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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ne 26, 2018


2016년 1월 어느 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혼자인 곳에서 갑자기 주인분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급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셨다. 그 공간은 절대적으로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들어오셨다. 안을 잠깐 살펴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무엇인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다가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와 함께 작은 종이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 온 학생입니다. 학비마련을 위해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격대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지만 카드를 받을 수 없으실 것 같아 현금을 확인해보니 지갑에는 3,000원이 있었다. 가장 작아 보이는 열쇠고리가 얼마인지 물어보니 가방을 잡고 손가락으로 어렵게 셋을 세어 알려주었다. 그래서 "뜨리? 아진 드바 뜨리?" 해서 물어보니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리고는 고르라고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수작업으로 그린 열쇠고리인듯 했다. 작은 열쇠고리에 채색은 그렇다고 해도 얼굴 모양은 조금 이상한 것들도 있었다.

열개 정도의 열쇠고리 중에서 가장 안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골랐다. 순간 내가 안 이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른다면 다른 누군가는 더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냥 그분을 도와주려고 삼천원을 쓰고 안 쓸려고 그런게 아니라 어딘가 쓸모있게 내가 써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쇠고리 인형은 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



여전히 과장된 눈썹은 삐뚤하고 다소 유머스러운 얼굴도 그대로다. 전자기기 전원 버튼에 붙어 있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흠있어 보이는 것을 먼저 가지려 한다. 가졌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예쁘고 안 예쁘고는 내 눈의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들고 예쁜 것을 고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가끔 가장 안 예쁜 것을 고르는 나를 보며 '왜 그런 것을 고르냐고' 타박하는 분들도 계신다.

세상에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 가치와 시선에 따라서 두가지 형태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 가치에 대해서 ─ 기능적 존재 vs. 근본적 존재 ] 어떤 기능을 해야만 존재의 가치가 생기는 경우와 그냥 있는 그대로 어떤 기능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가치를 가지는 경우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 잘 하는 존재로 이득이 될 때 기능적 존재를 잘 설명할 것이고 그냥 누군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하지 못해도 그냥 그대로의 자식으로의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이 근본적 존재로 설명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태어나서 오랜동안 아프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기능적 존재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런 존재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삶, 인간의 생명 안에는 그 자체로 근본적 존재 가치를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생명에는 그런 근본적 가치를 가진다.

제부터인지 잘 알 수 없다. 자본주의 capitalism 가 상식이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자본의 가치가 모든 가치의 척도와 같은 때로는 교환 가능한 가치가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는 때로는 근본적 존재 가치마저도 때로는 버릴 수 있는 가치라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어렵지만 어떤 동물의 생명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살릴 수 없음도 그렇게 잔인한 선택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어떤 동물의 생명에게는 애완용 혹은 어떤 이유로 필요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있는 생명과 그렇게 하기에는 비용이 많은 생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소설이자 영화인 오두막 (The Shack) 은 상처입은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의 자전적 상처를 통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많은 이들이 평가하지만 오두막을 읽고 나서 상처 혹은 치유에 대해 무엇이다 말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에 인간은 그렇게도 많은 평가를 내리고 무엇이 더 '좋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들이 결국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짧은 내용을 강하게 보여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매켄지가 동굴에서 여인의 모습을 한 하느님과 만나는 장면을 보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여인이 매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 중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두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딱 두 명만."

...

"또 당신의 자녀 중에서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갈 세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모습들을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가치있는 자식인지 비교하는 것은 전혀 의미도 없고 그럴수도 없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공감하게 된다. 바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소위 공부를 잘하는 돈을 잘 버는 자식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가끔 책상 위에 놓고 싶은 꽃을 위해 꽃집에 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꽃 - 라넌큘러스 - 을 몇 송이 놓고 그 꽃들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게 된다. 라넌큘러스는 참 약하다. 꽃이 화사하게 피기 전에는 알갱이 같이 작은 꽃봉오리는 장미처럼 무엇인가 화려하게 필 준비를 하기 보다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고 꽃이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면 쉽게 휘어지고 꽃대도 자주 꺾여버린다. 꽃이 다 피고 나면 꽃잎은 떨어지거나 색이 변하며 원래 색을 유지하는 시간보다 지는 시간을 더 많이 바라봐야 하고 꽃잎이 많이 떨어진 꽃은 때로는 볼품없는 대머리 독수리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도 좋다. 그래서 꺾어진 꽃대는 휴지로 부목을 대주기도 하고 떨어진 꽃잎들은 모아서 책갈피로 만들어 선물주기도 한다. 손이 많이 가고 아름다운 시간보다 초라해 보이는 시간이 많은 꽃이지만 그래도 그냥 좋다.

그래서 어디에 있게 되어도 항상 동네를 살피며 꽃집을 찾게 된다. 한국에서 꽃집은 조금 다른 느낌이 많았다. 결국 어디나 꽃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지만 그래도 꽃집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언제나처럼 라넌귤러스를 찾으면 처음에는 왜 그런 꽃을 찾을까 싶어하지만 그래도 몇송이 남은 꽃을 건네준다. 그리고 깔끔하고 많은 이들이 좋아할 대중적인 꽃집일수록 항상 정확했다. 한 송이에 얼마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내가 좋아하는 라넌큘러스는 몇송이 없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꺾여 있거나 너무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은 주지 않으려고 한다. 팔 수 없다고 하면 괜찮다고 가져가겠다고 하면 어떤 가게는 그 팔수 없다고 했던 꽃들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받는다. 어떤 가게는 반값에 그렇게 계산해서 준다. 팔 수 없는 꽃을 가져가겠다고 하니 그냥 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장사니깐 싶어 쉽게 그냥 달라고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가져오고 나면 기분이 활짝 좋거나 그렇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책상에 놓일 꽃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분은 꽃처럼 좋지는 않았다. 어느날 골목길을 지나가다 간판도 오래된 꽃집을 보았다. 잠깐 발길을 돌려 꽃집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았던 많은 화려하고 화사한 꽃집은 아니였고 그냥 정말 거의 대부분의 공간은 꽃들과 화분에 양보하고 오래된 형광등 불빛은 다소 어둡기까지 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일어나서 무엇을 찾냐고 물어오셨다. 난 역시 라넌큘러스를 찾았다. 아저씨는 다소 놀라시며 몇송이 있긴 한데 핀것도 많고 그래서 많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섯송이 정도 다양한 색으로 잡고는 간단하게 포장해주셨다. 어짜피 집에 놓을 것이니깐 포장 많이 안해주셔도 된다고 하니 그래도 가는 동안 괜찮게 줄기 끝부분만 잘 포장해주셨다. 그리고 다른 가게에서는 두송이 정도 살수 있는 가격으로 여섯송이를 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전해주신 아저씨의 얼굴이 더 신기했다. 라넌큘러스를 찾는 남자분은 처음보셨다면서 꽃이 꺾어지면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시는데 난 휴지로 꽃대를 세운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렇게 하고 책갈피도 만들어요. 라고 말하니 아저씨는 정말 화사하게 꽃처럼 웃으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에 오면 잘 모아두었다고 주신다고 하셨다.

그 이후에도 몇번 찾아 아저씨 가게에 갔다. 오늘은 세송이 뿐이라며 2,000원만 받으시기도 하고 다른 가게에서 받던 가격을 생각하면 아저씨가 손해보시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그보다 꽃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정말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구나 생각될 때가 많았다. 아저씨는 꽃을 가져가 얼마나 잘 키울지 생각하면 기분좋은 손님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손님이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아저씨는 꽃을 팔지만 정말 꽃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아지를 분양한다며 강아지를 파는 가게들을 지나갈 때마다 많은 생각들이 든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저렇게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거나 어떤 강아지가 더 인기가 많다 어떤 품종은 똑똑하다 라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나중에 인류의 생명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인간을 체외 in vitro 에서 임신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도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선택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꽃을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해도 강아지 정도는 생명이 아니라고 바라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꽃 하나 꺾어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안타가워 하는 사람들보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강아지라면 달라질 것이다. 강아지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생명을 다했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는 않아도 꽃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의 모습만 다를 뿐 다 같은 자연의 생명인데 생명의 사라짐에도 이처럼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생명의 사라짐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다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월호가 침몰한 2014년 그 해도 분명 봄은 찾아왔었다. 그 때도 벚꽃은 피었었다. 그 해 아직 개화하지 못하고 낙화한 어떤 꽃봉우리를 보았다. 예전 같다면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지나쳤지만 그 해 아직 개화도 못한 낙화를 보고 침몰하는 배안에서 사라진 생명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생명들이 겹치면서 그 꽃마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 느껴졌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꽃들도 그리 긴 시간을 견디어 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섭리 providence 일지 모른다.

