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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20, 2016

공부 잘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정적 직업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흥을 자주 즐기고 부인에게는 성병까지 옮긴다. 그러나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남자들이라면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조건을 붙이며 별로 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충격적이었다.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것을 이용하여 명문대 출신의 전문직 선배가 후배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후배마저도 도구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런 요구를 하는 명문대 출신의 인물은 상대방도 원했다 심지어 후배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이유를 통해서 자신은 큰 잘못이 없음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고 명문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상당하였던 그는 소위 아르바이트로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자신은 능력있는 것을 잘 활용해서 학비도 벌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스를 보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주어진 자리를 가지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함부러 남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몇십만원에 감옥을 가야하지만 소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범죄와 악행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가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자신처럼 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때마다 많은 이들은 마크 데스메트 Marc Desmet 가 표현한 '용기를 꺽는 모순들'에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쉽게 믿었던 보편 타당한 윤리, 도덕의 문제는 항상 꺽기고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키고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서두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가정, 사회 그리고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개인의 규모가 가지는 규범적 요소들의 파편성 fragmentation of regulations 을 생각하게 된다. 왜 누군가에게는 옳은 내용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깨도 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범법 행동에 대해서도 쉽게 합리화를 시키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점이 없는 행동들은 외부적인 훈육에 의해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훈육의 강도가 높지 않거나 때로는 알리지 않게 은밀하게 행동해도 그것은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렸을 때 예상되는 훈육의 짜증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즉, 무엇이 문제이다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심지어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똑똑함으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그 법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를 쉽게 할 수 있다.

정치적 타락이 만드는 눈뜬 정의의 여신

분명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에 의해서 피해자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선배의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하던 후배는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때문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강하지 못하게 자란 피해자를 탓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부인에게 성병을 옮기고 유흥을 즐기는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일 이외의 시간동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박 중독에 빠지는 것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덕과 윤리는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가?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질문은 정말 그들의 행동은 문제가 없는데 사회가 괜한 문제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진 것만으로 도덕 윤리 의식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명제는 지금의 사회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고 심지어 높은 도덕 윤리를 요구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오히려 적절한 범법 사실이 필요 조건이 되었다. 심지어 그 중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도 자식들을 위한 노력이 보인다면 어느정도 괜찮지 않는가 공직자 후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덕 윤리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사전적 정의로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영어로는 a lesson, especially one concerning what is right or prudent, that can be derived from a story, a piece of information, or an experience. 이라 나와 있지만 이처럼 정의하기 싫어 내리는 정의도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싶다. 도덕이란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와 공동체가 지켜야 할 행동 요소라고 말이다.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신체의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나와 내 공동체가 지키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란 도덕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예상하고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요소라고 정의하고 싶다. 쉽게 말해 도덕이란 개인적 감정의 보호막이고 윤리(倫理) 는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 (輪; 바퀴 륜) 혹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공동체의 보호막이라 생각한다. 도덕 혹은 윤리가 이성적 작용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상당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누군가 길거리에 소변을 본다고 해도 사실 나에게 물리적 직접적 피해는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누군가 그렇게 하는 행동을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쾌함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변이 급한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경우 자신이 지키고 싶은 도덕의 기준은 스스로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 목격자들이 없다면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상방뇨를 적극 합리화할 것이다. [주: 티코 브라헤 (1546-1601) Tycho Brahe 는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전해진다.]

도덕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의 mores 에서 유래된다. mores 는 행동이란 뜻이다. 즉, 도덕은 지극히 행동과 그 행동이 가지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은 사회적인 개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물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의 이야기는 공동체를 떠나 성립하기 어렵다. 혼자 사는 이에게 도덕이란 상황극일 뿐이다.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노상방뇨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행동이 어떻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정의를 '상처받지 않기 위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어도 끝까지 노상방뇨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일까 아니면 도덕 의식이 너무 높아서 혹시나 갑자기 나타나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목격자를 생각한 것일까? 행동 자체로 보았을 때 자신의 참는 불쾌함을 해소하는 것이 좀 더 이성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도덕이라는 구조 안에서 힘들게 고통을 참는 이유는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감정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도 수치스러워 스스로도 불쾌할 수 있다는 감정의 문제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 mores 행동이란 뜻에서 유래된다

도덕 윤리를 모두 잘 지킨다고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충동적 욕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회가 도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더 짜증날 것이다. 유흥업소를 즐겨 다니는 이에게는 적절한 거래에 의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그렇게 쓰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합리화시킬 것이고 후배에게 강요하는 선배는 자신의 권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성인 남녀의 개인적 문제라 해석할 것이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 즉 영향을 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정말 인간은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고 싶어할까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가학적 인간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직접 간접으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도덕 윤리는 점점 변화하고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유혹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귀찮고 필요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동의 문제인가 인식의 문제인가? 

뉴스는 많은 경우 시청자들의 귀과 눈을 끌기 위해 다양한 상황 circumstances 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사원, 치과의사, 한의사 등과 같은 직업적 요소뿐만 아니라 재벌집 아들, 강남 명문고 출신, 명문대 졸업자 등과 같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소위 명문대가 아닌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주목받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높은 교육 수준은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한다. 그러나 그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명문대 캠퍼스 안은 거의 천국에 가까워야 한다. 현실은 반대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은 현 시스템에 잘 순응하고 잘 따라와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일반적인 도덕적 요소를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 높은 교육 수준을 이용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탐욕을 챙기는 등 오히려 높은 교육 수준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 도덕에 어긋나는 때로는 반사회적 anti-social 행동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명문대 출신이라면 사람들은 더 충격을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 저렇게 살인을 저지를까 하는 예상 밖의 결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뉴스가 만든 상황적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시선을 다른 부도덕성에 비추면 재밌는 현상이 일어난다. 높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경제 범죄를 일으켜서 많은 이들 심지어 가족이라 생각한다는 회사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도 사회 지도자, 경제 지도자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경제사범들이 회사 경영자라는 이유로 다양한 불법 행위들을 통해서 많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했다면 분명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경제사범들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영웅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는 생각보다는 많은 경우 사라지는 희망같은 무력감마저 들때가 많다. 결국 힘없는 노동자들은 소수의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해결책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떠돌기만 한다.

기업적 부도덕의 예를 보여준 엔론 회계부터 경영 거의 전반적 비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인간의 도덕이란 행동의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문제인가 말이다. 현실의 복잡성때문에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개인 때로는 조직과 조직의 충돌 안에서 개인들은 다치게 된다. 많은 과정에서 결국 상처입는 것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가끔 인류가 만든 가장 악덕한 제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으로 '법인 corporate body' 라고 말한다. 법인이란 '자연인이 아니면서 법에 의하여 권리 능력이 부여되는 사단과 재단'을 말한다. 즉, 인간은 아닌데 법에 의해 마치 인간처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이런 법인은 다른 법인을 죽이기도 (망하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결합하기도 분리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지만 마치 인간처럼 (자연인처럼) 다른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해치기도 한다. 결국 인간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기업이나 단체와 같은 법인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인은 정말 대단한 존재이다. 자신이 피해를 주어도 그 책임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때로는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대상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도덕적 내용들을 따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이다.

결국 행동의 관점에서 살펴본 도덕이지만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이라는 항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덕적 기업 (법인) 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외의 대상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 법인의 활동은 많은 제도적인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간의 사회는 도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법이지만 법의 차원이 아니라도 규제 regulations 라고 부른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규제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기준이 될 수 있다. 돈이 넘치고 넘치는 욕정에 유흥업소를 다니며 돈으로 성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생각했을 때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할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고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재적 규제 immanent regulations 가 된다. 결국 행동은 표면적인 문제이지만 그 행동을 옮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 행동을 평가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자신의 성욕이 후배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후배라는 인격은 그저 도구적 가치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인터넷 도박이 아니라 돈보다 덜 가치있다 생각하는 어떤 것도 쉽게 행동할 것이다.

종교는 내재적 규제를 제시한다

결국 도덕을 행동의 문제이지만 그 원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행동보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설명이 길었지만 이 문제는 다른 질문으로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이란 존재할까? 란 질문으로 환원하고 싶다. 사회는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인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개인도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생각하고 가치를 인식한다.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을 때 주인이 여성 노예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면 현대의 시선을 모두 벗어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에 비추어 주인이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덕은 사회의 산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적일 것 같은 인간들의 비도덕적 행동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으로 연결짓기 어렵다.

사의 서사에서 침몰하는 개인 

괴물이란 화두는 아주 강하게 다가왔다. 괴물 monster 는 경고하다는 뜻의 라틴어 monere 에서 유래되었다. [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 괴물이란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연히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 Paul Verhaeghe 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를 읽게 되었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개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제라 생각하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에 책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쩌면 현재는 폭풍처럼 지나간 (혹은 지나고 있거나 머물러 있는)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부분에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와 거의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즉, 경제적 전체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가지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meritocracy 이다. 특히 전체주의가 좋아하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학살의 내용도 사실상 유전적 우수성에 가치를 두고 인식하여 유대인 학살의 인식적 근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진화된 존재와 덜진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서 어떤 요소가 우수한지를 평가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객관적 과학적 과정이 아닌 독일 아리아 혈통의 우수성을 결론내리고 유대인 및 타 인종에 대한 협오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진화론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고 얼마든지 능력만 좋다면 좋은 대우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신자유주의는 선전한다. 아주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능력은 이미 이루어진 기득권 사회의 평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위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구조적 문제를 떠나 단순히 '어떤 곳에서나' 능력만 있다면 출세할 것이라는 말은 능력주의를 가장한 인생을 두고 펼치는 보이스피싱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실수할 수 있거나 때로는 상황이 힘들어 자신의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말할까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지도자 및 경영자들의 부도덕한 요구가 있을 때 능력좋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상위 10%는 승진하고 30%는 그대로 남게 되고 나머지는 해고된다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면 (그 규칙은 법인이라는 법이 정하는 인격체에 의해서 정해진다.) 구성원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대표적으로 사유화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규제완화, 사회복지 축소, 복지제도의 해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국가 정책의 방향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그 사회 구성원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예를 들어 의료에 대한 복지가 줄어든다면 의료 부담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사보험이나 목돈을 마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규제완화의 한 부분으로 사업자 측 혹은 사용자 측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한다면 노동자가 사용자를 향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심지어 사용자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요구한다면 회사에 남기 위해 노동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다양한 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자유의 폭과 깊이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순을 마르텐 판 로섬 Maarten van Rossem 은 "현대 사회의 자유는 공포와 생존이라는 두가지 사슬에 묶여 이름만이 자유인 부자유의 다른 이름이 되어간다." 로 표현했다. 또한 이러한 모순을 마이클 영 (1915-2002) Michael Young 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상 최선의 의도로 포장되는 법이다" 라고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자유주의의 많은 결과들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문제점을 만들어 냈다. 능력주의에 따른 소수가 자본을 독식하는 구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심각한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생산을 위한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아주 쉬운 부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어떤 국회의원은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외국인 근로자들 40%에 숙식을 제공하는데 숙식비에 최저임금까지 하니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높다, 선진국도 숙박비가 최저임금에 삽입이 되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국제 감각이 떨어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 외국인 근로자들의 후생복리가 지나치게 좋아지는 것 아닌가" 라는 주장을 하며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을 한 국회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의 의원이었다. 이 뉴스 속에서 해당 국회의원은 노동에 대한 어떤 인식을 하고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한국사람들도 똑같은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개인적인 의문은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품위를 가진 분께서 왜 이런 인식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식을 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 

