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인간 관계론.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인간 관계론. Show all posts

Sunday, May 6, 2018


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 로 유명해진 이미지가 하나 있다.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는 국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표현되는 벤데타 가면이다. 1600년대 영국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가톨릭 탄압 정책을 펼쳤고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가이 포크스 Guy Fawkes 는 11월 5일을 기점으로 웨스트 민스터 궁전을 폭파해서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암살 계획이 미리 알려져서 화약에 점화하는 역할을 맡은 가이 포크스는 현장에서 잡혀서 극심한 고문으로 사전 공모자 등을 털어놓고 결국 사건 관련자들은 사지가 찢기는 등의 극형에 쳐해 죽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11월 5일을 화약음모사건 Gunpowder Plot 을 막은 기념으로 '가이 포크스의 날'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인물의 형상을 한 인형도 불태우고 모닥불도 불태우며 보낸다. 사실 가이 포크스는 핵심적인 주동자라기 보다는 실행자였지만 현장에서 잡히고 결국 극심한 고문으로 계획을 발설했지만 그래도 시대를 지나면서 가이 포크스는 하나의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그 이후 저항의 의미 반정부를 뜻하는 의미의 의미로 가이 포스크 가면은 사용되어 왔다. 이제는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를 검색하면 실제 모습보다는 '벤데타 가면'이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벤데타 가면이나 저항 정신 혹은 무정부주의 anarchism 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렇게 유명한 가이 포크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그렇지만 무서운 그리고 무거운 이야기 하나가 있다. 바로 암살 계획을 듣고도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형을 받은 가톨릭 신부인 헨리 가넷 Henry Garnet 에 대해 전하고자 한다. 헨리 가넷은 폭파시킬 계획을 고해성사에서 듣게 되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릴 수 없었다. 계획을 알고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렇지 않아도 맘에 안들었던 가톨릭 신부이기 때문인지 헨리 가넷은 사형당하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책을 만들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먼저 만들어진다음 사형당한 것일까?) 자신의 죄를 상세하게 적어 놓은 형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 공개된 인피책 (人皮冊) 이 헨리 가넷의 것으로 밝혀졌고 책의 표지에는 헨리 가넷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해졌다. 헨리 가넷이 미리 계획을 알고도 이를 알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고해성사 THE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 에서 알게 된 내용이였기 때문이다.

헨리 가넷의 인피책 출처: The Guardian  


Confidentiality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고해성사를 하는 살인청부업자 hitman 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는 이를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말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을 보여줄 때가 있다. 헨리 가넷도 성직자의 위치에서 암살음모를 알고 있지만 이를 왕에게 알릴 수 없었고 계획을 준비하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찾아가 설득하려고 했었다. 성직자로 지켜야 할 비밀과 암살 계획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안을 생각했던 것 같다. 종교 특히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헨리 가넷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비밀 유지가 성직자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내용인지 그리고 암살계획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까지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시민 사회 혹은 국가의 의미가 커지고 법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법과 성직자가 가지는 비밀유지 원칙은 자주 충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법정 안에서 성직작의 비밀유지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성직자가 알게 된 범죄 사실 혹은 범죄 가능성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아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범죄 사실을 인지하거나 범죄자를 특정할 수 있는 identifying a criminal 어떤 이가 이를 수사 기관에 알리지 않는다고 불고지 (不告知) 죄 가 존재하고 이또한 범죄라고 생각한다면 성직자는 분명 범죄자가 되기 쉽다. 범죄사실이나 범죄자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범죄가 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국가 중 하나는 대한민국일 것 같다. 지금 (2018년) 도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에는 이러한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공권력에 처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Confidential 은 평범하게 비밀내용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 사전에 의해서 '기밀'로 번역되고 비밀은 'secret' 로 번역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사실 문서 취급에서 보면 Confidential 이 붙은 문서보다 secret 이고 그보다 높은 문서 보안 수준은 top secret 이다. 느낌으로는 기밀이라고 하면 뭔가 빈틈없이 빠져 나가면 안되는 비밀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이 맞다면 기밀은 top secret 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사실상 confidential 은 다소 개인적인 내용 혹은 가급적 공개되지 않는 것이 좋을 내용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기업간의 거래 및 회의 내용들은 confidential 이 되는 것이고 공적 이유로 공개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secret 가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직자와 신자간의 개인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로가 (주로 성직자) 발설하지 않을 권리나 의무가 엄격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직자라는 직업을 가지는 '기능적 자아'에게는 권리처럼 주어질지 모르지만 성직자가 아닌 자연인으로는 발설한다는 자유의지까지 잘못되었다 말하기는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앞서 살펴본 성직자 / 신자를 뜻하는 priest–penitent 혹은 clergy–penitent 간에 비밀유지가 지켜지는 상태 혹은 지켜야 하는 의지를 confidentiality 라고 부른다. 동일하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환자의 상담 내용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나 광범위하게 의사가 진료 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의 병력 및 질환 상태에 대한 비밀유지를 하는 것도 동일하게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라고 말한다. 또한 법적 대리인과 의뢰인 사이도 동일하게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라고 한다. 이와 같이 찾아보면 현대 사회에는 직업상 (기능적 자아) 취득한 개인적인 정보에 대한 비밀 유지에 대한 어느정도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Confidentiality to privilege


앞서 소개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 법적 대리인 - 의뢰인간의 비밀유지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밀유지를 말할 때 confidentiality 를 쓰기 보다는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보다는 clergy–penitent privilege 라고 사용하고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는 doctor-patient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우선 privilege 란 말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권'이란 번역이 가장 먼저 나온다. 개인 혹은 일부 소수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이득을 뜻할 때 특권이란 말을 사용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특권은 그리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소수 재벌의 특권' 혹은 '권력자들의 특권'과 같이 일반 시민들이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에누리 없이 처벌을 받게 되지만 권력이나 자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경우를 보면 특권이란 분명 사라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성직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신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privilege 의 어원에 대해서 찾아본다. 개인을 뜻하는 라틴어 'privus' 와 법을 뜻하는 라틴어 -lex (-reg) 가 결합되어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 혹은 법률'이란 뜻으로 'privilegium' 이 시간이 지나 privilege 가 되었다. 어원대로 privilege 는 특별한 권한 혹은 권리라기 보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다양한 법의 내용을 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서 누린다면 그것을 특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있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대통령 직무 행정부 특권 executive privilege 을 가지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누가 누리는 특권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켜야 할 비밀인데 도대체 무엇이 특권이 되는가? 어원에서 살펴본 것처럼 특권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나 지켜야 하는 상황을 confidentiality 라고 말했지만 이는 법률적 책임이나 의무를 가지지 않는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헨리 가넷의 사례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성직자 - 신자 비밀유지를 떠나서 폭파 계획을 미리 알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이 범죄자가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확장해서 생각하면 동료 중 누군가 HIV 바이러스 양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주변에 알려서 미리 조심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서 다른 동료 누군가 바이러스 양성자가 되었다면 그 사실을 알았던 사람은 법적 책임은 아니라도 양심적 가책을 가져야 하는가?

이처럼 개인간의 비밀유지가 공적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거나 예상되는 피해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를 비밀유지를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비밀유지는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다. 특히 그런 논쟁의 중심은 대부분 법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많은 경우 비밀유지가 인정되어야 할 내용이고 이를 통해서 아무리 공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의 비밀유지를 지킬 개인적 의지에 대해서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정에서 말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그렇게 증언을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게 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역설적으로 법정에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 되어졌다. 결국 개인간의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는 법의 울타리에서 '비밀유지를 지키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Privilege against jurisprudence


법은 항상 상당 부분 허술하다. 직접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법이 완벽하다면 법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거나 '법을 이용한다'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법이 정하는 특권 혹은 예외는 법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을 부끄럽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범인을 찾는 범죄 드라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범인을 잡아 가둘 수 없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많은 경우 범죄사실은 알고 있지만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혹은 법률적 특권이나 예외 사항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나라일 수록 특권과 예외가 많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앞에 모든이들이 평등하다면 소위 '국민 법 감정'이란 오묘한 감정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리학 jurisprudence 는 법이 가지는 철학이나 원칙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하게 될 가능성을 말하는 학문이다. 좀더 어렵게 표현하면 "법의 본질과 목적, 법의 개념, 법의 객관적 가치 또는 법의 이념, 법의 존재상태 또는 법의 효력 · 타당성, 법현상 등을 일반적으로 구명하고, 다시금 법의 제정 · 해석 · 적용에 특유의 논리 또는 법적 사유(思惟)의 기본적 카테고리나 법학 방법론을 고찰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라고 나와 있다. 여전히 어렵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인간이 관찰하여 얻어낸 이론이 법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지할 수 없지만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거대 법칙 universal laws 가 존재한다면 그 법칙만 알아낸다면 물리학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느낌으로 법에도 공정하고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하고 이를 알아낸다면 법은 객관적 판단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복잡해서 상황에 따라서 해석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계기로 법의 골격이나 구조가 변화되어 왔다. 놀라운 지혜를 가진 완벽한 사람이 법이란 이렇게 작동한다라고 알려주었다면 사회 안에서 논란이나 갈등이 발생하며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줄어들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법은 그러한 해석의 영역이 더 강해지는 영역은 아닌가 의문이 들때가 많다.

