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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25, 2019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은 이성보다는 본능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감각은 본능에 더 가까운 것이고 이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할 때가 많다. 그래서 '감각적인' 이란 말은 오히려 '본능적인' 뜻으로 사용되기 쉽고 감각은 주어진 능력처럼 생각하게 된다. 시각, 청각과 같이 외부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생리학적인 능력으로 인식될 때가 많다. 그런데 감각이라는 말을 한자로 찾아보면 느낌 감 (感) 과 깨닫다 각 (覺) 으로 외부를 알아낼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깨닫는 작용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의 소설 Sense and sensibility 를 그대로 센스앤 센서빌리티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이성과 감성」 (김순영 옮김) 이다. 단순하게 sense 를 감각으로 번역했다면 아마도 소설의 내용을 떠나서 감각이 가지는 본능적인 느낌을 더 주게 되어서 소설의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타인을 자신처럼 생각할 수 있는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이 필요한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감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공감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여러가지 예를 들 뿐 공감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이 복잡해지고 자신의 영역은 명확해지고 공감의 필요성은 강조하지만 정작 사회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남기 위해서 타인보다는 자신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타인보다는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방법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시 공감이란 어느정도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학습하고 배워야 하는 그리고 노력해야 하는 능력이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막상 공감과 타인을 불쌍하게 혹은 긍휼하게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들은 듣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오히려 세상은 정의와 진실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타인에게 더 엄격한 진실을 요구하고 그 진실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고통에 대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감각, 공감


너무도 비슷한 말들이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조금이라도 그 의미를 구별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본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감각이라는 말은 sense 로 사용되고 외부의 자극, 현상 등을 감지해서 알아내는 곧 깨닫는 과정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후각, 시각,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의 소위 오감을 통해서 외부를 알아내고 그 감지한 (sensing) 정보를 뇌로 보내 뇌에서는 이를 처리하고 정보화하게 된다. 외부에서 전달된 신호 (signal) 를 뇌에서는 정보로 처리를 하고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도록 한다. 모든 생명체가 감각을 가지는 일차적인 이유는 자신의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요소를 빨리 알아내서 이를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차적인 이유는 과학의 목적과 동일할 것이다. 즉, 당장 위협의 요소는 아니지만 외부의 다양한 신호를 받아들이고 이를 체계화해서 일반화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연구 혹은 학문의 목적이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가 교육의 목적에서 제시했던 낭만의 단계와 정밀화의 단계를 거쳐서 일반화의 단계를 가지게 된다. 이때 낭만의 단계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도 정밀화의 단계에서도 감각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래서 시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이들 더 구체적으로 태어나면서 아예 가져보지 못한 이들과 가지고 있다고 상실한 이들이 생각해보면 시각적인 내용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빠르게 받아들이는지 반대로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시각적 정보를 얻지 못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가 기술에 대해 했던 다음의 내용처럼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모든 인간 기술은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인간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가지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통해서 빠르게 신호를 받아들여 정보를 만들어내고 싶은 인간의 노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기술에 대한 성격을 더욱 정확하게 해준다. 안경이나 보청기 뿐만 아니라 현미경 망원경까지 인간이 가지는 감각을 확장해주고 일반적인 인간 능력으로는 얻어내기 힘든 영역 domains 까지도 정보를 얻어내려고 하는 인간 감각의 연장 혹은 확장이다. 감각은 본능에 가깝기 보다는 오히려 이성에 더 가까운 것이고 학문의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의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감각하려고 하는 과정은 인간의 가장 활동적인 연구 내용이기 때문이다. 감각이란 상당히 능동적인 활동이다. 외부의 자극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협적인 신호라고 해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고 모든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무관심하다면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감각이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세포가 에너지를 소모해서 세포 안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가지고 오는 능동수송 active transport 에 더 가깝다.


공감에 대해 이야기하면 공감을 영어로 무엇이라 표현하는지 부터 설명하는 이들이 많다. 영어로 sympathy 와 empathy 가 있고 이 둘의 차이는 sympathy 는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해석하고 empathy 는 '공감하다' 이고 마치 sympathy 보다는 empathy 를 가져야 하는 감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한때는 의사였다가 한때는 대선주자였던 누군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 차이점에 대해서 이야기해서 마치 사실처럼 되어버리고 마치 두가지 중 empathy 가 더 우위가 되어버렸고 하나의 편견처럼 되어버렸지만 sympathy 란 상대방의 상황 condition 이나 환경 circumstance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상황에 대해서 간단하게 "I am so sorry for your loss" 라고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한 sympathy 의 예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공감한다고 생각해서 상대방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때리고 나쁜 아버지였고 최근까지도 상대방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잘 안다고 해서 상대방의 속마음에 공감한다고 "이제 속시원하겠네" 라고 말한다면 괜찮을까 생각해 보자. 그래서 sympathy 를 동정하다/측은히 여기다 라고 골라 해석하지 않고 위로하다 연민을 느끼다라고 충분히 번역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연민의 가치에 대해서...]

반대로 생각해 본다. 누군가를 크게 공감하는 능력이 만드는 현상이 있다. 바로 자신을 납치한 이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현상을 바로 스톡홀름 증후군 Stockholm syndrome 이 있다. 사회적인 법률을 떠나 자신을 납치한 이를 이해하고 크게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다면 단순히 동정과 공감으로 구별해서 empathy 의 능력을 강조한다면 스톡홀름 증후군을 가지는 인질은 공감 능력의 성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서 우리가 비이성적인 현상이라고 말을 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라고 하는 공감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감수성에 대한 단상


시대 (역사) 와 사회 (문화) 를 떠나서 무조건 죄가 되는 것이 있을까 생각한다. 즉, 문명이 없던 원시 인류에게 죄라는 것이 존재했을까 궁금한 것이다. 생존이 목적이였던 그 때에도 모르긴 몰라도 자신과 같이 수렵을 하는 동료를 먹으면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생명체는 자신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개체를 잡아먹기도 하지만 심지어는 가끔 영장류에서도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 같은 개체 사이에서도 죽이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잡아먹는 경우는 쉽게 볼 수 없다. 단순하게 유물론 관점에서 바라보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단백질과 지방 등으로 이루어진 아주 괜찮은 영양 공급원이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사람 고기를 먹는 경우는 극도의 불쾌함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공감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처음부터 인류는 식인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피해야 하는 것이라고 존재하면서 인식하고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문화인류학을 통해 살펴보면 식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한 과정이기 전에 하나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많이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파푸아뉴기아의 포어족은 장례 의식 중에 죽은 가족의 시체를 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이의 영혼과 같은 개념을 통해서 죽었지만 시체를 나누어 먹어 같이 살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죽은 이의 시체를 먹는 인육 섭취의 과정은 불쾌한 과정이 아닌 당연히 마무리해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먹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영양학 혹은 감염의학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런 식인 풍습은 상당히 나쁜 것이다. 우선 시체에서만 발생하는 세균에 의해서 감염될 가능성도 높고 시체의 보관 상태를 고려해도 인육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학적으로는 이 포어족의 식인 풍습은 새로운 발견을 하도록 했다. 쿠루병이라고 운동장애를 시작으로 전신에 걸친 신경학적 마비 증상이 높은 비율로 발생하는데 현재는 감염성 높은 뇌조직을 섭취해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염성 높은 단백질을 프라이온 Prion 이라 부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서 한참 논란이 일었던 광우병 - 소해면상뇌증 (bovine spongiform encephalopathy, BSE) 과 사람에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 (CJD) 등의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 뿐만 아니라 동종 혹은 유전적 유사성이 높은 동물들의 영양학적 섭취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백질은 기본적으로 모두 영양학적으로 모두 분해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단백질을 다시 조합해서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지고 그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 설계도가 유전자인데 이미 만들지도 않은 재료 중 완성품이 있을 때 어떤 질환이 일어날지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다시 넘어와서 식인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보아도 이제는 식인이 인간이 저지르는 나쁜 짓이라고 모두 공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모든 문화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관련된 극한의 상황에서도 어느정도의 예외는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영화 하트 오브 더 씨 In the Heart of the Sea (2015) 나 얼라이브 Alive (1993) 과 같은 예가 있다. 그리고 현재도 국제법상으로는 식인은 중죄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있을 때는 예외적으로 죄를 묻지 않기도 한다. 살인의 경우도 비슷하다. 미국과 같이 광범위한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국가(주)에서는 상대방을 죽이고도 기소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기소한다고 해도 실형을 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때로는 살인에 의한 희생자보다 정당방위에 의한 희생자가 더 숫자가 많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과정에서 정당한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런 정당방위는 암살을 하고도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이야기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정당방위의 범위가 너무도 협소하여 때로는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남편이 막은 강도가 죽어도 남편을 형사처벌을 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정당방위가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범위는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문화적인 가치보다도 오히려 법률적인 적용 내용이 더욱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느정도 정당방위에 의해서 행동해도 되는지는 형법이 정하는 범위가 어느정도인지가 중요하지 의도나 과정은 참고가 될 뿐이다. 그래서 정당방위가 상당히 넓게 인정되는 미국의 경우 총기 범죄가 많은 곳에서는 총기로 오인되는 물건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정당방위로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가지는 죄책감이나 도덕적 감정은 나중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지는 감수성을 생각하게 된다. 감수성이란 영어로 sensibility 라고 해석하지만 이 느낌은 얼마나 감각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마치 볼 수 있는가? 들을 수 있는가의 sense + ability 가 아닌가 싶어진다. 그래서 감수성이란 마치 타고난 능력 그리고 가지고 있는 능력처럼 해석되기 쉽지만 식인 혹은 살인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봐도 모든 식인이나 살인조차도 죄를 묻기가 어려울 때가 있고 오히려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죄인지 아닌지보다 인간의 행동 / 말이 가지는 사회적 감수성에 비추어 어느정도 용납이 가능한지 물어야 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결국 그 죄에 대해서 벌을 묻는 주체가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의 정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종종 감수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개인의 능력 혹은 개인이 가져야 하는 덕목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사회의 결과물인 경우가 더 많다.


사회적 감도


핸드폰을 쓰면서 감도가 떨어져 신호가 잘 잡혀 혹은 신호가 좋다 라는 표현을 할 때 기술적으로 자주 쓰는 단어가 감도 sensitivity 이다. 감도가 좋으면 외부의 작은 신호 변화를 감지할 수 있어서 이를 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청각이 좋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외부의 소리 자극에 더 반응하기 쉽다. 반대로 그렇게 감도가 높은 이들은 그만큼 외부의 자극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감도는 양면적인 측면이다. 감도를 높여서 감각을 하면 많은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어 정보를 높일 수 있지만 쏟아지는 정보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면 일상이 정보의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화재 경보기의 감도가 높아 자주 잘못된 경보를 울리게 되면 화재 경보기를 꺼놓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즉, 감도도 중요하지만 그 감각된 정보를 어떻게 잘 처리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처리하는 정보처리 과정이 그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회적 감도 social sensitivity 를 생각해보아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요즘에는 자주 거론되는 성감수성을 생각해보자. 성감수성이 낮았던 과거에는 성범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할 때가 많았다. 대부분 성범죄의 피해자였던 여성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합의된 성관계가 아니냐 혹은 합의를 보아서 다른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성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조사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고문이 수사의 한 방법이라고 자랑하던 공권력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도 아니다. 아무리 강도가 높아도 성범죄에 대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공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감수성은 낮았을 것이고 그만큼 높은 성범죄의 피해자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는 커녕 가해자들은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가해자들이 그렇게 죄의식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에게 돌릴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감도가 낮기 때문에 즉, 성범죄에 대한 감수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진 화재 경보기때문에 화재가 일어나도 대피하지 못해 수많은 인명피해를 보는 것처럼 그 사회의 사회적 감수성이 없다면 결국 그 사회가 화재처럼 큰 충격으로 피해를 입는 일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가게 된다.