무엇이 옳다 잘못됬다는 판단은 인간이 가지는 정상적인 그러나 상당히 비이성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이 옳다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 작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잘 맞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차라리 좋다 나쁘다로 설명하는 것이 잘 맞는 경우가 많다. 조금 학술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을 신념 faith 이라 부르지 않을까? 신념 faith 은 라틴어의 fides 에서 유래되었고 이 말은 믿음, 충성, 신뢰 등의 뜻이지만 이 모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즉, 호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만드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

전체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라 생각한다. 전체주의는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주의의 힘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무엇이 진실이다 라는 명확한 명제가 많아야 가능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역사학계의 의견은 단지 이견일 뿐 전체가 따라야 하는 진실은 명확하게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그리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전체주의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전체주의 역사 속에 묻힌 개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기도 전에 전체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진실의 힘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개인들이 유대인을 숨겨주면 자신도 범법자가 되기 때문에 혹시 유대인도 같은 인간인데 라는 양심의 외침에도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주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무엇이 진실이라 말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다양성을 숨죽이게 만든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심각하게 보면 개인 생존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조금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히 기관이나 이익집단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업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재벌 총수를 도와 횡령을 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회사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이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는 오히려 회사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부 고발자가 양심적이라고 말해도 그래서 그 결과로 회사를 떠나 직업을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내부 고발을 하고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도덕한 행위가 해도 된다고 인식한 높은 인간의 인식 수준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론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더욱 부러워할지 모른다. 이미 재벌 총수는 재벌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진실이다. 무엇이 양심적이고 합법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희망은 오직 '그'들 혹은 '그녀'들이 정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최소한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무감각한 괴물만 아니기 바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싱가포르란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가깝다고 느낀다. 지하철에서 음식물 먹는 것도 벌금, 화분 받침대에 물이 고여 있어도 벌금이다. 이런 다양한 벌금을 통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다소 심하게 구별되는 나라이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통제의 기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런 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만 화분 받침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라리아와 뎅기열때문에 보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이유라는 점을 듣고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모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두번째는 이런 통제에는 예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비리를 저지르면 그에 따른 조사와 처벌은 피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엄격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국민들이 그런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높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통제 및 규제의 이유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소수의 권위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즉, 국가의 통제 기준이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수준이라면 개인이 느끼는 양심적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을 생각해본다. 싱가포르의 경우 아주 소량의 마약만으로도 사형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마약 밀반입을 하려고 한 사람인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번 사형을 내린 사람들은 다시 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때는 조금 머뭇거리지만 항상 마약이 가지는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며 계속 주장한다. 이런 인식은 어쩌면 마약은 무조건 나쁜 것이야라는 인식을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법을 통해서 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당히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닌 예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 부모님이 정해주신 유전적 형질보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 어떤 환경 안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냐에 따라서 더 많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제유전학육유전학 

유전학 genetics 는 인간의 질환이나 이해할 수 없던 다양한 증상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전자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는 의학적 설명의 폭이 좁았던 것이다. 특히 유전자질환 genetic disorder 은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내과적 질환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사선이나 약물에 의해서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하지 못해서 외형적인 부분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유전자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일종의 청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청사진이 변경 (변이 variation) 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그 현상이 인간 생명 활동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유전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 유전자에 새의 유전자 특히 날개의 기능을 하는 유전자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날개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자를 인간에게 주입된다고 해도 해당 유전자가 전체 인간 유전자 안에서 실제 형태를 만들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도 인간 유전자가 단순히 몇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실현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변이를 만들어 유전병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가능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수적인 부분은 다양한 안전 장치와 보완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Econogenetics 경제유전학

생명 활동의 규모, 범위 그리고 실체적인 행동들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자를 이야기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서사 안에서 구성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제대로 된 경제적 활동을 하지 못하면 삶의 질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까지 위협받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더욱 더 나아가 개인을 결과로 판단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를 평가하여 이를 통해 능력을 평가한다.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 등으로 얻게 된 경우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국회의원의 인식대로라면 자신이 선택하 수 없는 출신 국가에 따라서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같은 결과를 보여 능력이 동일해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처럼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경제적 환경, 여기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자본의 크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 등과 같이 경제적 기회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들까지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다시 돌아가면 인간의 행동은 결과적인 문제이지 원인적으로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즉, 물려 받을 수 있는 자본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와 같은 자본적 환경은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에 영향을 주고 행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

이처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분명 우리의 인식 및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유전학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경제 econo- 유전학 genetics 이라고 부르려 한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되는 소위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인식은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는 한계적 요소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지만 이미 시작점부터 다른 부의 불평등은 이미 경제적 조건조차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주어진 자본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제 활동을 얼마나 쉽게 활동할 수 있는가와 같은 국가 안에서의 규제, 법률 등도 중요한 경제유전학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프로그래밍 능력이 뛰어나도 인터넷 도박을 개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나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능력과 기회가 충분하다고 해도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서 법이나 개인적인 차원의 양심은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하지 않는 과정도 경제유전학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경제가 자본을 많이 모으는 목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된 조직 안에서 공생이 더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생리적 인간도 비슷하다. 간세포들이 자신들은 기능이 뛰어나다고 끊임없이 자기 조직의 세포를 분열 복제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일반적으로 암세포라 부른다. 암세포 자체는 끊임없는 세포의 증가로 인해 정상적인 세포가 살아갈 여유조차도 만들지 못해 정상세포의 기능마저 할 수 없게 하여 결국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 관련된 활동 경제 구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적응을 위한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가 횡령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 회계를 담당하는 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지만 재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저질렀을 때 자신을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제대로 해줄 것인가 의문이다. 결국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가 무엇이고 그 유전체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기회를 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행동들이 제한받게 되는가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의 행동과 인식은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구조의 불법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이 잘 맞는다면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해가 되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단백질을 생산하면 이를 중단하고 되돌리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를 유전자 발현 및 조절 gene expression & regulation 이라 부른다. 유전자의 조절을 regulation 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사회 구조의 환경 및 기회 등이 하나의 유전자라고 가정한다면 사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영속하기 위한 규제 regulation 의 기능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Gene expression and regulations

Edugenetics 교육유전학 

인식이란 개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접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생각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에 큰 관련이 있다. 가치관은 유전자처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된 inherited 부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보아도 가치관이란 단순히 외부로 받은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수용이후 반응하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견의 명제들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생각하기 싫은지를 반증해주고 있다. '엄마없이 자라서 성격이 나뻐', '고아로 자라서 독립적이야' 와 같이 주어진 환경 혹은 상황에 따라서 편견의 결과를 쉽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 편견이 최소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 cases 를 경험 혹은 수집해야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진 한두가지 내용으로 사실이라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해석하고 진실이라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 진실이란 수식어 안에는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수많은 편견이 고착화되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제 성노예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의 논리를 접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 식민지 시절에 대한 해석 특히 최근 '강제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일본 국민들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다. 무엇이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역사의 사건은 존재하지만 그 사건을 해석하는 그리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감춘다면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당시 일본 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다 혹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왔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던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게되어 일단 그것을 수용하기 쉽다. 즉, 교육이란 선생님의 권위를 통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식을 주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만드는 인식의 틀과 내용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만들어 준다.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와 대칭적으로 이를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라 부르려 한다.

대다수 일본 사람이 강제 성노예에 대한 일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일본의 교육 과정이 일방적인 인식을 강요하고 있고 교육자도 강요한다고 해도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지 않은 다양한 내용과 외부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전하는 인권의 일반론을 접하게 되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 검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 무엇이 옳다는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쏟아질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 자신이 이것만은 간직해야 겠다고 믿는 가치관들의 기본 요소들 fundamentals of  principles 을 얻기 위한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은 시험점수를 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필요한 해석의 도구들을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적의 생수가 있다고 팔려는 사람을 보면서 물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며 경제적 탐욕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며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한다는 심리학적 분석을 하게 된다면 정말 치료될 수 있는 확률보다 사기꾼일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Glycosylation Process

결국 교육유전학은 세상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고 정답을 주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게 될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과 해결방법을 찾아줄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생리학에서 면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비슷하다. 즉, 외부의 셀수 없는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방어하고 어떻게 수용할지를 선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수많은 물질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이에 대응하는 1:1의 반응을 하게 된다면 인간 유전자는 지금보다 확실히 큰 규모가 되거나 어쩌면 대응하지 못한 물질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는 물질들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유전자의 부분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당단백질과 같이 다양한 당류의 조합과 가지치기 glycosylation 를 통해서 면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런 대응에는 가급적 다양한 재료가 가지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의 기능과 유사성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교육은 좀 더 다양한 접근이나 세부적인 문제의 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도 유연하게 풀거나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물이 사는 세상

