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 2018

유리창 이론 ─ 구조의 억압과 보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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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유리창으로 풍경이 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파리 한마리가 들어와 윙윙거리며 자유롭게 비행하고 있다.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카페 주인이 다가와 파리가 어딘가에 앉기만을 기다리다가 잡지책으로 잡아 죽였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사라져서 좋기는 하지만 갑자기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파리는 유리창으로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유리창으로 막혀 나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당황하고 있었을까 특별히 유리창 안 실내에서 파리가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단지 어쩌면 우연히 들어온 실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파리가 유리창의 밖에 있었다면 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잡지 책에 압사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파리가 죽어야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유리창이 만들어 놓은 공간 중 파리가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할 실내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든 것은 인간이 만든 유리창이였다. 파리의 입장에서는 유리창을 인지할 수도 없고 그렇게 구별된 공간 중 자신이 원해서 선택했다기 보다는 우연한 비행의 경로로 실내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더 넓은 자연에서 더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있었던 파리에게는 유리창이라는 원하지 않는 공간의 구분으로 인해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hoto by https://www.pexels.com/@danielbendig

잡지에 눌려 죽음을 맞이한 파리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이처럼 유리창과 같은 구조로 인해서 생존에 위험을 맞이하는 경우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구조가 인간의 자유를 누릴 공간을 줄이고 심지어 생존에 큰 위험이 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졌다. 자연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인간 개인의 자유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제한된 자유에 대해서 사회는 개인들에게 얼마나 합당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구조가 계속 되어서 인간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파리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유리창이 존재하고 그 유리창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지만 그 자체가 억압하는 구조가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Glass Ceiling

전 영부인이자 전 국무장관이자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Hillary Clinton 이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나온 장면은 유리천장 glass ceiling 이 깨지는 장면이였다. 유리천장이란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된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an unofficially acknowledged barrier to advancement in a profession, especially affecting women and members of minorities.
직업 활동에서 성취를 가로막는 특히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비공식적이지만 잘 알려진 장애물 

유리천장은 말그대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성이나 민족, 종교 등 다양한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는 방해물들 특히 사회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편견들을 포함한다. 유리천장의 의미는 다양하다. 유리는 투명하기 때문에 더 좋은 위치가 보이지만 이미 기득권에 의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고 그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 위치에 오르려고 하면 유리천장 자체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보여주기는 하지만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조건과 기득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에 의해서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만 그들이 누리는 좋은 환경은 이미 대중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능력이라면 직업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 바꿀 수 없는 조건에 의해서 사람들은 더이상 성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가장 큰 범위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비교해서 동일한 교육 환경 동일 조건에서의 노동에서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임금의 차이도 결국 생활 조건에 차별을 주는 다양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물을 국가가 나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유리천장을 깨는 이미지를 통해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유리천장의 종합판과 같은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에게 패배하였다. 미국 대선 후보정도 되면 대놓고 유리천장을 깨지 말고 차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는 어려운데 신비롭게도 도널드 트럼프는 그러한 유리천장을 대놓고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는 것도 더욱 신비로운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도널드 트럼프는 유리천장을 더욱 굳건히 하여 표를 얻은 가장 최근의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유리천장의 정의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비공식적 unofficially 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이 어떻다 해도 차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회가 성숙할 수록 그런 차별이 만드는 사회적 문제가 크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차별을 만드는 유리천장과 같은 비공식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가 대부분 인정하고 때로는 법이나 문화가 만드는 구조들이 인간을 차별하는 경우는 없는지 더 생각해 본다.


Glass Wall

유리창으로 인간에게는 실내와 실외의 구별이 생기지만 파리에게는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는 우리에게는 구별이 되지만 파리에게는 실내나 실외나 자신들이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유리창이라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공간은 실내와 실외로 구별이 되고 실외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는 억지로 쫓아다니면 죽이려 하지 않지만 실내에 있는 파리는 기회가 된다면 죽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저 미물이지만 파리 사회에서 바라보면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형제 혹은 자매의 죽음일 수 있고 파리 한 개인에게는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타가운 상황이다. 한 생명의 종말이다. 그렇게 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유리창이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실내와 실외의 구별 이전에 인간이 감히 날아다닐 수 없는 넓은 공간의 자유를 가지던 파리에게 실내라는 공간을 제한하고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지 파리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그리고 더 확대해서 우리가 그런 유리창에 의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면 단순히 파리의 생명이 아닌 사회 안에서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2017년 1월에 프랑스의 한 농부는 법정에 서게 된다. 그의 죄는 프랑스 국경 안으로 들어온 난민을 도와준 죄였다. 그의 올리브 농장은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워서 난민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지중해를 건너 온 난민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주고 도와주었지만 그는 불법체류자를 도운 협의로 법정에 서야 했고 농부 세드릭 에루 Cédric Herrou 는 법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l Jazeera