결국 사회적 감수성이 낮은 사회에서는 총체적인 문제가 터져 상당수의 피해자가 생기기 전까지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감수성의 낮은 반응은 의외로 우리들 사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무슨 일 있겠어?", "그게 뭐 어때서?" 혹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니야?" 와 같은 반응들은 우리의 사회적 감수성을 낮추는 사회적 인식에서 나오는 표현들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각 그리고 새로운 감수성


인간에게는 오감(五感)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오감은 가장 기본적인 것일 뿐이고 새로운 기술에 따라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 SNS 을 잘하는 것도 하나의 감각이 될 수 있고 인터넷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만들어 내지 않아도 잘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유용할 때가 많고 잘 사용하지 않는 이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어내는 것만을 생각해도 기술을 잘 이용하는 것도 인간의 새로운 감각으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마치 스타트렉 디스커버리 시리즈에 나오는 사루 Saru 와 같이 칼피언족은 자신의 대량살육을 감지할 수 있는 후두부에 있던 위험감지신경 (threat ganglia) 과 같이 다양한 종족들이 기술에 따라서 새로운 감각기관을 만들어 내는 세상같다. 그래서 아직 기술이 잘 적용되지 않거나 초기 도입 상태라면 그 기술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이들이 적고 당연하게 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감각할 수 있는 감수성도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지털 저작권이나 개인정보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소위 디지털 감수성은 기술의 속도를 절대 따라갈 수 없고 예전에는 대기업조차도 개인정보를 모으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강조하면서도 그 개인정보를 어떻게 보호하고 악용되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신의 서버에 저장하고 있던 암호화되지 않은 개인정보들이 유출되면 결국 그 유출된 개인정보에 의해서 새로운 피해자들이 생기게 된다. 그때는 그리고 여전히 이런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업이나 비밀번호나 개인정보는 개인이 관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범죄에 의해서 피해를 보아도 결국 개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당연하 사회적 감수성이였다. 그런 시절에는 개인정보를 적극적으로 유출시켜 팔거나 악용하는 것이 그리 큰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낮은 디지털 감수성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비밀번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거나 심지어 타인에게 알려주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비밀번호 관리를 하지 않는 (2차 인증이나 비밀번호 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는) 보안 감수성에서는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개인정보뿐만 아니라 범죄에 쉽게 이용될 수 있는 문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쉽게 알려준 특정 사이트의 비밀번호를 통해 남자친구는 다른 서비스의 계정에 접속하고 이메일이나 대화내용 그리고 중요한 개인정보를 얻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것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비밀번호 공유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과 알려준 비밀번호인데 다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가 하는 낮은 감수성으로 결국 예상할 수 없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개인정보에 대한 감수성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바로 인터넷이다. 자신의 민감한 개인정보를 목적없이 공개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개인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개인정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 인공지능 시대 개인정보란 무엇인가?] 에서 개인정보를 두가지로 구별했다. 우선 바로 알 수 있는 개인정보인 '본연적 개인정보' material privacy 이라 설명했고 바로 개인정보를 알 수 없지만 유추해서 알아낼 수 있는 근거를 포함하는 '가공된 개인정보' manufactured privacy 으로 구별했다. 자신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겠지만 아파트단지 사진이나 주변의 간판 등을 통해서 알아낼 수 있는 개인정보이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올린 아이(들) 사진을 올릴 수 있지만 나쁜 마음을 먹는 납치범의 좋은 목표물이 될 수도 있다. 메신저나 닫힌 공간에서 자신의 성범죄 등을 대화하고 공유하는 이들도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성범죄에 대한 낮은 감수성이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닫힌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은 더욱 그렇다. 낮은 성감수성을 가지고 인격의 수준을 의심할 수 있는 이들의 대화 내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감수성이 그정도인데 조금 닫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감수성의 발명 


사회가 가지는 감수성은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규칙을 통해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다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결국 법률에 의해 죄를 짓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률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서 행동은 제한된다. 예를 들어 음란물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잘 인지한다면 그런 행동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법률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 혹은 그런 법률이 있어도 나는 피해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법률은 어떠한 장벽도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적 감수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가지는 감수성이 낮게 된다. 종종 볼 수 있는 기득권자들의 갑질 논란도 결국 자신이 법률적 테두리를 벗어나 즉 사회적 감수성과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감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감수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법률 혹은 사회가 가지는 규법과 동일하다.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개인은 결국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든다. 갑질을 해도 어떠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권력이 가지는 그 불공평함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실 그 갑질의 피해자는 항상 존재한다. 누군가는 힘들고 고통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법률과 규칙은 누군가 불편은 받을 수 있지만 최소한 그 피해로 고통받는 이는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이 만든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고통마저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법률과 규칙은 인간의 논리와 이성으로 만들 때 불필요하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머리로 만든 법률은 결국 인간을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살게 만든다. 그래서 법률은 오히려 인간의 고통에 관심가져야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한국에서 소아 당뇨를 가진 아이들은 따돌림 당하는 아이들이 많다. 주사기를 가지고 다녀야 하고 급식시간은 쉽게 같이 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겉으로는 아무런 특별한 점이 없는데 소아 당뇨라는 말만 듣고는 설탕을 억지로 먹이는 아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아이들의 그 잔인성은 어디에서 배운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이라 생각하기에는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이 들고 주변에서 학습했다고 하면 그걸 학습하게 한 사회가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결국 학습한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같은 소아 당뇨 아이들이지만 미국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나라에서 대하는 태도를 보고 나서였다. 주변 아이들도 소아 당뇨 아이들이 그저 눈이 안 좋아 안경쓰는 것처럼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필요하면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한다는 것이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병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잘 인식하고 같이 어울리고 필요하다면 좀 더 배려하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같은 질환이지만 나라에 따라 인식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 인간 본연의 본성이 아닌 사회에 어떤 감수성을 제시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제시한 감수성은 결국 사회가 가지는 예의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예의란 결국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주지 않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아 당뇨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이들은 예의없는 어른들에게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단거 많이 먹었지?" "도대체 몸을 어떻게 관리했길래 그런 병에 걸려?" 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특히 어른들 그리고 그 어른들에서도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듣는다고 한다. 예의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란 나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얼마나 배웠는지의 문제이다. 그래서 단거 많이 먹어 소아 당뇨 걸린 것 아니냐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자신의 무식함으로 타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는지 모르는 무지와 무례일 뿐이다. 아직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만들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그런 질문은 결국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는 상처를 가지게 된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다. 복학했기 때문에 나이 한살 어린 친구들과 공부해야 했고 모두 키 순서대로 번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난 마지막 번호를 받았다. 키도 작은데 항암치료로 살은 찌고 머리카락은 거의 없는 소위 볼품없는 모습이였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자존감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국어 시간이였다. 선생님은 질문을 했고 내 번호에 내가 대답을 하니 질문은 멈추고 "이반은 몸무게 순으로 번호 매겼어?" 라고 뜬금없이 말했다. 반 전체는 그 농담에 모두 웃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서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웃자고 한 농담이 나에게는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타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내가 선택하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그것도 항암치료로 겨우 이겨낸 그 순간에 받아들이기에는 날카로운 상처였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서 악몽에 그 국어 선생님이 나올 때가 있다.

결국 인간에 대한 감수성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줄 수 있는지 아닌지를 잘 판단할 수 있는 일차적인 기준이 된다.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어떤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흑인이라 차별하거나 성소수자여서 싫다고 생각하고 말할 때 그 말이 인간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성소수자니깐 싫다는 이유로 혐오를 하고 차별을 한다면 결국 성소수자는 죽어도 된다는 끔찍한 역감수성 negative sensibility 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부터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소수자는 역사와 의학으로 살펴보아도 그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으로 차별하는 것은 예의없는 행동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수성이란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예의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예의를 사회적으로 합의한 것이 규칙이고 법률이 되어야 한다.


왜 인간은 상처주는가... 


인간의 상처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주는 상처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든 원칙이 있다. 결정할 수 없는 내용과 결정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별하고 결정할 수 없는 내용으로 이유를 대어 상대방에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앞서 말한 성소수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불쾌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 내용으로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그 이유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혈액형을 가지고 B형이니깐 어느 지방 출신이니깐 심지어는 남자이기 때문에 ... 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편견으로 다음 논리를 이어갈 때 대부분 사람들은 상처준다.

누군가 좋은 감정으로 만나려 하는데 남자 여자 나이차이가 많았다. 좋은 만남을 시작할 때 여자 부모님들은 남자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한다. 결혼 상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이 많을 수 있지만 우선은 나이가 많은 것부터 신경쓰이기 시작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나이 많은 것으로 이어진 걱정은 바로 '결혼한 적은 없었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호적등본을 요구했다. 물론 그러한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의 행정 시스템에는 '혼인관계증명서'가 존재했다. 나이는 어떻게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나이로 인해서 결혼한 적이 없는지 묻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혼한적은 없는지 그리고 동거한 적은 없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듣는 이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질문을 누군가 자신의 딸에게 했다면 그 기분이 어떨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지사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질문들이 상대방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을 하고 던진 질문인지 고민은 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이성적인 질문보다는 두려움에서 가장 먼저 해결하고 싶은 질문을 꺼내고 그렇게 꺼낸 것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런 질문들은 사회적 감수성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어떤 질문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일종의 갑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례한 질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근본적으로 상처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미 결혼한적 없는지 그리고 동거는 한적 없는지 결국 내 딸을 만나기 전에 어떤 이를 만나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은 아니냐는 질문으로 들릴 뿐이고 그것은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이 나쁜 인간이지 않은 것을 증명하라는 폭력일 뿐이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전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가볍게 한 말 무겁게 한 말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지금까지 적어온 감수성을 적용하면 감수성이 낮은 말과 감수성이 높은 말로 대체해도 같을 것이다. 결국 감수성이란 사회가 만든 규칙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사람에 대한 공감을 통해 만들어진 배려가 얼마나 훈련되고 익숙해졌는가를 뜻할 것이다. 화상입은 아이에게 "너 이게 뭐야?" 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화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뜨거운 것을 다룰 때 도와줄 수 있는 것이고 소아 당뇨 아이들에게 "단 것 많이 먹어서 그래?" "몸을 어떻게 관리해서 그래"라는 심판자같은 말은 차라리 하지 않고 입닥치고 있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인권 감수성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훈련하고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이에 비추어 해야하는 말인지 아닌지 한번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감수성이 가지는 가장 큰 기능일 것이다. 소위 인권 감수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경찰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의 편의성을 위해 조사받는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거나 불편하게 심지어 상처를 준다면 그것은 인권 감수성이 낮은 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란 인간이 덜 상처받고 덜 불편할 수 있는 반대로 공권력을 가지는 조사기관은 조금 더 불편하고 까다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결혼을 증명하라는 것은 두려움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라면 공권력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욕심에 의해 감수성이 무너진 상태일 것이다. 결국 감수성은 인간의 두려움과 욕심 (fear and greed) 으로 낮아질 때가 많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이 영어로 무엇인지 물어보면 대부분은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인권 감수성을 human right sensibility 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sensitization of human right 혹은 아예 training 이라는 더 명확한 설명일 것이다. 즉,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란 하나의 능력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생활화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일상에서 항상 훈련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 변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내용들이 변화한다면 당연히 그 변화에 따라서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란 변화한 세상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달라진 사회적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여자가 해야하는 가족 안에서의 역할이나 위치 등으로 많은 상처를 줄 때가 많다. 아이들의 육아는 여자의 몫이고 경제적인 활동은 남자가 해야 한다는 지난 시절의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일 수 있지만 인권 감수성에 비추어 보면 개인의 행복보다는 사회안에서의 기능적 역할을 얼마나 강조해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사회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집단 혹은 타인에 대한 뒷담화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대놓고 상대방에게 예의없는 상황보다는 일반화해서 만드는 편견 예를 들어 '중국사람들은 원래 그래' 혹은 '그 지방 사람들은 ...' 과 같이 편견들을 많이 듣게 된다. 그리고 사람 들 앞에서는 예의를 중시하지만 뒤돌아서 상대방이 없을 때 함부로 평가하거나 뒷담화하는 사람들에게도 인권 감수성은 쉽게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래서 인권 감수성은 밝은 곳에서보다 어두운 곳에서 더 잘 보이게 된다. 종종 자신의 SNS 계정에 자신의 연인 사진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 상대방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조금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초상권 뿐만 아니라 그런 경우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와 만나는 하나의 소유물 혹은 나는 이런 사람과 만나고 있어와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악세사리처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개인을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행복은 커녕 인권조차도 쉽게 훼손할 때가 있다. 특정 사이트 안에서는 자신의 연인이 일하는 곳을 공개하고 자신과의 은밀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글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는 인권 감수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단체 대화방에서 여자들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을 자랑하고 그런 동영상을 올리는 행동은 결국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조차도 도구일 뿐이라는 기대하기 힘든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아주 간단하다. 겉으로는 예의 바르고 평화로울지 몰라도 오만과 편견으로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결국 경쟁에 유리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런 사회의 목적은 아주 확실하다. 바로 생존일 뿐이다. 인간의 고통에는 관심가지지 않고 누군가의 아픔은 그냥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잘 생존하다가 갑자기 빠진 불행 속에서는 그 누구의 공감도 없이 스스로의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강한 진통제를 사용하면 통증이 없으니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강한 진통제를 먹으면 날카로운 물건에 손이 상처가 깊게 나고 피가 심하게 흘러도 잘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통증이 사라지면 좋겠다. 단 하나도 안 아픈상태였으면 좋겠고 그런 상태를 위해 참지 말고 진통제를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몸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아픈지 빠르게 알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불편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우리 몸의 반응들 중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많다. 염증이 생기면 아프지만 염증이 생긴 부위를 통해 어디가 문제인지 빠르게 알 수 있고 염증이 만들어진 부위에 더 집중해서 더 빨리 치료할 기회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통증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사회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오만과 편견에 쌓여 많은 것들이 당연한 세상에서 조금은 아닐 수 있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의 시작은 결국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세상의 고통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감지한다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문학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지옥, 연옥 그리고 천국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현생에서의 삶 이후 자신의 행동들에 따라서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선행을 해야한다는 교훈을 떠나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안에서 만나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단테가 지옥을 들어가는 곳 앞에서 마주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나를 통해 슬픔의 도시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갑니다.
당신은 나를 통해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 단테, 신곡 3장  
Per me si va ne la città dolente,
per me si va ne l’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THROUGH ME THE WAY TO THE CITY OF WOE,
THROUGH ME THE WAY TO ETERNAL PAIN,
THROUGH ME THE WAY AMONG THE LOST.
─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 Inferno, Canto III 


슬픔의 도시는 città dolente 으로 슬픔이란 뜻도 있지만 후회 혹은 상처만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영원한 고통은 회개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되는 고통에 빠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파멸된 인간들 속으로 란 말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이들의 세상이다. 전체적으로 지옥은 단절 그리고 무관심 무엇보다 함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공간들이다. 아마도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처럼 관계에서 서로 상처만 남고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서로의 존재가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회적 감수성 ─ 인간의 사소한 상처에 대해서

Wednesday, August 8, 2018


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인터넷 속도만 생각해봐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기기 등을 생각해도 분명 인터넷 강국이다. 이제 인터넷은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되어버린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인터넷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스마트폰이나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이미 인터넷의 사용자인 것을 모르고 쓰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인터넷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기기들 devices 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용 빈도와 사용량이 다를 뿐이지 많은 부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인터넷이 보급되고 보편화되기까지 상당히 빠르게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때 TV 에는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업체들 ISP; Internet Service Provider 광고들이 가득했었다. 그만큼 인터넷이 기업이나 학교 뿐만 아니라 홈 네트워크를 위한 가정용 인터넷 선 보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정도 초기 보급이 끝나고 나면 이후 나타나는 현상은 빠른 인터넷 선으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가격을 적정선 유지하거나 약간 올리면서도 사용자 고객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한때 100메가 속도를 자랑하던 시대에서 언제쯤 1000메가 = 1기가 선로를 보급시킬 것도 같은데 사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학교나 기업망은 이미 내부 선로는 1기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가정용 보급 라인이 1기가로 대체되지 않는 것도 마케팅이나 기업 전략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테마가 아닐까 싶은 부분이다.


