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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23, 2019

천천히 가는 사람이 종종
더 빨리 도착하는 것은 왜일까?
이런 사람은 무언가에 쫓겨 미친 듯이 달리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는 까닭이다.
시간을 가져라.
그리고 느림을 충분히 향유하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은 경직된다.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은 항상 영원을 약속한다는 소중한 비밀을.

오늘날, 세상은 기다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문제에 부딪치든,
사람들은 신속하게 해결책을 찾고 싶어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기다림은
우리가 지닌 본질적인 면을 가르쳐준다.
우리 자신의 발전을 깨닫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인내뿐이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잎들은 그만큼 빨리 시든다.
꽃이 필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즉각 변화시킬 수 없다.
변화는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찾아온다.


안젤름 그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느림

Monday, May 20, 2019


조급한 확신 A jumped assurance 


에피소드 하나: 병원 응급실에 아이가 들어왔다. 팔이 부러진 상태로 들어와서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혈관 주사로 진통제를 투여하려고 하니 아이는 갑자기 거부하고 경구용 진통제를 달라고 이야기한다. 아이의 요구에 경구용 진통제 알약을 주었다. 아이의 보호자인 아버지는 말끔하지 못한 모습으로 아이 곁에서 걱정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계속해서 통증을 호소하고 계속 진통제를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몇번 주었지만 상황을 의심한 의사는 아이의 약물검사를 해서 처방한 진통제를 복용했는지 확인한다.

CHICAGO | MED NBC

의사의 예상대로 아이에게서는 처방한 진통제는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몸이 불편하고 깔끔하지 못한 아버지를 의심했고 아이를 이용해서 약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한 진실이 밝혀진다. 아이는 의도적으로 팔을 골절시켰다. 그리고 병원에 와서 진통제를 받고 이를 먹지 않고 숨겨두었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사고로 몸이 불편해졌고 당시에는 쉽게 처방받을 수 있었던 옥시코돈을 처방받아 통증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정부 정책이 오남용을 먼저 걱정해서 처방을 제한하게 되고 나서는 제대로 약을 처방받을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처방을 받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의료보험을 요구받았고 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아버지는 계속 통증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 모습이 안타가웠던 아이는 스스로의 팔을 골절시켰던 것이다. 알약 몇개를 얻기 위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옆에서 보면서 그 고통을 몇번이라도 줄이고 싶었던 것이다.

'약을 얻기 위해서 아이를 이용했다고 생각했던' 의사는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면 사과를 마땅히 받아야 할 아버지는 의사로 부터 제대로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직업적 신념에 따라서 아버지를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고 잘 했던 행동이라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의심할 수 있고 쉽게 말해 '아니면 말고...' 라고 생각했을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인지 알 수 없는 씁쓸한 생각을 들게 한다. 아무튼 드라마에서는 의사가 깊은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시카고 메드 Chicago Med 시즌 4의 에피소드 21편 Forever Hold Your Peace 의 이야기 중 하나이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의심하고 진실이 무엇인지 찾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잘못된 진실을 믿고 상대방을 의심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충분히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진실을 알려고 하는 노력할 때보다 진실을 알고 나서 더 많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진실이 밝혀졌으면 그만이지라고 이야기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보면 의사가 밝혀낸 사실은 '아이는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라는 결과는 알아냈지만 그 사실들이 '자신의 약을 얻기 위해 아이를 이용한다'는 사실까지 말해주지 않지만 많은 편견과 시선으로 이미 그런 결론으로 도약할 때가 많다.

성급한 정의 A jumped justification 


에피소드 둘: 미국의 공립 병원인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의 정신과 의사인 이기 프롬 Iggy Frome 은 평소와 같이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아이들과 함께 집단 상담 치료를 한다. 치료의 일환으로 아이들이 모여서 치료활동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시의 복지담당 공무원은 환자인 아이 중 하나가 특별히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이를 이기 프롬 박사가 사적인 감정으로 아이를 다루어서 이에 생긴 트라우마가 아닌 것인지 의심하고 이를 조사하도록 요청하게 된다.


이기 프롬 박사의 치료 중 학대 사실을 의심하며 조사하는 과정에서 결국 피해 당사자인 아이에게도 질문을 하게 되지만 아이는 더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결국 이기 프롬 박사에게만 말하겠다고 말했다. 환자의 치료 과정 중 학대 혐의 alleged 를 받은 이기 프롬은 모든 진료를 중단해야 했고 심지어 피해자였던 아이의 요청이라고 해도 모든 치료 과정이 중단된 상태에서는 쉽게 아이의 이야기를 듣기 어려웠지만 이기 프롬은 이 요청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아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가족 구성원의 학대를 받아왔었다는 그리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과가 좋아서 모든 혐의가 없어 다행이지만 만약 아이의 거짓 증언이나 잘못된 정황이 나왔다면 이기 프롬은 바로 의사 면허를 박탈 당했을 것이다.

뉴암스테르담 New Amsterdam 시즌 1의 에피소드 21 This Is Not the End 에서는 모든 환자들을 사랑으로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이기 프롬은 어떤 아동을 부적절한 행동으로 학대했다는 혐의를 받고 이를 조사받는다. 이미 드라마를 통해서 이기 프롬은 천사에 가까운 정신과 의사였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배운 것은 버리고 환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주려는 환자들에게는 따뜻한 모습의 의사이다. 이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보면 말도 안되는 혐의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보면 화가 날 수 있다. 물론 그런 상황을 모르고 이기 프롬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시 공무원에게는 잘못된 내용이 의심된다면 이를 적절하게 조치하고 그 의심을 풀어내는 것이 의무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의심은 아주 순간적이다. [인생의 선택에 대해서 ─ 익숙하지 않은 미래란 모험]


가정은 의심을 초래할 수 있다. 가정은 대개 친근한 경험들에 근거하는 법이다. 따라서 그동안 유지해 온 과정을 적용할 때만이 가장 좋은 글을 쓰고, 가장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박자를 조절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이 행복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들은 이런 신속함을 요구한다. 만일 행인이 갑작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난다고 하자, 당신은 우선 놀랄 것이다. 잠시 후 그를 관찰할 준비가 되고 보니, 그는 이미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이다. 만일 당신이 이제부터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생각해 보리라 하고 뒤 쫓아간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인가?

─ 피에르 썅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中 

그래서 우리의 의심은 심사숙고한 결과라기 보다는 순간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일 때가 많다. 충동적이란 뜻은 결국 충분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관찰할 결과라기 보다는 자신의 쌓아온 경험에 근거할 때가 많다. 자신이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의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본인이 자주 '노래방'을 가서 다양한 경험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의 딸과 함께 딸의 남자친구가 노래방 이야기를 한다면 그 노래방이 가지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딸의 남자친구도 쉽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그 의심의 근거는 밝혀진 사실들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라는 점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Doubt (2008)

이런 이유로 미국의 어떤 주 정부는 내부 비리 혹은 부정 행위를 단속하는 인원들을 계속해서 근속시키지 않도록 한다. 왜냐하면 계속 의심하고 잘못된 형태를 봤던 이들에게는 모든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스스로 정의로운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은 좀더 확신하고 정의롭다 


두가지 에피소드를 보면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수많은 정의로움으로 얼마나 많은 사회의 악인이 사라졌을까 보다는 얼마나 반항하지도 못한 억울한 의인들이 먼저 쉽게 사라졌을까 싶었다. 악인과 의인으로 구별하는 것도 어렵지만 악인에 가까워서 사회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잘 사용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잘 피해다니고 그 구조 안에서 잘 생존하지만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이들은 종종 그 사회 안에서의 의심을 더 많이 받고 스스로 방어하기 어려워하는 성격 혹은 스스로 방어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이들이 먼저 사라지게 만들 때가 많다. 뉴암스테르담의 이기 프롬 박사가 그런 모습의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때로는 기존의 시스템과 규칙을 어기더라도 환자들의 마음을 먼저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이였고 그렇게 기존의 규칙을 어기는 모습들은 모두 의심을 받기 쉬웠다.

아버지의 고통을 보고 참지 못한 아이를 보며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한 부분이 있다.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에게 다가올 고통마저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받으면서 자신을 희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하기에 그런 경우 정 반대로 생각해서 아이를 이용하는 아버지가 되고 만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부의 약물 남용 opioid crisis 정책에 의해서 제대로 된 진통제도 받지 못하고 참으며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런 정책이 원망스러워도 그것조차 제대로 어기지도 못하고 참는 시민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CHICAGO | MED Season 4 Episode 21 -  Forever Hold Your Peace

"그동안 어떻게 견디어 오셨나요?"

아버지: "대부분 술이였죠." 

