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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rch 13, 2018

정치인이자 장관이고 현 작가인 분 (이하 갑)이 팟캐스트를 통해서 전했던 전 정치인이고 전 행정인 그리고 현 무직인 분 (이하 을)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갑이 행정부 장관이였고 을은 당시 야당의 대표였다. 국민연금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갑은 당시 대통령에게 백지위임장을 받아 야당 대표 을과 협상을 했었지만 결국 결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 측 갑이 내놓은 안은 삼백오십만명 (350만명) 에게 월 9만원을 지급하는 안이였고 야당은 오백만명 (500만명) 에게 월 20만원을 지급하는 안이였다. 그런데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 하던 갑이 협상 관계자들에게 물어본 결과 을이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왜 3000억원밖에 차이가 안나는데 우리의 안대로 안 해주느냐"
─ 당시 (2006년 4월 ~ 6월) 야당 (한나라당) 대표 을


그리고 갑은 이에 대해서 "그 때 '이 사람은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며 "협상대표로 나온 사람이 허위보고를 했다하더라도 산수만 할 수 있다면 여야안의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전했다. 정리를 하자면,

  • 갑의 제안: 90,000 KRW/PERSON·MONTH × 12 MONTH/YEAR × 3,500,000 PERSON ≒  3,780,000,000,000 KRW/YEAR (방송에서는 3조2천억원)   
  • 을의 제안: 200,000 KRW/PERSON·MONTH × 12 MONTH/YEAR × 5,000,000 PERSON ≒  12,000,000,000,000 KRW/YEAR

인데 야당 대표인 을은 이 둘의 차이를 3,000억원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정책의 수립 그리고 협상의 과정 사이에서 간단한 산수만 할 수 있었다면 둘의 차이는 3,000억원 차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단 말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위해서 시작한 내용은 아니다. 흔히 어떤 정책에 필요한 예산이 얼마이다 말할 때 쉽게 결과만 듣기 쉽다. 아마도 야당 대표까지 할 정도였다면 정책 결정에 있어서 본인 당의 제안과 정부의 제안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당의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부안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협상 대표로 참여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결론을 내렸을 수 있다.

을이 두가지 안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예산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간접비용을 제외한다면 지급 대상 인원수와 지급액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순히 산수를 해서 계산을 할 수도 있었지만 만약 두가지 안의 중요한 요소 즉, 지급액과 지급 대상 인원수를 파악하고 있다면 9만원보다 을의 안인 20만원은 대충 2배 (이상) 정도 차이가 나고 350만에 비해 을의 안인 500만을 비교하면 7분의 10 ( 10 / 7 ) 배 더 많이 소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을의 안이 12조 예산이 소요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대충 4분의 1정도인 3~4조임을 파악할 수 있다.


하기 ... 

영어 표현에 자주 듣는 말이 figure out 이란 말이 있다. 다양한 상황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란 뜻이 많은 경우이다. figure out 이란 말도 그런 경우이다. figure out 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각해 내다', '알아내다', '이해하다', '계산해 내다' 와 같이 다양한 뜻이 존재한다. 누군가 문제를 냈는데 잘 모를 때 'I will figure it out' 과 같이 말하면 한번 알아보지란 뜻이고 'I can't figure him out' 하면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 란 뜻이다. 동사 뿐만 아니라 명사로도 figure 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익숙한 표현으로는 논문이나 책에 나온 도표나 그래프 등을 Figure 라고 부른다. 또한 형태나 모양 등으로 알아볼 수 있는 실체가 있는 모양에도 figure 란 말이 사용된다. 이렇게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figure 의 가장 첫번째 뜻은 수 (number) 혹은 수치 (numbers) 이다. 여기서 수는 의미를 가지는 수를 말한다.

론에서 소개된 일화에서 산수 calculus 로 계산한 것은 12조 혹은 3조 와 같은 계산된 값 value 이지만 수많은 자릿수 digit 모두 계산하지 말고 계산 결과에 영향을 주는 요소만 고려해서 계산하는 것은 산수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가늠하기 (figuring) 이다. 많은 경우 계산하다 혹은 이해하다 생각하다 와 같이 표현하지만 figure out 은 생각의 근거를 숫자와 계산을 통해서 가늠하여 자신의 생각을 결정하는 과정에 더 가까운 표현이다. 따라서 12조의 반의 반토막 ( one quarter) 정도에서 조금 많은 정도가 갑의 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차이가 3천억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가늠하기를 잘못한 것이다. 즉, 가늠하기 (figuring) 이란 비교 대상과의 차이가 나는 요소를 파악하고 숫자의 규모혹은 자릿수 order of magnitude 가 몇개인지 빠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만약 경우 해외 뉴스에서 백만달러 혹은 천만달러 와 같이 나오면 한국에서만 살았던 사람들 머리 위에는 비슷한 말풍선이 보인다. 바로 자신이 쓰는 통화 가치로 환산하는 과정이다. 자릿수도 다르고 환율도 정확하게 달러당 1,000원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대충 얼마정도인지 파악하려고 한다. 달러는 1,000원에서 1,200원 정도로 생각해서 쉽게 계산하고 자주 나오기 때문에 익숙할 수 있지만 오만달러라고 하면 얼마인지 쉽게 가늠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오만달러를 머리 속에서 50,000 으로 숫자로 늘어놓고 여기에 1,000 혹은 1,200 을 곱해서 50,000,000원 으로 계산해서 오천만원에서 육천만원 정도로 생각한다. 순간 육백만불의 사나이는 비싼 놈일까 싼 놈일까 고민하게 된다. 우선 숫자가 아닌 '육백만'는 몇 자릿수일까 궁금해진다. 6,000,000 이기 때문에 달러당 1,000으로 계산하면 6,000,000,000 이 된다. 대충 60억 정도이다. 숫자를 표현할 때 6000000000 이 아닌 6,000,000,000 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이 쉽게 가늠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수를 막기 위한 아주 괜찮은 표현이다.

달러를 많이 쓰다 보면 환율을 가늠하는 방법은 조금 달라진다. 예를 들어 육백만불이라고 하면 육백+만 으로 나누어서 600에서 한 자릿수를 빼고 억을 붙이기 시작한다. 즉, 바로 육백만불은 60억이라 생각하고 칠천오백만불이라면 칠백오십억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억단위의 큰 돈이야 그렇게 생각하지만 해외여행을 가서 밥값이 45불이 나왔다고 하면 내가 먹은 식사에 적당한 가격인지 아닌지 고민하며 환율을 적용한다. 계산기를 꺼내 계산해본다. 오늘의 환율에 적용해서 계산할 수 있지만 비싼지 가치 판단을 하기 위해 십의 자리나 일의 자리는 중요하지 않다. 환율의 변동에 의해서 45불은 항상 변동된다. 5만원이 넘지 않을 수도 있지만 5만원을 넘어 환율이 달러당 환율이 1,200원 이상이면 5만5천원이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45달러는 단순히 45,000원으로 생각한다. 환율은 국가 대 국가의 가치의 변동이지만 현지 물가를 고려한다면 45달러는 지속적인 가치로 정해진 값이다. 다양한 문화 경제 및 시장의 환경에 맞게 정해진 값이다. 십진법에 모두 익숙해진 인류에게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1달러는 항상 1,000원이라고 생각하고 현지에 적응하는 것이 더 편할 때가 많다.