터넷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즘 스마트폰도 속도가 빨라지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인터넷 속도가 마치 얼마나 자신이 첨단 기술에 잘 적응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공기와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터넷이란 정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대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선 ─ 구조적 설계 사고 ] 에서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단순히 사용자는 웹브라우저에서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사이트를 입력하거나 터치하여 들어가지만 실제로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과 규칙을 거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원하는 페이지를 보여주는 것이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지만 물리적으로 거대한 장비들이 처리해주고 그 장비들이 모두 연결될 수 있는 물리적인 선로들이 깔려 있고 그 외 필요한 통신 장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원활하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중 몇개의 요소만 사라지거나 작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소처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느 것일까?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상당히 추상적 개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 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이란 세계 어디에 있는 서버 (서비스)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주 들어가던 구글 메인 사이트에 들어가는데 인터넷 업체를 바꿔 보니 예전보다 더 빠르게 들어간다면 비교해서 더 빠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비교를 하던 그 순간에 구글 사이트가 내가 접속하는 요청을 빠르게 처리했는가 아닌가이다. 정말 운이 안좋아 인터넷 선로를 바꾸고 바로 구글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때마침 구글 사이트가 공격을 받아 반응이 느리다면 사용자는 구글 사이트가 느리다가 아닌 '인터넷이 느리다' 로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용에 관련된 몇가지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 {접속 기기 (노트북 혹은 스마트폰 등) & 웹브라우저} ─ (입력: june.meson.kr) ─ {june.meson.kr 가 어떤 IP 를 가지는지 확인한다; DNS 서버} ─ {해당 IP 로 접속} ─ {인터넷 상에서 해당 IP 로 접속할 수 있는 경로는 만들어 접근한다} ─ {경로 상에 수많은 장비와 선로를 거쳐서 해당 요청을 서버에 통보} ─ {해당 서버가 요청한 내용에 맞게 결과를 보내준다} ─ {접속 기기의 웹 브라우저에서 수신받은 내용을 구성해서 표시} ─ [사용자 확인]

아주 간단해 보이는 웹사이트 접속조차도 인터넷은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어렵게(?)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서 또 다시 적절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간단하게 '인터넷 쓴다' 라고 표현하는 과정을 약 1/100 정도로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사용자는 거의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빠르다 느리다는 이 모든 과정에 관련된 장비, 선로, 아주 가까이는 사용자가 쓰는 기기의 성능까지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터넷이 빠르기 위한 조건들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자주 사용되고 서버가 빠르게 대응하거나 혹은 나와 물리적인 네트워크가 가까이 있는 (예를 들어 학교 내 서버 등) 경우 인터넷의 속도는 빠르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펜티엄 4 CPU 가지고 만들어진 서버에 접속하는 경우라면 그 서버까지 도달하는 장비의 성능, 선로의 속도, 심지어 서버의 반응 속도까지도 느리다면 전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내가 목표로 하는 서버까지 가는 길이 느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데 방해물이나 제한되는 요소가 없고, 사용자의 장비 (클라이언트) 와 서버의 장비 (서비스) 의 성능이 뛰어나 모든 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가정용 인터넷이 빨라진 이유 중에 하나는 소위 백본망 backbone networks 에서 나온 가정용 선로의 속도가 100메가 (bps) 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체감적으로 속도의 증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야 할 내용은 100메가 라는 속도는 제한속도이고 만약 이 선로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늘어난다면 100메가를 사용자들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정용 선로로 들어온 인터넷을 여러명의 가족 구성원이 사용하는 기기를 '공유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공유하는 대상은 인터넷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의 속도를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사용자의 인터넷 지점에서 백본망까지 도달하는 속도도 빨라야 하지만 백본망에서 다른 백본망까지 연결되는 선로도 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라와 나라를 연결해주는 해저 케이블 및 다양한 고속 선로를 만드는 이유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해저 케이블의 경우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미국에 서버가 있는 웹사이트의 경우 심하게 느려지거나 접속이 불가능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아무리 사용자의 컴퓨터가 성능이 좋고 서버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해저 케이블이란 선로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인프라 infrastructure 가 마련되어 있다면 사용자가 투자해서 인터넷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접속 장비와 더 빠른 인터넷 업체의 서비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사용자들에게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이야기하는 것도 사용자의 접속 장비와 백본망까지 가는 선로 (무선망 포함) 가 얼마나 빨리질 수 있는가를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충분히 빠르다면 사실상 인터넷은 급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터넷이 빠른 것은 좋은 것인가?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만큼의 투자와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이 빠른 인터넷 속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적절한 투자 혹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은 상당히 멍청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르게 해본다. 모든 사용자들의 인터넷 속도가 모두 빠른 상태가 좋은 것인가? 뭐 개인의 인터넷이 빠른 것이 좋은데 모든 사용자로 확대한다고 뭐가 나빠질 것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설명한 인터넷은 무한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인 장비가 충분한 성능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내가 인터넷을 사용할 때 모든 장비가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는 말은 관련된 모든 장비들이 내가 요청한 내용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량적으로는 모든 장비들이 내가 인터넷을 쓰는데 충분한 자원을 제대로 쓰고 처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비는 항상 한계를 가진다. 이런 장비의 한계를 이용한 공격 중 하나가 디도스 (DDoS Distributed Denial of Service; 서비스 거부 공격) 공격이다. 예를 들어 어떤 웹사이트에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5만명이라고 하면 10만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공격 웹사이트에 일시에 접속하게 하여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도 하나의 컴퓨터이기 때문에 CPU 및 메모리와 같은 물리적 자원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성능, 관련 데이터베이스의 튜닝 정도에 따라서 동시 처리 접속자 수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점을 노린 것이다. 문제는 10만명의 동시 접속 공격자를 만드는 일인데 이것은 해커들이나 공격자들의 몫이기 때문에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런 개념으로 접속하여 우리가 인터넷을 쓰는데 써야 하는 장비를 공격하는 방식을 DDoS 라고 한다. 여기에서 앞의 Distributed 란 말은 기존에는 한 클라이언트에서 여러개의 가상 클라이언트를 통해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정도쯤은 가볍게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분산된 distributed 형태로 클라이언트를 동원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에서는 전세계 각지에서 접속하는 비이상적인 클라이언트의 공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서비스 거부 공격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조금 네트워크 시스템 프로토콜에 대한 이해와 각 장비의 취약점 정도를 파악하면 다양한 장비의 서비스 거부 공격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응용(?)할 수 있다.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가 도메인으로 접속할 때 이 도메인 정보를 IP 정보로 해석해주는 DNS Domain Name Server 를 공격한다면 웹브라우저에서 입력한 도메인을 실제 IP 로 해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해당 서버의 IP를 직접 입력하지 않는 한 웹사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공격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보안이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라 사용자의 사용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줄 수 있는 균형을 어떻게 잡는가의 문제이다.


량문제를 바라보다. 

실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제대로 시작도 안된 상태에서 인터넷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론으로 삼았다. 이제 실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식량 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인터넷이 식량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개인적인 궁금증의 시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 점심으로 더 맛있는 것,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해도 마땅히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많은 나라의 기아 문제 특히 심각한 출산한지 약 36개월이 되지 않아서 영양실조 및 기아 문제로 죽는 영아 사망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심각성은 인지하기 어렵다. 얼마나 심각한지 아무리 다양한 미디어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 보아도 막상 그때뿐이고 곧 이어 누군가 음식 사진을 올리면 군침을 흘리며 다시 더 맛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분명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전세계 식량 중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 (식량을 포함하여) 은 전체의 1/3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곳은 음식이 남아돌아 버려지고 낭비되는데 어떤 곳은 먹을 것조차 없어 죽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양의 문제를 떠나 이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아의 문제는 인류 역사의 문제인가?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다가 질문 한가지를 하게 되었다.

아 문제는 인류 역사에 걸쳐 항상 존재하던 문제인가? 

이 문제에 대한 인류학적 해답을 제대로 해준 책이나 지식인은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대의 역사에서 현대까지 생각해보면 항상 가난은 존재해왔고 빈곤 그리고 그 빈곤의 상태가 생계를 위협하는 '절대 빈곤'은 분명 있었다. 그 원인은 다양했다. 때로는 자연재해나 전염병에 의해서 인간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 때로는 이 자원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절대 감소 등으로 식량화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다. 그런 시기를 떠나 적절한 부와 경제력이 존재하고 식량도 존재하는 동시에 '절대빈곤'에 의한 죽음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는가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영역을 확대해서 전세계를 통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절대빈곤'에서 자유로운 국가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끔 도시화가 인간의 절대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도시학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다.


반대로 역사상 절대 빈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국민들이 먹고 사는 것에 별로 걱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즉, 최소한 먹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그런 공동체 혹은 국가가 역사상 존재했는가를 묻고 싶다.


대빈곤과 인터넷 

식량문제, 절대빈곤의 문제를 인터넷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인터넷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뭔가 구체적인 장치로 적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식량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인터넷의 속성을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해본다.

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히 빠른 것이 좋다라고 대답하겠지만 한편 모두가 빠른 인터넷 속도라는 것은 결국 인터넷 자원은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에 한정된다는 사실에 집중한 내용이다. 쉽게 말해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접속할 수 있는 지점 point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질문은 전혀 상관조차 없는 질문이 되어버린다.


절대 빈곤에 놓인 사람들, 기아 문제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이 먹을 식량이 있는가 없는가의 존재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양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인터넷이 빠른가 느린가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우리가 항상 친근하게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인터넷 사용자들, 소셜 미디어의 친구들은 모두 이런 인터넷 절대빈곤 (인터넷 사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용자들에게는 더 빠른 속도의 인터넷이 세일즈 포인트 sales point 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절대빈곤의 문제에서 첫번째로 끌어내고 싶은 문장은...

식량에 풍부한 접근성을 가지는 사용자 (소비자) 와 식량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절대빈곤 사용자 (소비자) 는 인식의 대상 영역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식량문제 혹은 기아 문제의 해결책을 단순히 연민 혹은 인간애에 의존하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접근이 어려울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아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가상 실험

한가지 가상 실험을 시도해본다. 인류가 진화(?)해서 인간은 더이상 먹지 않고 일종의 인터넷 식량 internet food 를 먹으면 생존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단 하루에 정해진 서버에 접속을 해서 인터넷 식량에 접속해서 해당 페이지를 보아 확인해야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 즉, 이제 인간은 먹지 않고 심지어 영양성분이 농축된 알약을 먹지도 않고 인터넷 웹 사이트를 접속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아가는데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최첨단 시대에 살게 되었다. (가상이지만 조금 황당하기는 하다...) 

이제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웹 사이트에 접속해서 밥(?)을 먹는다.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기 위해서 10군데의 웹 사이트를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상황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인터넷은 생존에 꼭 필요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힘으로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절대빈곤) 이 만들어질 것인가? 만약 인터넷 사용이 생존의 문제가 된다면 요즘처럼 공짜 무선랜을 사용하게 하는 일도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심지어 흔하게 버려지는 구형 스마트폰이 쉽게 버려질 것인가? 가상 실험의 조건에는 인터넷은 현재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서버도 동시 사용 접속자수가 정해져 있고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느린 인터넷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등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희망하건데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두 빠른 속도로 접속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한편 자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고려하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인터넷 장비, 웹 사이트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성은 현재 얼마나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가와 관련되고 이는 결국 자본에 의해 얼마나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되게 된다. 사실 현재의 인터넷도 공공재의 성격은 아니다. 인터넷 사용에도 직접, 간접적으로 사용료를 제공해야 사용할 수 있고 현재는 다만 그 사용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상황일 뿐이다. 만약 이처럼 인터넷이 식량의 문제,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다면 현재처럼 관대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해 죽어가는 빈곤층이 발생하면서 이를 보다 못한 유엔과 각국의 정상들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기를 보급시키고 웹 사이트도 확대하여 동시 접속자수를 충분히 확보하였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제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굶어 죽는 사람들은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이론적으로 기아는 사라질 것이다. 즉, 기술적 가능성을 떠나서 기아 문제의 근본적 문제와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런 황당한 가상 실험으로 인류의 전자적 진화(?)까지도 가정해보았다. 이제 온 인류가 기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이다.

