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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8, 2013

골디락스 (Goldilocks) 는 원래 금발의 처녀란 뜻이다. 그러나 골디락스는 잘 알고 있는 동화 내용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골디락스와 세마리 곰」 이야기로 금발의 소녀가 곰이 사는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곰들은 집에 없었고 탁자에 있는 음식을 보고 첫번째 음식은 너무 뜨겁고 두번째 음식은 너무 식어버리고 세번째 음식은 온도도 입맛도 딱 맞아 음식을 다 먹어 버렸다. (너무 짜고, 너무 싱겁고 적당한 경우로 바꾼 이야기도 있다.)  거실의 의자에 앉아 보니 첫번째 의자는 너무 크고, 두번째 의자는 너무 푹신하고, 세번째 의자가 가장 자신에게 적당했지만 의자를 앉아 놀다가 부셔버리고, 다음으로 침실에 가서 첫번째 침대는 너무 크고, 두번째 침대는 너무 푹신하고 세번째 침대가 가장 적당해 결국 세번째 침대에서 자다가 곰들에게 들킨 이야기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골디락스와 세마리 곰 이야기는 엄마 말도 안 듣는 철없는 딸 하나가 겁도 없이 숲으로 들어가서 곰들이 사는 집에 무단 침입하는 것도 모잘라 음식까지 함부로 먹어버리고 기물도 파손하고 그리고 침대에서 편하게 자게 된 이야기이다. 이 과정에서 골디락스 기호에 맞는 세번째 곰 (새끼 곰)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무엇일까? 우선은 골디락스같은 딸을 기르면 항상 불안하게 지내야 한다는 점이 있다. 최대의 피해자인 새끼 곰의 입장에서 보면 적당한 조건에 맞는 새끼 곰은 항상 모든 재산이 '아작'나고 말았다. 결국 대중적 인기가 있는 조건의 상품은 많은 경쟁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골디락스에 대한 이야기... 

골디락스는 이후 많은 비유의 대명사로 많은 분야에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된 예는 바로 행성의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조건 (habitable zone) 을 생각할 때, 금성, 지구, 화성이 행성의 크기와 조건은 유사하지만 태양으로부터의 거리가 다소 가까우면 금성처럼 높은 온도의 대기 조건으로 생명체가 살기 힘들어지고, 태양으로부터 조금 멀어지면 화성처럼 대기가 조성되기 힘든 조건이 되어 결국 대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생물학적, 생물체가 살아갈 수 있는 대기, 환경 조건이 어긋나게 되고 지구가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어 지구가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의 골디락스 조건에 맞는다는 이야기이다. 즉, 어떤 치우치거나 극대화되는 조건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균형잡힌 평형 상태'를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골디락스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조건은 결과론적 결과란 점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조건과 우리의 생물학적 특징, 인간을 비롯한 생물체가 살 수 있는 조건을 알고 있는 결론에서 지구가 최적의 조건이라는 점, 골디락스 조건이라는 것은 알고 있고 이를 통해서 외계 생명체도 우리와 같은 생리학적 원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에 찾고 있고 있는 것이다. 즉, 외계의 다른 생명체를 찾는 방법은 생명체는 모두 지구의 생명체와 동일한 생명 현상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탐색하지만 이 사실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어떤 생명체는 질소로 호흡하고 (가능할까?)  아르곤 가스가 필수 원소이고 심지어 적당량의 방사능이 존재해야지만 살아갈 수 있는 생명 현상을 보인다고 하면 이 조건에 맞는 새로운 골디락스 지역 (Goldilocks Zone)을 찾을 수 있는가이다. 즉, 우리의 개념을 뛰어 넘는 조건들이 열거가 될 때 이를 만족하는 지구 밖 행성을 찾는 것 (어쩌면 외계 생명체는 행성이 아니라 항성 (별과 같이 직접 빛을 내는) 의 우리가 보기에 무시무시한 핵융합 반응 속에서도 살 수 있는지 모른다.) 이 가능한가이다. 조건에 맞는 행성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조건이 또 우리가 모르는 필수적인 생리현상과 연결이 되어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어떤 조건에 맞는 골디락스 조건을 찾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긴 내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지구라는 지역이 골디락스 구역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이 참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간이 열거한 조건, 예를 들어 항성 (태양) 과의 거리, 행성의 크기, 대기 구성 등을 찾았다고 해도 지구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조금 다른 어떤 조건도 인간 생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즉,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조건보다 우리가 열거하지 못하는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받아들인다면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구와 같은 골디락스 조건을 맞는 행성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즉, 골디락스는 이미 현상이 일어났다는 ━"happened" 사실이 존재하고 그 사실을 연역적으로 어떤 조건이 있는지 탐색하는 과정이다. 심지어 우리의 그 연역적 추리가 맞는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추리가 조건이 되는 것이다.

골디락스 용어가 사용된 다른 분야가 경제학이다. 경제학에서 골디락스란 1990년대 후반, 경제성장률은 약 4% 정도로 적정한 고성장을 이룩하면서도 낮은 실업률과 낮은 물가성장률을 기록하는 경제 현상을 두고 골디락스 경제 (Goldilocks economy) 라고 부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성장률이 올라가면 물가상승률도 올라가지만 경제적 생산 참여자들이 원하는 모든 방향이 적당하게 균형을 맞춰 적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해석이 있지만 그 중 1990년대의 IT 기술를 비롯한 새로운 생산 형태의 도입으로 생산 효율성이 높아져서 생산력이 높아졌지만 가격 요인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점도 하나의 해석이 되고 있다. 정부 혹은 경제 정책 기관이 볼 때 서로 몇개의 경제 지표들이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상태를 두고 골디락스 경제라고 부른다.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성장 과정에서 제조업 생산의 수요가 전세계적으로 커져서 경제 고용률이 높아지는 현상에서도 골디락스 경제라고 불렀다.