"만약 사람을 돕기 위해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농부는 사람을 먹여 살린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도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이 위험을 넘어서도록 돕는 것이고, 저 국경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위험"

이라고 말했다. 국경이 그들에게 큰 위험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난민 혹은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실내에 놓인 파리와 같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출생지 그리고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난민들의 생존을 도와줄 도움조차도 법에 의해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국경이나 난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아주 초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위험한 생명을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법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법과 국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에게 유리창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인종, 성별, 국적 등이 아닐까 싶지만 파리이기 때문에 항상 죽는 것이 아니라 실내의 파리이기 때문에 더 쉽게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가 유리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유리창은 인간에게는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일종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서 파리는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로 구별되고 실내의 파리는 인간에게 해충이 되기 쉽다. 유리천창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 차별받는 장애물이라면 유리창 혹은 유리벽은 오히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지만 그 구조에 의해 차별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난민을 도와준 사람이 범죄자가 될 수 있지만 그가 정말 죄를 지었는지 물어본다면 누군가는 죄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유리창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그 죄인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그가 쓰러진 프랑스 사람을 도와줬다면 그는 의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리벽 혹은 유리창 glass wall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된다.

유리창 이론: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 동일한 존재가 상이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현상


Artificial structure

앞서 설명한 구조 structure 를 언급하면 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structure 을 떠올리게 된다. 유리창도 하나의 구조물이 된다. 그러나 유리창 이론에서 구조물이 아닌 구조라고 표현한 이유는 물리적인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구조물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사회 문화 뿐만 아니라 제도 그리고 가장 넓은 범위로 법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고 봉건시대의 농노 villein, serf 와 비교하면 당연히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표현할 때는 두가지의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자유 freedom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방해나 구속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자유 liberty 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한국어로는 모두 자유로 표현된다. 두가지 자유를 표현하는 말 중에 좋은 예는 나는 말할 자유가 없다 - I have no liberty to speak 란 표현이 있다. 말은 할 수 있는 자유 freedom 은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 혹은 피해 등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렇게 말할 자유 no liberty to speak 가 없다고 표현한다. 말을 할 수 있는 발성기관은 정상이지만 그리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지어야 하는 책임과 사회적 피해를 생각했을 때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 liberty 는 사회적 가치와 더욱 중요한 인간이 만든 모든 구조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욕을 하고 험한 막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받을 비난이나 평판이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자유 freedom 보다는 해야 할 말만 하는 자유 liberty 가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가정하기 어렵지만 어떤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는 가족이 죽은 유가족을 향해서 '시체 장사를 한다' 와 같은 막말을 하는 것이 장려된다면 그 세상에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항상 위로받지 못하고 슬픔에서 헤어나오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그런 문화가 존재할 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지만 그런 문화가 가지는 위험성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가 모든 면이 합리적이라 볼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점점 진보한다고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만든 구조란 광범위하게 그런 문화적 요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양한 제도와 법도 포함해야 한다. 제도와 법은 원칙적으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항상 그렇다고 그리고 심지어 문화와 조금 다르지만 시간과 사람의 다양성이 많이 융합된다고 해서 더 좋아지고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복잡성은 인간의 구조가 단순히 인간 사상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라 본다. 가장 대표적인 가능성은 역시 인간의 기술이다.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그 기술이 가져올 피해와 이득을 정확하게 계량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때로는 기술이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소수의 인간에게만 이득을 주고 다수의 인간에게는 피해를 줄 때도 많다. 그것은 인간이 문화적으로 인문학적 사상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술을 사용할 때 생길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 인간이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할 가치보다 기술이 가져다 주는 당장의 이득이 세상의 모습을 더 빠르게 바꾸기 때문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이들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활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핸드폰으로 생각하지 못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어 편리하고 좋아졌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집에 카메라를 두고 빈집을 지켜보거나 애완동물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편리함은 주었지만 인간은 그 기술에 비해 제대로 관리하고 보안에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면 인터넷에 연결된 카메라는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 쉽게 노출시킬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인간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몰래 보고 이를 악용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인식할 수 있지만 기술이 가지는 편리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는 자신의 음침한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을 몰래 살펴보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문화적인 구조나 인간이 가진 도덕적 규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일어나는 일이라기 보다는 대중이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기술의 구조적인 불완전성이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인간이 인터넷 카메라의 원리와 보안 원리를 이해해서 모두가 자신만의 강력한 암호화 체계와 보안이 잘되는 인터넷을 관리한다면 인터넷 카메라 기술은 많은 이들이 충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항상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이해시키고 확산되지 않고 확산되고 이해할 사람만 이해하도록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삶에서 인위적인 구조는 법과 제도 뿐만 아니라 기술도 포함을 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유리창 이론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 특히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사용할 줄 안다고 당연히 대답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악의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때가 많다. 너무 밀접하게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용자의 편리성을 강조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하는 입장에서도 똑똑한 사용자가 많아서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서비스 활동이 감시받거나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많은 이들의 글과 그림을 보는 것에 빠져 자신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많이 빠져나가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가 많고 심지어 자신의 주소록이 빠져나가거나 자신의 사적인 활동까지 수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내용이 뉴스로 나와도 순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몇시간 후에는 다시 접속하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인간의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인간이 이해하는 속도보다 빨라지면 우선 삶의 모습을 빠르게 바꾸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 그것을 악용하는 비율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술이 주는 이득을 자주 접한다. 기술이 발전해 인간은 손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로도 전자기기를 제어할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도 있고 생필품을 주문할 수도 있다고 알고 있고 그런 삶이 주는 편리함에 대해서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음성인식 기기는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감청할 수 있는 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 화려한 세상은 계속 지켜보고 있지만 유리창 안에서도 나는 실외에 있다고 믿는 파리처럼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유리창 안에서 감시받거나 자신의 삶의 반경이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버릴 수 있다.