사회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구조처럼 보이지만 악인보다는 의인들이 더 쉽게 지치고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사회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고통을 참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신의 고통을 절대 참지 못하는 이들은 불법으로 약을 구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회가 가지는 규칙이 아무리 정의를 외쳐서 악인들의 남용이나 잘못된 부분들을 막으려고 해도 개인의 고통으로 참아내야 하는 이들의 소리도 잘 들어야 한다. 만약 그런 개인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생존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다면 정의를 강하게 외치고 누군가의 잘못을 확신하는 이들은 선에 가까울까 악에 가까울까 생각해 본다. 그 구별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선한 이들은 자신의 정의감으로 누군가 잘못된 진실로 상처받을 수 없는지 그리고 그 상처로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어할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서 좀 더 신중할 수 있고 좀 덜 확신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종종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정의롭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말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세상의 화려한 곳에는 사람의 고통을 찾아가지 않고 타인의 실수마저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화려하게 할 수 있다는 공명심에 빠진 경우를 보게 된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들은 세상의 화려한 곳이 아닌 세상의 고통이 가장 큰 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이다. [[내주변] 지상에 내려온 천사와 악마]

확인될 때까지 확신하지 않는 것 Not sure till confirmed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사법살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권력에 의해서 사적으로 죽였던 많은 역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과 제도가 잘 정비되었다 싶었던 시절에도 사코와 반제티 사건 [Struggle ...]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법살인들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해서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들은 결국 소수의 권력자들을 위해서 사법살인을 했던 비극적인 역사이다. 그리고 그 사건들 속에서는 사법부는 증거와 사실을 중심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정의'에 의해 휩싸인 확신에 의해서 많은 생명을 죽인 사건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것, 소위 팩트 체크가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수많은 미디어와 인간의 편견들은 수많은 잘못된 정보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모든 것을 다 평가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 아니다. 오히려 확신에는 어떤 의로움도 어떤 사실도 없다고 믿는 것이 더 필요한 세상이다. 어느 시대보다 증거로 인정이 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재판의 결과가 달라지고 그만큼 증거, 증인 material evidence, witness 의 증거능력을 더 고려하게 되지만 이 증거능력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고 죄지은 사람들은 풀려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유로 악마는 항상 섬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지 모른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
이 말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표현하지만 사실 섬세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곳에는 악마가 숨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쉽게 확신해서 섬세한 것을 놓치고 그냥 지나치는 곳에는 항상 어떤 악마가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이기 프롬 선생님 Dr. Iggy Frome


고민을 남기는 두 편의 드라마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지만 뉴암스테르담 시즌 1 에피소드 22 Luna 에서 이기 프롬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서 마무리한다.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드라마 속의 장면들과 겹치는 이 대사들 속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수많은 섬세한 장면들이 담겨 있다.

Dr. Iggy Frome

"우리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기 전까지는 직관적이지 않아 보인다. 뇌는 무엇인가 합리적이고 잘 설명되는 것으로 결론내려고 한다. 예를 들어, 때로는 세상은 너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친구의 밝은 웃음이나 막 태어난 아이가 당신의 손가락을 잡으려는 때 처럼 말이다. 그러나 삶은 또한 부서지기도 쉽다.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공포와 마주할 때,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트라우마를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려고 한다, 심지어 전혀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도. 그런데 왜 세상이 악으로 가득찼다고 말하기 어려워 하는가? 그건 악이란 당신의 두려움이 맞다는 뜻이다. 악이란 쉽게 포기할 것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악으로 가득차 보여도, 우리가 누군가에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쁜 상황이 되면 그런 믿음은 더욱 더 힘들어 진다. 그때는 우리가 일어나기 위해 선택해야 하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상은 우리의 주변은 그리고 매순간 사람들이 그렇게 선택한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어두워 보이나? 당연하다. 그러나 항상 빛은 존재한다. 더 많은 빛들 말이다. 당신은 그저 눈을 뜨고 바라보면 된다."

─ 이기 프롬 박사

"It does seem counter-intuitive until you realize how the brain works. The brain is just it's just trying to make sense of things. Like, sometimes the world is so beautiful, you know? The laughter of a friend, a newborn baby gripping your finger. Life is also fragile. You blink, it's gone, just like that. Into the face of horror, our minds turn our trauma into a story to make sense of it, even if it doesn't make sense. So why would you mind tell you that the world was evil? Because evil means that your fear is right. Evil means that you can just give up.

But to believe that we all have the capacity to be heroes, no matter how evil the world may seem. That's harder because that means when the worst happens we can choose to stand up, we can choose to help. And that's what, all day, all around us, people do. So is the world dark? Sure. But there's light. There's so much lights. You just have to open your eyes and look."

─ Dr. Iggy Frome



조급한 확신과 성급한 정의의 섬세함

Monday, April 2, 2018


시간이 흘러도 머리에 계속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일은 아주 기억하기 싫지만 상처처럼 남아 흉터처럼 떠오르는 일이거나 큰 충격처럼 남아 정말 잊지 않기를 바라는 강한 의지로 남아있는 일이다. 많은 경우 상처로 인해 남는 아픈 일들이 더 많이 남아 있지만 개인적으로 몇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

어느날 저녁을 먹지 못해 늦은 저녁을 챙겨 먹기 위해 시장 골목에 순대국 집에 들어갔다.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 사이 한 자리에서 나는 순대국 한그릇 시켜 먹기 시작했다. 조금 배를 채워가고 있는 중 할머니 한분이 순대국 집에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 있었고 할머니의 걸음마다 손으로 다리를 잡지 않으면 안되실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식당 손님들에게 껌을 팔기 위해 들어오셨다.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셨던 식당 관계자 분들도 이내 할머니의 굽은 허리와 힘든 발걸음에 불편한 표정을 더이상 지을 수 없으셨는지 계산대에 한분이 가셔서 천원짜리 지폐를 준비하시려고 움직이셨다.

대지팡이 들고 걸어가는 꼬부랑할머니 뒤태를 담은 강재훈 사진가의 전시 출품작

그런데 할머니는 너무 힘드셨는지 눈 앞에 보이는 정수기로 가셔서 물 한잔을 받아 마시셨다. 조금은 힘든 숨 뒤에 한잔 물을 드시고는 조금 멈춰 그 자리에서 쉬셨다. 할머니를 본 몇몇 손님들은 할머니를 위해 지갑을 꺼내셨고 나도 잔돈이 있을까 지갑을 꺼내는 순간이였다. 할머니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껌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급하게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가시는 것이였다. 나를 포함해 아마도 몇몇 분들은 할머니의 그런 행동에 놀라기도 했지만 천원 지폐를 준비하러 계산대로 가셨던 식당 관계자분이 가장 많이 놀라셨다. 할머니를 따라 할머니를 불렀는데 할머니께서는 갑자기 더 빠른 걸음으로 나가셨던 것이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할머니께서 하셨던 말은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지만

"물도 마셨는데 괜찮다. 염치없이 어떻게 ..." 

란 말을 남기고 식당 밖으로 급하게 나가셨다. 난 사실 순간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물 한잔 마셨다는 이유로 염치없이 어떻게 이 식당에서 껌을 팔 수 있겠냐는 내용으로 할머니가 말씀하셨을 때 사실 어떤 느낌인지 표현할 수 없는 멍한 가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원 지폐를 챙겨 따라가던 아주머니 뒤로 나도 잠깐 식당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할머니는 힘든 발걸음으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 싶을만큼 저 멀리 가고 계셨다.

사실 그때도 할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굽은 허리와 물 한잔에 '염치'를 말씀하시며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나가셨던 모습은 몇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염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굽은 허리의 할머니는 항상 내 머리 속에 들어오신다. 가끔 쓰는 말이지만 '염치'란 말은 참 어려운 말이다. 국립 국어원에 의하면 염치/얌치 없다 로 표현하고 얌체란 얌체/염치 없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라 말한다. 고 해다. 그리고 '염치'를 영어로는 무엇인지 전혀 떠오르지가 않아서 사전을 찾아보면 shame 이라 나온다. 그러나 shame 이 염치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e attitude of trying to maintain one's dignity or refraining from doing something shameful.

더 어렵다. 인간의 존엄 혹은 체면을 지키기 위한 태도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염치 없다' 표현하는 것처럼 사리사욕보다는 타인을 위해 지켜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조절하려는 모습이 더 가깝다. 그래서 염치란 염치없다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정적 느낌이 더 다가오기는 하지만 염치란 말 자체는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어떤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특히 허리 굽은 할머니의 행동을 본 이후 염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친필로 알려진 예의염치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사회가 되면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소위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고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생각한 태도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통해 더 많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에게 높고 낮음이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높은 자리에서 대우받기를 원하는 그 모든 태도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체면을 지키는 모습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통해 소위 권위와 위력을 통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실상 염치란 별로 중요한 덕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존엄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출처: 한국교원신문

체면이나 부끄러움이란 말과 염치란 조금 느낌이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염치, 한자로 廉恥 : 청렴할 렴,부끄러울 치 이다. 부끄러움을 알거나 사람의 체면을 지키려는 태도라고 생각했지만 염치의 염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청렴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다.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 속에서 청렴은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통해 탐욕을 챙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덕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태도가 염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SAN FRUTTUOSO, ITALY Christ of the Abyss
낮은 곳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삶에서 많은 이들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높은 곳을 동경하며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나쁘다 말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염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염치를 찾기 보다는 낮은 곳에서 염치를 찾기 더 쉬울 것이란 알 수 없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정하 시인의 시처럼 '너를 위해 나를 온저히 비우겠다는 뜻' 그리고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사랑의 노래에는 자신이 낮은 곳에 있지 않는다면 그 잠겨 죽어도 좋을 사랑은 밀려 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낮은 곳이란 그런 의미같다. 낮은 곳에 있어야 사랑도 흘러 내려오고 인간의 아름다움도 내려온다. 염치란 그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태도일지 모른다.

낮은 곳이라도 허리 굽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 내 삶에 무엇이 소중한지 생각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다.


염치 ─ 더 낮은 곳으로 ...

Sunday, June 28, 2015

아직 근골격계가 발달하지 않았지만 활발한 아이가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릇을 잡고 가다가 놓치고 말았다.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아이는 놀란 마음에 멈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놀라 달려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소 큰소리로 아이에게 말한다.

"다친데 없어? 그러니깐 조심성없이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거야!" 