그러나 경제 현상을 주요 경제 지표를 통해서 평가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은 많은 경제 현상들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골디락스 경제라는 이름으로 모순된 경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원인이 존재하는 경제 활동 영역에서 몇가지 지표를 통해 균형잡힌 성장점을 찾는다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 되어버린다. 즉,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골디락스는 이미 '만들어진 결과론적 해석'이 강하다. 그 결과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가능하지만 인간의 인지력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강한 의지에 보아야 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지구가 생명체가 생존 가능하다는 결과론적 사실에 대해서 우주행성학자들은 생명체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항성과 행성의 거리이다라고 한다면 다른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의 탐구에 있어 거리라는 요소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 현상에 골디락스 경제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가 원하는 몇가지 경제 지표들은 만족할지 모르지만 관심있는 경제 지표에 나타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동의 생산력은 높아질 수 있지만 실제 노동자의 고용률이나 노동자의 노동 생산환경,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정성을 높아질 수 있다.  거시적인 경제의 규모는 커지지만 실제 노동자 삶의 질은 점점 하향 평준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 산업 생산 규모는 줄어들지만 금융 자본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실제 성장은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물 생산의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는 순간 해외의 충격에 쉽게 무너지는 부분도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농업, 축산물의 생산의 국내 비율이 줄어들게 되면 당장 경제가 좋아 보일때는 문제가 없지만 금방 생산하기 힘든 1차 생산품의 경우 해외 수입에 의존 비율이 높아지게 되고 그 이후 환율이나 해외의 상황에 따라 크게 충격이 전해지는 현상을 예상할 수 있다.

골디락스 경제의 환상은 일부 경제학자들에게 막연한 희망을 주게 된다. 한때 그런 적이 있기 때문에 또 다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개념에 존재하지 않는 외계 생명체의 모든 생리학적 조건과 생존 조건에 대한 지식을 모두 알아도 그것에 맞는 골디락스 조건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만약 이런 작업이 가능하다면 현 상황에서 골디락스 경제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적당한 범위'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적절한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물어보면 항상 대답하기 힘들어 한다.

기회에 대한 이야기...

일반적으로 '기회(opportunity)'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느낌은 어떤가? 기회는 자신에게 유리한 무엇인가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시기적, 공간적 적절한 타이밍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는 잡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회'라는 단어에 가지는 느낌이다. 정성적 느낌은 이정도라면 정량적 느낌은 어떤가? 우리가 어떤 기회를 잡았다고 말할 때는 대부분 큰 돈을 벌거나 자본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가 많다. 아무리 종교 신학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사건'이 부활하실 수 있는 '기회'라고 말 할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못박혀 십자가에 죽으시는 분에게 '기회 잡으셨네!' 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기회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특별히 대중적인 느낌은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적 기회로 통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아무리 유명해지고 명예로운 자리에 오르게 되어도 그 명예가 자본의 증가와 연결이 되지 않으면 특별히 그것을 기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현대 사회에서 '기회'란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란 골디락스를 적용하여 적당한 자본을 얻는 것인가? 이 명제에 대해서 동의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란 가능한 큰돈, 많은 돈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목표는 골디락스가 전해주는 '균형잡힌 조건'은 소용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반대로 위험은 가능한 줄이기 바란다. 위험(risk) 는 가능한 가지고 있지 않고 권력과 힘에 의해서 자신들보다 구조적으로 하위인 집단에 넘기는 현상은 자본주의의 현명함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은행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의 위험은 투자자들과 은행이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투자자에게 돌아가서 투자자들은 자신의 원금을 다 날려도 제대로 찾지 못하지만 은행이 개인에게 투자하는 것 (을 자본주의는 투자라 부르지 않고 대출이라 부른다) 은 은행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받아내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은행이 기업에 대출해주고 상환 받지 못한 경우는 또 어떻게 되는가. 규모의 문제로 기업의 부실 채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위험 요소이다. 골디락스가 경제에 전해주는 하나의 교훈은 골디락스는 경제에서도 균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탐욕에 의해서 기업이 모두 기회만 찾고, 위험은 버릴려고 한다면 사실상 사라지지 않는 그 모든 위험을 떠 넘겨 받아야 하는 경제 추제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지구의 위치가 목성정도 되어도 인간이 생존해야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억지일 것이다. 지구는 지구가 놓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 대한 균형잡힌 조건을 갖춘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의 자본 투자에는 항상 위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위험 요소를 자신이 아닌 다른 경제 주체에 넘기는 방법은 책임은 지우고 권한만 높이려는 탐욕적 자본주의의 가장 큰 표본이다. 이런 이유로 파생상품이 만들어졌고 결국 그 파생상품의 피해는 은행의 복잡한 투자 공식 (formula) 를 이해하지 못하고 금융 기관만 믿었던 일반 투자자들, 심지어 투자도 하지 않았지만 금융 채무자였던 많은 서민들에게 그 위험이 전달되었다. 결국 우리가 기회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생각할 수 있던 자본은 무조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 즉, 자본적 기회를 최대로 잡아보자 는 일반적인 생각들의 합은 결국 위험의 강도에 따라서 점점 죽어가는 경제 주체들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골디락스 조건을 조금 벗어나 지구가 태양에 아주 조금 가까워졌다고 해서 당장 인류가 한꺼번에 멸망할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태양에 아주 조금 가까워진 이유로 변화되는 자연계의 현상이 위험이 되어서 이 위험에 취약한 순서대로 생존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도 위험에 덜 취약한 (위험에 대해서 대처할 충분한 자원 혹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 더 생존할 것이다. 만약 조금 더 태양에 가까워져 전 인류가 멸망해 버린다면 그 순간 지구라는 큰 실험실에서 골디락스 조건을 찾아낸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생존을 결과로 골디락스 조건을 찾는 하나의 거대한 실험 대상자들이다.

기회(opportunity) 의 형용사는 opportune 이다. 이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조금한 엉뚱한 느낌이 다가온다. 그 뜻은 '적당한', '적절한' 이란 뜻이다. 앞서 기회란 단어가 주는 최대의 효율과 이득을 향한 막연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했던 최대의 효율과 이득은 자본이 주는 인간의 탐욕만을 보여주는 기회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많다. 기회는 오히려 '골디락스'와 같은 것이다.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크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내가 쓸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적당한, 적절한 조건에 맞는 시간, 공간, 자원을 찾는 것이 바로 기회란 점이다.

