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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anuary 20, 2016

공부 잘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안정적 직업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흥을 자주 즐기고 부인에게는 성병까지 옮긴다. 그러나 부인에 대한 최소한의 미안함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남자들이라면 좀 더 수식어를 붙이자면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조건을 붙이며 별로 큰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이야기는 좀 더 충격적이었다. 선후배 관계가 중요한 것을 이용하여 명문대 출신의 전문직 선배가 후배에게 성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후배마저도 도구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런 요구를 하는 명문대 출신의 인물은 상대방도 원했다 심지어 후배가 자신을 유혹했다는 이유를 통해서 자신은 큰 잘못이 없음을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고 명문고등학교를 진학한 학생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이 상당하였던 그는 소위 아르바이트로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위해 프로그래밍을 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자신은 능력있는 것을 잘 활용해서 학비도 벌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하며 어떤 죄책감도 가지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위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하라고 주어진 자리를 가지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혹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함부러 남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이들에게는 몇십만원에 감옥을 가야하지만 소위 높은 자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범죄와 악행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가도 오히려 떳떳하게 살아가며 심지어 자신처럼 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때마다 많은 이들은 마크 데스메트 Marc Desmet 가 표현한 '용기를 꺽는 모순들'에 좌절하고 희망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쉽게 믿었던 보편 타당한 윤리, 도덕의 문제는 항상 꺽기고 모든 법과 윤리를 지키고 살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왜 지켜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서두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가정, 사회 그리고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개인의 규모가 가지는 규범적 요소들의 파편성 fragmentation of regulations 을 생각하게 된다. 왜 누군가에게는 옳은 내용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쉽게 깨도 되는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범법 행동에 대해서도 쉽게 합리화를 시키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제점이 없는 행동들은 외부적인 훈육에 의해서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훈육의 강도가 높지 않거나 때로는 알리지 않게 은밀하게 행동해도 그것은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알렸을 때 예상되는 훈육의 짜증때문에 숨기는 것이다. 즉, 무엇이 문제이다라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해도 심지어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의 똑똑함으로 무장한 이들에게는 그 법마저도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합리화를 쉽게 할 수 있다.

정치적 타락이 만드는 눈뜬 정의의 여신

분명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그들의 잘못된 행동들에 의해서 피해자는 결국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다. 선배의 강압적인 관계를 요구하던 후배는 결국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였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그것이 자신때문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강하지 못하게 자란 피해자를 탓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부인에게 성병을 옮기고 유흥을 즐기는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이 하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일 이외의 시간동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도박 중독에 빠지는 것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도덕과 윤리는 우리를 항상 즐겁게 해주는가?

많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공통적으로 들었던 질문은 정말 그들의 행동은 문제가 없는데 사회가 괜한 문제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업을 가진 것만으로 도덕 윤리 의식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명제는 지금의 사회가 이미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고 심지어 높은 도덕 윤리를 요구하는 고위 공직자들은 오히려 적절한 범법 사실이 필요 조건이 되었다. 심지어 그 중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라도 자식들을 위한 노력이 보인다면 어느정도 괜찮지 않는가 공직자 후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도덕 윤리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사전적 정의로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한다. 영어로는 a lesson, especially one concerning what is right or prudent, that can be derived from a story, a piece of information, or an experience. 이라 나와 있지만 이처럼 정의하기 싫어 내리는 정의도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하고 싶다. 도덕이란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와 공동체가 지켜야 할 행동 요소라고 말이다. 결국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신체의 외상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나와 내 공동체가 지키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윤리란 도덕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예상하고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할 요소라고 정의하고 싶다. 쉽게 말해 도덕이란 개인적 감정의 보호막이고 윤리(倫理) 는 공동체가 굴러가기 위해 (輪; 바퀴 륜) 혹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공동체의 보호막이라 생각한다. 도덕 혹은 윤리가 이성적 작용이라고 많은 이들이 말하지만 상당 부분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앞으로 설명할 것이다. 누군가 길거리에 소변을 본다고 해도 사실 나에게 물리적 직접적 피해는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 다만 누군가 그렇게 하는 행동을 보는 것 자체가 불쾌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쾌함은 어디서 왔는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이 소변이 급한데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경우 자신이 지키고 싶은 도덕의 기준은 스스로를 더욱 더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 목격자들이 없다면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의 슬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자신의 노상방뇨를 적극 합리화할 것이다. [주: 티코 브라헤 (1546-1601) Tycho Brahe 는 방광파열로 사망했다는 전해진다.]

도덕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의 mores 에서 유래된다. mores 는 행동이란 뜻이다. 즉, 도덕은 지극히 행동과 그 행동이 가지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은 사회적인 개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물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도덕의 이야기는 공동체를 떠나 성립하기 어렵다. 혼자 사는 이에게 도덕이란 상황극일 뿐이다. 혼자 사는 무인도에서 노상방뇨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행동이 어떻게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가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인 정의를 '상처받지 않기 위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어도 끝까지 노상방뇨를 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일까 아니면 도덕 의식이 너무 높아서 혹시나 갑자기 나타나 기분 나빠할 수 있는 목격자를 생각한 것일까? 행동 자체로 보았을 때 자신의 참는 불쾌함을 해소하는 것이 좀 더 이성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도덕이라는 구조 안에서 힘들게 고통을 참는 이유는 누군가 나의 행동을 보고 '감정적으로' 불쾌할 수 있다는 생각혹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도 수치스러워 스스로도 불쾌할 수 있다는 감정의 문제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Moral 의 어원은 라틴어 mores 행동이란 뜻에서 유래된다

도덕 윤리를 모두 잘 지킨다고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충동적 욕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에 대해서 사회가 도덕 윤리라는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더 짜증날 것이다. 유흥업소를 즐겨 다니는 이에게는 적절한 거래에 의해서 내 돈 가지고 내가 그렇게 쓰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합리화시킬 것이고 후배에게 강요하는 선배는 자신의 권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성인 남녀의 개인적 문제라 해석할 것이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 즉 영향을 준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지 모른다. 정말 인간은 누군가에게 피해주지 않고 싶어할까 묻고 싶을 때가 많다. 가학적 인간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특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직접 간접으로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도덕 윤리는 점점 변화하고 다양한 욕구의 충족을 위한 유혹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귀찮고 필요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행동의 문제인가 인식의 문제인가? 

뉴스는 많은 경우 시청자들의 귀과 눈을 끌기 위해 다양한 상황 circumstances 을 제시한다. 대기업 회사원, 치과의사, 한의사 등과 같은 직업적 요소뿐만 아니라 재벌집 아들, 강남 명문고 출신, 명문대 졸업자 등과 같은 부분이다. 예를 들어 명문대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소위 명문대가 아닌 졸업생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주목받는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높은 교육 수준은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한다. 그러나 그건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명문대 캠퍼스 안은 거의 천국에 가까워야 한다. 현실은 반대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에게 높은 도덕 수준을 예상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교육 수준이 높다는 것은 현 시스템에 잘 순응하고 잘 따라와서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일반적인 도덕적 요소를 잘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지옥에 가깝다. 높은 교육 수준을 이용해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탐욕을 챙기는 등 오히려 높은 교육 수준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실속을 챙기면 도덕에 어긋나는 때로는 반사회적 anti-social 행동들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명문대 출신이라면 사람들은 더 충격을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 저렇게 살인을 저지를까 하는 예상 밖의 결과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뉴스가 만든 상황적 분위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시선을 다른 부도덕성에 비추면 재밌는 현상이 일어난다. 높은 교육 수준의 사람들이 경제 범죄를 일으켜서 많은 이들 심지어 가족이라 생각한다는 회사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어도 사회 지도자, 경제 지도자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무척 관대하다는 것이다. 경제사범들이 회사 경영자라는 이유로 다양한 불법 행위들을 통해서 많은 노동자들을 힘들게 했다면 분명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경제사범들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한 영웅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는 생각보다는 많은 경우 사라지는 희망같은 무력감마저 들때가 많다. 결국 힘없는 노동자들은 소수의 자본가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해결책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떠돌기만 한다.

기업적 부도덕의 예를 보여준 엔론 회계부터 경영 거의 전반적 비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인간의 도덕이란 행동의 문제인가 아니면 다른 문제인가 말이다. 현실의 복잡성때문에 만들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과 개인 때로는 조직과 조직의 충돌 안에서 개인들은 다치게 된다. 많은 과정에서 결국 상처입는 것은 개인에게로 돌아간다. 가끔 인류가 만든 가장 악덕한 제도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개인적으로 '법인 corporate body' 라고 말한다. 법인이란 '자연인이 아니면서 법에 의하여 권리 능력이 부여되는 사단과 재단'을 말한다. 즉, 인간은 아닌데 법에 의해 마치 인간처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능적으로 이런 법인은 다른 법인을 죽이기도 (망하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때로는 결합하기도 분리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지만 마치 인간처럼 (자연인처럼) 다른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해치기도 한다. 결국 인간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은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기업이나 단체와 같은 법인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인은 정말 대단한 존재이다. 자신이 피해를 주어도 그 책임은 상당히 제한적이고 때로는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대상도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도덕적 내용들을 따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이다.

결국 행동의 관점에서 살펴본 도덕이지만 도덕이 문제가 아니라 도덕이라는 항목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초점을 맞춰야 한다. 도덕적 기업 (법인) 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예외의 대상은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대상이다. 그런 이유에서 법인의 활동은 많은 제도적인 안전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을 인간의 사회는 도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강하게 지켜야 하는 것은 법이지만 법의 차원이 아니라도 규제 regulations 라고 부른다.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해도 규제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부적 기준이 될 수 있다. 돈이 넘치고 넘치는 욕정에 유흥업소를 다니며 돈으로 성을 매매할 수 있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정을 생각했을 때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먼저 생각할 것이고 아무리 하고 싶고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음'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내재적 규제 immanent regulations 가 된다. 결국 행동은 표면적인 문제이지만 그 행동을 옮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그 행동을 평가하는 인식의 문제이다. 자신의 성욕이 후배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후배라는 인격은 그저 도구적 가치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인식한다면 인터넷 도박이 아니라 돈보다 덜 가치있다 생각하는 어떤 것도 쉽게 행동할 것이다.