비록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이미 사건은 일어났다. 비록 깨진 그릇의 파편에 아이는 상처입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내 엄마의 목소리에서 나온 파편에 찔려 상처입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던, 아니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엄마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모습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더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렇게 조심성없이 뭐 가지고 다닐거면 가지고 다니지마.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해!"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며 이야기하지만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야기했지만 대부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놀라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그대로 아이에게 내 뱉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아이에게 이해를 구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공감의 능력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결론이 난 일에 대해서 잘못, 옳음을 따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를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엄마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아이가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고 아이는 분명 나를 도와줄려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라며 아이에게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럴수도 있는 것이지 실수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너가 다칠 수 있으니깐 앞으로는 조심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감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 경우보다야 훨씬 아이가 상처입지 않도록 아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조심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착한 엄마일지 모르고 이해심이 많기에 아이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려깊은 엄마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순간 자신의 아이라고 해도 모든 행동에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공감은 작동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공감은 있는 그대로 아이(상대방)의 감정에 묻어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반응이 적절한 공감의 반응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공감에는 나... 내 중심이 사라지고 나를 죽여야 가능한 것들이 많아진다. 아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를 먼저 살필려고 노력하고 지금 아이의 상태는 나보다 더 놀랐을 것을 느끼며 아이가 더 이상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다는 것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난 이 사건을 분석하고 아이가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깨진 그릇에 놀란 바로 앞에 있는 아이라는 존재이다.


아이들은 분명 감정적으로 다치기 존재이다. 그것은 어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원리Principle 만 기억하자. 아이를 당신의 논리와 규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당신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위선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아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공감의 문제로 확장해도 비슷하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위에서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사이에서도 그런 것이 공감이라 생각한다. 즉, 상대방의 상황을 다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심리상태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그 파악된 논리 구조가 자신의 논리 구조와 합일해야 그때서 자신은 상대방을 공감해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공감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해도 자신의 전적인 이해를 조건으로 생각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고,
결코 채워줄 수도 없는 상대의 고독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크리스티앙 보뱅의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시켜야지만 나는 당신을 공감할 수 있다는 오만스러움은 인간을 어떻게든 서로가 서로를 설득시켜야 인간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지옥으로 만들어 간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의 슬픔을, 아픔을, 고통을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과 상대방을 잘 알고 있다는 교만은 결국 '나는 너를 다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넌 왜...' 라는 공감의 폭력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어도 상대방의 모든 행동들과 감정들에 묻어 가며 그 사람이 힘들어 하는 그 부분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고독이 어디있는지 찾는 것이 서로를 아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내가 어떤 어루만짐을 해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는 과정, 기도가 필요한지 모른다.

그리고 그 어렵고 힘든 ... 그 것을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한다는 것' 이라 정의내렸는지 모른다.

Ama et fac quod vis.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

- 성 아우구스티노 

공감의 미학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Saturday, May 23, 2015

가장 행복한 것은 어떤 때일까요?

아무런 고통도 없고 고민할 것 없이 원하는 것 모두 다 하고 모든 사람들과 사이가 좋고 싸움도 없는 그런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하나요? 아마 그런 상황은 너무도 지루해서 특별히 행복을 생각할 필요도 없어 행복을 느낄 이유도 없게 될 것이다.

flickr.com/photos/sarabiljana/8589138022/

어느날 제자가 현명한 스승을 찾아가 어떤 여인(배우자)을 찾아야 할까요 하는 이야기에 스승은 이렇게 이야기 해주었다.

먼저 갈등이 없는 사람은 피해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자신을 지극히 감추는 사람이기에 그 두가지 모두 결국 너를 사랑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두번째 갈등의 상태에서 남에게 탓하지 않고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는 모습으로 너를 찾는 사람을 만나라. 잘못의 원인을 찾기 위해 남을 탓함은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건 사랑의 범주가 아닐 것이다.

세번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위로하며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렇게 함께 하는 것으로도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한사람을 만나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동반자를 얻은 것이다.

네번째 그리고 서로 마주보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라. 그리고 그것이 행복임을 깨달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라.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특별한 그렇지만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면 된다.그래서 행복은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하는 과정이기에 행복엔 갈등과 고난이 필요하다.

May 23, 2012 페이스북에서...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힘들었다. 올리고 싶은 글들은 쌓여가고 매번 언제 다시 시작해야 하나 싶다가 마음먹고 꽤 긴 글을 작성하고 올려볼까 하지만 올리지 않은 관성도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페이스북에서는 요즘 새로운 기능을 보여준다. 예전에 쓴 나의 글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이다. 문득 지난 해들 (years) 오늘을 볼 때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에도 주기 (periods) 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쉽게 블로그를 이어가 본다.

사실 글이란 자신이 자신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가장 필요한 말이다. 그래서 만약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에 주기적인 반복이 존재한다면 옛 오늘의 글들은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해주는 하나의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 현명한 배우자에 대해서

Monday, January 5, 2015

아이가 반복적으로 무릎에 상처가 생긴다. 이를 본 부모는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두가지로 분류해보고 싶다. 아이가 상처입어 아파하는 마음이야 같겠지만 이를 본 부모는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첫번째는 "조심하지 않고 왜 이렇게 다치는 거야... 앞으로 다치지 않게 잘 보고 다니고 조심해 알았지!" 
두번째는 "어디서 계속 부딪치는 거야? 혹시 다니는 곳 중에서 무릎 다치게 하는 곳이 있니?" 


많은 사람들이 보수 (conservative) 와 진보 (progressive) 는 정치적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정치가 안정적이고 정치가 내 삶에 영향을 크게 주지 않고 만족하는 생활을 하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정치는 잊혀져도 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 심지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내 삶의 운명뿐만 아니라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받게 되면 결국 정치는 나의 삶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본인이 장애인으로 장애인 등급제에 의해서 실질적인 불편을 겪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결정된 기준에 의해서 나는 장애인으로 보조받아야 하는 경제적 행정적 복지를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세금들에 관련된 법률에 의해 지난달의 지출과 이번달의 지출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언론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까지도 보수와 진보로 분열되어 싸운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 보수가 무엇인지 진보가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그 정의 (definition) 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마치 그런 정의는 정치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위 청년이라는 20대~30대의 젊은이를 만나도 상황은 비슷하다. 보수와 진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런 것을 왜 물어야 하는지 우선 귀찮아하고 많은 경우 자신이 진보라 생각한다면서 보수는 논리도 떨어지고 우기기만 하는 꼴통 집단이라고 말하고 자신이 보수라 생각한다면서 진보는 이념적 색깔이 너무 강하다 심지어 유행처럼 말하는 '종북'이라는 색깔론 (매카시즘) 을 서슴치 않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왜 자신이 보수를 지향하고 진보를 지향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마치 모두들 대통령이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세상의 정의 (justice) 에 있어 자신은 옳은 쪽에 서 있다는 주장만 할 뿐이다. 사실 이런 부분이 가장 안타갑다. 자신이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원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리고 그 고민과 실제 진보와 보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이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한 신념의 문제로 발전시키는 경우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보수와 진보가 도대체 무엇일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보수는 기존의 시스템(제도 및 정책 등)에는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보고,
진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기존의 시스템이 더 문제라 보는 

문제를 대한 태도 [ 보수와 진보, 대립에서 균형으로 희망하며... ] 라 생각했다. 물론 이 개인적인 생각이 정확한지는 항상 검증 중이다. 개인적인 결론에 비추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이 잘 설명되는지 하나씩 맞추어 가면서 다듬어 가는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를 생각한다. 

글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무릎을 다치는 아이를 이야기하다 갑자기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인지 눈치가 빠르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정치적 논리나 사적 이익을 쟁탈하기 위해 이용하는 정치적 권모술수가 아니라 순수한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는 단순히 정치의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삶의 태도 그리고 확대하면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가지는 사람에 대한 태도로 확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보수는 말그대로 보존시키고 싶어한다. 진보는 반대로 무엇인가 변화시키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보존시키고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목적어에 해당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보수와 진보를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인 정의에 의해서 보수가 지키고 싶어 하고 진보가 바꾸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시스템' 혹은 구조라고 말하는 것이다.

먼저 두번째 부모를 생각해보자. 반복해서 다치는 아이의 상처를 보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반복적인 상처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즉, 아이가 아무리 조심하여도 피하기 힘든 무엇인가 아이에게 지속적인 상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부모는 아이가 반복적으로 다치는 곳, 상황 등을 생각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한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학교 사물함이 열려 있을 때 아이의 무릎 높이에서 열려 아이에게 자주 상처를 준다는 상황을 알게 된다면 부모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치기 쉬운 상황이 있다면 문제의 원인은 그 상황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첫번째 부모를 생각해보자. 아이가 계속해서 다치는 것을 아이가 조심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아이가 부주의해서 다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은 '너가 조심해야해'이다. 물론 이런 해결책은 아주 깔끔할 때가 많다. 앞의 상황처럼 학교 사물함이 아무리 아이의 무릎을 다치게 할 수 있는 취약한 부분이라도 아이가 이를 신경쓰고 더 조심하면 될 것이다.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아이가 다칠 때마다 각성시키고 다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극복하지 못할 상황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수적 해결책 vs. 진보적 해결책 

현실적으로는 극단적 보수도 극단적 진보도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기는 비슷하다. 사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과는 다른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앞서 예를 들었던 학교 사물함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사물함이 있지만 해당 사물함이 지극히 악한지 (apt to devil) 지극히 선한지 (apt to good) 를 판단하는 것은 유인원보다도 못한 행동이다. (below apes) 이유는 간단하다. 사물은 지극히 가치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학교 사물함이 그 따위로 만들어졌어도 다른 아이들은 잘 사용하는데... 왜 유독 우리 아이만... 이란 이유를 들어서 자기 아이의 개인적인 부주의함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다. 반대로 진보적 해결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자기 아이가 부주의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도 아이의 그런 부주의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왜 물건을 만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그 원인을 돌릴 수 있다. 결국 정치에서 나타나는 특정 문제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12 Michigan GOP campaign card

결국 보수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가진다. 그런 이유로 현재의 시스템을 지키고 운영해 가면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의 원인이 현재 운영되는 시스템의 문제인지 살펴보기 전에 개인적 문제가 아닌지 소위 개인적 일탈이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반대로 진보는 현재 운영되는 시스템보다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들이 많은 경우 개인이 도저히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소위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게 된다. 사회의 많은 문제들 그 중 대표적으로 범죄를 생각해보자. 보수의 가치는 현재의 시스템 즉, 법과 제도 그리고 확대해서 사회적인 규범에 대해 잘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법과 규칙이 바로 현재 사회를 '지켜주는' 구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과 질서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진보의 가치는 이와 다르게 법과 질서가 개인의 인권이나 생활을 억압하게 된다면 그런 법과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시스템은 항상 옳은가? 사회는 항상 진보하는가? 