즉, 이런 황당한 가정과 상상을 한 이유는 인간이 빠른 인터넷을 쓰고 싶어하는 욕심과 더 넓은 범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통해 다양한 네트워크 장비와 선로 등을 발전시켜 왔다. 즉, 보다 넓은 빠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기술은 발전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네트워크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의 특징과 문제점 등을 통해서 기아 문제와 같이 한정된 자원을 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다 빠르게 전달하지 못하는가의 문제로 환원시켜 문제를 비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문제 해결의 구조와 기아 문제의 구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상적이지만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히 성능 좋은 서버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하면 기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야호! (에휴...)


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는 인터넷 

여담이지만 어떤 자원도 한계를 지닌다. 그나마 가장 효율이 좋은 자원이라면 인간의 사고 및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 역시 신경세포를 혹사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영양과 관련되기에 이또한 제한된 자원과 연결이 된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인터넷을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가 된다고 해도 인터넷 사용에 불균형은 분명 발생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말은 한정된 자원을 누가 쓸 것인지 정하기 위해 누가 더 많은 토큰 token 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바라본다. 토큰은 시스템 공학이나 컴퓨터 시스템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웹 사이트에 접근하는데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100명일 때 어는 순간 110명이 접속을 하게 되면 이때 누구의 요청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방법으로 각자의 이름이 적힌 토큰을 내고 원하는 페이지를 요청하는데 이때 동시에 100명까지 처리할 수 있으니 101번째부터 요청한 사용자들은 앞선 사용자들이 다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다. 이때 사용자들의 토큰을 제출한 순서대로 처리해주는 것이다. 즉,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 순번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 사용자들의 순서를 정하는 방식이자, 시스템 내부적으로 어떤 작업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문제가 있다. 단순히 제출한 순서에 맞춰 처리해주는 것은 사용자들이 요청한 내용이 동일한 일의 처리량을 가질 때는 충분히 효과적이다. 그런데 101번째 사용자가 요청한 내용은 자원의 10만큼 필요한 내용인데, 102번째 사용자는 단지 4만큼 쓰게 되고 앞선 사용자 중 처리가 되어 한명이 빠져 나가 가용 자원이 딱 8이 남는다면 101번째 사용자 내용을 처리하기는 부족하지만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하기는 충분하게 된다. 이때 고집있게 101번째 사용자의 내용을 처리하기 위해 자원이 10의 여유가 생길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해줄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사용자의 대기 순서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더 빨리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설계가 더 효과적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 ⓐ 작업 최적화 load optimization 의 궁극적 목표 ] 


두번째 문제는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된다면 서버의 위치, 갯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 조금 현실적인 영역으로 넘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글에 접속한다. 동시 처리해야 하는 접속자수도 엄청난 숫자이다. 그런데 마땅히 구글 검색 엔진은 사용자가 많다고 서비스를 거부하거나 검색 결과가 늦게 처리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없었다 하기에는 분명 있긴 하였다.) 그렇다면 구글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는가? 가장 정답은 사실 자본이다. 돈이 많기 때문에 성능좋은 서버들을 많이 구매해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서버의 숫자를 늘린다고 해서 scale up problem 성능이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즉 자원의 충분한 숫자만큼 그 자원이 쓰이는 곳과 필요한 수요 네트워크에 따라서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구글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연구 내용을 만들어 낸다. [ ⓑ 분산 시스템 distributed systems 의 배치 location 문제 ]


결국 인터넷은 결국 사용자 end user 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장비와 서버가 배치되어서 접속만 해도 되는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져도 사용자가 접속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접촉 영역 user interface 이 필요하다. 최소한 사용자는 웹브라우저를 실행시키기 위해서 터치를 하거나 더블 클릭을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야 한다. 컴퓨터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용자에게 컴퓨터를 주고 무엇인가 해보라고 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 비효율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학습하고 교육받는 것이다. [ ⓒ 사용자의 교육 및 연습 user's training & practice ] 


모든 인류가 이제 익숙해져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인터넷은 공짜가 아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인터넷은 수많은 장비와 기기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런 부분에 수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결국 인터넷은 자본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자본이 있는 자들에게만! 으로 변경되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공공재의 수익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패드 하나를 구매하면 아이패드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비용과 기업이 가져가고 싶은 이익까지 다 포함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부과하고 이에 가치를 느낀 사용자는 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이런 수익 구조, 즉,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 꼭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공공사업 혹은 공공재이다. 예를 들어 같은 재화 혹은 서비스라고 해도 수혜자의 경제적 부담비율에 따라서 공급가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글을 검색할 때마다 돈을 내야 한다면, 실제 우리가 검색하는데 필요한 서버의 전기료, 선로 이용료 등을 모든 비용을 계산해서 우리에게 부과한다면 사람들은 인터넷을 거의 쓰지 않거나 일부 소수의 전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비용이 발생해도 특별히 비용을 사용자에게 부과하지 않는 이유는 검색에 의해 발생하는 비용 구조와 다른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수익 구조를 분리해서 그 이익과 손해를 보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글 검색에서 특별히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아도 다른 광고 사업이나 기업 대상 사업을 통해 수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 개인정보 privacy 차원에서 사용자가 단순히 무료로 사용하는가는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이 부분은 잠시 접어둔다.) [ ⓓ 수익구조의 다양화 alternation of business model ]


아 문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을 생각한다. 

앞서 ⓐ, ⓑ, ⓒ, ⓓ 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빠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몇가지 네트워크 상의 문제이다. 식량문제도 가상 실험에서 생각해보았던 것처럼 자원의 배분, 공급, 그리고 사용자의 식량 소비와 같은 네트워크 문제로 환원해서 식량문제를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로드 발란스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 특히 같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한정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식량의 문제로 접근하자. 식량은 단순히 양의 문제 a matter of quantity 가 아니다. 시간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첫번째이다. 즉, 식량문제를 다룰때 충분한 식량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식량이 필요한 곳으로 얼마나 빠르게 실행되어 공급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따라서 식량이 필요한 지역적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적 문제까지 포함해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의 문제와 같이 생각해보자. 시간의 문제로 제때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잘 분산된 실행 시스템이 필요하다. 즉, 식량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얼마나 잘 정비된 공급망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식량은 직접적으로 식량을 만들어 내는 생산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마치 분산 시스템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식량을 잘 공급하기 위한 공급망이 잘 되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산된 형태의 농업 생산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한 내용 중 하나는 왜 인류는 절대적 식량의 양은 증가하는데 왜 기아는 늘어나는가이다. 단순히 자본에 의해 식량이 아닌 연료나 가축의 사료 등에 증가하는 양을 떠나서 왜 기아가 심각한 곳으로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는가이다. 이는 단순히 공급망의 부실로 생각할 수 있지만 생산되는 곳과 기아 지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분산되어 제대로 지역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소위 지역 내 자체 식량 자급이 절재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급되는 식량에 의존하기에는 부족하고 마치 접속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사이트까지 접근하는데 복잡하고 긴 선로가 필요하다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분산 시스템이 결국 전체적인 인터넷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가까운 곳에서 처리할 수 있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량 문제를 단순히 전체 식량의 양의 문제가 아닌 지역 단위에서 자급(自給)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 문제와 같이 결국 기아 문제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당장의 생존의 문제가 달려 마땅히 먼 미래까지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더불어 주민들의 교육에도 힘써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좋은 핸드폰이 있어도 사용자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식량 문제의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주민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자립을 목표로 할 수 있는 의식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식량의 지속적 지원과 더불어 식량 자립 구조를 가질 수 있는 농업 기술의 조언과 주민들의 의지를 바꿀 수 있는 교육 환경도 필요할 것이다.


의 문제를 연결하면 식량을 단순히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보다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국제적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다고 해서 빈민국가를 마치 하나의 수익모델로 삼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탐욕적 그리고 약탈적 수익모델을 막기 위해서라도 수익구조와 비용구조가 분리된 일종의 국제적 차원의 공공 사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쓰기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지역 공동체 단위의 생산 소비가 이루어지는 동네 경제 [ 대량 생산의 불편함 - 동네 경제를 꿈꾸며 ] 에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산된 시스템의 장점 중 하나는 분산된 시스템 자체로 지역이 가지는 특징에 따라 지역이 필요한 경제 구조 혹은 수익 구조를 찾아낼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경제적 수요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분위기, 상황이 다른 나라, 지역과 비교했을 때 좀더 보완하거나 더 필요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접근하면 사실 기아 문제를 경험하는 나라들이 모든 상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는 기아 문제로 40% 의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상위 10% 는 호화로운 삶을 사는 나라도 존재한다. 아주 가까이는 우리나라도 이런 형태의 절대 빈곤의 구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접근할 때 어떻게 수익구조와 비용구조를 설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이 정책 결정권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생각의 중심은 단순히 인터넷 사용과 식량 문제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도록 했던 노력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서 식량 네트워크의 문제를 보다 본질적 문제에서 접근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따라서 동일한 방법으로 혹은 비슷한 유사성 analogy 로 해결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의 유사성을 통해서 인류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쉽게 지나쳐 온 부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식량문제를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닌 시간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고 이런 이유로 식량 문제의 해결은 하나의 시계열 문제로 처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는 점, 식량의 공급보다 지역 단위의 자급 시스템을 만드는데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 등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한순간에 식량문제가 뽕 하고 해결되면 좋겠지만 생소했던 인터넷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보급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식량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인터넷과 식량문제 ─ 네트워크를 바라보다

Tuesday, June 26, 2018


2016년 1월 어느 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혼자인 곳에서 갑자기 주인분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급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셨다. 그 공간은 절대적으로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들어오셨다. 안을 잠깐 살펴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무엇인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다가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와 함께 작은 종이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 온 학생입니다. 학비마련을 위해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격대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지만 카드를 받을 수 없으실 것 같아 현금을 확인해보니 지갑에는 3,000원이 있었다. 가장 작아 보이는 열쇠고리가 얼마인지 물어보니 가방을 잡고 손가락으로 어렵게 셋을 세어 알려주었다. 그래서 "뜨리? 아진 드바 뜨리?" 해서 물어보니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리고는 고르라고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수작업으로 그린 열쇠고리인듯 했다. 작은 열쇠고리에 채색은 그렇다고 해도 얼굴 모양은 조금 이상한 것들도 있었다.

열개 정도의 열쇠고리 중에서 가장 안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골랐다. 순간 내가 안 이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른다면 다른 누군가는 더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냥 그분을 도와주려고 삼천원을 쓰고 안 쓸려고 그런게 아니라 어딘가 쓸모있게 내가 써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쇠고리 인형은 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



여전히 과장된 눈썹은 삐뚤하고 다소 유머스러운 얼굴도 그대로다. 전자기기 전원 버튼에 붙어 있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흠있어 보이는 것을 먼저 가지려 한다. 가졌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예쁘고 안 예쁘고는 내 눈의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들고 예쁜 것을 고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가끔 가장 안 예쁜 것을 고르는 나를 보며 '왜 그런 것을 고르냐고' 타박하는 분들도 계신다.

세상에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 가치와 시선에 따라서 두가지 형태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 가치에 대해서 ─ 기능적 존재 vs. 근본적 존재 ] 어떤 기능을 해야만 존재의 가치가 생기는 경우와 그냥 있는 그대로 어떤 기능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가치를 가지는 경우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 잘 하는 존재로 이득이 될 때 기능적 존재를 잘 설명할 것이고 그냥 누군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하지 못해도 그냥 그대로의 자식으로의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이 근본적 존재로 설명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태어나서 오랜동안 아프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기능적 존재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런 존재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삶, 인간의 생명 안에는 그 자체로 근본적 존재 가치를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생명에는 그런 근본적 가치를 가진다.

제부터인지 잘 알 수 없다. 자본주의 capitalism 가 상식이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자본의 가치가 모든 가치의 척도와 같은 때로는 교환 가능한 가치가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는 때로는 근본적 존재 가치마저도 때로는 버릴 수 있는 가치라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어렵지만 어떤 동물의 생명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살릴 수 없음도 그렇게 잔인한 선택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어떤 동물의 생명에게는 애완용 혹은 어떤 이유로 필요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있는 생명과 그렇게 하기에는 비용이 많은 생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소설이자 영화인 오두막 (The Shack) 은 상처입은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의 자전적 상처를 통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많은 이들이 평가하지만 오두막을 읽고 나서 상처 혹은 치유에 대해 무엇이다 말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에 인간은 그렇게도 많은 평가를 내리고 무엇이 더 '좋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들이 결국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짧은 내용을 강하게 보여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매켄지가 동굴에서 여인의 모습을 한 하느님과 만나는 장면을 보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여인이 매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 중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두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딱 두 명만."

...