종교는 내재적 규제를 제시한다

결국 도덕을 행동의 문제이지만 그 원인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행동보다 '가치에 대한 인식'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설명이 길었지만 이 문제는 다른 질문으로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도덕'이란 존재할까? 란 질문으로 환원하고 싶다. 사회는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인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개인도 끊임없이 무엇이 가치있는지 생각하고 가치를 인식한다. 노예 제도가 합법이었을 때 주인이 여성 노예에게 성관계를 요구한다면 현대의 시선을 모두 벗어 당시의 사회가 요구하고 인정하는 가치에 비추어 주인이 비도덕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도덕은 사회의 산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도덕적일 것 같은 인간들의 비도덕적 행동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어 가는 것으로 연결짓기 어렵다.

역사의 서사에서 침몰하는 개인 

괴물이란 화두는 아주 강하게 다가왔다. 괴물 monster 는 경고하다는 뜻의 라틴어 monere 에서 유래되었다. [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 괴물이란 세상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주는 일종의 경고라 생각했던 것이다. 우연히 벨기에의 정신분석학자인 파울 페르하에허 Paul Verhaeghe 의 책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를 읽게 되었다. 책의 모든 내용을 소개할 수 없지만 가장 인상적이고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높은 교육 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가?
사회에 피해를 주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제라 생각하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한 부도덕한 행동들은 어떤 방법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에 책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어쩌면 현재는 폭풍처럼 지나간 (혹은 지나고 있거나 머물러 있는) 신자유주의의 희생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부분에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와 거의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즉, 경제적 전체주의가 바로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몇가지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 유사성을 느낄 수 있다.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능력주의 meritocracy 이다. 특히 전체주의가 좋아하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나치가 저지른 수많은 학살의 내용도 사실상 유전적 우수성에 가치를 두고 인식하여 유대인 학살의 인식적 근거가 되었다. 사회진화론은 궁극적으로 진화된 존재와 덜진화된 존재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서 어떤 요소가 우수한지를 평가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객관적 과학적 과정이 아닌 독일 아리아 혈통의 우수성을 결론내리고 유대인 및 타 인종에 대한 협오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진화론의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능력을 키우고 그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고 얼마든지 능력만 좋다면 좋은 대우 받으면서 살 수 있다고 신자유주의는 선전한다. 아주 건전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능력은 이미 이루어진 기득권 사회의 평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위에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구조적 문제를 떠나 단순히 '어떤 곳에서나' 능력만 있다면 출세할 것이라는 말은 능력주의를 가장한 인생을 두고 펼치는 보이스피싱이나 다름없다. 인간이 실수할 수 있거나 때로는 상황이 힘들어 자신의 제대로 된 역량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은 말할까 궁금하다.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지도자 및 경영자들의 부도덕한 요구가 있을 때 능력좋은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상위 10%는 승진하고 30%는 그대로 남게 되고 나머지는 해고된다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면 (그 규칙은 법인이라는 법이 정하는 인격체에 의해서 정해진다.) 구성원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다. 대표적으로 사유화 [ 공공 부분의 사유화 ─ 민영화에 대한 생각들 ], 규제완화, 사회복지 축소, 복지제도의 해체 등이 있다. 이와 같은 국가 정책의 방향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그 사회 구성원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예를 들어 의료에 대한 복지가 줄어든다면 의료 부담이 걱정되는 사람들은 사보험이나 목돈을 마련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규제완화의 한 부분으로 사업자 측 혹은 사용자 측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한다면 노동자가 사용자를 향하는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심지어 사용자들이 부도덕한 행동을 요구한다면 회사에 남기 위해 노동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다양한 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려고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살아가는가에 따라서 그 자유의 폭과 깊이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이런 모순을 마르텐 판 로섬 Maarten van Rossem 은 "현대 사회의 자유는 공포와 생존이라는 두가지 사슬에 묶여 이름만이 자유인 부자유의 다른 이름이 되어간다." 로 표현했다. 또한 이러한 모순을 마이클 영 (1915-2002) Michael Young 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항상 최선의 의도로 포장되는 법이다" 라고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설명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신자유주의의 많은 결과들은 이미 많은 나라에서 문제점을 만들어 냈다. 능력주의에 따른 소수가 자본을 독식하는 구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심각한 부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노동의 가치가 생산을 위한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아주 쉬운 부품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어떤 국회의원은 최저임금을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외국인 근로자들 40%에 숙식을 제공하는데 숙식비에 최저임금까지 하니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높다, 선진국도 숙박비가 최저임금에 삽입이 되고 있다. 이런 얘기하면 국제 감각이 떨어진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 외국인 근로자들의 후생복리가 지나치게 좋아지는 것 아닌가" 라는 주장을 하며 적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을 한 국회의원은 환경노동위원회의 의원이었다. 이 뉴스 속에서 해당 국회의원은 노동에 대한 어떤 인식을 하고 있는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렇다면 외국에 나가 일하는 한국사람들도 똑같은 차별을 받아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속 시원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개인적인 의문은 '국회의원까지 할 수 있는 지적 수준과 품위를 가진 분께서 왜 이런 인식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인식을 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 

무엇이 옳다 잘못됬다는 판단은 인간이 가지는 정상적인 그러나 상당히 비이성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이 옳다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이성적 작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감정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더 잘 맞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옳고 그름은 차라리 좋다 나쁘다로 설명하는 것이 잘 맞는 경우가 많다. 조금 학술적으로 표현해서 이것을 신념 faith 이라 부르지 않을까? 신념 faith 은 라틴어의 fides 에서 유래되었고 이 말은 믿음, 충성, 신뢰 등의 뜻이지만 이 모든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면 즉, 호의를 가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만드는 많은 것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하셨다.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

전체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진실이라 생각한다. 전체주의는 무엇이 옳은지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주의의 힘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무엇이 진실이다 라는 명확한 명제가 많아야 가능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역사학계의 의견은 단지 이견일 뿐 전체가 따라야 하는 진실은 명확하게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그리고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전체주의가 되기 어렵다. 따라서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위협은 진실의 힘이 아니라 무엇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성이 되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전체주의 역사 속에 묻힌 개인들은 자신들이 좋아할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기도 전에 전체주의 국가가 제공하는 진실의 힘속에서 살아야 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는 개인들이 유대인을 숨겨주면 자신도 범법자가 되기 때문에 혹시 유대인도 같은 인간인데 라는 양심의 외침에도 유대인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주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무엇이 진실이라 말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가지는 다양성을 숨죽이게 만든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심각하게 보면 개인 생존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계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조금 작은 규모의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실 공동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단순히 기관이나 이익집단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업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재벌 총수를 도와 횡령을 하고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회사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지만 이를 고발하는 내부고발자는 오히려 회사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내부 고발자가 양심적이라고 말해도 그래서 그 결과로 회사를 떠나 직업을 잃어버려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한다. 문제의 원인은 내부 고발을 하고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도덕한 행위가 해도 된다고 인식한 높은 인간의 인식 수준이라는 것에 대해서 공론화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부도덕한 행동을 해도 부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더욱 부러워할지 모른다. 이미 재벌 총수는 재벌 기업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진실이다. 무엇이 양심적이고 합법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희망은 오직 '그'들 혹은 '그녀'들이 정의롭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최소한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무감각한 괴물만 아니기 바랄 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싱가포르란 나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가깝다고 느낀다. 지하철에서 음식물 먹는 것도 벌금, 화분 받침대에 물이 고여 있어도 벌금이다. 이런 다양한 벌금을 통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 할 수 있는 행동들이 다소 심하게 구별되는 나라이지만 두가지 측면에서 이런 통제의 기능을 생각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그런 규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한다는 점이다. 지하철에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지만 화분 받침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말라리아와 뎅기열때문에 보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한 이유라는 점을 듣고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모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두번째는 이런 통제에는 예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위 공직자라도 비리를 저지르면 그에 따른 조사와 처벌은 피해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얼마나 엄격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국민들이 그런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높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통제 및 규제의 이유가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소수의 권위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즉, 국가의 통제 기준이 절대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수준이라면 개인이 느끼는 양심적 갈등은 줄어들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요소들을 생각해본다. 싱가포르의 경우 아주 소량의 마약만으로도 사형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싱가포르 사람들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마약 밀반입을 하려고 한 사람인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번 사형을 내린 사람들은 다시 살릴 수 없는 문제를 이야기하면 그때는 조금 머뭇거리지만 항상 마약이 가지는 사회적 문제를 떠올리며 계속 주장한다. 이런 인식은 어쩌면 마약은 무조건 나쁜 것이야라는 인식을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법을 통해서 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당히 자율적으로 스스로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닌 예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 부모님이 정해주신 유전적 형질보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 어떤 환경 안에서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냐에 따라서 더 많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 

유전학 genetics 는 인간의 질환이나 이해할 수 없던 다양한 증상에 대해서 다양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유전자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는 의학적 설명의 폭이 좁았던 것이다. 특히 유전자질환 genetic disorder 은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내과적 질환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방사선이나 약물에 의해서 특정 유전자가 기능을 하지 못해서 외형적인 부분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도 존재한다. 유전자는 인간이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을 제공하는 일종의 청사진이기도 하지만 그 청사진이 변경 (변이 variation) 되는 경우에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그 현상이 인간 생명 활동에 치명적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유전자는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에서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기도 한다. 아무리 인간 유전자에 새의 유전자 특히 날개의 기능을 하는 유전자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날개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심지어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자를 인간에게 주입된다고 해도 해당 유전자가 전체 인간 유전자 안에서 실제 형태를 만들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추구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도 인간 유전자가 단순히 몇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실현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생명체가 죽을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변이를 만들어 유전병을 만들 수도 있지만 가능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수적인 부분은 다양한 안전 장치와 보완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들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Econogenetics 경제유전학