"인위적인 법률과 그 가치에 대칭되는 것으로 자연히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보편적 불변적 법칙"으로 존재하는 자연법과 대비되어 복잡한 세상에 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을 실정법 positive law, ius positum 이라 부른다.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현실적인 제도로 시행되는 법"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권리를 만드는 법"이라 부른다. 앞서 설명한 많은 특권이나 예외는 실정법에서는 '새로운 권리'로 표현되며 인간 세상에서의 다양한 상황에 '조금 더 정의롭다고 추정되는 방향'으로 추진하려는 노력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많은 실정법들은 그렇게 느끼기 어렵지만 많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과정들이다. 막상 법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권리보다는 할 수 없는 제한들로 가득하지만 많은 부분은 앞서 설명한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특권 privilege 들은 법이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들이 인정할 수 있는 실정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던 것도 생각해야 한다.


Privilege under jurisdiction 


실증법은 그래도 개인의 사생활 개별 인격이 가지는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성직자, 의사 등 개인의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직업들이 나타나고 만약 성직자나 의사가 신자나 환자의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사회가 필요해서 만든 직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밀유지 혹은 특권은 단순히 사생활 보호가 아니라 직업이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성직자들이 개인의 고해성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말한다면 어떠한 신자들도 성직자를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고해성사가 가지는 종교적 의미가 아무리 성스러워도 기능할 수 없는 고장난 기계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어떤 생각에서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공 혹은 국가를 위해서 사생활이 제한받아야 하고 사생활의 내용이 국가를 위험하게 한다면 이는 비밀유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위험을 찾아야 하고 개인들이 나누는 사생활 속에서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활동, 대화, 심지어 생각까지 감시하기 위해서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에서 얻어낸 개인적인 내용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는다.

9.11

극단적 충격은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마비시킬 때가 있다. 9.11 테러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이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의 공포와 어쩌면 내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테러는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다. 테러를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막을 수 있는' 테러는 당연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을 수 있는'이란 가정은 인간을 참 어지럽게 만든다. 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알아낸 테러의 징후를 통해서 막는다면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이들의 사생활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게 쉽게 내줄 것인지 말이다. 많은 이들은 나는 테러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 항상 정의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테러를 막아줄 수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가상이지만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본다.

1. 노동조합을 설립하려고 하는 노동조합장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이다. 시위 관련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경찰에서는 체포하려 한다. 아내가 다니는 병원을 알아내고 담당의사에게 언제 진료하러 오는지 알아내고 다음에 올 때는 남편도 같이 오라고 하라고 의사에게 강요한다. 의사는 환자의 정보를 알려줄 수도 없지만 아내가 임신 중 주의 관찰해야 하는 산모라는 정보까지 수사당국에 알려준다. 
2. 모기업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가 있다. 정신적 압박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다. 기업은 내부 고발자를 미행해서 이 사람이 다니는 정신과 의사에게 접촉해서 어떤 상담 내용을 받았는지 회유하며 거액을 제시한다. 그리고 앞으로 상담 내용을 알려주면 더 많은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3.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어떤 학자가 다니는 가톨릭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정부의 정보기관 담당자가 접근해서 학자에 대해서 물어본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지에 묻지만 그 사람은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그 사람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 관계에서 알게 되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그 비밀유지를 깨는 대신 황금의 유혹이나 권력의 공포를 이용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알아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헨리 가넷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목숨을 내놓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이 '위험한 사람'이라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하면서 쉽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다. 비밀유지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은 위험한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공헌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테러를 할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권력기관의 말을 믿고 심지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사생활을 알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DHS

권력에 반하는 어떤 존재도 쉽게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권력이 주는 큰 유혹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은 신뢰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비밀유지까지도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진 사생활에서 자신이 깨버린 비밀유지의 상대방은 극심한 고통에 놓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대방이 진짜 나쁜 놈이라면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지만 진짜 나쁜 놈이 아니라 권력에 저항한 의인이라면 비밀유지를 깬 이들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Perjury against privilege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옳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찰 때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제이 애셔 Jay Asher 의 소설이자 2017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13 reasons why 를 보면 자살을 선택한 한 소녀가 자신이 왜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육성으로 남긴 내용으로 회상하며 말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여러가지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거짓증언 perjury 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건 what it happened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믿을만큼 얼마나 강하게 말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리기 위한 이야기는 얼마나 자극적인지 느끼게 된다.

13 reasons why (Netflix)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파이의 숫자보다 미국 정보기관이 찾아낸 스파이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였지만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미국 정보기관에서 의심을 받아 감시를 받다가 진짜 스파이가 된 사람도 있었고 정말 스파이였던 사람은 미국에 협조한다고 하고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을 스파이라고 지목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사생활이 감시를 받고 일상 생활에서 고통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사생활을 감시했으면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정상일텐데 '저 사람은 스파이다'라는 전제하에 감시를 하면 모든 행동들이 스파이 활동을 위한 몸짓이라고 해석해서 보고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스파이를 찾아내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명예욕에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이 잡아낸 사람들은 진짜 스파이라고 믿는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권력이 만든 거짓 증언은 그만큼 그 피해와 고통은 생각보다 크다. 1920년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그 당시에 보아도 많은 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형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결과는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이 무정부주의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들은 진범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도 사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의 범행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닌 그들이 가진 사상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살인범일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비슷하다. "누구는 빨갱이다" 라고 크게 소리지르면 자신은 빨갱이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자신이 살기 위해 쉽게 누군가를 빨갱이로 만들었다.

사코와 반제티

거짓증언 perjury 혹은 위증이란 말은 라틴어 perjurium 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false oath 란 뜻이다. 단순한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통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깨버렸다는 뜻에서 비밀유지 confidentiality 을 깨는 것과 의미가 더 통할 것 같다. 개인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비밀유지와 거짓증언을 하기도 하지만 권력과 같은 구조도 알고 싶은 정보를 위해서 거짓증언을 비밀유지를 쉽게 깰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한다. 정보기관에서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라고 말하면 환자나 신자와 같이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의 정보를 얼마나 쉽게 제공하는지 아니면 제공하지 않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How to protect privilege 


프랑스의 정치인 중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1925년 12월 23일 - 1993년 5월 1일) 우크라이나 이민 2세이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도 못했지만 프랑스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싸워왔고 16세부터 금속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해서 1992년에 부패 척결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총리에 올랐지만 다음해 5월 1일 노동절에 자살을 했다. 자살하게 된 이유는 부패 척결 정책을 펼치던 베레고부아 총리 자신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친구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했고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서 크게 떠든 내용과는 다르게 그의 자살 이후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고 자신의 돈마저도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고 월세를 내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개인적으로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때 한강공원을 매일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강공원에서 만난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도 유명한 연예인이어서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예기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서럽게 우는 모습에 그저 연예인으로 힘들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생을 마감하셨다. 사건 이후 알게 된 내용 중에는 증권가 직원이 소위 증권가 찌라시 내용을 올린 내용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증권가 직원은 고인을 얼마나 잘 아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런 내용이 아무리 공인이라도 어떤 고통이 될지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갔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가져올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쉽게 말하고 쉽게 전달한다. 성직자를 믿고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을 통해서 성직자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 아이는 어떤 성격의 아이야" 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고해성사 중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말해서 사람들이 공연하게 알게 되버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가 집에 와서 자신의 환자 이야기를 하면서 무용담 삼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랑하지만 그 안에서 환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거나 누구나 아는 공인이라면 "그 배우가 우리 병원에 왔는데 내가 맡았잖아." 하며 환자의 질환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아주 가벼운 가쉽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밀유지 내용을 깨고 있는지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며 쉽게 가쉽으로 말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야만 느끼게 되는 몇 안되는 공감이 안되는 내용이다. 비밀유지를 지킬 것이라는 믿음으로 신자나 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가 많고 반대로 믿었던 사람은 고통을 얻게 되기도 한다. 막상 확실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을 유지할 상대로 믿지 말고 어쩌면 깰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비밀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할 때 인상적인 그리고 유일한 impressive and unique 표현을 적당히 섞으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받았던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비밀유지를 깨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았다는 소송을 걸었고 정신과 의사는 자신만이 그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친구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던 성적 행위에 대한 특별한 단어를 정신과 의사에게만 이야기했다는 점으로 소송에서 이긴 적이 있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깨졌을 때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는 복잡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영화 Doubt (2008)

그래서 영화 Doubt (2008) 에서는 가쉽에 대해서 다시 모을 수 없는 찢어 흩어진 베개의 깃털을 비유해서 전달했다. [ About Gossip ]  사람에 대한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게 된다.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인데 들은 내용만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탓하고 심지어 자신은 옳은 행동을 했다고 믿을 것이다.