첫 부분으로 시작한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작은 공동체인 가정부터 경계가 무한에 가까운 공동체까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왜 해가 되지만 스스로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개인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점점 그런 존재들이 증가하는 것만 같은지 궁금했다. 사실 그저 문제이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탓하며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단절시키면 되지만 근본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좀더 문제의 원인을 다른 시선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다. 부도덕한 일들을 하고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은 오랜 시간 인간이 지키려고 했던 윤리 또는 인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역행하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는 유흥업소들이 가득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하나의 문화처럼 수용하기도 한다.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정보인 것처럼 그런 환경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연쇄 살인범같은 살인자들이 뉴스에 나올 때 항상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코패스 psychopath 이다. 살인을 하는 그 행동에는 분명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계속해서 묻는다. 그래서 살인자들은 원래 그런 유전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살인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린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만 사회 대다수 혹은 소수라 할지라도 국가 기관의 지도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전 국민들에게 '살인 유전자' 보유 사실을 검사하고 이를 통해 특별 감시를 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특히 후생유전학 epigenetics 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가 원인이 되어 행동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다. 그래서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나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환경이나 교육의 조건에 따라서 인식이 결정되거나 행동이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허무맹랑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의 인식이 좀 더 합리적으로 공통선을 향한 일반적인 정의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유전자의 유사성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Hannibal (TV Shows) as known psychopath

누군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원칙중 하나가 '존재와 행동'은 분리해서 생각하자이다. 이미 정해진 존재가 항상 정해진 행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할 수 없는 요소를 통해 전적으로 변명하는 것도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살인자의 이유가 (정말 있다고 해도) 살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속한 회사의 환경 등과 같은 경제적 환경때문에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회사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수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손해를 주면서 회계 부정을 하는 사람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행동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홍수에 빠져 있는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월급은 적어도 도덕적 경영을 하는 회사가 인기를 얻는 이유인지 모른다.

주입식 교육이란 마치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대응하여 면역 단백질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와 비슷하다. 시험에 나오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서 해당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풀줄은 알지만 그런 수학문제에 필요한 미적분이나 확률이 우리가 앞차와의 안전거리 유지해야 한다거나 광고에 혹하여 손해만 보는 보험에 가입한다거나 주식을 제대로만 하면 돈을 항상 벌 수 있다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내가 속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그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속한 경제구조 환경의 특징을 알아야 하고 내가 배워왔던 교육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으로 구별해서 생각하고 싶었던 이유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존재도 경제유전자 econogene 이 바뀌고 교육유전자 edugene 이 지속적으로 접촉될 수 있다면 존재의 행동은 좀더 바람직한 공동선을 추구하고 개인도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면 경제유전자의 기업 활동이 좀더 투명하고 다양한 참여자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자본의 흐름으로 좌우되지 않는 공정성을 강조한 규제들이 확립된다면 우리 몸의 유전자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잘못된 기능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처럼 좀 더 체계적인 경제(환경)시스템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유전자는 교육기관의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론들이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접근성 및 여론의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공동체 구성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유전자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복되는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서 공정하지 못한 처리 과정으로 법 체계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스스로 방어를 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유전자들을 포기하고 개인대 개인이 투쟁하는 정글의 모습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제대로 이룩된 경제유전자의 요소들은 우리가 불필요한데 쓸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흄 (1711-1776) David Hume 이 능력에 기초한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해체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이성을 지녔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무지한 어떤 존재가 있어서, 가장 공적으로 이로우며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의 justice 및 사유재산 property 의 규칙들이 무엇일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덕 virtue 이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주려고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들이 그런 법을 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지닌 본래의 모호함과 각 인간들의 자만 때문에 우수함 merit 이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아무런 확고한 행동 규범이 나올 수 없고, 당연히 사회는 즉시 전부 해체될고 말 것이다." 


사회가 만드는 조직적 괴물에 대해서 ─ 경제유전자와 교육유전자

Sunday, July 5, 2015

episode 1.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모두 지역의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밖에서는 항상 인자하고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남편은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폭력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습관이 되고 심지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얼굴과 같이 노출되는 부위는 때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아내는 늦은 나이였지만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선택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편의 가정 폭력을 잘 알고 있던 대학생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러나 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이혼하면 제가 시집을 좋은데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주세요." 


episode 2.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는 가정처럼 보였지만 남편은 결혼 이전부터 만나던 여인을 결혼 이후에도 만나며 아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외도를 계속 이어갔다. 가정 폭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가정에 관심을 쓰지 않고 단지 돈 벌어오는데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는 마음먹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아들과 둘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생 아들에게 아버지와 이혼했으면 싶다고 말했고 아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제가 학교에서 왕따당해요. 제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바라시는거예요?"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믿기 힘든 실화를 들었지만 아주 짧게 요약해서 소개해보았다. 특정인물이 관련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이야기의 구조와 등장인물을 각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혼에 대한 딸과 아들의 태도와 느낌은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엄마의 선택에 딸과 아들은 '당신의 그 선택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망칠 수 있으니 하지 마세요.' 와 다를 것 없는 그 말이 너무도 무섭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딸과 아들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한 단어는 바로 '괴물'이었다.

물이 사는 세상 

괴물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협오스럽고 보자 마자 이질적인 느낌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기 힘든 대상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괴물 (2006) 을 보면 그 흉찍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격성 때문에 인간은 무서워하고 괴물이 죽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영화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 아니라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나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협오와 두려움으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인간과 괴물은 대결의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공격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괴물은 인간보다 생물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괴물에 의해 쉽게 죽는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없고 나약하지만 단지 겉모습 때문에 인간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쫓기며 사는 괴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지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영화가 슈렉 (Shrek, 2001) 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슈렉도 상당히 인간적 형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이 존재하지만 괴물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수 social majority 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 소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 외롭게 살아가도 인간의 폭력과 공포로 인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괴물은 사회의 산물 product 이다. 영화 괴물은 인간이 버린 유해 물질에 의해서 한강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괴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에 의해 버림받지만 사실 그 사회의 잘못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쩌면 괴물을 설명하는 아주 짧고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괴물이라 부를까? 

개인적으로 앞서 소개한 예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몇명 소수의 이야기라고 놀라고 넘어가기 보다는 내가 듣지 못한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런 실화가 얼마나 평범한 것은 아닌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소에서 언급되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이 생각난다.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아무렇지 않고 평범할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대상이 어쩌면 악한 본성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대상일지 모른다는 그 잔잔한 공포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평범한 모습인데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가끔 이런 순간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글쓰기 방법이 하나 있다. 현상을 듣고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괴물' 가장 먼저 생각난 단어였다. 그리고 내가 왜라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생각한 그 단어의 어원 word origin 을 찾아보는 것이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괴물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영어로 괴물은 monster 이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monstum , monere 로 각각 뜻은 portent , warn 이란 뜻이다. 즉, portent 는 징후 전조이고 warn 은 경고(하다) 이다. 즉, 괴물 monster 는 단순히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 혹은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단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괴물은 많은 경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혹은 스스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해서 자신을 만든 그 사회와 대결하며 살아야 한다. 괴물의 어원이 뜻밖에 '경고'란 뜻은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괴물이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고 있고 그 경고는 사회가 그 경고를 방치하면 다음 괴물이 될 수 있는 희생자는 바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회가 만든 괴물에 대해서...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딸과 아들은 엄마의 인생, 엄마의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스웨덴에서 만는 가정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범하게 자식들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남편이 갑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 sexual identity 가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임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은 본인의 결정에 따라 엄마와 같이 살거나 두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엄마에게 나머지 큰딸과 큰 아들은 두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데 개인적으로 심한 혼란감과 많은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혼란감이야 익숙하지 않은 동성애에 대한 느낌이었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은 당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저의 싫음때문에 포기하지 않기 바랬다.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랬다." 

자신의 '더 좋은' 혼인을 위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더 좋은' 학교 생활을 위해 어머니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행복이 더 우선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혼인과 학교를 위해서 어머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망치는 것도 불행한데 이 경우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불행을 보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렵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행복한 삶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 그 대상들은 정말 본인의 행복을 정말 실현해줄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식들 (욕 아님...) 을 괴물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불행마저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의 삶, 행복, 생명마저도 파괴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화들을 들으면서 느낀 그 소름끼치는 느낌들은 괴물, monster 란 단어가 가지는 라틴어 어원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고를 경고로 느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와 같이 순응하며 살게 된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다음 사람은 당신의 자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냥 순응하며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쟁만이 강요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자신의 욕망,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은 희생되어도 되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고민없이 사는 괴물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먼저 딸과 아들이 욕망했던 대상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학교 ... 그리고 결혼은 '좋은데 시집' 가는 것, '왕따 당하지' 않는 것 둘 모두 조건의 문제였다. 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상 (결혼, 학교) 인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 (더 좋은, 왕땅 당하지 않는) 이었다. 조건의 속성 property 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현은 조건이었지만 항상 사회적으로 더 좋은... 덜 좋은... 때로는 가장 좋은... 과 같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벼운 사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인생의 경로는 대학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경쟁의 구조 속에서 대학이라는 대상과 '더 좋은'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그 욕망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기능만 할 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로움을 주는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데 별 관심이 없다. 경쟁만이 강요될 뿐이다. 더 좋은 경로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이로움을 줄지 온갖 해악과 더러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토록 수많은 돈과 자원을 쏟아가며 괴물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님의 [ 공부는 힘이 세다 ] 를 꼭 읽기를 권한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국립묘지에 조성된 '정의의 상' 공부를 잘하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했다. 그때 가장 분개하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학생이였다. 지금의 경쟁 사회 속에서 가능할까 의문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잘 선발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발전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은 거의 반대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정한 과정보다 유리한 조건만 생각하고 같이 걸어가는 동료보다는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경쟁자만 생각한다.

과관계의 희생자 casualty of causality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지 느끼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멍청함이다. 흔히 인간은 지금의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지금의 원인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쉽게 확신한다.

어머니가 이혼하면 딸은 더 좋은 결혼을 하지 못할것이라 믿고 있고 아들은 학교 생활에서 왕따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서울대를 갈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인성을 가질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직장)을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욕망의 사슬에는 건강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한순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정의 목표들 중에는 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용은 없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한 내용들만 존재한다.