보수적 가치를 신뢰한다는 말은 어느 사회에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사회에 잘 적응한 한 보수적 인물이 북유럽에 간다고 해서 항상 보수적인 인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보수적 신념을 가진다는 말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에 있는지, 그 사회가 가지는 보편적 가치들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미국에 가서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소위 외국인 (alien) 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을 외국인으로 차별하는 미국 사회에 대해서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있던 경제활동이 미국에서는 불법이라면 아무리 한국에서 보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미국에서 보수적 인물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익숙했던 한국의 시스템과 구조들이 왜 미국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지 불평하게 될 것이다. 결국 개인이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를 구별하게 되는 것은 개인적 성향이라기 보다는 '어떤 사회에 소속되어 있고' '어떤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하는지' 에 따라서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어떤 사회가 가장 발전된 사회인가?" 

미국 사회가 가장 발전되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가 가장 발전되었다. 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발전된 사회' 에 대한 이상적인 접근을 말한다. 즉, 모든 사회 구성원이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현재의 시스템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는 사회를 생각해본다. 이런 완벽에 가까운 사회라면 결과적으로 진보적 사회 구성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을 조금 다르게 접근해서 중세 봉건제도 사회보다 현재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된 사회인가 혹은 진보된 사회인가? 이다. 다른 질문으로 붕괴된 공산주의 이념의 사회가 자본주의 이념의 사회에 비해 조급하고 덜 성숙한 사회인가? 이념의 큰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세상의 모든 정치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정말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로 진보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진보의 생각을 먹고 사는 보수 

진보적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 구성원의 불편함에서 시작한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사회의 시스템의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구성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혹은 역차별을 받고 있는 구성원이 있기 때문에 불편한 구성원은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하여 현재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런 이유로 새로운 학문을 배우거나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은 보수적 성향보다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기 쉽다. 같은 불편함이 보여도 보수적 성향의 구성원은 개인의 노력을 더욱 더 강조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변화시킬 필요을 덜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문제가 구조적 문제점이라 많은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조금만 변화시켜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편리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진보적 성향의 구성원이 제시하게 된다. 그래서 진보적 구성원은 항상 반복되는 문제의 원인과 현재의 구조에서 무엇을 변화시키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강조하게 된다. 즉, 변화에 대한 이득을 적극적으로 알리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만약 사회적 구성원 중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잘 적응해서 사회의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어서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아무리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껴도 그 불편이 개인적 불편함이 아니라면 그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장애인에 대한 등급을 통해서 장애인으로 가지는 기본적 불편함이 있는데 등급에 의해서 차등 지원이 되고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관련 법률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고치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덜 불편하게 살수 있다고 말을 해도 변화를 주도하는 보수적 성향의 구성원이 '더 많은 장애인들'이 '더 편해질 수 있는 이득'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거나 공감하지 못한다면 결국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은 사회 구성원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해질 수 있는 사회적 목표가 '더 발전된' 사회로 정의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개인의 지적 영역은 한계를 가진다. 아무리 법과 정치를 오랫동안 전공하고 경험한 사람이라도 장애인의 복지와 장애인의 삶에 대해서는 스스로 장애인 혹은 그 가족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의견, 특히 진보적 구성원이 제시하는 '변화의 내용'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얼마나 많은 구성원이 편해질 수 있는가' 에 대해 판단을 하면 된다.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는 사회 구성원을 소위 '보수 꼴통'이라고 부르는지 모른다. 즉, 자신이 처리할 수 없는 전문적 영역조차도 자신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사회 구조의 변화는 비용일 뿐이고 더 편해지는 사회 구성원의 행복은 계산되지 않는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다. 그래서 보수적 구성원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회의 구조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진보의 생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 많은 경우 이런 꽉 막힌 보수층이 사회 지도자가 되면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은 불행하고 불편해지고 더욱 더 비상식적 현상이 일어나지만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며 이겨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그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때 그저 '힘내라' 란 말만 해줄 것이다.

이념의 문제가 아닌 문제 해결 방법

보수, 진보를 하나의 대결 구도로 바라보는 것에 불편함이 느껴진다. 계속 강조하지만 보수와 진보를 이념 혹은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치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의 시작점으로 바라보면 좋겠다. 라디오 방송 중 경제 관련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트랜드 모니터 2015」 책에서 저자가 나와서 했던 말이 인상적이였다. 새로운 맛집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집을 포함하여 소유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요약을 하자면 '보수는 소유를, 진보는 소비를 (conservative possesses, progressive consumes ; CPs, PCs)' 지향하는 모습이라 요약해본다. 이런 성향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의에 맞춰 생각해볼 수 있다.

보수는 기존의 시스템을 신뢰하고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현재 구조에서 인정되는 가치에 대해서 공감하고 투자할 것이다. 반대로 진보는 기존 시스템보다는 변화하는 구조를 더 원하기 때문에 기존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덜 가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구분이 누가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라 만약 보수는 ... 진보는 ... 과 같은 구분되는 성향이 있다면 그 구분에 따라서 해석이 가능한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자주 다치는 아이에 대한 반응 뿐만 아니라 이미 보여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해석 가능한 도구가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첫번째는 누가 무엇을 탓하는가 (who blames what) 이다.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지적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 노숙인에 대한 시선을 생각해보자. 어떤 이들은 노숙인이 스스로 성실하지 않아서 돈을 벌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노숙인의 증가는 성실하지 않은 '개인'의 증가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해결책은 개인이 노력하는 것이다. 반면 노숙자뿐만 아니라 집이 있어도 생활고에 자살하는 가족들 혹은 계속되는 자본의 개발로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내몰려야 하는 사회 전반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스펙트럼을 통해서 노숙인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가 제대로 된 복지 구조를 가지지 못해 한정된 저 임금 노동을 반복해도 계속해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 구조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아무리 개인이 노력을 해도 가난 혹은 기본적 생활 자체가 고통이 되는 상황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사람이 많다면 그 문제의 원인은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탓하는가는 개인 / 구조 의 문제로 구별할 수 있고 이를 보수 / 진보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가 (who) 의 문제는 조금 다른 문제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문제 해결의 주체 (who) 는 누구인가? 

본인 스스로에 대한 비판보다 더 어려운 비판이 자신이 속한 집단,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보수 / 진보의 문제를 떠나서 조금 더 생각해볼 문제가 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노숙인이거나 혹은 노숙인 생활을 해본 사람 혹은 노숙인을 위한 기관에서 봉사를 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경험을 한 사람에게 노숙인의 문제는 아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경우 힘들게 노력해도 국가의 비합리적인 제도에 의해서 다시 가난의 그늘에 들어서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좋지 못한 환경에서 건강문제로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직접, 간접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쉽게 보지 않는다. 반면 태어나서 부족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는 쉽게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 쉽다. 즉, 자신이 원래 가진 보수 / 진보의 성향을 떠나 문제점이 발생한 구조 (사회) 에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체가 문제와 얼마나 관련있는지에 따라서 문제에 대한 보수 / 진보적 성향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한 의사가 비윤리적인 의료 행위를 통해서 환자가 사망했다고 하자. 문제를 살펴보면 다양한 문제의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의사 개인의 비윤리적인 부분도 문제이고 그런 비윤리적인 부분이 발생할 수 있도록 만든 허술한 법 제도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의료 관련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해진다. 비슷한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들은 개인적 문제로 집중할 것이다. 그것이 어느정도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정말 법률 혹은 구조적인 문제라면 같은 직종의 의사들도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 즉, 직접적 관련이 있는 당사자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 (개인의 문제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의 태도는 문제를 조금 더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더 관계 있는 문제일수록 보수적으로 될까? 반대로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일수록 진보적으로 될까? 사회적인 현상 (문제 발생) 에 대해서 여론의 방향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구체적으로 밀양 송전탑이나 제주 강정 해군 기지 건설 문제를 생각하면 만약 자신과 덜 관계되는 문제일 수록 진보적이라면 이런 문제들은 아주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여론은 전혀 그렇지 않거나 오히려 투쟁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성향을 종북과 같은 말로 문제삼으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왜 보수적으로 사고하는가? 

젊은 이들이 보수화된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경쟁 사회 그리고 언제 어떤 것이 어떻게 바뀔 지 모르는 불안한 구조보다 사회에 의한 일부의 희생이 있어도 자신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현재의 구조에 안착할려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이런 가설에 반증이 되는 예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직업의 안정이 안되어서 일용직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지금의 사회가 고통스럽지만 그렇다고 뭔가 더 변화하여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걱정하여 현재의 구조에 어떻게든 살려고 한다.