윌리엄 W. 영의 오두막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네? 저요? 저는 그렇지 않은데요." 그는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하였다. "나는 판단할 능력조차 가지지 않았는데요"

"정말 그게 사실일까요," 바로 대꾸하며 이제는 조금은 비꼬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이미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 이 짧은 순간에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통해 많은 판단을 해왔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심지어 얘기하지 않은 동기조차 판단해왔고 그런 당신의 판단은 항상 진실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피부색, 몸짓 뿐만 아니라 체취까지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과거와 관계에 대해서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심미적 기호를 통해 바라보며 한사람의 가치마저 판단해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보건데, 당신은 상당히 판단하는데 잘해왔음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원문]


사회 안에서 비밀유지 ─ 지키기 너무 가벼울 수 있는 비밀에 대해서

Tuesday, June 30, 2015

간의 삶에서 다툼 quarrel, argument, fight 이 없이 살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아주 중립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의 시선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조차 다르게 된다. 어떤 하나라도 같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비슷한 영역이 존재하면 그래도 마음이 맞는다 생각이 비슷하다 말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 사이의 다툼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툼이 어쩔 수 없다면 그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묘안의 해결책이 존재한다면 인간 사회는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 수많은 갈등 해결은 결국 누구와 누구의 다툼인가 어떤 상황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다툼의 당사자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 성격 등 내부적인 요소에 따라서 복잡한 결과를 만들어 낼수 밖에 없다. 모든 다툼의 과정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개인적인 경험에서 느껴지는 몇가지를 통해 그 과정을 생각해 보고 싶다.

툼의 시작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라고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다름은 곧 틀림이라는 순간적인 충동(?)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의 사소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 중 자신의 시선에서 알수는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상대방이 아무 생각없이 말을 했지만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은 남편의 행동이 기분 나빠서 아내는 곧 신경질 낸다. 물론 상대방이 잘못을 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다툼의 시작은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어떤 부분이 내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에 시작한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부분의 다툼은 냉정하지 못한 감정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그 이후 감정의 발전 단계는 조금 이상하게 연결된다. 감정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상대방의 생각과 말과 행동 중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기 뚜껑을 내리라고 말했잖아' 와 같이 약속혹은 서로간의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며 계약의 위반을 통해 잘못을 설명하거나 하루종일 게임을 하는 맘에 안드는 자식을 보면서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게임만 하면 어떻게 해!' 와 같이 신분이나 위치에서의 당위적으로 해야할 본분을 행하지 못함을 말하기도 한다.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아무리 시작이 감정적이라고 해도 그 이후 진행은 대부분 도덕적 당위, 윤리적 책임을 포함하여 불성실, 불이행 등과 같이 상대방의 잘못을 찾아내는 상당히 논리적인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구의 탓이어야 하는가

이제 다툼이라는 사소한 표현을 떠나 조금 더 큰 범위의 '갈등'이라는 말로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부분 다툼도 갈등의 한 부분이고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인간 관계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가 다툼과 같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불이 붙기 때문이다. 넓은 범위에서 결국 인간의 사화 활동은 갈등을 어떻게 관리하고 처리하는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갈등의 진행과정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결국 갈등이 있다는 것은 같은 대상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그 다른 시선때문에 지금 다툼이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변기 뚜껑을 내려놓지 않는 남편은 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항상 잘못된 습관과 자신 (부인)을 배려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남편의 입장에서는 어쩌다 실수한 부분을 너그럽지 못하게 받아주지 않고 따지는 것이고 때로는 남편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생각까지도 해서 더 갈등은 깊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바로 상대방을 생각하며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이다. 즉, 이미 갈등의 시작에서 누구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갈등은 깊어지기 어렵다. 결국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양쪽 모두 자신의 탓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의 탓이 더 크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제의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는 조건에서 시작한다. 가끔은 갈등 자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비난을 그대로 표면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갈등은 단지 물리적으로 다툼이 존재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쌓여 항상 갈등이 터질 수 있는 화약고 같은 상태도 포함되어야 하고 사실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갈등이란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서 찾으려는 힘든 과정이다.


갈등의 순간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서로 다투는 과정은 사실 많은 사람들은 피하고 싶은 과정일지 모르지만 사람을 더욱 더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어쩌면 더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크게 두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본다.

1.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고 상대방의 인격, 성격 등 근본적인 잘못으로 인해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태도

2. 상황 situation 과 상태 condition 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실수 mistake 와 오해 misconception 을 구별하고 원인을 찾으려는 태도

격적인 상처를 주다...

첫번째의 태도는 생각보다 많이 경험하게 된다. 아주 단적인 예로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야', '왜 이렇게 사람이 조급해', '너는 이게 문제야 항상 조심성이 없어' ... 와 같이 상대방은 어떠하다 와 같이 상대방의 근본적인 성격, 인격 등을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태도이다. 일상의 갈등에서 잘 들어보면 이렇게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상대방의 태도를 들을 수도 있다. 이런 근본적인 판단을 내려버리면 문제의 원인은 아주 깔끔하게 상대방의 문제이다. '너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변기의 뚜껑을 내려놓지 않고 나온다' 라고 결론을 내려버리기 때문에 자신은 이 갈등에서의 피해자일뿐 문제의 원인은 상대방에 있다고 정리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근본적 성격, 인격적 내용을 건드리는 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상대방을 아주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리면 문제의 원인 뿐만 아니라 다툼의 승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입장이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쁜가. 감정이 얼마나 상하는지 상상하면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라도 이런 말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 한사람 이상의 이런 태도는 갈등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전환시켜버린다. 첫번째는 최초 갈등이 무엇에서 시작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처음의 변기 뚜껑은 아내의 경우 '이기적인 남편을 합리화하기 좋은 도구'가 되고 남편은 그런 사소한 변기때문에 자신이 이기적 인간이 되었다는 억울함과 분노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결국 갈등은 변기에서 인격의 문제로 승화(?)되게 된다. 즉,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남편은 성격을 싹 뜯어 고치고 남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기적 요소를 버리기 위해 수많은 고행과 번뇌를 감수해야만 할 것 같은 소위 인격 개조 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남편은 자신이 이기적이 않다는 것을 해명하기 수많은 예를 들며 아니라고... 말하면서 더욱 더 알수 없는 스스로의 찌질함에 빠져들게 되어버린다. 인간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상대방을 단적으로 성격이나 인격을 단정지어 말하는 태도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도 상대방은 무엇이다, 어떻다 말하는 것은 참 거짓을 떠나 한 사람이란 우주 cosmos 를 무시하는 것이다. 한사람의 역사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한 사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고통과 아픔, 기쁨과 희열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복잡하게 만들어진 한 서사시같은 존재이다. 그건 금수저를 물고 나와 화려한 삶만을 살았던 사람이나 부모없이 어렵게 자라고 힘든 여정을 거친 사람이나 상관없다. 그 복잡한 우주를 지구의 시궁창만 보고는 '우주는 시궁창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의 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소위 함부로 말한다는 것 중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은 갈등을 심화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잘못도 존재하는 갈등의 문제에서 상대방의 근본적인 문제로 인해서 발생했다고 믿고 갈등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미는 무책임한 행동도 정당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는 '인격적인 상처' 를 만든다고 표현하고 싶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최소한 개인적으로 인간은 그런 존재일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인격적인 상처는 자신을 한순간에 규정해버리고 자신이 지향하고 싶은 모습이 아닌 지양하고 싶은 모습으로 공격받는다. 이타적이고 남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이 '이기적인 인간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지만 아주 강한 정신력을 가져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그런 인격적인 상처에 쉽게 빗장을 내려 공격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런 인격적인 상처를 주는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그런 말들은 힘들고 아프게 다가오기 쉽다.

등 해결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

첫번째와 다른 두번째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 인격적인 상처를 쉽게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다. 동적이고 하루에도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이 혼돈을 이루며 사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런데 그런 실수의 원인이 원래부터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너의 그 삐뚫어진 인격때문이야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자존감은 얼마나 흔들리겠는가. 결국 자신만 바라봐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바라볼 때는 아주 단순화시킨 명제로 단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 때로는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무조건 저사람은 '이기적 인간'이라 바라보는 순간 갈등의 해결은 '저 이기적 인간이 바뀌지 않는다면 해결책은 없어...'가 된다.