인생에 기회가 세번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말에 대해서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기회를 몇번 찾아오지 않는 뭔가 특별하고 시간의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세번정도가 적당할 지 모른다. 그러나 기회란 이미 존재하는 시간, 공간, 자원의 적절한 조건을 찾는 과정이다. 김연아 선수의 트리플 악셀이 뛰어나고 멋지다고 해서 나에게도 그 트리플 악셀이 기회가 될거라고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맞는,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만의 골디락스를 찾는 것은 중요하다. 일단 그렇게 찾은 골디락스는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지속적인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골디락스 조건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과정이 된다. 앞서 설명한대로 골디락스는 결과론적 해석이다. 일단 어떤 결과가 일어나고 그 결과에 대한 우리들의 해석이 골디락스인지 아닌지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에게 맞는 골디락스 조건을 찾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경험과 많은 내용을 개인의 것으로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조건의 시도를 통해 개인에게 맞는 골디락스 조건을 찾게 되는 것이다. 마치 아빠 곰의 음식을 먹어 봐야 아기 곰의 음식이 더 맛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골디락스 동화에서 우리가 주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우리에게 맞지 않아 보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경험도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인생에는 세번의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는 인생은 세번정도 나에게 적절한, 적당한 조건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자신에게 적당한 시간, 공간, 자원을 세번정도 찾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골디락스가 자신에게 적당한 조건을 찾기 위해 세번의 시도를 했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무 현명하기 때문에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고 머리로 판단하여 나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골디락스 조건일 수 도 있는 경험을 포기하고 결국 더욱 더 자신의 기회를 만나기 힘든 것이다. 적당한 조건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탐욕의 크기로 너무 태양에 가까이 가버리면 인간은 지구도 금성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자신의 두려움의 양이 커서 너무 태양에서 멀어지면 인간은 지구도 화성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면 인간은 항상 기회를 가질 것이다.


기회 (opportunity) 는 어느 순간 번쩍 나타나는 일시적 사건 (discrete event) 가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는 일종의 연속체 (continuum) 이다.

골디락스와 세마리 곰 - 동화 다시보기

Saturday, May 25, 2013

인간의 어리석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우화를 통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짧은 생각들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이솝우화 (Aesop's Fables) 혹은 아이소피카(Aesopica) 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그 기원과 정작 이솝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원 저작자는 고대 그리스의 노예였던 아이소포스(Αἴσωπος, Aesop)이 지은 우화들의 모음을 이야기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토끼와 거북이부터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비롯해 양치기 소녀와 늑대도 이솝의 우화이다.


우화는 사람이 아닌 동물과 같은 대상을 통해서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구조를 가진 짧은 이야기로 이야기는 짧기 때문에 전달되기 편하고 내용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직접적인 교훈을 주지 않아도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는지 정확하게 전달되는 특징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들었던 이솝우화의 특징은 간단한 상황 설명과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이솝우화 중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 이솝우화의 한 부분이지만 시대의 배경과 전해지는 상황에 따라서 이야기의 내용은 배경은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노예였던 아이소피카의 원 내용과 조금은 다르게 가끔 이야기의 배경은 프랑스의 농부, 한적한 시골 마을이 되기도 하지만 원 이야기의 내용은 헤르메스 신에게 총애를 받아 황금알을 하루에 하나씩 낳는 거위를 선물 받은 그리스 배경의 농부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배경이든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연히 거위를 얻게 되었는데 (혹은 주변 농부의 거위를 관찰하다가) 하루에 하나씩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의구심은 많았지만 매일 관찰하며 낳는 황금알이 진짜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큰 행운을 얻은 것이라 기뻐했지만 농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매일 황금알을 낳는다면 거위 배속에는 수많은 황금알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거위를 죽여 배를 갈랐지만 결국 배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결국 매일 얻을 수 있었던 황금알 마저도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나친 인간의 욕심은 찾아온 행운 마저도 파괴할 수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fortune; 재산) 에 감사하며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아주 간단하고 명확한 교훈을 준다. 추가적으로 황금알에 너무 집중해서 황금알이 만들어 지는 원리와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단편적인 방식으로 세상을 보았던 농부의 무지함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엉뚱한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교훈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구조를 현대 자본주의에 적용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욕심은 어디에서 시작하나 

인간의 욕심은 어디에서 시작하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만난 농부는 어느 순간 더 많은 황금알이 거위 배속에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인간의 욕심은 분명 합리적인 사고보다는 욕심에 빠져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한다. 조금만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농부는 자신이 배를 갈랐을 때, 가르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수입에 대해서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경제적인 의미로 살펴본다면, 거위는 자신에게 주기적으로 (매일) 황금알을 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입원이다. 그리고 고정적 수입을 제공해준다. 만약 농부가 배를 갈라 많은 양의 황금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해도 그 양은 한정되고 고정적 수입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아마도 농부는 당장 큰 유동자산 (목돈) 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생산의 주체가 바로 거위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 농부는 욕심이 생겼을까? 황금알 정도면 어떤 시대 상황이라도 상당히 안정적 생활을 보장할 수 있었는데 왜 과욕을 부렸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황금이라는 재물을 보았기 때문에 더 욕심이 커진 것인지, 아니면 농부가 원래 욕심 가득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처럼 욕심의 시작은 인간을 생각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거의 중요한 생산 주체였던 거위를 죽이게 되어 더이상 생산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욕심은 당장의 재물과 명예 등과 같이 자신을 꾸며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지속적 생산 주체가 될 수 있는 근본마저도 파괴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마는 것이다.

단순히 이런 욕심의 결과가 아이들에게 욕심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한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일까? 아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이 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욕심은 점점 복잡하고 인지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교묘하게 변화하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더 많은 탐욕을 통해서 수많은 거위를 죽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욕심은 파괴와 폭력을 쉽게 만든다 

[ 파괴와 폭력에 대해서 - 세상을 보는 방법 ] 을 통해서 이미 파괴와 폭력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파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를 제거하는 행동
폭력은 존재의 대상을 목적이 아닌 수단(기능)으로 다루는 행위


라고 이야기했다. 농부에게 거위는 자신의 문제 (경제적 욕심, 경제적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위를 죽였지만 문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거위가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농부는 이 또한 멍청한, 다시 말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조차 하지 못할 폭력을 저지른 것이다. 그 결과 거위는 파괴되었다. 이처럼 욕심, 인간의 욕망은 어리석은 폭력을 만들어 낸다. 결국 자신의 문제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최면 걸리듯 행동하고 그렇게 파괴의 결과만 만들어내는 최악의 경우를 쉽게 만들어 낸다. 욕심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욕심의 결과는 상대적으로 알기 쉽다. 인간의 욕심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만날 때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파괴를 만들 가능성만 높아진다.

