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5, 2015

보수아빠 진보아빠 ─ 이념이 아닌 문제 해결 방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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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반복적으로 무릎에 상처가 생긴다. 이를 본 부모는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두가지로 분류해보고 싶다. 아이가 상처입어 아파하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이를 본 부모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첫번째는 "조심하지 않고 왜 이렇게 다치는 거야... 앞으로 다치지 않게 잘 보고 다니고 조심해 알았지!" 
두번째는 "어디서 계속 부딪치는 거야? 혹시 다니는 곳 중에서 무릎 다치게 하는 곳이 있니?" 


많은 사람들이 보수 (conservative) 진보 (progressive) 는 정치적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정치가 안정적이고 정치가 내 삶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고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정치는 잊혀져도 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 심지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내 삶의 운명뿐만 아니라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받게 되면 결국 정치는 나의 삶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본인이 장애인으로 장애인 등급제에 의해서 실질적인 불편을 겪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결정된 기준에 의해서 나는 장애인으로 보조받아야 하는 경제적 행정적 복지를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세금들에 관련된 법률에 의해 지난달의 지출과 이번달의 지출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언론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까지도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어 싸운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 보수가 무엇인지 진보가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그 정의 (definition) 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마치 그런 정의는 정치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위 청년이라는 20대~30대의 젊은이를 만나도 상황은 비슷하다. 보수와 진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런 것을 왜 물어야 하는지 우선 귀찮아하고 많은 경우 자신이 진보라 생각한다면서 보수는 논리도 떨어지고 우기기만 하는 꼴통 집단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보수라 생각한다면서 진보는 이념적 색깔이 너무 강하다 심지어 유행처럼 말하는 '종북'이라는 색깔론 (매카시즘) 을 서슴치 않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왜 자신이 보수를 지향하고 진보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마치 모두들 대통령이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정의 (justice) 에 있어 자신은 옳은 쪽에 서 있다는 주장만 할 뿐이다. 사실 이런 부분이 가장 안타갑다. 자신이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원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리고 그 고민과 실제 진보와 보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이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한 신념의 문제로 발전시키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보수와 진보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보수는 기존의 시스템(제도 및 정책 등)에는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보고,
진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기존의 시스템이 더 문제라 보는 

문제를 대한 태도 [ 보수와 진보, 대립에서 균형으로 희망하며... ] 라 생각했다. 물론 이 개인적인 생각이 정확한지는 항상 검증 중이다. 개인적인 결론에 비추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잘 설명되는지 하나씩 맞추어 가면서 다듬어 가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부모를 생각한다. 

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무릎을 다치는 아이를 이야기하다 갑자기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인지 눈치가 빠르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정치적 논리나 사적 이익을 쟁탈하기 위해 이용하는 정치적 권모술수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는 단순히 정치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삶의 태도 그리고 확대하면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가지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확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보수는 말그대로 보존시키고 싶어한다. 진보는 반대로 무엇인가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보존시키고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인 정의에 의해서 보수가 지키고 싶어 하고 진보가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시스템' 혹은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 두번째 부모를 생각해보자. 반복해서 다치는 아이의 상처를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반복적인 상처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즉, 아이가 아무리 조심하여도 피하기 힘든 무엇인가 아이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부모는 아이가 반복적으로 다치는 곳, 상황 등을 생각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학교 사물함이 열려 있을 때 아이의 무릎 높이에서 열려 아이에게 자주 상처를 준다는 상황을 알게 된다면 부모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치기 쉬운 상황이 있다면 문제의 원인은 그 상황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첫번째 부모를 생각해보자. 아이가 계속해서 다치는 것을 아이가 조심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가 부주의해서 다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너가 조심해야해'이다. 물론 이런 해결책은 아주 깔끔할 때가 많다. 앞의 상황처럼 학교 사물함이 아무리 아이의 무릎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취약한 부분이라도 아이가 이를 신경쓰고 더 조심하면 될 것이다.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아이가 다칠 때마다 각성시키고 다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극복하지 못할 상황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적 해결책 vs. 보적 해결책 

현실적으로는 극단적 보수도 극단적 진보도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기는 비슷하다. 사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과는 다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들었던 학교 사물함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사물함이 있지만 해당 사물함이 지극히 악한지 (apt to devil) 지극히 선한지 (apt to good) 를 판단하는 것은 유인원보다도 못한 행동이다. (below apes) 이유는 간단하다. 사물은 지극히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학교 사물함이 그 따위로 만들어졌어도 다른 아이들은 잘 사용하는데... 왜 유독 우리 아이만... 이란 이유를 들어서 자기 아이의 개인적인 부주의함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다. 반대로 진보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기 아이가 부주의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아이의 그런 부주의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왜 물건을 만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그 원인을 돌릴 수 있다. 결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특정 문제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12 Michigan GOP campaign card