본 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그냥 고민하는 모습이 맘에 들어서...

개인적으로 만난 분 중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서 가장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준 분이 계신다. 이분의 대화에서 갈등 해결의 지혜로운 대처를 생각해 본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태 situation 과 상황 condition 에 따라서 자신이 선택하는 말과 행동이 정해진다. 따라서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상태와 상황에 따라서 그 원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사람의 말과 행동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감정의 해석 analysis based on acceptant's emotions 이 아닌 상황과 상태를 통한 분석 analysis based on situation & condition 을 통해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상대방 / 본인의 실수 mistake 가 무엇이고 오해 misconception 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수는 인정하고 오해는 풀면 된다."

정확히 전달받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핵심 내용만 파악해서 전달해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실수도 하고 실수하지 않았다 해도 상대방의 오해때문에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갈등은 시작되고 심화되기 시작한다. 이때 맘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자신의 감정으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지 말고 상대방이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상태와 상황을 먼저 생각해 본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감정을 잠시 보류하고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할 수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경우 갈등은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서 시작한다. 친밀한 관계도 포함되지만 직장과 같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여 정서적 거리 sentimental distance 만큼 업무적 거리 operational distance 도 포함한다. 결국 이런 갈등을 한번 잘못 판단하여 '인격적인 상처'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한번 판단하면 갈등은 점점 감정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 미움이란 안경과 사랑이란 안경 ] 이런 경우 상대방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에 버금가는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인간은 항상 옳을 수 없다. 이는 실수하고 잘못된 말과 행동 그리고 나아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사람을 판단하는데도 항상 옳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은 편견과 자신만의 좁은 경험과 식견으로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타인의 상태 situation 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정보들에 의해 타인의 상황 condition 도 알 수 없게 된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인간의 불완전성 faultiness of human' 를 인정하고 섣부른 감정적 판단에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시작한다.

실 세상에서의 상처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연구 주제 중 하나가 가족 구성원 들 사이에서의 언어 표현의 유사성 similarity of linguistic expression 이다. 단순히 자주 사용하는 어휘나 어투의 문제가 아니라 앞서 소개한 '인격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정적인 표현의 사용이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알고 싶다. 자식의 실수 혹은 잘못에 대해서 부모는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조언을 하는 순간 부모의 말을 잘 들어보면 상당히 인격적인 상처가 많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아이가 어떤 실수를 하면 '너는 맨날 이래!' 혹은 '어디서 못된 짓'만' 배워서' 과 같은 표현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아이들은 자신에게 부모가 말하는 표현을 배우는 것도 있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언급할 때 더 많이 배우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면서 자신 앞에 끼어든 차량을 향해 욕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상대에 대해서 표현하는 것도 아이들은 좋은 교본이 되기도 한다.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예는 연인 관계일 것이다. 사소한 계기로 다툼이 일어나고 나면 감정적으로 나쁜 상태에서 상대방에 대한 쉬운 판단을 한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라고 말하면 이기적이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자신이 이기적이지 않은 근거를 들기 위해 그렇지 않았던 사건들을 열거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란 했던 이기적이란 말에 그렇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누군가 '너는 바보야' 라고 놀리는 말에 쉽게 상처받고 '나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이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문제는 가까운 사이일 수록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로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어떤 것이 약점인지 잘 알기 때문에 상대방이 쉽게 반응하는 부분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자란 남자 친구가 다툼에 여자 친구를 밀치게 되었을 때 여자 친구가 말한다.

"너는 아버지 닮아 왜 이리 폭력적이야"

이 말 속에는 서로가 가깝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개인적 트라우마 뿐만 아니라 너는 폭력적이다 라는 단적인 상대방에 대한 인격적인 상처를 포함하고 있다. 과거의 아픔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서로 이야기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상처를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 상처를 다시 찌르고 만다.

처를 만드는 다양한 무기들... 

"너는 무엇(나쁜 내용)하다" 와 같은 형식도 있지만 사실 좀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유형은 다음과 같은 형태이다.

"너는 맨날 그렇게 밖에 못해!" , "넌 너만 잘났지!" , "니가 뭘 안다고 그래!" , "너 같은게 할 수 있을 거 같아!" , "이것도 못하니!"

(※ 예들은 정신과 임상을 하고 있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 가벼운 실수에도 상대방의 능력이나 가치를 무시하고 전체로 확대하는 인격적인 상처이다. 즉, 원래 너의 능력이나 가치가 제대로 된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확정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직접 실수를 하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에도 화풀이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다.


한 시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으로 자기 아들에 대한 자부심으로 며느리의 모든 부분이 부족해 보이고 심지어는 잘난 자기 아들과 결혼해 호강하며 산다고 생각하고 학벌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항상 무시하였다.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어도 시어머니는 "너가 내조를 못하니깐 내 아들이 이렇게 되었잖아! 도대체 너는 하는게 뭐야 우리 아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매번 모든 일을 이 화풀이 맞춰 끊임없이 며느리를 혼낸다. 바람에 쓰러진 화분도 며느리 탓을 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런 대접을 받는 며느리 스스로 어떻게 자신을 생각하게 되는가이다. 아무리 아닌 이야기도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고 특히 위계 질서와 권위에 의해 강압적으로 듣는 입장이라면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부딪치며 힘들어지고 이런 현실에 내성이 생기면 정말 스스로를 '별 것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 더욱 더 상처는 깊어지게 된다. 언젠가 자기 아들의 공부를 봐주는 엄마가 과학 문제를 설명하다가 한숨을 쉬고는 "너는 어떻게 이런 것도 못 푸니?" 라고 하길래 그 엄마에게 가서 "당신 로렌스 수축과 약한핵력과 전자기파가 어떻게 통합되는지 설명해봐!" 라고 소리지르고 싶었다. 정말 세상의 [ 어떤 진리도 상처보다 깊을 수 없다. ]

운 길에는 항상 함정이 있다...

자신의 감정대로 말하고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많은 인격적인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래서 사람의 말은
가볍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무겁게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 道馬 垣俊

그런데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대로 하는 말들의 피해자는 누구일까? 앞의 예처럼 시어머니의 독설같은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며느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결국 그 가족 구성원 특히 자식들은 그 언어 표현을 쉽게 받아들인다. 말을 무겁게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과 상태를 알려고 노력하고 조금은 어렵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어려운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순간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적 무게에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럴 때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 된다. 문제는 감정의 단계에서 한 숨 쉬고 시간을 가지는 것과 실수를 인정하고 때로는 용서를 구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힘든 것인지 모를 뿐이다.


정신과 상담받는 청소년 들 중에는 표현이 짧고 단정적인 이야기가 많은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가끔 그런 아이들의 부모들은 주변 사람들은 어떤 표현을 쓰는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어떤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런 행동은 나빠요' ,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해요' 와 같이 예외없는 단정적인 표현들로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족 안에서 감정따라 쉽게 한 말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다. "너가 할 줄 아는게 뭐야!" 라는 그 감정적 표현에 상대방은 무엇인가 하려고 하기 전에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고 "니가 뭘 안다고 그래!" 라는 말에는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들도 '내가 생각한게 뭐 맞겠어?' 라는 의구심만으로 포기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을 단정하고 함부로 이야기하는 쉬운 이야기들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할 수 있는 희망보다는 해도 소용없다는 포기를 먼저 만들기 쉽다. 그리고 정서적 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 영향은 더 크게 받는다. 특히 가족 중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군가의 편이 되어준다는 것...

어느 커피 전문점에서 두 여인이 이야기를 한다. 자기 남자친구가 보낸 문자를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이거 대답하는 것이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지 않아? 하트도 없고 이거 표현도 ... "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쓰지 않는 메신저 서비스에는 자신의 감정을 바로 보여주는 기능이 있나 싶었다. 텍스트에 불과한 문자에서도 상대방의 의도 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다투고 정말 노래가 좋아 공유한 노래가 상대방의 감정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며 가사를 집중해서 듣고 상대방의 감정을 판단하려고 한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은지 부터 생각하게 된다.

같은 대상도 미움의 안경을 쓰면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이고 사랑의 안경을 쓰면 잘난 척 하는 사람도 똑똑해 보이는 것이다. 가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나쁜 absolutely bad 행동이 무엇이 있냐고 물어본다. 그럼 '살인하다' 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고 달려든 강도를 살인했다' 라면 어떻냐고 물어본다. 한 생명이 사라지게 했다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살인하다는 말 조차도 사실 상황 situation 에 따라서 절대적으로 나쁠 수만도 없다. 생각보다 인간이 너무도 허술한 존재라는 것은 법정에서 억울한 누명으로 몇십년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진범이 늦게 나타나 그 세월의 억울함을 쉽게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는 순간에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백함을 믿을 것이다.