특정 학원을 다녀야 시험 성적이 오른다 와 같은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보기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특정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의 공포와 미래의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때 과거의 그것때문에... 라는 결과론적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 않으면 .. 를 얻을 수 없다 와 같은 인과관계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란 측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원인때문에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특정 결과는 특정 원인때문이야 라는 인과관계의 희생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수용을 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원인에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그럴 수 있고 휴식시간동안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알았던 사실이 시험에 나올수도 있고 다행히 자신이 공부한 내용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시기에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고 학원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인때문이고 원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일들은 결코 우리고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고 때로는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변 사람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세상이나 괴물은 존재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욱 더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예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떠나서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관계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주요 원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치적으로 제외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런거고 그런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럴때 대답하기 위해 만든 좀비이론 zombie theory 이 있다. 영화에서 좀비는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그 감염 증가 속도는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착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믿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일부 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라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어원이 알려주듯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좀비가 조금 보였을 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비가 세상의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점이다.


여기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episode 1.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벌고 다른 여인과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다.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키우는데 식모랑 운전기사는 필요하잖아. 근데 이혼하면 더 돈들잖아 그냥 지금이 더 싸게 들어... 어느날 아내를 무시하며 식모 취급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집에서 나가세요. 더 많이 배운 아빠에게서는 더이상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없지만 덜 배운 엄마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끼는 방법도 계속 배울 수 있으니깐요." 

episode 2. 남편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직장 생활 때문에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에서 다른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만났다. 남편은 자신이 바람피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게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여인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아내가 용서하고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 말한다. 오랜 결정 끝에 이혼을 결정하고 큰딸에게 말했다.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큰 딸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끊임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해도 끊임없이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물이라는 경고에 대해서...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사회의 잘못된 문제가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물이 될 수 있을까 계산하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혹시 나 스스로도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두개의 이야기를 더 소개했다. 그러나 글의 처음에 소개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들과 딸이 있다. 이 둘도 부모의 이혼때문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더 좋은' 이라는 조건의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덜 좋은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이 배운 공부를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다. 인간은 왜 사회를 만들었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같이 모여 불편하기도 많고 짜증나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이 사회는 왜 만들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클라우드 서비스 ] 에서 가치에 대한 정의 definition 를 설명했다.

"가치"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연민을 통해 구현되는 이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한 이유는 어떤 일을 맡아 해야할때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만들고 이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연민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도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경쟁사회에서는 오직 나뿐이다. 타인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같이 협업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잠시 같이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이런데 어떻게 타인을 위한 이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연구소에서는 많은 특허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 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전차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명을 특허로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누었던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 디젤 기관) 와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들은 자신의 재능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환경, 사회의 덕이라 믿고 이로움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시 사회 구성원에게 돌려준 것이다. 조너스 소크는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이죠. 특허라고 할 것이 있나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요?' 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길가의 들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되나 싶다.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고 그 무엇이 좋은 대학가는데 얼마나 필요한지가 아니라 그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소개시켜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숨겨진 괴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공통적으로 설정된 남편들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남편으로 일관되었지만 부모이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쩌면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과관계의 커다란 희생자 즉,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된 네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통해서 연민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다.

물이 치유받는 사회를 꿈꾸다... 

우연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 지역을 지나다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난 여행가는구나 싶어 보기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재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책가방도 부족해서 캐리어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심하게 넘어가면 상관없는 이들의 삶이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SBS스페셜, 부모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중 한장면

무엇이 문제이다 속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교육의 문제일까 싶어 교육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면 되지 않을까 싶어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에서 제시한 교육의 목적에 맞춰 교육을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다양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고 배워야 하는 것, 공부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인간다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서 무엇이 '더 좋은' 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반 학우의 노트를 훔치기도 하고 그렇게 훔쳤을 때 학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괴물은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무감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본다.

젓먹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도 엄마는 먹이고 싶을 때 젓을 물릴 것이고,
누군가 쓰려저 죽어가도 내가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지구 반대편 아이들이 기아로 힘들어 해도 더 맛있는 맛집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 놀림과 오해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내 외모에 더 신경 쓰일 것이다. 

괴물에게는 엄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는 자식들이 느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온 좀비와 무엇이 다를까? 영화에서는 좀비는 좀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 편에서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많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괴물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좀 더 위안이 된다...) 자신에 감정에 솔찍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때로는 연민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감도 가지고 오랜동안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상처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Tuesday, January 14, 2014


녀는 비만 오면 눈물을 흘린다.
아직도 그 무엇이 그렇게 슬픈지
여전히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누가 저 소녀라면
쉽게 눈물을 멈출 수 있을까
사라진 젊음을 누가 보상해줄 것이고,
사라진 희망을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그래도 해방을 맞이한 조국에서
젊음도 희망도 찾을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는 그들에게
자유로운 해방을 선물해주지 못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슬픈역사라 외면하지 않고
아픈과거라 감추지도 않고
멀리, 오래 기억해
반복해서는 안되는 역사로
기억할 수 있도록...

소녀는 아직도 눈물을 흘린다

  [ 공공의료 글타래 1/4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공공의료 글타래 2/4 ] 공공 의료는 왜 필요한가 ─ 의료의 공공성
  [ 공공의료 글타래 3/4 ] 공공 보험에 대해서 ─ 노동의 탈상품화
  [ 공공의료 글타래 4/4 ] 중증환자와 만성환자 ─ 질환 중심 분류

인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는 보험 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미국의 의료가 문제라고 하지만 이 문제가 의료 시스템의 문제인지, 의료 보험을 포함한 의료 복지의 문제인지 정확하게 구분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이다. 사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은 상당히 합리적인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보험 제도의 문제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상당한 부분이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거나 심각한 질환이나 사고에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대부분 보험에 관련된 경우가 많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치료 도중 보험이 갑자기 적용되지 않거나 보험 범위가 아닌 내용이기 때문에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내용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의료 보험 (사보험) 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정치 집단이다. 거의 20년동안 미국 정치에 가장 많은 정치 자금을 지불한 집단이다. 항상 공식적 정치 후원금으로 보험회사와 제약회사는 1,2등을 다툰다. 의료 보험 특히 사보험 시장과 제약 회사가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정보는 중증환자 / 만성환자 에 관한 자료들이다. 이 자료가 왜 중요한 것인가? 이런 자료가 중요한 이유는 사기업의 탐욕적 모습을 잘 대변하는 내용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회의 로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윤을 많이 뽑을 수 있는 환자와 질환을 분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중증환자와 만성환자들의 의료비 지출은 높고 지속적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이들에 대한 보험료를 인상하고 중증 / 만성화 되는 질환들에 대한 보험 적용을 축소하기 위해서이다. 즉, 보험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보험금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는 환자들마저도 이익 창출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보험회사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이를 통해 제약회사들도 신약 개발부터 의약품 공급에 있어 검은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검은 연결 고리는 별도로 이후에 제약 / 보험회사들의 지하 경제 (실질 경제에서 들어나지 않는) 에 대해서 다루어 볼 생각이다.

사기업의 입장에서는 아픈 환자들, 특히 심하게 아프고, 오래 아픈 환자들이 가장 좋은 돈벌이가 되지만 반대로 중증환자 / 만성환자를 의료 정책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하는 곳도 있다. 현재 의료비 상한제도 및 국가 주도의 의료 보험을 실시하는 나라들이다. 즉, 중증환자와 만성환자를 잘 치료하여 그들이 빠르게 경제적 활동 인구로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만성질환을 줄이거나 완화시켜 일상적인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해주기 위해 지속적 관심을 통해서 공공 보건 (Public Health) 와 예방 의학 (Preventive Medicine) 에 집중하는 것이다. 심지어 중증 / 만성환자들이 치료하는 과정에 필요한 치료, 재활 등에 필요한 인력도 중요한 직업 (재활 치료사, 보건 간호사, 공중보건 교육교사 등) 으로 육성하여 이들의 직업적 안정성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정책까지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이 충분하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중증 / 만성환자들의 경제적 파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노동의 자유시장 (시장 기능에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노동 시장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하지만 일단 고용과 노동이라는 차원에서의 수요 - 공급 을 생각했을 때의 시장) 에 해를 주는 반시장주의 정책인 것이다. 즉, 국가에 필요한 노동력이 병이나 사고에 의해 손실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노동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일종의 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장 돈벌이의 수단으로 환자들이 이용된다면 그들이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기 보다는 환자의 고혈을 뽑아내며 어떻게든 생존의 문제에 부딪치게 해서 무리해서라도 이익을 얻어내는 소비자로 만드는 것이다. 즉, 미국은 사보험과 제약회사의 강력한 로비와 정치력으로 환자를 돈을 벌 수 있는 자금원 (money source) 로 생각했던 반면 중증 / 만성환자를 줄이고 이들의 의료비를 적극 도와주는 나라의 경우 의료는 구성원이 빠르게 경제 구성원으로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원적 복지 (supportive welfare) 이자 투자 정책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4.1. 누가 중증환자이며, 만성환자인가?

중증환자의 반대 개념은 만성환자가 아니다. 중증환자는 말 그대로 증상의 강도가 어떤가에 대한 개념이고, 만성환자 (chronic) 의 반대 개념은 급성환자 (acute) 이다. 즉, 질환의 심각도에 따라 중증 / 경증으로 나누어지고, 질환의 지속 기간에 따라 (환자가 인지하지 못한 기간까지 포함하여) 급성 / 만성으로 분류하게 된다.

먼저 급성 / 만성을 생각해 보면, 감기와 같이 비교적 단기간에 회복이 가능하고 좀더 정밀한 생리학적 의미로는 '생리학적 향상성 (physiological consistency) 으로 자연스럽게 치료될 수 있는 질환을 급성, 이와는 반대로 신체의 향상성만으로 회복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질환을 만성이라 부른다. 즉, 변화된 환경에 잠시 아플 수 있지만 곧 회복할 수 있는 질환을 급성이라 부른다. 의료비 측면엣 급성은 전반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거나 많은 경우 보험의 영역에 포함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전염성 급성 질환을 생각할 수 있다. 가끔 재난에 가까운 전염성 급성 질환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공공 의료의 기능이 필요하다고 이전 블로그 내용 [ 공공 의료는 왜 필요한가 ─ 의료의 공공성 ] 에서 살펴보았다.

