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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23, 2019

작은 시골 학교가 있었다.
겨울철이면 그 학교는
항아리처럼 배가 불룩한 구식 석탄 난로에 불을 지펴
교실 난방을 해결했다.
날마다 한 어린 소년이 맨 먼저 등교해서
교사와 다른 학생들이 오기전에 난로를 지펴
교실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아침
교사와 학생들이 등교해서 보니
학교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불타는 교실안에는
그 어린 소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소년을 밖으로 끌어냈다.

소년은 살아날 가망이 희박해 보였다.
하체 부위가 끔찍한 화상을 입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곧바로 소년을 근처의 시립병원으로 옮겼다.

심한 화상을 입은 채 희미한 의식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어린 소년은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말했다
불길이 소년의 하반신을 온통 망가뜨렸기 때문에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으며
어쩌면 이 상태에선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죽고 싶지 않았다.
꼭 살아나겠다고 소년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무튼 의사에게 큰 놀라움을 선사하며
소년은 죽지 않고 소생했다.

위험한 고비를 일단 넘겼을 때
소년은 또다시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의사는 말했다.
하반신의 신경과 근육들이 화상으로 다 파괴되었기 때문에
소년을 위해선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을 뻔 했으며
이제 하체 부위를 전혀 쓸 수 없으니
평생을 휠체어에서 불구자로 지내야만 한다고.

소년은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었다.
결코 불구자가 되지 않기로….
언젠가는 다시 정상적으로 걸으리라고 소년은 결심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허리 아래쪽에는
운동 신경이 하나도 살아 남아 있지 않았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힘없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소년은 퇴원을 했다.
엄마가 날마다 소년의 다리에 마사지를 해 주었다.
아무 느낌, 아무 감각,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걷고야 말겠다는 소년의 의지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소년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으면
좁은 휠체어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어느 햇빛이 맑은 날 아침
엄마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해 주려고
소년을 휠체어에 태워 앞 마당으로 나갔다.
소년은 엄마가 집 안으로 들어간 틈을 타 휠체어에서 몸을 던져
마당의 잔디밭에 엎드렸다.
그러고는 다리를 잡아끌면서 두 팔의 힘으로
잔디밭을 가로질러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당가에 세워진 흰색 담장까지 기어간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담장의 말뚝을 붙들고 일어섰다.
그런 다음 말뚝에서 말뚝으로 담장을 따라
무감각한 다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꼭 다시 걷겠다는 소년의 강한 의지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년은 날마다 그 일을 반복했다.
마침내는 담장 밑을 따라 잔디밭 위에
하얀 길이 생겨 날 정도였다.
자신의 두 다리에 생명을 불어 넣는 일만큼
중요한것이 소년에게는 없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마사지와
소년의 강한 의지
흔들림없는 결심 덕분에
마침내 소년은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엔 더듬거리며 발을 옮겨 놓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다시 걸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달려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소년은 달리는 것에서 오는 순수한 기쁨때문에
끝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훗날 대학에 들어간 소년은 육상부에 소속되었다.

더 훗날
한때는 살아 날 가망성이 희박했으며
결코 걸을 수 없고
결코 뛰어다닐 희망이 없었던,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이 사람 글렌 커닝햄 박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벌어진 1마일 달리기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학교 육상부원들을 부러워하고, 육상 선수가 되기를 바랬으나
하반신의 화상으로 다리를사용 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던 소년.
그러나 1934년 1마일(1609.3m) 달리기에서 4분 6.7초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게 된 청년,



글렌 커닝햄 (Glenn Cunningham) 박사의 실화

Glenn Cunningham from Wikipedia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에 대해서 - 글렌 커닝햄

Monday, May 20, 2019


조급한 확신 A jumped assurance 


에피소드 하나: 병원 응급실에 아이가 들어왔다. 팔이 부러진 상태로 들어와서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혈관 주사로 진통제를 투여하려고 하니 아이는 갑자기 거부하고 경구용 진통제를 달라고 이야기한다. 아이의 요구에 경구용 진통제 알약을 주었다. 아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말끔하지 못한 모습으로 아이 곁에서 걱정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계속해서 통증을 호소하고 계속 진통제를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몇번 주었지만 상황을 의심한 의사는 아이의 약물검사를 해서 처방한 진통제를 복용했는지 확인한다.

CHICAGO | MED NBC

의사의 예상대로 아이에게서는 처방한 진통제는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몸이 불편하고 깔끔하지 못한 아버지를 의심했고 아이를 이용해서 약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한 진실이 밝혀진다. 아이는 의도적으로 팔을 골절시켰다. 그리고 병원에 와서 진통제를 받고 이를 먹지 않고 숨겨두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사고로 몸이 불편해졌고 당시에는 쉽게 처방받을 수 있었던 옥시코돈을 처방받아 통증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정부 정책이 오남용을 먼저 걱정해서 처방을 제한하게 되고 나서는 제대로 약을 처방받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처방을 받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의료보험을 요구받았고 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아버지는 계속 통증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 모습이 안타가웠던 아이는 스스로의 팔을 골절시켰던 것이다. 알약 몇개를 얻기 위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옆에서 보면서 그 고통을 몇번이라도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약을 얻기 위해서 아이를 이용했다고 생각했던' 의사는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사과를 마땅히 받아야 할 아버지는 의사로 부터 제대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직업적 신념에 따라서 아버지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고 잘 했던 행동이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의심할 수 있고 쉽게 말해 '아니면 말고...' 라고 생각했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알 수 없는 씁쓸한 생각을 들게 한다. 아무튼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깊은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시카고 메드 Chicago Med 시즌 4의 에피소드 21편 Forever Hold Your Peace 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의심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잘못된 진실을 믿고 상대방을 의심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는 노력할 때보다 진실을 알고 나서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진실이 밝혀졌으면 그만이지라고 이야기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보면 의사가 밝혀낸 사실은 '아이는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라는 결과는 알아냈지만 그 사실들이 '자신의 약을 얻기 위해 아이를 이용한다'는 사실까지 말해주지 않지만 많은 편견과 시선으로 이미 그런 결론으로 도약할 때가 많다.

성급한 정의 A jumped justification 


에피소드 둘: 미국의 공립 병원인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의 정신과 의사인 이기 프롬 Iggy Frome 은 평소와 같이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집단 상담 치료를 한다. 치료의 일환으로 아이들이 모여서 치료활동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시의 복지담당 공무원은 환자인 아이 중 하나가 특별히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이를 이기 프롬 박사가 사적인 감정으로 아이를 다루어서 이에 생긴 트라우마가 아닌 것인지 의심하고 이를 조사하도록 요청하게 된다.


이기 프롬 박사의 치료 중 학대 사실을 의심하며 조사하는 과정에서 결국 피해 당사자인 아이에게도 질문을 하게 되지만 아이는 더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결국 이기 프롬 박사에게만 말하겠다고 말했다. 환자의 치료 과정 중 학대 혐의 alleged 를 받은 이기 프롬은 모든 진료를 중단해야 했고 심지어 피해자였던 아이의 요청이라고 해도 모든 치료 과정이 중단된 상태에서는 쉽게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웠지만 이기 프롬은 이 요청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아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가족 구성원의 학대를 받아왔었다는 그리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과가 좋아서 모든 혐의가 없어 다행이지만 만약 아이의 거짓 증언이나 잘못된 정황이 나왔다면 이기 프롬은 바로 의사 면허를 박탈 당했을 것이다.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시즌 1의 에피소드 21 This Is Not the End 에서는 모든 환자들을 사랑으로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이기 프롬은 어떤 아동을 부적절한 행동으로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고 이를 조사받는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서 이기 프롬은 천사에 가까운 정신과 의사였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배운 것은 버리고 환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주려는 환자들에게는 따뜻한 모습의 의사이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보면 말도 안되는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 화가 날 수 있다. 물론 그런 상황을 모르고 이기 프롬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시 공무원에게는 잘못된 내용이 의심된다면 이를 적절하게 조치하고 그 의심을 풀어내는 것이 의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의심은 아주 순간적이다. [인생의 선택에 대해서 ─ 익숙하지 않은 미래란 모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동안 유지해 온 과정을 적용할 때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고, 가장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박자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은 이런 신속함을 요구한다. 만일 행인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당신은 우선 놀랄 것이다. 잠시 후 그를 관찰할 준비가 되고 보니, 그는 이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해 보리라 하고 뒤 쫓아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그래서 우리의 의심은 심사숙고한 결과라기 보다는 순간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일 때가 많다. 충동적이란 뜻은 결국 충분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관찰할 결과라기 보다는 자신의 쌓아온 경험에 근거할 때가 많다.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의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본인이 자주 '노래방'을 가서 다양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의 딸과 함께 딸의 남자친구가 노래방 이야기를 한다면 그 노래방이 가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딸의 남자친구도 쉽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그 의심의 근거는 밝혀진 사실들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Doubt (2008)