Glassified legally

인간이 만든 구조를 생각하면서 다양한 대상을 생각할 수 있지만 우선 법과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법은 우선 영어로 law 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를 표현하는 영어 개념이 freedom 과 liberty 로 나눌 수 있는 것과 다르게 law 에는 어쩌면 상반될 수 있는 두가지의 뜻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법이다. 그 법에 대한 영어 정의는 다음과 같다.

the system of rules that a particular country or community recognizes as regulating the actions of its members and may enforce by the imposition of penalties.

즉, 국가나 공동체에서 구성원의 행동을 규제하도록 인식된 규칙의 체계 혹은 구조이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대비한 형벌을 포함한다.

그러나 두번째 law 는 한국어로 법칙이란 뜻으로

a statement of fact, deduced from observation, to the effect that a particular natural or scientific phenomenon always occurs if certain conditions are present.

관찰에 의해 추론된 사실의 정리 혹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법칙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영어로 역시 law 이고 열역학 제2법칙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과 같이 자연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의 작동 원리도 역시 law 라고 표현한다.

첫번째 법은 상당히 인위적이고 무엇보다 국가 혹은 공동체를 전제로 정의되고 행동의 자유로운 활동보다는 규제되는 것을 더 표현하고 있다. 결국 공동체에서 인식된 법이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한다면 그것이 법이 된다. 그런 이유로 동시대를 사는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에 의해서 여성의 차별이 법으로 정해진 나라도 있고 국가의 법 혹은 성문법 statement 의 내용과는 다른 관습법 customary law 이 더 존중받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보다는 제한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혹은 하면 공동체 일원으로 비난받기 쉬운 내용들이 더 많다. 그래서 법은 무엇을 적극 장려한다는 내용보다는 하면 어떤 불이익이 가해진다는 내용으로 인식되기 쉽다. 한국어로는 법과 법칙으로 그 의미를 구별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law 가 법률의 법과 자연의 법칙으로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마도 자연이란 존재가 따라야 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칙이라 볼 수 있지만 자연의 법칙은 제한하고 통제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은 어쩌면 법칙이 아니라 섭리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연의 섭리를 이용해서 그 섭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내용이 오히려 기술이 된다. 그래서 기술은 중력을 이겨내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고 지구 대기를 뚫고 우주로 나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어 낸다. 자연의 섭리로는 유전에 의한 선천적인 장애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만 이 또한 유전자 치료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도전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인간 공동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법이나 자연의 법칙도 모두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술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항상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법률을 극복하거나 이용하면 보통 편법이라고 말하고 자연의 법칙을 이겨내면 이는 기술이라 말한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는 가장 큰 약점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률도 완벽하지 않아 이를 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소수가 생길 수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당연히 따라야 할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기술조차도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크게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인간이 만드는 법은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유리창처럼 장벽이 될 수 있기도 한다.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법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싫고 법률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좋은 표현이 바로 대의명분 大義名分 이다. 영어로 조금은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종종 사용되는 표현으로 the greater good 은 대의가 되고 명분은 cause 가 된다. 좋은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의 권리 혹은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 더 큰 선 즉, 대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the greater good 를 말할 때가 많다.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해야 하는 경우보다는 일부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고 있다. 즉, 우리가 양보하고 포기하는 많은 자유들이 어떤 더 큰 선과 이유를 위해서 내용은 잘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막히고 특히 법률의 양이 많아지면 그런 경우는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법이란 그 특성상 제한 사항과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처벌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Glassified technically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는 Payback: Debt and the Shadow Side of Wealth (번역본: 돈을 다시 생각한다) 에서 과학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Paris Review

모든 과학 기술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따라서 안경, 망원경, 텔레비전, 영화, 그림은 눈의 연장이고, 라디오와 전화는 귀의 연장이며, 지팡이와 목발은 다리의 연장이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외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을 연장시킨다 표현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연장' 이라는 표현으로 신체적 물리적 능력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연장까지도 포함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과학 법칙에 따르지 않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기술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렛 애트우드의 과학 기술은 natuaral science and technology 가 아닌 technology 만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번역본에서는 과학 기술로 번역이 되었지만 원문 책은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 & 기술이 아닌 기술만 놓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종종 과학 기술이 하나의 단어처럼 표현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가지의 단어는 별도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 법칙에 따르는 현상을 알아내려는 자연과학 natural science 와 그 현상을 이용하고 극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연장 extensions 이 되는 기술은 분명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기술이 만든 다양한 유리창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 같은 다양한 기술 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기술 용어들은 우선 기술 소비자들보다는 그 기술을 이용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제품을 소비하는 매력으로 등장할 때가 많다. 여전히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의 정확한 구조와 실현 방법에 대해서 연구가 계속 되고 있지만 가전제품 뿐만 아니라 주식거래와 같이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구현되지도 않은 인공지능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광고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실현되지 않는 기술이라도 개념만 존재한다면 인간의 마음에서는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떤 기술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삶은 획기적으로 바뀌고 그 바뀐 삶은 항상 행복할 수 있고 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희망이다. 플라스틱이 발명된 시절에도 비싼 재료를 대체할 수 있는 혁명적인 재료라고 믿었고 플라스틱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 믿었지만 지금 플라스틱이 인간에 이득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해가 더 많은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조차도 더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다. 결국 플라스틱이 가져다 준 편리성과 경제성은 인간을 한순간에 매혹시켰지만 플라스틱이 가져오는 환경 문제와 그 환경 문제가 다시 인간 사회에 어떻게 재앙으로 돌아오는지는 여전히 관찰 중이다.