결국 보수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가진다. 그런 이유로 현재의 시스템을 지키고 운영해 가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이 현재 운영되는 시스템의 문제인지 살펴보기 전에 개인적 문제가 아닌지 소위 개인적 일탈이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반대로 진보는 현재 운영되는 시스템보다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이 많은 경우 개인이 도저히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소위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의 많은 문제들 그 중 대표적으로 범죄를 생각해보자. 보수의 가치는 현재의 시스템 즉, 법과 제도 그리고 확대해서 사회적인 규범에 대해 잘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법과 규칙이 바로 현재 사회를 '지켜주는' 구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과 질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진보의 가치는 이와 다르게 법과 질서가 개인의 인권이나 생활을 억압하게 된다면 그런 법과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스템은 항상 옳은가? 사회는 항상 진보하는가? 

보수적 가치를 신뢰한다는 말은 어느 사회에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사회에 잘 적응한 한 보수적 인물이 북유럽에 간다고 해서 항상 보수적인 인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보수적 신념을 가진다는 말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에 있는지, 그 사회가 가지는 보편적 가치들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미국에 가서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소위 외국인 (alien) 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을 외국인으로 차별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서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있던 경제활동이 미국에서는 불법이라면 아무리 한국에서 보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미국에서 보수적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익숙했던 한국의 시스템과 구조들이 왜 미국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불평하게 될 것이다. 결국 개인이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를 구별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 성향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회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하는지' 에 따라서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떤 사회가 가장 발전된 사회인가?" 

미국 사회가 가장 발전되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가 가장 발전되었다. 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발전된 사회' 에 대한 이상적인 접근을 말한다. 즉, 모든 사회 구성원이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현재의 시스템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본다. 이런 완벽에 가까운 사회라면 결과적으로 진보적 사회 구성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을 조금 다르게 접근해서 중세 봉건제도 사회보다 현재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된 사회인가 혹은 진보된 사회인가? 이다. 다른 질문으로 붕괴된 공산주의 이념의 사회가 자본주의 이념의 사회에 비해 조급하고 덜 성숙한 사회인가? 이념의 큰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세상의 모든 정치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정말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진보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보의 생각을 먹고 사는 보수 

진보적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 구성원의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의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구성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혹은 역차별을 받고 있는 구성원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구성원은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하여 현재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학문을 배우거나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은 보수적 성향보다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기 쉽다. 같은 불편함이 보여도 보수적 성향의 구성원은 개인의 노력을 더욱 더 강조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변화시킬 필요을 덜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문제가 구조적 문제점이라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조금만 변화시켜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편리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진보적 성향의 구성원이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진보적 구성원은 항상 반복되는 문제의 원인과 현재의 구조에서 무엇을 변화시키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게 된다. 즉, 변화에 대한 이득을 적극적으로 알리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만약 사회적 구성원 중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잘 적응해서 사회의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어서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아무리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껴도 그 불편이 개인적 불편함이 아니라면 그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장애인에 대한 등급을 통해서 장애인으로 가지는 기본적 불편함이 있는데 등급에 의해서 차등 지원이 되고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련 법률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고치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덜 불편하게 살수 있다고 말을 해도 변화를 주도하는 보수적 성향의 구성원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더 편해질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결국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은 사회 구성원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는 사회적 목표가 '더 발전된' 사회로 정의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개인의 지적 영역은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법과 정치를 오랫동안 전공하고 경험한 사람이라도 장애인의 복지와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는 스스로 장애인 혹은 그 가족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 특히 진보적 구성원이 제시하는 '변화의 내용'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구성원이 편해질 수 있는가' 에 대해 판단을 하면 된다.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는 사회 구성원을 소위 '보수 꼴통'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즉,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전문적 영역조차도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회 구조의 변화는 비용일 뿐이고 더 편해지는 사회 구성원의 행복은 계산되지 않는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보수적 구성원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회의 구조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진보의 생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많은 경우 이런 꽉 막힌 보수층이 사회 지도자가 되면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고 불편해지고 더욱 더 비상식적 현상이 일어나지만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며 이겨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그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저 '힘내라' 란 말만 해줄 것이다.