많은 이들은 '사랑'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많은 조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는 것 중에 정말 사랑을 위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워지고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조건으로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 그 조건이 사라진다면 그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분히 좋아할만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좋아할 수 없어 모두가 다 떠나갈 때도 지켜주는 이가 누구인지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누구나 화려하게 아름답게 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꺾어지고 찢기고 상처난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줄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냥 버리는 이들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요할 뿐이다.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줄껀가요

Sunday, July 5, 2015

episode 1.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가 있었다. 부부 모두 지역의 교장 선생님을 하셨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밖에서는 항상 인자하고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남편은 그러나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 폭력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폭력이 잘못된 것을 알지만 습관이 되고 심지어 남들이 알지 못하게 얼굴과 같이 노출되는 부위는 때리지 않는 모습까지 보였다. 계속되는 폭력에 지친 아내는 늦은 나이였지만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선택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편의 가정 폭력을 잘 알고 있던 대학생 딸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 그러나 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가 이혼하면 제가 시집을 좋은데 갈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주세요." 


episode 2.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는 가정처럼 보였지만 남편은 결혼 이전부터 만나던 여인을 결혼 이후에도 만나며 아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들을 포함한 집안의 모든 일들을 아내에게 맡기고 외도를 계속 이어갔다. 가정 폭력은 없었지만 오히려 가정에 관심을 쓰지 않고 단지 돈 벌어오는데 무슨 문제냐며 오히려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내는 마음먹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경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아내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아들과 둘이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학생 아들에게 아버지와 이혼했으면 싶다고 말했고 아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제가 학교에서 왕따당해요. 제가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기 바라시는거예요?" 

개인적으로 최근에 들었던 가장 소름돋는 이야기였다. 이밖에도 믿기 힘든 실화를 들었지만 아주 짧게 요약해서 소개해보았다. 특정인물이 관련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이야기의 구조와 등장인물을 각색한 부분도 있었지만 부모의 이혼에 대한 딸과 아들의 태도와 느낌은 가장 비슷하게 표현하도록 노력했다.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엄마의 선택에 딸과 아들은 '당신의 그 선택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망칠 수 있으니 하지 마세요.' 와 다를 것 없는 그 말이 너무도 무섭고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딸과 아들이 말을 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한 단어는 바로 '괴물'이었다.

물이 사는 세상 

괴물이라고 하면 인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고 때로는 협오스럽고 보자 마자 이질적인 느낌때문에 좋은 느낌을 가지기 힘든 대상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괴물 (2006) 을 보면 그 흉찍한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격성 때문에 인간은 무서워하고 괴물이 죽어 사라지기만을 바란다. 영화에 의해 형상화된 것이 아니라도 괴물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나쁜 모습들을 많이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이며 사람들은 그 협오와 두려움으로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결국 인간과 괴물은 대결의 구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왜 죽여야 하는지 모르고 서로에게 공격하게 된다. 물론 많은 경우 괴물은 인간보다 생물학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죽이지 못하고 반대로 인간은 괴물에 의해 쉽게 죽는다.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힘없고 나약하지만 단지 겉모습 때문에 인간의 편견에 사로잡혀 인간에게 쫓기며 사는 괴물들도 있다. 나름대로 괴물의 형상이지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영화가 슈렉 (Shrek, 2001) 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슈렉도 상당히 인간적 형상이다.


다양한 형태의 괴물이 존재하지만 괴물이라는 대상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수 social majority 에 의해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주류 사회에 소속될 수도 없고 심지어 외롭게 살아가도 인간의 폭력과 공포로 인하여 끊임없이 인간의 공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괴물은 사회의 산물 product 이다. 영화 괴물은 인간이 버린 유해 물질에 의해서 한강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괴물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회에 의해 버림받지만 사실 그 사회의 잘못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쩌면 괴물을 설명하는 아주 짧고 역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괴물이라 부를까? 

개인적으로 앞서 소개한 예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몇명 소수의 이야기라고 놀라고 넘어가기 보다는 내가 듣지 못한 비슷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그리고 이 사회에서 이런 실화가 얼마나 평범한 것은 아닌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소에서 언급되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이 생각난다. 우리가 겉모습만으로 아무렇지 않고 평범할 것이라 생각했던 많은 대상이 어쩌면 악한 본성을 너무도 잘 나타내는 대상일지 모른다는 그 잔잔한 공포가 느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사회의 평범한 모습인데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가끔 이런 순간 무엇이 문제일까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있다. 글로 표현하고 싶은데 더 이상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른 그런 순간이다. 그런 순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글쓰기 방법이 하나 있다. 현상을 듣고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나는 단어를 찾는 것이다. '괴물' 가장 먼저 생각난 단어였다. 그리고 내가 왜라는 질문은 잠시 보류하고 내가 생각한 그 단어의 어원 word origin 을 찾아보는 것이다. 익숙하게 알고 있는 괴물이란 단어는 무슨 뜻일까? 영어로 괴물은 monster 이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monstum , monere 로 각각 뜻은 portent , warn 이란 뜻이다. 즉, portent 는 징후 전조이고 warn 은 경고(하다) 이다. 즉, 괴물 monster 는 단순히 우리가 제거해야 할 대상 혹은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만이 아니라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경고하고 있단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괴물은 많은 경우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만든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괴물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인간들의 공격에 혹은 스스로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의해서 자신을 만든 그 사회와 대결하며 살아야 한다. 괴물의 어원이 뜻밖에 '경고'란 뜻은 새로운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괴물이란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경고하고 있고 그 경고는 사회가 그 경고를 방치하면 다음 괴물이 될 수 있는 희생자는 바로 나 혹은 내 주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회가 만든 괴물에 대해서... 

두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딸과 아들은 엄마의 인생, 엄마의 행복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예전에 스웨덴에서 만는 가정이 생각났다. 원래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범하게 자식들 3명을 낳고 잘 살고 있다가 남편이 갑자기 자신의 성적 정체성 sexual identity 가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임을 알게 되었고 아내와 논의 끝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남편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들은 본인의 결정에 따라 엄마와 같이 살거나 두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은 엄마에게 나머지 큰딸과 큰 아들은 두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독립하며 살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늦게 알게 된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데 개인적으로 심한 혼란감과 많은 궁금증이 들게 되었다. 혼란감이야 익숙하지 않은 동성애에 대한 느낌이었고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궁금증은 당시 그런 선택에 대한 자식들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던 큰 아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행복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저의 싫음때문에 포기하지 않기 바랬다.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랬다." 

자신의 '더 좋은' 혼인을 위해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그 노력을 무시하고 자신의 '더 좋은' 학교 생활을 위해 어머니의 자존감을 가지기 위한 그 많은 노력들을 보지 않았다. 누구의 행복이 더 우선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위해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할 수 있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 문제를 떠나 자신의 혼인과 학교를 위해서 어머니의 행복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에 더 가깝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 누군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망치는 것도 불행한데 이 경우들은 자신의 미래를 담보로 타인의 현재를 망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불행을 보면서 그리고 어머니는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렵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머니의 행복한 삶을 위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이 찾고자 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고 심지어 그 대상들은 정말 본인의 행복을 정말 실현해줄 수 있는 대상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자식들 (욕 아님...) 을 괴물이라 부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불행마저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의 삶, 행복, 생명마저도 파괴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화들을 들으면서 느낀 그 소름끼치는 느낌들은 괴물, monster 란 단어가 가지는 라틴어 어원처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경고를 경고로 느끼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심각하지 않다거나 어쩔 수 없지 않나... 와 같이 순응하며 살게 된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다음 사람은 당신의 자식,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면 그냥 순응하며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쟁만이 강요되는 사회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것들이 수없이 많겠지만 자신의 욕망,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은 희생되어도 되고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지 못하고 타인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도 괜찮다고 고민없이 사는 괴물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게 된다. 사회의 어떤 잘못된 부분이 이들을 괴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먼저 딸과 아들이 욕망했던 대상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학교 ... 그리고 결혼은 '좋은데 시집' 가는 것, '왕따 당하지' 않는 것 둘 모두 조건의 문제였다. 두개의 에피소드 말고도 다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점은 바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대상 (결혼, 학교) 인듯 보였지만 사실 조건 (더 좋은, 왕땅 당하지 않는) 이었다. 조건의 속성 property 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표현은 조건이었지만 항상 사회적으로 더 좋은... 덜 좋은... 때로는 가장 좋은... 과 같은 비교의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가벼운 사실을 너무도 무겁게 받아들인다. 인생의 경로는 대학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경쟁의 구조 속에서 대학이라는 대상과 '더 좋은'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끊임없이 욕망하게 한다. 그 욕망 이외에는 중요하지 않다. 교육은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한 기능만 할 뿐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로움을 주는 사회 구성원을 만드는데 별 관심이 없다. 경쟁만이 강요될 뿐이다. 더 좋은 경로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 사람이 이 사회에 이로움을 줄지 온갖 해악과 더러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왜  그토록 수많은 돈과 자원을 쏟아가며 괴물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인가. 이계삼 선생님의 [ 공부는 힘이 세다 ] 를 꼭 읽기를 권한다.

"공부를 잘하면 한수원 직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보다 공부 못했던 하청 직원들에게 피폭 노동을 맡길 수 있다. ‘컨트롤 C에서 컨트롤 V’로 끝나는 보고서에 밀양 주민들의 생존권을 빼앗을 법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것도 바로 서울대와 미국 박사의 스펙이 엮어낸 전문가의 자격이다.

나는 지금껏 돈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실감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돈이 인간의 영혼을 주장하지는 못하리라는 믿음 또한 갖고 있었다.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난 2년 사이 공부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실감을 얻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공부가 인간의 영혼마저 주장하고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돈보다 공부가 더 힘이 세다.