누군가의 편이 되어준 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은 적이 아님을 먼저 아는 것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며 다투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많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지만 다툼의 순간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끌어내리려고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과거 행동 말뿐만 아니라 정황적인 추측까지도 포함하여 상대방이 이 다툼에서 잘못했다는 것을 결론내리려고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논리적 과정이 아니라 단순히 감정적 소모일 뿐이다.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말했지만 사람의 행동과 말은 시간이라는 차원 속에서 다른 상황과 상태를 가질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완전하지 않은 인간은 실수도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실수와 잘못을 하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그럴 수 있다.

상대방이 적이라면 이겨야 하는 대상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라고 해주고 싶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인격적인 상처를 덜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 삶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기회가 된다.

랑은 서로의 모순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과 슬픔에 대해서 같이 이해하고 슬퍼해주는 것... 그래서 어떤 행동도 생각도 사랑 앞에서는 설명되게 된다. 억지로 해석하고 분석하려 하지 않아도 항상 그대로 자연스럽게 수용된다.

인격적인 상처에 대해서 ─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Wednesday, May 27, 2015

느날 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지인의 지인이 다가와 인사를 할 때가 있다. 나의 지인은 다가온 자신의 지인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게 된다. 사소해 보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사회 관계의 시작인 소개 (introduction)을 통해 오히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게 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누군가를 소개시켜주거나 내가 소개받는 경우에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이름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 나와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이고 조금 확장한다면 소개시켜주는 사람과 소개받는 사람 사이의 공통점이 될 수 있는 부분, 학연 및 지연도 이에 포함될 것이다. 이런 사회적 관계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관계일 수 있지만 확장하면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관계를 위한 작은 시작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소개받을 때 정말 '내가 누구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나또한 그런 형식적인 소개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대부분 비슷한 형태로 누군가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친구와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친구의 친구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친구는 나를 자신의 친구에게 이렇게 소개시켜주었다.

"This is June, also born in June. and this guy got a great and warm heart toward around!" 

그리고 몇몇 소개를 추가했지만 그 소개를 듣고 난 묘한 감동과 알수 없는 깨달음을 전달받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도 내 이름이 무엇이다 상황에 따라 항상 다르게 말했었다.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생각해서 인도계 친구들에게는 탐Tom,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토마스Thomas 그리고 동양계 아이들에게는 Wonjun 등 그 규칙은 결국 내 맘대로 내키는대로였다. 그런데 친구의 소개를 듣고 이후 난 내이름을 June 이라 소개하는 것이 참 좋았다. 내가 6월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내 이름을 통해서 알릴 수 있기도 하고 항상 그 친구가 왜 나를 June 이라고 불렀는지 그때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친구는 내가 아파서 심장시술을 받고 누워있을 때도 치료를 받으며 쉬는 동안에도 많은 위로를 해주고 기도도 자기 스스로 잘 못한다며 기도를 주변사람들에게 부탁해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힘든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그 힘든 정도를 측정해주는 사람과 달리 아무리 작아도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하는 성격같다. 그래서 나에게 내 심장은 어려운 일을 견디어 냈으니 이제 'a great heart' 라고 불러주었다.

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직업, 나이 심지어 내 가족들마저도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재벌의 아들이다, 정치인의 자식이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가족 친적이란 이유가 당신이 누구인지보다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랑을 간직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지 보다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것을 누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어버린지 모른다. 나는 친구의 그 멋진 소개를 통해서 내 스스로 얼마나 많은 껍질의 화려함에 그렇게 익숙하게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무엇을 가졌는지보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다 세상을 선하게 만드는데 얼마나 노력하는지 더 관찰하게 되었다. 그런 소개는 소개받는 사람의 직업이 바뀌어도 나이가 변해도 그리고 어떤이의 누군가가 아닌 독립적 존재 그대로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 있어도 '덜' 변하는 내용인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친구는 정의감이 넘쳐서 니가 불의한 짓을 하면 너를 때려버릴지 몰라...", "약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 와 같이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좋은 느낌, 그리고 내가 배우고 싶은 상대방의 모습들을 설명하며 소개하고 싶어졌다. 

시 사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ET IN ARCADIA EGO

변할 수 있는 조건과 상황, 영원하지 않은 것들 심지어 인간의 욕심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기준을 통해 누군가의 영혼을 설명하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싶다. 나란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소한 소개에도 우리는 인간이 가지는 따뜻함의 원천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인간이 인간을 향하는 보석같은 마음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은 그립다. 그 그리움은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그 따뜻함은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 소개의 미학

Friday, December 19, 2014

한민국의 한 항공사 부사장이 일등석에서 승무원을 혼내고 결국 사무장을 JFK 뉴욕 공항에 내리게 했던 사건은 대한민국의 모든 뉴스를 흡수하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Korea 라면 우선 North Korea 를 먼저 생각하는 외국 언론에서도 이번 사건은 비교적 비중있게 다루었던 것 같다.


갑의 횡포, 재벌 3세의 특권의식 등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이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법적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다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온할 때보다 어렵고 곤란한 일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태도를 보아야 속마음을 알기 쉬운 편이다. 사건의 당사자인 부사장이 아닌 부사장이 몸담고 있는 회사의 공식 사과문을 한번 살펴본다. 

1. 승객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 드립니다. 비상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승무원을 하기시킨 점은 지나친 행동이었으며, 이로 인해 승객 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사과 드립니다. 당시 항공기는 탑승교로부터 10미터도 이동하지 않은 상태로, 항공기 안전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2. 대한항공 임원들은 항공기 탑승 시 기내 서비스와 안전에 대한 점검의 의무가 있습니다. 사무장을 하기시킨 이유는 최고 서비스와 안전을 추구해야 할 사무장이 1) 담당 부사장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규정과 절차를 무시했다는 점 2) 매뉴얼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변명과 거짓으로 적당히 둘러댔다는 점을 들어 조 부사장이 사무장의 자질을 문제 삼았고, 기장이 하기 조치한 것입니다. 대한항공 전 임원들은 항공기 탑승 시 기내 서비스와 안전에 대한 점검 의무가 있습니다. 조현아 부사장은 기내 서비스와 기내식을 책임지고 있는 임원으로서 문제 제기 및 지적은 당연한 일입니다. 3. 철저한 교육을 통해 서비스 질을 높이겠습니다. 대한항공은 이번 일을 계기로 승무원 교육을 더욱 강화해 대 고객 서비스 및 안전 제고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결론은 더욱 더 승무원 교육을 강화해 고객 서비스 및 안전 제고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많은 이들의 공분과 지적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 회사를 경영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가졌으면 하는 아쉬운 면을 이야기하고 싶다. 

공기를 탑승하는 승객들 중 가장 큰 안전사고가 무엇일까? 대규모의 충돌이나 추락사고에 의한 사고야 그 규모가 크기 때문에 논외로 두고 항공기를 탑승하는 승객들의 생명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의외로 사소한 것들이다. 보통 우리가 사소하다... 란 표현을 쓸 때는 많은 경우 의, 식, 주에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많이 알려진 장기간 좁은 좌석에서 움직이지 않아 생길 수 있는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이 있다. 하지정맥류와 같이 장시간 좌석에 앉아 있어 생기는 문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를 발생할 수 있는 요인은 역시 먹는 것이다. 특히 음식이나 특정 물질에 의한 아나필락시스 (anaphylaxis) 는 조심해야 한다. 아나필라시스는 특정 알레르기 항원에 의해 전신적 알레르기 반응이 단시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호흡기, 소화기에 급격한 반응으로 생명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주게 되어 사망에 이르기 쉽다. 


그런데 이런 아나필락시스의 원인이 되는 항원 물질 (식품) 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견과류이다. 견과류의 경우 그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중 어떤 물질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일 수 있다는 후보군은 있지만 그 마저도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가급적 이런 견과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기업이라도 경영자는 무엇을 변화해야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중견기업도 아닌 소위 재벌 기업의 부사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서비스가 매뉴얼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이에 대해서 바로 즉각적인 반응과 지적을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반응이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이성적이고 자신이 속한 기업을 위한 반응이었다면 견과류는 왜 고객의 의사를 물은 다음 원하는 경우 포장을 뜯어 그릇에 담아 고객에게 전달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했을 것이다. 즉, 항공사의 기내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책임 경영자라면 현재의 매뉴얼의 항목마다 "왜" 이런 서비스 매뉴얼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철학과 이유에 대해서 스스로 공부했어야 할 것이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경영자의 몫인가? 경영자는 오히려 매뉴얼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면 현실과 매뉴얼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왜 매뉴얼이 아닌 현실대로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처음 이 사건을 듣고 들었던 생각은 아마도 견과류라는 특수성 때문에 고객의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미국의 항공사의 경우 많은 경우 견과류 뿐만 아니라 알러지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식품 (먹고 남은 씨 혹은 특정 재료 포함) 에 대해서는 별도 포장을 한다. 기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중 승객의 안전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사장이 이런 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매뉴얼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지침일 뿐 절대 변경되서는 안되는 바이블이 아니다. 