생명 활동의 규모, 범위 그리고 실체적인 행동들을 결정하는 요소로 유전자를 이야기 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안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의 서사 안에서 구성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하고 생존을 위해서는 경제적 활동을 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제대로 된 경제적 활동을 하지 못하면 삶의 질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까지 위협받게 된다. 신자유주의는 더욱 더 나아가 개인을 결과로 판단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를 평가하여 이를 통해 능력을 평가한다. 따라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사고 등으로 얻게 된 경우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국회의원의 인식대로라면 자신이 선택하 수 없는 출신 국가에 따라서 최저임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같은 결과를 보여 능력이 동일해도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처럼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경제적 환경, 여기에는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나 자본의 크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곳 등과 같이 경제적 기회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소들까지도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다시 돌아가면 인간의 행동은 결과적인 문제이지 원인적으로 인간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즉, 물려 받을 수 있는 자본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나라에서 왔는지와 같은 자본적 환경은 내가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에 영향을 주고 행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상품이 되어버린 인간 그리고 인간의 노동

이처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분명 우리의 인식 및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유전학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경제 econo- 유전학 genetics 이라고 부르려 한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대한민국 사회에 통용되는 소위 금수저 흙수저와 같은 인식은 결국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는 한계적 요소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주장하지만 이미 시작점부터 다른 부의 불평등은 이미 경제적 조건조차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주어진 자본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제 활동을 얼마나 쉽게 활동할 수 있는가와 같은 국가 안에서의 규제, 법률 등도 중요한 경제유전학의 요소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프로그래밍 능력이 뛰어나도 인터넷 도박을 개발하는 행위는 제한되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나 쉽게 돈 벌 수 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주기 때문이다. 능력과 기회가 충분하다고 해도 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들이 존재한다. 이처럼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서 법이나 개인적인 차원의 양심은 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하지 않는 과정도 경제유전학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경제가 자본을 많이 모으는 목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된 조직 안에서 공생이 더 가까운 의미일 것이다. 생리적 인간도 비슷하다. 간세포들이 자신들은 기능이 뛰어나다고 끊임없이 자기 조직의 세포를 분열 복제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일반적으로 암세포라 부른다. 암세포 자체는 끊임없는 세포의 증가로 인해 정상적인 세포가 살아갈 여유조차도 만들지 못해 정상세포의 기능마저 할 수 없게 하여 결국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 관련된 활동 경제 구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는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적응을 위한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벌 총수가 횡령을 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 회계를 담당하는 한 사람이 부정한 방법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지만 재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저질렀을 때 자신을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이해해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그 불법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제대로 해줄 것인가 의문이다. 결국 자신이 속한 다양한 사회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유전체가 무엇이고 그 유전체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떤 기회를 줄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행동들이 제한받게 되는가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의 행동과 인식은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구조의 불법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이 잘 맞는다면 지속적으로 공동체에 해가 되는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유전자가 단백질을 합성하는 과정에서도 잘못된 단백질을 생산하면 이를 중단하고 되돌리는 과정이 존재한다. 이를 유전자 발현 및 조절 gene expression & regulation 이라 부른다. 유전자의 조절을 regulation 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사회 구조의 환경 및 기회 등이 하나의 유전자라고 가정한다면 사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영속하기 위한 규제 regulation 의 기능도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Gene expression and regulations

Edugenetics 교육유전학 

인식이란 개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접하고 얼마나 느끼고 얼마나 생각하여 어떤 가치관을 가지는지에 큰 관련이 있다. 가치관은 유전자처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유전된 inherited 부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비슷한 환경에서도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을 보아도 가치관이란 단순히 외부로 받은 자극을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수용이후 반응하고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견의 명제들은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생각하기 싫은지를 반증해주고 있다. '엄마없이 자라서 성격이 나뻐', '고아로 자라서 독립적이야' 와 같이 주어진 환경 혹은 상황에 따라서 편견의 결과를 쉽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 편견이 최소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가설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 cases 를 경험 혹은 수집해야 하지만 대부분 자신이 가진 한두가지 내용으로 사실이라 믿어버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방향대로 해석하고 진실이라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 진실이란 수식어 안에는 증명되지 않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인간의 수많은 편견이 고착화되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강제 성노예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의 논리를 접할 때가 있다. 가장 가까운 예가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 식민지 시절에 대한 해석 특히 최근 '강제 성노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일본 국민들 중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성노예 문제에 대해서 일본의 아베 총리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다. 무엇이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역사의 사건은 존재하지만 그 사건을 해석하는 그리고 해석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적절하게 감춘다면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철저하게 당시 일본 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다 혹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위안부에 왔다는 식의 거짓 정보를 제공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현장을 목격하지도 않았던 학생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키는 방향을 보게되어 일단 그것을 수용하기 쉽다. 즉, 교육이란 선생님의 권위를 통해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인식을 주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인간의 인식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만드는 인식의 틀과 내용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눈을 만들어 준다.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와 대칭적으로 이를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라 부르려 한다.

대다수 일본 사람이 강제 성노예에 대한 일방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일본의 교육 과정이 일방적인 인식을 강요하고 있고 교육자도 강요한다고 해도 무엇이 사실인지 알려고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르쳐 주지 않은 다양한 내용과 외부의 다양한 지식인들이 전하는 인권의 일반론을 접하게 되는 학생이라면 자신이 배운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기준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아닌지 검증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수용하는 과정이 아니라 질문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 무엇이 옳다는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 쏟아질 문제들을 해결하고 가치판단을 하기 위해서 최소한 자신이 이것만은 간직해야 겠다고 믿는 가치관들의 기본 요소들 fundamentals of  principles 을 얻기 위한 것이다. 수학이나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등의 다양한 학문은 시험점수를 잘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필요한 해석의 도구들을 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적의 생수가 있다고 팔려는 사람을 보면서 물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이며 경제적 탐욕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마저 속이며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한다는 심리학적 분석을 하게 된다면 정말 치료될 수 있는 확률보다 사기꾼일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Glycosylation Process

결국 교육유전학은 세상의 세부적인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고 정답을 주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접하게 될 수많은 문제들의 본질과 해결방법을 찾아줄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생리학에서 면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비슷하다. 즉, 외부의 셀수 없는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방어하고 어떻게 수용할지를 선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수많은 물질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간직하고 이에 대응하는 1:1의 반응을 하게 된다면 인간 유전자는 지금보다 확실히 큰 규모가 되거나 어쩌면 대응하지 못한 물질은 인간이 적극적으로 피해야 하는 물질들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는 유전자의 부분요소들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당단백질과 같이 다양한 당류의 조합과 가지치기 glycosylation 를 통해서 면역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이런 대응에는 가급적 다양한 재료가 가지는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의 기능과 유사성을 가진다. 이런 이유로 교육은 좀 더 다양한 접근이나 세부적인 문제의 풀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도 유연하게 풀거나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괴물이 사는 세상

첫 부분으로 시작한 이야기들은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 왜 작은 공동체인 가정부터 경계가 무한에 가까운 공동체까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왜 해가 되지만 스스로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는 개인은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점점 그런 존재들이 증가하는 것만 같은지 궁금했다. 사실 그저 문제이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탓하며 공동체에서 철저하게 단절시키면 되지만 근본적인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좀더 문제의 원인을 다른 시선에서 접근해 보고 싶었다. 부도덕한 일들을 하고도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려는 시도들은 오랜 시간 인간이 지키려고 했던 윤리 또는 인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도 역행하는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등하교 길에는 유흥업소들이 가득하고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하나의 문화처럼 수용하기도 한다. 마치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정보인 것처럼 그런 환경이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연쇄 살인범같은 살인자들이 뉴스에 나올 때 항상 나오는 단어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사이코패스 psychopath 이다. 살인을 하는 그 행동에는 분명 유전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계속해서 묻는다. 그래서 살인자들은 원래 그런 유전적 특징이 있기 때문에 심지어 그런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살인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을 내린다.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만 사회 대다수 혹은 소수라 할지라도 국가 기관의 지도자들이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전 국민들에게 '살인 유전자' 보유 사실을 검사하고 이를 통해 특별 감시를 할수도 있을지 모른다. 특히 후생유전학 epigenetics 을 알고 있다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유전자가 원인이 되어 행동의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다. 그래서 경제유전학 econogenetics 나 교육유전학 edugenetics 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주어진 환경이나 교육의 조건에 따라서 인식이 결정되거나 행동이 정해진다는 결정론적 허무맹랑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의 인식이 좀 더 합리적으로 공통선을 향한 일반적인 정의가 수립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교육적으로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유전자의 유사성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Hannibal (TV Shows) as known psychopath

누군가를 판단하는데 있어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원칙중 하나가 '존재와 행동'은 분리해서 생각하자이다. 이미 정해진 존재가 항상 정해진 행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할 수 없는 요소를 통해 전적으로 변명하는 것도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살인자의 이유가 (정말 있다고 해도) 살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는 모든 이유가 될 수 없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이 속한 회사의 환경 등과 같은 경제적 환경때문에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되어서도 안된다. 회사 상사의 부당한 요구에 수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경제적 손해를 주면서 회계 부정을 하는 사람의 상황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행동마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홍수에 빠져 있는 많은 현대인들은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월급은 적어도 도덕적 경영을 하는 회사가 인기를 얻는 이유인지 모른다.