"또 당신의 자녀 중에서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갈 세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모습들을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가치있는 자식인지 비교하는 것은 전혀 의미도 없고 그럴수도 없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공감하게 된다. 바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소위 공부를 잘하는 돈을 잘 버는 자식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가끔 책상 위에 놓고 싶은 꽃을 위해 꽃집에 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꽃 - 라넌큘러스 - 을 몇 송이 놓고 그 꽃들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게 된다. 라넌큘러스는 참 약하다. 꽃이 화사하게 피기 전에는 알갱이 같이 작은 꽃봉오리는 장미처럼 무엇인가 화려하게 필 준비를 하기 보다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고 꽃이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면 쉽게 휘어지고 꽃대도 자주 꺾여버린다. 꽃이 다 피고 나면 꽃잎은 떨어지거나 색이 변하며 원래 색을 유지하는 시간보다 지는 시간을 더 많이 바라봐야 하고 꽃잎이 많이 떨어진 꽃은 때로는 볼품없는 대머리 독수리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도 좋다. 그래서 꺾어진 꽃대는 휴지로 부목을 대주기도 하고 떨어진 꽃잎들은 모아서 책갈피로 만들어 선물주기도 한다. 손이 많이 가고 아름다운 시간보다 초라해 보이는 시간이 많은 꽃이지만 그래도 그냥 좋다.

그래서 어디에 있게 되어도 항상 동네를 살피며 꽃집을 찾게 된다. 한국에서 꽃집은 조금 다른 느낌이 많았다. 결국 어디나 꽃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지만 그래도 꽃집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언제나처럼 라넌귤러스를 찾으면 처음에는 왜 그런 꽃을 찾을까 싶어하지만 그래도 몇송이 남은 꽃을 건네준다. 그리고 깔끔하고 많은 이들이 좋아할 대중적인 꽃집일수록 항상 정확했다. 한 송이에 얼마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내가 좋아하는 라넌큘러스는 몇송이 없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꺾여 있거나 너무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은 주지 않으려고 한다. 팔 수 없다고 하면 괜찮다고 가져가겠다고 하면 어떤 가게는 그 팔수 없다고 했던 꽃들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받는다. 어떤 가게는 반값에 그렇게 계산해서 준다. 팔 수 없는 꽃을 가져가겠다고 하니 그냥 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장사니깐 싶어 쉽게 그냥 달라고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가져오고 나면 기분이 활짝 좋거나 그렇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책상에 놓일 꽃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분은 꽃처럼 좋지는 않았다. 어느날 골목길을 지나가다 간판도 오래된 꽃집을 보았다. 잠깐 발길을 돌려 꽃집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았던 많은 화려하고 화사한 꽃집은 아니였고 그냥 정말 거의 대부분의 공간은 꽃들과 화분에 양보하고 오래된 형광등 불빛은 다소 어둡기까지 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일어나서 무엇을 찾냐고 물어오셨다. 난 역시 라넌큘러스를 찾았다. 아저씨는 다소 놀라시며 몇송이 있긴 한데 핀것도 많고 그래서 많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섯송이 정도 다양한 색으로 잡고는 간단하게 포장해주셨다. 어짜피 집에 놓을 것이니깐 포장 많이 안해주셔도 된다고 하니 그래도 가는 동안 괜찮게 줄기 끝부분만 잘 포장해주셨다. 그리고 다른 가게에서는 두송이 정도 살수 있는 가격으로 여섯송이를 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전해주신 아저씨의 얼굴이 더 신기했다. 라넌큘러스를 찾는 남자분은 처음보셨다면서 꽃이 꺾어지면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시는데 난 휴지로 꽃대를 세운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렇게 하고 책갈피도 만들어요. 라고 말하니 아저씨는 정말 화사하게 꽃처럼 웃으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에 오면 잘 모아두었다고 주신다고 하셨다.

그 이후에도 몇번 찾아 아저씨 가게에 갔다. 오늘은 세송이 뿐이라며 2,000원만 받으시기도 하고 다른 가게에서 받던 가격을 생각하면 아저씨가 손해보시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그보다 꽃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정말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구나 생각될 때가 많았다. 아저씨는 꽃을 가져가 얼마나 잘 키울지 생각하면 기분좋은 손님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손님이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아저씨는 꽃을 팔지만 정말 꽃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아지를 분양한다며 강아지를 파는 가게들을 지나갈 때마다 많은 생각들이 든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저렇게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거나 어떤 강아지가 더 인기가 많다 어떤 품종은 똑똑하다 라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나중에 인류의 생명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인간을 체외 in vitro 에서 임신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도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선택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꽃을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해도 강아지 정도는 생명이 아니라고 바라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꽃 하나 꺾어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안타가워 하는 사람들보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강아지라면 달라질 것이다. 강아지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생명을 다했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는 않아도 꽃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의 모습만 다를 뿐 다 같은 자연의 생명인데 생명의 사라짐에도 이처럼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생명의 사라짐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다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월호가 침몰한 2014년 그 해도 분명 봄은 찾아왔었다. 그 때도 벚꽃은 피었었다. 그 해 아직 개화하지 못하고 낙화한 어떤 꽃봉우리를 보았다. 예전 같다면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지나쳤지만 그 해 아직 개화도 못한 낙화를 보고 침몰하는 배안에서 사라진 생명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생명들이 겹치면서 그 꽃마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 느껴졌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꽃들도 그리 긴 시간을 견디어 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섭리 providence 일지 모른다.

많은 이들은 '사랑'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많은 조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는 것 중에 정말 사랑을 위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워지고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조건으로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 그 조건이 사라진다면 그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분히 좋아할만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좋아할 수 없어 모두가 다 떠나갈 때도 지켜주는 이가 누구인지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누구나 화려하게 아름답게 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꺾어지고 찢기고 상처난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줄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냥 버리는 이들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요할 뿐이다.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줄껀가요

Sunday, May 6, 2018


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 로 유명해진 이미지가 하나 있다.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는 국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표현되는 벤데타 가면이다. 1600년대 영국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가톨릭 탄압 정책을 펼쳤고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가이 포크스 Guy Fawkes 는 11월 5일을 기점으로 웨스트 민스터 궁전을 폭파해서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암살 계획이 미리 알려져서 화약에 점화하는 역할을 맡은 가이 포크스는 현장에서 잡혀서 극심한 고문으로 사전 공모자 등을 털어놓고 결국 사건 관련자들은 사지가 찢기는 등의 극형에 쳐해 죽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11월 5일을 화약음모사건 Gunpowder Plot 을 막은 기념으로 '가이 포크스의 날'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인물의 형상을 한 인형도 불태우고 모닥불도 불태우며 보낸다. 사실 가이 포크스는 핵심적인 주동자라기 보다는 실행자였지만 현장에서 잡히고 결국 극심한 고문으로 계획을 발설했지만 그래도 시대를 지나면서 가이 포크스는 하나의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그 이후 저항의 의미 반정부를 뜻하는 의미의 의미로 가이 포스크 가면은 사용되어 왔다. 이제는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를 검색하면 실제 모습보다는 '벤데타 가면'이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벤데타 가면이나 저항 정신 혹은 무정부주의 anarchism 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렇게 유명한 가이 포크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그렇지만 무서운 그리고 무거운 이야기 하나가 있다. 바로 암살 계획을 듣고도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형을 받은 가톨릭 신부인 헨리 가넷 Henry Garnet 에 대해 전하고자 한다. 헨리 가넷은 폭파시킬 계획을 고해성사에서 듣게 되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릴 수 없었다. 계획을 알고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렇지 않아도 맘에 안들었던 가톨릭 신부이기 때문인지 헨리 가넷은 사형당하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책을 만들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먼저 만들어진다음 사형당한 것일까?) 자신의 죄를 상세하게 적어 놓은 형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 공개된 인피책 (人皮冊) 이 헨리 가넷의 것으로 밝혀졌고 책의 표지에는 헨리 가넷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해졌다. 헨리 가넷이 미리 계획을 알고도 이를 알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고해성사 THE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 에서 알게 된 내용이였기 때문이다.

헨리 가넷의 인피책 출처: The Guardian  


Confidentiality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고해성사를 하는 살인청부업자 hitman 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는 이를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말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을 보여줄 때가 있다. 헨리 가넷도 성직자의 위치에서 암살음모를 알고 있지만 이를 왕에게 알릴 수 없었고 계획을 준비하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찾아가 설득하려고 했었다. 성직자로 지켜야 할 비밀과 암살 계획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안을 생각했던 것 같다. 종교 특히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헨리 가넷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비밀 유지가 성직자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내용인지 그리고 암살계획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까지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시민 사회 혹은 국가의 의미가 커지고 법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법과 성직자가 가지는 비밀유지 원칙은 자주 충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법정 안에서 성직작의 비밀유지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성직자가 알게 된 범죄 사실 혹은 범죄 가능성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아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범죄 사실을 인지하거나 범죄자를 특정할 수 있는 identifying a criminal 어떤 이가 이를 수사 기관에 알리지 않는다고 불고지 (不告知) 죄 가 존재하고 이또한 범죄라고 생각한다면 성직자는 분명 범죄자가 되기 쉽다. 범죄사실이나 범죄자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범죄가 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국가 중 하나는 대한민국일 것 같다. 지금 (2018년) 도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에는 이러한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공권력에 처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Confidential 은 평범하게 비밀내용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 사전에 의해서 '기밀'로 번역되고 비밀은 'secret' 로 번역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사실 문서 취급에서 보면 Confidential 이 붙은 문서보다 secret 이고 그보다 높은 문서 보안 수준은 top secret 이다. 느낌으로는 기밀이라고 하면 뭔가 빈틈없이 빠져 나가면 안되는 비밀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이 맞다면 기밀은 top secret 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사실상 confidential 은 다소 개인적인 내용 혹은 가급적 공개되지 않는 것이 좋을 내용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기업간의 거래 및 회의 내용들은 confidential 이 되는 것이고 공적 이유로 공개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secret 가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직자와 신자간의 개인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로가 (주로 성직자) 발설하지 않을 권리나 의무가 엄격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직자라는 직업을 가지는 '기능적 자아'에게는 권리처럼 주어질지 모르지만 성직자가 아닌 자연인으로는 발설한다는 자유의지까지 잘못되었다 말하기는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앞서 살펴본 성직자 / 신자를 뜻하는 priest–penitent 혹은 clergy–penitent 간에 비밀유지가 지켜지는 상태 혹은 지켜야 하는 의지를 confidentiality 라고 부른다. 동일하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환자의 상담 내용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나 광범위하게 의사가 진료 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의 병력 및 질환 상태에 대한 비밀유지를 하는 것도 동일하게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라고 말한다. 또한 법적 대리인과 의뢰인 사이도 동일하게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라고 한다. 이와 같이 찾아보면 현대 사회에는 직업상 (기능적 자아) 취득한 개인적인 정보에 대한 비밀 유지에 대한 어느정도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Confidentiality to privilege


앞서 소개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 법적 대리인 - 의뢰인간의 비밀유지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밀유지를 말할 때 confidentiality 를 쓰기 보다는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보다는 clergy–penitent privilege 라고 사용하고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는 doctor-patient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우선 privilege 란 말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권'이란 번역이 가장 먼저 나온다. 개인 혹은 일부 소수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이득을 뜻할 때 특권이란 말을 사용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특권은 그리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소수 재벌의 특권' 혹은 '권력자들의 특권'과 같이 일반 시민들이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에누리 없이 처벌을 받게 되지만 권력이나 자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경우를 보면 특권이란 분명 사라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성직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신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privilege 의 어원에 대해서 찾아본다. 개인을 뜻하는 라틴어 'privus' 와 법을 뜻하는 라틴어 -lex (-reg) 가 결합되어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 혹은 법률'이란 뜻으로 'privilegium' 이 시간이 지나 privilege 가 되었다. 어원대로 privilege 는 특별한 권한 혹은 권리라기 보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다양한 법의 내용을 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서 누린다면 그것을 특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있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대통령 직무 행정부 특권 executive privilege 을 가지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누가 누리는 특권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켜야 할 비밀인데 도대체 무엇이 특권이 되는가? 어원에서 살펴본 것처럼 특권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나 지켜야 하는 상황을 confidentiality 라고 말했지만 이는 법률적 책임이나 의무를 가지지 않는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헨리 가넷의 사례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성직자 - 신자 비밀유지를 떠나서 폭파 계획을 미리 알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이 범죄자가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확장해서 생각하면 동료 중 누군가 HIV 바이러스 양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주변에 알려서 미리 조심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서 다른 동료 누군가 바이러스 양성자가 되었다면 그 사실을 알았던 사람은 법적 책임은 아니라도 양심적 가책을 가져야 하는가?