농담같은 이야기지만 해외에 가면 소주가 비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소주는 현지 화폐 가치로 20달러라는 것이다. 미국에 가면 미화 20달러 (USD) 이고 싱가포르는 20싱가포르달러 (SGD) 호주에 가면 20호주달러 (AUD) 란 이야기다. 소매점에서 쉽게 찾을 수 없기에 한국 음식점을 중심으로 판매되기에 가격이 다소 높긴 하지만 15~20달러 사이에서 판매가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제품과 서비스의 가격은 시장의 수요 공급에 의해서도 결정되지만 십진법의 묘수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7.99 달러라고 판매하는 음식은 판매자가 한국이라도 만원 정도 하는 가격으로 맞추기 위해서 정한 가격이라기 보다 단지 8달러 정도라는 10달러가 되지 않는 가격이라는 점을 더 고려했을 것이다. 2006년에는 1 싱가포르달러 (SGD) 는 600원이라 생각하고 계산했다. 그러나 현재는 환율은 1 SGD 당 815원 (2018년 3월 초) 정도이다. 거의 30% 이상이 상승하였다. 싱가포르달러로 돈을 벌어 한국에서 소비하는 사람이라면 이득인듯 보이지만 싱가포르에서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싱가포르의 물가가 상승했다면 실질 수입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가늠하는 작업은 정확하게 계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만 확인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figuring 의 가장 첫번째 기능은 정확하게 계산하는 수가 아니라 내가 의사결정을 하는데 중요한 덩어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자릿수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즉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크기 magnitude 에 따라 수를 인식하는 것이다. 화폐 경제에서도 십원짜리 백개가 부피가득 있다고 해도 결국 만원짜리 종이보다 가치가 덜 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이미 만원이 가지고 있는 자리수 order of magnitude 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 ... 

온도를 나타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섭씨 (°C) 이다. 섭씨는 스웨덴 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Anders Celsius) 가 제안한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물의 어는점과 물이 끓는점을 100등분 한 방법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물의 삼중점을 0.01도, 1 기압에서 물의 끓는점을 100도로 정하여 사용한다.) 제안한 사람 이름이 셀시우스라서 중국 사람들은 셀시우스씨 (Mr. Celsius) 가 제안한 것이라 해서 섭씨 (섭氏) 라 이름 붙였다. 많은 국가에서 많이 사용되기도 하고 국제 표준이기도 하기 때문에 섭씨 25도라면 어느정도 날씨인지 섭씨 영하라면 춥다는 것은 바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날씨는 다른 온도 방법을 선호한다. 역시 제안한 사람이 독일 출신 물리학자 다니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Daniel Gabriel Fahrenheit) 이기에 파렌하이트씨라 화씨가 되었다. 온도를 처음 배우면 단골처럼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는 문제가 바로 섭씨와 화씨 변환 문제이다. 화씨 40도는 섭씨 몇도인가? 와 같은 문제이다. 문제는 수백번 변환해도 화씨 40도가 따뜻한 온도인지 추운 온도인지 느낌이 잘 안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히려 화씨에 익숙한 사람들은 섭씨의 온도가 더 어색하다.

섭씨 (파렌하이트) 본인이 얼마나 그 유용성을 생각하고 제안했는지 모르지만 화씨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체온과 비교하면 더 직관적이다. 인간 성인의 정상 체온은 보통 36.5 ~ 37.2 정도이다. 이를 화씨로 변환하면 97.8 ~ 99 이다. 저체온 영역은 35도 이하라면 화씨로 95이다. 열이 동반되는 경우 보통 38 °C (100.4 °F) 이상 관찰하게 된다. 직관적으로 100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얼마나 편차가 존재하는지 생각하면 된다.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화씨 1도 올라가는 것은 섭씨 0.556 도 올라가는 것이다. 즉, 화씨는 섭씨보다 작은 온도 상승을 표시한다. 예를 들어 체온이 섭씨 0.556도 올라가면 화씨는 1도 올라가는 것이다. 온도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해야 하는 화씨가 더 유용할 수 있다. 비슷한 이유로 화씨로 날씨를 알려주면 간단하게 100을 기준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생각할 수 있다. 화씨 0도는 섭씨 -17.7 정도이다. 어느 정도 중무장을 하면 그래도 견딜만한 온도가 아닐까 싶다. 결국 화씨로 표현하면 인간이 활동하는데 추운 한계와 더워 죽을 것 같은 한계를 통해 비교할 수 있다. 화씨 50도는 섭씨로 10도 정도이다. [ 미국만이 거의 실질적으로 mile/Fahrenheit 의 UK 도량형을 사용한다는 내용의 기사 - Why Americans still use Fahrenheit long after everyone else switched to Celsius ]

금은 어려울 수 있지만 편차 가늠하기의 좋은 예는 유체역학에서 볼 수 있다. 유체 fluid (流體)는 고체에 비해 형상이 일정하지 않아 변형이 쉽고 자유로이 흐를 수 있는 상태이다. 가장 대표적인 액체, 기체 그리고 플라즈마와 고체 중에서도 흐름이 존재하는 일부 고체도 유체이다. 이해하기 편하게 기체만 생각해 본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 비행기가 난류 turbulence 를 만나서 기체 airframe 가 흔들릴 수 있으니 안전벨트를 매달라고 한다. 난류는 유체가 가지는 상태 중 하나이다. 유체는 층류 laminar flow 와 난류 turbulent flow 로 구별될 수 있다. 층류란 유체가 진행 방향을 따라 층을 이루며 진행하는 흐름으로 안정적 형태를 보인다. 반면 난류란 전체적인 진행 방향에 비해 유체의 흐름이 혼란스럽고 변화가 심한 흐름이다.

출처: https://www.nuclear-power.net/ 강의 노트 중 


유체의 흐름이 층류인지 난류인지 알아보는 방법은 직접 경험할 수도 있지만 이를 가늠하는 방법으로 레이놀즈 (Osborne Reynolds) 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수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붙여 이를 레이놀즈수 Reynolds number 라 부른다.

출처: https://www.nuclear-power.net/ 강의 노트 중 

복잡한 수식을 떠나 유체가 앞으로 진행하려는 힘과 진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힘의 비율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즉, 유체가 앞으로 진행하려고 하는 힘 (관성력 inertial force) 이 강하다면 진행할 것이지만 유체가 흐르는데 방해가 되는 힘들이 존재한다면 이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유체의 행동이 결정될 것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방해가 되는 힘이라 표현했지만 레이놀즈 수에서는 이를 점성력 viscous force 라 부른다. 간단한 예로 점성 viscosity 을 생각하면 끈적한 꿀이 물보다 덜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레이놀즈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레이놀즈수가 가지는 유체역학적 의미가 아니다. 두개의 대립된 요소를 분자 분모에 넣어서 그 비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의의 물성 material property 를 열거해서 얻어내면 되는 것인가? 비율의 편차를 찾아내는 방법에는 다소 직관적이지만 아주 논리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수식의 물성들이 나타내는 단위 unit 를 살펴보면 분자 분모 모두 동일하다. 즉, 분자 분모는 단위로 표시하면 모두 소거되어 레이놀즈수는 단위가 존재하지 않는 수가 된다. 이를 무차원수 dimensionless number 라 부른다. 무차원수 특히 레이놀즈수는 유체의 흐름 특성을 수로 표시하지만 분자 분모의 요소들은 서로 동일한 차원을 가지는 물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레이놀즈수와 같은 무차원수는 우리가 특정 대상의 특징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무차원수는 찾아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의 상태를 구별하기 위해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씨 온도와 같이 의학적 의미에서 편리성을 줄 수 있는 +/- (가감)의 편차가 대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무차원수와 같이 분자/분모 로 표현하여 비율 (ratio) 로 표현하여 이해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많은 무차원수는 주로 유체역학에서 사용되는 듯 보이지만 그 응용은 다양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초반 대규모 항만 컨테이너 물류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무차원수의 아이디어를 이용한 경험이 있다. 문제는 항만에 들어온 컨테이너의 체류시간 및 긴급도 등에 따라서 컨테어너의 위치가 최적화되지 않았다. 무차원수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컨테이너가 가지는 다양한 속성을 통해서 무차원수를 만든 것이다. 분자에는 컨테이너가 빨리 나가야 하는 요소를 모으고 분모에는 오래 머물게 되는 요소를 모아서 무차원수를 만들었다.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대상의 속성을 구별할 수 있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정리하고 이를 정리하고 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인간의 직관적 이해 이상의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 준다.