이런 이유로 미국의 어떤 주 정부는 내부 비리 혹은 부정 행위를 단속하는 인원들을 계속해서 근속시키지 않도록 한다. 왜냐하면 계속 의심하고 잘못된 형태를 봤던 이들에게는 모든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스스로 정의로운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은 좀더 확신하고 정의롭다 


두가지 에피소드를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수많은 정의로움으로 얼마나 많은 사회의 악인이 사라졌을까 보다는 얼마나 반항하지도 못한 억울한 의인들이 먼저 쉽게 사라졌을까 싶었다. 악인과 의인으로 구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악인에 가까워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잘 사용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잘 피해다니고 그 구조 안에서 잘 생존하지만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이들은 종종 그 사회 안에서의 의심을 더 많이 받고 스스로 방어하기 어려워하는 성격 혹은 스스로 방어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이들이 먼저 사라지게 만들 때가 많다. 뉴암스테르담의 이기 프롬 박사가 그런 모습의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기존의 시스템과 규칙을 어기더라도 환자들의 마음을 먼저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이였고 그렇게 기존의 규칙을 어기는 모습들은 모두 의심을 받기 쉬웠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고 참지 못한 아이를 보며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한 부분이 있다.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에게 다가올 고통마저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을 희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기에 그런 경우 정 반대로 생각해서 아이를 이용하는 아버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부의 약물 남용 opioid crisis 정책에 의해서 제대로 된 진통제도 받지 못하고 참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런 정책이 원망스러워도 그것조차 제대로 어기지도 못하고 참는 시민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CHICAGO | MED Season 4 Episode 21 -  Forever Hold Your Peace

"그동안 어떻게 견디어 오셨나요?"

아버지: "대부분 술이였죠." 

사회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구조처럼 보이지만 악인보다는 의인들이 더 쉽게 지치고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절대 참지 못하는 이들은 불법으로 약을 구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회가 가지는 규칙이 아무리 정의를 외쳐서 악인들의 남용이나 잘못된 부분들을 막으려고 해도 개인의 고통으로 참아내야 하는 이들의 소리도 잘 들어야 한다. 만약 그런 개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생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다면 정의를 강하게 외치고 누군가의 잘못을 확신하는 이들은 선에 가까울까 악에 가까울까 생각해 본다. 그 구별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선한 이들은 자신의 정의감으로 누군가 잘못된 진실로 상처받을 수 없는지 그리고 그 상처로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서 좀 더 신중할 수 있고 좀 덜 확신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종종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세상의 화려한 곳에는 사람의 고통을 찾아가지 않고 타인의 실수마저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화려하게 할 수 있다는 공명심에 빠진 경우를 보게 된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들은 세상의 화려한 곳이 아닌 세상의 고통이 가장 큰 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이다. [[내주변] 지상에 내려온 천사와 악마]

확인될 때까지 확신하지 않는 것 Not sure till confirmed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사법살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권력에 의해서 사적으로 죽였던 많은 역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과 제도가 잘 정비되었다 싶었던 시절에도 사코와 반제티 사건 [Struggle ...]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법살인들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해서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들은 결국 소수의 권력자들을 위해서 사법살인을 했던 비극적인 역사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서는 사법부는 증거와 사실을 중심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정의'에 의해 휩싸인 확신에 의해서 많은 생명을 죽인 사건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것, 소위 팩트 체크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미디어와 인간의 편견들은 수많은 잘못된 정보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모든 것을 다 평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확신에는 어떤 의로움도 어떤 사실도 없다고 믿는 것이 더 필요한 세상이다. 어느 시대보다 증거로 인정이 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재판의 결과가 달라지고 그만큼 증거, 증인 material evidence, witness 의 증거능력을 더 고려하게 되지만 이 증거능력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고 죄지은 사람들은 풀려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악마는 항상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지 모른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이 말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섬세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곳에는 악마가 숨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쉽게 확신해서 섬세한 것을 놓치고 그냥 지나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악마가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이기 프롬 선생님 Dr. Iggy Frome


고민을 남기는 두 편의 드라마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뉴암스테르담 시즌 1 에피소드 22 Luna 에서 이기 프롬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서 마무리한다.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드라마 속의 장면들과 겹치는 이 대사들 속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수많은 섬세한 장면들이 담겨 있다.

Dr. Iggy Frome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직관적이지 않아 보인다. 뇌는 무엇인가 합리적이고 잘 설명되는 것으로 결론내려고 한다. 예를 들어, 때로는 세상은 너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친구의 밝은 웃음이나 막 태어난 아이가 당신의 손가락을 잡으려는 때 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또한 부서지기도 쉽다.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공포와 마주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트라우마를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한다, 심지어 전혀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도. 그런데 왜 세상이 악으로 가득찼다고 말하기 어려워 하는가? 그건 악이란 당신의 두려움이 맞다는 뜻이다. 악이란 쉽게 포기할 것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악으로 가득차 보여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쁜 상황이 되면 그런 믿음은 더욱 더 힘들어 진다. 그때는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 선택해야 하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은 우리의 주변은 그리고 매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선택한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어두워 보이나? 당연하다. 그러나 항상 빛은 존재한다. 더 많은 빛들 말이다. 당신은 그저 눈을 뜨고 바라보면 된다."

─ 이기 프롬 박사

"It does seem counter-intuitive until you realize how the brain works. The brain is just it's just trying to make sense of things. Like, sometimes the world is so beautiful, you know? The laughter of a friend, a newborn baby gripping your finger. Life is also fragile. You blink, it's gone, just like that. Into the face of horror, our minds turn our trauma into a story to make sense of it, even if it doesn't make sense. So why would you mind tell you that the world was evil? Because evil means that your fear is right. Evil means that you can just give up.

But to believe that we all have the capacity to be heroes, no matter how evil the world may seem. That's harder because that means when the worst happens we can choose to stand up, we can choose to help. And that's what, all day, all around us, people do. So is the world dark? Sure. But there's light. There's so much lights. You just have to open your eyes and look."

─ Dr. Iggy Frome



조급한 확신과 성급한 정의의 섬세함

Thursday, April 25, 2019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감각은 본능에 더 가까운 것이고 이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감각적인' 이란 말은 오히려 '본능적인' 뜻으로 사용되기 쉽고 감각은 주어진 능력처럼 생각하게 된다. 시각, 청각과 같이 외부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생리학적인 능력으로 인식될 때가 많다. 그런데 감각이라는 말을 한자로 찾아보면 느낌 감 (感) 과 깨닫다 각 (覺) 으로 외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깨닫는 작용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의 소설 Sense and sensibility 를 그대로 센스앤 센서빌리티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이성과 감성」 (김순영 옮김) 이다. 단순하게 sense 를 감각으로 번역했다면 아마도 소설의 내용을 떠나서 감각이 가지는 본능적인 느낌을 더 주게 되어서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감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공감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여러가지 예를 들 뿐 공감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이 복잡해지고 자신의 영역은 명확해지고 공감의 필요성은 강조하지만 정작 사회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남기 위해서 타인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타인보다는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시 공감이란 어느정도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학습하고 배워야 하는 그리고 노력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막상 공감과 타인을 불쌍하게 혹은 긍휼하게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들은 듣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세상은 정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타인에게 더 엄격한 진실을 요구하고 그 진실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감각, 공감