념의 문제가 아닌 문제 해결 방법

보수, 진보를 하나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는 것에 불편함이 느껴진다. 계속 강조하지만 보수와 진보를 이념 혹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치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시작점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라디오 방송 중 경제 관련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트랜드 모니터 2015」 책에서 저자가 나와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였다. 새로운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집을 포함하여 소유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요약을 하자면 '보수는 소유를, 진보는 소비를 (conservative possesses, progressive consumes ; CPs, PCs)' 지향하는 모습이라 요약해본다. 이런 성향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의에 맞춰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는 기존의 시스템을 신뢰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현재 구조에서 인정되는 가치에 대해서 공감하고 투자할 것이다. 반대로 진보는 기존 시스템보다는 변화하는 구조를 더 원하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덜 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구분이 누가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만약 보수는 ... 진보는 ... 과 같은 구분되는 성향이 있다면 그 구분에 따라서 해석이 가능한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자주 다치는 아이에 대한 반응 뿐만 아니라 이미 보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해석 가능한 도구가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첫번째는 누가 무엇을 탓하는가 (who blames what) 이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지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 노숙인에 대한 시선을 생각해보자. 어떤 이들은 노숙인이 스스로 성실하지 않아서 돈을 벌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노숙인의 증가는 성실하지 않은 '개인'의 증가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해결책은 개인이 노력하는 것이다. 반면 노숙자뿐만 아니라 집이 있어도 생활고에 자살하는 가족들 혹은 계속되는 자본의 개발로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내몰려야 하는 사회 전반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스펙트럼을 통해서 노숙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가 제대로 된 복지 구조를 가지지 못해 한정된 저 임금 노동을 반복해도 계속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구조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아무리 개인이 노력을 해도 가난 혹은 기본적 생활 자체가 고통이 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사람이 많다면 그 문제의 원인은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탓하는가는 개인 / 구조 의 문제로 구별할 수 있고 이를 보수 / 진보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who) 의 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제 해결의 주체 (who) 는 누구인가? 

본인 스스로에 대한 비판보다 더 어려운 비판이 자신이 속한 집단,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보수 / 진보의 문제를 떠나서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가 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노숙인이거나 혹은 노숙인 생활을 해본 사람 혹은 노숙인을 위한 기관에서 봉사를 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을 한 사람에게 노숙인의 문제는 아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경우 힘들게 노력해도 국가의 비합리적인 제도에 의해서 다시 가난의 그늘에 들어서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좋지 못한 환경에서 건강문제로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직접, 간접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쉽게 보지 않는다. 반면 태어나서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는 쉽게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 쉽다. 즉, 자신이 원래 가진 보수 / 진보의 성향을 떠나 문제점이 발생한 구조 (사회) 에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가 문제와 얼마나 관련있는지에 따라서 문제에 대한 보수 / 진보적 성향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한 의사가 비윤리적인 의료 행위를 통해서 환자가 사망했다고 하자. 문제를 살펴보면 다양한 문제의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의사 개인의 비윤리적인 부분도 문제이고 그런 비윤리적인 부분이 발생할 수 있도록 만든 허술한 법 제도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의료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해진다. 비슷한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들은 개인적 문제로 집중할 것이다. 그것이 어느정도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정말 법률 혹은 구조적인 문제라면 같은 직종의 의사들도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즉, 직접적 관련이 있는 당사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 (개인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의 태도는 문제를 조금 더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더 관계 있는 문제일수록 보수적으로 될까? 반대로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일수록 진보적으로 될까? 사회적인 현상 (문제 발생) 에 대해서 여론의 방향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 해군 기지 건설 문제를 생각하면 만약 자신과 덜 관계되는 문제일 수록 진보적이라면 이런 문제들은 아주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여론은 전혀 그렇지 않거나 오히려 투쟁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성향을 종북과 같은 말로 문제삼으려고 한다.

은 사람들은 왜 보수적으로 사고하는가? 

젊은 이들이 보수화된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경쟁 사회 그리고 언제 어떤 것이 어떻게 바뀔 지 모르는 불안한 구조보다 사회에 의한 일부의 희생이 있어도 자신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현재의 구조에 안착할려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이런 가설에 반증이 되는 예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직업의 안정이 안되어서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지금의 사회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뭔가 더 변화하여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현재의 구조에 어떻게든 살려고 한다.

보수적 생각, 진보적 생각 이전 간과하고 있던 내용이 있다. 누구 (who) 란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많은 사람들은 정보의 양과 질만큼 해당 정보를 대하는 감정적 태도의 문제가 더욱 더 중요하다. 자신과 더 관계 있는 문제일수록 보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더 관계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감정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핵발전소 주변의 주민들이 암에 걸려 죽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건 그 사람이 재수없어 걸려 죽은거고!" 라고 말한다면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극단적으로 감정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즉, 바라보는 시선은 기본적으로 내가 보수적,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중간과정은 오히려 감정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의료 사고를 낸 의료인을 바라보며 많은 여론이 모든 의사들이 문제다라고 일반화하여 문제를 만들었다고 보자. 이런 여론은 지극히 감정적 문제이다. 문제의 원인이 의사 개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의사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관행이 되어버렸는지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의사들' 이라는 표현은 감정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감정적 태도, 즉 보수적, 진보적 성향을 떠나 지극히 편향되고 개인적 감정이 가득한 세상이 만든 여론과 소문의 세상에서 자극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폭스 미디어 (미 보수적 방송의 대표) 가 세상을 위한 기여는 '심슨 가족' 뿐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을 보고 있으면 모든 문제는 민주당에게 있고 때로는 오바마의 흉물스러운 얼굴 때문에 외교가 실패한다... 와 같은 품격없는 이야기가 방송되기도 한다. 차단된 정보에서 무엇인가 태도를 취해야 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왜곡된 언론 속에서 보수화되기가 쉽다. 아무리 진보적 판단에 대한 정보들이 나와도 보수화되기 쉬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정량적 평가는 어렵지만 다양한 정보들이 유입되어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제의 원인들은 참 매력적이다.