주입식 교육이란 마치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대응하여 면역 단백질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와 비슷하다. 시험에 나오는 모든 문제들을 풀어서 해당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풀줄은 알지만 그런 수학문제에 필요한 미적분이나 확률이 우리가 앞차와의 안전거리 유지해야 한다거나 광고에 혹하여 손해만 보는 보험에 가입한다거나 주식을 제대로만 하면 돈을 항상 벌 수 있다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내가 속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그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속한 경제구조 환경의 특징을 알아야 하고 내가 배워왔던 교육의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서 이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별히 경제유전학과 교육유전학으로 구별해서 생각하고 싶었던 이유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존재도 경제유전자 econogene 이 바뀌고 교육유전자 edugene 이 지속적으로 접촉될 수 있다면 존재의 행동은 좀더 바람직한 공동선을 추구하고 개인도 만족할 수 있는 방향이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면 경제유전자의 기업 활동이 좀더 투명하고 다양한 참여자들이 의사결정을 하고 자본의 흐름으로 좌우되지 않는 공정성을 강조한 규제들이 확립된다면 우리 몸의 유전자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잘못된 기능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처럼 좀 더 체계적인 경제(환경)시스템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교육유전자는 교육기관의 교육뿐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론들이 전달될 수 있는 정보의 접근성 및 여론의 투명성이 보장된다면 공동체 구성원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유전자를 접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반복되는 부도덕한 일들에 대해서 공정하지 못한 처리 과정으로 법 체계가 모든 이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스스로 방어를 하기 위해 다양한 경제유전자들을 포기하고 개인대 개인이 투쟁하는 정글의 모습이 되어버릴 것이다. 결국 제대로 이룩된 경제유전자의 요소들은 우리가 불필요한데 쓸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흄 (1711-1776) David Hume 이 능력에 기초한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해체된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이성을 지녔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무지한 어떤 존재가 있어서, 가장 공적으로 이로우며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정의 justice 및 사유재산 property 의 규칙들이 무엇일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덕 virtue 이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고, 각자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을 행할 힘을 주려고 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인간들이 그런 법을 시행한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지닌 본래의 모호함과 각 인간들의 자만 때문에 우수함 merit 이란 지나치게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아무런 확고한 행동 규범이 나올 수 없고, 당연히 사회는 즉시 전부 해체될고 말 것이다." 


사회가 만드는 조직적 괴물에 대해서 ─ 경제유전자와 교육유전자

Saturday, July 4, 2015

어니스트 러더퍼드 (Ernest Rutherford; 1871~1937) 는 일반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과학사에서 그의 업적은 절대 없어서는 안될 과학의 전환점 같은 혁명을 만든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고전 물리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러더퍼드는 실험 물리학에서 새로운 과학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모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뿐만 아니라 모든 공학은 느린 속도로 발전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는 우리가 물질을 바라보는 새로운 철학적 근거를 제시해줬다.

The Lord Rutherford of Nelson, 뉴질랜드 화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실험은 다음과 같다. 당시 물리학의 유행처럼 방사능은 아주 중요한 발견이자 실험 도구이자 대상이었다. 방사능 물질 중 라돈과 같은 천연 방사능 물질이 가지는 능력은 대단했다. 특히 투과력은 주목할 만했다. 이런 방사능 물질을 두고 금 gold 박편을 두면 그 박편을 투과하여 반대편에 방사능 물질이 도달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 물리학자, 화학자들은 어떻게 금속 성분의 물질을 통과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을 때 러더퍼드는 제자였던 가이거 (Hans Geiger) 와 마스덴 (Ernest Marsden) 에게 통과하는 반대편이 아니라 방사선이 조사되는 incidence 방향에도 방사능을 검출되는지 확인해보라고 얘기했다. 제자들은 무척 당황해 했었다. 그런데 러더퍼드의 예상처럼 방사선 (알파 입자 헬륨 원자핵) 이 튕겨져 나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 실험으로 러더퍼드는 물질의 기본 구조가 원자핵과 그 주변을 전자가 돌고 있고 거의 텅텅 빈 원자 모형을 제시했다. 튕겨져 나오는 비율을 통해서 그 크기도 제시했는데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율이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을 빈공간을 다 제거하게 되어 원자핵만의 부피로 모아본다면 인간의 몸은 소금 결정 하나 정도로 압축될 수 있을 크기였다. 그런데 인간은 왜 줄어들지 않고 이렇게 붕괴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이후 수많은 질문들을 만들어 냈고 그 엉뚱해 보이는 질문의 시작은 결국 현대 물리학의 비약적인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왜 연구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특별히 공부라는 표현을 떠나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유의 과정은 질문이다. 왜? 라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찾아가고 아직 사고되지 않은 영역까지, 검증되지 않은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그 질문의 반복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두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크게 비판적 질문 subjective query 과 사유적 질문 objective query 이다. 비판적 질문은 이미 결론을 내고 있는데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고 싶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과 의견을 달리 하는 의견의 결함을 제시하고 싶은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적 질문은 그와 다르게 순수한 궁금증, 호기심의 발생이 그 원동력이 된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사유의 흐름에 오류나 방해가 있지 않는지 검증하면서 찾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질문들이다.

그래서 비판적 질문을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자신이 관심가진 영역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감소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정도 자신만의 논리로 체계화가 이루어지면 자만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만들어 버린다. 그렇게 비판적 질문은 가치있을지 모르는 영역도 가치없게 만들어 버릴 위험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사유적 질문은 하면 할수록 자신이 관심가진 영역에 대한 의문과 신비를 경험하게 된다. 질문하지 않았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을 질문을 통해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모든 사유의 폐기도 고려해야 할만큼 생각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수 있고 전혀 가치없어 보이는 부분이 새로운 가치로 다가오게 되고 자신의 시야는 점점 넓혀 진다.
비판적 질문은 실용적 성격으로 변화되기 쉽다. 현실적 가치를 세속적 기존에 맞춰 살펴보고 자신의 이론과 생각조차도 끼워 맞출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판단에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경우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이 마치 진리인 듯 말하게 만든다. 반대로 사유적 질문은 궁극적 성격으로 변화되기 쉽다. 아무리 현실적 이득이 자신에게 올 수 있다 해도 객관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모호한 부분에 대해서는 모른다 말할 수 있지만 아닌 사실에 대해서는 맞다고 말하지 않게 된다. 

인간에게 지혜란 한없이 의심하는 경계적 precautional 대상으로 세상이 나에게 주는 실용적 가치 기준에 맞춰 내 안의 합리적 질문조차 거세해버리고 합리적이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통해서 내 사유의 의심이 맹신의 늪으로 가지 않는지 항상 주의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알프레드 화이트헤드는 지혜란 지식을 제대로 저장하고 사용하기 위한 합리적 도구라고 불렀다.


익숙한 것조차도 질문하고 그 질문에 끊임없이 대답하려고 하는 과정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만든 기준과 가치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품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질문이 만드는 신비를 경험한다면 질문은 인류 발전에 가장 필요한 과정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질문을 두려워 하지 말아라

Tuesday, June 23, 2015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동안 유지해 온 과정을 적용할 때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고, 가장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박자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은 이런 신속함을 요구한다. 만일 행인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당신은 우선 놀랄 것이다. 잠시 후 그를 관찰할 준비가 되고 보니, 그는 이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해 보리라 하고 뒤 쫓아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피에르 썅소 Pierre Sansot 의 책을 읽는 순간의 느낌을 기억한다. 어렵지 않은 문장 속에서 내용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잠시 머물러 기다리면 그 내용들은 쉬운 내용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꼭 질문해야 하는 내용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나서 그의 모든 책들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의 또 다른 매력은 글의 내용과는 다른 문제의 해결책을 주는 것 같은 기분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로 시작하는 이 내용은 우리의 의심에 대한 내용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점 한문장 읽어가면서 어쩌면 이 글은 우리가 인생에서 항상 고민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나 현재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고민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인생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고 그 선택을 통해 무엇을 하고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금 하는 일들이 잘 되지 않을 때 '과거 언젠가 그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회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선택하지 않은 다른 선택 후보에 대해서 선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흔한 착각은 우리가 비교적 논리적이고 모든 결과 consequence 를 예측할 수 있을거라 믿는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렇게 될 것이야'와 같이 1차원적 인과관계의 나열이 상당히 논리적이라 믿는다. 비교적 다양한 결과를 생각한다 해도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설정된 예측이라기 보다는 순열적 sequential 추측을 이어가고 결론이 어느정도 나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여 다른 순열적 추측을 만든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신중한 사람이다.

인간의 선택은 아무리 1차원적이라고 해도 원인-결과를 생각해 가장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는 (믿는) 선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를 통해 문제는 인간에게 선택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찾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정'의 영역이란 점이다.

