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3, 2011

종교, 깔끄럽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몇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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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종교에 드는 나의 생각들을 모아서...


⑴ 내 종교가 소중하다면 다른이의 종교도 소중하다. 

간혹 종교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가능하면 종교는 신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같은 종교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안할려고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종교가 '더 좋다' , '더 옳다' 를 이야기하는 것은 뭐라 하기 싫은데 그런 와중에 자신의 종교가 더 좋은 것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너의 종교는 이래서 틀리고 저래서 틀리고' 라며 이야기 시작한다. 특히 내가 아는 사람중에 당신의 종교를 믿는 사람 누구는... 특정 인물을 비판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판단하지 말라는 종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 상대방을 판단한다. 자신의 종교가 좋다를 이야기하지 왜 상대방의 종교가 틀리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자신의 종교가 진리이고 확실하다고 믿음에 가득 찬 사람들만큼 교만에 가깝지 않은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비단 이는 소위 다른 종교의 사람들과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종교도 결국 인간의 믿음이다. 굳고 강한 강철일수록 강한 충격에 한번에 잘라지고 연하고 무른 강철일수록 그만큼 변형되기 쉽듯이 우리의 신앙도 강하면 강할수록 강한 충격에 쉽게 끊어지기도 때로는 너무도 나약하게 변형되기 쉬운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종교의 당위성을 도덕적 의무감으로 변질해 누군가에게 부과한다면 결국 종교는 '신'만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보살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본다. 종교의 첫번째 가르침이 사랑이라면 말이다.

겸손의 옷을 입은 사람은 결코 종교를 무기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을 것이다.

⑵ 믿음과 신뢰의 영역 - 종교는 자판기가 아니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은 안나지만 믿음과 신뢰란 단어를 한꺼번에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잠시동안 두가지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결론적으로 두가지가 어떤 의미인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지만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뢰(信賴)란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처럼 믿고 의지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가 더 강할 것이다. 그래서 비지니스에서 믿음이라는 말보다는 신뢰라는 말을 더 어색하지 않게 쓰는 것이고 연인 관계에서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믿음으로 이어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뢰라는 말은 조금 어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상호 이해관계가 섞여 있는 성격은 신뢰라는 말이 더 쉽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호 관계성을 강조함에 따라서 그 신뢰의 바탕은 막연한 대상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s)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금융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즉, 현재의 내용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게이지(gauge)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영역에서는 쉽게 신뢰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Trust in God 란 말은 영어 문화권에서 사용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는 신뢰(credit)이란 뜻이 아니라 (sincerity in belief)란 말로 오히려 믿음 중에 조건없는 믿음(unconditional belief)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더 강하다. 우리가 신을 믿는 한 신은 우리에게 자동판매기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뽑아 주지 않는다. 자판기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물건을 내어 준다면 그런 신뢰없는 자판기를 더이상 사용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청원하는 것들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더이상 내가 바라던 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종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신뢰는 그만큼 상호 관계성과 함께 그 상호 관계 안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예상을 기반으로 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본인이 원하는 모습의 신이 아니라도 불가능하고 내 인지력의 이상(beyond recognition)이라 할지라도 신은 신뢰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비록 내게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을 내가 받는다 할지라도, 고통, 아픔, 슬픔, 그 어떤 것이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다 해도 지키는 것이 믿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신뢰의 그 이면에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함께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신뢰를 쌓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목적을 위해 다른 이름의 믿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을 주는 신에 대한 믿음과 같이...

⑶ 신앙인이 마지막까지 붙잡을 수 있는 건 사랑하나 뿐이길... 

상상해보아라...

만약 누군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돈을 원해 부자가 되어도 전쟁이 일어나 돈이 무의미하게 될 수도 있고
명예를 원해 높은 자리에 올라도 누군가의 시기로 죽음을 당할 수 있고

그 어떤것이든 인간이 만든 자리와 인간이 만든 물건 을 원한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희미하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사랑'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살인자의 마지막 순간에도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이 있을 것이고 어머니마저 잊혀버린 사람이라도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연민이 있을 것이고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 안에서 마지막 순간이 있다하더라도 그 어딘가 혹시나 모르는 자비의 마음이 그를 향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언어로 부르지만... 연민이나 자비나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따뜻한 말들은 결국 '사랑'입니다. 인간의 그 욕심에 그저 다르게 부르고 싶을 뿐이 아닐까요.

⑷ 십자가 

가족이 짐스럽고 힘들고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생각은 정말 죄일 것이다. 내가 힘든만큼 가족들은 오죽할까 그리고 그 삶의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언제인가 신부님이 고난의 세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셨다. 자신의 길이 바른 길이 아닐 때 가이드 같은 훈육, 자신의 성장을 위한 통고 그리고 세번째가 십자가라고... 그 십자가를 버리는 순간 죄를 짓게 되지만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면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보며 예수님의 제자라 불리워지게 된다고...

그런 명예로움이나 영광스러움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다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가족이 행복할 때 나또한 "자유롭게" 행복할 수 있음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나 혼자라면 느끼지 못하겠지만 내 곁에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어 내 십자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 때문에 모두들 피하고 싶은 그 고난과 고통안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 나의 작은 십자가마저 불평하려는 순간 또 이렇게 알려주신다.

⑸ 기적이 있나요?

천주교를 믿는 이 중에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앙에 대한 자긍심도 있고 스스로 천주교를 믿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어떤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자신이 경험한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 듣곤 했다.

기도를 하던 중 '초 자연적' 현상이 자신에게 일어났거나,
꿈 속에서 예수님이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거나 하는 등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일상의 삶은 불평과 주변사람들에 대한 불만족, 때로는 자신의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탓으로 돌리는 이야기를 하는 것 또한 종종 듣게 되었다.

종교인으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선택받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스스로 이야기하는 그 자매님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로운 매 순간임은 잊어버리고 왜 초자연적인 것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려고 할까...? 그런 묘한 감정이 쌓였을 때 신부님의 주일 강론에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신이 주는 기적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의미있게 신의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두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번째는 매일의 삶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 얼마나 큰 신비로움과 감사함으로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지 정말 '살아 숨시는 매 순간이 기적임'을 느껴야 겠다.

오늘 하루 아무리 불편하고 불평스러운 시간이었다고 해도 감사할 수 있는 단 한가지, '내가 무사히 하루를 마쳤다'는 사실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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