이 사건을 통해 개인적으로 사회가 가지는 두가지의 결핍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싶었다. 첫번째는 인내 (patience) 의 결핍이고 두번째는 질문 (question) 의 결핍이다. 

인내의 결핍 

개인적으로 스스로 똑똑하다는 착각에 빠져 살 때, 그만큼 내가 내리는 결정은 항상 옳을 것이라는 심각한 착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즉, 내가 옳고 내가 이성적인데 내가 내리는 결정이 항상 옳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성격을 가지고 대학을 포함한 사회를 통해서 살아가다 보니 내 결정 중 인내심이 부족한 즉흥적인 결정의 경우 내가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해도 상당히 편향되고 감정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결국 내가 아무리 옳은 삶을 살았다고 해도 빠르게 정해지는 결정들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감정적 판단이고 결국 내 감정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불완전한 결정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당장 내 눈앞에서 무엇인가 결론이 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남녀 사이에서 당장 확답을 얻어야 자신의 성질이 풀리는 경우이다. 상대방에게 시간을 주지 않는다. 당장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과일도 햇볕에 익어가기 전에 과육은 쓴맛을 가진다. [ 인내는 기다림이 아닌 과정임을... ]

많은 경우 참지 못해 얻는 결과는 대부분 쓴맛을 가진 덜 익은 과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참지 못하고 덜 익은 과일이라도 먹으려고 하는 것은 인내가 가지는 그 가치를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경험의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은수저를 손에 쥐고 태어나 자라면서 원하는 것은 대부분 이룰 수 있는 사람에게 인내라는 가치는 불필요할지 모른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서비스가 맘에 안들 때 그 순간을 참을 수 있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감정에 의해 행동을 해도 마땅히 그것이 옳지 않은 행동일 수 있다고 충고해주기 보다는 그 감정에 휘둘려 난장판이 된 순간에도 누군가 뒷처리를 해주었다면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했을 때 누가 피해를 볼 수 있는지 상대방은 어떤 기분인지 별로 배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잠시라도 인내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자신이 느껴야 하는 감정적 불쾌함이 매뉴얼의 문제인지 아니면 서비스를 제대로 하지 않는 승무원의 문제인지 한번 쯤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더욱 더 인내의 가치가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높은 위치란 그만큼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인내가 작동하고 나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왜 자신이 감정적으로 불편한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근본적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즉, 본인이 불편한 것이 '매뉴얼대로 서비스하지 않는 승무원'이 마음에 안들어서인지, 아니면 '마침 매뉴얼대로 서비스하지 않은' 승무원이 마음에 안들어서인지, 포장뜯기 싫었던 자신의 귀찮은 마음때문인지, 이미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때 마침 포장안 뜯고 서비스한 승무원이 마음에 안들어서인지 는 알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고 나면 사실 그 이후 어떤 변명과 변론을 해도 궁색해진다. 

질문의 결핍 

특히 기내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임원이였다면 감정의 문제를 떠나 나에게 다가오는 불편이 사적인 내용인지 아니면 내가 담당하는 기내 서비스가 정말 문제인지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충분한 시간을 인내의 시간이라 표현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나에게 다가오는 그 감정적 불쾌함과 내가 제대로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그 감정의 문제를 차분히 질문하는 것이 바로 변화를 만드는 경영자와 그렇지 않은 경영자의 차이가 아닐까? 


많은 경험은 없어도 기내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는 임원의 입장에서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견과류는 승객의 의사를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만약 견과류가 아나필락시스와 같은 승객의 안전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면 포장을 뜯어 서비스하는 것이 안전할까? 아니면 포장된 상태에서 서비스하는 것이 더 안전할까
현재의 매뉴얼에는 문제가 없는 것인가?
현재의 매뉴얼 상태에서 더 안전한 서비스를 위해서는 어떤 선택이 좋을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무장에게 '내릴 것을 권고(?)...' 한 순간 결과는 자신의 감정에 의한 상당히 즉흥적 결과가 되어버렸고 결국 경영자의 한사람으로 특히 자신이 책임지는 부분에 대한 많은 고민은 저 멀리 하늘 위로 날라가버렸다. 좀 더 현명한 경영인이라면 잠시의 감정은 참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수많은 질문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질문들은 매뉴얼이 왜 필요하고 그 매뉴얼의 각 항목은 왜 만들어졌고 필요하다면 질문을 통해서 현재의 매뉴얼을 개선하고 고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멋진 경영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하지 않는 학생을 만들어 내는 교육은 질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세상의 잘못에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세상의 잘못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관심하게 생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 교육이 학생들에게 질문한다 ─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 

가끔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몇개의 요소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에서 놀랄 때가 있다. 즉, 몇가지 요소들이 결국 이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의 사건도 비슷하다. 인내없는 사회 그리고 질문없는 사회는 당장의 결과를 바라고 현재의 구조 안에서 빠른 결과물을 바라는 어른들의 욕심으로 이룩된 사회에서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아닐까 싶다. 인내의 가치를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더욱 더 감정에 치우치게 될 수 밖에 없다. 빠르게 결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에 영향을 받게 되고 옳은 결론보다는 빠른 결론을 바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많은 것을 심사숙고할 수 있는 시간보다는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게 된다. 

드라마 마르코 폴로 (Marco Polo) 에서 원나라 성종이 되는 테무르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전하는 대사 하나가 있다. 

Patience, patience to ensure that true aim finds the true target.
인내, 인내는 참된 목적이 참된 목표를 찾도록 해준다. 


경쟁 사회에서 빠르게 결정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교육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보다 무엇이 맞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빠른 결정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결국 빠르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혀 하지 않은 체 자신의 감정적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빠른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결정...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선택을 위해 인내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그 인내의 시간은 그저 기다림이 아니라 항상 질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참된 인내는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차분히 제거하고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많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질문이 아닌 해답을 주는 정치인,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해답을 제시하는 지도자는 많은 경우 자신이 옳다는 가정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겸손의 미덕이 없기 때문이다. 겸손은 단지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사회에 영향력이 많은 인물이 겸손하지 않을 때 제시된 정답에 그저 따르는 집단과 제시된 정답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내하지 못하는 사회... 문하지 못하는 사회... 

우리가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세상의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되고 많은 사람들은 그 문제의 희생자로 끊임없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인내없는 사회, 질문없는 사회

Friday, March 21, 2014

람의 말에는 음식에서 찾을 수 있는 다섯가지 맛이 있다.

기분좋게 하기 위해 단맛같은 달콤한 말도 필요하다.
자극되는 느낌 위해 짠맛같은 강렬한 말도 필요하다.
신선하게 하기 위해 신맛같은 상쾌한 말도 필요하다.
깨우치는 생각 위해 쓴맛같은 거슬린 말도 필요하다.

달콤한 말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러나 달콤한 말이 계속 될때 다른말은 듣기 싫어진다.
우리에게 활력소를 주던 이 달콤한은
어느새 우리에게 위험한 말이 된다.

강렬한 말은 생각의 자극을 주게 한다.
그러나 강렬한 말이 계속 될때 자극조차 점점 약해진다.
우리에게 자극원이 되던 이 강렬함은
어느새 우리에게 피로한 말이 된다.

상쾌한 말은 의외의 동기를 부여 한다.
그러나 상쾌한 말이 계속 될때 피로또한 같이 쌓여간다.
우리에게 시금석이 되던 이 상쾌함은
어느새 우리에게 불쾌한 말이 된다.

거슬린 말은 반성의 기회를 부여 한다.
그러나 거슬린 말이 계속 될때 감정먼저 쉽게 상해간다.
우리에게 전환점이 되던 이 거슬림은
어느새 우리에게 파괴적 말이 된다. 

마지막 맛이 있다. 이 맛은 우리에게 늦게 알려진 맛이다.

Credit: Rafa Irusta, Shutterstock


칠맛 (savory taste)

우리의 식욕을 당기는 이 맛은 늦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어떤 식욕도 없다면 먼저 네가지 맛은 그 어떤 의미도 없어진다. 우리의 말에도 이 감칠맛이 필요하다. 만약 누군가와 대화하는데 알 수 없는 매력으로 계속 대화하고 싶고 계속 듣고 싶거나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 안에는 감칠맛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람이 사람을 향하는 마음...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감칠맛이 아닐까. 

