Wednesday, January 2, 2013

힐링의 대중화 - 찾아야 할 진정한 멘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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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적으로 몸이 아프면, 예를 들어 배가 아프면 아픈 배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하고 소화제를 먹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복통의 원인이 소화기관과 관계없을 때는 아무리 아픈 배를 붙잡고 소화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숨이 차고 가슴이 아픈 상황에서는 숨 찬 불편함 때문에 페가 문제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심장에 문제가 있거나 심근경색 전단계 혹은 심혈관 계통의 문제일 가능성도 높다. 환자에게는 아픈 곳에 집중하게 되지만 의사의 경우에는 아픈 부분이 "왜" 아픈지에 대한 원인 부위(병소; focus, lesion)를 찾아내야 한다.


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치유(이후 힐링)와 멘토라는 단어가 이슈가 되어 있고, 미디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반 대화에서도 힐링과 멘토라는 이야기는 유행처럼 이야기되고 전해진다. 시대의 흐름이 암울해 보이고, 경제의 어려움에 취업이전에 대학생은 당장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며 생계를 걱정하는 존재가 되었고 공부하고 연구에 전념하는 대학생은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부모세대의 경제력에 의해서 가능한 하나의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은 꿈을 꾸고, 무엇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가의 이상과 실천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이미 당장 먹고 살아갈 막막함 앞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이 시대의 청년들은 아픔이 존재하게 된다. 그 아픔은 때로는 가로막힌 꿈에 좌절하고, 경제적 고통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마저 포기해야 하는 상처로 다가오는 것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현 시대의 '사실'이다.

시대의 모습이 그래서인지,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젊은 세대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아픔으로 힐링, 멘토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사실, 너무 많이 언급되어 마치 온라인 게임 속의 캐릭터가 몇번의 클릭으로 가능한 힐링을 떠올리며, 순간적이고 효과적인 치유가 없을까 고민하면서 찾아다닌다. 그런 요구를 반영하듯 서점에는 수많은 힐링, 멘토에 관련된 서적을 비롯해서 자기 개발과 성공론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와 마치 저자의 삶처럼 살면, 저자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치유받고, 성공하고, 이 시대가 부러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미디어와 인터넷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강연의 형태로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가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아도 감동적이고 얻을 수 있는 많은 교훈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시대에서 보여주는 힐링, 멘토 그런 부분을 믿지 않는다. 치유자나 조언자의 기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보여주는 힐링, 멘토'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위 힐링, 멘토라는 상품으로 포장되어 오히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의 희망을 조언해주는 원래의 기능이 가지는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소위 성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강단에 서서 많은 청중들에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이런 고난과 역경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소위 사회적으로 인지되는 성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한번 살펴보는 것은 좋은 간접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의 기준을 넘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 그 기준을 넘은 사람만이 우리의 멘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떤가. 그래서 유명 인사의 이야기를 들으러 수많은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청중으로 가득차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 스스로 힐링되었다고 감동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많은 청중들 중 자신이 살고 있는 이웃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보려는 사람들은 얼마나 존재할까?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의 멘토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내 주변의 친구, 이웃,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 조차도 나의 멘토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봉사는 단순히 내가 나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운이 좋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아픔을 가진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람에게도 내가 배울 것이 있다는 경험을 위한 하나의 수업으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힐링, 멘토의 대중화는 우리에게 우리가 성공해야 하는 가치의 다양성을 잊어버리게 한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행복한 삶의 기준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멘토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다양한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 좋은 방법임에 틀림없다. 역설적으로 멘토는 대중적일 이유가 없다. 꼭 유명 인사의 강연을 들어야지 힐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의 멘토, 롤모델(role model)이 되어야 나의 삶이 풍요로워 질거란 생각은 개인적으로 착각에 가깝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가치관, 누군가의 성공 신화가 우리를 치유(힐링)할 수 있을거라고 언제부터인가 믿고 있다. 그리고 멘토라는 이름으로 우리 청년들이 얼마나 멘토를 원하며, 힐링이 필요하냐고 이야기 한다.


나쁜 현상은 아니니, 청년들이 탈출할 수 있는 아픔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의 현상을 살펴보며 의문이 들었던 것은 바로 우리는 어떻게 치유(힐링)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몸이 아프면 아픈데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치유는 다시 아프지 않을 수 있도록 아픈 곳이 원인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음의 아픔도 신체의 아픔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이런 이유로 사실 마음이 아프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아픔의 원인은 어린 시절 가족 안에서의 관계, 갈등으로 시작되거나 만성화되어 버려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아픔이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시절 느끼는 꿈을 버리게 하는 경제적, 사회적 고통에 그냥 순응하고 참고 견디면서 젊은 시절 아픔, 특히 이시대 우리나라의 아픔은 더욱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아프니깐 청춘이다..." 사실 아프면 환자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개인의 아픔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 이해하려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표면적으로는 힐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감싸고 누군가의 삶과 가치관이 나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바라면서 멘토라 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 아파서 병원에 오면 아픈 부위를 먼저 살펴야 하지만 그 다음은 아픈 부분과 생리학적으로 연결된 부분을, 그리고 전체적인 상황, 환경을 통해서 아픈 원인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다시 아프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너무 아픈 것에 집중한다. 그냥 아프다는 그 현상이 하나의 현상이 되어버렸는지, 이유도 없는 상실감과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삶에 커다란 이정표가 놓여지기를 바랄 뿐이다.