갑-을 관계의 자본주의 

소위 '갑질(갑의 횡포)'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원래 갑(甲) / 을(乙) 이란 계약서 등의 문서 상 구별을 위해서 순서를 나타내는 것인데 어느새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집단 혹은 개인이 갑(甲) 그리고 그 주도권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대상이 차례로 을(乙) / 병(丙) / 정(丁) 으로 구별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런 계약 관계 상에서의 불공정 , 불평등에 대해서는 호소되었지만, 소수의 외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가 모 유업의 대리점 관리자와 대리점 주의 녹음된 전화 통화 내용이 공개되며 거의 열풍과 같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불매운동과 같은 성난 소비자들의 반응도 나타났지만 한달이 조금 지난 지금 시점에서 다시 세상 속으로 묻혀 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느낌이다.

중심이 되는 문제는 바로 본사에서 각 대리점으로 밀어내는 물량, 즉 대리점은 경제 원리에 의하면 대리점이 관리하는 지역 주민들의 수요에 따라서 제품을 주문하고 그에 맞춰 본사 / 공장은 제품을 조달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생산된 제품을 무조건 떠 밀어 대리점에서 할당량을 다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수요도 없는 물건이지만 본사 / 공장에서 보낸 물건들을 떠 맡아야 하고 만약 수요가 없어 팔리지 않은 물건도 결국 대리점이 그 손해를 떠 맡아야 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결국 본사 입장에서는 대리점에 밀어 낸 물량은 모두 수입이 되지만 대리점에서 판매를 하지 못하면 대리점만 손해를 보는 구조를 가지게 된다. 이런 구조는 유제품 유통 업체만의 문제는 아니다. 주류, 통신 등 고객들 가까이 접근해 영업해야 하는 유통 구조를 가지는 거의 대부분의 산업에서 할당과 밀어내기 식의 영업을 통해서 결국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손실을 통해서 본사의 경제적 이익은 보장해왔던 것이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생각해보자. 물론 유통 대리점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 생산 주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 주체는 결국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 집단도 그 생산활동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얻게 되는 것이다. 즉, 대리점의 생산 활동을 통해서 본사또한 결국 지속적 생산 이익을 얻게 되는 가장 큰 수혜자라는 점이다. 개인적 추측으로 거위도 황금알을 낳음으로 인해 자신에게 생리적인 이득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거위에게는 하나의 노폐물과 같은 황금을 모아 모아서 마치 신장과 같은 기관에서 농축시켜 황금알이라는 형태로 배출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도 자신의 생명 활동을 위해서 필요한 일을 했던 것이고 중요한 것은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거위의 입장에서 삶의 공간을 제공해 준 농부에게 고마워 하며 자신의 배설물을 아낌없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농부의 가장 큰 경제 생산 주체는 바로 거위가 되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리점을 압박하여, 대리점은 삶의 기반을 점점 잃어가며 빚에 시달리게 되는데 본사는 생산 주체인 대리점에서 얻을 것을 다 얻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현재의 유통 대리점의 가장 큰 차이점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황금알은 아니라도 최소한 경제 주체로 생산 활동을 하는 대리점이 많다는 것이다. 즉, 대리점이 횡포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황금알이 아니라고 믿는 본사에 있었다는 점이다. 대리점주들은 본사 입장에서 마음에 안 들면 바꿔버리면 되는 대체 가능한 대상이라 보았을 것이다. 즉, 언제든지 대리점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기 때문에 본사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대리점 따위는 그냥 계약 파기해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리점을 하지 못하게 하면 가장 빠른 해결책이라 믿었을 것이다. 즉, 농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 한 마리가 아닌 그냥 일반 거위 알을 낳는 많은 거위들이 있었다면 농부는 그 거위들이 낳는 알에 욕심을 내기 보다는 거위의 모든 것, 예를 들어 거위 고기, 깃털 등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욕심은 거위와 나와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위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이득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대량 생산을 통한 욕망의 극대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현대 생산 구조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대량 생산이다. 대량 생산은 집중화된 생산력을 필요했지만 동시에 광범위한 소비력을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은 전문화되고 이를 통해 대량 생산된 제품들은 유통을 통해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단순히 공산품 만의 문제가 아니다. 공업적 생산 뿐만 아니라 농업, 어업, 축산업 등 자연에서 생산하는 경우에도 대량 생산이 주축이 되었고 소고기, 돼지고기와 같이 소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축산품은 이제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통해서 동물적 본능을 제거된 체 단지 인간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사육된다. 어업도 별로 다르지 않다. 무한히 잡힐 것이라고 생각하던 생선들도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특히 산란기를 포함하여 쉬지 않기 때문에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특정 어종에 대한 수요가 집중되어 멸종의 위기에 놓인 어종과 공격적 조업을 통해 다양한 어류들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같이 포획되어 버려지는 경우도 많다. 가장 잔인한 인간의 활동 중 하나는 바로 상어 지느러미 요리를 먹기 위해 상어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나머지 상어는 그대로 바다에 버리는 경우이다.


농업을 잠시 살펴보자. 인간의 농업은 이제 일부 품종을 위해서 자연에서 그대로 자라는 다양한 종은 사라지게 된다. 대부분 인류의 농산물은 밀, 옥수수, 쌀, 콩 등으로 제한되게 되고 종의 다양성도 심하게 제한되게 된다. 거의 대부분의 농산물은 매년 종자 회사에서 종자를 구매해서 농사를 해야 하는데 그 중에는 자연이 만들어 낸 종자보다는 병충해에 강한 유전자 조작된 농산물인 경우가 많다. 또한 이런 대량 생산적 농업을 위해서 대규모 산림, 목초 지역이 모두 개간되어 모두 생산 지역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의 땅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는 토종 농산물들은 이런 대량 생산 품종에 의해 점점 사라지게 된다. 이는 유전적으로 종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학문적 문제도 있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병충해에 강한, 예를 들어 옥수수가 전세계 생산의 90%이상 생산되는 경우 알려지지 않은 병충해가 나타난다면 효과적으로 90% 이상의 옥수수가 병충해에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즉, 단순히 병충해에 강력한 농산물이라고 종자를 판매하고 재배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이란 조건이고 알려지지 않은 병충해가 나타나면 거의 대부분의 옥수수는 병들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도 종의 유전적 다양성은 중요하다.


사실 가장 주목해야 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문제가 보이는 부분이 축산업이다. 특히 소고기, 돼지고기의 대량생산을 위한 공장형 생산은 비 위생적인 대규모 사육 환경이나 잔인한 도축 과정을 떠나 추가적으로 농업에 커다란 문제를 만들어 낸다. 소나 돼지는 초식동물이고 기본적으로 풀을 통해서 에너지원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풀을 먹는 초식동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필요한 풀도 막대하다는 것을 먹이사슬의 원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소, 돼지의 대량생산을 위해서 사료마저도 대량생산을 하게 되고 지구의 한쪽에서는 먹을 식량 (곡물) 조차 없어 굶어 죽는데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미식을 해결하기 위해 소, 돼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료를 만들어 낸다. 이런 사료를 만들기 위해서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하는 우림 지역이나 산림 지역을 파괴하여 경작하고 점점 근본적인 자연 환경을 파괴하기 이른다.