이 없는 진보적 해답, 답만 있는 보수적 해답 

진보적 성향의 문제 원인과 보수적 성향의 문제 원인이 제공될 때 자신과 관계가 깊은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한 선택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별로 관계없는 문제라면 좀 더 감정적 문제로 접근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보수적 해답과 구조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진보적 해답을 비교해 보자.

진보적 해답: 문제의 원인은 사회 구조에 있기 때문에 잘못된 법, 규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까지 모두 설명해야 한다. 복잡하다. 때로는 설명하려는 사람 조차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힘들어 한다. 구조적 문제란 단기간에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시간동안 얽힌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참 힘들다. 
보수적 해답: 문제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다. 개인의 도덕적 문제 그리고 지금까지 잘못한 내용들을 열거하면 된다. 아주 깔끔하게 개인적 일탈이면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필요하다면 사법적 책임을 진다. 

두 해결책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라면 쉽게 다가가는 그리고 감정적으로 뭔가 좀 더 땡기는 해결책을 선택하기 쉽다. 즉,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동일한 정보가 제공되어도 보수적 해답은 참 깔끔하고 당장 정의가 실천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하기 복잡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내용에 대해서 특별히 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 심지어 국가 공권력의 비 합법적인 억압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아도 자신의 일상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뉴스에서 전해주는 감정적 전달에 의존하고 판단하기 쉽다.


예를 들어 밀양 송전탑 공사를 보도하면서 밀양 주민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고 싶어하는지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송전탑을 지역 이기주의로 반대하는 것인지 보도하고, 반대하는 주민들 배후에 누군가 있다란 식의 정치인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면 이는 그대로 보도하고 이에 대한 반문 혹은 반대 증거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는 선택적 보도를 통해서 충분히 감정적으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보도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일한 정보가 주어져도 감정적 반응이 더 빠를 수 있는 보수적 해답에 더 끌리는데 언론마저도 선택적으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의도를 가지고 보도하게 된다면 결국 정보의 양도 부족하고 경쟁 사회 속에서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은 보수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 보인다.

민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렇다면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런 편향된 태도를 언론의 순기능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젊은이들이 점점 보수화되는 과정은 사회적으로 좋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만약 지금의 세상이 억울하고 가난한 이들을 조금씩 덜 만들어 간다면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이 느끼는 고통이 줄어들고 있다면 젊은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에 대해서 큰 문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소외받고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통계 자료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가도 쉽게 고통받는 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법과 권력조차 이들의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개인적 탓으로 돌린다.

이런 이웃의 고통을 볼때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진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몇몇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규모가 큰 문제이다. 왜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는지 그 한가지 원인으로 젊은이들의 보수화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문제의 발생 과정에서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 감정적 반응'을 선호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 그러나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저 멀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연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랜동안 그 연민의 가치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 연민에 대하여 ─ 구조적 범죄에 대한 생각 ]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져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파괴하는 해군 기지를 막기 위해 매일 공사현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참 멍청하게 보이고 해고 당했으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 계속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미련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런 것 다 떠나서 그들은 사람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힘들지 말이다.

오래전에 이 글을 시작했지만 해를 넘기면서도 쉽게 써지지 않았다. 역시 부족한 글솜씨라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힘들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사자성어가 인상적이다.

집사광익 (集思廣益) : 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언제부터 많은 생각이 모이면 일치가 되지 않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민주주의는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과정의 신중함으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결론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소수의 독단적인 생각만 강조하고 이를 따르면 된다. 보수적 해답도 진보적 해답도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보수적 해답만 강조되어 개인이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이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알아서 생존하도록 살아가게 하는 세상을 생각하니 너무도 끔찍했다. 몇일전 이런 세상을 꿈 속에서 만났다. 그리고 깨어나자 마자 메모를 했다.


간이 인간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다면 뉴스에서는 사망자 수가 아닌 생존자 수를 발표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끔찍하다. 결국 삶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고 생존자 숫자 속에 자신이 들어가기 바랄 뿐이다. 생존이 희망인 절망의 시간들

보수, 진보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문제는 인간이 더 행복하기 위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보수 진보 그 어떤 해결책이 되어도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이 죽어가는 삶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아파하는 인간을 바라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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