보수적 생각, 진보적 생각 이전 간과하고 있던 내용이 있다. 누구 (who) 란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많은 사람들은 정보의 양과 질만큼 해당 정보를 대하는 감정적 태도의 문제가 더욱 더 중요하다. 자신과 더 관계 있는 문제일수록 보수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더 관계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감정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핵발전소 주변의 주민들이 암에 걸려 죽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건 그 사람이 재수없어 걸려 죽은거고!" 라고 말한다면 보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극단적으로 감정적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즉, 바라보는 시선은 기본적으로 내가 보수적,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중간과정은 오히려 감정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의료 사고를 낸 의료인을 바라보며 많은 여론이 모든 의사들이 문제다라고 일반화하여 문제를 만들었다고 보자. 이런 여론은 지극히 감정적 문제이다. 문제의 원인이 의사 개인에게 있는지 아니면 의사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관행이 되어버렸는지의 문제를 벗어나 '모든 의사들' 이라는 표현은 감정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감정적 태도, 즉 보수적, 진보적 성향을 떠나 지극히 편향되고 개인적 감정이 가득한 세상이 만든 여론과 소문의 세상에서 자극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폭스 미디어 (미 보수적 방송의 대표) 가 세상을 위한 기여는 '심슨 가족' 뿐이라고 생각한다. 방송을 보고 있으면 모든 문제는 민주당에게 있고 때로는 오바마의 흉물스러운 얼굴 때문에 외교가 실패한다... 와 같은 품격없는 이야기가 방송되기도 한다. 차단된 정보에서 무엇인가 태도를 취해야 하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왜곡된 언론 속에서 보수화되기가 쉽다. 아무리 진보적 판단에 대한 정보들이 나와도 보수화되기 쉬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정량적 평가는 어렵지만 다양한 정보들이 유입되어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제의 원인들은 참 매력적이다.

답이 없는 진보적 해답, 답만 있는 보수적 해답 

진보적 성향의 문제 원인과 보수적 성향의 문제 원인이 제공될 때 자신과 관계가 깊은 경우에는 좀 더 신중한 선택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별로 관계없는 문제라면 좀 더 감정적 문제로 접근하게 된다. 그런데 개인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보수적 해답과 구조의 문제로 해석하려는 진보적 해답을 비교해 보자.

진보적 해답: 문제의 원인은 사회 구조에 있기 때문에 잘못된 법, 규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까지 모두 설명해야 한다. 복잡하다. 때로는 설명하려는 사람 조차도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힘들어 한다. 구조적 문제란 단기간에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시간동안 얽힌 문제를 설명하기에는 참 힘들다. 
보수적 해답: 문제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문제는 개인에게 있다. 개인의 도덕적 문제 그리고 지금까지 잘못한 내용들을 열거하면 된다. 아주 깔끔하게 개인적 일탈이면 모든 문제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문제에 대한 해결과 필요하다면 사법적 책임을 진다. 

두 해결책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신과 별로 관계가 없는 문제라면 쉽게 다가가는 그리고 감정적으로 뭔가 좀 더 땡기는 해결책을 선택하기 쉽다. 즉,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동일한 정보가 제공되어도 보수적 해답은 참 깔끔하고 당장 정의가 실천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하기 복잡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내용에 대해서 특별히 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의 다양한 문제 심지어 국가 공권력의 비 합법적인 억압 속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뉴스에서 보아도 자신의 일상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뉴스에서 전해주는 감정적 전달에 의존하고 판단하기 쉽다.


예를 들어 밀양 송전탑 공사를 보도하면서 밀양 주민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고 싶어하는지가 아니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송전탑을 지역 이기주의로 반대하는 것인지 보도하고, 반대하는 주민들 배후에 누군가 있다란 식의 정치인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면 이는 그대로 보도하고 이에 대한 반문 혹은 반대 증거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는 선택적 보도를 통해서 충분히 감정적으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보도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동일한 정보가 주어져도 감정적 반응이 더 빠를 수 있는 보수적 해답에 더 끌리는데 언론마저도 선택적으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의도를 가지고 보도하게 된다면 결국 정보의 양도 부족하고 경쟁 사회 속에서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은 보수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 보인다.

연민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렇다면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런 편향된 태도를 언론의 순기능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젊은이들이 점점 보수화되는 과정은 사회적으로 좋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만약 지금의 세상이 억울하고 가난한 이들을 조금씩 덜 만들어 간다면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이 느끼는 고통이 줄어들고 있다면 젊은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에 대해서 큰 문제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도 많은 이들이 소외받고 경제적 고통을 받고 있고 이를 증명하는 통계 자료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지나가도 쉽게 고통받는 이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법과 권력조차 이들의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개인적 탓으로 돌린다.

이런 이웃의 고통을 볼때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진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몇몇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규모가 큰 문제이다. 왜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는지 그 한가지 원인으로 젊은이들의 보수화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문제의 발생 과정에서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 감정적 반응'을 선호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서... 그러나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저 멀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을 우리는 '연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랜동안 그 연민의 가치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 연민에 대하여 ─ 구조적 범죄에 대한 생각 ]
[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 

연민이 사라져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파괴하는 해군 기지를 막기 위해 매일 공사현장에 있는 많은 이들이 참 멍청하게 보이고 해고 당했으면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 계속해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미련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런 것 다 떠나서 그들은 사람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힘들지 말이다.

오래전에 이 글을 시작했지만 해를 넘기면서도 쉽게 써지지 않았다. 역시 부족한 글솜씨라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힘들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사자성어가 인상적이다.

집사광익 (集思廣益) : 생각을 모아 이익을 더한다.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면 더 큰 효과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언제부터 많은 생각이 모이면 일치가 되지 않고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민주주의는 결론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과정의 신중함으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결론을 빨리 만들기 위해서는 소수의 독단적인 생각만 강조하고 이를 따르면 된다. 보수적 해답도 진보적 해답도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보수적 해답만 강조되어 개인이 절대 극복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이 안에서 살아남을 사람들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알아서 생존하도록 살아가게 하는 세상을 생각하니 너무도 끔찍했다. 몇일전 이런 세상을 꿈 속에서 만났다. 그리고 깨어나자 마자 메모를 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다면 뉴스에서는 사망자 수가 아닌 생존자 수를 발표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끔찍하다. 결국 삶의 폭풍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고 생존자 숫자 속에 자신이 들어가기 바랄 뿐이다. 생존이 희망인 절망의 시간들

보수, 진보 모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문제는 인간이 더 행복하기 위해서 해결하려고 한다. 보수 진보 그 어떤 해결책이 되어도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이 죽어가는 삶 안에서는 의미가 없다. 아파하는 인간을 바라보면 좋겠다.

보수아빠 진보아빠 ─ 이념이 아닌 문제 해결 방법으로

Thursday, November 20, 2014

대학교 다닐 때 학교 정문 앞 소위 공갈빵이라고 불리던 호떡을 파는 아저씨가 계셨다. 길거리 음식의 매력이지만 격식없이 간단하게 횡단보도 파란불을 기다리며 간단하게 사먹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종종 애용했던 기억이 난다. 십년 정도 지난 후 여전히 호떡을 파는 트럭을 여전히 있었고 머리는 조금 하얗게 서리 내리셨지만 아저씨도 여전하셨다.

반가운 마음에 배부르지만 호떡을 하나 사먹었었다. 오랫동안 익숙하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주문하는 방법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호떡 하나요! 라고 외치는 대신 작은 소리내며 검지 손가락을 올리며 한개라는 것을 전했다. 그리고 아저씨는 예전처럼 활기차게 종이에 호떡을 싸서 주셨다. 가격이 올랐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아저씨께서 호떡을 주실 때 모습은 여전하셨다. 아저씨는 청력에 문제가 있으신 난청 장애인이시다. 그래서 몇개요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손가락으로 몇개를 알리는 것이 더 편하고 즐거워 하셨다. 가끔 열명이상 같이 가다가 호떡이나 먹을까 싶어 주문해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열손가락을 펼치고 앞뒤로 한번만 더 흔들면 아저씨는 귀신같이 20개를 주문하시는지 쉽게 알아들으셨다. 

예전 집앞에 맛으로 유명한 튀김 노점상이 있었다. 튀긴 음식을 그리 즐기지 않았기에 평소 줄이 긴 것을 보아도 그렇게 먹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날 혼자서 마땅히 먹을 것이 없는 순간 그 튀김집이 생각이 났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바로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줄이 긴 집은 맛이 없거나 맛이 있거나 한데 내 입맛에 딱 좋아서 생각보다 더 많이 튀김을 먹게 되었다. 튀김 6개를 먹고 나서 집에 포장을 해갈려고 6개 더 주문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먼저 먹고 계산하려는 아가씨가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주인 아주머니를 향해 계속 "4개 먹었다고요!" 하면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순간 나는 주인 아주머니의 행동을 보면서 아주머니께서 듣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는 어렵게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뭐 저래? 말을 왜 못알아 들어?" 하면서 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먹고 있던 튀김을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은 생겼지만 맛있어서 던질 수가 없었다. 

난 아주머니에게 손가락으로 6개를 표시하고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며 여기서 6개 먹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고 또 다시 6개를 표시하고 주먹을 쥐어서 어깨 위로 땡기며 포장해갈 것을 알려드렸다. 아주머니는 알아들으셨다는 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원하는 튀김 6개를 넣고는 추가로 4개를 서비스로 넣어주시며 튀김 12개 값을 조금은 어색한 말투로 알려주셨다. 뜻밖의 서비스에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 이후 가끔 찾아갈 때마다 나를 알아보시고 항상 주문한 것보다 더 많이 넉넉하게 주시는 서비스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날 나만 그렇게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주는 것일까 싶어 옆을 살펴보는데 그렇게 살펴보는 나를 유심히 보시다가 나에게 말해주셨다. 

"예뻐서 특별히 더 주는 것이예요~!" 

음... 단지 특별한 감각을 가지셨기에 나를 예뻐하시는지는 몰랐지만 손님이 적은 한적한 어느 날 아주머니가 나를 예뻐해주는 이유에 대해서 손가락으로 주문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하루만 도와주러 나온 남편분께서 가끔 잘 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러웠던 그리고 무시당하던 많은 경험들이 있던 어느날 손가락으로 열심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내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고 이야기들었다 나에게 알려주셨다. 난 오히려 그 말들에 참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덤으로 주셨던 튀김들도 당연히 고마웠지만 그보다 잊지 않아주셨다는 것에 더욱 더 고마웠던 기억이다. 