우리 시대의 황금알을 생각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우리 시대에 주는 생각해볼 가치는 무엇일까? 아마도 갑(甲)질을 열심히 해서 을(乙)들의 고혈을 빨아 먹는 욕심 덩어리 인간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물어본다면, 당연히 매일 황금알을 받으면서 살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본질조차 생각하지 않는 멍청함이 존재한다. 바로 황금알이 낳는 거위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황금알이 아닌 '낳는' 이란 점이다. 경제 활동은 생산 주체의 생산 활동이 근본이다. 즉, 생산 주체가 사라진다면 더 이상 생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농부가 거위의 배를 가를 때 가졌던 기대는 자신에게 커다란 부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그 커다란 부의 원천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의 요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세상의 부는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닌 생산 주체의 생산 활동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대리점에 횡포를 부린 본사의 생각도 그런 경제의 기본 원리 조차 파악하지 못한 부적격의 경영자이다. 즉, 회사의 생산 주체가 누구인지 파악도 하지 않고 경제 주체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누가 생산 주체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회사의 이익이 어떤 과정을 통해 발생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당장 눈에 보이는 공장의 생산만이 생산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불교의 수도자들이 식사 전에 외우는 공양계가 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었으니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고치는 약으로 바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유통은 단순히 공장에서 생산을 한다고 해서 이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회사의 이익을 만들어 내는 공장의 생산 뿐만 아니라 유통을 위한 대리점의 활동이 필수적이다. 갑-을 관계에 의해 횡포를 부린 그 모습이 도덕적 문제를 보이기도 했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회사의 이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경영자들이 경영을 했다는 점에서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공양계에서 말하듯 자신이 지금 먹는 밥 한톨, 물 한방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음식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경영자들도 자신의 이익을 누가 만들어 주는지 진정한 생산 주체가 누구인지 파악도 못하기에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커녕 그들을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다는 점에 더욱 더 화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현명한 자본가라면 '황금알'을 낳지 않는다면 황금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원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황금알에 눈이 멀어 '낳는' 생산 활동을 하는 수많은 주체의 배를 가른다면 결국 그들의 이익도 멈추게 될 것이다.

황금알을 찾아서... 

농부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닌 그냥 수많은 거위들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황금알이 없기 때문에 농부는 실망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현명한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다면 농부는 황금알이 아닌 '낳는'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단지 생산이 미덕이라고 본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다양한 대량 생산은 분명 나쁜 활동은 아닐 것이다. 대량 생산으로 우림, 산림이 파괴되고, 공장형 축산으로 소고기, 돼지고기의 생산이 많아져 사람들은 대량의 고기를 소비할 수 있게 되고 원하는 수산물을 마음껏 먹게 되어 우리의 식욕을 충족 시켜준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낳는'다는 생산 활동이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낳을 수 있도록 거위가 건강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황금알이 아니라도 해도 일반 거위 알을 낳는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낳을 수 있는 거위'가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 '낳을 수 있는 거위'는 무엇을 뜻할까? 어렵지 않게 그 낳을 수 있는 거위는 바로 '자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생산한다는 것에 대해서 인간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활동은 생산적 활동이라고 믿었다. 만약 죽지 않을 정도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조금씩 가른다면, 거위는 언젠가 죽게 될 것이다. 다시 복원하지 못하는 상태로 거위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낳을 수도 없게 된다.


인간은 당장 거위가 죽지 않고 아직까지 황금알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거위의 존재 따위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다행히 그 거위는 상대적으로 건강하지만 하루는 깃털이 뽑히고, 하루는 상처입고, 그렇게 매일 상처만 입는다면 언젠가 거위는 지쳐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더 이상 회복 될 수 없는 상태까지 된다면 더 이상 생명의 활동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 공양계를 조금 더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생산은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그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 있다. 쌀 한톨 만들어 내는데 농부의 손길도 필요했지만, 수확하기 전까지 햇빛이 필요했고 물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모든 성장 이전 한톨의 씨앗으로 시작했고 그 한톨의 씨앗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항상 '자연'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근본이 되는 자연을 파괴하고 어떻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대량 생산의 이 시대 배를 갈라 더 많은 황금알을 찾는 인간의 모습에서 바로 자연을 파괴해 더 많은 생산을 해보려는 인간의 욕심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결책은 오히려 간단하게 대량 생산을 줄이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찾아보고 싶다. 마치 매일 하나의 황금알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욕심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히 욕심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거위가 낳을 수 있는 능력만큼 하루에 하나의 황금알만 취한 것처럼 자연이 생산해낼 수 있는 능력만큼 기다리고 인내하며 생산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연이 만들 수 있는 능력의 범위를 지키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매일 황금알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은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매일 얻는 보람도 있고 그 보람이 거위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은 과욕을 부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마음과 대조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사가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대리점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 생활조차 어려워지도록 만드는 것도 결국 자연을 파괴하는 범위까지 대량 생산하려는 인간의 욕심과 통한다.


아마도 대리점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며 본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영자도 이솝우화를 자식들에게 들려주며 "과욕을 부리면..." 라고 교훈을 말해 줄 것이다. 우화가 더이상 우화(愚話)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 동화 다시보기