국립묘지에 조성된 '정의의 상' 공부를 잘하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했다. 그때 가장 분개하고 거리에 나온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학생이였다. 지금의 경쟁 사회 속에서 가능할까 의문하게 된다. 

경쟁을 통해 잘 선발된 인재들이 우리 사회를 이롭게 하고 발전시키고 더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은 거의 반대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반대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정한 과정보다 유리한 조건만 생각하고 같이 걸어가는 동료보다는 짓밟고 올라갈 수 있는 경쟁자만 생각한다.

과관계의 희생자 casualty of causality 

어머니의 희생을 강요하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얼마나 교육이 중요한지 느끼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인과관계에 대한 멍청함이다. 흔히 인간은 지금의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은 잘한다. 그러나 지금의 원인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쉽게 확신한다.

어머니가 이혼하면 딸은 더 좋은 결혼을 하지 못할것이라 믿고 있고 아들은 학교 생활에서 왕따 당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와 비슷한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서울대를 갈 것이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인성을 가질 것이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직장)을 가지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욕망의 사슬에는 건강으로 모든 것을 잃거나 한순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과정의 목표들 중에는 왜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내용은 없고 '더 좋은' 조건을 위한 내용들만 존재한다.


특정 학원을 다녀야 시험 성적이 오른다 와 같은 이야기들은 인과관계를 너무도 쉽게 보기 때문일까?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특정 대학을 가기 위한 조건들이 존재한다면 그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도 있을 수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의 공포와 미래의 결과가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때 과거의 그것때문에... 라는 결과론적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 하지 않으면 .. 를 얻을 수 없다 와 같은 인과관계에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과관계를 단순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의 일들을 예상하고 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다양성의 수용'이란 측면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특정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단 하나의 원인때문에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도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특히 특정 결과는 특정 원인때문이야 라는 인과관계의 희생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상에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들에 대한 수용을 하지 못한다. 어떤 학생이 중간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좋은 성적을 받은 원인에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해서 그럴 수 있고 휴식시간동안 우연히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알았던 사실이 시험에 나올수도 있고 다행히 자신이 공부한 내용에서 많이 나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시기에 다녔던 학원이 있었다고 학원이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얼마나 어리석인 일인가. 하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많은 원인때문이고 원인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목표하는 일들은 결코 우리고 원하는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도 없고 때로는 부족하여 만족스럽지 못하게 때로는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으로 기대 이상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인과관계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에게 가진 편견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의 범위가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나 선례인 것 같다. 그러나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운 진리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는 법이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동의가 진리의 타당성을 확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변 사람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어느 세상이나 괴물은 존재할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욱 더 잘못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결코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많은 고위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생명을 무시하는 예들만 보아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떠나서 얼마나 거대한 괴물이 되었는지 공감할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고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과관계의 전형적인 희생자들이다.  자신이 가진 전문적인 지식을 떠나서 다른 지역과 차별이 되는 주요 원인인 원자력 발전소를 정치적으로 제외하기 위해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은 결국 지역 주민들의 아픔과 고통을 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어떤 사람은 세상은 원래 그런거고 그런 괴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데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그럴때 대답하기 위해 만든 좀비이론 zombie theory 이 있다. 영화에서 좀비는 일정 수준이 넘어서면 그 감염 증가 속도는 조절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착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선한 의지를 믿는 일부 사람이 아니라 대중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서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의 존재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이들을 피해 다니는 일부 착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사회가 제대로 된 모습이라 말할 수 없다. 괴물이라는 어원이 알려주듯 이상한 조짐이 보이는 좀비가 조금 보였을 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좀비가 세상의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착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다수의 무관심이라는 점이다.


여기 앞선 이야기들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episode 1. 남편은 아내를 두고 다른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전문직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들의 생활비를 벌고 다른 여인과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며 살았다. 여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키우는데 식모랑 운전기사는 필요하잖아. 근데 이혼하면 더 돈들잖아 그냥 지금이 더 싸게 들어... 어느날 아내를 무시하며 식모 취급을 하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집에서 나가세요. 더 많이 배운 아빠에게서는 더이상 배울 것도 존경할 것도 없지만 덜 배운 엄마에게서는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도 아끼는 방법도 계속 배울 수 있으니깐요." 

episode 2. 남편은 해외 지사로 발령받아 떠나야 했고 아내는 직장 생활 때문에 딸 둘을 데리고 살았다. 남편은 해외에서 다른 여인을 만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계속해서 만났다. 남편은 자신이 바람피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게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여인과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아내가 용서하고 남편을 이해해야 한다 말한다. 오랜 결정 끝에 이혼을 결정하고 큰딸에게 말했다. 이혼을 거부하는 남편에게 큰 딸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과 이혼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끊임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용서해도 끊임없이 아버지는 잘못을 저지르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물이라는 경고에 대해서... 

원래부터 괴물이었던 존재가 무엇이 있을까? 괴물은 우리에게 사회의 잘못된 문제가 사회 구성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알려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물이 될 수 있을까 계산하고 싶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을까 혹시 나 스스로도 괴물이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두개의 이야기를 더 소개했다. 그러나 글의 처음에 소개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아들과 딸이 있다. 이 둘도 부모의 이혼때문에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이 불행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 본다.

'더 좋은' 이라는 조건의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든다. 더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덜 좋은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이 배운 공부를 자신의 합리화를 위해 사용한다. 인간은 왜 사회를 만들었을까 생각할 때가 많다. 같이 모여 불편하기도 많고 짜증나고 수많은 스트레스를 만드는 이 사회는 왜 만들었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희망을 전하고 싶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클라우드 서비스 ] 에서 가치에 대한 정의 definition 를 설명했다.

"가치"란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연민을 통해 구현되는 이로움이라 정의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한 이유는 어떤 일을 맡아 해야할때 선택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만들고 이에 부합되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싶었다. 우선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동기가 개인적 욕심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라는 연민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부도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로움을 얻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경쟁사회에서는 오직 나뿐이다. 타인은 어떻게 이길 것인지만 생각하는 대상이 되어버리고 같이 협업한다는 것도 결국 내가 잘되기 위해서 잠시 같이 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사회 구성원은 그저 배경일 뿐이다. 이런데 어떻게 타인을 위한 이로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어떤 연구소에서는 많은 특허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어... 와 같이 욕망이 이끄는 전차처럼 운영하는 곳도 있다. 많은 이들을 위해 자신의 발명을 특허로 가지고 있지 않고 나누었던 루돌프 디젤 (Rudolf Diesel; 디젤 기관) 와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 소아마비 백신) 들은 자신의 재능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릴 수 있던 환경, 사회의 덕이라 믿고 이로움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시 사회 구성원에게 돌려준 것이다. 조너스 소크는 '이 백신의 특허권자는 누구죠?' 라는 질문에 '사람들이죠. 특허라고 할 것이 있나요?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요?' 라고 대답했다.


자기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기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냐고 물어보는 대신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와줬는지 물어볼 수 없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말하고 길가의 들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대해서 물어보면 안되나 싶다. 무엇을 잘하는지 물어보고 그 무엇이 좋은 대학가는데 얼마나 필요한지가 아니라 그 재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소개시켜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분명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숨겨진 괴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공통적으로 설정된 남편들이다. 이야기의 편의상 남편으로 일관되었지만 부모이지만 자신의 욕심때문에 자신의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랑이 가득한 아버지였다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위해서 누군가의 불행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도 사회가 만들어낸 어쩌면 역사가 생각보다 깊은 경쟁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과관계의 커다란 희생자 즉, 괴물일 것이다. 그러나 소개된 네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후반부의 이야기들은 어머니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통해서 연민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기 위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던 이들이다.

물이 치유받는 사회를 꿈꾸다... 

우연히 교육열이 높은 강남 지역을 지나다가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아이들을 보았다. 난 여행가는구나 싶어 보기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재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책가방도 부족해서 캐리어에 넣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심하게 넘어가면 상관없는 이들의 삶이지만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SBS스페셜, 부모님. 당신의 선택에 따라 아이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중 한장면

무엇이 문제이다 속단하지도 못하고 너무 많은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에 가볍게 해답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교육의 문제일까 싶어 교육의 원래 목적으로 돌아면 되지 않을까 싶어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에서 제시한 교육의 목적에 맞춰 교육을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든 생각이 어쩌면 지금의 사회는 인간다움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단지 사랑하는 마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그 다양한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당하고 배워야 하는 것, 공부해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들을 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에 인간다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고민하고 그 고민을 통해서 무엇이 '더 좋은' 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1등을 하기 위해서 반 학우의 노트를 훔치기도 하고 그렇게 훔쳤을 때 학우가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괴물은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무감각의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진 세상을 생각해본다.

젓먹이 아이가 배고파서 울어도 엄마는 먹이고 싶을 때 젓을 물릴 것이고,
누군가 쓰려저 죽어가도 내가 바쁘다면 신경쓰지 않고 갈 길을 갈 것이고,
지구 반대편 아이들이 기아로 힘들어 해도 더 맛있는 맛집을 찾을 것이고,
누군가 놀림과 오해를 받아 눈물을 흘려도 내 외모에 더 신경 쓰일 것이다. 