너무도 비슷한 말들이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감각이라는 말은 sense 로 사용되고 외부의 자극, 현상 등을 감지해서 알아내는 곧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후각,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의 소위 오감을 통해서 외부를 알아내고 그 감지한 (sensing) 정보를 뇌로 보내 뇌에서는 이를 처리하고 정보화하게 된다. 외부에서 전달된 신호 (signal) 를 뇌에서는 정보로 처리를 하고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한다. 모든 생명체가 감각을 가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빨리 알아내서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차적인 이유는 과학의 목적과 동일할 것이다. 즉, 당장 위협의 요소는 아니지만 외부의 다양한 신호를 받아들이고 이를 체계화해서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연구 혹은 학문의 목적이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가 교육의 목적에서 제시했던 낭만의 단계와 정밀화의 단계를 거쳐서 일반화의 단계를 가지게 된다. 이때 낭만의 단계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도 정밀화의 단계에서도 감각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시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 더 구체적으로 태어나면서 아예 가져보지 못한 이들과 가지고 있다고 상실한 이들이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내용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는지 반대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시각적 정보를 얻지 못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가 기술에 대해 했던 다음의 내용처럼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모든 인간 기술은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인간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가지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통해서 빠르게 신호를 받아들여 정보를 만들어내고 싶은 인간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기술에 대한 성격을 더욱 정확하게 해준다. 안경이나 보청기 뿐만 아니라 현미경 망원경까지 인간이 가지는 감각을 확장해주고 일반적인 인간 능력으로는 얻어내기 힘든 영역 domains 까지도 정보를 얻어내려고 하는 인간 감각의 연장 혹은 확장이다. 감각은 본능에 가깝기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더 가까운 것이고 학문의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감각하려고 하는 과정은 인간의 가장 활동적인 연구 내용이기 때문이다. 감각이란 상당히 능동적인 활동이다. 외부의 자극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협적인 신호라고 해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무관심하다면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감각이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세포가 에너지를 소모해서 세포 안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가지고 오는 능동수송 active transport 에 더 가깝다.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면 공감을 영어로 무엇이라 표현하는지 부터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영어로 sympathy 와 empathy 가 있고 이 둘의 차이는 sympathy 는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해석하고 empathy 는 '공감하다' 이고 마치 sympathy 보다는 empathy 를 가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의사였다가 한때는 대선주자였던 누군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리고 마치 두가지 중 empathy 가 더 우위가 되어버렸고 하나의 편견처럼 되어버렸지만 sympathy 란 상대방의 상황 condition 이나 환경 circumstance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I am so sorry for your loss" 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sympathy 의 예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감한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때리고 나쁜 아버지였고 최근까지도 상대방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잘 안다고 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에 공감한다고 "이제 속시원하겠네" 라고 말한다면 괜찮을까 생각해 보자. 그래서 sympathy 를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골라 해석하지 않고 위로하다 연민을 느끼다라고 충분히 번역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반대로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크게 공감하는 능력이 만드는 현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납치한 이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현상을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 Stockholm syndrome 이 있다. 사회적인 법률을 떠나 자신을 납치한 이를 이해하고 크게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다면 단순히 동정과 공감으로 구별해서 empathy 의 능력을 강조한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지는 인질은 공감 능력의 성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인 현상이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라고 하는 공감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에 대한 단상


시대 (역사) 와 사회 (문화) 를 떠나서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이 있을까 생각한다. 즉, 문명이 없던 원시 인류에게 죄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궁금한 것이다. 생존이 목적이였던 그 때에도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같이 수렵을 하는 동료를 먹으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생명체는 자신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개체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심지어는 가끔 영장류에서도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 같은 개체 사이에서도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잡아먹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없다. 단순하게 유물론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단백질과 지방 등으로 이루어진 아주 괜찮은 영양 공급원이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 고기를 먹는 경우는 극도의 불쾌함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공감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처음부터 인류는 식인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존재하면서 인식하고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문화인류학을 통해 살펴보면 식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과정이기 전에 하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이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파푸아뉴기아의 포어족은 장례 의식 중에 죽은 가족의 시체를 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이의 영혼과 같은 개념을 통해서 죽었지만 시체를 나누어 먹어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은 이의 시체를 먹는 인육 섭취의 과정은 불쾌한 과정이 아닌 당연히 마무리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영양학 혹은 감염의학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식인 풍습은 상당히 나쁜 것이다. 우선 시체에서만 발생하는 세균에 의해서 감염될 가능성도 높고 시체의 보관 상태를 고려해도 인육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이 포어족의 식인 풍습은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했다. 쿠루병이라고 운동장애를 시작으로 전신에 걸친 신경학적 마비 증상이 높은 비율로 발생하는데 현재는 감염성 높은 뇌조직을 섭취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염성 높은 단백질을 프라이온 Prion 이라 부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서 한참 논란이 일었던 광우병 - 소해면상뇌증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과 사람에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CJD) 등의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동종 혹은 유전적 유사성이 높은 동물들의 영양학적 섭취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백질은 기본적으로 모두 영양학적으로 모두 분해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다시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지고 그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설계도가 유전자인데 이미 만들지도 않은 재료 중 완성품이 있을 때 어떤 질환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다시 넘어와서 식인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보아도 이제는 식인이 인간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 모두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문화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관련된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정도의 예외는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In the Heart of the Sea (2015) 나 얼라이브 Alive (1993) 과 같은 예가 있다. 그리고 현재도 국제법상으로는 식인은 중죄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죄를 묻지 않기도 한다. 살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미국과 같이 광범위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국가(주)에서는 상대방을 죽이고도 기소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기소한다고 해도 실형을 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때로는 살인에 의한 희생자보다 정당방위에 의한 희생자가 더 숫자가 많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정당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 정당방위는 암살을 하고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이야기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정당방위의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여 때로는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남편이 막은 강도가 죽어도 남편을 형사처벌을 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정당방위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범위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문화적인 가치보다도 오히려 법률적인 적용 내용이 더욱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느정도 정당방위에 의해서 행동해도 되는지는 형법이 정하는 범위가 어느정도인지가 중요하지 의도나 과정은 참고가 될 뿐이다. 그래서 정당방위가 상당히 넓게 인정되는 미국의 경우 총기 범죄가 많은 곳에서는 총기로 오인되는 물건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정당방위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가지는 죄책감이나 도덕적 감정은 나중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지는 감수성을 생각하게 된다. 감수성이란 영어로 sensibility 라고 해석하지만 이 느낌은 얼마나 감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마치 볼 수 있는가? 들을 수 있는가의 sense + ability 가 아닌가 싶어진다. 그래서 감수성이란 마치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가지고 있는 능력처럼 해석되기 쉽지만 식인 혹은 살인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봐도 모든 식인이나 살인조차도 죄를 묻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오히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죄인지 아닌지보다 인간의 행동 / 말이 가지는 사회적 감수성에 비추어 어느정도 용납이 가능한지 물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결국 그 죄에 대해서 벌을 묻는 주체가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의 정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종 감수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개인의 능력 혹은 개인이 가져야 하는 덕목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회의 결과물인 경우가 더 많다.


사회적 감도


핸드폰을 쓰면서 감도가 떨어져 신호가 잘 잡혀 혹은 신호가 좋다 라는 표현을 할 때 기술적으로 자주 쓰는 단어가 감도 sensitivity 이다. 감도가 좋으면 외부의 작은 신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서 이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청각이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외부의 소리 자극에 더 반응하기 쉽다. 반대로 그렇게 감도가 높은 이들은 그만큼 외부의 자극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감도는 양면적인 측면이다. 감도를 높여서 감각을 하면 많은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어 정보를 높일 수 있지만 쏟아지는 정보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면 일상이 정보의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화재 경보기의 감도가 높아 자주 잘못된 경보를 울리게 되면 화재 경보기를 꺼놓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즉, 감도도 중요하지만 그 감각된 정보를 어떻게 잘 처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처리하는 정보처리 과정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감도 social sensitivity 를 생각해보아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요즘에는 자주 거론되는 성감수성을 생각해보자. 성감수성이 낮았던 과거에는 성범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냐 혹은 합의를 보아서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성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조사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고문이 수사의 한 방법이라고 자랑하던 공권력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도 아니다. 아무리 강도가 높아도 성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감수성은 낮았을 것이고 그만큼 높은 성범죄의 피해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 커녕 가해자들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가해자들이 그렇게 죄의식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에게 돌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감도가 낮기 때문에 즉, 성범죄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진 화재 경보기때문에 화재가 일어나도 대피하지 못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보는 것처럼 그 사회의 사회적 감수성이 없다면 결국 그 사회가 화재처럼 큰 충격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게 된다.