오랫동안 고민한 현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프트웨어를 소개해주고 어떻게 쓰는지 설명해주고 심지어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아도 몇일 후에 찾아가면 내가 알려준대로 편하게 사용하고 있겠지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다시 옛날 방식으로 어렵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때마다 왜 내가 알려준대로 사용하지 않는냐라고 묻지만 당연히 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또한 어색해지고 만다. 이와 같은 경험이 반복되면서 처음에는 '익숙한 것을 버리기 싫은' 이유라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자기 표현이 강한 친구의 말은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편한 것은 알겠는데 혹시나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기능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원하는 기능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막연한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리 쉽고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 선택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그 가정은 검증의 절차없이 선택에서 제외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피에르 쌍소의 표현대로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모르는 영역은 친근한 경험일 수 없고 결국 자신에게 친근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두려움은 자신이 모르는 새롭고 더 좋은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 항상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인간의 선택이 보여주는 새로운 특징이 있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두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친근한 경험에 근거한 가정으로 '선택하지 않음'을 더 자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는 인간의 선택을 축소시키고 무엇인가를 해도 좋을거란 희망을 가지기 보다 그렇게 해서 잘못되는 결과때문에 포기를 하게 된다. 그 가정의 올가미 속에서 우리의 언어는 참 신기한 작용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는 가정을 세우고 자신에게 친근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이 가정이 성립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곧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되기 쉬워'라고 단순 가정은 모든이 포함된 절대 가정이 되고 이 가정은 '모든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잘못된다'라는 확고한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가정은 의심을 초래하고 그 의심은 우리에게 다가온 가능성의 다양한 세상을 아주 단순화 시킨다. 그래서 인간의 선택에서 가정은 필요하지만 그 가정이 자신의 직접, 간접적 경험에 제한된다면 그 이상의 가능성과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더 큰 기회는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될 것이다. 항상 이야기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영재일 수 있지만 천재일 수 없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적응하고 그것을 잘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잘 적응된 아이에게 가정은 창의적인 내용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과 체계에 잘 들어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가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인식, 철학, 체계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기존의 구조를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끌어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피에르 쌍소가 말한 가정과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세상보다 더 멋진 세상이 있을거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을거란 열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내 선택의 가정이 익숙하고 알고 있는 것에 한정된 의심의 범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 가정은 인생의 선택에서 가능성은 제외하고 시작하게 된다. 결국 익숙한 것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은 쉽게 포기한다.

가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면 너는 이렇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꼈다. 단순한 인과관계가 사실이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될 필요도 없었고 사회갈등도 없었고 그 단순한 인과관계를 성립시켜줄 사회제도 (법, 제도) 등만 있으면 인간은 투명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행복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준 많은 사건들 속에는 가정을 통한 익숙한 것에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들이 전부라고 믿고 있다. 노예 제도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던 시절 노예도 주인과 동일한 인간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피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 제도는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과 끊임없는 행동이 존재해야 한다. 억압과 고통은 항상 익숙한 영역이다. 그래서 한 노예가 아무리 '같은 인간이지 않을까?'란 가능성을 생각해도 그 선택을 통해 얻어지는 고통과 아픔때문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많은 경우 '그거 해봤자...' , '그렇게 해봐도...' ,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란 말을 들을 때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누군가 억압받아도 '그래봤자 소용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 놈 그렇게 했다가 결국 자기만 죽었잖아' 와 같이 한가지 결론을 마치 모든 당연한 결론처럼 말하는 사람들, 정말 가치있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가능성이라도 노력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웃음 짓는 사람들... 인간의 가치는 그럴 수록 익숙하고 부조리한 굴레에서 더이상 벗어나지 못할 뿐이다.

예전에 항암치료를 받을 때 주사실에서 같이 항암제를 맞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독한 항암제때문에 무엇인가 먹으면 토했다. 그러나 또 먹고 곧 토하고 계속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렇게 토할 걸 먹지말자." 그러자 아이는 엄마에게 힘겹게 말했다.

"엄마 이번에는 먹을 수 있을거야." 

할수 없다 될 수 없다는 희망의 포기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누군가 지금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있다면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불가능을 믿지 말고 가능성을 믿어요.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모험을 했는가에 따라 행복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믿어요." 

인간의 선택에 포기에 의한 제외보다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을 그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을 때 우리 세상이 더 다양해지고 좀 더 가치있는 일들이 많아질 것이란 희망이 있다. 그 누구도 안개가 자욱한 경계에 서지 않고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할 수 없다. 경계의 근처도 가지 않고 경계 넘어에는 나에게 나쁜 것이 있을거야 믿는 것은 한번 살아야 하는 인생에서 너무도 슬픈 선택이다. [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인생이 포기와 익숙한 것의 굴레에서 계속 돌아간다면 얼마나 슬픈일이 될 것인가. 같은 책에 있던 다른 글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는 두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그 첫번째 형태. 이것은 의지적인 방식에 의한 것인데, 우리 자신의 도약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의 주도권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앞에 투영해 본다. 이때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과 '우리의 현재 모습' 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그리고 다소 시간이 걸리는 장기 계획을 세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토막난 짤막짤막한 시간들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삶에서 기다림이란 단지 주문한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 혹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지나가야 할 길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해야 할 방법들을 계산해 보는 시간 정도일 뿐이다.

두번째 형태. 이것은 첫번째 형태보다 덜 의지적인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방식에 의하면 우리는 마음을 여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되면, 우리의 인생의 큰 흐름을 결정짓는 굵은 사건들이 삶 속에 들어오기까지는 다소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기다리던 미래라는 수평선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자유롭고 텅 빈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드넓게 펼쳐진 빈 공간에서는 그동안 바라오던 수많은 사건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게 된다.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기다리기

인생의 선택에 대해서 ─ 익숙하지 않은 미래란 모험

Tuesday, January 28, 2014

개인적으로 종이가 주는 질료 (質料) 의 느낌이 좋아서 종이 책을 선호하지만 특별히 원하는 언어와 책을 구할 수 없을 때 전자책 (ebook) 은 좋은 대안을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은 전자책으로 구해서 보는 경우가 있다. 우연한 계기가 생겨 단테의 신곡 (The Divine Comedy, Dante Alighieri) 에 대한 독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핵심은 모국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의 모국어를 통해 읽고 토론하여 언어에 관계없이 책이 주는 느낌을 함께 공유해보자는 목적이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 편으로 각 편당 33개의 곡 (canto) 로 이루어졌고 마지막 행을 제외하고 3행이 하나의 단위를 가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문학적 아름다움, 특히 시적 운율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으면서 그 내용도 보면 볼수록 빠지는 그런 책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책의 구조를 보고 전자책으로 보게 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Intention vs. Attention

잠시 다른 화제를 먼저 생각해보자. Intention 과 Attention 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Intention 은 번역하면 '의도' 라고 번역되고, Attention 은 '주목' 하다 정도로 해석되지만 사실 개인이 어떤 대상 (object) 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의도 (intention) 인지, 주목 (attention) 인지 사실상 객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서 영화 추천 (suggestion) 을 해주는 기능을 보고 내가 의도적으로 특정 장르의 영화를 좋다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의도대로 의도된 장르를 추천해줄까? 하는 의문을 가진적 있었다. 즉, 페이스북이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추천해주는 기준은 일단 내가 좋다고 누른 영화를 바탕으로 분석한 것일텐데 내가 그 분류 기준이 영화의 장르인지 아니면 영화 배우, 감독 등도 고려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특정 영화 감독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좋아요 눌렀을 때 내가 의도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즉, 의도란 내가 특정 결과를 예상하고 그 결과대로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개입된다. 단순히 내가 의도하지 않고 그냥 좋아서 누르는 영화는 의도는 없지만 내 주목 (attention) 이 포함된 것이다. 따라서 내 의도는 포함되지 않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렇게 일상적으로 주목하는 대상들 사이에 내가 어떤 기준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주목한 내용들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내가 의식하지 않는 내용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돌아가는지 알 수 있게 되기도 한다.

Nature of intention & attention

만약 특정 개인이 만들어 내는 정보들이 의도된 정보인지, 주목된 정보인지 알 수 있는가? 사실 주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정보의 입장에서는 대부분 개인이 주목했다고 해도 많은 경우 무의식적으로 흘려지는 정보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개인의 위치정보이다. 스마트폰의 위치정보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특히 통신사의 통신 중계기의 정보와 무선랜 정보까지 포함되고, 더 정확하게 GPS 정보까지 보강된다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확하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위치 정보는 자신이 원해서 남기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데리고 다니는 핸드폰이 알아서 기록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을 잘 알고 있다면 이런 데이터 조차도 만들지 않도록 신경쓸 수 있지만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이런 개인 정보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반적으로 개인들은 파악하기 힘들다.

개인은 잘 모르지만 이미 위치 정보를 잘 기록하는 스마트폰을 가진 개인들은 최소한 위치 정보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체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다음의 페이지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Google Location History : maps.google.com/locationhistory

만약 구글 위치정보 수집에 동의하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정확한 자신의 위치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위의 페이지에 아무런 정보가 없다면 위치 정보 수집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쓰일 수 있다는 정보의 의도성에 대해서 이미 인지하고 있고 이런 정보가 서비스 업체 (구글이나 애플 등) 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다. 다만 우리는 그저 일상의 삶을 가볍게 살아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관심 내용 혹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내용들, 자신의 일상과 관련된 많은 정보들은 실제로 자신의 Attention (주목) 대상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의식적이지 않지만 자신이 흘러 다녔던 장소와 행동들은 특정 소비자가 어떤 지역에서 어느정도의 돈을 지불하는지 생활 패턴을 알아낼 수 있고 결국 개인의 주목 대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구글이나 애플과 같은 서비스업체들이 개인의 사사로운 위치 정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수많은 개인들의 행동 양식과 위치 정보들을 모으면 유용한 정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말에 싱글들은 어떤 지역에 자주 출몰하고 한번에 해당 지역에 출몰해서 얼마 정도의 돈을 쓰고 집에 들어오며, 집에 들어올 때까지 어떤 업종과 어떤 형태의 지불을 하는지에 대한 패턴을 연령대 뿐만 아니라 원래 거주지에 따른 분석까지도 가능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특정 상권 (신촌, 홍대, 종로와 같은...) 에 접근하기 위해 어느정도 교통비와 교통 거리를 감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이는 충분히 가치있는 마케팅 자료이며 어떤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도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Attention to Intention

이제 개인의 무의식, 의식의 주목 대상이었던 대상들, 행동 양식 등의 다양한 정보들이 하나의 의도를 가지는 정보로 변환되는 아주 작은 과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Attention 의 정보들이 패턴 (patterning) 과 관심 대상의 집중화 (narrowing) 으로 우리에게 의미있는 정보들을 반대로 제시해주는 과정이다. 즉,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주목 (attention) 의 대상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그 의미가 하나의 의도 (Intention) 을 가지는 정보로 다시 우리에게 제공되는 과정이다.