괴물에게는 엄마의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는 자식들이 느낄 슬픔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나온 좀비와 무엇이 다를까? 영화에서는 좀비는 좀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고 몇 편에서 그런 시도를 했지만 많이 성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괴물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좀 더 위안이 된다...) 자신에 감정에 솔찍하고 타인의 감정을 수용하고 때로는 연민을 통해 내가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감도 가지고 오랜동안 그렇게 감정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면 괴물은 언젠가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인간이 되어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에게 상처가 있는 이유는 그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약점을 알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의 아픔과 슬픔을 보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라는 의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상처는 차라리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 모른다.

괴물을 만드는 사회 ─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

Monday, January 27, 2014

원에서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가족 모두가 실의에 빠지고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분노도 가져보았지만 달라지는 것 없는 세상에 조금 순응하며 자신에게 다가온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매순간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면 남은 6개월 마저도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더 큰 두려움에 남은 6개월을 충실하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몸은 힘들고 지쳐갔지만 아이들과의 시간을 더 가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감정의 말들도 전달했다. 그리고 자신의 떠나가는 자리를 더욱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미소와 행복을 가지고 6개월을 보내고 의사가 이야기한 6개월이 지나고 6개월하고 1일째 되는 날이 다가왔다.



부인은 아프지만 미소와 행복으로 가득한 남편을 향해 이야기했다.

"여보 거봐요. 의사 말 하나도 믿을 것 없다니깐... 당신은 더욱 더 오래 오래 나보더 더 오래 살거야."

이야기를 듣고 남편은 가족들을 모아 그들 앞에서 이야기했다.

"늘은 참 기쁜 날이구나. 오늘부터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은 모두 기적의 시간들이니 말이야. 우리에게 기적의 시간들은 이제부터 계속 늘어나겠구나."

그렇게 가족들 모두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때로는 죽는 순간까지도 건강하지만 절망의 시간들로 채울 수 있는 삶에 불구하고,
죽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기적의 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선택의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인생이 나에게 주어진 환경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이 순간 당신의 시간을 기적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선택은 바로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고...


래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운 존재이다.

기적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Wednesday, November 20, 2013

년 넘게 매일 하루에 8개 정도의 약을 먹는다. 매일 아침 거의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물잔과 정해진 약통에서 약을 꺼내어 먹는다. 월, 화, 수... 토, 일 7개의 칸으로 나누어진 약통은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모두 비워지면 약을 채워 넣는다.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챙겨 먹었다. 일년치 약이면 거의 360여개가 넘고 그렇게 8 종류라면 거의 3000여개 알약들이다. 중간점검 차 약을 세어보니 모든 약들이 단 한개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남아 있었다.


"군가 그랬다. 의무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아무런 느낌이 없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면 그 의무는 목적마저 잊어 버리게 된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는 약을 먹는 것은 내가 정상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도 이제는 매일 주사를 찌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지만 가끔 약을 먹으라고 알려주는 알림 소리는 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라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래도 싫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일어나 무엇인가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더 잠자고 싶은 의욕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리고 조금 이른 아침 시간에 글을 쓰거나 필요한 책을 읽고 때로는 멍하니 공상에 잠겨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리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환하여 생각해보아도 약을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 지속가능한 즐거움 ] 무엇이든 지속가능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습관에 의지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지겨운 의무감으로 바뀌어 버린다. 아마도 매일 인터넷을 쓰면서 지속가능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을 쓰는 것이 의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하루에 일정 기간동안 인터넷을 의무적으로 써야 한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일이 되고 힘든 짐이 될지도 모른다.

연히 개그맨 이동우 씨의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듣고 적어 둔 내용이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또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였다. ... "고통 중에 억울함이 큰 고통이다. ... 그 억울함이 가장 나를 짓눌렀고 괴롭혔다. 확실히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란게 있다. 어느정도 버티어 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 아닐까... " 

행복에 대한 그 수많은 명사들의 이야기보다 이처럼 명경(明鏡)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시력이냐고 묻는 질문에 이동우 씨 대답은 이러했다.

"밝은 날엔 아 참 햇살이 좋다. 를 느낄 수 있는 정도..." 

누군가에게는 절망에 가까운 그 상황에서도 맑은 햇살을 그 누구보다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생각한다. 내려 놓아야 함과 동시에 나에게 다가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이동우 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가슴이 먹먹하지만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뭔가 보물을 얻은 기분이다. 합병증 검사를 위해 안과에서 검사받으러 가던 순간의 두려움이 항상 기억난다. 온 다리에 힘이 풀려 휠체어에 앉아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아직 현실도 아닌 온갖 상상에 원망을 했던 것 같다.

분명 이동우 씨도 오랜동안 아주 오랜동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도 느껴진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그저 원망만 하며 그것을 핑계 삼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 시간은 더욱 더 길어질 것이고 그 원망의 긴 어둠은 더욱 더 길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절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시한 맑스라는 사람이 바보 같은 게 그렇게 매력 있었어. 도무지 쓸데없는 짓을 했잖아. 자신들이 노동자도 아니면서 노동자들이 왜 저렇게 비참한지를 연구하느다니. 그런 점이 나랑 통할 것만 같았던 거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걸 고민하는 게 맘에 들었단 말이야. 사는 건 그런 거라고. 어차피 고통스러운 거라고 돈 많은 엥겔스를 만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리스 고전을 논하고, 그 문장의 유려함에 대해서 서로 현학을 겨루기만 했대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거 아냐? 충분히 책도 여러 권 쓸 수 있었을 거고 인기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 ... 그들은 마치 예수처럼 말이야. 그들도 바보 같았던 거야. 그러니까 만일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하고 울부짖던 말이 아니었다면, 버림을 받고 있으면서 왜 버리느냐고 울부짖었던 바보 같은 그 말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깐 그건 정말 그때까지는 버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말도 되니까. 내가 그를 위선자는 아니었을까 의심할 뻔했던 것처럼 말이야.

공지영 ─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from「고등어」

게 무엇인가 다가올 때 그것을 의무로 방어할 수도 아니면 내가 감내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일 지는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망이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는 거부와 어쩔 수 없이 의무감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모두 말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좋은 것, 원하는 것들만 누릴 수 있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삶은 꼭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과 아픔을 덜어 낼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과 아픔을 거부한다면 그 고통의 크기는 더 커지고, 아픔의 시간은 더 길어질지 모른다. 때로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허락한 그 아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단단하게 해주는지 느낄 수 있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 그것은 허락할 수 있는 마음일지도...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

Friday, November 8, 2013


I am not accustomed to rejoicing in things that are small, hidden, and scarcely noticed by the people around me. I am generally ready and prepared to receive bad news, to read about wars, violence, and crimes, and to witness conflict and disarray. I always expect my visitors to talk about their problems and pain, their setbacks and disappointments, their depressions and their anguish. Somehow I have become accustomed to living with sadness, and so have lost the eyes to see the joy and the ears to hear the gladness that belongs to God and which is to be found in the hidden corners of the world.

I have a friend who is so deeply connected with God that he can see joy where I expect only sadness. He travels much and meets countless people. When he returns home, I always expect him to tell me about the difficult economic situation of the countries he visited, about the great injustices he heard about, and the pain he has seen. But even though he is very aware of the great upheaval of the world, he seldom speaks of it. When he shares his experiences, he tells about the hidden joys he has discovered. He tells about a man, a woman, or a child who brought him hope and peace. He tells about little groups of people who are faithful to each other in the midst of all the turmoil. He tells about the small wonders of God. At times I realize that I am disappointed because I want to hear "newspaper news,"exciting and exhilarating stories that can be talked about among friends. But he never responds to my need for sensationalism. He keeps saying: "I saw something very small and very beautiful, something that gave me much joy."

The father of the prodigal son gives himself totally to the joy that his returning son brings him. I have to learn from that. I have to learn to "steal" all the real joy there is to steal and lift it up for others to see. Yes, I know that not everybody has been converted yet, that there is not yet peace everywhere, that all pain has not yet been taken away, but still, I see people turning and returning home; I hear voices that pray; I notice moments of forgiveness, and I witness many signs of hope. I don't have to wait until all is well, but I can celebrate every little hint of the Kingdom that is at hand.

This is a real discipline. It requires choosing for the light even when there is much darkness to frighten me, choosing for life even when the forces of death are so visible, and choosing for the truth even when I am surrounded with lies. I am tempted to be so impressed by the obvious sadness of the human condition that I no longer claim the joy manifesting itself in many small but very real ways. The reward of choosing joy is joy itself. Living among people with mental disabilities has convinced me of that. There is so much rejection, pain, and woundedness among us, but once you choose to claim the joy hidden in the midst of all suffering, life becomes celebration. Joy never denies the sadness, but transforms it to a fertile soil for more joy.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 Henri J. M. Nouwen (1932 – 1996)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brandt (1669)

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을 즐기는 습관은 몸에 배어 있지 않다. 그보다 전쟁과 폭력과 범죄에 대한 '나쁜 소식'을 듣고 갈등과 투쟁을 목격할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으레 골치 아픈 문제와 괴로움, 실망과 낙담, 불안과 분노를 토해 내리라고 기대한다. 어쩌다 보니 슬픔과 아픔에는 익숙해 있으면서 세상의 은밀한 구석에 감춰진 기쁨을 보는 눈과 즐거움을 듣는 귀는 잃어버렸다.