결국 사회적 감수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총체적인 문제가 터져 상당수의 피해자가 생기기 전까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의 낮은 반응은 의외로 우리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무슨 일 있겠어?", "그게 뭐 어때서?" 혹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니야?" 와 같은 반응들은 우리의 사회적 감수성을 낮추는 사회적 인식에서 나오는 표현들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각 그리고 새로운 감수성


인간에게는 오감(五感)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오감은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이고 새로운 기술에 따라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 SNS 을 잘하는 것도 하나의 감각이 될 수 있고 인터넷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아도 잘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유용할 때가 많고 잘 사용하지 않는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어내는 것만을 생각해도 기술을 잘 이용하는 것도 인간의 새로운 감각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리즈에 나오는 사루 Saru 와 같이 칼피언족은 자신의 대량살육을 감지할 수 있는 후두부에 있던 위험감지신경 (threat ganglia) 과 같이 다양한 종족들이 기술에 따라서 새로운 감각기관을 만들어 내는 세상같다. 그래서 아직 기술이 잘 적용되지 않거나 초기 도입 상태라면 그 기술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이들이 적고 당연하게 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감각할 수 있는 감수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지털 저작권이나 개인정보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소위 디지털 감수성은 기술의 속도를 절대 따라갈 수 없고 예전에는 대기업조차도 개인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강조하면서도 그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하고 악용되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서버에 저장하고 있던 암호화되지 않은 개인정보들이 유출되면 결국 그 유출된 개인정보에 의해서 새로운 피해자들이 생기게 된다. 그때는 그리고 여전히 이런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이나 비밀번호나 개인정보는 개인이 관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범죄에 의해서 피해를 보아도 결국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당연하 사회적 감수성이였다. 그런 시절에는 개인정보를 적극적으로 유출시켜 팔거나 악용하는 것이 그리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낮은 디지털 감수성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거나 심지어 타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비밀번호 관리를 하지 않는 (2차 인증이나 비밀번호 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보안 감수성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범죄에 쉽게 이용될 수 있는 문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쉽게 알려준 특정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통해 남자친구는 다른 서비스의 계정에 접속하고 이메일이나 대화내용 그리고 중요한 개인정보를 얻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비밀번호 공유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과 알려준 비밀번호인데 다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으로 결국 예상할 수 없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자신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목적없이 공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개인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인공지능 시대 개인정보란 무엇인가?] 에서 개인정보를 두가지로 구별했다. 우선 바로 알 수 있는 개인정보인 '본연적 개인정보' material privacy 이라 설명했고 바로 개인정보를 알 수 없지만 유추해서 알아낼 수 있는 근거를 포함하는 '가공된 개인정보' manufactured privacy 으로 구별했다.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겠지만 아파트단지 사진이나 주변의 간판 등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개인정보이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올린 아이(들) 사진을 올릴 수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는 납치범의 좋은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 메신저나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성범죄 등을 대화하고 공유하는 이들도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성범죄에 대한 낮은 감수성이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닫힌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은 더욱 그렇다. 낮은 성감수성을 가지고 인격의 수준을 의심할 수 있는 이들의 대화 내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감수성이 그정도인데 조금 닫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감수성의 발명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은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규칙을 통해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다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결국 법률에 의해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률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서 행동은 제한된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잘 인지한다면 그런 행동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 혹은 그런 법률이 있어도 나는 피해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법률은 어떠한 장벽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적 감수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가지는 감수성이 낮게 된다. 종종 볼 수 있는 기득권자들의 갑질 논란도 결국 자신이 법률적 테두리를 벗어나 즉 사회적 감수성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감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감수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법률 혹은 사회가 가지는 규법과 동일하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결국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든다. 갑질을 해도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권력이 가지는 그 불공평함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실 그 갑질의 피해자는 항상 존재한다. 누군가는 힘들고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법률과 규칙은 누군가 불편은 받을 수 있지만 최소한 그 피해로 고통받는 이는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만든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고통마저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법률과 규칙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만들 때 불필요하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머리로 만든 법률은 결국 인간을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살게 만든다. 그래서 법률은 오히려 인간의 고통에 관심가져야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한국에서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은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이 많다. 주사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고 급식시간은 쉽게 같이 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겉으로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데 소아 당뇨라는 말만 듣고는 설탕을 억지로 먹이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들의 그 잔인성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이라 생각하기에는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이 들고 주변에서 학습했다고 하면 그걸 학습하게 한 사회가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결국 학습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같은 소아 당뇨 아이들이지만 미국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에서 대하는 태도를 보고 나서였다. 주변 아이들도 소아 당뇨 아이들이 그저 눈이 안 좋아 안경쓰는 것처럼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필요하면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병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잘 인식하고 같이 어울리고 필요하다면 좀 더 배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같은 질환이지만 나라에 따라 인식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 인간 본연의 본성이 아닌 사회에 어떤 감수성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제시한 감수성은 결국 사회가 가지는 예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예의란 결국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주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이들은 예의없는 어른들에게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단거 많이 먹었지?" "도대체 몸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그런 병에 걸려?" 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특히 어른들 그리고 그 어른들에서도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듣는다고 한다. 예의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란 나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얼마나 배웠는지의 문제이다. 그래서 단거 많이 먹어 소아 당뇨 걸린 것 아니냐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함으로 타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는지 모르는 무지와 무례일 뿐이다. 아직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만들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그런 질문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는 상처를 가지게 된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다. 복학했기 때문에 나이 한살 어린 친구들과 공부해야 했고 모두 키 순서대로 번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난 마지막 번호를 받았다. 키도 작은데 항암치료로 살은 찌고 머리카락은 거의 없는 소위 볼품없는 모습이였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국어 시간이였다. 선생님은 질문을 했고 내 번호에 내가 대답을 하니 질문은 멈추고 "이반은 몸무게 순으로 번호 매겼어?" 라고 뜬금없이 말했다. 반 전체는 그 농담에 모두 웃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서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웃자고 한 농담이 나에게는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타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선택하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그것도 항암치료로 겨우 이겨낸 그 순간에 받아들이기에는 날카로운 상처였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 악몽에 그 국어 선생님이 나올 때가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감수성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흑인이라 차별하거나 성소수자여서 싫다고 생각하고 말할 때 그 말이 인간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성소수자니깐 싫다는 이유로 혐오를 하고 차별을 한다면 결국 성소수자는 죽어도 된다는 끔찍한 역감수성 negative sensibility 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부터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역사와 의학으로 살펴보아도 그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으로 차별하는 것은 예의없는 행동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수성이란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예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예의를 사회적으로 합의한 것이 규칙이고 법률이 되어야 한다.


왜 인간은 상처주는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주는 상처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든 원칙이 있다. 결정할 수 없는 내용과 결정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별하고 결정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유를 대어 상대방에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앞서 말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불쾌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 내용으로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그 이유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혈액형을 가지고 B형이니깐 어느 지방 출신이니깐 심지어는 남자이기 때문에 ... 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편견으로 다음 논리를 이어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상처준다.