플라스틱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많은 기술들도 그런 거대한 희망의 크기 때문에 기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천재보다 자신이 연구하는 기술이 가져다 줄 부작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현명한 이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기술은 항상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기술은 문제점을 걱정하며 더디게 진행되기 보다는 이념처럼 종교처럼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무래도 핵폭탄 개발을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많은 과학자들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 과학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였고 물리학, 화학에서 가장 최고의 과학자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과학적 업적 예를 들어 원자핵의 구조나 원리 등을 알아내는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를 무기로 만든 기술적 업적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고 핵 실험을 하는 단계에서 이를 참관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만든 엄청난 기술의 결과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살상력보다는 이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더 큰 대의명분에 휩싸여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은 아주 소수의 과학자도 있었지만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기술의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술은 항상 피해자를 만드는가?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그렇다고 마음으로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곧 이어 기술이 만들어 주는 많은 혜택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은 인간 사회가 원한다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법으로 막을 수 있지만 기술이 주는 다양한 달콤함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날 정부가 핸드폰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 다음달부터는 전면적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공동체가 순순히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들어와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을 더 길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마가렛 애트우드의 표현처럼 이미 연장된 extended 인간의 몸과 마음은 쉽게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기술은 완전하게 비가역적 absolutely irreversible 이지 않지만 가역하기에는 너무 완전한 irreversiblely absolute 대상이라 본다. 그리고 되돌리기 어려운 많은 기술의 결과들은 그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생산품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부족하다면 핸드폰을 쓰지 않아 통신 요금을 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통신 요금은 하나의 식사를 위한 비용만큼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미 기술에 의해 연장된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만들어 낸 영역까지도 고려하는 현대 사회에 맞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돈없어 교통요금을 낼 수 없고 통신요금을 낼 수 없는 취약 계층들은 그대로 돈이 없으니 당연히 움직이지 말고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쓸 수 있는 자 / 쓸 수 없는 자 로 구별되어 기술의 사용할 수 없는 소외계층이 아닌 제외계층이 될 것이다. 한 개인이 해결 할 수 없는 기술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자본이 기술의 사용 가능성을 만드는 거의 유일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기술을 떠나 현대 사회의 자본 의존성 그리고 기술 사용에 필요한 비용이 증가하면 기술 자체가 아무리 선하고 인간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Colored or Painted glass 

성당의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를 볼 때 교회 밖은 지옥같지만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해서 멋진 성인과 아름다운 교회의 역사만 바라보라는 뜻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교회 밖 세상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고 억울한 일들이 가득한데 교회 안에서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보면서 세상의 모습을 잠시 잊으라는 배려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처럼 세상 밖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유리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삶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어쩌면 보면 싫어할 내용은 모두 다 제거하고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것만 보여주는 그런 유리창 말이다.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의 연장'이 된 텔레비전 혹은 언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병에 걸린 주인공도 극적으로 해외 유명 대학의 저명한 의사가 갑자기 난데없이 찾아와서 고쳐주기도 하고 하루 삶이 고단한 주인공의 앞에 갑자기 자신의 미모에 홀딱 반해버린 재벌집 자식이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우연히 만난 많은 은인들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이야기를 그저 현실성 없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란 허구지만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드라마는 차라리 환타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리창 모두가 스테인드 글라스라면 정말 세상은 아름다울까 아니면 현실은 무시하고 내 삶만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의 모든 아픈 현실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대부분 개인의 욕망을 자유롭게 채우면 거의 대부분 공동체의 범죄자가 되기 쉽다. 최소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피해자들의 고통 그들의 신음소리를 무시하고 살면 어느정도는 편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자기 먹을만큼 살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 된다.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저』 에서 '성안의 사람들'이라 표현된 소위 대기업에 직장을 가질 수 있거나 이미 일정 부를 대물림 받을 수 있어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스테인드 글라스에 둘러쌓여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행복할 것이다. 언론이 다양해지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언론이나 미디어를 소비하는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 현실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내용 contents 에 더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다양성을 대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다고 해서 무조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민중을 갇히게 하려 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찾기 때문이다. [ 참고: 거칠어 지는 언론 - 미디어의 그레샴 법칙 ]