많은 경우 '그 사람을 잘 알아...' 라고 말하는 표현에는 참 많은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속단하고 함부로 이야기하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내가 어떤 기분인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단지 내가 그 자리에 없다는 이유로 함부로 이야기하는 그런 경우 말이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수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쉽게 안다고 말을 한다. 


학교 앞 호떡파는 아저씨나 집앞 튀김파는 아주머니께서 청력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내가 정말 그 두분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학교 동문을 만나면 호떡파는 아저씨가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호떡파는 아저씨가 청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마치 호떡을 먹어봤다는 하나의 암호같은 내용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그 사람의 출신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속단하고 심지어 혈액형이 무엇이니깐 어떤 성격일 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사실과 가치의 경계를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튀김집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계속해서 튀김을 더 준다고 해서 나와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끔 튀김 가게 아주머니 이야기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나서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일까? 물어보면, '사람들에게 친절하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라고 대부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누군가에게 친절할 수 있다는 것은 꼭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다. 많은 경우 내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기가 쉽다. 그러나 친절이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나 불쌍한 감정을 가지는 대상에 대한 호혜가 아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아주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로 튀김 몇개를 더 가질 수 있는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개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는 그 무형의 가치가 더 소중하다. 


친절은 결코 댓가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친절은 항상 자신의 가치를 높여준다. 돈과 명예로 누군가를 아랫사람 대하는 태도가 자신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자본과 권력이 친절이 주는 인간의 가치를 포기하게 만드는 하나의 작용일지 모른다. 

친절함은 누구를 위한 투자인가...

Saturday, October 11, 2014

우연히 버스에서 서 있는데 바로 옆에 어떤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우연히 왼쪽 손목에 그려진 문신을 보게 되었다. 문신의 모양은 새장의 문이 열려 있고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두마리 새가 그려져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양이었다. 익숙한 이미지였기에 인터넷에서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보았다.


위의 이미지에서는 새들이 많이 있지만 그 여성분의 손목에는 날개짓을 시작하는 듯한 두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직접 문신이 아닌 피부에 그린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조금 유심히 살펴보니 문신 (타투) 가 가지는 몇가지 특징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문신이 그려진 곳에서 손목가까이 손목과 직각 방향으로 여러 흉터를 같이 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을 물어보지도 물어볼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여성의 손목을 보는 순간 참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내가 본 것이 정확하다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내용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인간 세상에서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누군가는 속으로라도 훈계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질 수도 있고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아마 다양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분의 흉터가 여러번 삶의 힘든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도한 것이거나 떄로는 습관적 이유에서 손목에 자해를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시도를 그만둘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도록 문신은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모든 추측은 나의 착각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통해서 그냥 그 잘못된 시도에 대해서 탓하거나 그런 나쁜 짓(?)을 왜 했었냐는 시선이 아니라 그저 문신으로 그려 놓은 그림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새장과 같은 것에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기를 아주 짧게 기도하게 되었다.


가끔 가벼운 슬픔부터 아주 깊은 고통에 힘들어 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의도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도움이 된다면 자신이 도와주고 싶다는 친절함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주 가벼운 슬픔이라고 해도 내가 왜 이런 슬픔에 빠졌는지 그 모든 원인과 상황을 되돌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만에 만난 누군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무엇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는지 얼만큼 슬픈 일인지 처음에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해주었던 것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휴지 한장을 주면서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그 슬픈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슬퍼지게 되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좀더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무슨 일인지 궁금함은 가득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누군가 '슬퍼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보름달이 크게 떠오른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슈퍼문 (super moon) 이라고 부르면서 평소보다 더 커진 달을 바라보지만 아무리 크게 보이는 달이라도 달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달의 뒷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만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달에게 다가는 노력을 해야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달조차 보여주기 싫은 뒷면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달과 같이 말하기조차 힘든 자신의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여주기 싫은 그 부분도 달이다. 달이란 자아가 가진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달조차 그런데 사람이라고 달의 뒷면과 같은 면이 있을 것이다.


위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슬퍼하는 사람이 '왜 슬픈지'를 알려고 한다. 심지어 그것이 달의 뒷면과 같은 말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솔찍하지 않다거나 때로는 위로해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렵게 이야기를 해도 '슬퍼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거나 '그렇게까지 슬퍼하지 않아도 될 일...' 이라며 지금 내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을 향해 '슬픔의 품질'을 평가한다. 그러나 위로는 평가가 아니다. 위로란 이유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정일 뿐이다.


내 기도가, 내 위로가 단지 당신이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Sunday, July 13, 2014

어린 시절부터 신김치가 좋았다. 

방금 김장이 끝나 한번 먹어보라고 맛있다고 해도 절대로 익지 않은 김치는 먹지 않았다. 그래서 김치가 익어야만 김치를 입에 대는 식성 까다로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날 가족끼리 집 앞 칼국수집에 가서 외식을 했었다. 칼국수 맛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지만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유독 내 입맛에 딱 맞았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적당히 익은 신김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에 주인 아주머니에게 외쳤다. 


"와! 김치가 맛있어요!" 

밝게 웃으며 나에게 응답해줄 것이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래?" 하시며 그냥 가신 기억이 뚜렸했다. 

무뚝뚝한 아주머니라 생각하며 그렇게 십여년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어서 학교 앞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칼국수 하나로 유명한 집으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역시나 저녁시간에 맞춰 와서 줄서서 기다려서 겨우 들어간 후 유일한 메뉴인 칼국수가 인원수대로 자동으로 주문이 되고 바로 칼국수가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십여년전 무뚝뚝한 아주머니가 계시던 그 칼국수집이 떠올랐던 것이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신김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칼국수 집 특유의 겉절이로 오늘 아침 막 양념이 묻은 그런 김치였었다. 옛날 칼국수 집이 생각난 이유는 어쩌면 그때 아주머니 표정은...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겠니..." 

라는 그때 아주머니의 표정에 대한 이유를 이제서야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십여년이 지난 후에서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칼국수 집 김치가 어떤 김치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다. 꼭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주방장의 특급 비법으로 제공되는 김치일지도 모르고 주인의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아는만큼 보이게 된다. 흔히 공감을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아는 과정이라고 말하기에 일종의 감정의 과정처럼 표현된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공감은 그저 인간의 기본적 희노애락의 감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슬퍼하며 눈물흘리는 것만으로도 슬픈 감정은 알 수 있지만 왜 슬픈지 왜 눈물까지 흘려야 하는지는 상대방의 상황을 알아야 더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예전에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 빗질하는 순간 머리카락이 한움쿰 빠지는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때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실제로 무엇인가 현실로 다가왔구나 하는 슬픈 서막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텔레비젼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가슴이 울컥해지고 마음이 큰 바위 하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온다. 사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내용뿐이지 그 느낌은 절대로 전달하기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을 만나면 특별히 어떤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서로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감이 이루어진다. 


결국 가장 효과적인 공감의 도구는 직접경험이다. 그러나 공감을 위해 직접경험에만 의존한다면 너무도 슬픈 세상이 될 것이다. 세월호의 유가족에게 막말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자식을 잃은,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최소한 조부모님과 죽음에 의해 이별해 본 경험은 있을 것이고 나이가 좀 있다면 부모님과 죽음으로 더이상 보지 못하는 상황일텐데 정확하게 '사고로 누군가를 갑자기 잃어본 직접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막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자식들만 모두 모아서 바다에 침몰시켜 수장시켜봐야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간접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직접 경험만으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물을 배우며 고양이는 어느정도 높은데서 떨어져도 괜찮고 무엇을 먹는지 지식을 배우는 이유는 고양이가 높은데서 떨어질 때마다 놀라지 않고 인간 몸에 좋다고 인삼먹으라고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고양이에 대한 습성, 생리학적 지식을 배워서 고양이가 내 앞에서 펼치는 이상한 행동에도 좀 더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내가 고양이가 아니어도 말이다. 인간의 생리학적 현상을 알게 되면서 왜 일어나는지 몰랐던 질병들을 이해하고 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과학적 접근이 가능해진 이유도 모두 간접경험, 교육의 결과이다. 

그래서 교육은 경쟁에서 이겨서 더 좋은 자리를 위한 입신(立身)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주변을 향한 공감을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풍수지리의 내용을 알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특정 장소에 높은 가격에도 사려고 하는지, 어떤 땅은 아무리 싸게 나와도 사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기에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위한 지식이 되게 된다. 칼국수에 어떤 김치가 나와야 하는지 모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아저씨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심지어 경기도 양평에서 텃밭을 가꾸는 칼국수 매니아 김모 할아버지라도 김치에 관심이 없다면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오는 것이 때로는 장사가 안되어서 김치가 익을 때까지 손님이 없을 수 있겠구나... 라는 추측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게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알게되면 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이라 표현되지만 관심과 애정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단순히 칼국수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한숨 가득했던 아주머니의 표정 속에서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가지고 있을 애환을 보게 되었다. 그 애환이 칼국수 집의 신김치라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에서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그저 사교성 나쁜 아주머니라 그냥 넘겨 버렸을 것도 어쩌면 장사가 잘 안될 수도 있겠구나 좀 더 다가가는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참 좋아하는 것은 항상 알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생긴다. 

기본적으로 세월호와 관련해서 막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에 가지는 기본적 애정조차 가지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비록 자신이 정확하게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텐데 그들에게는 직접 경험만이 유일한 공감의 영역이다. 교육은 알기 위해서이다. 그냥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참 좋아하는 대상을 찾기 위해서이다. 공감이 없는 그들은 인간에 가지는 기본적 애정조차 가지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고 한마디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놈이란 뜻이다. 


배움의 목적은 참 좋아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이기고 누구 하나라도 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라고 가르치는 이 교육현실에서 어떤 공감과 이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희망이다. 누군가 나를 공감해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과 투쟁의 사회 속에서는 결국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그 소수가 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무엇이라 할 수 없지만 서로가 공감하고 같이 살아가는 다수가 살아가는 사회가 더욱 행복할 것이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엘리트가 되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엘리트 속에서도 다시 경쟁에 의해 또 살아남아야 하고 결국 삶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경쟁과 생존으로 살아가야 한다. 