내겐 내가 슬픔을 기대하는 곳에서 기쁨을 보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하느님께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동안 방문한 나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듣고 본 세계의 참상, 불의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심각한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다. 자기가 찾아낸 숨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 희망과 평화를 가져다준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 이야기,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서로 믿고 돕는 사람들 이야기,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 들려준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만한 흥분되고 거창한 이야기, '신문에서 읽은 새 소식'을 듣지 못해 실망한다. 그는 나의 선정주의(sensationalism)에 응하는 법이 없다. 그냥 "나는 매우 작고 아름다우며 내게 큰 기쁨을 주는 무엇을 보았어." 하고 말할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가져다 준 기쁨에 자신을 몽땅 내맡긴다. 그한테서 배워야 한다. 현장에 숨어 있는 진짜 기쁨을 '훔치는'법을 익혀, 그 기쁨을 훔쳐 모두가 보도록 높이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평화롭지 못한 곳이 많으며 아직도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가던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서로 용서하는 순간을 목격하며 희망을 본다. 모든 것이 좋아지기를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일들을 축하해야 한다. 나를 겁주는 깊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선택하고 죽음의 힘이 기승 부릴 때 생명을 선택하며 온갖 거짓으로 에워싸인 곳에 서 진실을 선택하기!

것이 진정한 수련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 세상의 아프고 괴로운 현상에 마음을 쏟으려는 유혹에 넘어가, 사소하지만 분명하고 진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기쁨과 즐거움에 눈이 멀어 있었다. 기쁨을 선택하면 그 보상으로 기쁨을 얻는다. 나는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는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 속에 있는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찾기로 마음 먹을 때 삶은 축제로 바뀐다. 기쁨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더 큰 기쁨을 위한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 놓는다.

헨리 나우웬 (1932 – 1996) ─ 탕자의 귀향

숨은 기쁨 ─ 부정하지 않은 슬픔에 대해서...

Thursday, October 17, 2013

2013년10월16일 연중 제 28주간 수요일 복음묵상

희는 불행하여라!” (루카11,44)


복과 불행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 거리를 한 번 재보도록 하자.
불행(不幸)이란 글자 그대로 ‘행복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 말은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말과 같다.
반대로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붙어있으니 거리는 ‘제로’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무척 큰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행복과 불행은 늘 같은 자리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은 조건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그 조건이 채워지도록 모든 힘을 기울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은 무엇인가?
조건이란 쉽게 말해서 “그렇게 된다면”을 뜻한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렇게 된다면’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행복과 불행은 조건 이전에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한테 불행한 이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누구였던가?
그들은 왜 예수님께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들어야만 했을까?
그들 역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믿는 길을 채우고자 달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얻고자 한 것들을 얻었을 것이고, 얻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 틀렸기에 옳은 삶을 만들 수 없었고, 그럼에도 무엇이 틀렸는지조차 모르는 삶이었다.
그래서 “너희는 불행하다”라는 말을 예수님께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무엇이 참 행복인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야만 한다.
같은 자리에 있는 행복과 불행 중 당연히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
답은 간단명료하다.
복음적 가치를 선택해야 한다.
그 가치를 선택하고 살 수 있을 때, 그 어떤 조건이나 환경은 의미를 잃게 된다.
이미 행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억하자.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한 것이다.
그러니 감사하며, 어떤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해도 희망을 갖고 기쁘게 복음적 삶을 살아야 한다.


매일의 복음 내용을 통해 글을 올려주시는 [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이에르 (소나무) 신부님 ]께서 올려주신 글이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경쟁을 하며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느냐?' 라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대답이 '행복하기 위해서...' 라고 한다.

린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져야 행복할 수 있다고... 그러나 삶의 고난과 삶의 무게가 자신의 마음처럼 될 수 없을 때 특히, 자신이 원하지 않은 상황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순간마다... 즉, 조건이 하나 하나 실현되지 않을 때마다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 좌절하기도 한다.

신부님의 글처럼 "불행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기 않기 때문이다. 모두 "행복해지고 싶다" 고 이야기하며 그 행복의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탓만 하게 된다. 눈을 돌려 살펴보면 내가 행복하지 않고 행복의 조건이 있다면 나보다 조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야 한다. 그 조건도 참 복잡하고 요구사항도 많다. 경제적 조건을 포함하여 자신의 욕심을 반영하는 모든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러나 그것은 행복하지 않으려는 핑계일 뿐이다. 세상에는 행복을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부족함이라 생각하는 조건을 적당함이라 생각하며 선택한다.
내가 모자람이라 생각하는 조건을 충분함이라 생각하며 선택한다.
내가 불만족이라 생각하는 조건을 흡족함이라 생각하며 선택한다.

행복은 선택의 문제이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신부님의 글을 접하고 알 수 없는 가슴의 벅찬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작년 이맘때 나에게 찾아온 병마들은 나에게 행복을 빼앗아갈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중환자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이었다. 그땐 행복은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행복은 조건이 맞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의 조건을 버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선택을 한다면...
그 어느 순간보다 벅찬 행복을 만나게 된다.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Saturday, January 12, 2013

리의 지난 기억 속에는 유독 진하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 존재한다.

잔잔한 사랑의 아련한 기억도, 쓰라린 아픔의 이별도... 그 어떤 순간이든 인간이라면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는 그런 순간들이 존재해서 어떻게든 우리가 살아있음을 깨달게 해준다.

뜻하지 않은 심근경색(M.I.)과 당뇨(D.M.)이란 친구들이 찾아와 준 7월의 어느 날도 무척이나 날씨였다. 파란하늘, 그리고 수채화같은 구름의 농담(濃淡)이 아름답게 드리워진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나의 가슴은 왜그리도 아팠는지 타오르는 기관지, 무엇때문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 누워보고 뒤로 누워보고 어떤 방법으로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는 그런 날이었다.


응급실에 들어간지 12시간도 안되어 정말 응급으로 막힌 심장혈관을 뚫어주는(?) 시술을 마치고 자정이 조금 넘긴 시간에 다시 고요한 중환자실에 부산떨며 돌아왔던 그날이 여전히 기억에 가득하다.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했던 그 중환자실... 오래전 긴 수술끝에 들어갔던 중환자실의 느낌과 다르지만 그래도 중환자실이 나에게 주는 그 슬픔의 강도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무게이다.


행히 시술을 마치고 가슴 통증은 사라졌지만 생각하지 못한, 원하지 않는 친구들의 방문은 나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만들었다. 잦은 체혈, 예전의 항암치료로 이미 숨어버린 혈관을 숨박꼭질하듯 찾아야내야 하는 순간마다 얼굴은 웃지만 항상 한번으로 끝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랬고, 혈당 수치가 나오는 몇초동안 희망의 강도가 커지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상상하지 못한 높은 혈당 수치, 그리고 그런 상태가 꽤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는 혈액검사 결과... 모든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 가슴으로는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분극된 머리와 가슴을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

원을 나오고 삶은 많이 변화되었다. 불규칙한 식사도 항상 규칙적으로 바꾸었고, 걷기 이외 하지 않던 운동도 정기적으로 해주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였다. M.I. 와 D.M. 이란 친구가 오기 전,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나의 마음은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계속 일상처럼 다가와서인지 그냥 너무도 흐린 먹구름의 연속같은 기억들 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점점 그 구름의 그늘 안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생각조차 퇴화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 약을 먹는다는 것은 내가 좋아지게 해준다는 믿음보다는 내가 아픈 상태임을 일깨워주는 각성제이고  매일 먹는 식사마다 생각하며 골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일반인도 필요한 식습관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내 욕심을 항상 누르고 내 자신을 최면에 걸어야 하는 과정으로 다가오곤 했다.

년이 지나간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던 세상이 내가 생각했던 세상과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아픔에 대한 수용이 되었다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변화이다. 무엇보다 나는...

느림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반년동안 일부러 일을 만들고, 외출을 하고, 최소 한시간 이상 이동해야 갈 수 있는 공간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고 노력했다.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생각 하고 무엇보다 나에게 다가온 나의 현재에 비판도, 좌절도 없이 느림의 속도도 멈추지 않으면 앞으로 갈 수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앞의 방향이 나에게 바른 길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에게 매번 생각나도록 했다. 그리고 공간의 익숙함이 생각의 익숙함으로 다가올 때 나는 다른 곳을 찾아 옮기고... 그렇게 익숙해지지 않는 연습도 하고 있다.

그렇게 이동하는 시간동안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내가 스쳐지나갈 수 있는 사람들간의 온기를 느끼고, 내가 귀를 막아 듣지 못한 섬세한 사람들의 소리도 아무런 판단없이 들으려고 노력했다. 역시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가치없다 느끼는 그 작은 순간 모두 지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찰나이며 그 순간이 나를 매일 변화하게 만드는 작은 비료 알갱이 같은 존재임을 느끼며 쉽게 버릴 수 없음도 생각해보았다.

이해하는 것만큼 버릴 수 있는 것도 용기라는 것도 배우며... 때로는 이해받지 못함에 안타가워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흐르는 강물처럼 떠내려 보내는 것도 필요함을 느끼고 시간은 흘러갔던 것 같다.