한국 사회 특히 정치에서는 '색깔론' 이란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상대방을 정치적 적으로 간주하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대상으로 단정지어 말한다. 그래서 색깔론으로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짧고 명료해야 한다. "김아무개는 빨갱이다." 라고 말해야지 효과적이지 "김아무개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상을 연상시키는 ..."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색깔론은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고 심하게 부정적인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공격을 받은 점잖은 정치인은 반박한다. "그런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지 마세요" 그러나 이 표현은 결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색깔론 공격을 하는 사람이 색안경을 썼다면 세상사람들이 색깔있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그래서 효과적인 색깔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색안경을 쓴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격하는 이와 같은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다수가 색안경을 끼고 있다면 그 색안경을 벗을 수 있도록 해주거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을 깨야 한다. 농담같지만 우리 사회에 가득한 수많은 색 유리창(안경)을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깨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요건으로 포르투나 fortuna, 비루트 virtu, 네체시타 necessita 을 강조했다. 포르투나는 운 혹은 운명이고 비루트는 덕 virtune 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virtune 이란 말 조차도 어원은 남성을 뜻하는 vir 에서 나왔고 힘이란 뜻이 더 강조된다. 즉, 운명에 의해 결정된 인물이 힘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고 네체시타는 시대가 필요한 정신, 혹은 시대에 적합한 행동 그리고 요즘은 시대정신 zeitgeist 을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올바른 도덕적인 군주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내용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면 시대정신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라기 보다는 소수의 욕망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힘과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경우 공동체는 거대한 방향성을 가질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다양한 색 유리창을 통해서 사람들이 봐야하는 다양성의 색이 아닌 지도자가 강조하는 하나의 색 혹은 소수의 색만으로 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색 유리창 안에서 갇혀 살아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무지개 색에 대한 인식도 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나중에 무지개색을 보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부정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힘을 가진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정확한 결론을 낼 때는 우리가 색 유리창에 갇혀 있도록 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예전에는 합리적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성스러운 군주를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지금 시대는 다양성의 목소리와 다양한 색의 조화를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들이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경제를 살릴 수 [ 참고: 사람들은 조금씩 병들고 경제는 살아나고... ] 색안경 속에서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경험도 있다.


당장 앞에 보이는 모습이 화려하고 마음에 든다고 해도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리창이 존재할 때 우리의 삶은 왜곡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잘못되어 그 잘못된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되어 모니터에 보이는 심지어 VR 헤드기어에 보이는 모습들이 사실같다고 해도 정확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리창이 투명하게 현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한번쯤은 내 앞의 유리창이 어쩌면 색 유리창이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유리창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유리창 안 실내가 분명 실외보다 안전할 수 있지만 가끔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직접 가볼 필요도 있다.


Build or Break glass 

유리창이 만든 실내와 실외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실내의 파리의 운명으로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운명처럼 인간 사회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들에 의해서 인간 스스로 파괴되거나 인간의 권리조차 무시당하는 경우도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만드는 장애물 같은 구조들을 만들어 내는 것 중에 법이나 기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구조같은 유리창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꼭 깨야 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다양한 구조들은 처음부터 '인간을 파괴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두고 만들 수 없다. 