Tuesday, December 11, 2012

익숙하지 않지만 한번쯤 들어본 듯한 동화가 있다. 피리부는 사나이 - 다양한 기원이 전해지고 있으며 주로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Rattenfänger von Hameln)로 전해진다. 독일의 민간전승 동화라고 전해지며 그림형제 등 다양한 작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래의 자세한 이야기를 소개할 것은 아니다. 짧은 스토리 안에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우리들의 삶의 문제를 한번 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동화 다시보기로 소개하려 한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Rattenfänger von Hameln)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하멜른 지방엔 쥐떼들이 창궐하여 마을 사람들에겐 골치거리였다. 이때 마을에 나타난 한 사나이는 자신이 쥐떼들을 몰아 내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돈을 지불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사나이는 자신의 피리로 마을에 있는 쥐떼들을 몰아서 결국 호수에 몰살시켜서 쥐떼들이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처음의 약속과 다르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위 '배째 정신'으로 사나이에게 돈은 커녕 고마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피리 부는 사나이는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유혹하여 이끌어내어 결국 그 마을엔 아이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산업 혁명의 시대에 무엇이 노동이며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나의 부속품처럼 '쓰여지던' 시대에서 노동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사고의 기회를 주었던, 그리고 경제에서 우리가 불평등의 구조가 생기는지에 대한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시각을 주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단순히 육체적인 작업을 뜻하는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 직업, 일 (job)과 같은 의미이며, 그 어떤 직업이든 생산성에 관련된 모든 행위들을 노동이라고 정의하면 쉬울 것이다. 여기에서 생산성이란 꼭 우리가 말하는 돈(재화)와 연결이 된다 할 수 없지만 노동에 필요한 비용이 벌어드린 수입보다 많을 때 요즘 말로 우리는 '잉여'라는 새로운 신조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19세기말 러시아 공장노동자

피리부는 사나이로 넘어오자.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가지는 직업, 더 구체적으로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피리부는 사나이(이하 사나이)는 쥐떼를 몰아내는 노동을 맡는 장면에서 노동의 가치를 세가지로 언급하고 싶다. 우선은 ① 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재능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연마한 기술이라도 좋다.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② 자신의 상품 혹은 서비스가 유익한 타인이 있다. 쉽게 우리는 소비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③ 두가지 수요와 공급을 만들어주는 댓가이며 가격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아주 간단한 시장 가격의 형성 원리와 동일하다. 즉, 노동의 가치는 아주 간단하게는 수요, 공급이라는 시장 원리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능력의 공급, 수요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재밌는 점은 꼭 자신의 능력이 아주 특별하거나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시장에서의 높은 노동의 가치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수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생산품이나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높은 가격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나이가 쥐떼를 몰아내는 특별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쥐들이 문제가 아니라면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피리부는 사나이의 복수 - 노동 인력

피리부는 사나이는 노동의 가치를 적절하게 지불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나름 복수로 보이는 '노동'을 시행한다. 마을의 아이들을 피리로 유혹해서 마을에서 데리고 간다. 단순히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재앙으로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줄 수 있지만,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비추어 본다면 노동의 가치가 상실되거나 제대로 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 아이들은 있어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현재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해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라면 지금처럼 ⓑ 출산을 포기하는 사회로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그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즉,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다음 세대의 희망도 불투명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현재 세대가 몰락하고 결국 그 사회의 노동인구는 하멜른 마을처럼 노동의 가치가 아무리 인정받아도 정작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구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비극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익광호협의회,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공익광고

그렇다면 우리시대는 제대로 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노동의 댓가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그 누구도 어쩌면 선진국일수록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편의상 현대 사회의 경제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싶다. 첫번째는 ⓐ 생산 경제(production domain)이다. 노동의 중심이 되며 우리가 필요한 모든 제품, 서비스들이 만들어지고 이루어지는 도메인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이다. 두번째는 ⓑ 금융 경제(finance domain)이다. 특별히 이를 따로 분류하지 않고 이를 생산 경제에 놓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현물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로 현물이 존재하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별도로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 투자 경제(investment domain)이다. 현실 세계가 움직이고 실제로 필요한 삶의 거리로 볼 때 생산 경제가 가장 가깝고, 금융 경제 그리고 투자 경제 순일 것이다. 경제 주체의 크기로 보아도 생산 - 금융 - 투자 순이지만 실제로 경제 규모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생태계에서의 먹이사슬로 보았을 때 식물 - 초식동물 - 육식동물 과 같은 형태이고 현실 경제에서는 마치 돈을 통해서 이어진 먹이사슬(capital chain)같다. 쉽게 예를 들면 금융 경제의 주 수입원은 생산 경제에서 나오는 수수료와 이자 등의 자금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 주체를 큰 자본으로 합병혹은 대규모 경영 변화를 만들어 천문학적 규모의 금융을 움지기는 것은 금융 경제 자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소수의 투자 자본이라는 것이다.

만약 생산 경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금융 경제와 투자 경제만 활성화 된 상황을 생각하면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 경제에 필요한, 실제 생산을 위한 자본이 아닌 투자와 투기를 목적으로 한 복잡한 금융 상품들은 생산 경제의 원할한 수혈을 위한 자금을 위한 서비스가 아닌 생산 경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기조차도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복잡한 수학적 도식과 비율의 조작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경제를 만들어 냈고 실제 생산 경제의 흐름과 상관없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만다. 가까운 예를 들어도 환율하락에 의한 손해를 막기 위해 KIKO(Knock-In Knock-Out) 라는 상품만 보더라도 환율하락이라는 상황에서 손해를 막을 수 있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손해를 감수해야한다는 것도 상기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상품들은 생산 경제가 잘 흘러가는가와는 별도의 문제이다. 고위험, 고수익의 이러한 금융 경제 그리고 이미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 경제를 통해 생산 경제의 원할한 흐름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금융, 투자 경제의 결정 주체는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의 집단 이성에 의해 공익을 위한 판단보다는 보통은 자본 소유자들의 탐욕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 생산 경제의 눈물, 그리고 반격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아니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결국 재앙이 다가왔다. 그 재앙은 단순히 아이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노동 인력이 사라진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결국 마을의 실질 경제 - 금융 경제나 투자 경제가 아닌 - 가 이루어지기 위해 노동 인력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점이다.

금융 자본가, 더 구체적으로 금융 탐욕가의 경우, 자신이 벌어들인 이익이 아주 정당하고 제대로 치루어진 노동의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생산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몇년 전에 비해 적은 수의 노동자로 같은 생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자동화, 생산 효율화 등 인간의 수많은 지식과 기술은 인간이 직접 생산 노동에서 좀더 창조적인 노동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생산 노동 자체의 가치를 급격하게 낮아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0년전 100,000이라는 생산 가치를 1,000이라는 노동자가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한사람 당 100의 생산 가치를 만들어 냈고 이 중 노동자들은 100중 50정도의 인건비로 노동의 가치를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면 10년 후에 100,000이라는 생산 가치를 100명으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면 한 사람당 실제 노동 가치는 1,000 중 50% 라면 500 정도의 노동 가치를 댓가로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즉, 급속하게 증가하는 일인당 생산 가치에 비례해서 노동 가치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부가되는 문제는 생산 경제는 이제는 금융 경제와 투자 경제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게 되고 종속화 된다는 점이다. 즉, 생산 경제 자체의 창의성이나 생산성보다는 금융, 투자 가치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고 이를 통해 결국 노동의 숨결이 살아있는 생산 경제의 현장은 도매급으로 그저 투자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로 판단되게 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금융 및 투자 경제 주체의 입장에서 당장의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비용으로 보여지고 어떻게든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려 금융 및 투자 경제의 이익을 증가시킬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업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회사를 위해 위험한지도 모르고 젊은 청춘을 받쳐 일했던 생산 현장에서 쓰러져간 노동자를 한번 생각해보자.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국내 모 기업의 생산 공장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 (정확한 숫자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적지 않은 숫자이고 단 한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백혈병을 비롯해 다양한 난치병에 걸리고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할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산업재해조차도 막으려는 기업이 있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단순히 쓰고 버리면 그만인 부속품과 무엇이 다르게 보일까. 어쩌면 버릴 수 있을 때 버리면 절감할 수 있는 비용으로 느껴질 것이다.