늠하 ...

2012년 대한민국 대선 토론 과정에서 모 야당 후보가 여당 후보를 향해 질문한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내용은 당시 야당 후보는


"전○○ 합동수사본부장에게서 받은 6억 원이면 (이때 시세로)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었다"

라고 질문했다. 이 질문이 기억나는 이유는 6억이란 돈이 아니라 당시의 시세를 통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아파트 30채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서상 은마아파트라는 상징성이 가지는 공감되는 가치를 통해서 당시 6억원이란 돈이 상당히 큰 돈임을 바로 느끼게 해주었단 점이다. 많은 언론은 이에 대해서 정말 6억원이면 당시 은마아파트를 30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사실(?) 검증을 했는데 평수와 매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평균 매매 가격을 고려하면 당시 6억원으로 은마아파트는 30채가 아니라 29채까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12년 시세 기준으로 약 192억여원이다. 실제로 은마아파트가 현재 얼마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아파트가 가지는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해서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6억원이라 강조했다면 6억이 가지는 현재가치를 생각하며 그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고 느낄 수 있지만 아파트 30채가 가지는 가치의 크기는 분명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설의 은마아파트 단지

문의 예술성 art of question 이 더 뛰어난 이유는 과거가치와 현재가치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짜장면이나 자동차와 같은 대상이 아닌 물가에 비해 비교도 안될 정도로 뛰어오른 주택 (아파트) 을 통해 비교했다는 점이다. 만약 1979년 기준 짜장면 가격 (인상폭이 높은 시기였다고 한다.) 1,200원 기준으로 생각해도 5십만 그릇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가치로 20억이다. 결국 서민과 가장 친근하다는 이유로 짜장면 몇그릇으로 질문을 했다면 질문의 의도와 다르게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가치를 가늠하는데 중요한 것은 동일한 자본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가치가 되어 있을 것이란 소위 투자 가치 investment value 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면 당시 6억원이란 돈을 짜장면 오십만 그릇을 사는데 투자했다면 배고픈 오십만명의 한끼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 돈을 고스라니 은마아파트 29채를 샀다면 2012년에 팔기면 해도 192억여원을 벌 수 있었다. (임대에 의한 이자 및 월세 수입은 별도)

따라서 투자는 역시 아파트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조금 다른 시각을 생각해보고 싶다. 국가가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60세 이상의 국민들에게 일정 금액을 주려고 할 때' 어떻게 계산할지 물어보면 다양한 계산 방법이 나온다. 어떻게 계산하는지 고등학생들(공부 잘해 들어간다는 소위 명문고 학생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연히 몰려드는 질문들은 월 얼마를 주어야 하는가 60세 인구가 몇명이냐 물어본다. 모든 것은 각자 알아서 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란다고 하면 정답 강박증이 심한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불평이 가득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학생 1: 60세 이상 인구가 몇명인지 알아서 여기에 일인당 주려고 하는 금액을 정한다.
 학생 2: 전체 인구중 60세 이상 인구 비율이 어느정도인지 알아서 일인당 지급액을 곱해서 구한다.
 학생 3: 전체 예산을 통해서 60세 인구로 나누어서 일인당 지급액을 정한다.
 학생 4: 전체 예산에서 소득 수준에 따라서 금액을 차등 지급한다. 저소득 인구에 더 많은 지급액을 설정한다.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그리고 나온 의견들을 분류하고 비슷한 것들을 모아서 약 6가지 정도의 방법을 통해서 각 내용을 수식으로 표현하게 했다. 이 분류 과정에서 나름 두가지의 접근 방법 approaches 을 볼 수 있었다. 우선 예산이 정해진 상태에서 계산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예산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인당 지급액을 정하고 이에 따라 예산을 정하는 방법이었다. 어떻게 계산을 하는 것이 좋은지 계산 방법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을 때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계산된 일인당 금액이 어느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을 받았을 때 몇명의 아이들은 일인당 금액이 가지는 가치는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이 금액을 가지고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와 같이 인간의 활동 영역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정 금액을 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금액이 인간의 활동하는데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결국 물가나 개인의 형편과 같이 생각할 수 있는 변수들을 추가하기 시작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숫자가 인간의 활동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고 그대로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 를 '가치' 라고 생각해 보자.

공무원들에게 '복지'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다양한 대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멋진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 스웨덴의 공무원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스웨덴 공무원 중 한명이 이런 대답을 한적이 있었다.

"시민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공적 보험" ─ "Public insurance that helps citizens' activities practically."

UK welfare spending 출처: The Guardian 

복지를 단순히 돈을 지급하고 그 돈으로 알아서 쓰라는 용돈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종종 선별적 복지를 이야기하고 돈을 지급했을 때 엉뚱한 곳에 쓴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복지가 단순히 자본을 투입하는 형태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형태로 보장된다면 예를 들어 시민들의 이동권을 보장하는 의미에서 교통비를 지원해주고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지역 농산물에 대해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한다면 개인별로 지급되는 복지비를 줄여도 큰 불평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복지라는 형태로 돈을 지급받아도 거주를 위한 월세비용으로 다 빠져 나가고 일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교통비로 빠져 나간다면 국가가 지급하는 복지 비용의 종착역이 어딘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에게 복지 비용을 지급하거나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국가가 보장해주는 형태거나 모두 돈 즉, 국가의 예산은 필요하게 된다.

결국 가치를 가지는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이 만들어 내어 인간이 필요한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여 한다. 인간 활동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적은 돈으로도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고 많은 돈을 썼다고 해도 다수의 인간 활동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소수의 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면 가치 있다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가치를 가늠한다는 시작점은 전체 예산이 얼마가 필요한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자본이 얼마인지를 계산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과와 효에 대해서... 

가늠하기 활동에는 이처럼 크기를 가늠하거나 편차를 가늠하거나 궁극적으로 가치를 가늠하는 활동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영어로 'figure out' 이란 말에는 크기를 가늠하고 편차(차이)를 가늠하고 가치를 알아내다는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가늠하기 활동을 통해서 알아내려고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과정까지 모두 figure out 이라 말하고 대상을 '이해한다'는 말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사전에서 확인해보면 '계산해서 (합계를) 알아내다' 란 뜻이 먼저 나오고 이해하다 그리고 해결하다는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대상에 대한 본질적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수치로 표현될 수 있는 내용을 통해서 대상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예를 들어 예산안의 크기는 몇자리 수의 단위인지를 통해서 예산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편차를 통해서는 대상이 가지는 특징을 알아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미리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가늠하는 과정은 대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미리 전략을 세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율과 효과는 비슷한 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효과적인은 영어로 effective 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좋다는 뜻이고 효율적인은 efficient 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들인 노력에 대비해 얼마나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지 나타낸다. 예를 들어 '멜라토닌은 불면증에 효과가 있다'라고 표현을 하지 '멜라토닌은 불면증에 효율이 있다' 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멜라토닌 2mg 으로도 충분히 효과를 낼 수 있다면 20mg 을 먹는 것은 효율이 떨어진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용량이 2mg 단위인지 20mg 단위인지에 따라서 약이 우리 몸에서 작용하는 효율은 비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용량의 크기에 따라서 약이 작용하는 범위가 전신 systemic 범위인지 극소 부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같은 효과를 내는 두가지 약을 비교할때 한 약이 다른 약에 비해 적은 양으로도 거의 동일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면 약이 몸에서 한번 쓰이고 배출되는지 아니면 반복되서 사용되는지 등과 같이 약의 특성을 가늠할 수도 있다. 여기서도 편차 가늠하기를 통해서 같은 효과를 보이는데 적은 양이 사용된다면 효율을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효과와 효율을 통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것도 가늠하기를 통해서 대상을 평가하게 된다.