반면 만성환자는 이미 과거력이나 가족력 (유전력 + 환경력) 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보험 시장은 방어적으로 보험의 범위를 줄이거나 혹은 치료가 지속됨에 따라서 보험 혜택을 줄이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미국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만성질환 환자 혹은 환자의 가족이 가입한 직장 보험 혹은 사보험에서 일방적으로 보험 조건을 갱신하거나 취소하여 갑자기 의료비가 증가한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사보험과 같이 이윤 활동이 중심이 되는 보험 시장의 경우 만성환자들은 보험 부담금을 증가시켜도 어쩔 수 없게 된다. 항상 그렇지만 사보험과 환자에 있어서 협상 주도권은 사보험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은 거의 대부분이 환자가 될 수 있는 입장에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중증질환의학적으로 치료 효율이 떨어지는 질환을 말한다. 수치적으로 생존율이나 완치율 등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땅히 치료 방법이 없어 증상을 완화하는 내용의 치료만으로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치료하기 힘든 중증질환, 난치병의 경우 만성질환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사보험을 가입한 상태에서 암에 걸려 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깔끔한 암에 걸리라는 말이 있다. 즉, 병리학적으로 애매한 암이나 약관에 어긋난 상황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수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보험 시장이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아프지 않은 보험 가입자 (사보험 회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보험금을 지불하는 고객) 에게 가능한 많은 돈을 뽑아내고 보험금이 필요한 절박한 입장의 환자들에게는 가능한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보험금을 적게 지불하는 것이 이윤 측면에서 최고의 경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이런 중증, 만성환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보험을 적용하지 않으면 결국 이들은 경제적 파산으로 생존의 절벽에 매달리는 계층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중증질환 / 경증질환에 대한 국가 보험의 비용 구조를 보면 해당 국가의 의료 정책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스웨덴과 같은 경우, 경증질환에 대한 병원 접근성을 높게 해서 (환자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 부담이 높게 해서) 병원을 찾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예방과 보건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급성, 중증질환에 대한 위험도를 줄여간다. 대한민국에서 감기환자에 대한 엄청난 건강보험의 지출을 보면서 생각해 볼 부분이 많을 것이다.

4.2. 수혜자 부담 원칙의 어두운 그늘

미국 의료 제도가 보험 / 제약 회사와 연결된 검은 커넥션은 감추면서 항상 주장하는 말이 있다. "수혜자 부담 원칙 (beneficiary pays principles)" 이다. 즉, 심하게 아픈 사람이 더 많은 의료비를 지불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의료 보험 제도를 개혁하려고 했던 노력은 2013년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은 아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러한 사보험 시장이 확대되면 아무리 공공 보험에 대한 투자 비율이 증가해도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생각에 사보험의 기능을 줄이기 위해 공공 보험을 큰 규모로 확대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몇번의 민주당이 집권하여 케너디를 비롯해 몇번의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현실 정치에서 회사가 가지는 정치력을 이기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수혜자 부담 원칙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미국의 문화가 있다. 소위 킬링 코드 (killing code) 라는 것이다. 논쟁을 하다가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민감한 주제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종차별'이다. 그리고 두번째가 '참전군인' (veteran) 이다. 즉, 참전용사에 대한 혜택을 줄인다거나 그런 헤택이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주장하는 사람은 도덕적 비난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점차 참전용사에 대한 공공의료와 공공보험에 대한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이마저도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상이군인에 대한 공정 보험이 사보험의 위험 속에서 위태로운 시절이 있었다. 사실 수혜자 부담 원칙이라면 이들의 후유증이나 고통은 그들이 견디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그런 공감대는 절대 수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전쟁에서 싸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사적인 내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잠깐의 격동기에서 참전용사 및 상이군인들의 경제적 몰락, 이들이 저소득층이 되는 사회적 현상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런 현상은 사보험이 엄청난 규모로 미국의 병원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력을 가지게 되면서 공공병원을 사보험 회사들이 소유하는 소위 사유화 과정이 진행되게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정신질환을 포함하여 참전하여 발생한 장애, 후유증 등을 치료하는 시설은 공공병원이 담당해야 했지만 공공병원의 경영 적자 등의 경영 논리를 통해 사유화 과정을 거치고 거대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보험 혹은 제약회사 등은 개인 병원으로 전환하고 공공 보험을 거부하거나 공공 보험의 영역이 아닌 의료 행위를 통해 공공 보험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참전군인의 경제적 몰락에는 절대적으로 병원 서비스를 받아야 했던 이들의 의료비 부담이 실질적으로 늘어나면서 더욱 가속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공 보험은 조금씩 무력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는 저소득층, 더 정확한 의미로는 극빈층에 대한 무상 보험 제도가 있다. 메디케이드 (Medicaid) 가 그것이다. 연방정부에서 지원하는 생활 보조 제도로 최하위층 7% (하위 7%) 에 대한 의료 지원을 제공하지만 문제는 7% 보다 조금이라도 더 소득이 발생하면 혜택이 끊어져 상상을 초월하는 의료비를 부담하게 되기 때문에 저소득층은 확실한 극빈층이 되기 위해 생활 수준이 하향평준화 (하향극빈화) 가 되어버린다. 본질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다. 수혜자 부담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미국 의료 보험은 직장에서 보험을 가입하고 있어도 직장 구성원의 의료비가 증가하면 직장은 개별 구성원의 보험 조건을 일방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만성환자들이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생활을 위한 임금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는 해고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바마케어 (Obamacare ; the Affordable Care Act) 의 핵심은 서민층의 의료 혜택 비율을 증가시키고 직장에서 부담하던 개별적 계약에 의해 기업들이 의료비의 부담이 너무 유동적이어서 이를 고정 비용으로 국가 보험에 지불하고 국가가 이를 공공 보험 형태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험을 확대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특히 만성환자와 같이 지속적 치료만으로도 충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환자들은 기존의 사보험 제도에서는 해고만 하면 절감할 수 있는 비용이 되지만 오바마케어에서는 이미 고정적으로 기업이 지불하는 고정 비용이 있기 때문에 만성환자를 해고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 예가 바로 GM (General Motors) 의 파산과정에서 기업이 사보험과 개별적으로 협상해서 맺고 있는 보험이 불합리하고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느 비용으로 파산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회계 분석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사보험에 의해 결국 기업들도 경제적 활동의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과 결국 이 시장의 거의 유일한 생존자는 사보험 회사라는 점이다.


결국 수혜자 부담 원칙을 통해 이익을 얻었던 기업은 보험회사 조금 넓게 잡아 제약회사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보험회사들의 막대한 수익은 2008년 이전 금융 자산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즉, 실제 환자들의 의료비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자본은 결국 보험회사의 금융 투자에 의해 금융 자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순수하게 환자들의 의료 비용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자본은 엉뚱하게 금융 자산을 늘리는 종자돈이 되었던 것이다. 이 부분은 의료 서비스에 관련된 자본이 엉뚱하게 영리 사업 (주식, 채권 등의 금융 투자, 부동자 투자, 영리사업, 배당금 등) 에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가장 기본적인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료 서비스의 영리화 과정에서 보험 회사의 탐욕적 기업 운영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자본의 성격 - 산업 자본 & 금융 자본 - 을 구별하는 개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4.3. 사회 복지 측면에서의 중증환자

어떤 질환이 중증질환인지 구별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질환 (질병; disease) 이란 병리학적 (pathological)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 그리고 일반적 증상 등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발병했는가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 즉, 병리학적 접근이란 다양한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 원인 등에 대한 접근이고 질환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주로 환자들이 불편을 느끼는 내용 (증상) 과 동시에 병리학적 해석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표현된다. 즉, 같은 병이라도 환자에 따라서 그 증상에 차이가 있고 자각의 정도에 따라서 어떤 환자는 심각하게 불편하지만 반대로 어떤 환자는 전혀 불편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질환 중심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환자의 특성과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의학적 지식과 해석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역에 따른 의학, 유전학에 따른 의학, 환경에 따른 의학 특히 직업이나 산업적 환경에 따른 산업 의학 등과 같은 접근은 단순히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만 치료하는 차원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고려해야 하는 예방의학, 산업의학의 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특히 산업적 환경에 따라서 발생빈도가 낮은 중증질환 (치료하기 힘든) 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는 지역, 산업의 특징에 따른 역학적 관계를 조사하고 이를 통해 향후 환자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이에 대한 산업 보건 차원에서의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사보험 회사에서 수행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보험이 특정 산업과 이해관계를 가진다면 이는 더욱 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공적인 개입을 통해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면 국가 차원의 공공 의료가 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중증질환은 질병에 의한 삶의 질이 높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경제적 노동력을 제공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소위 사회적 노동이라 불리우는 지식 혹은 교육 분야는 중증환자가 계속 직업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 보기 힘들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경제적 활동 뿐만 아니라 간병해야 하는 가족들까지 있다면 이또한 추가적으로 경제적 활동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증질환은 재활이 목적이 아니라 병의 치료에 집중해야 하고 이또한 힘들다면 생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호스피스 등을 통해서 남은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중증환자 들을 위한 사회적 보장, 보호 등을 위한 인력은 국가적 차원에서 비용만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공공 의료와 국가 차원의 간병인을 육성하여 국가가 간병인과 의료 보조인에 대한 고용을 보장한다면 환자 가족들은 스스로 간병인이 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단순히 비용 논리만으로 본다면 이는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적자가 될 수 있지만 국가에 고용된 간병인 및 의료 보조인 등은 사실상 지속적으로 중증환자들 돌볼 수 있는 전문 인력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해 공공 의료를 활성화시켜 국가가 부담하는 공공의료비가 다시 공공 의료 시설로 순환 투자될 수 있는 방법을 만들기 때문이다. (인건비는 재정 부담의 큰 부분이다.)