이처럼 개인간의 비밀유지가 공적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거나 예상되는 피해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를 비밀유지를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비밀유지는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다. 특히 그런 논쟁의 중심은 대부분 법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많은 경우 비밀유지가 인정되어야 할 내용이고 이를 통해서 아무리 공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의 비밀유지를 지킬 개인적 의지에 대해서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정에서 말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그렇게 증언을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게 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역설적으로 법정에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 되어졌다. 결국 개인간의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는 법의 울타리에서 '비밀유지를 지키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Privilege against jurisprudence


법은 항상 상당 부분 허술하다. 직접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법이 완벽하다면 법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거나 '법을 이용한다'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법이 정하는 특권 혹은 예외는 법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을 부끄럽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범인을 찾는 범죄 드라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범인을 잡아 가둘 수 없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많은 경우 범죄사실은 알고 있지만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혹은 법률적 특권이나 예외 사항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나라일 수록 특권과 예외가 많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앞에 모든이들이 평등하다면 소위 '국민 법 감정'이란 오묘한 감정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리학 jurisprudence 는 법이 가지는 철학이나 원칙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하게 될 가능성을 말하는 학문이다. 좀더 어렵게 표현하면 "법의 본질과 목적, 법의 개념, 법의 객관적 가치 또는 법의 이념, 법의 존재상태 또는 법의 효력 · 타당성, 법현상 등을 일반적으로 구명하고, 다시금 법의 제정 · 해석 · 적용에 특유의 논리 또는 법적 사유(思惟)의 기본적 카테고리나 법학 방법론을 고찰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라고 나와 있다. 여전히 어렵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인간이 관찰하여 얻어낸 이론이 법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지할 수 없지만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거대 법칙 universal laws 가 존재한다면 그 법칙만 알아낸다면 물리학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느낌으로 법에도 공정하고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하고 이를 알아낸다면 법은 객관적 판단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복잡해서 상황에 따라서 해석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계기로 법의 골격이나 구조가 변화되어 왔다. 놀라운 지혜를 가진 완벽한 사람이 법이란 이렇게 작동한다라고 알려주었다면 사회 안에서 논란이나 갈등이 발생하며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줄어들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법은 그러한 해석의 영역이 더 강해지는 영역은 아닌가 의문이 들때가 많다.

"인위적인 법률과 그 가치에 대칭되는 것으로 자연히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보편적 불변적 법칙"으로 존재하는 자연법과 대비되어 복잡한 세상에 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을 실정법 positive law, ius positum 이라 부른다.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현실적인 제도로 시행되는 법"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권리를 만드는 법"이라 부른다. 앞서 설명한 많은 특권이나 예외는 실정법에서는 '새로운 권리'로 표현되며 인간 세상에서의 다양한 상황에 '조금 더 정의롭다고 추정되는 방향'으로 추진하려는 노력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많은 실정법들은 그렇게 느끼기 어렵지만 많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과정들이다. 막상 법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권리보다는 할 수 없는 제한들로 가득하지만 많은 부분은 앞서 설명한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특권 privilege 들은 법이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들이 인정할 수 있는 실정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던 것도 생각해야 한다.


Privilege under jurisdiction 


실증법은 그래도 개인의 사생활 개별 인격이 가지는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성직자, 의사 등 개인의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직업들이 나타나고 만약 성직자나 의사가 신자나 환자의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사회가 필요해서 만든 직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밀유지 혹은 특권은 단순히 사생활 보호가 아니라 직업이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성직자들이 개인의 고해성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말한다면 어떠한 신자들도 성직자를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고해성사가 가지는 종교적 의미가 아무리 성스러워도 기능할 수 없는 고장난 기계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어떤 생각에서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공 혹은 국가를 위해서 사생활이 제한받아야 하고 사생활의 내용이 국가를 위험하게 한다면 이는 비밀유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위험을 찾아야 하고 개인들이 나누는 사생활 속에서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활동, 대화, 심지어 생각까지 감시하기 위해서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에서 얻어낸 개인적인 내용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는다.

9.11

극단적 충격은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마비시킬 때가 있다. 9.11 테러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이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의 공포와 어쩌면 내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테러는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다. 테러를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막을 수 있는' 테러는 당연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을 수 있는'이란 가정은 인간을 참 어지럽게 만든다. 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알아낸 테러의 징후를 통해서 막는다면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이들의 사생활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게 쉽게 내줄 것인지 말이다. 많은 이들은 나는 테러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 항상 정의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테러를 막아줄 수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가상이지만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본다.

1. 노동조합을 설립하려고 하는 노동조합장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이다. 시위 관련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경찰에서는 체포하려 한다. 아내가 다니는 병원을 알아내고 담당의사에게 언제 진료하러 오는지 알아내고 다음에 올 때는 남편도 같이 오라고 하라고 의사에게 강요한다. 의사는 환자의 정보를 알려줄 수도 없지만 아내가 임신 중 주의 관찰해야 하는 산모라는 정보까지 수사당국에 알려준다. 
2. 모기업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가 있다. 정신적 압박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다. 기업은 내부 고발자를 미행해서 이 사람이 다니는 정신과 의사에게 접촉해서 어떤 상담 내용을 받았는지 회유하며 거액을 제시한다. 그리고 앞으로 상담 내용을 알려주면 더 많은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3.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어떤 학자가 다니는 가톨릭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정부의 정보기관 담당자가 접근해서 학자에 대해서 물어본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지에 묻지만 그 사람은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그 사람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 관계에서 알게 되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그 비밀유지를 깨는 대신 황금의 유혹이나 권력의 공포를 이용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알아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헨리 가넷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목숨을 내놓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이 '위험한 사람'이라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하면서 쉽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다. 비밀유지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은 위험한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공헌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테러를 할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권력기관의 말을 믿고 심지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사생활을 알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DHS

권력에 반하는 어떤 존재도 쉽게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권력이 주는 큰 유혹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은 신뢰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비밀유지까지도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진 사생활에서 자신이 깨버린 비밀유지의 상대방은 극심한 고통에 놓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대방이 진짜 나쁜 놈이라면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지만 진짜 나쁜 놈이 아니라 권력에 저항한 의인이라면 비밀유지를 깬 이들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Perjury against privilege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옳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찰 때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제이 애셔 Jay Asher 의 소설이자 2017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13 reasons why 를 보면 자살을 선택한 한 소녀가 자신이 왜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육성으로 남긴 내용으로 회상하며 말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여러가지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거짓증언 perjury 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건 what it happened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믿을만큼 얼마나 강하게 말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리기 위한 이야기는 얼마나 자극적인지 느끼게 된다.

13 reasons why (Netflix)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파이의 숫자보다 미국 정보기관이 찾아낸 스파이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였지만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미국 정보기관에서 의심을 받아 감시를 받다가 진짜 스파이가 된 사람도 있었고 정말 스파이였던 사람은 미국에 협조한다고 하고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을 스파이라고 지목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사생활이 감시를 받고 일상 생활에서 고통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사생활을 감시했으면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정상일텐데 '저 사람은 스파이다'라는 전제하에 감시를 하면 모든 행동들이 스파이 활동을 위한 몸짓이라고 해석해서 보고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스파이를 찾아내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명예욕에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이 잡아낸 사람들은 진짜 스파이라고 믿는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권력이 만든 거짓 증언은 그만큼 그 피해와 고통은 생각보다 크다. 1920년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그 당시에 보아도 많은 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형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결과는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이 무정부주의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들은 진범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도 사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의 범행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닌 그들이 가진 사상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살인범일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비슷하다. "누구는 빨갱이다" 라고 크게 소리지르면 자신은 빨갱이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자신이 살기 위해 쉽게 누군가를 빨갱이로 만들었다.

사코와 반제티

거짓증언 perjury 혹은 위증이란 말은 라틴어 perjurium 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false oath 란 뜻이다. 단순한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통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깨버렸다는 뜻에서 비밀유지 confidentiality 을 깨는 것과 의미가 더 통할 것 같다. 개인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비밀유지와 거짓증언을 하기도 하지만 권력과 같은 구조도 알고 싶은 정보를 위해서 거짓증언을 비밀유지를 쉽게 깰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한다. 정보기관에서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라고 말하면 환자나 신자와 같이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의 정보를 얼마나 쉽게 제공하는지 아니면 제공하지 않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How to protect privilege 


프랑스의 정치인 중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1925년 12월 23일 - 1993년 5월 1일) 우크라이나 이민 2세이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도 못했지만 프랑스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싸워왔고 16세부터 금속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해서 1992년에 부패 척결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총리에 올랐지만 다음해 5월 1일 노동절에 자살을 했다. 자살하게 된 이유는 부패 척결 정책을 펼치던 베레고부아 총리 자신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친구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했고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서 크게 떠든 내용과는 다르게 그의 자살 이후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고 자신의 돈마저도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고 월세를 내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개인적으로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때 한강공원을 매일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강공원에서 만난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도 유명한 연예인이어서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예기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서럽게 우는 모습에 그저 연예인으로 힘들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생을 마감하셨다. 사건 이후 알게 된 내용 중에는 증권가 직원이 소위 증권가 찌라시 내용을 올린 내용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증권가 직원은 고인을 얼마나 잘 아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런 내용이 아무리 공인이라도 어떤 고통이 될지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갔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가져올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쉽게 말하고 쉽게 전달한다. 성직자를 믿고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을 통해서 성직자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 아이는 어떤 성격의 아이야" 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고해성사 중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말해서 사람들이 공연하게 알게 되버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가 집에 와서 자신의 환자 이야기를 하면서 무용담 삼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랑하지만 그 안에서 환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거나 누구나 아는 공인이라면 "그 배우가 우리 병원에 왔는데 내가 맡았잖아." 하며 환자의 질환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아주 가벼운 가쉽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밀유지 내용을 깨고 있는지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며 쉽게 가쉽으로 말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야만 느끼게 되는 몇 안되는 공감이 안되는 내용이다. 비밀유지를 지킬 것이라는 믿음으로 신자나 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가 많고 반대로 믿었던 사람은 고통을 얻게 되기도 한다. 막상 확실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을 유지할 상대로 믿지 말고 어쩌면 깰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비밀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할 때 인상적인 그리고 유일한 impressive and unique 표현을 적당히 섞으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받았던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비밀유지를 깨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았다는 소송을 걸었고 정신과 의사는 자신만이 그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친구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던 성적 행위에 대한 특별한 단어를 정신과 의사에게만 이야기했다는 점으로 소송에서 이긴 적이 있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깨졌을 때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는 복잡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영화 Doubt (2008)

그래서 영화 Doubt (2008) 에서는 가쉽에 대해서 다시 모을 수 없는 찢어 흩어진 베개의 깃털을 비유해서 전달했다. [ About Gossip ]  사람에 대한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게 된다.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인데 들은 내용만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탓하고 심지어 자신은 옳은 행동을 했다고 믿을 것이다.

윌리엄 W. 영의 오두막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네? 저요? 저는 그렇지 않은데요." 그는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하였다. "나는 판단할 능력조차 가지지 않았는데요"

"정말 그게 사실일까요," 바로 대꾸하며 이제는 조금은 비꼬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이미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 이 짧은 순간에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통해 많은 판단을 해왔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심지어 얘기하지 않은 동기조차 판단해왔고 그런 당신의 판단은 항상 진실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피부색, 몸짓 뿐만 아니라 체취까지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과거와 관계에 대해서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심미적 기호를 통해 바라보며 한사람의 가치마저 판단해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보건데, 당신은 상당히 판단하는데 잘해왔음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원문]


사회 안에서 비밀유지 ─ 지키기 너무 가벼울 수 있는 비밀에 대해서

Sunday, April 1, 2018


통 유리창으로 풍경이 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파리 한마리가 들어와 윙윙거리며 자유롭게 비행하고 있다.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카페 주인이 다가와 파리가 어딘가에 앉기만을 기다리다가 잡지책으로 잡아 죽였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사라져서 좋기는 하지만 갑자기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파리는 유리창으로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유리창으로 막혀 나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당황하고 있었을까 특별히 유리창 안 실내에서 파리가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단지 어쩌면 우연히 들어온 실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파리가 유리창의 밖에 있었다면 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잡지 책에 압사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파리가 죽어야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유리창이 만들어 놓은 공간 중 파리가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할 실내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든 것은 인간이 만든 유리창이였다. 파리의 입장에서는 유리창을 인지할 수도 없고 그렇게 구별된 공간 중 자신이 원해서 선택했다기 보다는 우연한 비행의 경로로 실내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더 넓은 자연에서 더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있었던 파리에게는 유리창이라는 원하지 않는 공간의 구분으로 인해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hoto by https://www.pexels.com/@danielbendig

잡지에 눌려 죽음을 맞이한 파리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이처럼 유리창과 같은 구조로 인해서 생존에 위험을 맞이하는 경우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구조가 인간의 자유를 누릴 공간을 줄이고 심지어 생존에 큰 위험이 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졌다. 자연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인간 개인의 자유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제한된 자유에 대해서 사회는 개인들에게 얼마나 합당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구조가 계속 되어서 인간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파리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유리창이 존재하고 그 유리창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지만 그 자체가 억압하는 구조가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Glass Ceiling

전 영부인이자 전 국무장관이자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Hillary Clinton 이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나온 장면은 유리천장 glass ceiling 이 깨지는 장면이였다. 유리천장이란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된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an unofficially acknowledged barrier to advancement in a profession, especially affecting women and members of minorities.
직업 활동에서 성취를 가로막는 특히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비공식적이지만 잘 알려진 장애물 

유리천장은 말그대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성이나 민족, 종교 등 다양한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는 방해물들 특히 사회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편견들을 포함한다. 유리천장의 의미는 다양하다. 유리는 투명하기 때문에 더 좋은 위치가 보이지만 이미 기득권에 의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고 그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 위치에 오르려고 하면 유리천장 자체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보여주기는 하지만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조건과 기득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에 의해서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만 그들이 누리는 좋은 환경은 이미 대중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능력이라면 직업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 바꿀 수 없는 조건에 의해서 사람들은 더이상 성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가장 큰 범위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비교해서 동일한 교육 환경 동일 조건에서의 노동에서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임금의 차이도 결국 생활 조건에 차별을 주는 다양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물을 국가가 나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유리천장을 깨는 이미지를 통해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유리천장의 종합판과 같은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에게 패배하였다. 미국 대선 후보정도 되면 대놓고 유리천장을 깨지 말고 차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는 어려운데 신비롭게도 도널드 트럼프는 그러한 유리천장을 대놓고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는 것도 더욱 신비로운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도널드 트럼프는 유리천장을 더욱 굳건히 하여 표를 얻은 가장 최근의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유리천장의 정의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비공식적 unofficially 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이 어떻다 해도 차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회가 성숙할 수록 그런 차별이 만드는 사회적 문제가 크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차별을 만드는 유리천장과 같은 비공식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가 대부분 인정하고 때로는 법이나 문화가 만드는 구조들이 인간을 차별하는 경우는 없는지 더 생각해 본다.