가늠하기의 다양한 활동은 결국 대상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좀 더 높은 효율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리 크기와 편차를 가늠하는 과정은 대상의 특징을 알아내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엉뚱하거게 크기가 맞지 않거나 편차가 너무 심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 제외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통 효과적, 효율적이라는 말은 가장 최적화된 결론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라기 보다는 말도 안되는 대상들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예산을 계산하는 과정에서도 예산의 크기를 가늠하고 어느정도 크기인지를 확인해서 어떻게 예산을 얻을 수 있는지에 따라서 선택하는 전략이 달라야 하고 일인당 복지비용을 계산하는 과정에서도 현실적 가치와 너무 편차가 심하거나 비교하기 어려운 정도로 너무 크거나 작다면 이를 제외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처럼 적절하지 않는 것을 제외시키는 과정을 위해서 가늠하기가 필요한 것이다.

확하지 않음에 대한 여유 ... 

대한민국 수학 교육을 받으면서 이런 가늠하기의 영역은 거의 무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확한 정답을 요구하고 그래서 문제도 가늠하기 위해 필요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정답에 써야 하는 정확한 숫자가 무엇인지 요구받는다. 그래서 삼각 함수의 문제는 계산하기 쉬운 각도가 나오고 조금 익숙하지 않은 각도도 배운 공식으로 알아내려고 할 때가 많다. 계산기를 이용하기 보다는 외우고 있는 내용을 요구한다. 계산기와 컴퓨터가 이처럼 많은 세상에서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 문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현실 세상에서 수학의 다양한 원리를 응용하고 그 값을 통해서 정확하지 않더라도 적절하게 가늠하는 훈련이 더 필요한 세상이다. 이런 정확한 정답을 요구 받아온 교육에 익숙해 있다가 컴퓨터의 반복 계산을 통해서 근사한 값 approximate value 을 찾아내는 근사한 fabulous 과정을 하는 수치해석 numerical analysis 를 접하면 당황해 하기도 한다.

출처: https://github.com/kmammou/v-hacd 대상을 분석하기 위해 근사값으로 나눌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준다.

상은 정확한 값을 가지고 놀기에는 너무도 많은 수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세상의 교육은 얼마나 정확한 원리를 배울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다양한 가늠하기 방법을 배울 수 있는지에 따라서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현실적 교육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가늠하기 방법을 배운 이들은 세상에서 정확한 정답을 찾아내서 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그리고 효율적인 결과를 위해서 해서는 안되는 일들과 하면 도움이 안되는 일들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라의 행정이 효과적이지 못하고 이미 집행된 예산도 효율적이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지적된다면 이는 예산을 집행하기 위한 항목을 결정하는 정책 결정권자들이 이런 가늠하기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탐욕이 너무 강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부터 잘못 가늠된 내용은 실제로 집행하는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예산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불평하게 된다. 그래서 정확하지 않음에 대한 여유란 대충 계산하고 대충 하자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하지 않지만 실제로 실행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가늠하기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다양한 학문 예를 들어 통계학도 이런 현실 세상에 맞는 다양한 가늠하기 방법이 필요하다. 그 가늠하기 방법은 크기를 평가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편차를 통해서 대상의 특징을 밝혀내고 비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도 필요하다.


가늠하기의 방법이 좋으면 좋을수록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효율은 더욱 더 높아진다. 따라서 가치란 정해진 절대적 값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치가 '인간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라고 정의한다면 얼마나 효율적으로 국가의 자원 - 돈을 포함하여 - 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사회 구성원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가늠하기 방법론을 만들어 내서 효율을 높이면 높일수록 가치는 점점 높아질 것이다. 단순히 어떤 공약을 시행하기 위해서 얼마나 필요하다고 말하는 정치인 혹은 행정가들을 보면 저들에게는 가치란 어떤 뜻일까 궁금할 때가 많다. 인간의 활동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많을 수 있고 그 다양한 방법을 개발할 때도 인간에게는 정확한 값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잘 가늠하고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정치인 혹은 행정가가 더 우리 세상에 필요하다. 그래서 투표권을 가지는 사람들이 좀 더 시선을 바꾸어서 이런 가늠하기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면 하는 큰 바람이 있다. 그들은 대단한 어떤 것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나 해도 별 효과가 없는 일들을 적절하게 제거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늠해서 인간의 가치를 높여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늠하기의 과학 ─ 가치를 생각하다

Tuesday, December 10, 2013

똑한 학생들이 모인 곳은 항상 모험을 떠나 도전을 시도하는 새로운 개척지 같은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기발한 생각,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이 오랜동안 살아오면 경험으로 터득한 지식들과 뭉치면서 전혀 새로운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그런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되면 하는 질문 하나가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버스의 속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특별히 조건을 제한하거나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소위 Open boundary Problem 문제로 시작하려 한다. 특별한 정답이 요구되지도 않고 질문자가 원하는 정답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질문을 받는 학생들이 그 질문에 대해 필요하다면 조건을 더하고 그 조건에 맞는 가정과 논리적 전개 모두 다 허용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대답 (bursting answer) 는 익숙하고 이미 그 목적을 위해 개발된 기성품을 이용하는 것을 제시한다.

"스마트폰의 속도계를 이용하거나 GPS 를 이용하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정확하고 그다지 나쁜 대답도 아니다. 스마프폰이 익숙하게 손에 잡혀 있는 상황이라면 특별히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나면 항상 시시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약간의 경계 조건 (상황) 을 추가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일체를 소지하고 있지 않고 사용할 수 없다면?" 

그럼 학생들은 좀 더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대답한다.

"운전석에 가서 속도를 확인합니다!" 

문제의 의도에도 벗어나지 않고 사실 첫번째 부여한 제한 조건에 어긋나지도 않는 좋은 대답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를 물어본 이유는 아니기 때문에 다른 추가 조건을 제시하여 문제를 더 제한한다.

"안타갑게도 운전석의 속도계는 고장이 나서 표시가 안되는 상황입니다." 

학생들은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고민의 결과 다양한 대답을 내 놓는다. 물론 정확한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속도라는 우리가 과학을 위해 정의한 변량 (variable quantities) 를 어떻게 얻어낼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고민의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대답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정한 시간에 버스 밖으로 물건을 낙하시켜 떨어진 거리를 측정하여 속도를 알아냅니다." 

이 대답을 접하는 순간 많은 학생들은 의문을 가진다. '속도를 알아낸다'는 목적을 위해 꼭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당장 알아내야 한다는 제한 조건은 없지만 많은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제한하는 조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대답을 했던 학생은 '속도를 알아내다' 라는 목적에 집중하여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답이 하나 나오면 그때부터 다양한 대답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를 풀 수 없게 만드는 제한 조건들이 자연스럽게 풀리기 때문이다.


대답과 그 대답이 어떻게 도출 되었는지를 확인하면서 몇가지 오답도 나오게 된다. 혹은 대답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조작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버스 밖으로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은 괜찮은데 왜 버스 안에서 물건을 떨어뜨려도 속도를 알아낼 수 없는가이다. 버스 안에서 밖으로 자유 낙하하는 것과 버스 안에서 자유 낙하하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자유 낙하할 경우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공중에 떠있는데 버스는 앞으로 달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체는 뒤로 가지 않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처럼 아주 단순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통한 질문은 복잡한 많은 대답을 만들어 주고 그 과정에서 자연 과학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 느낌없이 지내던 주변에 대해서 조금 더 주위깊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해준다.