그런 경우 공동체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고 심지어 실체적으로 파괴와 억압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조차도 항상 권력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색안경을 쓰게 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인간을 위해 잘 작동하는 구조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부작용으로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다. 역사에서 권력이 만든 색안경을 스스로 벗어내고 깨는 작용은 일종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 심어놓은 유리창으로 구별해서 적과 아군을 정하고 적은 억압하고 아군은 유혹하는 과정을 과감하게 벗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 억압을 당하는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색안경을 벗어내는 과정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혁명의 시작은 누군가의 큰 희생이 알려지면서 붉은 색안경조차도 피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색안경을 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과정이 혁명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반면 완벽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충분히 필요하고 아무런 문제조차 없는 것이라도 종종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초기의 선한 목적과는 상관없이 권력을 가진 주체가 바뀌면서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경찰저지선 (폴리스라인) 을 볼 수 있다. 경찰저지선을 정하고 운영하는 것은 경찰의 몫이지만 시위조차 할 수 없도록 경찰저지선을 만들거나 경찰차로 도로 통행에 방해가 되는 정도로 과도하게 만들어 놓고 경찰저지선을 어기는 사람들은 무관용 원칙에 의해 죄인이 된다면 그때 법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과 권위는 정의를 구현하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가 흘러가야할 흐름을 막아버리는 위협적이고 조직적인 댐이 되어버린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29~1968) [원문 보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은 인간의 보호를 위해 만든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때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유리창을 과감하게 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리창 안의 실내가 항상 안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실외로 나갈 수 있는 흐름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라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규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규제가 인간을 억압할 수 있는 구조라면 규제철폐해야 하지만 규제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실내 실외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가 될지 모른다. 자연상태란 자연 법칙이 따르는 상태가 아니다. 이미 사회 안에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는 그리고 그 공동체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 (힘) 과 자본 (돈) 이 지배되는 세상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으로 경쟁해서 자신의 생업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밀려 살아남지 못하게 될지 모르고 권력에 의해서 불공정한 거래보다는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될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실내에 놓인 파리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유리창은 실외의 파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파리 죽음을 당할 가능성을 낮추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즉, 인간의 불공정하고 부도덕적인 모습이 만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법과 규제는 필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공정거래법이 있다.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를 통해서 재벌 자식들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자식들이 아닌) 은 최소한의 자본으로 엄청난 주식을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기업을 만들고 기업의 일감을 대기업에서 몰아주어 이익을 극대화해서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다. 만약 규제가 없다면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재벌일가가 이런 획기적인 방법을 하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재벌들은 이런 식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노동의 대가를 독식하게 되고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이익을 얻는 불로소득 unearned income 을 가져가게 된다. 재벌은 부를 얻기 위해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인적인 양심 혹은 도덕적인 가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이 퍼지기 전에 유리창 안에 가둬놔야 한다. 파리를 보면 미친듯이 잡아 죽이는 사람이 실내에 있는데 실외에 있는 파리들이 들어가 죽지 않도록 유리창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의 규제를 설정하는 과정을 단순히 시대의 필요성 (네체시타) 에 의존해서 설정하거나 해제하기 보다는 법이나 규제가 유리창처럼 존재할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압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만든 수많은 구조들은 모두 유리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유리창의 비유로 계속 설명을 한다면