말의 맛

Friday, May 17, 2013

스승에게 제자가 찾아와서 오랫동안 고민한 질문을 내 놓았다. 

"스승님,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항상 어렵고 무엇인지 알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스승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제자에게 몸에 품고 다닐 수 있는 크기의 칼을 가지고 오게 했다. 제자는 스승의 말대로 적당한 크기의 칼을 가지고 와서 스승에게 드렸다. 그러자 스승은 제자에게 칼을 칼집에서 뽑아 책상 앞에 나란히 놓고 제자에게 질문했다.


"너는 칼집이나 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쪽을 선택하겠느냐?" 

제자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스승에게 대답했다.

"저는 칼을 선택하겠습니다." 

칼을 선택한 제자에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하루동안 그 칼을 가져가서 절대 놓치 말고 몸에 지니고 생활하다가 내일 다시 여기에 오기 바란다. 그 다음 너의 질문에 대답해주겠다." 

집이 없는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불편할 것을 예상한 제자이지만 스승의 가르침이 궁금하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거란 기대에 스승이 시킨대로 칼집이 없는 칼을 지니고 하루 내내 생활하고 다음 날이 되어 제자는 다시 스승을 찾아왔다.

"스승님, 칼집이 없는 칼을 지니고 다니니 너무 불편했습니다. 칼에 다칠까 걱정되어 노심초사 다녀야 했고 그러면서 몸에는 알게 모르게 상처들도 나고 모든 행동에 신경이 쓰이고 혹시나 칼에 다른 이들이 다칠까 불안해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스승님 이제 어제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스승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의 말에 이어갔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바로 칼과 칼집과 같은 것이다. 관계란 짝이 맞는 한 쌍의 칼과 칼집을 선택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칼집이 없는 칼은 항상 불안해 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상처를 입게 되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지. 그렇기 때문에 좋은 관계란 너의 칼에 맞는 칼집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불안을 잊어버리고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닐까?" 

제자는 조금은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으로 다시 질문했다.

"그렇다면 그런 칼집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스승은 조금은 단호하게 제자에게 이야기했다.

"어제 너에게 칼과 칼집을 선택할 수 있던 순간 너는 별 고민없이 칼을 선택했다. 그러나 너에게는 분명 칼이 아닌 칼집을 선택할 수 있는 순간이 있지 않았느냐? 만약 모든 사람들이 칼을 선택한다면 분명 둘 모두 상처를 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상처 받을 것이다." 

람의 관계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순간 이미지처럼 칼이 떠올랐다. 대부분 칼과 칼집 중 선택을 한다면 칼을 선택할 것이다. 우선 무엇인가 힘을 가진 도구이고 칼집은 그에 비해 별로 쓸모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과 칼집이 한 벌의 물건이라고 해도 칼이 더 중요한 물건이라는 막연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칼을 선택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 할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관계가 칼과 칼집의 비유와 같은 성격이라면 모든 사람이 칼만 가지면 그처럼 비극적인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때로는 자신을 보호한다며 휘두르는 칼에 자신 뿐만 아니라 많은 주위 사람에게 상처주는 사람, 때로는 무엇이 진실인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가진 칼날을 믿으며 휘두르는 사람 등, 사람 사이의 관계는 마치 이런 칼을 품으면 자신이 상처받고 자신이 다치지 않기 위해 휘두르면 주변 사람들이 피해보게 만드는 칼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제는 자신의 칼에 맞는 칼집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이 칼과 칼집의 선택권이 존재할 때 칼집을 선택하는 것도 필요할지 모른다. 자신의 칼에 맞는 칼집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 관계는 불안이 사라지고 상처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언제든 칼은 칼집에서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 당장은 평화로운 상태라고 해도 인간은 언제나 위험한 존재이다. 영원히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며 불안해 하기 보다는 칼을 품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니체에 따르면
자신의 삶의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하며
의혹과 악의, 자기부정의 태도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며 살아가는 사람을 '병자'라 부른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상처를 찢고,
오래전에 치유된 상흔에서 피 흘린다.
그들은 친구와 아내와 아이들과 그 밖에
그들의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든다.

─ 김정현의《철학과 마음의 치유》중에서 -

사람 사이의 관계란 무엇일까?

Wednesday, May 15, 2013



혼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가 사위에게 해주는 이야기. 이렇게 멋진 wedding speech 는 처음인 것 같다.

Philip, I want to tell you a story and like all good stories it starts like this...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father and in case you can't figure that out, that's me.
This father had a wonderful little boy. He was very happy.
Then one day, he found out his wife was going to have another baby. 

So I prayed, "Lord if it's Your Will... make her a little girl." And He did.
I was the first person to hold her in my arms.
And I looked at her and said, "Lord make her like her mother." And He did.
She was loving and giving and so good and so kind. 

But then I realized I was getting left out
So I said, "Lord, make her like me." And He did.
She could drive a truck and a tractor. She could load hay and chew tobacco.
Do you realize what you're getting?
But at the same time, she was opinionated, emotional and hard-headed.
So I said, "Lord that's enough of that. Make her like YOU." And He did.
He gave her the desire to serve people. She loves people.
She gave her life to being a nurse. She's brought people back from the dead.
And she's held the hand of people who have breathed their last breath.
He gave her a heart of for missions and she's trekked all over the world.
Pushing canoes up swollen rivers. Laid on the on the floor as bullets whizzed outside.
So she could tell people about Jesus. 

But still something was missing.
So I said Lord, "Make her happy." And she met you.
See that look on her face? I never saw that, until she met you.
And I'm grateful for that.
Today I'm giving you the best thing I have to give.
And I just want you to know before I do that....
how hard me and God has worked to get her ready.
So Philip, as I give her to you, I don't think you'll mind if I give you one more word of advice.
Me and God's worked hard...
Don't screw it up! 

번역 by 몽달이

필립(사위), 이야기 하나 해주고 싶네. 그리고 모든 괜찮은 이야기들의 시작같이...
옛날 옛적에, 아버지가 있었네 혹시 눈치채지 못했을까 알려주지만 그 아버지는 나일세.
이 아버지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네. 아빠는 무척 행복했었다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아내가 다른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래서 기도했지, "하느님, 당신의 뜻이 허락한다면 딸을 얻게 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은 이루어주셨지.
나는 그 딸 아이가 태어나 가장 먼저 안아준 사람이었지.
그리고 딸을 보면서 기도했지, "하느님, 엄마를 닮게 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은이루어주셨지.
딸아이는 사랑이 넘치고 따뜻한 아이였고 매우 착하고 인정많은 소녀였지.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점점 소외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네.
그래서 기도했지, "하느님, 딸이 나를 닮게 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은이루어주셨지.
딸은 트럭이며 트랙터를 운전하였고 축사도 돌보고 담배도 재배하게 되었지.
어떤 딸인지 이제 알 수 있겠나? (얼마나 생활력 좋은 딸과 결혼하는지 알 수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고집세고, 감성적이고 완고하기까지 했네.
그래서 기도했지, "하느님, 이제 괜찮으니 딸을 당신을 닮게 해주세요." 그리고 하느님은 이루어주셨지.
하느님은 그녀에게 사람들을 봉사할 열정을 주었고 딸은 사람들을 사랑했다네.
딸은 간호사가 되어 삶을 개척해 갔다네. 딸은 죽음에서 사람들을 살려내기도 했다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숨을 쉬는 그 순간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네.
하느님은 그녀가 선교를 위한 용기를 주었고 딸은 전세계를 돌아다녔다네.
급류에 카누를 몰고가기도 하고 총알이 날라다니는 곳에서 몸을 피하기도 했다네.
그렇게 딸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다네.
그러나 여전히 뭔가가 부족했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했지, "딸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딸은 자네를 만났네.
딸의 얼굴 표정을 보았나? 자네를 만나기 전엔 볼 수 없던 표정이라네.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고맙다네.
오늘 나는 내가 자네에게 주어야만 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려 하네.
그리고 자네가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하네.
얼마나 나와 하느님이 현재의 딸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그래서 필립, 자네에게 딸을 주는 오늘 한마디만 더 자네에게 충고하고 싶다네.
나와 하느님이 이렇게 열심히 만들어 놓았으니
망치지 말게나. 

망치지 말게나 ─ Don't screw it up!

Friday, February 22, 2013

CSI: NY 시즌 9 는 다른 시즌에 비해서 참 멋진 에피소드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에피소드 11 (Command+P) 편에서 부검의 시드 박사 (Dr. Sid) 가 뉴욕 시민 10명에게 각각 백만불을 익명으로 보내면서도 자신이 했던 선행을 들어내지 않았지만 결국 예리한 조 댄빌 (Jo Danville)에게 들키는 내용 등 배우들의 대사와 내용이 다시 보고 싶을만큼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가 특히 많은 시즌이다. 에피소드 16 로 방영한 Blood Actually 도 그런 잔잔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였다.