사실 이 하나의 질문으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배우는 많은 내용들은 '언어적 정의'에서 시작한다는 사실과 그 언어적 정의가 왜 자연과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먼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로 속도 (velocity) 와 속력 (speed) 의 개념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단순히 속도는 벡터 (vector) 이고 속력은 스칼라 (scalar) 라고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통해서는 단순히 언어의 정의만 알려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속도의 측정이라는 현실적인 도전 과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속도란 표현은 실제로 속력의 개념이고 그 속력에 방향이 합쳐지면 속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스마트폰에서 말하는 속도계란 실제로는 속력(측정)계가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물체를 떨어뜨린다는 생각은 이미 속력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많은 과학 지식들은 우리의 경험과 익숙함 속에 알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어려운 과학 지식도 설명하지 못하는 과학 이론은 없다. 다만 그 설명의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릴 뿐이다. 또한 이를 통해 제시된 질문으로 "왜 버스 안에서 떨어뜨리는 물체는 뒤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다. 많은 경우 버스 안의 공기와 일체가 되어! 와 같은 직관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된다. 중요한 점은 상대성 이론을 알아낼 수 있는 과정이라는 점이 아니라 동일한 행동 (물체를 떨어뜨리는 ...) 이지만 왜 다른 결과와 다른 유용성 ─ 버스 밖으로 던질 때는 속도 측정이 가능하지만, 버스 안에서 던질 때는 속도 측정이 안되는 차이 ─ 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두 과정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더 진행된다면 가속도의 개념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버스를 타면서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과정에서 몸의 쏠림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는 버스 안에서 물체를 자유 낙하할 때는 앞에서 바라본 경우와 다른 것인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가속도와 정속도 (가속도 = 0 ) 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과 대답의 과정들은 지식이 많을수록 많은 편견에 쌓이기 쉽다. 순수한 지성의 상태가 지극한 지성의 상태를 더 쉽게 만들어 준다.  (a purified intelligent makes sincere intelligent) 순수 지성에 대한 신뢰는 어린 아이라고 지식이 짧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일상과 연결시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게 만든다. 주입식 교육이 지겹고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배우는 지식들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확신도 안들기 때문에 단순히 성적을 매기고 순위를 매기기 위한 하나의 경쟁 도구라는 인식을 가지고 지식은 절대로 인간을 즐겁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교육의 제도와 환경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은 체 그런 제도와 환경만 질문한다면 그건 쉽고 빠른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가도록 놔두는 어리석음이 될지 모른다. 교육의 역할은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가능성과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경계가 없는 형태의 질문을 자주 묻는 것이다. 처음부터 제한되고 하나의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들은 내가 고른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 매번 풀때마다 노심초사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는 지식은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시대나 부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처럼 반복되고 부조리하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에 놓인 그런 부조리의 시대말이다. 그런데 기성 세대는 후배 세대들에게 적절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이 시대에 질문에 익숙하고 질문에 어떤 답을 해도 두렵지 않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만약 후배 세대들이 질문에 겁을 먹고 대답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기성 세대의 잘못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이 잘못되었다 말하게 된다. 그리고 질문에 익숙하고 다양한 대답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을 거친다면 세대를 걸쳐 우리는 조금씩 진보라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이다. 진보가 꼭 나아진다 좋아진다를 뜻하지 않기에 우리가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돌덩이의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해도 올려놔야 하는 언덕의 높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너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는 교사들도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세상에도 질문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는 학생들이 많아진다면 부조리에 노동자가 죽어가고 자본이 사람을 살인해도 아무렇지 않게 무관심한 사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시대 우리가 부조리하고 마땅히 고쳐야 하는 인간의 파괴 앞에서 그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교육이 '어떻게 질문하는지 연습하지 못하고 오답과 정답의 구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오답이 아닐까 두려움에 떨게 만든...'

문하지 않는 학생을 만들어 내는 교육은 질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세상의 잘못에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세상의 잘못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관심하게 생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어떤 부모가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살기 원할까?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Tuesday, February 26, 2013

정상 (正常) [정ː상]  : normality, , normalcy
[명사]
1. 특별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
2. [북한어] 있어야 할 상태에 바로 있는 것. 또는 그런 상태. 

히 정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일반적이고 평범한 그리고 대부분 평균의 집단이 수행하는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정상이라고 표현한다. 코 하나에 입 하나, 눈 두개, 귀도 두개에 별로 특별한 것 없으면 그냥 외형적으로 정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주목할 만큼 특별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상태를 정상이라고 표현한다. 상당히 정상적인 교육의 과정을 겪어 왔던 사람들에게 정상적 교육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일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상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만약 모든 부모들이 자식의 교육에 있어 보통 남들이 하는대로 돈을 쓰고 대학에 보내는 것을 정상이라고 표현을 하고 일반적으로 학교 교육만 받아서는 모자라기 때문에 추가적인 학원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교육이 바로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이 가지는 정상의 범위이다.

모든 부모들은 겉으로 일반적인 상태를 말하는 정상 (normality) 를 이야기하지만 속으로 의미를 파악할 때는 아마도 정상(top, summit)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정상 (頂上)   : top, summit
[명사]
1. 산 따위의 맨 꼭대기.
2. 그 이상 더없는 최고의 상태.
3. 한 나라의 최고 수뇌. 

그렇게 부모들은 동음이의(同音異義)의 정상을 외치면서 아이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필요한 학력과 기준을 강요하고 있다. 그렇게 강요된 교육이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흥미롭고 즐거울 일이 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정상에 대한 강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시작하게 된다.

상 범위에 대한 고찰 

한때 고혈압(hypertension) 에 대한 정상 범위는 80 (이완기) - 120 (수축기) 였다. 일반적 상식처럼 80 - 120 의 범위에서 비슷하게 혈압이 나오면 특별히 치료나 관리를 받지 않아도 되는 정상 범위라고 생각했다. 고혈압에 대한 정상 범위 그리고 치료 대상에 대한 논의는 JNC ( Joint National Committee ) 를 통해서 가이드라인이 매년 권고되고 추가되는데 그 기준이 변경된다. 2014년 기준으로 140/90 미만을 치료 목표로 정하고 있다. 물론 고혈압에 취약한 식사와 생활에 좀더 강화된 기준이 필요하긴 하고 전문가들의 임상 경험과 회의를 거쳐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이드라인이 엄격해지는 것에 대해서 특별히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가이드라인에 의하면 예전에는 특별히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경계선상의 사람들도 환자로 분류되어 치료를 받는 것을 권고하게 되었다.


가지 불편한 내용은 이런 의학적 기준과 가이드라인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요인은 환자들의 질병 경향성(pattern)이나 치료의 어려움 과 같은 임상적 내용도 있지만 제약회사의 영향력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제약회사는 세상의 질병이 사라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절대로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업을 하거나 기존의 약들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마케팅의 힘으로 진단 기준을 변경하여 정상 범위를 완화하는 방법으로 잠재적 환자와 약의 수요자를 창출해내고 PR (public relations)을 통해서 약에도 must-take 의 인식을 넓히는데 열심히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통제 시장이다. 사람들에게 아프면 참지 말고 얼른 먹으면 좋다는 인식을 넓히기 위해서 세계적으로 진통제의 TV 광고에 대한 투자는 거대해졌다. 아팠다가 마치 마법처럼 괜찮아져 금새 뛰어다니고 밝게 웃으며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장밋빛 데이트도 하는 광고를 통해 사람들이 약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긍정적 효과와 이미지를 증대하였다.