느림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비록... 오늘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해도, 내 앞에 장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해도 사실 지금의 느림이 결정적으로 나의 삶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빠름에 기대어 지금 이순간 내가 꼭 보아야 하는 그 순간의 영상을 내 속도에 지나치게 된다면 나의 삶은 그저 일그러진 형체들로 흐려진 피사체만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머무는 짙은 그 시간은 항상 느리게 간다... 어쩌면 우리가 의식하는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그 순간 우리 머리 속 필름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져 더욱 더 짙어지는지 모른다.

아픔때문이든, 기쁨때문이든 우리의 기억에 진하게 남은 순간은 우리에게 느리게 흘러간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느림에 기대어 보려고 한다. 

매 순간 소중한 의미를 찾으려면 진한 사진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느림에 기대어 본다.

Monday, December 31, 2012

아픔이 없다면 건강의 소중함도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휴식의 달콤함도 없습니다.
이별이 없다면 만남의 설레임도 없습니다.
상처가 없다면 치유의 놀라움도 없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생명의 간절함도 없습니다.
장애가 없다면 능력의 위대함도 없습니다.
가난이 없다면 풍요의 편안함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느끼는 수많은 느낌들,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감정들.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들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들의
존재로 더욱 더 다가온다.

래서
우리가 누리고 가지는 것들은
피하고 싶은 것들에 항상 빚지고 있다.

래서
우리가 누리고 가지는 것들에
마땅하고 당연함으로 소유하지 않고
미안하고 감사함으로 지켜가야 한다

우리가 누리고 가지는 것들은...

Sunday, September 2, 2012

침의 햇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전해'준다.

우리는 그 햇살만으로 참 많은 것을 선물 받는다.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주는데 당신은 받을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그 선물을 거절한다. 그런데 거절하는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당신에게 필요한 선물을 준비하고 전해준다. 그렇지만 당신이 필요했던, 원하던 선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거절한다.


아침의 햇살은 그런 선물이다. 어둔 밤에 지내던 우리에게 처음으로 빛을 선물하는 아침의 햇살은 분명 우리에게 선물이다. 그 선물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선물을 거절한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우리가 그 선물을 받는 방법은 참 쉽다.

눈을 뜰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 눈을 떠 들어오는 햇살에 감사하고, 그 햇살에 밝아진 이 세상의 수많은 피사체를 바라본다. 그 누군가 우리의 수많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주고 싶던 사랑의 마음으로 그 피사체를 바라본다.

매일의 선물

Sunday, June 24, 2012

장 행복한 것은 어떤 때일까요?

아무런 고통도 없고 고민할 것 없이 원하는 것 모두 다 하고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좋고 싸움도 없는 그런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하나요? 아마 그런 상황은 너무도 지루해서 특별히 행복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 행복을 느낄 이유도 없게 될것입니다.


어느날 제자가 현명한 스승을 찾아가 '어떤 여인(배우자)를 찾아야 할까요' 하는 이야기에 스승은 이렇게 이야기 해주었다.

첫번째, 갈등이 없는 사람은 피해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자신을 지극히 감추는 사람이기에 그 두가지 모두 결국 너를 사랑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영원해야할 사랑에는 그것은 지옥이다.

두번째 갈등의 상태에서 남에게 탓하지 않고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는 모습으로 너를 찾는 사람을 만나라. 잘못의 원인을 찾기 위해 남을 탓함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의 범주가 아닐 것이다.

세번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위로하며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렇게 함께 하는 것으로도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한사람을 만나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서로는 믿음의 동반자로 지낼 것이다.

네번째 그리고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이 행복임을 깨달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라. 그렇게 행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가 바로 행복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행복을 잊고 지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특별한 그렇지만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면 된다.

행복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과정이기에 행복엔 갈등과 고난이 필요하다. 그렇게 행복의 다른 이름은 고난이다.

행복의 순간

Thursday, June 14, 2012

제부터인가 써내는 소설의 양이 늘어난 작가에게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죠? 비결이 뭔가요? 독자들은 그 양에도 불구하고 떨어지지 않는 소설의 완성도도 모두들 감탄을 합니다." 

작가는 상당히 담담히 말했다.

"년 전 말기암 시한부 선고를 받았거든요. 그 순간 저에겐 두가지 선택이 가능했습니다."

"첫번째는 비통해 하고 내 인생을 원망하며 그 원망 속에서 억울해 하며, 두려움과 좌절 속에서 살아가는 길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내가 그 모든 두려움을 잠시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쓰려고 했지만 실행하지 못한 생각들을 써내려가는 것이었소."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러자 그 절박함에 하나라도 쓰고 싶었고 결국 나도 생각하지 못한 분량의 원고지를 채울 수 있었고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체 살다보니 시한부로 선고받은 몇개월을 훌쩍 넘기고 말았네요." 

그때 기자는 느꼈다.


마가 가장 좋아하는 영양분은 우리의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절망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그러나 반대로 절망 안에서 자신의 끝내야 할 역할을 찾는다면 그 병마는 오히려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일상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기자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 작가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했다.

"비록 내가 시한부 인생이라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이렇게 오늘도 글을 쓰고 내일 눈을 뜨지 못한다면 나는 작가로 죽게 되겠죠? 작가로 남게 되겠죠..." 

기자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시한부인 것처럼 매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내일 아침 숨이 끊어져 죽어도 여한이 없도록...

절망희망은 원래 본질은 같지만
빛이 비추는 곳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희망이 될 것이고,
어둠의 희미한 실루엣만 바라본다면 절망이 될 것이다. 

절망과 희망

Wednesday, January 4, 2012

결혼한지 20년,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인의 남편이고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 살아간지 20년이 지나도 남자의 마음 안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한 여인의 잔상이 남겨져 있다.

명 사랑하고 그리고 그 결실로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 결혼 생활이 불행하거나 남들이 보기에 행복하지 않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남자의 마음 한 구석엔 항상 지워지지 않는 연애 시절, 지금의 부인 이전의 어떤 여인에 대한 잊지 못하는 그리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문뜩, 알 수 없는 그리움 그리고 어떤 먹먹한 가슴을 쥐어잡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의 결론으로 나타나는 한 여인의 이미지를 지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지워지지 않는 이미지를 가진 남자는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 앞에서 다가오는 책임감과 가장으로의 도덕적 의무감,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의 흐름에 그 이미지를 혼자만 간직하고 겉으로 이야기하거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 

생각보다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배우자 외 아련한 아쉬움 혹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자신의 이미지를 공개하고 자신의 가정과 부인을 당황스럽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배우 신성일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나이 들어....', 어찌고 저찌고 그런 반응이었지만 사실 그런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하지 않는 공감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그 이미지를 놓치 못하고 결국 자신의 현재마저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찌질함에 속하겠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현재에 충실할 수 있다면 그건 반대로 성숙함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조금의 용기가 있어 먼 훗날에도 떠오를 그 이미지의 대상에게 용기있게 고백할 수 있다면 차라리 분명 아쉬움은 덜 했을 것이다.

간은 분명 이상한 동물이다. 겉으로는 해서 후회하는 일들만 이야기하면서 사실 하지 못해 후회하는 일들로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 동물이니... 그래서 본능만 존재할 것이라고 다른 생명을 미물로 놀리면서 한편으로는 그 본능에 충실한 짐승들을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잔상...

Wednesday, August 17, 2011

리학자 그리고 의학 연구를 통해 밝혀진 재미있는 사실은

사람의 즐거운 표정, 행복한 표정에 대한 판단은 쉽게 내리지만 사람의 좋지 않은 감정을 나타내는 표정은 쉽게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표정과 좋지 않은 감정이 섞인 부분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감정을 표정이나 카메라를 통해서 알아낸다는 것은 사실 어떤 부분에서는 과학적일 수 있지만 현실적 혹은 실용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인간은 다양한 표정을 상황에 따라서 감출 수 있고 비록 감출려고 하는 연습이 서툴러서 제대로 표정이 안나왔을 때도 상당히 애매한 얼굴 표정이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래 같이 살아오고 다양한 감정을 같이 공유한 사람이야 상대방에 대한 표정을 그래도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인간 개개인이 가지는 고유한 반응때문이다. 즉, 사람들마다 정확하게 같은 자극이라고 하더라도 그 반응의 차이와 방법은 다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전화, 인터넷 등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많이 늘어났다. 대면하며 이야기하는 동안은 상대방의 얼굴 표정과 자신이 이야기 하는 반응에 대해서 살펴보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전화 (물론 화상통화 제외) 를 비롯한 메세지, 메신저 등은 사람의 얼굴 표정을 전혀 보지 않은 체 대화해야 한다.

단이 곧 불행의 시작이라면 하고 싶은가? 