누군가 좋은 감정으로 만나려 하는데 남자 여자 나이차이가 많았다. 좋은 만남을 시작할 때 여자 부모님들은 남자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결혼 상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 많을 수 있지만 우선은 나이가 많은 것부터 신경쓰이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나이 많은 것으로 이어진 걱정은 바로 '결혼한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호적등본을 요구했다. 물론 그러한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의 행정 시스템에는 '혼인관계증명서'가 존재했다. 나이는 어떻게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나이로 인해서 결혼한 적이 없는지 묻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한적은 없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듣는 이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질문을 누군가 자신의 딸에게 했다면 그 기분이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질문들이 상대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던진 질문인지 고민은 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이성적인 질문보다는 두려움에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질문을 꺼내고 그렇게 꺼낸 것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런 질문들은 사회적 감수성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일종의 갑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례한 질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근본적으로 상처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미 결혼한적 없는지 그리고 동거는 한적 없는지 결국 내 딸을 만나기 전에 어떤 이를 만나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은 아니냐는 질문으로 들릴 뿐이고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이 나쁜 인간이지 않은 것을 증명하라는 폭력일 뿐이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가볍게 한 말 무겁게 한 말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지금까지 적어온 감수성을 적용하면 감수성이 낮은 말과 감수성이 높은 말로 대체해도 같을 것이다. 결국 감수성이란 사회가 만든 규칙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에 대한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 배려가 얼마나 훈련되고 익숙해졌는가를 뜻할 것이다. 화상입은 아이에게 "너 이게 뭐야?" 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화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뜨거운 것을 다룰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이고 소아 당뇨 아이들에게 "단 것 많이 먹어서 그래?" "몸을 어떻게 관리해서 그래"라는 심판자같은 말은 차라리 하지 않고 입닥치고 있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인권 감수성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훈련하고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이에 비추어 해야하는 말인지 아닌지 한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감수성이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일 것이다. 소위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경찰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의 편의성을 위해 조사받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심지어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인권 감수성이 낮은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란 인간이 덜 상처받고 덜 불편할 수 있는 반대로 공권력을 가지는 조사기관은 조금 더 불편하고 까다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결혼을 증명하라는 것은 두려움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라면 공권력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욕심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일 것이다. 결국 감수성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심 (fear and greed) 으로 낮아질 때가 많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인권 감수성을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sensitization of human right 혹은 아예 training 이라는 더 명확한 설명일 것이다. 즉,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란 하나의 능력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생활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항상 훈련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내용들이 변화한다면 당연히 그 변화에 따라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란 변화한 세상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달라진 사회적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해야하는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나 위치 등으로 많은 상처를 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육아는 여자의 몫이고 경제적인 활동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지난 시절의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일 수 있지만 인권 감수성에 비추어 보면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안에서의 기능적 역할을 얼마나 강조해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집단 혹은 타인에 대한 뒷담화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대놓고 상대방에게 예의없는 상황보다는 일반화해서 만드는 편견 예를 들어 '중국사람들은 원래 그래' 혹은 '그 지방 사람들은 ...' 과 같이 편견들을 많이 듣게 된다. 그리고 사람 들 앞에서는 예의를 중시하지만 뒤돌아서 상대방이 없을 때 함부로 평가하거나 뒷담화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권 감수성은 쉽게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밝은 곳에서보다 어두운 곳에서 더 잘 보이게 된다. 종종 자신의 SNS 계정에 자신의 연인 사진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상대방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조금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초상권 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와 만나는 하나의 소유물 혹은 나는 이런 사람과 만나고 있어와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악세사리처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개인을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행복은 커녕 인권조차도 쉽게 훼손할 때가 있다. 특정 사이트 안에서는 자신의 연인이 일하는 곳을 공개하고 자신과의 은밀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인권 감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단체 대화방에서 여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을 자랑하고 그런 동영상을 올리는 행동은 결국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조차도 도구일 뿐이라는 기대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아주 간단하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평화로울지 몰라도 오만과 편견으로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결국 경쟁에 유리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런 사회의 목적은 아주 확실하다. 바로 생존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에는 관심가지지 않고 누군가의 아픔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잘 생존하다가 갑자기 빠진 불행 속에서는 그 누구의 공감도 없이 스스로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강한 진통제를 사용하면 통증이 없으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강한 진통제를 먹으면 날카로운 물건에 손이 상처가 깊게 나고 피가 심하게 흘러도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통증이 사라지면 좋겠다. 단 하나도 안 아픈상태였으면 좋겠고 그런 상태를 위해 참지 말고 진통제를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몸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아픈지 빠르게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불편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우리 몸의 반응들 중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많다. 염증이 생기면 아프지만 염증이 생긴 부위를 통해 어디가 문제인지 빠르게 알 수 있고 염증이 만들어진 부위에 더 집중해서 더 빨리 치료할 기회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통증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사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오만과 편견에 쌓여 많은 것들이 당연한 세상에서 조금은 아닐 수 있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시작은 결국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의 고통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감지한다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문학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생에서의 삶 이후 자신의 행동들에 따라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해야한다는 교훈을 떠나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안에서 만나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단테가 지옥을 들어가는 곳 앞에서 마주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나를 통해 슬픔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 단테, 신곡 3장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THROUGH ME THE WAY TO THE CITY OF WOE,
THROUGH ME THE WAY TO ETERNAL PAIN,
THROUGH ME THE WAY AMONG THE LOST.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슬픔의 도시는 città dolente 으로 슬픔이란 뜻도 있지만 후회 혹은 상처만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영원한 고통은 회개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고통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란 말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이들의 세상이다. 전체적으로 지옥은 단절 그리고 무관심 무엇보다 함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들이다. 아마도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처럼 관계에서 서로 상처만 남고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서로의 존재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감수성 ─ 인간의 사소한 상처에 대해서

Wednesday, August 8, 2018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게 했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짐, 가족의 짐, 직장의 짐, 이웃과의 짐, 가난의 짐, 몸이 아픈짐,
슬픈 이별의 짐들이 내 삶을 감당하는 힘이 되어 오늘도 최선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내등에 짐

Sunday, July 5, 2015

episode 1.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모두 지역의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밖에서는 항상 인자하고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남편은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폭력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습관이 되고 심지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얼굴과 같이 노출되는 부위는 때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아내는 늦은 나이였지만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선택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편의 가정 폭력을 잘 알고 있던 대학생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러나 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이혼하면 제가 시집을 좋은데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주세요." 


episode 2.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는 가정처럼 보였지만 남편은 결혼 이전부터 만나던 여인을 결혼 이후에도 만나며 아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외도를 계속 이어갔다. 가정 폭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가정에 관심을 쓰지 않고 단지 돈 벌어오는데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는 마음먹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아들과 둘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생 아들에게 아버지와 이혼했으면 싶다고 말했고 아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제가 학교에서 왕따당해요. 제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바라시는거예요?"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믿기 힘든 실화를 들었지만 아주 짧게 요약해서 소개해보았다. 특정인물이 관련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이야기의 구조와 등장인물을 각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혼에 대한 딸과 아들의 태도와 느낌은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엄마의 선택에 딸과 아들은 '당신의 그 선택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망칠 수 있으니 하지 마세요.' 와 다를 것 없는 그 말이 너무도 무섭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딸과 아들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한 단어는 바로 '괴물'이었다.

괴물이 사는 세상 

괴물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협오스럽고 보자 마자 이질적인 느낌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기 힘든 대상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괴물 (2006) 을 보면 그 흉찍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격성 때문에 인간은 무서워하고 괴물이 죽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영화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 아니라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나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협오와 두려움으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인간과 괴물은 대결의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공격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괴물은 인간보다 생물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괴물에 의해 쉽게 죽는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없고 나약하지만 단지 겉모습 때문에 인간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쫓기며 사는 괴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지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영화가 슈렉 (Shrek, 2001) 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슈렉도 상당히 인간적 형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이 존재하지만 괴물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수 social majority 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 소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 외롭게 살아가도 인간의 폭력과 공포로 인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괴물은 사회의 산물 product 이다. 영화 괴물은 인간이 버린 유해 물질에 의해서 한강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괴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에 의해 버림받지만 사실 그 사회의 잘못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쩌면 괴물을 설명하는 아주 짧고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우리는 괴물이라 부를까? 