1. 유리창이 존재할 때 얻는 이득과 손해를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참여자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 특정 치료제가 일부 환자들에게는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국민의료보험제도에 의해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치료제가 특정 약이 아닌 원래 제약회사가 신청한 임상 효과가 일정 수준이 아니라는 이유일 때가 있다. 심지어 보험이 되지 않지만 환자들이 비싼 약값을 감당하서라도 쓰겠다고 하지만 약의 처방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부의 행정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그 규제에 의해서 피해를 받거나 이익을 얻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소리는 듣지 않고 소위 탁상공론으로 수많은 지식의 색안경을 쓴 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이해당사자의 생명권에 관련된다면 이는 의무적으로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2. 오염된 유리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적 방법론을 만든다.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등장한 탈진실 post truth 시대에서 가장 큰 저항은 역시 사실확인 fact check 이다. 사실이 무엇이다 알린다 해도 이미 색안경을 쓰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확인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리천장이라는 편견의 벽에 갇히고 색유리창에 갇히게 될 때 많은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해자처럼 비난받게 되고 최근의 소위 미투운동 #metoo 의 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권력과 자본으로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것을 지금 목격하고 있다.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색안경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단순하게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가해자혹은 원인제공자로 만들기 전에 오염된 유리창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들이 만들어 질 필요를 느낀다.

3. 필요하다면 깰 수 있어야 한다. 유리창이 오염되어 닦아 낼 수 있어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보호막이 되어 공동체에 이로운 구조가 될 수 있지만 너무 오염되어 더이상 유리창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외로 나가고 싶은 이들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면 그때는 유리창을 깰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말한 시대정신 네체시타란 단순히 소수 지성인의 선각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다양한 색을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생각으로 모으는 과정이라고 본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걸리고 또 당연히 오염되기 쉽다. 시대가 변하고 유리창은 점점 오염되는데 그 유리창을 그대로 놔둔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유리창을 깰 수 있어야 한다.


Glassy conclusion 

참혹한(?) 압사를 당한 파리를 보고 본 글을 생각한지는 거의 3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건강상의 문제와 여러가지로 블로그를 이어가지 못하는 동안에도 소위 시대정신도 많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색안경 속에서 묻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색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도 하나씩의 색안경을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조금은 맥이 없는 glassy 결론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혁명은 유리창에 생긴 작은 균열 crack 이 유리창 전체를 깰 수 있듯이 작은 노력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 결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몰랐던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 혁명들 속에서도 유명한 이들의 노력보다 수많은 민중들이 작게는 자신의 편한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행동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믿게 된다.

파리의 죽음을 목격한 유리창을 생각하게 한 4.19 혁명 민주묘지 근처 한 카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름의 유리창이 필요한지 생각하다 읽게 된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 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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