결과적으로 상업적 활동의 소비자로 대중이 필요한 시대가 다가오면서,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잠재적 소비자를 증가시키는 활동 (마케팅 및 시장 창출) 과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흐리는 활동 (PR) 을 통해 지속적 소비층으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즉, 정상에 대한 강요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 라고 설득당하며, 비정상에 대한 두려움과 필요성에 대한 욕심을 적절하게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에의 강요 & 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트 쥐스킨트 ( Patrick Süskind; 1968-1974 ) 의 「깊이에의 강요 (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ung)」 를 보면 인간이 가지는 내면적 욕망의 구조와 흐름을 아주 간단하지만 치명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추상적이고 때로는 주관적이어서 그 실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깊이'라는 단어에 집착하게 될 수 있고 그 집착은 결국 자신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쉽게 빠지는 늪과 같은 것 같다. 정상도 마찬가지이다. 부족하거나 특별하지 않다고 하지만 특히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의 시스템에서 평균을 받는다고 정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 모순투성이다. 학생이 생각하는 정상도, 부모가 생각하는 정상도 모두 다 다를 뿐만 아니라 그 기준조차도 모호할 뿐이다. 어떤 아이가 평균 점수를 받았다고 해서 부모는 아이의 성적표를 보며 "와! 우리 아들은 평균점수를 받았네? 와 평균이니깐 정상이구나..." 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부모에게는 아이들은 정상(top)의 점수를 받아야 정상(normality)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는 아이들은 정상이 아닌 것인가?


본적으로 경쟁의 논리로 아이들의 교육을 바라보는 그 시작의 시선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선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선은 앞선 질문을 다시 물어본다.

"평균 이하의 최저점을 받는 아이들은 정상이 아닌가?" 

이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정상이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아이들은 단지 학습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단지 시험에 나오는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뿐인데 그것을 통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정상에의 강요가 깊이에의 강요와 절묘하게 만난 부분이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의 입장에서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는 아이가 심적으로는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심한 것 같고..." 그런 부모의 마음과 제약회사의 실리(profit)적 만남으로 ADHD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attention-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사실 ADHD 는 선천적 장애 (disorder) 이기 때문에 원인은 구조적인, 유전적 원인이 강하고 사회성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한 행동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로 인해 과잉행동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ADHD 가 학교에서 학습장애와 연결이 되고 ADHD 대한 범위와 학생들의 학습 부진의 주요 원인을 ADHD 의 발병기전(pathogenesis)적 원인을 슬며시 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평균이하 점수를 받는 아이들에게 정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는데 그 원인을 ADHD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정상의 범위가 아니라는 진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평균 이하의 점수에 대한 논리적 수긍을 할 수 있는 비정상의 원인을 찾은 안도감을 느낄 수도 있을지 모르고 제약회사의 입장에서는 ADHD 치료제 (disorder 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제는 증상에 대한 완화일 뿐이다.) 를 학습 부진을 극복해 학습 증진으로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놀라운 사실은 실제로 ADHD 약을 지극히 정상인 아이들도 단순히 학습 집중력을 증가(?)시킨다는 목적으로 처방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고 시험기간이 다가올 수록 그런 요구는 증가한다는 것이다. 정말 믿기지 않아서 실제 고등학생인 사람들을 표본으로 질문을 했을 때 복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학생의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제약회사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부모들을 상대로 강연회를 하며, ADHD 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는지에 대한 내용만 이야기를 해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주의력장애를 넘어서 학습 증진으로 포장하여 더 시장을 넓힐 수 있다는데 경이로운 마케팅의 힘을 느낀다.

상에 대한 가이드라인

우리나라에서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학원은 기본으로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고 학교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시험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라고 대한민국 교육부 교육 강령 비슷한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요즘이다. 정상에 대한 강요는 심지어 의학적 진단과 내용까지도 섞어 설명하며 사람들에게 정상에 대한 갈망을 주었고, 그 정상에 대한 갈망은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내용을 정해주기 시작했다. 즉,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을 읽거나 배우거나 알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고 언제부터인가 배움이라는 그 자체보다는 배움에도 효율을 따지며 요령과 기술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험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교육의 범위가 아니라는 무서운 상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인적으로 학창시절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책장에는 거의 500여권의 과학 교양서적으로 가득 차 있고 중학교 시절부터 시간날 때마다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지금은 열정이 식었나 싶기도 하다...) 그 시절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읽으면서 놀라움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경외심도 최고였다. 당시 노벨상 수상자의 강연을 듣기 위해 고등학교 수업도 빼먹었다면 요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보았던 책의 내용들은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떠나 심리학, 심지어 언어학에 관심이 있어 볼 때마다 그 원리의 유사성(analogue)에 그때의 책들이 큰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그 당시 맨날 '이상한 과학책'만 보는 학생에게 선생님은 한마디 충고를 했다. "그렇게 해서 대학이나 갈수 있겠어? 맨날 이상한 책만 보지 말고 문제집 좀 풀어봐..." 교과서보다 더 많은 흥미와 흥분을 주었던 책이 이상한 책이 되어버리다 상당히 낙담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집에서는 그런 이상한 책을 사서 보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좋아하셨다.


정상 교육의 가이드 라인으로 보면 정상이 아니었지만 교육의 목표는 시험에 나오는 내용에 대한 답습이 아니라 학생들이 생각할 대상을 찾고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그 생각이 맞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TED ]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일과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실제의 현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전달해준다.  TED의 아주 초창기부터 즐겨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한가지가 있다. TED 의 슬로건(tagline)은 IDEAs worth spreading 이다. 즉, 널리 공유될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이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모두 그렇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은 바로 이 아이디어에 집중해서 내용이 전달된다. 초반은 이 아이디어가 왜 생겨났는지 시작해서 아이디어의 내용 그리고 그 아이디어로 기대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국내도 이런 TED를 따라하며 여러가지 비디오 강연들이 나온다. 그런데 몇 개의 비디오를 보고 더 이상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어쩌면 TED가 가지는 아이디어 전달자 (idea conveyancer)의 역할을 찾기 힘들다는 느낌이었다. 국내의 비디오 강연을 한번 살펴보면, 대부분이 시대의 아픔 때문인지 힐링 혹은 자기 개발에 대한 내용이 많다. 소위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 아직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일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나와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인생의 1막의 사람들이 나와 연극을 끝낸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기에는 어떤 아이디어가 있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추천하는 꽤 많은 강연 영상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성공담(벌써 성공이라 이야기하는 것도 참 이상하다.)과 인생 역전기를 소개하는 자서전 프리뷰 (preview) 라고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힐링의 요구도 어쩌면 정상에 대한 강요가 만든 하나의 유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성공에 대한 계량적인 (quantitative) 기준이 마련되어 어떤 직장, 어느 정도의 경제력 등이 성공의 기준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ADHD 와 마찬가지로 성공이라는 기준조차도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데, 어느새 사회는 성공에 대한 정상도 적정하고 사람들이 욕심내는 기준을 통해 정상 범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정상 범위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ADHD 치료제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진통제를 선사해준다. 그것이 어쩌면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대중적 힐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간에게는 치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은 자신의 상처를 살피고 보기 싫어도 직시(直視)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상당히 개인적인 여정이어야 한다. [ 힐링의 대중화 ] 는 진통제일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상이기 바라나요? 재이기 바라나요? 