개인적으로 앞서 소개한 예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몇명 소수의 이야기라고 놀라고 넘어가기 보다는 내가 듣지 못한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런 실화가 얼마나 평범한 것은 아닌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소에서 언급되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이 생각난다.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아무렇지 않고 평범할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대상이 어쩌면 악한 본성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대상일지 모른다는 그 잔잔한 공포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평범한 모습인데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가끔 이런 순간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글쓰기 방법이 하나 있다. 현상을 듣고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괴물' 가장 먼저 생각난 단어였다. 그리고 내가 왜라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생각한 그 단어의 어원 word origin 을 찾아보는 것이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괴물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영어로 괴물은 monster 이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monstum , monere 로 각각 뜻은 portent , warn 이란 뜻이다. 즉, portent 는 징후 전조이고 warn 은 경고(하다) 이다. 즉, 괴물 monster 는 단순히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 혹은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단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괴물은 많은 경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혹은 스스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해서 자신을 만든 그 사회와 대결하며 살아야 한다. 괴물의 어원이 뜻밖에 '경고'란 뜻은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괴물이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고 있고 그 경고는 사회가 그 경고를 방치하면 다음 괴물이 될 수 있는 희생자는 바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만든 괴물에 대해서...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딸과 아들은 엄마의 인생, 엄마의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스웨덴에서 만는 가정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범하게 자식들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남편이 갑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 sexual identity 가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임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은 본인의 결정에 따라 엄마와 같이 살거나 두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엄마에게 나머지 큰딸과 큰 아들은 두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데 개인적으로 심한 혼란감과 많은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혼란감이야 익숙하지 않은 동성애에 대한 느낌이었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은 당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저의 싫음때문에 포기하지 않기 바랬다.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랬다." 

자신의 '더 좋은' 혼인을 위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더 좋은' 학교 생활을 위해 어머니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행복이 더 우선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혼인과 학교를 위해서 어머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망치는 것도 불행한데 이 경우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불행을 보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렵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행복한 삶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 그 대상들은 정말 본인의 행복을 정말 실현해줄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식들 (욕 아님...) 을 괴물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불행마저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의 삶, 행복, 생명마저도 파괴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화들을 들으면서 느낀 그 소름끼치는 느낌들은 괴물, monster 란 단어가 가지는 라틴어 어원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고를 경고로 느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와 같이 순응하며 살게 된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다음 사람은 당신의 자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냥 순응하며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경쟁만이 강요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자신의 욕망,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은 희생되어도 되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고민없이 사는 괴물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먼저 딸과 아들이 욕망했던 대상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학교 ... 그리고 결혼은 '좋은데 시집' 가는 것, '왕따 당하지' 않는 것 둘 모두 조건의 문제였다. 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상 (결혼, 학교) 인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 (더 좋은, 왕땅 당하지 않는) 이었다. 조건의 속성 property 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현은 조건이었지만 항상 사회적으로 더 좋은... 덜 좋은... 때로는 가장 좋은... 과 같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벼운 사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인생의 경로는 대학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경쟁의 구조 속에서 대학이라는 대상과 '더 좋은'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그 욕망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기능만 할 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로움을 주는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데 별 관심이 없다. 경쟁만이 강요될 뿐이다. 더 좋은 경로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이로움을 줄지 온갖 해악과 더러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토록 수많은 돈과 자원을 쏟아가며 괴물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님의 [ 공부는 힘이 세다 ] 를 꼭 읽기를 권한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국립묘지에 조성된 '정의의 상' 공부를 잘하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했다. 그때 가장 분개하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학생이였다. 지금의 경쟁 사회 속에서 가능할까 의문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잘 선발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발전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은 거의 반대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정한 과정보다 유리한 조건만 생각하고 같이 걸어가는 동료보다는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경쟁자만 생각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 casualty of causality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지 느끼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멍청함이다. 흔히 인간은 지금의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지금의 원인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쉽게 확신한다.

어머니가 이혼하면 딸은 더 좋은 결혼을 하지 못할것이라 믿고 있고 아들은 학교 생활에서 왕따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서울대를 갈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인성을 가질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직장)을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욕망의 사슬에는 건강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한순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정의 목표들 중에는 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용은 없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한 내용들만 존재한다.


특정 학원을 다녀야 시험 성적이 오른다 와 같은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보기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특정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의 공포와 미래의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때 과거의 그것때문에... 라는 결과론적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 않으면 .. 를 얻을 수 없다 와 같은 인과관계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란 측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원인때문에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특정 결과는 특정 원인때문이야 라는 인과관계의 희생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수용을 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원인에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그럴 수 있고 휴식시간동안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알았던 사실이 시험에 나올수도 있고 다행히 자신이 공부한 내용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시기에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고 학원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인때문이고 원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일들은 결코 우리고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고 때로는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주변 사람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세상이나 괴물은 존재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욱 더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예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떠나서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관계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주요 원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치적으로 제외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런거고 그런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럴때 대답하기 위해 만든 좀비이론 zombie theory 이 있다. 영화에서 좀비는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그 감염 증가 속도는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착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믿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일부 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라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어원이 알려주듯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좀비가 조금 보였을 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비가 세상의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점이다.


여기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episode 1.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벌고 다른 여인과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다.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키우는데 식모랑 운전기사는 필요하잖아. 근데 이혼하면 더 돈들잖아 그냥 지금이 더 싸게 들어... 어느날 아내를 무시하며 식모 취급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집에서 나가세요. 더 많이 배운 아빠에게서는 더이상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없지만 덜 배운 엄마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끼는 방법도 계속 배울 수 있으니깐요." 

episode 2. 남편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직장 생활 때문에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에서 다른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만났다. 남편은 자신이 바람피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게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여인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아내가 용서하고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 말한다. 오랜 결정 끝에 이혼을 결정하고 큰딸에게 말했다.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큰 딸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끊임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해도 끊임없이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괴물이라는 경고에 대해서...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사회의 잘못된 문제가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물이 될 수 있을까 계산하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혹시 나 스스로도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두개의 이야기를 더 소개했다. 그러나 글의 처음에 소개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들과 딸이 있다. 이 둘도 부모의 이혼때문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더 좋은' 이라는 조건의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덜 좋은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이 배운 공부를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다. 인간은 왜 사회를 만들었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같이 모여 불편하기도 많고 짜증나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이 사회는 왜 만들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

[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클라우드 서비스 ] 에서 가치에 대한 정의 definition 를 설명했다.

"가치"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연민을 통해 구현되는 이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한 이유는 어떤 일을 맡아 해야할때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만들고 이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연민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도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경쟁사회에서는 오직 나뿐이다. 타인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같이 협업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잠시 같이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이런데 어떻게 타인을 위한 이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연구소에서는 많은 특허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 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전차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명을 특허로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누었던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 디젤 기관) 와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들은 자신의 재능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환경, 사회의 덕이라 믿고 이로움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시 사회 구성원에게 돌려준 것이다. 조너스 소크는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이죠. 특허라고 할 것이 있나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요?' 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길가의 들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되나 싶다.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고 그 무엇이 좋은 대학가는데 얼마나 필요한지가 아니라 그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소개시켜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숨겨진 괴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공통적으로 설정된 남편들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남편으로 일관되었지만 부모이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쩌면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과관계의 커다란 희생자 즉,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된 네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통해서 연민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다.

괴물이 치유받는 사회를 꿈꾸다... 

우연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 지역을 지나다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난 여행가는구나 싶어 보기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재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책가방도 부족해서 캐리어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심하게 넘어가면 상관없는 이들의 삶이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SBS스페셜, 부모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중 한장면

무엇이 문제이다 속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교육의 문제일까 싶어 교육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면 되지 않을까 싶어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에서 제시한 교육의 목적에 맞춰 교육을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다양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고 배워야 하는 것, 공부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인간다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서 무엇이 '더 좋은' 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반 학우의 노트를 훔치기도 하고 그렇게 훔쳤을 때 학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괴물은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무감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본다.

젓먹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도 엄마는 먹이고 싶을 때 젓을 물릴 것이고,
누군가 쓰려저 죽어가도 내가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지구 반대편 아이들이 기아로 힘들어 해도 더 맛있는 맛집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 놀림과 오해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내 외모에 더 신경 쓰일 것이다. 