신김치를 공감하다. ─ 공감은 감정의 문제인가?

Sunday, May 4, 2014

친구의 장례식에 한 남자가 여자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형광색으로...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기 때문에 많은 공연들, 문화 행사들이 취소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진행하려고 했지만 취소를 강요당하는 곳들도 종종 보게 된다. 미디어도 웃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도 조심스럽게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마다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다. 누군가는 슬픔을 잊기 위해 자신의 일에 더욱 더 몰두하기도 하고, 즐거운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해서 그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방법으로 슬픔에 대처한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은 결국 타인에 대한 폭력이 된다.

"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슬픈거 맞어? 이처럼 슬픈 상황에서 그런 걸 하고 싶어?" 

그런 이유인지 공연의 내용에 상관없이, 심지어 분위기 때문에 예정대로 잡혀 있던 공연 내용을 변경하여 최대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모습들도 보게 된다.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삼일로창고극장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 할 수는 있습니다." 

참 멋진 말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슬픔에만 잠겨 있다고 슬픔에 대처하는 각자의 모습마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나와 다른 모습으로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도덕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더욱 더 빨리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대한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비록 장례식장에 형광색 여자 복장을 하고 왔지만 장례식 분위기를 망치기 위한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곧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복장을 하고 온 친구는 친한 친구이자 전우였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목숨을 잃은 전우의 장례식에 이런 무례한 복장을 하고 온 이유는 전장에서 전우와 나눈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 먼저 죽게 되면 상대방의 장례식에 여자 복장을 하고 오자!
그래야 무덤 안에서라도 웃을 수 있지 않겠냐!" 

그리고 친구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슬프지도 않은데 슬픈 척 가식적인 모습보다 이 무례한 복장이 더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여자 복장을 한 친구는 결국 장례식장에서 오열을 하며 먼저 떠나간 친구의, 전우를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 슬펐을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갇혀 아직도 찾지 못한 부모에게 가고 싶은데 아직도 부모님의 품에 한번 안기지도 못하고 찾지 못한 학생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가족이고 친구고 ... 누군가에게 누군가였던 실종자들이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이 슬픔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은 다르다. 그 모습마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nation ; 우리는 국가라고 부른다. nation 은 항상 자기의 땅을 갖지 못한 이방인들이 태어난 [natus] 곳을 잊지 않음 [-ion] 을 기억하기 위한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어디에 있어도 기억해야 하는 nation 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국가 (國家) 라고 부른다. 나라도 부족해서 집이란 표현까지 붙여가며 우리가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느낌까지 준다. 우리가 집밖에서 누군가가 때려 다친다면 가장 먼저 걱정해주고 슬프해줘야 하는 곳은 가족이다.

Will Lammert, Jewish victims of fascism : 파시즘에 의해 희생당한 유태인

그리고 그 슬픔에 가장 먼저 다가와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은 모두 다 다르다. 그러나 그 슬픔에 가장 큰 위로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는 국가이다. 왜냐면 국가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집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믿고 의지할 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국가가 우리에게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요한다. 자신들의 모습대로 슬픔에 대처하라고... 그리고 그것은 곧 폭력이다.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Thursday, April 24, 2014


성수대교가 무너질 때 무너지는 대교의 상판이 떨어져 내는 굉음 소리를 듣고 좋아했었다. 

그날은 학교에서 등산이 계획된 날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 성수대교가 보이는 친구의 집앞에서 친구가 나오기 기다리다가 천둥 소리가 나서 비가 오면 등산은 취소되겠구나 싶어 같이 있던 친구와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한강을 보는 순간 정말 믿기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당연히 이어져 있어야 할 것 같은 성수대교의 중간이 사라져 있고 그 밑은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없는 공포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년 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라디오를 듣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한 친구는 거짓말한다며 아이들에게 한대씩 맞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세계사의 굵직한 여러 사건들 가까이에서 경험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은 영화보다 더 견디기 힘든 참사가 일어났다.


무엇을 보고 웃어도 미안하고, 무엇을 먹어도 미안한 이 알 수 없는 깊은 수렁같은 느낌은 무엇일까. 정말 기도밖에 할 수 없다는 이 무기력함은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보다 더 깊은 심해로 침몰하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은 물로 가득차버리는 것 같다. 거의 몇일동안 잠도 안오고 문득 혹시나 하는 마음에 뉴스를 찾아보고 또다시 한숨쉬고...

한숨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날 아침을 맞이하며 갑자기,

침몰해가는 배 안의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고, 결국 그 아이들을 구조할 필사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그 구조와,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내놓고 잘 살수 있다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고, 결국 생활고 속에서 죽어가도 별로 관심가지지 않고도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는 그 구조가...

어쩌면 참 비슷하다는 짧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기에 아이들이 있어요...!" 라고 외치지만 정작 하나 둘 숨이 없는 아이들을 바라봐야 하는 그 찢어지는 아픔에 얼마나 공감하고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다. 동영상을 통해 본 한 유가족 아버지의 말이 계속 끝없이 메아리 친다.

"살려서 구조하다가 죽기라도 하면 비난받겠지만, 죽어서 시신을 수습하면 잘했다고 할 테니깐..." 

피 맺힌 그 절규같은 이야기는 왜 소수의 언론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도 어쩌면 세월호같이 침몰해가는 모습처럼 생활고에 점점 숨막혀 죽어가는 사람들만 늘어날거란 무서운 생각이 든다. 마치 침몰하는 배 안의 격벽에 각자 갇혀 있어 서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없는 체 자신에게 차오르는 물의 높이만 가늠하다 결국 숨이 막혀 죽어가는 그런 모습 말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절규했을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다시 돌아가라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가... 어밴져스를 보면 저 영웅들이 침몰되는 배를 구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고, 미래를 예언하는 초능력 영화를 보면 세월호 좀 미리 막아주지 하는 그 영화같은 상상만이 한동안은 우리를 괴롭힐 것 같다. 그냥 다시 아무 일 없듯이 웃고 싶어도 그게 잘 안될 뿐이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득 그게 꿈이었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라도 저 문으로 아빠가 들어올 것 같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갑자기 슬퍼지더라. 사람들은 이제 잊을 때도 되었다고 하지만 그럼 나는 슬퍼지지 않겠지만 아빠는 아마 잊혀져서 슬플꺼야." 

먼저 잃은 자식들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누군가를 묻고 처음에는 그 죽은 모습 그대로이겠지만 점점 흙이 되어가며 그 공간은 사라질 것이다. 점점 텅 비어갈 것이다. 처음에는 가슴에 가득 차 빠져 나가지 못할 것 같은 그 고통이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 텅 비어버린 공간에 더 슬퍼질 것 같다.

그냥 아이들이 원하는 것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어른들이 원하는 것 어른들이 만든 세상의 규칙과 경쟁의 경기장에 들어와 싸워 이기기 위해 조금만 참으라고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좋은 대학만 가면... 좋은 직장만 가면... 돈만 더 벌면... 과 같이 이것만 하면... 이라며 현재를 참으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현재 행복하지 않는데 어떻게 미래에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성공기라며 힐링이라며 조금만 참으면... 나처럼 될 수 있다 우리처럼 될 수 있다는 거짓 희망의 기대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되고 싶은 건 성공한 어른들이 아니라는 것은 왜 생각해주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조금만 참으며 지금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면 내일은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을지 모른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내일이면 행복할거란 그 짜증나는 대박 사상좀 지워버리고 싶다.

그냥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 해주게 하면 좋겠다. 이제 알잖아요... 아이들이 얼마나 착한지 죽을지 모르는 그 공포 안에서도 그대로 있으라는 어른의 말까지도 따르던 그 착한 것들...

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주고 아직 돌아오지 않고 바람으로 온 혁규.

잊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잊지 말아야 한다. 너무 무섭다.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날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잊혀질까 무섭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만의 고통과 아픔이 되어버릴 이 격벽의 사회가 무섭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정말 기억했으면 좋겠다.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얼마나 큰 아픔과 미안함을 느꼈는지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볼모로 지금 모든 것을 참으라고 말하는 그 거짓과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덜 미안할 것이다. 그래야 덜 아플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희생자는 우리가, 우리의 가족이 될 것이다. 

드디어 범죄없는 세상이 되었다.
누구나 행복한 세상이 되었다.
가난도 고통도 사라진 세상이 되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세상엔 아이들도 사라졌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False Peace...]

─ 道馬 洹俊

우리의 가슴도 침몰해간다...

Wednesday, March 12, 2014


천사와 악마에 인간 세상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지상에 내려온 천사를 찾고 싶어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서, 천사라면 당연히 아름답고 눈부시게 화려하고 인간의 모든 마음을 빼앗아 버릴만큼 매력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가는 사람 중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두고 혹시 저 사람이 천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온통 천사가 어디에 있을까 고민하게 될 것이다. 천사는 정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약 천사가 이 세상에 내려온다면 어디로 갈까?"

나도 이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찌들고 힘들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도 천사를 만나면 이 모든 고통을 이해해주고 아픈 것을 위로해주고 슬픔을 없애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가 천사를 만나고 싶은 이유를 생각하니 천사가 이 세상에 내려온다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아프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먼저 갔을 것이라 믿었다. 현실의 나도 충분히 아프고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픈 이들을 찾아 떠나보았다. 그저 천사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말이다.