학창 시절동안 철학 서적이나 고전을 통해 오랜 시간 인간이 고민하고 아파해 왔던 문제가 무엇인지 별로 생각해볼 기회도 박탈당한 요즘 청년들은 이제와서 자신의 아픔이 무엇때문에 발생했는지 고민하기보다는 그냥 일차적으로 다가오는 아픈 부위만 쥐어잡으며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다. 그리고 힐링, 멘토라는 진통제와 각성제로 순간순간 뜨거운 감동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치유되었다,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일뿐 다음에 다른 아픔이 찾아오면 더 큰 힐링과 멘토를 찾아서 떠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는 진보를 원한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진보의 이념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 사회, 이 시대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분명 구조적인 모순 안에서 시지프스의 신화같은 부조리에 갇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세대들은 더욱 더 많은 힐링과 멘토의 이름으로 상업적 소비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더 큰 힐링과 멘토의 강도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처럼 해봐", "다 노력하면 될 수 있어"라는 개인의 무한한 능력만을 강조하지 말고 자신의 아들, 딸이라 생각하며 기득권자로 어떤 부조리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지 찾아서 바꿀려고 해야한다. 성공을 하여 진보라는 이름을 가진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아픔만을 바라보게 한다면 아프다고 진통제만 주고, 졸리다고 각성제만 주는 의사와 무엇이 다른가. 진정한 의사라면 그런 고통을 받는 병의 원인을 찾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힐링은 기성 세대들이 자식 세대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이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의 마음을 가진 한 사람으로 개인적으로 느끼는 한가지는 '힐링'은 결코 자기발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개인적 노력이 덜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힐링은 자신이 가진 미움, 분노 등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을 버릴 때 가능하게 된다. 대선이 끝나고 나서 가장 이해되면서 역설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왜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은 결과'에 아파하고 상처받는가였다. 개인적으로 아픈 것은 힘들게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이 더 투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픔때문에 가장 안타가웠다. 그러나 힐링이 필요한 소위 진보의 세력은 무엇때문에 아파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정치적 공허함에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가 바뀌기 바랬던 우리 시대의 모습만은 간직하며 소외와 고통으로 아픔받는 우리 주변에 진짜 힐링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해 한번 행동했으면 좋겠다.


가장 진보적이라 생각하는 인물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생각한다. 그 시대 많은 제자들의 멘토이기도 했고 그리고 사회의 개혁자였으면서도 처참한 최후로 많은 이들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죽음을 당할 때 느낀 공허함과 아픔은 아마도 지금 진보 이념을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아픔보다 더 클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멘토의 모습으로 예수님은 항상 낮은 곳을 지향했다. 그곳은 변화의 의지가 가장 강했고 먹고 살기 적당한 중산층의 삶보다 그들의 바램은 간절하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주기 위해 본인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인기를 누리는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었다. 심지어 아픔에 그 이야기마저 하기 힘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해주었고 때로는 자신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도 배우는 낮은 자세 (마르코 7,24)도 가지셨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성공이나 인기가 아닌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내면을 공감해주고 같은 편이라는 진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본적으로 치유는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이다. 아픈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치유가 아니다. 아픔, 고난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픈 것보다는 아프지 않은 것이 더 좋다. 충분히 인간은 자라면서 누구나 아픔, 고난없이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기성 세대는 자신의 자식 세대가 최소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 부조리한 환경 안에서 노력해도 안되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먼저 살아온 세대의 의무이자 자식 세대를 사랑하는 가장 효율적인 노력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힐링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조금은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멘토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한사람이 아닌, 유명인이든 일반인이든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내 삶의 같은 편이 되어줄 수 있는 멘토가 되어줄 분들을 찾아 보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연한 기회로 참여하게 된 노숙인 센터에서 50대의 아저씨를 만났다. 사회에서 실패자라고 부를지 몰라도 그분의 삶에는 희망과 이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는 많은 꿈과 희망을 전해준 소중한 분이시다. 그 희망대로 그분은 새로운 삶을 시작해 이제는 안정적으로 살면서 다른 노숙인들의 자립을 위해 살아가신다.


만약 우리 사회가 아프니깐 청춘이고 당연하고 그래서 너가 강해져서 이겨내는 것이 너의 당연한 과정이야라고 이야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변화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아픔과 고통이 모이고 그것이 왜 그래서는 안되느냐가 바로 우리 시대 힐링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아픔에 집중하는 사회가 아니라 아픔의 원인을 찾아 서로가 서로를 치유해주는 사회가 필요하다. 우리는 치유받아야 할 환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충분히 치유할 수 있는 의사이기도 하다.

치유의 마지막 단계는 바로 행동이다. 자신이 상처로 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는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누군가의 치유를 위해서이다. 그 순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멘토는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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