사람들은 자신의 대화 특히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사람에게 더 민감하다. 상대방의 메세지 하나, 목소리 톤, 손짓 발짓부터 다양한 모습을 통해서 상대방이 어떤 감정이구나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심리적으로는 당연하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어떤지 살피려는 이유도 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자신이 방어해야할 부분이 혹시나 있을까 하는 방어적이 이유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엉덩이에 염증이 나서 불편한 자리때문에 찡그린 얼굴에도 혹시 내가 잘못 말했나 걱정해야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혀 감정적 반응도 안 보이는 문자 메세지도 몇번을 살피며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감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하고 자신에게서 해결이 안되면 수많은 게시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올리고 지인들을 불러 자신의 문자를 보여주며 정답을 찾을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봤자 사실 불안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바로 본인 스스로이다. 사람의 관계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위해 그렇게 살피고 상대방의 얼굴을 읽지만 대부분 관계의 잘못이나 어긋남은 이런 잘못된 '얼굴 읽기(face reading)'의 단계에서 찾아온다는 사실도 재밌다. 우리가 카페나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헤어진 이야기나 잘못된 관계에서 비롯된 상대방을 이야기할 때 결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마치 나쁜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상대방인 듯 상당히 상세히 설명한다는 점이다. 즉, 이야기만 듣고 보면 상대방이 정확하게 절제된 단조로운 하나의 감정, 예를 들어 분노, 짜증, 미움 등의 형태를 잘 표현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은 당연하다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들을 때 나는 항상 물어본다. 상대방이 그런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한적 있냐? 그럼 대부분은 얼굴에서 보인다. 그의 행동에서 보인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감정의 표현이 잘 나타나 모두가 공감하는 상태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얼굴 표정이나 상당히 애매한 상황에서의 감정을 포착하여 확신에 찬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된 판단의 대부분은 정말로 사소하고 말도 안되는 것들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걸을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뭐 먹으러 갈까?"  
"응 아무거나..." (평소 잘 결정을 못하는 성격이고 이 날따라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아무거나? 나랑 만나는데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거야? 그리고 왜이리 짜증내면서 이야기해" 

짜증의 정도가 어느정도인지 몰라도 사실 짜증을 읽어내는 사람의 기분과 기준에 따라 그 짜증의 정도는 없을 수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가능한 얼굴에서 그리고 심지어 문자 메세지 등에서 상대방을 읽지 않도록 하면 어떨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감정을 건드리는 외부 요소는 상당히 많다. 상대방이 얼굴이 안 좋은 이유는 당신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

사람마다 감정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그렇게 읽은 감정이 별로 정확하지도 않다. 본인은 정확하다 확신한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확신은 결국 나중엔 불신을 위한 확신으로 진화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만 더 안좋아진다. 행복하고 싶으면 차라리 그 얼굴을 잊어버리자. 그래서 행복한 얼굴의 상대방 사진을 가지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 

우리의 판단력은 자신이 믿고 이미 결정내린 사안들을 지지해줄 증거들을 수집하는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객관적 판단력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감정적인 부분들에 대한 판단은 일단 유보할려고 하고 옳은 일이다 잘못된 일이다 에 대한 판단을 먼저하자는 것이다. 소위 신념과 정의의 관점에서의 판단은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을 읽고 상대방의 의도를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말자는 것이다.

의 얼굴을 숨기기 or 보여주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이런 표현을 해야하는 것 아니야!"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아니... 내 말은 내 뜻은 그런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예절과 예의의 기준은 상당히 높고 까다로우면서 자신이 하는 이야기와 감정의 표현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한 표현을 이야기해도 말꼬리의 높낮이 목소리의 높이, 톤 등을 고려해서 종합적 판단으로 상대방은 나를 미워한다 자주 결론을 내리곤 한다. 재미있는 일이다. 아무리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여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요소가 상대방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상당히 까다롭고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나 다툼의 화근은 대부분 문장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은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이라는 점이다. 감정이 격해져서 상대방의 호칭을 "야..." 라든지 상대방의 부모를 "너희 부모" 라는 표현으로 정말 별 것 아니고 이해해주면 될 것 같은 요소들도 상대방의 귀엔 거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직접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전화, 문자, 메신저 등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수없이 Shift 키를 누르면서 이모티콘을 난발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능한 가까운 지인이라도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존댓말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이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도 있지만 비록 나의 감정이 나쁘다고 해도 일단 진정을 해야한다는 감추기의 기능도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전화기나 컴퓨터에 나오는 상대방의 감정은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는 특징이 있다. 메세지에서 "아우 짜증나" 하면 짜증난 것은 알지만 그 짜증이 나에게 향한 것인지 아님 다른 사람을 향한건지에 대한 확신을 하기 힘들다. 서로 쉽게 비속어를 사용하는 사이라고 막역하고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번 감정이 엇갈리면 그때부터 서로에게 비속어를 상다방에게 쓰기 때문이다.

복이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사람들과의 관계가 물 흘러가듯 거스름도 없고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읽어도 사실 제대로 읽은 적도 별로 많지 않고 특히 그러한 판단은 대부분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들이고 그런 나쁜 판단은 결국 엉뚱한 상상의 나래로 자신들을 괴롭히게 된다.

대부분 나의 판단의 기준은 편협하고 너르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런 속 좁은 마음에서 다른 이들의 얼굴을 열심히 읽어도 나에게 평화를 주는 판단은 거의 없없다. 오히려 이러한 판단을 하려는 마음이 강해질 때 바꾸어 생각해보자 다른 이들도 나보다 너그럽지 못할 것 같다면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 분노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통신 생활이나 언어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신선한 미소를 줄 수 있는지 노력해 보는 것이 좋지 않알까?

개인적으로는 호감이 안가지만 노홍철의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에는 어느정도 동감이다. 너무 과도하거나 부적절하게 웃으면 그건 분명 미친 놈 취급 혹은 비웃는다 판단이 들겠지만 최소한 평소 생활의 미소는 어두운 얼굴과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상대방에게 불편한 판단, 얼굴 읽기를 덜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읽지 마세요.

Thursday, July 23, 2009

뭄이 심해진 어느 마을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하나밖에 없는 우물물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을 길러 오고 있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길러와야지 하면서 더 큰 양동이와 더 큰 물통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갈려고 하고 물을 가지고 가려는 이웃 사람들끼리 서로 먼저 왔다, 그만 담아라 하면서 인심은 나빠지기만 하는 하루 하루...

그 마을에는 바보라고 불리우는 한 청년이 있었다.

다들 많이 가지고 가야 한다고 싸우는 와중에 이 청년은 자신보다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가지고 가라며 순서도 양보하고 심지어는 생활에 필요한 물을 길러가는 물통은 낡아 버려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큰 구멍은 아니었지만 청년의 집으로 가는 동안 물은 조금씩 빠져 나오고 집에 올 때쯤이면 자신이 우물에서 길렀던 물의 양보다 훨씬 줄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한마디씩 했다.

"에휴 불쌍하게 애써 물 다 흘리면서 가네... 저 아이는 항상 저럴까..."
"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놔둬요... 뭐 자기 물 흘리는 것이지..." 

마을 사람들은 그런 청년의 모습에서 멍청함과 미련함만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 청년은 순수하고 사람들에게 양보하기 좋아하고 미련함과 바보스러움에 사람들이 놀려대도 미소만 가득한 정말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든 그런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게 척박해지고 이웃 인심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이 마을엔 웃음소리라고는 찾을 수 없었고 사람들의 모습엔 가득한 주름과 힘든 고통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날 이 마을에는 작은 기적이 하나 일어났다. 그 청년이 흘리고 갔던 그 길을 따라 아름다운 들꽃이 피어나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챙길려고 흘리지 않고 물을 가지고 가던 마을 사람들이 지나던 길에는 가뭄의 목마름만 남아 있어 그 땅에는 풀조차 살아가기 쉽지 않는 갈증이 더해가고 있었지만 이 바보 청년이 지나가던, 그 멍청하게 물 흘리며 갔던 그 길엔 이름모를 아름다운 들꽃들이 피어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들꽃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희망을 꿈꾸기 시작했고 조금씩 마을 사람들의 입가엔 살며시 미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가에게 약점으로만 보이고 멍청하게 보이는 부분이 때로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아름다운 희망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영어를 잘해야만 성공할 것 같고, 학점이 높아야만 좋은 직장에서 인정받으면서 살아갈 것 같고 조금이라도 헛점이 보이면 숨길려고 하고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 완벽의 세상속에서 살아가면서 바보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바보같다는 것은 항상 손해를 보는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잘못된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희망은 오히려 누군가의 헛점같아 보이는 바보같은 부분에서 더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인 듯 합니다.

오늘 하나라도 더 가질려고 욕심가지며 살아가지는 않았나요?
오늘 하나라도 덜 흘릴려고 조바심내며 살아가지는 않았나요? 

때론 바보같이 흘려진 한 줄기 물이 어떤 들꽃에겐 생명과도 같으며 그 들꽃은 우리에게 때론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희망없이 자신만 가득 채운 세상에서 살기 원하십니까?
조금은 손해보는 것 같지만 희망이 가득한 곳을 원하십니까?

바보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Wednesday, July 22, 2009

장원급제를 간절하게 바라던 양반 집 아들이 집 밖에서 들리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시험때문에 불안했던 마음에 목탁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스님, 시주하면 급제할 수 있을까요?" 

스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마디 하셨다.

"주하면 급제하는 것이 아니라 시주하는 마음이 급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인가 할려고 합니다.

어떠한 종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조건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소원을 만들기 위한 그 마음을 만들기 위한 하나 하나의 연습일 뿐입니다.

시주하세요... (목탁소리와 함께)

Tuesday, October 14, 2008

년전쯤 같은 종교의 사람들이 하루동안 모여서 서로의 경험과 일상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는 기회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살아가는 모습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값진 기회였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의 얘기가 오늘 갑자기 생각났다.