그렇게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아픈 삶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적었지만 그 적은 것을 나누어 그들을 위해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고마워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고 아픈 이들을 찾아 나섰다. 더 힘들고 아픈 이들이 없을 것이라 믿었지만 이 세상은 찾으면 찾을수록 왜이리도 힘들고 아픈 이들이 많은 것일까? 점점 나의 삶이 부족해서 불평으로 가득했던 예전의 한숨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도 조금씩 나누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천사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존재는 나라며 가장 불행한 존재는 나라고 믿었던 스스로의 믿음은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을 찾아 나서면서 점점 내가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진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누어 쪼개어지는 내 물질적 풍요와 함께 물질적 욕심도 같이 쪼개어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천사를 찾아 떠난 그 여정은 결국 욕심으로 채워진 내 마음을 나눔과 감사로 다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던 노숙인에게 손을 내밀며 먹을 것을 권하는데 그 분은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천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군요." 

만약 세상에 악마가 내려온다면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 자신의 욕심을 쉽게 채울 수 있는 '쉬운 길' 에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는 인간은 그것이 악마의 유혹인지 조차 알기 힘든 그런 곳이다. 그래서 악마는 결코 나쁜 것을 시키지 않는다. 대신 나쁜 것을 당연히 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화려하고 찬란한 천사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점점 악마를 만나기 쉬워질지 모른다. 화려한 날개와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화된 천사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욕심이고 우리의 환상일지 모른다.

이 세상에 내려온 천사를 찾고 싶다면 조금 더 낮은 곳을 찾아야 한다. 그곳에 더럽고 보잘 것 없이 보여도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 가까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언젠가 자신에게 충분한 보상도 없이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낮은 곳의 사람들은 부지런하지 못해서 결국 도와줘도 그대로일 것이라고 냉소와 함께 그 대신 좀 더 자신을 위해 쓰며 즐기는 삶이 어떠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은 누군가의 어려움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무엇을 위해 그렇게 돕는지 물어보면 그 누구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아마도 나는 돈도 명예도 주지 못하는 천사의 달콤한 속삭임이 그들을 붙잡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천사를 만나고 싶으세요? 악마를 만나고 싶으세요? 

선택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 천사를 만나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고 아픈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기대어 쉴 수 있는 어깨를 대주는 사람을 찾기 바란다. 그 눈물이 흐르는 손에, 기대어 쉬는 어깨에 분명 천사는 스며들어 살아간다.


[내주변] 지상에 내려온 천사와 악마

Sunday, November 10, 2013

종종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사람들 혹은 술에 취해 제대로 걷지 못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013년 올해는 그런 경험을 유독 심하게 하는 것 같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로 아프고 나서 더욱 더 그런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오히려 내가 그동안 크게 관심있게 혹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친 많은 사람들이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Episode One...

여름, 한국의 어느 지하철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어색한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지 호기심에 가까이 가보았다. 그런데 지하철 계단에 어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분께서 술을 드시고 앞으로 쓰려지고 깨진 술병에 얼굴을 포함해 자상을 입은 체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이었다. 주변에는 거의 1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놀랍게 자기 카메라를 꺼내어 대부분 사진을 찍고 있었고 심지어 그때까지도 누구 하나 제대로 신고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무슨 용기인지 모르지만 달려가서 출혈 부위의 자상을 보고 가지고 있던 휴지 등으로 지혈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계단 내려가는 방향으로 쓰려졌기 때문에 호흡에 좋은 자세가 안되었기 때문에 평탄한 곳에 눕혀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술냄새가 심하게 나긴 했지만 다행히 맥박과 호흡은 괜찮았지만 얼굴과 손등에 지혈을 해야 했다. 소리지르며 사람들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하고 주변에 있던 남자 몇분께서 같이 도와주셔서 결국 응급차에 인계할 수 있었다.


사실 너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사진을 찍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황이 끝나고 누구에게 뭐라고 소리지르며 어떻게 사진찍고 있냐고 화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그저 한사람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가는데 어떻게 사진찍고 있을 수 있는가 싶었을 뿐이다. 물론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연습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안타갑고 당황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죽은 상황도 아닌데 마치 범죄현장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정말로 위태롭게 쓰려진 사람을 어떻게 해볼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이었다.

Episode Two...

그리고 한달쯤 지났던 어느날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가고 있는데 젊은 나이의 출근하는 청년 한명이 계속 팔을 주무르면서 팔과 가슴이 불편한 듯 계속 누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좋지 않은 예감은 그렇게도 적중하듯 청년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푹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놀라서 당황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정지해달라고 소리지르고 버스는 멈추었다. 쓰러져서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면서 힘없이 누워 있는 청년을 보고 앞으로 달려가서 혹시 모르는 응급 상황을 대비해 가지고 다니는 니트로글리세린 (NTG) 을 꺼내어 아파하는 청년에게 녹이도록 했다. 다행히 두알에 통증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대로 놔둘 수 없어서 가까운 응급실에 바로 들어가도록 했다.


그런데 그 급박하고 응급의 상황에서 자기 발 아래 쓰러진 청년을 두고 왜 빨리 출발안하냐고 버스 기사에게 소리지르는 아줌마가 있었다. 안타가움 혹은 안쓰러운 마음, 적어도 엄마가 자식을 걱정하는 모성의 마음은 커녕 오히려 자기 늦는데 왜 버스 빨리 출발안하냐는 아줌마의 모습을 보면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가지 더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정신없는 경황 속에서 응급실에 같이 동행하고 한참이 지나서 아줌마의 어이없는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 같다.

Thinking about...

한국에서 버스를 타면 항상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탑승 줄의 마지막에 서서 타려고 한다. 혹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양보해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내 스스로가 조금 그래서 그냥 차선책으로 생각해본 방법이다. 예전에 임산부로 보이는 어떤 분에게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였는데 그분은 자리에 앉아서 나에게 화를 내면서 알 수 없는 소리로 나를 째려 보아서 자리를 피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에는 임산부석이라고 따로 지정되지도 않은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당혹감은 여전히 기억난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차! 임산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회상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려를 하고 도움을 주려 할때도 마땅히 그래야 할 많은 이유들을 생각해야 하게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약 두달동안 캘리포니아 소재 회사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잠깐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서 방문하게 되었지만 조금 놀라운 경험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공짜 점심이나 한국에서 부러워하는 여러가지 복지 정책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것들은 조금 다른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이 신경써야 하는 나(self)이기 때문에 항상 어디를 가도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거리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 너무 안타가워 하는 마음도 어쩌면 내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마음때문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심하게 아픈 경험도 했기 때문에 그 아픔이 얼마나 외롭고 서러운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날 나와 같이 작업하는 분들은 보건 및 건강 담당 (public health & insurance) 하는 분이 오셔서 미리 나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응급 상황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응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그리고 가능한 응급 상황에 대해서 알려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라면 아마 그런 것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런 것을 담당하는 사람조차 쉽게 만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나와 같이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은 내가 어떤 상황이고 어떤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였고 차가 없는 나를 위해 유쾌한 마음으로 나를 태워주었다. 몇일이 지나고 그런 내용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사생활이 노출된 것 같은 불쾌함이 아니라 그동안 주변 동료들이 보여준 태도와 모습들이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Public Health Portal from Washtenaw County, MI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예전처럼 체력이 강하지도 뛰어나지도 않다. 혈당도 조절하고 조심해야 하고 혈압도 조절하고 그리고 심장도 조심해서 무리가 가지 않도록 잘 지켜봐줘야 한다. 건강한 사람들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호흡곤란이나 숨차는 현상도 가끔은 느껴야 한다. 그때마다 걱정도 된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오면서 혈당 측정기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일주일 가량을 측정하지 못했다. 뭐 이젠 적당히 조절되겠지 싶어서 일부러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날 보건 담당하는 분이 오셔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혈당 측정기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꺼이 혈당 측정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었다. 이미 회사 안에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혈압 측정기와 운동기구는 다 있었지만 혈당 관리해야할 직원들이 없었던 모양이다. 몇개월 후면 떠날 사람인데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오히려 이렇게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내 책임이 되니깐 자신을 위해서라도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About Public health... & Practice

누군가 보건 (public health) 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항상 앵무새처럼 이야기하게 된다.

보건이란 "건강을 지키고 싶은 의지를 만드는 환경을 만드는 공공재" 

라고 말이다. 그런데 공공재란 단순히 공공의 서비스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 그 공공재가 충분히 필요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사회 곳곳에 AED (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 자동제세동기) 가 마련되어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경우 우리는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리고 누군가를 배려해야 것은 상당 부분 '인간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런 배려와 도움도 결국 연습이 필요하고 그 연습은 사회가 왜 보건이 필요한지,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을 왜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의식이 충분히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수능에 나오는 문제 하나 더 가르치고 풀 수 있도록 하는 학생들도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연습을 시키는 것, 응급 상황에서 왜 내가 도와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전에 먼저 행동할 수 있는 연습과 습관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응급 조치에 대한 연습과 실무를 할 수 있도록 교육에 투자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다. 그런 교육을 통해 내 주변의 누군가 거리에서 쓰려져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모두 다 지켜보고 카메라만 찍고 있는 상황이 아닌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배려도 도움도 연습이 필요할지 모른다.

Thursday, November 7, 2013

풀은 꽃이 핀다고 해서 봄에 감사하지 않고
나무는 잎이 진다고 해서 가을을 원망하지 않는다.
─ 신흠 (申欽, 1566~1628) 

어린아이가 패달을 구르며 신나게 달린다. 아이가 탄 자전거는 뒤에서 누군가 아이를 위해 밀어주어 앞으로 가고 있다.

아이는 자기가 탄 자전거가 왜 앞으로 가는지 원리를 모른다. 만약 알고 있다면 패달을 열심히 구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는 뒤에서 밀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해 하지 않는다. 아이를 밀어주는 누군가도 아이에게 감사함을 바라지 않는다.

아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 즐거움의 본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연스러움이란 ... 그런 것일지 모른다. 너무도 당연해 감사함도 원망함도 너무 어색해지는 그런 것들...

... 가을을 원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