1. 가장 간단한 과정의 의도화 (Intention-ization)

가장 흔하지만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시무시한 의도화의 과정이 하나 있다. 아주 간단한 예이다. 만약 우리가 나와 같이 다른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 (두세명 정도 같이 찍은 사진이 가장 좋다.) 을 페이스북에 올리면 페이스북은 그중 사진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기존에 올려진 페이스북 주인의 모습과 비교해서) 선택해서 사진의 자신에 해당하는 사람을 골라 자신의 이름 태그 (name tag) 를 붙일 것인지 물어본다. 물어보지 않을 때도 타임라인에 올리기 위한 작은 크기의 사진으로 보여줄 때 즉, 썸네일 (thumbnail) 이미지를 만들때도 아무 규칙없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당 사진 중 페이스북 사용자가 있다면 사용자를 중심으로, 혹시 없다면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고 인물마저 없다면 가장 중심이 될 사물을 중심으로 작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작업은 사용자의 사진이나 활동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정확해진다. 즉, 사진에 사용자가 왼쪽에 있다면 우선 왼쪽의 사용자를 중심으로 작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2. 개인 맞춤형 광고

인터넷의 수많은 사이트에서 접할 수 있는 광고들은 아무 내용이나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광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접속하는 사이트의 성격과 내용, 특별히 이미 구매한 적이 있거나 관심이 있어서 살펴본 물품들이 자주 보이거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자신이 잠시 출장나온 지역에 대한 정보들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광고를 보여준다. 즉 잘 살펴보면 나와 별 관계없는 광고는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는데 잠시 스위스에 출장을 나와 있다면 광고는 지금 거주하는 지역이 스위스라는 것과 이 사용자의 주 활동 무대가 미국 워싱턴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광고 중 항공사 혹은 여행사 상품 중 두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권 상품에 대한 광고를 보여줄 것이다. 즉, 개인 맞춤형 광고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들은 우리들이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거나 우리들이 관심을 보일 수 밖에 없는 주목 (attention) 의 대상이고 그 주목의 내용들을 모아서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내용들을 만들어 의도 (intention) 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즉, 우리들의 attention 을 intention 으로 만들어 내느 것이 광고 엔진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고 이 intention (의도화) 를 얼마나 더 매력적으로 해주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구매 욕구와 우리의 구매 필요는 증가하게 될 것이다.

Back to the Divine Comedy, Dante

서론만 얘기하고 잊어버렸던 단테의 신곡 이야기로 다시 넘어오자.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새로운 시도에 대해서 이어가기 위해서 주목 (attention) 과 의도 (intention) 에 대한 미묘한 차이, 그리고 그 미묘한 차이가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른 목적성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을 위해 잠시 길게 돌아왔다.

새로운 시도는 다음과 같다. 단테의 신곡은 조금은 일정한 문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정하고 한 페이지에 표시되는 내용의 양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러한 문학적 구조를 통해서 조금은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재미있는 시도의 철학적 근거는 바로 우리가 주목하는 내용들이 의도를 가지고 분석될 수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즉, 인터넷 광고가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수집한 주목된 정보들이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매력적인 광고 내용으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독서 과정에서도 그러한 무의식적으로 주목된 정보들을 의도된 정보로 만들어 보자는 시도였다.

평소 습관과 다르게 전자책을 이용해서 독서하기 때문에 가지는 이점들을 통해 이런 attention to intention 과정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각 페이지 당 읽는데 머무는 시간을 측정한다. [ reading period per page; rp3 ] (머무는 시간은 전자책에서 책장을 넘기는 작업 (swiping) 의 제스쳐 (gesture) 를 잡아내 계산한다.)
2. 각 페이지당 머무는 시간에 따라서 내가 오래 머물러 있던 페이지를 골라낸다.
3. 페이지의 내용들을 수집하여 해당 페이지의 키워드를 찾아낸다.
4. 추출된 키워드에 의해서 머무는 시간에 관계없이 본문 전체 내용 중 키워드에 관련성 (relevance; relevant coefficient) 이 높은 구절을 뽑아낸다.

일반적으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기록하거나 표시하는 작업과 같이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내용에 주목하는 것을 골라내듯 내가 주목하는 내용들이 실제 페이지의 머무는 시간과 연관관계를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고 개인화 맞춤형 광고와 마찬가지로 내가 의식하지 않은 독서 과정을 통해서 내가 필요하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종의 의도 (intention) 된 정보들을 고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즉, 내가 관심을 가지는 내용에 머무르는 시간 (retention time) 은 증가할 것이고 해당 페이지에 있는 키워드들을 수집하면 내가 책을 통해 마음에 들거나 더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반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머무르는 시간은 안드로이드에서 제스쳐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측정했다. 사진은 전자책의 가독성으로 뛰어난 E-잉크 방식의 전자책기기

즉, 일상적인 주목의 내용들을 통해서 내가 관심가지는 내용이 무엇인지 조금은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적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특별히 나의 주목을 통해 만들어진 의도된 정보들이 내가 수동적으로 골라내어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고 싶었다. 키워드 추출을 위해 하나의 과정을 더 추가하였다.

5. 읽은 책은 국문 (한글판) 이였지만 영문판의 내용도 동시에 분석해서 영문 키워드로 추출해보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주목된 내용들에서 어떤 내용들이 의도된 정보를 가질 수 있는지 소위 내가 좋아할 가능성이 높은 구절들을 뽑아주었다. 단테의 신곡은 이번까지 네번째 읽은 것인데 이번의 독서를 통해서는 조금 다른 느낌, 그리고 내가 좀 더 바라는 무엇인가가 다르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읽는 중간에는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추출된 구절들을 모아보고 다시 읽어 보았을 때 키워드 없이 내가 원하는 내용이 무엇이구나 다시 느끼게 되기도 하였다.

6. 머무는 시간과 추출된 페이지의 관련성 분석

여기에 추가적으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분석이 있다. 물론 이 부분은 키워드 분석을 하고 관련성을 통해 해당 페이지를 추출할 때 설계해 놓은 부분이지만, 한 페이지를 읽는데 머무는 시간이 긴 페이지가 추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즉, 통계 분석에서 자주 범하게 된는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직접적인 연관 관계가 있는 변량 (variable) 사이에서의 결과가 바로 나오게 된는 과정이다. 즉, 중간의 키워드를 통한 추출 과정이라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설계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머무르는 시간이 긴 페이지의 경우 해당 페이지가 추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분석을 위한 시료의 크기와 분석 후 시료의 크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Significance of Sampling Size (S3)

머무르는 시간은 책의 페이지 단위로 측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요소가 있다. 전자책을 선택하며 이런 아이디어를 실현시켜보려고 했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전자책은 일반 종이책과는 다르게 해상도에 따라서 페이지 당 표시되는 정보의 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전자책은 종이가 주는 그 질감의 느낌을 절대 줄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가장 큰 부분은 아마도 전자책이 가지는 그 밝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반대로 종이책은 가질 수 없는 전자책의 특징은 해상도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글자 크기에 따라서 페이지 당 표시되는 내용의 양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이부분은 종이책과 다르게 한 페이지 당 표시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기기의 해상도에 따라서 한 페이지당 보여주는 정보의 양 (샘플의 크기) 는 달라진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높은 해상도가 편할 수 있지만 섬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낮은 해상도가 유리할 수 있다.

흔히 일정 크기 (주로 타블렛 수준) 의 화면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크기에서 어떤 활자와 어떤 기능이 가능한가에 따라서 가독성 등의 다양한 내용으로 전자기기가 가진는 전자책의 기능이 평가된다. 종이 활자와의 가독성을 비교하는 것은 제외하고 특정 제품 중에는 이런 가독성에 특히 특화된 제품들도 출시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독성을 위해서는 최소 어떤 크기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독서하는 동안 페이지당 머무는 시간을 통해 내가 좋아할만한 구절을 뽑아주는 작업에서도 한 페이지당 많은 정보가 표시되는 환경이 유리할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교를 위해 하나는 해상도가 낮은 일반 5인치 정도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보는 경우, 다른 경우는 해상도가 높은 타블렛으로 보는 경우를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전자의 경우 한 페이지당 표시되는 책의 양은 확실히 후자에 비해서 줄어들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마트폰 2페이지의 내용이 타블렛 한 페이지에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스마트폰의 경우에는 한 페이지당 샘플의 양이 작고 타블렛의 경우에는 샘플의 양이 커진다. 만약 키워드 분석을 위해 한 페이지당 머무는 시간을 측정할 때 어떤 기기가 유리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페이지 당 정보의 양이 작다는 것은 그만큼 분석의 크기가 좀 더 세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으로 읽는 것이 더 불편할 수 있지만 나의 정보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분석을 위한 샘플의 크기가 어떻게 되는지는 attention to intention 의 과정에서 얼마나 섬세한 정보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위치 정보의 경우에도 정밀한 위치가 정말 필요할까 싶지만 좀더 정밀한 위치, 정밀한 시간대를 파악할 수 있다면 정보의 양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세밀한 분석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용자들의 개인화된 주목 (personalized attentions) 을 수집해 개인들에게 필요한 의도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 (personalized intention) 의 과정에서 보다 매력적인 내용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주목되는 내용들이 섬세하면 섬세할 수록 좋다. 이는 다시 말해 개인들의 주목된 정보들의 샘플은 정밀할 수록 좋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큰 화면의 고해상도에서 검색하는 사용자보다 작은 화면으로 검색하는 사용자의 선택 양식 (decision patterns) 에 더 주목할 것이다. 따라서 모바일 환경에 맞는, 최적화된 웹페이지의 개발이란 단순히 모바일 환경에서 볼 수 있는 화면을 구성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페이지당 사용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어떻게 표시하고 어느정도 표시하여 구성할 것인지를 정해서 이 정보를 잘 이용한다면 고해상도의 컴퓨터 사용자들보다 더 유용한 사용자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용자의 해상도 정보는 어떤 검색을 하고 어떤 검색 내용에 더 충성도를 보이는가와 더불어 중요한 정보가 될 것이다.