부모로 자신의 아이가 정상이기 바랄까? 아니면 천재이기 바랄까?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정상이란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그 추상적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정상에 대한 다양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간다. 교육에 의학적 내용을 통해 학습의 정상 범위를 알리고, 인생에 자본적 내용을 통해 성공의 정상 범위를 알려준다. 그런데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보며 생각하는 첫번째 착각이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라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는 그 아이디어를 만든 사람 이전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재는 세상의 교육과 제도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 시대가 공감하는 천재들은 시대를 순응하고 현재의 논리와 감성 안에서 잘 교육되고 평가된 아이가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지난 과거의 천재들을 살펴보면 시대의 부적응자나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미있는 사실이지만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879 – 1955)은 ADHD 환자의 대표적인 예이다. 당신의 아이가 천재가 되어서 세상의 부적응자가 된다면, 즉 세상이 정한 학습의 정상 범위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당신의 아이를 천재로 자라게 할 수 있는 지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정상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볼 것인가? 문제는 자신의 아이가 천재인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에 더 집중하기 쉽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정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험 성적이 학습 능력, 인지 능력과 창의력의 척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의 창의력을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히려 틀린 것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학생들의 엉뚱한 생각이 때로는 창의력이 될 수 있고, 비논리적인 설명이 뛰어난 상상력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틀린다는 기준과 정상이라는 기준을 모두 제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든 기준이 존재해서 그 기준의 잣대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의 창의력은 새로운 기술이 되어 삶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고, 상상력은 새로운 문학이 되어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Salvador Dalí - ADHD 였는지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의 독특하고 엉뚱한 행동들은 그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보여졌다.

Do not fear to be eccentric in opinion, for every opinion now accepted was once eccentric.
- Bertrand Russell (1872 - 1970)

엉뚱한 의견을 내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현재 받아지는 모든 의견들은 한때 엉뚱했던 것들이다.
- 버틀란드 러셀 (1872 ~ 1970)

그래서 천재로 키울 것인지, 정상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한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교육의 목표가 기준을 세우고 서열과 경쟁을 하지 않는다면 모든 학생들의 생각 (아이디어)는 좀더 빠르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는 다양한 탐구의 기회, 직업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교육의 제도가 마련해준다면 어떤 분야의 천재인지 적어도 어떤 재능을 가지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새 만들어진 성공의 정상 범위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경쟁을 계속 하면서 지쳐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육의 제도가 바뀌기만을 바랄 것인가? 

진보의 가치를 믿기에 시스템이 변화해야 교육의 방향과 정책이 정상의 범위를 깰 수 있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바뀌기까지 넋놓고 기다리거나 그때까지 아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은 창의적일 수 있지만 비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진보의 가치는 시스템에 대한 적극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역에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을 행동해야 더 가치가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의 정상 범위를 무시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담력을 가진 부모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학원도 보내고 여러가지 시도할 것이지만 최소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바라보자.

승현: 엄마 엄마! 나 오늘 시험에서 백점맞았어! 
승현의 엄마: 우리 승현이 잘했네~ 그런데 너희 반에서 몇 명이나 백점 맞았니?

종서: 엄마 오늘 도시락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었어요! 
종서의 엄마: 와~ 잘했네 근데 평소에 시금치도 이렇게 잘 먹으면 좋겠는데 그치? 

분명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부모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다가왔을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아서 안정감을 찾고 싶어하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자랑하거나 자신을 내보이고 싶기보다는 부모를 향한 일종의 본능일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에게 부모는 아이가 시험 하나에도 소위 성공의 범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가 백점을 맞은 사실보다 몇등을 했는지에 대한 경쟁의 논리에 비추게 되는 것이고 아이는 자신이 백점을 맞아 기분이 좋은 그 감정을 엄마도 공감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엄마의 관심은 실질적으로 몇등인 것인지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내용과 엄마가 좋아하는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생각하게 될 것이다. 두번째 경우도 비슷하다. 다만 지금 도시락을 다 비워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아이의 마음은 중심이 아니고 평소 엄마가 생각해서 아이가 해주었으면 하는 평소의 생각을 갑자기 꺼내어 아이는 그래도 먹어보려는 시금치가 더 맘에 안 들지 모른다. 두가지 경우 엄마는 아이의 행동과 마음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찾게 된다. 조금 다르다면 첫번째 경우는 아이가 잘한 것을 다른 기준으로 비추어 아이의 마음을 실망시킨 것이고, 두번째 경우는 평소 생각하던 바램이나 당위성을 직접적 관련이 없는 행동에 개입시켜 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어린 나이의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해봤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행동에 집중해서 대화하는 습관'은 엄마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아이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엄마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도 원칙을 가지고 아이의 행동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좋은 행동, 발전된 행동 등 아이가 좋아하고 행복해 하는 행동들에 대해 별다른 첨언(코멘트; comments)하지 않고 그 행동에 대한 아이의 태도를 반복해서 리뷰해주고 비평을 할 필요는 없단 것이다. 예를 들어 매주 토요일마다 병원 소아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에게...

"와 우리 명준이는 좋은 일을 매주 하고도 기분이 참 좋은 것 같네? 매주 갔다오면 얼굴이 밝아지네? 힘들지는 않고? 가장 재미있는 일은 뭐였니? ... " 

"병원 봉사활동도 좋지만 학원 빠지지 않도록 시간 조절 잘해야 해 그리고 이왕이면 다른 봉사활동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픈 아이들보다는 안 아픈 아이들에게 봉사활동 갈 수도 있고 봉사활동 하고 꼭 확인받아 봉사활동 점수 챙기는 것도 잊지말고..." 

전자는 아이의 행동과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봉사활동을 하는 아이보다는 봉사활동을 통해서 점수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아이... 기준에 부합되고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는 아이에 집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조금은 과장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가끔 엄마와 아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들었던 내용을 틈틈이 메모했던 내용 중 요약한 것이다. 경쟁과 입시에 집중이 된 부모에게는 아이의 행동에 집중하지 않고 아이가 기준에 부합되는지, 더 좋은 조건인지에 대한 분석과 비평이 주를 이룬다. 아무리 부모가 보기에 입시에 불리한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웃음지을 수 있는 작은 행동들을 관찰하고 서두르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조금의 여유를 가지는 것은 아이가 좀 더 자신이 행복하며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는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적극적 지지자로 학교 공부를 조금 소홀히 해도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을 도와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아이의 행동과 도전에 경쟁의 논리로 평가하고 하지도 못하게 하지는 말고 아이의 행동에 집중하며 관심있게 지켜보면서 소극적인 지지자가 되어준다면 아이가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찾던, 소위 시대적 정상 범위에서 평범하게(?) 공부하며 입시를 준비하든 마음은 편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아이가 천재든 아니든 아이의 행동에 조금 더 관심있게 바라보며, 부모의 감정의 기호(嗜好)나 판단의 기준을 버리고 아이의 행복에 더 집중한다면 아이는 경쟁의 전쟁터 같은 교육 제도 안에서도 자신을 존중하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는 주체가 되어 줄거라 믿는다.

상의 모호함을 버리고 구체적 다양성을 기대한다. 