어렵게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다니고 있고 남동생 한명과 여동생 두명의 학비까지 책임지고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계시고 어머니는 파출부일로 돈을 벌어가는 그 누가 보더라도 "불행하게만 보이는" 가족이었다.

이런 집안 사정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을 모르고 만났을 때 처음 그 아이의 첫인상은 항상 입가엔 웃음이 있어 보조개가 항상 보이는 그런 참 이쁜 아이였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근심 걱정하나 없이 살아가는 그런 아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 미소는 참 깊고 인위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주었다.

"저는 태어나서 한번도 제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6명의 가족들이 항상 한방에서 살아야 했어요." 

이중섭 作 - 가족과 비둘기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 다음 이야기를 예상했다. 아... 그래서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나보다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다음의 이야기는 스스로 부끄럽게 하기 충분하였다.

"래서 전 너무 행복해요. 남들은 느끼지 못할 가족들의 소중함을 항상 느낄 수 있고 누구 하나 아프더라도 항상 옆에서 서로 위해줄 수 있고 가족들 사이에 벽이 하나도 없어서 매일 혼자 기도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래서 주님께 너무 감사드리면서 살고 있어요." 

그 아이의 얼굴엔 그저 행복만이 있었기에 그 말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암치료를 마치고 나는 학교에 복학하면서 적응하기 힘들정도로 살찐 외형때문에 반 학우로부터 여러가지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내 속사정도 모르고 저러는 사람들이 너무 싫었고 부모님에게 학교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했었다. 그런 선택을 생각해보라는 부모님에게 성질내면서 이렇게 외쳤다.

"지금까지 삐뚤어지고 안 자라온게 어디야!" 

마치 자랑인양 얘기했던 그 말은 아직까지도 가장 가슴아픈 말이구나 하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에 뭐만 있으면 좋을텐데...', '돈만 조금 더 있으면 좋을텐데...', '다 좋은데 이것만...' 많은 이유를 달면서 현재의 상황이 나에겐 최선을 다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를 붙이고 싶어합니다.

행복은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은 이 것때문에 불행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상황탓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때문에 행복하세요.

무엇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불행은 당신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세요.

이유없는 무덤은 없나..

Thursday, June 19, 2008

자살하는 사람들 소식이 많이 들린다.

나쁜 짓을 해서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기 두려워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은 사람...

다들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의 행복을 찾지못해 목슴을 끊는 사람...

생활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삶의 무게에 눌러져 끝내 목숨을 끊는 사람... 

그렇지만 그 반면 삶의 끈을 놓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어떤 젊은 여인은 3개월때 안면에 종양이 생기고 살아오는 동안에 무려 10차례의 암과 싸워야 했다. 암세포때문에 얼굴은 함몰하고 코는 눌러지고 양쪽 가슴은 절재되어서 살아와야 했지만 그는 오늘 하루도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위해서 암병동의 간호사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힘든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의 고통의 순간이 없다면 그 또한 불행한 삶일 것이라고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축복일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삶의 고통이 이길 수 있을만큼 조금씩 역치를 높여가는 삶속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더 축복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순간에 무너질 고통으로 삶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보다는 끈을 잡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은 역설적이게 삶의 고통이 참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순간마다 용기를 주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용기란 강한 시련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비록 나에게 시한부의 인생을 언도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은 삶을 더욱 더 값지게 살아야 한다는 자극이 되어야 한다. 비록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잔잔하게 자신의 깊은 향기로 남은 삶을 살아간다면 늙어서까지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보다 더 뜻깊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사실 어느 순간엔 참 힘들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픈 것도 고통 속에 있는 것또한 내가 살아 있기 떄문에 느끼는 다른 종류의 사치일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힘들어도 나의 마음만은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삶의 끈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를 놓아버리면 편할 것 같은데... 삶의 끈을 놓아버리면 편할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순간부터 놓쳐진 끈을 안타가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 같은... 그래서 삶의 끈을 놓아 자살을 택한 사람을 위해 안타가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이 놓아 다시 잡을 수 없는 그 마음이 안타가운 것이다. 한번 놓으면 다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아있다면... 그리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이 있다면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 살아가는 사람의 운명이다. 신은 마치 자살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것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너무도 사랑해 삶의 끈을 놓는 그 순간까지도 너무도 애처롭게 그 사람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삶의 끈을 제공해주 었다.

그래서 끝까지 자신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놓을 수 있는 의지는 우리에게 있지만 그 순간까지 갈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끈을 끊어야 하는지... 하나 둘 끊어가면서도 다시 되돌아 오기를 바라는 안타가운 마음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지 모른다.


그래서... 용기란 강한 자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여 자신에게 걸친 끈의 굴레를 놓을 자신이 없는 것도 용기인 것이다.

삶의 끈을 놓고 싶을 때...

Monday, August 9, 2004

희망을 쫓는 것이 꿈을 쫓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꿈과 희망은 크게 잡기 때문이다.

자신이 현재 이루지 못한 것을 그리고 이룰 듯 느껴지는 그 어떤 것에 희망을 가지고 꿈을 가진다. 그렇지만 사실 대부분 자신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다소 힘든 것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 이룰 수 없는 꿈이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별을 따고 싶은 꿈은 어른이 되어 천문학자가 되어 항상 가슴속에 별을 따면서 살아가는 과학자를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외계인을 만나고 싶은 어린 아이의 허황되어 보이는 꿈이 때로는 보이지 않는 미지의 탐험을 이룰 수 있는 화성 탐사선도 만들 수 있었으며 그 꿈은 아직도 이뤄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을 쫓는데 그 길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 길이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렇지만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그 길이 평탄하지 못하거나 장애물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꿈과 희망을 가졌던 그 마음가짐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돌맹이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아프다고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지 하고 스스로 질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뜻이 강하고 의지가 강하다면 넘어진다고 해도 바로 일어나서 자신이 넘어지기 전에 갈려던 방향으로 다시 일어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한번 꿈과 희망을 설정하면 그 순간 자신의 가슴속 시계를 멈추두는 것이다. 꿈과 희망을 이룰때까지는 항상 초심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꿈의 시계

Sunday, August 1, 2004

고 싶은 사람들은 꿈꾼다.

나에게 날개를 달 수 있게 해달라고...

날개를 얻고 나면 날개만으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들이 멋지게 창공을 저어가며 날아가는 것은 보아도

날기 위해 어린 시절 얼마나 많은 날개짓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리고 날개를 달고 날개짓을 해 하늘을 날고 나면

어떻게 땅에 내리는지 알아야 한다.

비록 멋지게 하늘을 가르며 비행에 성공했다 해도

제대로 착륙을 못하면 결국 크게 다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렇지만 다치는 것을 두려워해 계속 하늘에서 비행만 한다면

언젠가 지쳐 추락하게 될 것이다.

날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더 큰 어려움이 닥칠거란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 어려움을 두려워해 날기 거부하지 말자.

우리가 꿈꿔야 하는 것은 날개가 아니라 비행이다. 그리고 멋지게 착륙하자.



그게 인생이지 않을까...

날고 싶어하는 영혼을 위해...

Sunday, June 13, 2004

"사진이 나이 들게 나왔었군요"

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책에 나온 사진은 언제 적 것입니까?"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마 전에는 한반중에 아랫녘에 계시는 이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건네 받자 마자 이모께서는

"이 빌어먹을 놈아. 어째 그렇게 폭싹 늙어뿌럿냐"

며 푸념을 해대셨다. 어떤 텔레비젼 화면에 잠깐 지나간 내 모습을 보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만나 뵌 지가 3년이나 되어가니. 당신 나이 드는 것만 알고 내 나이 드는 것은 모르시는 이모로서는 그럴만도 하다.

언젠가 원로분으로부터 이런 말 들은 것을 기억한다.

"세월이라는 것은 겨울 삭정이에 눈 쌓이는 것 같다네. 한참 쌓일 때는 모르는데 어느 순간 그 가벼운 눈발 하나 더 얹히면 풀썩 꺾이고 말거든."

나도 이제야 알겠다. 시시각각으로 시간은 흐르지만 늙음은 한 달치씩 1년치씩 그때그때 표시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은 삭정이에 눈 쌓이듯 모아 둔 채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삭 한꺼번에 나이 든 표시가 난다는 것을.

지난 5월, 어떤 수녀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찔레꽃이 한창이라며 불러 주었다. 꽃구경을 하고 향기에 취한 채 수녀님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 수녀님이 "실례지만"이라고 전제한 후 내 나이를 물어 보았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5학년 몇 반이라고 대답하자 와! 하고 웃음이 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수녀님이 얼굴에 그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비결이 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당황해서 웃다가 '임상 실험'중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이것 한 가지만은 공개했다.

"저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행복했던 일이나, 아름다운 풍경, 혹은 누군가의 유머 등 기분 좋았던 일만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그 반대였지요.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나한테 기분 나쁘게 했던 사람. 속상했던 일, 모진 말 등 안 좋았던 것만을 떠올렸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잠자는 어린 아기를 들여다 봤더니 혼자 웃으며 잠을 자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저도 잠자면서 이 가는 것보다는 웃는 얼굴이 되고자 그런 임상 실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 정채봉 에세이 「 눈을 감고 보는 길 」



분 좋은 임상 실험을 위해서...

얼굴과 나이 ─ 정채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