4.4. 사회 복지 측면에서 만성환자

만성환자의 특징은 지속적인 관리만 된다면 일상적인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지속적으로 관리하지 못해서 만성질환에 의한 후유증이나 급성질환으로 바뀌어서 생명이 위험해지기 쉽다. 만성질환은 특히 사회적 인식과 치료제의 보급 등에 따라서 많이 상황이 달라지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AIDS (후천성 면역 결핍증) 으로 예전에는 중증질환으로 여겨지던 질환이고 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에이즈 치료제 및 HIV 바이러스의 효소 억제제 등으로 그 기능을 지속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만성질환은 적절하고 지속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를 절대로 볼 수 없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질환을 자각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 혹은 지역기관이 이를 적극적으로 치료에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 혹은 지역기관이 환자에게 직접적인 개입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지역단위에서 진료가 빠르고 쉬워야 할 뿐만 아니라 부담되는 의료비의 걱정때문에 접근하지 못하는 저소득층에 대한 폭넓은 보험 혜택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일반적으로 공중 보건 (Public Health) 라고 부를 수 있다. 공중 보건이란 단순히 전염병과 같은 위협이 되는 질환의 확산을 막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서 만성질환과 같이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환자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환자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의료 기관을 찾아오는 과정이 아니라 의료 기관이 적극적으로 필요한 환자 수요를 찾아서 지속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공격적인 의료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단위의 인구가 많고 어느 정도 사회적 활동이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도시의 경우 이런 기능을 미디어 등을 통하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적용할 수 있지만 인구밀도가 낮아 지역사회가 크게 형성되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는 공공 보건이 만성환자를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구조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주의 공공 보험을 적용하는 국가의 경우 국가에 소속된 의료인이 집에 방문하거나 필요한 의료 기기가 필요할 때는 국가의 지원을 통해 가정에도 설치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만성질환을 잘 통제해서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데 힘쓰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제 만성질환의 큰 부분은 노인질환 및 여성의 경우 갱년기 이후 질환 등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4.5. 마무리하며...

결국 중증질환 / 만성질환을 구분하는 것은 사보험의 입장이나, 공공 보험의 입장이나 중요한 부분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보험 회사가 완벽하게 선 (perfectly good) 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해도 결국 기업의 이윤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그 선함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다. 결국 사보험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중증질환 / 만성질환 환자들을 구분하고 이들에 대한 보험의 차별적 적용이 이루어진다면 결국 중증환자 / 만성환자 들은 점점 증가하는 의료비의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중증 / 만성환자는 국가 (state) 라는 구조에서 공공성을 보장받는 환경에서 살아가야 최소한 경제적 부담뿐만 아니라 일상적 생활에 복귀하거나나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가 중증질환 / 만성질환을 적극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잘 조절할 수 있는 방법과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은 국가차원에서도 생산적 노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이득이 되고 무엇보다 자신도 원하지 않은 질환에 의해 경제적인 위협이 발생해서 저소득층으로 몰락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 보험은 단순히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어떤 질환에 걸려도 자신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 장치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심리적 안정 장치는 자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미래에 걸릴지 모르는 질환에 두려워하며 지속적으로 투자해야만 하는 사(적)보험의 기능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적 측면으로 살펴보아도, 삶의 질의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국가가 공공 보험 / 공공 의료에 투자하는 것은 건강한 국가의 인력을 항상 유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좋은 투자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살펴보아도 보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해 경제적 / 의료적 파탄을 경험하는 인구가 늘어난다면 어떻게 그 국가가 제대로 된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중증환자 / 만성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 지속적으로 의료비를 뽑아낼 수 있는 좋은 자금원이라 여기는 기업의 생각ⓑ 건강한 인력이 되어 자신이 원하는 각자의 삶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중 국가적 차원에서 선택되어야 하고 당신이 그 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이 더 좋겠는가?

국가의 미덕은 국민의 긍휼과 아픔을 자신의 부덕으로 여기고 그들이 힘들어 하는 것에 연민을 느끼는 어머니의 마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국가가 기업의 이윤 논리와 상품 가치로 국민들을 바라본다면 결국 국민들의 고혈이 다 뽑혀 극소수의 사치를 보장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국가의 위상은 국가의 정책으로 극과 극을 선택할 수 있다.

보험은 상점에서 팔 수 있는 상품인가?

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치 (Joseph Stiglitz) 가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거대한 전환 (the Great Transformation) 의 발문의 내용을 통해 국가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장경제를 목적 그 자체로 보지 않으며 훨씬 근본적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사유화, 자유화, 심지어 거시경제 안정화 같은 것들까지 마치 개혁의 목표인 양 취급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여러 나라에 얼마나 빨리 사유화를 달성하는가는 목표를 내걸고 아예 점수표까지 걸어놓고 시합을 붙인다 — 사유화가 정말 쉬운 일인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사유화를 위해 할 일이라고는 그저 자기 친구들에게 자산을 나누어주고 그 대가가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빈곤으로 내몰리는 이들의 숫자, 창출된 일자리에 비교한 없어진 일자리의 숫자, 폭력의 증가, 불안감과 무력감의 증대와 같은 지표들을 놓고서는 점수표가 내걸려는 일이 너무나 드물다.


  [ 공공의료 글타래 1/4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공공의료 글타래 2/4 ] 공공 의료는 왜 필요한가 ─ 의료의 공공성
  [ 공공의료 글타래 3/4 ] 공공 보험에 대해서 ─ 노동의 탈상품화
  [ 공공의료 글타래 4/4 ] 중증환자와 만성환자 ─ 질환 중심 분류

중증환자와 만성환자 ─ 질환 중심 분류

Monday, January 13, 2014

  [ 공공의료 글타래 1/4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공공의료 글타래 2/4 ] 공공 의료는 왜 필요한가 ─ 의료의 공공성
  [ 공공의료 글타래 3/4 ] 공공 보험에 대해서 ─ 노동의 탈상품화
  [ 공공의료 글타래 4/4 ] 중증환자와 만성환자 ─ 질환 중심 분류

국가가 의료 복지 특히, 의료 보험에 대해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는 국가가 노동력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노동에 대한 철학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국가 생산력의 측면에서 노동력의 상실 혹은 감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의료 보험은 특히 노동력의 상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를 살펴보면 그 맥락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제 활동을 하던 국민이 질병 혹은 사고에 의해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노동력의 상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가 아니면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어느 범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를 정하는 모든 정책 활동은 국가의 철학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론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지만 의료 복지는 특히 복지의 일반 이론에서 제시되는 노동력의 탈상품화 (decommodication) 이론에 따른 복지 형태를 통해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핑 앤더슨(Esping-Andersen)의 사회복지국가 유형으로 세가지를 구분하는데,

ⓐ 자유주의 복지국가 (liberal welfare regime) : 국민이 노동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을 때 생계에 필요한 최저 수준을 제공하며, 개인의 책임을 더 강조하며 최소한의 공공부조 프로그램을 주장한다. (예: 미국, 캐나다, 호주 등)

ⓑ 조합주의 복지국가 (corporatist welfare state) : 직업 교육과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사회 공공 시스템이 존재하며, 사회보험 방식으로 최저 소득보다 높은 수준을 보장하며 직업별, 계층별 차등 복지가 제공된다. (예: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등)

ⓒ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social democratic welfare state) : 조세, 급여, 복지 수준을 국가가 적극 개입하여 사회적 평등과 연대성을 강조하며 높은 급여 수준과 더불어 높은 세금 등으로 일정 사회 생활 수준을 유지한다. (예: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는 사회복지의 형태를 구분한 것이고 이 분류가 그대로 의료 복지와 연결된다고 볼 수 없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의 발생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댓가로 임금을 받고 이 임금을 통해 자신이 생활하고 필요한 복지수요를 해결하는 것이 시작이다. 문제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어 임금을 받지 못할 때는 기본수요를 넘어선 문화생활과 같은 부가적인 활동은 어렵게 되고 심지어 기본적 생존에 필요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을 착실하게 제공해도 자본가의 착취와 구조적인 문제로 노동에 대한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 이들의 생존을 어떻게 국가가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로 되돌아 가게 된다.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이들 생존에 필요한 기본 수요를 어떻게 충족시켜줄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를 탈상품화 정도에 따라서 구별한다. 탈상품화란 노동이 노동시장에 얼마나 의존적인가에 따른 분류이다. 즉, 탈상품화란 시장에서 노동이 거래될 때 상품적 가치가 줄어든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개별의 인간이 더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노동의 상품화가 큰 상태는 인간 개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이 더 중요하고 노동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 투자 (임금) 비율 생산 효율 (efficiency) 가 중요하다.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경우 국민이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아도 기본적 생활을 위한 수준을 국가가 보장하기 때문에 고용이 자신의 생계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 → ⓒ 로 갈수록 탈상품화가 높아지며 경제력이 상실되어도 국가에서 충족해주는 복지 내용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탈상품화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이 질병 / 사고에 의해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① 비용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충분한 노동력이 회복되는데 필요한 ② 투자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게 된다. ⓐ 의 경우 개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노동력만 확보되면 되기 때문에 개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노동력은 다른 인력으로 대체되기만 하면 충분하다. - 따라서 이런 경우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지도 개인의 선택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경우 노동력의 소실 가능성에도 신경쓰며 예방과 보건에도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정책을 가지게 된다.

3.1. 협상 영역의 범위를 결정하다

탈상품화를 살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탈상품화 정도에 따라서 복지 혜택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그에 따라 노동자들이 필요한 기본 수요 영역 중 얼마나 '협상 영역'이 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협상 영역'이란 개인재화 / 서비스 공급자와 개별 협상을 해야하는 영역이라 생각하면 된다. 먹을 것부터, 입을 것 뿐만 아니라 주택, 수도, 전기 및 의료 등과 같이 생활에 필요한 기본 수요를 충족시켜주는 영역에 있어서 얼마나 개인이 신경써야 하는 영역을 이야기한다. 만약 국가가 주거 및 직업을 강제로 정해준다면 개인은 주거 및 직업은 특별히 협상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별 불만이 없다면 국가가 정해준 주택과 직업을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집에 수도, 전기와 같은 유틸리티도 모두 국가가 공급해준다면 (공공 부분 형태) 이 영역도 협상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택이나 직업까지 국가가 강제로 정해주는 것은 개인의 인권과 능력을 억압하는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주택은 비교적 자유시장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 / 수요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투기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이는 잠시 보류한다.) 그렇지만 주택을 자신의 경제력에 따라서 원하는 곳과 형태를 결정할 수 없는 국민들에게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주거 공간을 국가가 제공한다면 이는 협상 영역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즉, 협상 영역이란 쉽게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재화 / 서비스 중 개인이 직접 신경써야 하는 영역이라 생각하면 된다. 국가가 최소한 거리로 내몰리지 않도록 주택을 공급하여 (공공 주택)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지고 수도, 전기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인터넷마저도 국가 주도로 공급해주고 실제로 무료로 제공해준다면 이또한 협상 영역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공공주택 HDB

결과적으로 국가가 국민들을 위한 공공 부분 / 서비스를 확대한다면 비교적 국민들이 가지는 협상 영역을 줄어들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교적 탈상품화가 높아져 복지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 개인의 협상 영역은 줄어들고 기본적 생활에 필요한 영역의 대부분은 국가가 해결해주게 된다. 이런 경우 개별 협상에 필요한 개인들의 노력이 줄어들고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줄어들게 된다. 의료 서비스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3.2. 의료 서비스의 범위를 생각하다

미국은 지역뿐만 아니라 병원에 따라서 보험의 차이가 심하다. 자신이 가입한 보험의 종류에 따라서 어떤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 있지만, 어떤 병원에서 치료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물론 보험을 적용받지 않고 지불 할 수 있는 부자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미국의 기본적 의료 서비스의 수가 (a medical charge) 가 기본적으로 높다. 따라서 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은 경우 고위험 출산의 경우 거의 십만달러 (1억원 이상) 가 적용된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보험을 가입했는가에 따라서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범위가 정해지게 된다. 즉, 개인이 가입한 사보험의 종류에 따라서 의료 서비스가 정해지며 이는 미국에서는 의료 서비스는 철저하게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협상 영역'이 된다.