Conclusive Inspiration

중심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주제는 Attention to intention 이다. 언어적인 느낌과 다르게 우리가 주목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실제 의식하며 주목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의 우리의 개인 생활의 영역으로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의 많은 부분 무의식의 행동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다니는 전자기기의 기능으로 우리들을 기록하고 추적한다. 개인 사생활의 영역에 대한 논의를 떠나 이러한 영역을 우리의 Attention 영역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부분은 의도 (Intention) 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독서라는 일상적인 내용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생활과 우리가 생각하는 내용을 좀 더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실험을 시도했고 그 중요한 핵심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페이지 당 머무르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관심가지는 대상을 찾아보고 그 분석된 결과를 통해 우리가 관심가질 수 있는 구절들을 찾아보는 과정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된 중요한 내용은

① 페이지와 같이 우리가 주목하는 샘플의 사이즈는 작아도 나름대로 유리할 수 있다는 부분
② 우리가 주목하는 정보의 샘플과 분석되어 나오는 결과의 샘플 크기에 신경 써야한다는 부분

이다. 그리고 조금은 신경써서 관찰하면 이 모든 과정들은 우리들의 일상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섬세하게 정보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찾게 된다. 자신의 경로를 기록하는 지도의 경우 처음에는 나의 위치정보를 기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더 중요한 정보는 위치정보와 함께 연결된 시간 정보이다. 즉, 위치에 시간 정보가 결합되어 좀 더 의미있는 정보로 가공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페이지에 머무른는 시간을 측정하는 것도 페이지라는 공간 정보에 시간이라는 정보를 포함시키는 과정이다. 즉, Attention 정보가 Intention 정보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 (time stamp) 더 정밀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이 특정 공간 (spatial information) 정보가 시간 정보 (periodic information) 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테의 신곡을 모두 읽고 나서 모아진 페이지당 머무른 시간에 대한 정보, 그리고 그 정보를 통해 추출된 키워드 (여기에서는 국문뿐만 아니라 영문 내용도 포함), 키워드를 통해 내가 관심가질 (intention results from my attention) 정보들을 검토해보면 내가 이번 독서를 통해서 어떤 내용에 집중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작은 시도에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 철학적, 과학적 질문에 대한 시작때문이었다. 시간에 변함없이 불변할 수 있는 자연법칙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생리학적 질문으로 환원하자면 어제 발현된 단백질이라고 100% 오늘 발현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있을까? 확률의 문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지만 우리의 정보가 좀 더 섬세한 분석을 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의 의미가 적절하게 항상 해석되어야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의 과학은 그 우연성의 확률을 진실로 믿고 있는 중이 아닌가. 그 어떤 정보와 정보의 분석에서 이제까지는 시간이 가지는 중요성을 쉽게 간과했지만 이제는 그 무의식의 영역마저도 우리가 알아내지 못하는 순간 기록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좋은 기회를 오히려 우리를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하는데 쓸 수 있는 실험의 설계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20대에 발생하면 안되는 암세포가 50대에도 똑같이 위험요소일까? 노화된 세포에게 암세포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전 (mechanism) 은 왜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기술적 한계로 인해 힘들었던 내용이지만 개인의 DNA 염기 서열 분석을 시공간으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은 (한 페이지당 머무는 시간과 같이...) 유전자가 환경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후생유전학의 영역 뿐만 아니라 노화 (Aging)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보의 섬세함에 대해서 ─ 무의식의 정보화

Saturday, November 30, 2013

제어 공학 (control engineering) 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제어 기법은 feedback control (되먹임 제어) 이다. 예를 들어 방안의 온도가 너무 낮을 때 적정 온도 (set point) 에 이르기까지 방에 난방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매번 측정된 값이 적정 온도보다 낮으면 계속 난방을 지속하고, 적정 온도에 이르거나 적정 온도보다 높으면 난방을 꺼 (OFF) 적정온도를 유지하도록 되먹임 (Feedback) 하는 것이다. 물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단순히 ON/OFF 로 제어하지 않고 적정 온도로 빠르게 수렴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난방에 투입되는 열량을 시간에 따라 연속적으로 (dynamic) 투입할 수 있다.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되먹임 제어 (Feedback control) 은 제어하고자 하는 대상을 측정하고 그 측정값에 맞춰 설정값 (set point) 와의 차이 등을 고려해서 어떤 동작 (열을 공급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 을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착각은 기대 (expectation) 에서 온다. 인간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 착각의 양"은 정해지기 마련이다. 적정 기대값(설정값)을 높게 하면 그만큼 되먹임 되는 반응(측정값)이 시원치 않을 때 주로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때 인간은 두가지 결정을 하게 된다. 반응 (되먹임 값) 이 기대만큼 높지 않기 때문에 적정 기대값을 낮추거나 아니면 적정 기대값에 올라오도록 계속 요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뜨끈 뜨끈한 방에서 등좀 지지고 싶은데 보일러 성능이 좋지 않아서 난방이 시원치 않게 되어 그냥 좀 추운대로 견디는 것이고, 후자는 그래도 등좀 지져야 하기에 전기 난로, 전기 장판 모두 동원해 난방을 시도하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실망하게 되면 다시 시도하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시스템을 다 꺼버리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적정 기대값을 낮추어서 계속 시도한다면 어느 정도에서 타협해야 하는지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경우 자신의 적정 기대값을 낮추어 기대를 줄이게 된다면 착각은 크게 줄어 들 것이다.


다른 경우 적정 기대값을 절대 낮추려 하지 않을 때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 기대값은 충분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대부분은 상대방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실망을 하지 않고 상대방이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되먹임 되어 온 반응 (측정값)을 적절하게 순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시스템은 망가지기 쉽다. 측정값을 임의로 판단하면 제대로 된 행동을 취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적정 기대값이 높은데 상대방이 따라주지 않는다 하면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중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충분히 섹시미가 풍부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의 섹시한 매력에 빠져 공적인 자리에서 만난 어린 인턴도 넘어올거라 기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내는 수많은 질타 (반응, 되먹임) 는 자신의 섹시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결과라 믿을 것이다. 
공직의 자리에 있으면 자신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의 뛰어난 언변에 빠져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해도 충분히 이해할거라 기대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내는 수많은 야유 (반응, 되먹임) 는 자신의 정신세계가 너무 고귀한 안타가움이라고 믿을 것이다.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너무 높은 기대에 있는 사람들이 그 되먹임 반응을 좀 제대로 받아들여 기대값을 줄여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의 높은 기대값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착각에 불쾌해 하는데 그것조차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한다.

제어공학의 실패 사례들... 

착각은 기대에서 온다. ─ 제어공학적 관찰

Monday, November 18, 2013

유난히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영화가 있다. 영화 아일랜드 (The Island; 2005) 는 인간 복제 기술 (cloning technology) 을 통해서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얻기 위해서 복제 인간을 가두어 기르는 상황을 다루었다. 결국 복제된 인간은 스스로 자각하고 거부하고 투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의 필요에 의해 소위 '생산되는' 인간들도 인간이 가지는 인격과 자아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과 비슷하게 어쩌면 이야기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상황은 거의 동일한 영화가 있다. 영화 NEVER LET ME GO (2010) 은 시대적 배경은 70년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활기찬 영국의 기숙학교를 시작으로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작한다.

NEVER LET ME GO (2010) 

영화 NEVER LET ME GO 는 영화 사이에 삽입되어 흘러나오는 가사이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누군가의 장기 공급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갈등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말이기도 할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느끼게 되는 것은 복제 인간, 장기 공급을 위해 생산되는 인간 등과 같은 비윤리성, 그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 등도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영화 한편을 접하고 나서 두 영화가 가지는 공통점에 대한 실마리를 통해서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영화는 다소 생소한 그리스 영화 Dogtooth (Κυνόδοντας ; 송곳니 2009) 이다.

NEVER LET ME GO (2010)

DOGTOOTH (2009) 

영화는 어느 한 가정에서 시작한다. 절제된 대사, 조금은 지루해 보이는 영화는 조금씩 영화의 배경을 알게 되면서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부모는 자신의 자식들을 울타리 안에서 자라게 하면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게 한다. 그리고 울타리 안에서의 교육과 교육 내용은 우리의 일반적 상식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전달된다. 물론 아버지는 울타리 넘어 밖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바깥 세상은 위험하기 때문에 다 자라 '송곳니 (dogtooth)' 가 빠지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DOGTOOTH (2009)

두 영화를 보고 나면 두가지 당혹감이자 새로운 느낌을 가지게 된다. 두 영화는 모두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NEVER LET ME GO 의 경우 좀더 확장된 사회의 개념이고 DOGTOOTH 의 경우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의 개념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족을 포함한 어떤 사회도 고립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특이한 현상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영화라는 점을 고려해서 생각해야겠지만 두 영화 모두 고립되어 전달되는 언어 체계를 보여준다. '일반적'이란 말의 정의가 어렵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 영화 속 인물들을 직접 만난다면 언어적 소통이 조금은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만들었다. 즉, 아무리 같은 영어를 쓰고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도 단어, 문장을 쓰는 의미가 그들만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NEVER LET ME GO 에서는 죽음을 COMPLETION (COMPLETE ; 죽다) 라고 말하고, 자신이 복제된 원래 인간을 표현할 때 직접적 표현보다는 ( ... WHO I AM MODELED ON ) 이라 말한다. 또한 일상의 평범한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황극을 통해서 연습시킨다. DOGTOOTH 는 그런 언어의 고립 현상을 더욱 더 부각시켜 보여준다. 그리스어이기 때문에 정확한 느낌을 전달받기 어려웠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나오는 언어 학습 테이프를 통해서 가족 안에서 정의된 단어와 실제 외부 세계에서 정의된 단어를 다르게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아버지는 그들이 언어를 통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지 못하게 하도록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적 호기심을 끊을 수 있는 단어의 뜻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두려움이 작동하는 울타리 

자신이 기르는 양이나 가축을 지키기 위해서 울타리를 친다. 울타리를 통해 영역을 표시하여 외부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영역에 있는 존재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문제는 내부의 존재를 외부로 나가지 못하게 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두려움' 이라는 점이다.