Glass Wall

유리창으로 인간에게는 실내와 실외의 구별이 생기지만 파리에게는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는 우리에게는 구별이 되지만 파리에게는 실내나 실외나 자신들이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유리창이라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공간은 실내와 실외로 구별이 되고 실외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는 억지로 쫓아다니면 죽이려 하지 않지만 실내에 있는 파리는 기회가 된다면 죽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저 미물이지만 파리 사회에서 바라보면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형제 혹은 자매의 죽음일 수 있고 파리 한 개인에게는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타가운 상황이다. 한 생명의 종말이다. 그렇게 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유리창이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실내와 실외의 구별 이전에 인간이 감히 날아다닐 수 없는 넓은 공간의 자유를 가지던 파리에게 실내라는 공간을 제한하고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지 파리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그리고 더 확대해서 우리가 그런 유리창에 의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면 단순히 파리의 생명이 아닌 사회 안에서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2017년 1월에 프랑스의 한 농부는 법정에 서게 된다. 그의 죄는 프랑스 국경 안으로 들어온 난민을 도와준 죄였다. 그의 올리브 농장은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워서 난민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지중해를 건너 온 난민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주고 도와주었지만 그는 불법체류자를 도운 협의로 법정에 서야 했고 농부 세드릭 에루 Cédric Herrou 는 법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l Jazeera

"만약 사람을 돕기 위해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농부는 사람을 먹여 살린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도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이 위험을 넘어서도록 돕는 것이고, 저 국경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위험"

이라고 말했다. 국경이 그들에게 큰 위험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난민 혹은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실내에 놓인 파리와 같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출생지 그리고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난민들의 생존을 도와줄 도움조차도 법에 의해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국경이나 난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아주 초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위험한 생명을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법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법과 국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에게 유리창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인종, 성별, 국적 등이 아닐까 싶지만 파리이기 때문에 항상 죽는 것이 아니라 실내의 파리이기 때문에 더 쉽게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가 유리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유리창은 인간에게는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일종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서 파리는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로 구별되고 실내의 파리는 인간에게 해충이 되기 쉽다. 유리천창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 차별받는 장애물이라면 유리창 혹은 유리벽은 오히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지만 그 구조에 의해 차별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난민을 도와준 사람이 범죄자가 될 수 있지만 그가 정말 죄를 지었는지 물어본다면 누군가는 죄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유리창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그 죄인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그가 쓰러진 프랑스 사람을 도와줬다면 그는 의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리벽 혹은 유리창 glass wall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된다.

유리창 이론: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 동일한 존재가 상이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현상


Artificial structure

앞서 설명한 구조 structure 를 언급하면 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structure 을 떠올리게 된다. 유리창도 하나의 구조물이 된다. 그러나 유리창 이론에서 구조물이 아닌 구조라고 표현한 이유는 물리적인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구조물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사회 문화 뿐만 아니라 제도 그리고 가장 넓은 범위로 법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고 봉건시대의 농노 villein, serf 와 비교하면 당연히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표현할 때는 두가지의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자유 freedom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방해나 구속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자유 liberty 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한국어로는 모두 자유로 표현된다. 두가지 자유를 표현하는 말 중에 좋은 예는 나는 말할 자유가 없다 - I have no liberty to speak 란 표현이 있다. 말은 할 수 있는 자유 freedom 은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 혹은 피해 등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렇게 말할 자유 no liberty to speak 가 없다고 표현한다. 말을 할 수 있는 발성기관은 정상이지만 그리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지어야 하는 책임과 사회적 피해를 생각했을 때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 liberty 는 사회적 가치와 더욱 중요한 인간이 만든 모든 구조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욕을 하고 험한 막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받을 비난이나 평판이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자유 freedom 보다는 해야 할 말만 하는 자유 liberty 가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가정하기 어렵지만 어떤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는 가족이 죽은 유가족을 향해서 '시체 장사를 한다' 와 같은 막말을 하는 것이 장려된다면 그 세상에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항상 위로받지 못하고 슬픔에서 헤어나오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그런 문화가 존재할 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지만 그런 문화가 가지는 위험성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가 모든 면이 합리적이라 볼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점점 진보한다고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만든 구조란 광범위하게 그런 문화적 요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양한 제도와 법도 포함해야 한다. 제도와 법은 원칙적으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항상 그렇다고 그리고 심지어 문화와 조금 다르지만 시간과 사람의 다양성이 많이 융합된다고 해서 더 좋아지고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복잡성은 인간의 구조가 단순히 인간 사상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라 본다. 가장 대표적인 가능성은 역시 인간의 기술이다.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그 기술이 가져올 피해와 이득을 정확하게 계량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때로는 기술이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소수의 인간에게만 이득을 주고 다수의 인간에게는 피해를 줄 때도 많다. 그것은 인간이 문화적으로 인문학적 사상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술을 사용할 때 생길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 인간이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할 가치보다 기술이 가져다 주는 당장의 이득이 세상의 모습을 더 빠르게 바꾸기 때문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이들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활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핸드폰으로 생각하지 못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어 편리하고 좋아졌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집에 카메라를 두고 빈집을 지켜보거나 애완동물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편리함은 주었지만 인간은 그 기술에 비해 제대로 관리하고 보안에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면 인터넷에 연결된 카메라는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 쉽게 노출시킬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인간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몰래 보고 이를 악용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인식할 수 있지만 기술이 가지는 편리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는 자신의 음침한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을 몰래 살펴보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문화적인 구조나 인간이 가진 도덕적 규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일어나는 일이라기 보다는 대중이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기술의 구조적인 불완전성이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인간이 인터넷 카메라의 원리와 보안 원리를 이해해서 모두가 자신만의 강력한 암호화 체계와 보안이 잘되는 인터넷을 관리한다면 인터넷 카메라 기술은 많은 이들이 충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항상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이해시키고 확산되지 않고 확산되고 이해할 사람만 이해하도록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삶에서 인위적인 구조는 법과 제도 뿐만 아니라 기술도 포함을 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유리창 이론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 특히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사용할 줄 안다고 당연히 대답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악의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때가 많다. 너무 밀접하게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용자의 편리성을 강조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하는 입장에서도 똑똑한 사용자가 많아서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서비스 활동이 감시받거나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많은 이들의 글과 그림을 보는 것에 빠져 자신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많이 빠져나가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가 많고 심지어 자신의 주소록이 빠져나가거나 자신의 사적인 활동까지 수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내용이 뉴스로 나와도 순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몇시간 후에는 다시 접속하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인간의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인간이 이해하는 속도보다 빨라지면 우선 삶의 모습을 빠르게 바꾸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 그것을 악용하는 비율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술이 주는 이득을 자주 접한다. 기술이 발전해 인간은 손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로도 전자기기를 제어할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도 있고 생필품을 주문할 수도 있다고 알고 있고 그런 삶이 주는 편리함에 대해서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음성인식 기기는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감청할 수 있는 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 화려한 세상은 계속 지켜보고 있지만 유리창 안에서도 나는 실외에 있다고 믿는 파리처럼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유리창 안에서 감시받거나 자신의 삶의 반경이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버릴 수 있다.


Glassified legally

인간이 만든 구조를 생각하면서 다양한 대상을 생각할 수 있지만 우선 법과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법은 우선 영어로 law 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를 표현하는 영어 개념이 freedom 과 liberty 로 나눌 수 있는 것과 다르게 law 에는 어쩌면 상반될 수 있는 두가지의 뜻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법이다. 그 법에 대한 영어 정의는 다음과 같다.

the system of rules that a particular country or community recognizes as regulating the actions of its members and may enforce by the imposition of penalties.

즉, 국가나 공동체에서 구성원의 행동을 규제하도록 인식된 규칙의 체계 혹은 구조이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대비한 형벌을 포함한다.

그러나 두번째 law 는 한국어로 법칙이란 뜻으로

a statement of fact, deduced from observation, to the effect that a particular natural or scientific phenomenon always occurs if certain conditions are present.

관찰에 의해 추론된 사실의 정리 혹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법칙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영어로 역시 law 이고 열역학 제2법칙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과 같이 자연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의 작동 원리도 역시 law 라고 표현한다.

첫번째 법은 상당히 인위적이고 무엇보다 국가 혹은 공동체를 전제로 정의되고 행동의 자유로운 활동보다는 규제되는 것을 더 표현하고 있다. 결국 공동체에서 인식된 법이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한다면 그것이 법이 된다. 그런 이유로 동시대를 사는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에 의해서 여성의 차별이 법으로 정해진 나라도 있고 국가의 법 혹은 성문법 statement 의 내용과는 다른 관습법 customary law 이 더 존중받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보다는 제한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혹은 하면 공동체 일원으로 비난받기 쉬운 내용들이 더 많다. 그래서 법은 무엇을 적극 장려한다는 내용보다는 하면 어떤 불이익이 가해진다는 내용으로 인식되기 쉽다. 한국어로는 법과 법칙으로 그 의미를 구별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law 가 법률의 법과 자연의 법칙으로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마도 자연이란 존재가 따라야 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칙이라 볼 수 있지만 자연의 법칙은 제한하고 통제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은 어쩌면 법칙이 아니라 섭리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연의 섭리를 이용해서 그 섭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내용이 오히려 기술이 된다. 그래서 기술은 중력을 이겨내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고 지구 대기를 뚫고 우주로 나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어 낸다. 자연의 섭리로는 유전에 의한 선천적인 장애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만 이 또한 유전자 치료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도전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인간 공동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법이나 자연의 법칙도 모두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술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항상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법률을 극복하거나 이용하면 보통 편법이라고 말하고 자연의 법칙을 이겨내면 이는 기술이라 말한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는 가장 큰 약점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률도 완벽하지 않아 이를 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소수가 생길 수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당연히 따라야 할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기술조차도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크게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인간이 만드는 법은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유리창처럼 장벽이 될 수 있기도 한다.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법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싫고 법률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좋은 표현이 바로 대의명분 大義名分 이다. 영어로 조금은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종종 사용되는 표현으로 the greater good 은 대의가 되고 명분은 cause 가 된다. 좋은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의 권리 혹은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 더 큰 선 즉, 대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the greater good 를 말할 때가 많다.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해야 하는 경우보다는 일부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고 있다. 즉, 우리가 양보하고 포기하는 많은 자유들이 어떤 더 큰 선과 이유를 위해서 내용은 잘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막히고 특히 법률의 양이 많아지면 그런 경우는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법이란 그 특성상 제한 사항과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처벌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Glassified technically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는 Payback: Debt and the Shadow Side of Wealth (번역본: 돈을 다시 생각한다) 에서 과학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Paris Review

모든 과학 기술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따라서 안경, 망원경, 텔레비전, 영화, 그림은 눈의 연장이고, 라디오와 전화는 귀의 연장이며, 지팡이와 목발은 다리의 연장이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외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을 연장시킨다 표현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연장' 이라는 표현으로 신체적 물리적 능력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연장까지도 포함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과학 법칙에 따르지 않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기술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렛 애트우드의 과학 기술은 natuaral science and technology 가 아닌 technology 만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번역본에서는 과학 기술로 번역이 되었지만 원문 책은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 & 기술이 아닌 기술만 놓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종종 과학 기술이 하나의 단어처럼 표현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가지의 단어는 별도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 법칙에 따르는 현상을 알아내려는 자연과학 natural science 와 그 현상을 이용하고 극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연장 extensions 이 되는 기술은 분명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기술이 만든 다양한 유리창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 같은 다양한 기술 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기술 용어들은 우선 기술 소비자들보다는 그 기술을 이용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제품을 소비하는 매력으로 등장할 때가 많다. 여전히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의 정확한 구조와 실현 방법에 대해서 연구가 계속 되고 있지만 가전제품 뿐만 아니라 주식거래와 같이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구현되지도 않은 인공지능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광고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실현되지 않는 기술이라도 개념만 존재한다면 인간의 마음에서는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떤 기술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삶은 획기적으로 바뀌고 그 바뀐 삶은 항상 행복할 수 있고 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희망이다. 플라스틱이 발명된 시절에도 비싼 재료를 대체할 수 있는 혁명적인 재료라고 믿었고 플라스틱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 믿었지만 지금 플라스틱이 인간에 이득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해가 더 많은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조차도 더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다. 결국 플라스틱이 가져다 준 편리성과 경제성은 인간을 한순간에 매혹시켰지만 플라스틱이 가져오는 환경 문제와 그 환경 문제가 다시 인간 사회에 어떻게 재앙으로 돌아오는지는 여전히 관찰 중이다.