물론 저소득층 (이라고 하기보다는 극빈층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에게 적용되는 연방 차원의 의료 보장 제도 (Medicaid) 가 존재하지만 이또한 재원 문제나 행정적 문제로 극빈층은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지원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직장에 따라서 의료 서비스의 질은 차이가 심하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자유주의 복지 정책을 유지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경우 직장을 통한 보험을 적용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또한 의료비 부담이 증가하거나 노동력 상실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 당하게 되는 경우 한 순간 의료 보험을 적용받지 못해 심각한 경제적 부담을 가지게 되거나 의료 서비스를 중단하게 된다. 또한 지역에 따라서 의료 보험의 질은 큰 차이를 보인다. 직장 중심의 의료 보험과 사보험이 적용하기 어려운 범위의 경우 보다 광범위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지역 단위의 조합주의 보험이 적용되는 것이다. 즉, 개인적 협상 영역을 좀더 확장하여 지역 단위의 협상을 통해서 치료 받을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의 영역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이다. 예를 들어 보스턴 지역의 경우 대학과 연계된 비영리 병원과 지역 병원을 포괄하여 파트너스 (Partners) 시스템을 구축하여 병원간의 의료 정보 뿐만 아니라 지역 단위의 보험까지도 통합적으로 관리하여 지역 주민의 의료 서비스를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하려고 한다.


기본적 복지정책이 탈상품화가 낮은 자유주의 복지 정책을 유지해도 여기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보다 높은 탈상품화 정도를 가지는 복지 정책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이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병원의 공공성을 증가시키고 최소한 비영리화를 보다 확대해 나가야 한다. 영국이나 싱가포르의 경우 모든 국민들은 의료 서비스에 접근성은 높다. 이는 공공 의료 비중이 거의 100%에 가깝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사민주의 복지정책을 가지는 나라들은 의료 서비스는 완전 무상이 아니다. 그러나 의료비에 대한 상한제를 두어 의료비에 의한 경제적 파산을 구조적으로 막고 있다. 그리고 감기와 같은 경증 질환의 경우 기본적 치료비는 높은 편이다. 접근성이 높아 가벼운 질환에도 무조건 병원을 찾아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의료비 구조를 줄여 이를 중증 질환과 만성 질환 환자들에 대한 관리에 더 치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결국 국가가 가지는 공공 보험의 범위가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서 혹은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험의 적용 범위가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서 개인이 얼마나 많은 부분 신경써야 하는가. 즉,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개인이 협상을 해야하는지가 결정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상품화가 늘어날수록 노동자들은 공공 영역보다 사유 영역의 협상이 많아지게 되고 결국 노동자들은 낮은 가처분소득에도 불구하고 사보험을 가입하거나 아예 가입하지 않아 의료 서비스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탈상품화가 높은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보험 시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특히 의료 부분에서) 공공 보험만으로도 충분하게 된다.


대한민국을 생각해보면 공공 보험 (국민건강보험) 이 존재하고 거의 대부분이 비영리 의료법인이라 의료적 영리활동이 제한되지만 10% 미만 (실제로 6%) 의 공공 의료의 현실과 중증, 만성 치료의 장기 치료의 경우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여 개인적 파산을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공공 보험의 기능적 역할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현실적 증거가 된다. 결국 이러한 불안 요소는 사보험의 기형적 증가가 일어났다. 공공의료비의 비중을 살펴보기 위해 OECD 자료를 통해 살펴보면

국민의 의료 비용 지출은 2000년부터 2009년까지 OECD국가 중에서는 슬로바키아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이 증가했고, 가계 소비지출에서 의료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OECD 34개 국가 중 5번째로 높았다. 또한 2002~2007년까지 5년 동안의 연평균 증가율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국민의료비 증가율은 9.3%로 OECD 평균(3.4%)의 2.7배였다. 민간지출과 의료비 증가율이 높은 이유는 공공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OECD 27개 국가 중 칠레, 미국, 멕시코 다음으로 적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지출 비율은 58.2%로, 칠레 47.4%, 미국 47.7%, 멕시코 48.3% 등에 이어 최하위 수준이었다. OECD 평균인 72.2%에도 크게 못 미쳤다.

즉, 온국민 건강 보험으로 공공 보험이 작동하고 있지만 실제로 공공의료 지출 비율은 60% 를 넘지 않고 약 40% 에 해당하는 비용은 개인의 부담이 되거나 사보험의 영역이 된다는 것이다. 구조적으로 ① 의료의 영리법인을 규제하고 ② 공공 보험을 온 국민에 적용하고 ③ 의료 수가를 제한하지만 실제로 그 기능은 60% 정도 발휘하고 있고 나머지 40% 의 의료비 부담은 고스라니 개인의 경제적 파산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런 위험 가능성은 보험의 좋은 마케팅 자료가 될 것이다.

3.3. 사보험은 공공 보험을 대체할 수 없는가?

사보험 시장이 공공 보험의 역할을 충실히 대신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보험 시장의 공급자가 많다면 경쟁에 의해서 가격이 저렴해지고 이에 따라서 소위 값싸고 질좋은 보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기 위해 두가지로 먼저 접근해 보자. 첫번째는 현재 이런 사보험 시장의 현재를 살펴보는 것이다. 미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4인 가족 기준으로 평균 의료 보험비용은 약 1,3000달러(USD) 정도이다. 대한민국만 살펴보아도 건강 보험 (공공 보험) 비용 이외 의료 관련 사보험 비용 (암보험, 사망보험, 중증 질환 기타 등) 은 중산층 기준으로 월 30~50만원 정도이다. 공공 보험이 존재하지만 공공 보험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추가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지불하는 고정 비용이다. 사민주의 복지 정책에서 공공 보험은 그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대부분이 의료비 부담 상한제를 통해 일정 이상의 의료비를 부담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기본적으로 세금으로 나오지만 소득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고 세율도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복지에 사용되는 세금은 소득의 불평등 및 경제 수준의 균형을 맞추고 의료비에 의한 경제적 파산을 막는 기능을 가지게 된다. 현재의 모습을 보아도 사보험 시장이 증가하면 할수록 개인의 가처분소득은 점점 줄어든다. 특히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의 의료비 부담은 증가하게 된다.


두번째사보험은 결국 '영리 기업'이다. 보험회사의 공공성을 법률적으로 제한하지 않는다면 영리기업은 어떻게든 일단 많은 보험 가입자를 받은다음 보험 가입자들 중 보험 혜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이들에 대한 보험금 지급에 대해서 까다롭게 적용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고 의료 지식이 깊지 않은 일반인을 상대로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을 적용하여 피보험자들이 예상했던 보험금 이하를 지급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즉, 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거대 기업이 개인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일어나고 있고 많은 경우 사보험을 가입해도 경제적 파탄을 맞이하는 경우도 목격할 수 있다. 결국 보험에 가입할 때는 가입자들이 미래를 대비하라며 심한 경우 공포 마케팅을 이용하여 가입을 유치한 후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에는 보험금 지급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법적, 행정적 방법을 이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사보험 시장에서 임의적으로 자체적인 심사기준에 의해 보험금 지급하는 방법이 아닌 국가에서 공인된 보험 사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사보험은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자들의 돈을 뽑아내기 위한 다양한 묘책이 세워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기업인 사보험 회사들이 완벽하게 소비자들을 위한 사업을 해야하지만 그 말은 결국 공공 보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공공 보험을 강화하면 될 것을 왜 사보험이 자선사업을 할 것도 아닌데 공공 보험처럼 행동하라고 하는 것이다.

3.4. 사보험과 의료 영리화의 관계

공공 보험이 그것도 지역 보험이나 조합 보험이 아닌 국가가 관리하는 공공 보험이 존재하는데 이 기능을 어떻게 활성화한다면 사보험의 수요가 증가할리 없을 것이다. 그만큼 공공 보험에 대한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미디어에는 넘처나는 사보험 광고가 공공 보험의 떨어지는 신뢰를 대변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의료 보험의 사보험 시장 (실비보험) 을 허용한 순간 의료 사유화의 첫 걸음은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보험조차도 선택에 따라서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결과가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도가 높아지는 것은 의료 서비스에서 결코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미 의료 관련 사보험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점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진단명의 미묘한 차이에 의해서 전혀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이 가입한 보험의 약관에 따라서 전혀 수혜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사보험의 문제라기 보다는 결국 사보험은 영리 추구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보험이 증가되고 공공 보험의 신뢰가 떨어지는 경우 의료 영리화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두가지 단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 비영리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운영 합법화 ⓑ 의료 법인의 완전 영리화 이다.