괴물에게는 엄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는 자식들이 느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온 좀비와 무엇이 다를까? 영화에서는 좀비는 좀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 편에서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많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괴물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좀 더 위안이 된다...) 자신에 감정에 솔찍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때로는 연민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감도 가지고 오랜동안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상처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Tuesday, June 30, 2015

인간의 삶에서 다툼 quarrel, argument, fight 이 없이 살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아주 중립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조차 다르게 된다. 어떤 하나라도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영역이 존재하면 그래도 마음이 맞는다 생각이 비슷하다 말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 사이의 다툼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툼이 어쩔 수 없다면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묘안의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는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갈등 해결은 결국 누구와 누구의 다툼인가 어떤 상황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다툼의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 성격 등 내부적인 요소에 따라서 복잡한 결과를 만들어 낼수 밖에 없다. 모든 다툼의 과정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몇가지를 통해 그 과정을 생각해 보고 싶다.

다툼의 시작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라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사소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 중 자신의 시선에서 알수는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지만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은 남편의 행동이 기분 나빠서 아내는 곧 신경질 낸다. 물론 상대방이 잘못을 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다툼의 시작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어떤 부분이 내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에 시작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부분의 다툼은 냉정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 이후 감정의 발전 단계는 조금 이상하게 연결된다. 감정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의 생각과 말과 행동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기 뚜껑을 내리라고 말했잖아' 와 같이 약속혹은 서로간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계약의 위반을 통해 잘못을 설명하거나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맘에 안드는 자식을 보면서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게임만 하면 어떻게 해!' 와 같이 신분이나 위치에서의 당위적으로 해야할 본분을 행하지 못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아무리 시작이 감정적이라고 해도 그 이후 진행은 대부분 도덕적 당위, 윤리적 책임을 포함하여 불성실, 불이행 등과 같이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내는 상당히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누구의 탓이어야 하는가

이제 다툼이라는 사소한 표현을 떠나 조금 더 큰 범위의 '갈등'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 다툼도 갈등의 한 부분이고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가 다툼과 같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불이 붙기 때문이다. 넓은 범위에서 결국 인간의 사화 활동은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하는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의 진행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결국 갈등이 있다는 것은 같은 대상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그 다른 시선때문에 지금 다툼이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는 남편은 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항상 잘못된 습관과 자신 (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실수한 부분을 너그럽지 못하게 받아주지 않고 따지는 것이고 때로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생각까지도 해서 더 갈등은 깊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이미 갈등의 시작에서 누구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갈등은 깊어지기 어렵다. 결국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 자신의 탓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탓이 더 크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가끔은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비난을 그대로 표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갈등은 단지 물리적으로 다툼이 존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항상 갈등이 터질 수 있는 화약고 같은 상태도 포함되어야 하고 사실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갈등이란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힘든 과정이다.


갈등의 순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서로 다투는 과정은 사실 많은 사람들은 피하고 싶은 과정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어쩌면 더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본다.

1.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고 상대방의 인격, 성격 등 근본적인 잘못으로 인해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태도

2. 상황 situation 과 상태 condition 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실수 mistake 와 오해 misconception 을 구별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

인격적인 상처를 주다...

첫번째의 태도는 생각보다 많이 경험하게 된다. 아주 단적인 예로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조급해', '너는 이게 문제야 항상 조심성이 없어' ... 와 같이 상대방은 어떠하다 와 같이 상대방의 근본적인 성격, 인격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태도이다. 일상의 갈등에서 잘 들어보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판단을 내려버리면 문제의 원인은 아주 깔끔하게 상대방의 문제이다.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변기의 뚜껑을 내려놓지 않고 나온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갈등에서의 피해자일뿐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근본적 성격, 인격적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상대방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리면 문제의 원인 뿐만 아니라 다툼의 승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감정이 얼마나 상하는지 상상하면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이런 말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한사람 이상의 이런 태도는 갈등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환시켜버린다. 첫번째는 최초 갈등이 무엇에서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처음의 변기 뚜껑은 아내의 경우 '이기적인 남편을 합리화하기 좋은 도구'가 되고 남편은 그런 사소한 변기때문에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 되었다는 억울함과 분노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결국 갈등은 변기에서 인격의 문제로 승화(?)되게 된다. 즉,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남편은 성격을 싹 뜯어 고치고 남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적 요소를 버리기 위해 수많은 고행과 번뇌를 감수해야만 할 것 같은 소위 인격 개조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남편은 자신이 이기적이 않다는 것을 해명하기 수많은 예를 들며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욱 더 알수 없는 스스로의 찌질함에 빠져들게 되어버린다. 인간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상대방을 단적으로 성격이나 인격을 단정지어 말하는 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도 상대방은 무엇이다, 어떻다 말하는 것은 참 거짓을 떠나 한 사람이란 우주 cosmos 를 무시하는 것이다. 한사람의 역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과 아픔, 기쁨과 희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만들어진 한 서사시같은 존재이다. 그건 금수저를 물고 나와 화려한 삶만을 살았던 사람이나 부모없이 어렵게 자라고 힘든 여정을 거친 사람이나 상관없다. 그 복잡한 우주를 지구의 시궁창만 보고는 '우주는 시궁창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소위 함부로 말한다는 것 중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도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에서 상대방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믿고 갈등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미는 무책임한 행동도 정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는 '인격적인 상처' 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최소한 개인적으로 인간은 그런 존재일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인격적인 상처는 자신을 한순간에 규정해버리고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모습이 아닌 지양하고 싶은 모습으로 공격받는다. 이타적이고 남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이 '이기적인 인간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져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인격적인 상처에 쉽게 빗장을 내려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런 말들은 힘들고 아프게 다가오기 쉽다.

갈등 해결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첫번째와 다른 두번째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인격적인 상처를 쉽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동적이고 하루에도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이 혼돈을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런 실수의 원인이 원래부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너의 그 삐뚫어진 인격때문이야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자존감은 얼마나 흔들리겠는가. 결국 자신만 바라봐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는 아주 단순화시킨 명제로 단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 때로는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무조건 저사람은 '이기적 인간'이라 바라보는 순간 갈등의 해결은 '저 이기적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없어...'가 된다.

본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그냥 고민하는 모습이 맘에 들어서...

개인적으로 만난 분 중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서 가장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준 분이 계신다. 이분의 대화에서 갈등 해결의 지혜로운 대처를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태 situation 과 상황 condition 에 따라서 자신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정해진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그 원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해석 analysis based on acceptant's emotions 이 아닌 상황과 상태를 통한 분석 analysis based on situation & condition 을 통해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상대방 / 본인의 실수 mistake 가 무엇이고 오해 misconception 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는 인정하고 오해는 풀면 된다."

정확히 전달받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핵심 내용만 파악해서 전달해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실수도 하고 실수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방의 오해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갈등은 시작되고 심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자신의 감정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태와 상황을 먼저 생각해 본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감정을 잠시 보류하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 갈등은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도 포함되지만 직장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여 정서적 거리 sentimental distance 만큼 업무적 거리 operational distance 도 포함한다. 결국 이런 갈등을 한번 잘못 판단하여 '인격적인 상처'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한번 판단하면 갈등은 점점 감정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 미움이란 안경과 사랑이란 안경 ] 이런 경우 상대방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에 버금가는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옳을 수 없다. 이는 실수하고 잘못된 말과 행동 그리고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항상 옳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은 편견과 자신만의 좁은 경험과 식견으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의 상태 situation 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에 의해 타인의 상황 condition 도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인간의 불완전성 faultiness of human' 를 인정하고 섣부른 감정적 판단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시작한다.