플라스틱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많은 기술들도 그런 거대한 희망의 크기 때문에 기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천재보다 자신이 연구하는 기술이 가져다 줄 부작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현명한 이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기술은 항상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기술은 문제점을 걱정하며 더디게 진행되기 보다는 이념처럼 종교처럼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무래도 핵폭탄 개발을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많은 과학자들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 과학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였고 물리학, 화학에서 가장 최고의 과학자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과학적 업적 예를 들어 원자핵의 구조나 원리 등을 알아내는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를 무기로 만든 기술적 업적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고 핵 실험을 하는 단계에서 이를 참관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만든 엄청난 기술의 결과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살상력보다는 이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더 큰 대의명분에 휩싸여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은 아주 소수의 과학자도 있었지만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기술의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술은 항상 피해자를 만드는가?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그렇다고 마음으로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곧 이어 기술이 만들어 주는 많은 혜택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은 인간 사회가 원한다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법으로 막을 수 있지만 기술이 주는 다양한 달콤함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날 정부가 핸드폰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 다음달부터는 전면적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공동체가 순순히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들어와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을 더 길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마가렛 애트우드의 표현처럼 이미 연장된 extended 인간의 몸과 마음은 쉽게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기술은 완전하게 비가역적 absolutely irreversible 이지 않지만 가역하기에는 너무 완전한 irreversiblely absolute 대상이라 본다. 그리고 되돌리기 어려운 많은 기술의 결과들은 그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생산품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부족하다면 핸드폰을 쓰지 않아 통신 요금을 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통신 요금은 하나의 식사를 위한 비용만큼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미 기술에 의해 연장된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만들어 낸 영역까지도 고려하는 현대 사회에 맞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돈없어 교통요금을 낼 수 없고 통신요금을 낼 수 없는 취약 계층들은 그대로 돈이 없으니 당연히 움직이지 말고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쓸 수 있는 자 / 쓸 수 없는 자 로 구별되어 기술의 사용할 수 없는 소외계층이 아닌 제외계층이 될 것이다. 한 개인이 해결 할 수 없는 기술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자본이 기술의 사용 가능성을 만드는 거의 유일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기술을 떠나 현대 사회의 자본 의존성 그리고 기술 사용에 필요한 비용이 증가하면 기술 자체가 아무리 선하고 인간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Colored or Painted glass 

성당의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를 볼 때 교회 밖은 지옥같지만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해서 멋진 성인과 아름다운 교회의 역사만 바라보라는 뜻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교회 밖 세상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고 억울한 일들이 가득한데 교회 안에서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보면서 세상의 모습을 잠시 잊으라는 배려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처럼 세상 밖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유리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삶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어쩌면 보면 싫어할 내용은 모두 다 제거하고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것만 보여주는 그런 유리창 말이다.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의 연장'이 된 텔레비전 혹은 언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병에 걸린 주인공도 극적으로 해외 유명 대학의 저명한 의사가 갑자기 난데없이 찾아와서 고쳐주기도 하고 하루 삶이 고단한 주인공의 앞에 갑자기 자신의 미모에 홀딱 반해버린 재벌집 자식이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우연히 만난 많은 은인들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이야기를 그저 현실성 없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란 허구지만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드라마는 차라리 환타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리창 모두가 스테인드 글라스라면 정말 세상은 아름다울까 아니면 현실은 무시하고 내 삶만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의 모든 아픈 현실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대부분 개인의 욕망을 자유롭게 채우면 거의 대부분 공동체의 범죄자가 되기 쉽다. 최소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피해자들의 고통 그들의 신음소리를 무시하고 살면 어느정도는 편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자기 먹을만큼 살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 된다.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저』 에서 '성안의 사람들'이라 표현된 소위 대기업에 직장을 가질 수 있거나 이미 일정 부를 대물림 받을 수 있어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스테인드 글라스에 둘러쌓여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행복할 것이다. 언론이 다양해지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언론이나 미디어를 소비하는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 현실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내용 contents 에 더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다양성을 대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다고 해서 무조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민중을 갇히게 하려 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찾기 때문이다. [ 참고: 거칠어 지는 언론 - 미디어의 그레샴 법칙 ]

한국 사회 특히 정치에서는 '색깔론' 이란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상대방을 정치적 적으로 간주하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대상으로 단정지어 말한다. 그래서 색깔론으로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짧고 명료해야 한다. "김아무개는 빨갱이다." 라고 말해야지 효과적이지 "김아무개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상을 연상시키는 ..."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색깔론은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고 심하게 부정적인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공격을 받은 점잖은 정치인은 반박한다. "그런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지 마세요" 그러나 이 표현은 결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색깔론 공격을 하는 사람이 색안경을 썼다면 세상사람들이 색깔있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그래서 효과적인 색깔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색안경을 쓴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격하는 이와 같은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다수가 색안경을 끼고 있다면 그 색안경을 벗을 수 있도록 해주거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을 깨야 한다. 농담같지만 우리 사회에 가득한 수많은 색 유리창(안경)을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깨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요건으로 포르투나 fortuna, 비루트 virtu, 네체시타 necessita 을 강조했다. 포르투나는 운 혹은 운명이고 비루트는 덕 virtune 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virtune 이란 말 조차도 어원은 남성을 뜻하는 vir 에서 나왔고 힘이란 뜻이 더 강조된다. 즉, 운명에 의해 결정된 인물이 힘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고 네체시타는 시대가 필요한 정신, 혹은 시대에 적합한 행동 그리고 요즘은 시대정신 zeitgeist 을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올바른 도덕적인 군주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내용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면 시대정신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라기 보다는 소수의 욕망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힘과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경우 공동체는 거대한 방향성을 가질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다양한 색 유리창을 통해서 사람들이 봐야하는 다양성의 색이 아닌 지도자가 강조하는 하나의 색 혹은 소수의 색만으로 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색 유리창 안에서 갇혀 살아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무지개 색에 대한 인식도 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나중에 무지개색을 보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부정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힘을 가진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정확한 결론을 낼 때는 우리가 색 유리창에 갇혀 있도록 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예전에는 합리적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성스러운 군주를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지금 시대는 다양성의 목소리와 다양한 색의 조화를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들이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경제를 살릴 수 [ 참고: 사람들은 조금씩 병들고 경제는 살아나고... ] 색안경 속에서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경험도 있다.


당장 앞에 보이는 모습이 화려하고 마음에 든다고 해도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리창이 존재할 때 우리의 삶은 왜곡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잘못되어 그 잘못된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되어 모니터에 보이는 심지어 VR 헤드기어에 보이는 모습들이 사실같다고 해도 정확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리창이 투명하게 현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한번쯤은 내 앞의 유리창이 어쩌면 색 유리창이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유리창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유리창 안 실내가 분명 실외보다 안전할 수 있지만 가끔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직접 가볼 필요도 있다.


Build or Break glass 

유리창이 만든 실내와 실외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실내의 파리의 운명으로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운명처럼 인간 사회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들에 의해서 인간 스스로 파괴되거나 인간의 권리조차 무시당하는 경우도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만드는 장애물 같은 구조들을 만들어 내는 것 중에 법이나 기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구조같은 유리창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꼭 깨야 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다양한 구조들은 처음부터 '인간을 파괴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두고 만들 수 없다. 그런 경우 공동체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고 심지어 실체적으로 파괴와 억압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조차도 항상 권력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색안경을 쓰게 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인간을 위해 잘 작동하는 구조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부작용으로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다. 역사에서 권력이 만든 색안경을 스스로 벗어내고 깨는 작용은 일종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 심어놓은 유리창으로 구별해서 적과 아군을 정하고 적은 억압하고 아군은 유혹하는 과정을 과감하게 벗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 억압을 당하는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색안경을 벗어내는 과정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혁명의 시작은 누군가의 큰 희생이 알려지면서 붉은 색안경조차도 피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색안경을 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과정이 혁명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반면 완벽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충분히 필요하고 아무런 문제조차 없는 것이라도 종종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초기의 선한 목적과는 상관없이 권력을 가진 주체가 바뀌면서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경찰저지선 (폴리스라인) 을 볼 수 있다. 경찰저지선을 정하고 운영하는 것은 경찰의 몫이지만 시위조차 할 수 없도록 경찰저지선을 만들거나 경찰차로 도로 통행에 방해가 되는 정도로 과도하게 만들어 놓고 경찰저지선을 어기는 사람들은 무관용 원칙에 의해 죄인이 된다면 그때 법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과 권위는 정의를 구현하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가 흘러가야할 흐름을 막아버리는 위협적이고 조직적인 댐이 되어버린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29~1968) [원문 보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은 인간의 보호를 위해 만든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때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유리창을 과감하게 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리창 안의 실내가 항상 안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실외로 나갈 수 있는 흐름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라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규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규제가 인간을 억압할 수 있는 구조라면 규제철폐해야 하지만 규제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실내 실외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가 될지 모른다. 자연상태란 자연 법칙이 따르는 상태가 아니다. 이미 사회 안에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는 그리고 그 공동체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 (힘) 과 자본 (돈) 이 지배되는 세상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으로 경쟁해서 자신의 생업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밀려 살아남지 못하게 될지 모르고 권력에 의해서 불공정한 거래보다는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될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실내에 놓인 파리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유리창은 실외의 파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파리 죽음을 당할 가능성을 낮추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즉, 인간의 불공정하고 부도덕적인 모습이 만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법과 규제는 필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공정거래법이 있다.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를 통해서 재벌 자식들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자식들이 아닌) 은 최소한의 자본으로 엄청난 주식을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기업을 만들고 기업의 일감을 대기업에서 몰아주어 이익을 극대화해서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다. 만약 규제가 없다면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재벌일가가 이런 획기적인 방법을 하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재벌들은 이런 식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노동의 대가를 독식하게 되고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이익을 얻는 불로소득 unearned income 을 가져가게 된다. 재벌은 부를 얻기 위해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인적인 양심 혹은 도덕적인 가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이 퍼지기 전에 유리창 안에 가둬놔야 한다. 파리를 보면 미친듯이 잡아 죽이는 사람이 실내에 있는데 실외에 있는 파리들이 들어가 죽지 않도록 유리창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의 규제를 설정하는 과정을 단순히 시대의 필요성 (네체시타) 에 의존해서 설정하거나 해제하기 보다는 법이나 규제가 유리창처럼 존재할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압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만든 수많은 구조들은 모두 유리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유리창의 비유로 계속 설명을 한다면

1. 유리창이 존재할 때 얻는 이득과 손해를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참여자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 특정 치료제가 일부 환자들에게는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국민의료보험제도에 의해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치료제가 특정 약이 아닌 원래 제약회사가 신청한 임상 효과가 일정 수준이 아니라는 이유일 때가 있다. 심지어 보험이 되지 않지만 환자들이 비싼 약값을 감당하서라도 쓰겠다고 하지만 약의 처방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부의 행정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그 규제에 의해서 피해를 받거나 이익을 얻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소리는 듣지 않고 소위 탁상공론으로 수많은 지식의 색안경을 쓴 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이해당사자의 생명권에 관련된다면 이는 의무적으로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2. 오염된 유리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적 방법론을 만든다.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등장한 탈진실 post truth 시대에서 가장 큰 저항은 역시 사실확인 fact check 이다. 사실이 무엇이다 알린다 해도 이미 색안경을 쓰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확인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리천장이라는 편견의 벽에 갇히고 색유리창에 갇히게 될 때 많은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해자처럼 비난받게 되고 최근의 소위 미투운동 #metoo 의 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권력과 자본으로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것을 지금 목격하고 있다.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색안경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단순하게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가해자혹은 원인제공자로 만들기 전에 오염된 유리창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들이 만들어 질 필요를 느낀다.

3. 필요하다면 깰 수 있어야 한다. 유리창이 오염되어 닦아 낼 수 있어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보호막이 되어 공동체에 이로운 구조가 될 수 있지만 너무 오염되어 더이상 유리창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외로 나가고 싶은 이들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면 그때는 유리창을 깰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말한 시대정신 네체시타란 단순히 소수 지성인의 선각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다양한 색을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생각으로 모으는 과정이라고 본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걸리고 또 당연히 오염되기 쉽다. 시대가 변하고 유리창은 점점 오염되는데 그 유리창을 그대로 놔둔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유리창을 깰 수 있어야 한다.


Glassy conclusion 

참혹한(?) 압사를 당한 파리를 보고 본 글을 생각한지는 거의 3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건강상의 문제와 여러가지로 블로그를 이어가지 못하는 동안에도 소위 시대정신도 많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색안경 속에서 묻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색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도 하나씩의 색안경을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조금은 맥이 없는 glassy 결론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혁명은 유리창에 생긴 작은 균열 crack 이 유리창 전체를 깰 수 있듯이 작은 노력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 결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몰랐던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 혁명들 속에서도 유명한 이들의 노력보다 수많은 민중들이 작게는 자신의 편한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행동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믿게 된다.

파리의 죽음을 목격한 유리창을 생각하게 한 4.19 혁명 민주묘지 근처 한 카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름의 유리창이 필요한지 생각하다 읽게 된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 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유리창 이론 ─ 구조의 억압과 보호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