고인이 되신 반도체 노동자분들,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한 그들에게 돌아오는 기업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다시 피리부는 사나이로 넘어가자. 노동의 가치는 단순히 수요, 공급 그리고 그에 적절한 댓가를 통해 결정된다고 했지만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 노동은 인간이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기계화, 자동화가 발달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노동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본의 풍부함에 돈 아까운지 모르는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의 주변의 음식, 집, 가구, 자동차가 단순히 자신들이 지불한 돈으로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들, 음식은 어떤 농부, 어떤 어부의 생산 노동의 결과이고 모든 공산품들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 생산 라인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생산 노동의 결과이다.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논리라면 아이들이 사라진 마을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억압받고 열악한 노동 환경 아래에서 결국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자본가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실현해주고 인정해주는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즉, 피리부는 사나이의 유혹은 "노동자 몇명 없어도 일할려는 사람들 많아"라는 도덕성이 결여된 돼지같은 탐욕가에겐 경고일 수밖에 없다. 노동 시장이 도덕적이고 기업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사회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세상으로 이동하려고 할 것이다.

¶ 정부가 해야하는 일들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정부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주체들이 아무리 힘이 있는 존재라도 억압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정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부는 노동의 수요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리고 그런 수요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장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동의 수요는 국내 생산 경제의 규모화이다. 단순히 인건비의 압박때문에 국내 생산 공장을 해외로 진출하는 근시안적인 생산 경제도 결국 생산 경제의 장기적인 안목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투자 경제의 탐욕적인 결정이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결정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단순히 인건비때문에 생산 공장을 옮기면 내수 생산 경제는 축소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생산품의 질 등 다양한 외부 변수들의 위험도 감수해야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번째 개인의 능력은 노동의 다양화일 것이다. 이 부분은 무척이나 어렵다. 단순히 노동 시장의 문제가 아닌 교육과 개인의 역량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소도시에서 몇몇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값비싼 소위 명품(masterpiece)의 생산은 자신의 능력과 고부가가치가 잘 들어 맞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안정적인 시장은 바로 고용 안정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불안한 직장에서 고수익을 얻는 것과 안정적인 직장에서 적당한 수익을 얻는 것 중에 많은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안에서 오는 위험은 사람을 행복하기 위한 직업이 아닌 단순한 생계수단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직업이 단순한 생계수단으로만 의미가 있을 때 인간은 가장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정부가 규제해야하는 부분 중 하나는 아무리 수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윤리적 수요에 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청부살인이라는 직업이 고수익이고 수요가 높다고(?)해도 분명 막아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청부살인이지 아무리 일부에게 이익 혹은 행복을 준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불행을 통해, 다른 이들의 파괴를 통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수요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윤리적 노동 수요의 증가를 뜻해야 한다.

고용 하도급화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을 위한 필리핀 노동자의 노동운동

그래서 정부의 정책은 복잡하지만 그 철학적 배경은 아주 간단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탐욕과 공포 (greedy & fear) 이 최소화 된 노동 시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탐욕에 의해 자신이 가진 99에 1을 더하려는 사람들을 최소화하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증가하는 노동의 가치에 맞는 분배 정의에 맞는 노동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단순히 거시 경제의 규모와 그 규모에서 어떻게 분배를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중심이다. 그 안에서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상실된, 그리고 훼손되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힘들게 만들어버리는 노동 현실에 대한 냉철한 시각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가치를 실현해야한다는 철학적 기초부터 이야기해야한다는 것이다.

¶ 경제 민주화는 무엇일까?

노동의 가치부터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해야한다는 심증적 믿음은 있었지만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실체, 손에 잡히는 명확한 정의는 너무 어려웠다. 그런 과정에서 피리부는 사나이가 주는 짧은 이야기가 짧은 그렇지만 굵은 연상을 주었다. 다시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로 넘어가자.

쥐떼를 몰아냈을 때 피리부는 사나이는 약속대로 돈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돈 천냥 (큰 포도주 통 두개를 채울 수 있을 정도) 을 주기 싫어서 사나이와 약속을 깨버린 것이다. 없어서가 아니었다. 분명 이것은 탐욕이었다. 그 탐욕의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사나이에게 돈주는 것을 만장일치로 반대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분명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마을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소수가 결정한 결과이고 그에 따라 그 결과는 재앙에 가까웠다. 바로 소수의 경제 주체가 자신의 탐욕이나 잘못된 판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탐욕과 공포의 칼날 아래에서도 목숨걸고 싸웠던 정치민주화를 생각해보자. 그때에는 대통령조차 이제는 흔한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장기집권을 통해 자신의 욕심대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간단하게 그것을 독재라고 부른다. 때로는 어떤 철학가는 아주 현명한 현자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면 나라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 '아주 현명한 현자'라는 가정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역사를 통해 그러한 현자로 불리던 사람들은 결국 독재자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렵게 이룩한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그래도 형식적으로 제도적으로 정치가 민주화 즉, 정치의 주체가 누가 되든, 그 결과가 어리석은 결과가 나오든,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구성원들이 집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5일 오후 서울 동대문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경제민주화시민연대 출범식, 민중의소리

경제민주화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소수의 재벌들이 자본의 계획과 집행을 결정하는 과정은 결코 민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힘들다. 재벌들이 자신들의 사적 욕심을 위해 자본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잘못된 것이다. 소위 재벌은 법적으로도 주인이라고 이야기하기에 너무도 적은 주식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서 월권에 가까운 경영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의 가장 기본은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동자들과 생산의 주체들이 경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돈을 지불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그 과정이 길어지고 비효율적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아깝다고 하더라도 욕심에 의해서, 도덕성을 훼손하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중요한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민주화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경제를 만들어내는 경제 주체가, 생산의 기여도만큼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 교수님이 쓰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이야기하듯 노동 주체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보장을 하고 법적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큰 분수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의 마지막에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모든 아이들이 피리부는 아이들에 이끌려 마을을 떠났지만 몸이 불편했던 어떤 한 아이는 같이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의 행복까지 망치게 하는 것은 분명 큰 잘못일 것이다.