NEVER LET ME GO (2010)

NEVER LET ME GO 의 한 장면은 그런 두려움이 작동하는 가장 효과적인 울타리를 보여준다. 공놀이를 하다가 울타리 넘어로 넘어간 공을 두고 모든 아이들이 공을 찾으러 나가지 않는다. 이에 의문을 품은 신입 교사는 물어본다. "왜 공을 찾으러 안가니?" 아이들은 당연한듯 이야기한다. 울타리 넘어 가면 뭔가 자신들을 해칠 무엇인가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렇게 당했던 알 수 없는 소문을 진실로 믿고 있다. 가축들이 울타리 넘어로 넘어가지 못하게 마치 울타리 전체에 전기를 흐르게 해서 넘어갈 때 전기가 주는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전기가 주는 고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이상의 무엇인가 나에게 주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가능성'이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점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DOGTOOTH 도 마찬가지이다. 울타리 넘어의 위험 요소를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구체화시키고 그것이 어떻게 위험이 될 수 있는지 두려움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막이 된다.

시스템에 순종적인 인간들 

사실 두려움은 충분히 인간에게 필요한 요소이다.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좋은 방어 기재이기도 하고 반복되는 위험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필요성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계속되어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호기심이 사라지게 되는 순간 인간이 믿는 내용들은 일종의 코메디 혹은 황당한 이야기가 된다. 두 영화가 공통으로 주는 두번째 공통점은 비현실적 황당함이다. NEVER LET ME GO 는 비현실적 상황에 대해서 너무도 진지하게 다가간다. 보통 장기 기증을 3번정도 하고 생명 유지가 어렵거나 너무 힘들기 때문에 죽는 것 (COMPLETION) 을 택한다. 그런데 이 집단 중에 사랑하는 연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3~4년 정도 장기 기증을 유예 (DEFERRAL)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 들은 이 유예 제도에 적용되기 위해 관리자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유예 제도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한 예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의 그림을 선택해서 전시하는 갤러리 시스템을 '진짜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정' 이라고 자신들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NEVER LET ME GO (2010)

NEVER LET ME GO 는 죽음이라는 절박한 상황때문에 시스템의 목적과 이유를 오해하고 그 잘못 인식된 시스템에 순종하기 위해서 황당한 결정과 행동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황당함'의 반대편을 DOGTOOTH 는 보여준다. 그 황당함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이다. 고립된 가족들만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진지하고 전혀 웃기지 않지만 외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너무도 황당하고 황당하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일부 영화 소개 사이트에서는 이 영화 장르를 '코메디'로 분류하기도 했다. 그만큼 영화 내내 보여주는 내용은 상당히 진지한 코메디 같은 내용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시종일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진지하다. 그들은 그 삶이 무척 일상적이다. 그러나 그 일상적 행동들은 우리들의 눈에는 너무도 우습기만 할 뿐이다. 그렇게 가족들만이 가지는 시스템에 순종적인 그들은 결국 외부의 시선에서는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그런 이유로 고립된 사회가 보여주는 황당함의 결과는 때로는 유쾌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식의 울타리 속 인간들 

두 영화는 조금 지루했지만 끝까지 흥미를 이끄는 극적 긴장감은 액션 영화만큼 충분했다. (물론 이 부분은 개인적인 느낌이니 절대 참고하지 않기를...)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황당함이 단지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런 인식의 울타리는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차이, 삶의 방식 때로는 너무 이해가 안되는 문화적 풍습 등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당황스러움은 영화가 주는 황당함과 그 맥락이 비슷할 때가 많다. 다만 이런 문화적 차이점에는 우리가 알고자 한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차이점은 있을 것이다. 즉, 울타리를 넘는 두려움은 다소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적 차이도 결국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익숙해져 울타리 안의 세상이 만든 시스템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시스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당황해 할 수 있게 된다.

불편한 진실을 모르고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A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 B
불편한 진실을 모르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 C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 D 


특별한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이 땅에서 나오는 석유가 실제로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추출해서 만들어진 것이란 말도 안되는 내용이 진실이 되어버렸을 때 위의 네명 중 누가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른다는 것은 때로는 무시한다는 것과 실질적으로 같을 수 있다고 가정하면 아마도 사람 A 가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일단 그런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자체가 수식어가 표현해주듯 '불편한' 상황이 되어 버린다.

인식의 울타리 넘어... 

[ 두려움의 현기증을 즐기자. ] 어떤 경계에 선다는 것은 항상 두려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세상에 다가가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 경계에는 항상 우리가 모르는 인식의 울타리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잘 살아가고 울타리 안의 시스템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시스템에 손종하며 잘 살아가기 때문에 울타리 밖의 '무엇인가 다른 것 (something different) 은 황당한 것 (something absurd;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 으로 간주한다. 그것이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다.


두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우리의 황당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에서 진지하고 충분히 정상적인 무엇인가도 인식의 울타리 넘어 있는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영화를 보는 '황당홤'처럼 어이없이 진지하고 우스꽝스러운 세상일지 모른다. 즉, 우리 세상이 황당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요즘같이 정치적 대립이 극명한 상황에서 정치인들의 발언 등을 보면서 '인식의 울타리'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주는 공포와 유머는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황당함'과 일면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비록 물리적으로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그 진지한 황당함, 우스꽝스런 황당함 모두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세상에서 살면서 인식의 울타리 넘어 가보려는 호기심보다 순응하며 살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DOGTOOTH (2009)

예를 들어 아무리 현제의 정치 제도가 자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그 현실적 배경과 다르게 어떤 이들에게는 마치 '절대 왕정' 이라는 인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간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해석 가능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인식의 울타리

어린 시절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무엇이냐 물으면 누군가는 '재벌 아빠' 정도로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은 '낯선 곳으로 여행'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인식의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는 가장 큰 호기심은 경계와 울타리가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충분히 이기게 만든다. 그래서 교통이 불편하던 고대시대부터 '방랑자', '순례자' 는 항상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때문에 환영받게 된다. 낯선 세상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느끼지 못하던 시스템에 대한 호기심은 우리의 삶을 자극시키는 하나의 촉매가 된다. 물론 그 호기심을 위해 때로는 고통을 느껴야 하기도 하지만 순수한 여행자들에게 그런 고통은 그저 즐거운 경험이 될 뿐이다.


영화 NEVER LET ME GO 의 처음부터 끝까지 왜 주인공들은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했는가 질문을 하게된다. 초반에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소위 졸업을 하고 장기 이식을 위해 외부 세계에서 생활하는 몇년간의 삶 동안 그들에게 물리적인 울타리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시도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죽음 (COMPLETION) 을 순응해야 했다. 그만큼 우리에게 더욱 더 무서운 것은 죽는 순간까지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하고 순종하는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들이 인식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떤 정치인이 잘못했다 잘했다 의 소위 정의의 문제 (a matter of justice) 를 이야기하며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인식의 울타리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때로는 이때문에 서로를 파괴하는 과정까지 가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인식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우리가 두 영화를 보며 느끼는 황당함처럼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이미 충분히 황당하고 어이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순수한 여행자가 되고픈 마음 

순수하다는 것은 순종적이란 말과 다를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가 만든, 마치 두 영화에서 만든 기숙학교나 고립된 가족과 같은 시스템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때로는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울타리를 넘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과 공포의 요소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불합리한지 최소한 검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울타리를 넘어갈 수 있는 순수한 여행자가 세상에 많아진다면 세상의 옳고 그름을 위해 피를 토하며 주장하지 않아도 무엇이 황당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순수한 여행자란 인식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결국 NEVER LET ME GO 라며 나가고 싶은 마음에도 스스로 나가지 못하는 결정을 내리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LET ME GO 가 아닌 왜 LET MYSELF GO 인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도 생각해볼 주제가 아닐까 싶다. 결국 그들을 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에 순종하며 두려움에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일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의 울타리 ─ NEVER LET ME GO (2010)

Monday, July 15, 2013

자네에게 묻겠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겠지. 그러나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이 나무 위에서 산다면 겁이 나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일세. 그러나 원숭이도 그럴까? 이 셋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거주지' 〔正處〕 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뱀은 지네를 달게 먹고, 올빼미는 쥐를 좋다고 먹지.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맛' 〔正味〕 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맺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함께 놀지. 모장이나 여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고, 새는 보자마자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보자마자 급히 도망가 버린다네. 이 넷 중에서 어느 쪽이 '올바른 아름다움' 〔正色〕 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장자, 제물론」 


아름다움은 인간의 주관적 판단의 결과라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만약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물고기도 새들도 사슴도 도망가지 않고 아름다움에 반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이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보다는 반대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는 환상적 요소를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인간이 바라보는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움은 대부분 순간적인 것들이 많다. 일시적이고 영원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때로는 인간 스스로를 허무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일지 모른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되돌아 보는 자세와 더불어 대중적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목받지 않거나 너무도 익숙해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섬세한 관심도 필요하지 않을까?

결국 아름다움에 대한 허무한 결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세지도 전해주는 것은 아닌가.

진정한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