보통 어디가 아파서 병원을 찾으면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검사를 한다. 검사 결과 별 이상이 없을 때 자주 듣는 이야기가 "정상인데요..." 라는 말이다. 정상이라도 사실 기분이 좋지 않은 경우도 존재한다. 바로 이런 경우이다. 정상이라는 규정은 상당히 모호하다. 정상이라는 표현에는 무엇인가 기준이 있고 상당히 객관적인 표현같지만 사실 그 실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당히 추상적인 표현이다. 쉽게 말해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정상이 아닌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없이 '정상입니다'라는 표현으로 퉁 치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인을 찾지 못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될 것인데 검사 결과만으로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상이라는 말이 가지는 추상적 표현력을 이용해 원인을 찾지 못한 변명을 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래서 미국의 임상의사들 사이에서는 표현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표현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환자들이 이해하기 힘들어도 대상과 기능을 표현하는데 연습한다. 예를 들어 복부 초음파를 찍고 나서 원인을 찾지 못하면 "현재 초음파로 (도구) 본 결과 간의 기능상 정상 (functional) 으로 보이고 초음파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추가적으로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은 초음파 결과 간에서 문제가 발견되었으니 치료를 위한 추가적인 검사가 필요합니다. 와 같이 대상, 기능, 검사 방법, 추가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를 해준다는 것이다. 환자가 들어서 무엇을 알겠는가 하는 마음에 정상이라는 표현을 쉽게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의' (normal) 이라는 표현 대신 '기능이 수행되는' (functional) 로 대체해서 표현하고 그 한계성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들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알겠어...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로 퉁치면 될 것이라고 생각부터 버릴 필요가 있다. "좀 잘해...", "그렇게 잘못할줄 알았어!" ,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사랑해" 라는 말까지도 사실 이중에는 일상처럼 해주면 좋은 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표현에 아이들에게 더 구체적으로 "준현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일찍 준비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와 같이 아이의 구체적인 행동을 관찰하고 표현해준다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더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해야할 것은 아이가 하지 않은 행동인데 부모가 원하는 마음에 조건을 달아 표현하는 예를 들어, "미현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더 사랑스럽고 좋을텐데 그치?"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부모의 욕심을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이의 진솔한 관찰자가 되어 아이의 행동에 욕심과 기준없이 (정상 범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이에게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다가간다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이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과제와 학습 그리고 모든 배움에 있어서 자신을 얻게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에게도, 평범한 일반 학생에게도 적극적 관찰자인 부모의 모습은 아이를 더 많이 웃게 해줄 것이다.

육의 목적을 생각한다 

가장 작은 규모의 교육은 바로 가정이다. 그래서 부모가 가지는 아이에 대한 원칙과 가르침은 국가가 가지는 교육 정책과 교육 내용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이라고 믿는다. 철학은 비록 현재의 모습이 대중의 눈에 마음에 안들어도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반대로 철학이 없는 교육 정책은 결국 어떤 이익집단에게도 쉽게 휘둘리게 된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뉴스와 학자들의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관심은 학습 능력, 학업 성취도와 같은 무엇인가 기준을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 학생들은 몇명이다 그래서 교육이 잘된다 못한다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고등학교의 위상은 몇명을 대학에 보내고 명문대에 진학시키는가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철학이 우리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인문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뜨거운 가슴을 전해주는지, 과학이 세상을 보는 명석한 눈을 주는지에 대한 가슴떨리는 경험도 없이 그냥 사회가 만든 또다른 '정상의 범위'에서 그럭저럭 살게 된다.

교육의 목적은 바로 배움에 기준과 정상의 범위를 제거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 그리고 상당히 우울한 현실을 조금 반영하면, 학원 교재까지가 우리 교육이 제시하는 배움의 기준과 정상의 범위안에 있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문학작품도 시험에 나오는 범위가 아니라면, 심지어 시험에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면 배움의 범위가 아닌 것이다. 교육이 가지는 정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한번쯤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 한가지는 교육의 목적은 대학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년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아이들의 적극적 관찰자가 되어주어야 하지만 자신의 욕심과 기준을 반영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듯이, 국가의 교육도 학생들이 무엇을 하든 나쁘지 않은 범위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해줘야 할 것이다.


엇을 배워야 하는지 국가가 정해주고, 학습과 배움을 시험으로 판단하고 기준을 세우게 된다면 정상에 대한 강요는 합법적인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국가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폭력은 역설적으로 "국민 행복"일지 모른다. 이정도 경제 수준과 이정도 복지 예산과 얼마 정도 벌면 국민들은 행복할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고 "이정도 국가가 해주면 국민은 행복해야지 않아" 하면서 강요하는 것은 추상적 표현이 가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이 될 것이다. 부모와 국가는 아이와 학생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이와 학생들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주어야 할 것이다. 적극적인 지지자큰 입(big mouse)이 아닌 큰 귀(big ears)가 되어야 함을 항상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정상에 대한 강요 - 교육의 목적을 생각하다

Saturday, January 19, 2013

때 왜 그랬을까 후회를 한다고 해도
같은 혹은 비슷한 실수를
다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후회
이미 엎지러진 결과에 대한 평가일 뿐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만 늘어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그렇게 된 결과를 가지고
왜 그랬는지 아이를 평가하고
잘못을 알려줄려고 할 때마다,


아이는 점점 잘못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행동 자체에 대한 뒷걸음만 커질 뿐이다.

만약 아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1. 내 욕심에 잘못을 만든 것은 아닌지...
2. 혼나고 받는 상처가 크지는 않을지... 

먼저 생각하고 혼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선한 행동을 추구하는 적극적 자아가 아닌
감정의 보호가 필요한 안정적 자아이길 더 바란다.

아이가 내 눈에 맘에 안들 때, 한번 꾹 참고 안아주면 좋겠다.

보호자

Saturday, August 4, 2012

6살쯤 되는 큰 딸이 엘레베이터에 자신의 자전거를 끌고 먼저 들어갔다. 엘레베이터 안으로 자전거는 어정쩡한 크기와 구석에 미리 들어온 나 때문에 가운데에 자리잡게 되었고 뒤따라 유모차를 끌고 들어가는 엄마는 가운데에 놓인 자전거에 유모차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큰 딸에게 조금은 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자전거를 그렇게 두면 들어갈 자리가 없잖아. 유모차가 못들어가잖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엄마는 유모차를 앞뒤로 밀었다 당기기를 반복하면서 유모차가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하면서 큰딸이 '제대로' 자전거를 엘레베이터에 들어 놓지 못했다는 점을 계속 이야기했다. 정작 아기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잠시 뺐다가 자전거를 정리하고 다시 넣으면 잘 될 것 같은데 엄마는 아이가 처음부터 자전거를 제대로 놓지 않았다는데 집중하면서 계속 큰딸이 자전거를 제대로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만 그 짧은 순간에 5번을 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더욱 당황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구석에 있던 나는 상황을 참지 못하겠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이야기했다.

"마에게 유모차를 잠시 빼달라고 이야기해볼래? 그럼 자전거를 정리할 공간이 생길 것 같다고 말이야..." 

이는 조금은 힘들게 말을 시작해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엄마는 살짝 당황하면서 유모차를 뒤로 빼고 아이가 자전거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나는 자전거를 잡아 도와주었지만 아이가 힘을 주어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여 정리할 수 있도록 자전거를 잡아주기만 하면서 안쪽으로 잘 넣어 유모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도록 봐 주었다. 그리고 충분한 공간을 만든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면서 아이 얼굴 가까이 이야기해 주었다.

"들었지? 그래도 잘했네 동생위해 이렇게 공간도 만들어주고 착하다" 

엄마가 확실히 들리게 조금은 크게 이야기했다. 조금은 멋쩍어 하는 엄마에게 아주 정중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며 이야기했다. 절대 미소를 지우지 않고 결코 단 한번도 웃는 얼굴을 잊지 않고 엄마에게 차분히 이야기했다. (더 미워보였겠지...)

"모차 타고 있는 아이는 흔들리는 것에 민감해요. 유모차를 왔다갔다 흔들면 아이들에게는 어른들 뇌진탕 같이 될 수 있으니 아이 위해 조심해주세요." 

그리고 같이 올라가면서 엄마는 조용히... 숫자 올라가는 것만 보고 계셨고 큰 딸은 먼저 나가면서 '감사합니다'라며 인사해주었다. 아이들의 미소엔 가식이나 허식이 없어서 언제나 좋다.

아이의 미소는 언제나 내 삶의 윤활유이다. 아이를 혼낸다면 그 미소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미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