피리부는 사나이 ─ 동화 다시보기

Tuesday, June 19, 2012

어린 시절부터 '거짓말 하지 말라'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어른들이 자주 들려주는 동화가 있다. 양을 돌보는 양치기 소년은 양을 돌보다가 심심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늑대가 나타났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 이야기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잡으러 왔지만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며, 때로는 화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다시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속게 된다. 그리고 세번째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했지만 두번이나 속아서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가지 않았고 결국 양들은 늑대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동화의 교훈은 거짓말을 하면 결국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양들의 희생, 혹은 경제적인 피해의 책임은 거짓말을 한 양치기에게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묵언의 공감을 하게 된다. 일단 결과적으로 양들은 희생당했다. 양치기 소년은 어떤 이유에서든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동화의 묘사에 따르면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반응하는 모습이 바보스러워 보였고 그 바보스러운 모습에 다시 재미를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화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양의 희생이다. 재산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양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신뢰하지 않는 순간, 양의 생명, 좁게 생각해서 마을의 재산인 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양치기 소년을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확신하기 보다는 불신에 대해 더 쉽게 확신하게 된다. 그만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확신보다는 자신이 가지는 지식과 논리,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신에 대한 확신은 빠르게 진행된다.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 링크 ]

늑대가 나타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확신했던 것은 자신들의 불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이 늑대에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들은 희생 당했다. 그러나 좀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마을 주민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게임이론(Game theory)의 비협조적 죄수의 딜레마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을 믿는다.
늑대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음  양들의 희생 = 0 양들의 희생 = 0
늑대가 실제로 나타남  양들의 희생 발생 ≠0 양들의 희생 ≠0 or 경미한 희생

결국 늑대가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양치기 소년을 믿는 것이 경제적인 손해에도 이득이 되는 것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대신 믿을만한 사람을 대신하게 하는 책임을 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대한 불신을 확신한 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불신이 가지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합리적인, 논리적인 생각의 사람도 결국에는 감정적, 불신에 의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여 자신에게 피해가 되더라도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과 달리 이번에는 새로운 가정을 한번 해보자. 다른 마을의 양치기 소년ⓑ가 있었고 이전 마을에서 양들을 희생한 늑대들이 다른 마을에 가서 양치기 소년 앞에 늑대는 잠깐 나타났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안 사라져 버렸다. 양치기 소년ⓑ은 마을 사람에게 알렸지만 마을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이미 늑대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늑대들은 똑같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 마을 사람들을 헛탕치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양치기 소년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그리고 똑같이 세번째 경고에 마을 사람들은 불신하고 결국 똑같이 늑대들은 양들을 약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결국 양치기 소년ⓑ에게 탓을 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억울해 하는 양치기 소년ⓑ에게 마을 사람들은 늑대가 양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냥 가겠어? 혹은 자신들의 논리와 편견 혹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추어 쉽게 양치기 소년을 거짓말 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양치기 소년은 아무리 억울해 해도 마을 사람들은 정말 불신했을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에 현명한 마을 사람이라면 힘들지 몰라도 돌아가면서 양치기 소년ⓑ와 함께 양들이 지키는 노력을 했다면 양치기 소년ⓑ을 불신하는 잘못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재산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생기고 때로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기 힘든 상황에서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때로는 뒷조사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확인해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믿을만한 정보보다는 믿지 못할 내용에 대해서 더욱 더 확신하면서 상대방을 거짓말 쟁이로 만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때 상대방은 어떤 상처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불신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으며 자신의 불신은 정당하고 확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오해를 풀겠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양이 늑대에게 물려가는 그 순간에도 확실하게 믿었던 상대방의 불신으로 가득차 어떤 피해를 입어도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다시 게임이론으로 넘어간다면 상대방이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을 보고 그래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때 그만두어도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신의 그늘 뒤에 숨어 상대방의 노력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판단한다.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그리고 자신의 편견에 휩싸인 체 다양한 사실에 대해서 받아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결국 제대로 사실을 파악하지도 않으면서 불신의 확신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혼자 불신으로 살아가면 뭐라 할 수 없지만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가쉽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양치기 소년ⓑ도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양치기 소년ⓑ를 원망하면서 자신의 재산인 양에 손해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양치기 소년ⓑ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양치기 소년ⓑ에 대한 판단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것이다. "그 양치기 소년ⓑ 때문에 우리가 큰 피해를 보았고 더 이상 믿지 못한다"

믿음이 잃어가는 상대방이 있다면 용기있게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봐 오해를 푸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을 믿는 척 하면서 자신의 불신을 확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어떤 것도 결국 불신의 뿌리에서는 상대방을 오해할 이유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상황과 사정을 생각하지 않은 체 자신의 오만과 편견으로 결국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의 증명은 결국 어떤 증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양치기 소년ⓑ가 늑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억울함을 호소할 때 그의 편에 서서 늑대가 왔다갔다는 증거를 같이 찾아보려고 했다면 그것은 상대방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같은 편이라는 마음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믿고 안 믿고는 다음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자신의 기준과 편리함으로 불신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것은 상대방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을 확신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

누군가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며 제대로 서로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함부로 판단하며 가쉽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 그 불신의 뿌리를 파 낼 수 있기를 그냥 묵묵히 기도하라는 어떤 성직자의 조언이 생각난다. 억울하다고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믿어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떤 불신의 가능성으로 또 다시 오해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늑대가 왔다 간 발자욱을 발견해 보여주어도 늑대의 발자욱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고 이런 장난을 위해 늑대 발자욱까지 만들었냐고 더 불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신의 깊은 뿌리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불신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도 잘 모른다. 그저 두려움이 무서울 뿐이다. 그래서 불신의 숲 안에서는 그 울창한 두려움의 나무들 때문에 그 사이에 비치는 햇빛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체 두려움의 그늘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불신의 그늘 안에 갇어 두지만 결국 그 불신의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자신인 것을 매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 - 동화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