현실 세상에서의 상처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가 가족 구성원 들 사이에서의 언어 표현의 유사성 similarity of linguistic expression 이다. 단순히 자주 사용하는 어휘나 어투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소개한 '인격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정적인 표현의 사용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알고 싶다. 자식의 실수 혹은 잘못에 대해서 부모는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조언을 하는 순간 부모의 말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인격적인 상처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면 '너는 맨날 이래!' 혹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서' 과 같은 표현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모가 말하는 표현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언급할 때 더 많이 배우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면서 자신 앞에 끼어든 차량을 향해 욕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상대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도 아이들은 좋은 교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연인 관계일 것이다. 사소한 계기로 다툼이 일어나고 나면 감정적으로 나쁜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한 쉬운 판단을 한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라고 말하면 이기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은 근거를 들기 위해 그렇지 않았던 사건들을 열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란 했던 이기적이란 말에 그렇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누군가 '너는 바보야' 라고 놀리는 말에 쉽게 상처받고 '나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문제는 가까운 사이일 수록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로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약점인지 잘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쉽게 반응하는 부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자란 남자 친구가 다툼에 여자 친구를 밀치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가 말한다.

"너는 아버지 닮아 왜 이리 폭력적이야"

이 말 속에는 서로가 가깝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개인적 트라우마 뿐만 아니라 너는 폭력적이다 라는 단적인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상처를 포함하고 있다. 과거의 아픔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서로 이야기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상처를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상처를 다시 찌르고 만다.

상처를 만드는 다양한 무기들... 

"너는 무엇(나쁜 내용)하다" 와 같은 형식도 있지만 사실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형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너는 맨날 그렇게 밖에 못해!" , "넌 너만 잘났지!" , "니가 뭘 안다고 그래!" , "너 같은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것도 못하니!"

(※ 예들은 정신과 임상을 하고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 가벼운 실수에도 상대방의 능력이나 가치를 무시하고 전체로 확대하는 인격적인 상처이다. 즉, 원래 너의 능력이나 가치가 제대로 된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접 실수를 하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도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한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으로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며느리의 모든 부분이 부족해 보이고 심지어는 잘난 자기 아들과 결혼해 호강하며 산다고 생각하고 학벌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항상 무시하였다.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어도 시어머니는 "너가 내조를 못하니깐 내 아들이 이렇게 되었잖아! 도대체 너는 하는게 뭐야 우리 아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매번 모든 일을 이 화풀이 맞춰 끊임없이 며느리를 혼낸다. 바람에 쓰러진 화분도 며느리 탓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대접을 받는 며느리 스스로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가이다. 아무리 아닌 이야기도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고 특히 위계 질서와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듣는 입장이라면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부딪치며 힘들어지고 이런 현실에 내성이 생기면 정말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더욱 더 상처는 깊어지게 된다. 언젠가 자기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엄마가 과학 문제를 설명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너는 어떻게 이런 것도 못 푸니?" 라고 하길래 그 엄마에게 가서 "당신 로렌스 수축과 약한핵력과 전자기파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설명해봐!"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정말 세상의 [ 어떤 진리도 상처보다 깊을 수 없다. ]

쉬운 길에는 항상 함정이 있다...

자신의 감정대로 말하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많은 인격적인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그런데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대로 하는 말들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앞의 예처럼 시어머니의 독설같은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가족 구성원 특히 자식들은 그 언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인다. 말을 무겁게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과 상태를 알려고 노력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어려운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무게에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럴 때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된다. 문제는 감정의 단계에서 한 숨 쉬고 시간을 가지는 것과 실수를 인정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힘든 것인지 모를 뿐이다.


정신과 상담받는 청소년 들 중에는 표현이 짧고 단정적인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가끔 그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떤 표현을 쓰는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런 행동은 나빠요' ,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해요' 와 같이 예외없는 단정적인 표현들로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감정따라 쉽게 한 말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다. "너가 할 줄 아는게 뭐야!" 라는 그 감정적 표현에 상대방은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에는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들도 '내가 생각한게 뭐 맞겠어?' 라는 의구심만으로 포기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단정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쉬운 이야기들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희망보다는 해도 소용없다는 포기를 먼저 만들기 쉽다. 그리고 정서적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영향은 더 크게 받는다. 특히 가족 중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두 여인이 이야기를 한다. 자기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를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대답하는 것이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 않아? 하트도 없고 이거 표현도 ... "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쓰지 않는 메신저 서비스에는 자신의 감정을 바로 보여주는 기능이 있나 싶었다. 텍스트에 불과한 문자에서도 상대방의 의도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다투고 정말 노래가 좋아 공유한 노래가 상대방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며 가사를 집중해서 듣고 상대방의 감정을 판단하려고 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지 부터 생각하게 된다.

같은 대상도 미움의 안경을 쓰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랑의 안경을 쓰면 잘난 척 하는 사람도 똑똑해 보이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나쁜 absolutely bad 행동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럼 '살인하다'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달려든 강도를 살인했다' 라면 어떻냐고 물어본다. 한 생명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하다는 말 조차도 사실 상황 situation 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나쁠 수만도 없다. 생각보다 인간이 너무도 허술한 존재라는 것은 법정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몇십년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진범이 늦게 나타나 그 세월의 억울함을 쉽게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순간에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백함을 믿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 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은 적이 아님을 먼저 아는 것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지만 다툼의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 행동 말뿐만 아니라 정황적인 추측까지도 포함하여 상대방이 이 다툼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결론내리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적 소모일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말했지만 사람의 행동과 말은 시간이라는 차원 속에서 다른 상황과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실수도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수와 잘못을 하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럴 수 있다.

상대방이 적이라면 이겨야 하는 대상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고 해주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격적인 상처를 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삶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회가 된다.

사랑은 서로의 모순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슬픔에 대해서 같이 이해하고 슬퍼해주는 것... 그래서 어떤 행동도 생각도 사랑 앞에서는 설명되게 된다. 억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항상 그대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Sunday, June 28, 2015

아직 근골격계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아이가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릇을 잡고 가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아이는 놀란 마음에 멈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놀라 달려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 큰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다친데 없어? 그러니깐 조심성없이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거야!" 


비록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미 사건은 일어났다. 비록 깨진 그릇의 파편에 아이는 상처입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내 엄마의 목소리에서 나온 파편에 찔려 상처입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던, 아니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엄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더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심성없이 뭐 가지고 다닐거면 가지고 다니지마.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해!"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이야기하지만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놀라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그대로 아이에게 내 뱉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아이에게 이해를 구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공감의 능력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결론이 난 일에 대해서 잘못, 옳음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이가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고 아이는 분명 나를 도와줄려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라며 아이에게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럴수도 있는 것이지 실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너가 다칠 수 있으니깐 앞으로는 조심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감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 경우보다야 훨씬 아이가 상처입지 않도록 아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심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착한 엄마일지 모르고 이해심이 많기에 아이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려깊은 엄마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순간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모든 행동에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공감은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공감은 있는 그대로 아이(상대방)의 감정에 묻어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반응이 적절한 공감의 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공감에는 나... 내 중심이 사라지고 나를 죽여야 가능한 것들이 많아진다. 아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를 먼저 살필려고 노력하고 지금 아이의 상태는 나보다 더 놀랐을 것을 느끼며 아이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다는 것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사건을 분석하고 아이가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깨진 그릇에 놀란 바로 앞에 있는 아이라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분명 감정적으로 다치기 존재이다. 그것은 어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원리Principle 만 기억하자. 아이를 당신의 논리와 규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당신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위선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공감의 문제로 확장해도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 공감이라 생각한다. 즉, 상대방의 상황을 다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심리상태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그 파악된 논리 구조가 자신의 논리 구조와 합일해야 그때서 자신은 상대방을 공감해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공감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도 자신의 전적인 이해를 조건으로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고,
결코 채워줄 수도 없는 상대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크리스티앙 보뱅의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시켜야지만 나는 당신을 공감할 수 있다는 오만스러움은 인간을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켜야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지옥으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의 슬픔을, 아픔을, 고통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은 결국 '나는 너를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넌 왜...' 라는 공감의 폭력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과 감정들에 묻어 가며 그 사람이 힘들어 하는 그 부분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고독이 어디있는지 찾는 것이 서로를 아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내가 어떤 어루만짐을 해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 기도가 필요한지 모른다.

그리고 그 어렵고 힘든 ... 그 것을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한다는 것' 이라 정의내렸는지 모른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

- 성 아우구스티노 

공감의 미학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