ⓐ 비영리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운영 합법화

현재 (2014년 1월) 대한민국에서 논의되는 소위 '의료 민영화' , '의료 영리화' 로 줄여서 불리는 내용의 핵심이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의 시작은 의료 서비스에 들어가는 의료 수가의 원가를 국가가 얼마나 보존해주는가이다. 정확한 수치는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원가에 못 미치는 의료 수가라는 점에는 정부도 동의한다. 즉, 의료 서비스를 시행하면 할수록 적자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발생하는 적자를 줄이기 위해서 (비영리의료기관도 이윤을 생각한다) 환자에게 모든 의료비를 청구할 수 있는 비보험 수술이나 치료를 적용하거나 환자의 편의를 위해 허용되는 장례식과 같은 부대 사업을 통해 그 이익을 충당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적자를 적극적으로 매꿀 수 있도록 지금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관련 사업을 비영리의료법인이 아닌 자회사를 만들어 자회사를 통해 영리사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야기하는 사업이 환자 보호자 등을 위한 숙박사업, 의료 관련 기기 사업 등이 거론되지만 이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자회사로 물리치료 및 대체 치료 (alternative therapy) 및 영양 보충제 등과 같은 사업과 같이 환자들이 직접적으로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사업 영역도 존재한다.

고급호텔과 같은 병실, 부유층을 위한 호화 병원을 통한 이익 극대화는 예상되는 영리병원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업들은 기본적으로 경쟁 구조를 가지기 어렵다. 의료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컨설팅 (상담) 과 의료 치료과 동반된다. 컨설팅이 들어간다는 것은 환자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전문의의 전문적인 지식을 상담받고 이에 따라 치료를 수행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표면적으로 환자들은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상담을 받게 되는 순간, 독점화 구조가 이루어진다. 대부분 환자는 그런 이유로 자신의 주치의사를 바꾸거나 병원을 바꾸는데 큰 부담을 느끼게 되거나 병원 기록의 원할한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국의 경우에는 이러한 부담은 더욱더 커진다. 따라서 환자가 받아야 하는 의료 서비스 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처방에 따를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자회사의 이윤을 위해 자회사의 사업 영역을 의사가 소개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의료법인의 완전 영리화

의료법인이 자회사가 아닌 자체적으로 영리화가 가능하다면 현재 미국 개인 병원 (Private Hospital) 과 완전 동일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병원은 의사에 의해서 환자가 받아야 하는 의료 서비스를 지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병원 차원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보험 서비스를 연계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영리의료 법인이 비영리법인과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의료 서비스의 경우 환자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고 할 것이다. 즉, 생명과 건강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비용이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영리법인은 소위 유명한 명의를 높은 연봉을 제시하며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다.

3.5. 공공 보험만이 해결책인가?

의료 수가만 현실화한다면 괜찮을까? 즉, 아무리 영리화 된다고 해도 국가에서 의료 수가만 현실화 한다고 하여 높인다면 괜찮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일괄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병원의 다양한 치료 방법에 대한 다양한 검증 과정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의사의 판단과 개인적인 신념에 의한 진료가 아니라 임상결과기반 (Clinical Evidence-Based) 의 치료 방법의 공유와 가이드라인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가이드라인도 학회기준 뿐만 아니라 국내의 임상기록을 통한 우리나라 만의 현실적인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는 노력도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즉, 치료에 대한 의사들의 양심을 기본적으로 신뢰해야 하지만 임상 통계에 의해 잘 분석된 치료의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서 이를 의료수가에 반영하여 치료의 결과와 예후가 좋은 치료 방법에 대해서는 높은 수가를 보존해주어 해당 치료 방법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새로운 기술과 수시로 반영되는 기록들을 공유할 수 있는 의료 임상 데이터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 접근도 필요할 것이다. 이를 위해 진료 과목에 따른 임상기록 뿐만 아니라 질환 및 증상에 따른 데이터 통계를 통해서 환자 관점에서 접근된 임상 데이터도 정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의료 서비스도 결국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서비스이기 때문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인의 양심과 직업 윤리 의식도 중요하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HIPAA (Health Insurance Portability and Accountability Act) 라는 이름으로 환자의 권리 및 의사의 책임 한계와 의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떤 양심에 따라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에 대한 법률이 정해져 있고 이는 기본적으로 숙지하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각종 법률적, 윤리적 한계에서 책임이 발생하면 이는 주기적으로 갱신하는 의사 면허에 반영되어 실질적으로 정부 주관의 인력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의료 정보와 데이터에 대한 반영을 위해서 Continuing Medical Education (CME) 를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주정부에서 갱신한 면허 및 운영에 관련된 행정 감시는 연방 정부 차원에서 다시 감시하고 있다.


이처럼 직업적 윤리 의식 및 빠르게 변화하는 임상 여건 및 의료 기술에 대한 습득을 기본으로 하며 검증된 의료 서비스를 중심으로 제공하고 기본적으로 공공 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 기관의 비율이 증가한다면 공공 보험이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공공 의료 비율이 높지 않은 체 공공 보험만 강화된다면 결국 공공 보험의 자본 (공공 자본) 은 결국 비영리의료법인이라고 해도 결국 민간 자본으로 흘러가게 되고 만약 의료 영리화가 된다면 공공 자본이 민간 자본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영리의료기관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비보험 부분의 치료를 임의적으로 확대하여 공공 보험을 상대로 사보험이 우위를 가질 수 있는 전략도 가능해진다.

3.6. 그래도 결국 다시 현실은...

참 어려운 이유는 이 모든 논의는 대부분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생각하기 위해서 이미 의료영리화가 진행된 미국의 예를 통해 살펴보고 미국에서 의료영리화에 의해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 등도 소개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이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된다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환자 (인간) 가 자본을 끌어 모으기 위한 도구가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대부분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그런 인간의 경제적 탐욕의 결과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처럼 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미국보다 더 심각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큰 두가지 부분은 ① 너무도 열악한 공공 의료 비율과 비영리의료기관의 영리자회사 허용시 참여할 수 있는 ② 거대 자본이 정해진 상황이라는 점이다. 즉, 현재의 비영리의료기관이 대부분 수익을 위해 영리자회사를 세우고 자회사 주도의 중소규모의 병원들을 흡수 통합하는 형태까지 허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결국 거대 자본의 M&A (인수합병) 을 통한 실질적인 독과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막을 수 있는 실효적인 법안이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광범위한 영리자회사를 허용한다는 것은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거대 자본의 공격적 경영에 대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공공 보험은 공공 복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보험 시스템 뿐만 아니라 보험 지급 발생을 줄일 수 있고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즉, 아픈 환자들이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는 노령화 시대에 대비하는 고령화 관련 의학 (geriatrics) 에 공공 보험을 자연스럽게 치중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예방의학 (preventive medicine) 이나 산업의학 (occupational medicine) 과 같은 예방하거나 빠른 치료를 통해서 경제적 노동 손실과 의료비 부담에 의한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 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사보험이 집중할 수 없는 공공 보험의 중요 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사보험이 100% 인 국가를 생각한다면 실질적으로 난치병 및 불치병에 대해서 사보험이 보장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국가의 의료 정책의 중심 과제는 공공 보험을 강화하여 국가가 ① 난치병과 불치병에 걸린 국민들에게 다양한 치료 기회를 위한 투자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적자가 나는 사업이라고 해도 이를 위한 기초 연구와 관련 기술을 육성할 수 있는 학계, 산업계의 연계가 가능하도록 정책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 단위의 규모가 아니면 힘들며 민간 기업은 거의 사회적 공헌 수준에서 실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강제도 아니다. 두번째 사보험에게 기대할 수 없는 공공 보험의 기능은 치료와 동시에 ② 예방과 보건 (Public Health) 에 균형있게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방과 보건을 강화하면 자연스럽게 치료에 드는 부담이 줄어들게 할 수 있다. 예방과 보건에 균형있게 투자하여 병에 걸리지 않도록 정책을 세우는 것과 감기와 같은 경증 질환을 가지고 상급병원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경증 질환에 대한 의료비용을 높이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보험의 문제는 결국 병의 종류와 병의 치료 기간 및 다시 회복하는 데 필요한 자원 (의료인, 간병인 및 교육자 모두 포함) 이 얼마나 들어갈지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따라서 질환에 대한 세부적인 분류와 접근을 공공 보험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3.7. 마무리하며...

우리나라의 스팸 전화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가 아마도 보험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보험 가입 권유 전화를 받았을 때 "고객님이 불의의 사고에 의해 돌아가셨을 때 가족들에게..." 라고 말하는 텔레마케터에게 나는 "그럼 제가 죽어야 하는건가요?" 라고 되물은 적이 있었다. 사보험은 근본적으로 예방을 위한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되풀이 되어 아픈 환자들이 생겨 그 환자들이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혹은 죽어가는) 증인이 되어 보험 가입의 강한 두려움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만약 사보험이 고객님들의 완치와 쾌유를 바란다면 치료를 받거나 과거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받아줘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공공 보험조차 일부 항암치료 및 특수치료의 경우 재발의 경우에는 보험 적용이 줄어들거나 보험 적용되는 약이 줄어드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소아당뇨 아이가 부모님이 안계시는데 의료 지식이 없는 할머니에 의해 자라다 결국 생명을 잃은 경우까지 목격했다. 결국 공공 보험은 단순히 치료를 원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예방과 보건을 행정과 조직적으로 연계해서 이를 공공 의료로 확대해서 공공 보험이 공공 의료로 자본이 순환되어 그 효과를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공공 보험과 동시에 예방과 보건에 신경쓰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분류가 있다. 바로 중증 질환과 경증 질환의 분류, 그리고 만성 질환과 급성 질환의 분류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분류는 사보험이 원하는 마케팅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공공 보험의 입장에서 어떻게 예방 및 보건 정책을 통해 중증 환자가 되기 이전에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투자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유는 다르지만 공공 보험이나, 사보험이나 결국 중증 질환 (환자)만성 질환 (환자) 에 대해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공공 보험의 투자는 결국 질환 / 사고에 의해 잃어버린 경제력을 회복시키는 투자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구조적인 기초는 공공 의료 비율을 증가시켜야 한다. 미국조차도 어떻게든 공공 의료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투자를 하고, 비영리병원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서 다양한 제도적인 시도를 접근하는 과정에서 왜 우리나라는 공공 의료 비율의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자회사를 통한 영리화의 단초를 마련해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영리화를 위한 첫 시작이 아니라면 충분히 이를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는 법적 규제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법적 규제조차 이미 영리사업이 추진된다면 FTA 의 국가-투자자 제소 (ISD) 와 래칫조항에 위반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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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보험에 대해서 ─ 노동의 탈상품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