CSI: NY 시즌 9 에피소드 16 ; Blood Actually 은 큰 줄기의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해서 3개의 사랑에 얽힌 에피소드 세개를 짧게 해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하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 남자가 의문의 사고로 쓰러져 죽었지만 부검결과 혈당과다로 쇼크로 죽었고 부인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조사 결과 결국 부인이 범인이었다. 남편은 원래 선천성 당뇨병(diabetes type I)를 가지고 있어서 설탕이나 초코렛을 섭취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부인은 발렌타인 데이를 맞이해서 무설탕 초콜렛이라고 속이고 설탕 가득한 초콜렛을 먹도록 했고 혈당을 내리기 위한 인슐린 주사에도 미리 설탕물을 넣어두어 인슐린 주사를 찌르고 남편은 혈당과다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부인이 죽이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간단했다. 남편이 자신 몰래 바람피고 있고 남편의 핸드폰을 통해서 바람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자신과 가기로 했던 여행까지 같이 가기로 했던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살인을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나서 경찰 조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오히려 남편은 부인을 위한 여행 선물을 위해 여행사 직원과 이야기한 내용이었고 깜짝 선물로 준비하려고 했던 것을 부인이 오해하고 살인한 것이었다. 사건이 종결되고 셀던 호크 박사 (Dr. Sheldon Hawkes) 와 대니 메셔 (Danny Messer)와의 대화 중 일부이다. 젊은 시절 뚱뚱했던 호크 박사의 사진을 보여주며


Messer: Whoa-whoa-whoa-whoa-whoa, this is you?
메셔: 어라~ 어라... 세상에.. (....) 이게 너란 말야?

Hawkes: Yeah. I was 20, and madly in love with a girl named Susie Thomas. But she couldn't see past my size, pretended I didn't even exist and broke my heart.
호크: 그래. 그때 20살이었고 나는 수지 토마스(Susie Thomas)라는 여자에게 포~옥 빠졌었지. 그러나 이 몸집인 나를 못본 척 했고 (무시했고),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었고 나는 마음이 상처입었었지.

Messer: Eh, what'd you do about it?메셔: 어~라 그래서 어떻게 했어?

Hawkes: Starting working out, eating right. I was a different man when I ran into Susie years later.호크: 운동하기 시작했고 식사도 조절했지. 그리고 일년후에 수지 앞에 섰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지 (다이어트에 성공했단 말)

Messer: Yeah, that must've felt pretty good, huh?메셔: 와우~ 음 괜찮았겠는걸 그렇지?

Hawkes: Yeah, yeah it did... until... she told me that she had a giant crush on me, too, but was afraid of what her friends would say.호크: 그랬지... 근데 그녀가 나에게 당시에 관심이 있었지만 그녀의 친구들이 뭐라고 이야기할지 두려웠다고 하기 전까지는 괜찮았었지 (더 기분이 안좋았단 말)

Messer: Of course.메셔: 그렇군...

Hawkes: Yeah. And I realized, you know, that love has the power to overcome almost anything, but only if we all can get past our own prejudice and let it.호크: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지, 사랑은 거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그러나 우리의 편견들을 모두 버려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Messer: Yeah. I'm gonna keep this.메셔: 그래. 나 이 사진 가질께


남편은 부인을 위해 사랑하고 있었고 부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부인은 그 노력과는 반대로 오해로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살인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진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 전에 섣부른 판단으로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방법은 남편이 가지는 약점을 잘 활용해서 가까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을 가지고 살인을 했다는 것이다.

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고 공유해야한다고 하지만 정말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믿고 사랑해줄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비밀과 아픈 상처를 알려준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신뢰하기 위한 시작으로 공유한 비밀과 상처가 결국 자신에게 칼이 되어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이 이해하는 세상에 상대방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의 세상에 대해 신뢰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나라없이 이스라엘의 억압을 받아오는 것을 참지 못한 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미국내 이스라엘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외교 로비 및 금품 수수 등의 비리 내용을 폭로하기 위해 일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미국 내에서 좋은 대학 교육을 받고 엔지니어로 좋은 직장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임시 정부를 위해서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스파이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과 다르게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국의 감시를 받아오던 사람이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사랑하는 마음에 더 이끌렸고 결국 팔레스타인을 위한 활동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으로 점점 희석되기 시작하였지만 이스라엘 정보국은 이 사람의 여자친구까지 뒷조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든 관계를 정리해야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정보국에 의해 다치거나 해를 입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정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자는 남자에게 매달리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정보국은 결국 여자를 이용해 남자를 잡기로 했고 이스라엘 정보국은 여자에게 접근해서 남자에 대한 거짓 정보를 통해서 여자에게 오해를 만들고 그 여자는 결국 복수심에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다 넘겼고 결국 남자는 이스라엘 감옥에 이송되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감옥에 남긴 글귀가 다음과 같았다.

진정한 사랑은 왜 이별 후에 느껴지는가.
Why can human only feel the true love after a farewell.

군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신뢰한다는 것이다. 신뢰는 나쁘게 말한다면 최면이다. 상대방이 나를 진정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이별이 다가와야 느끼게 된다는 것은 참 서글픈 메카니즘이 되어버린다. 이별이 다가오기 전에는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이별을 하고 나면 후회가 밀려오는 사람도 있어 몇년이 훌쩍 지나도 걸어가는 길거리의 낙엽에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이별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름조차 희미해져가는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별의 고비에 서로가 보여주는 이별에 대처하는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생각나는 사람인지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준다는 것이다. 이별이 거듭되면서 마음을 열기가 더 어려워지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공유한 상처와 아픔이 이별로 이어지는 원인인듯 쉽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너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다 이해할 수 있어... 난 당신을 사랑하니깐..." 이라고 신뢰를 주어 아픔과 상처를 어렵게 이야기하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듯 받아들이지만, 그렇게 어렵게 이야기한 아픔과 상처라면 그 이야기를 자신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가쉽거리 이야기하듯, 혹은 자신은 이런 상대방의 상처와 아픔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신의 아픔과 상처가 공기 중에 떠돌면서 (On Air) 돌아다니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순히 자신의 사랑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의 상처도 받아줄 수 있을거라 이야기하지만, 이별의 순간 상대방에 대한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진정 사랑했는지 아닌지 이별 전에 더 느끼게 된다는 것은 장난같은 역학이다. 이스라엘에서 죽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스파이는 이별의 순간 상대방 여자가 자신을 향한 신뢰가 한순간 불신으로 바뀌고 자신의 상처와 아픔이 결국 무기가 되어 되돌아 오는 것을 느끼고 역설적으로 이별 후에도 믿어주는 신뢰에 대한 아쉬움으로 진정한 사랑을 조금 느꼈는지 모른다.

수많은 편견은 세상을 왜곡해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보지 않으려는 세상을 가리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가린 세상에 놓인 누군가는 불신으로 바라본다. 조금 더 인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전부인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본 모습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바라보는 모습만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불신은 자신이 두려움과 만난 결과물이다. 불신은 두려움을 먹고 산다. [ 불신은 두려움의 결과 ] 이다. 편견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보지 않으려는 태도이고, 불신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기에, 편견과 불신은 다른 세상에 대한 탐구와 용기를 포기하게 한다.

불신은 합리성과 논리성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그 누구의 초대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초대되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


요즘 너무 맘에 드는 사진과 연필을 이용한 작품이다. [ Ben Heine ] 의 작품으로 비현실적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연결되는 신비로운 이미지를 주어서 참 마음에 든다. 이 작품의 제목은 LOVE IS NOT FAR. KEEP LOOKING FOR IT! 이다.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세상의 존재와 만나는 방법은 상대방의 세상에 대한 신뢰와 초대가 아닐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만을 인정한다면, 나에게 필요한 사랑은 계속 찾기만 해야하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진정한 사랑은 왜 이별 후에 느껴지는가

Tuesday, August 28, 2012

만남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 오니까.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가장 비천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닿았을 때는 던져 버리니까.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니까.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남 - 정채봉

Sunday, August 26, 2012

게 말해 양보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진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언제나 우리의 삶은 인간의 관계 안에서 어떤 결투의 속성을 항상 가지고 가는 것일까? 그 결투에서 지게 된다면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인지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급하는 것은 자존심이다. 자존심이란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관계에서 진다는 생각, 혹은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무시 당했다고 느껴지는 느낌은 자존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존심이란 자신이 주체이고 객체또한 자신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 흔들린다면 사실 그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은 상대방이 될 수 없다. 자존심의 주체는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상처를 받을 때,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이 없어진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실제로 자신에게 없어진 것은 '자신감'일 뿐이지 자존심은 자신감이 없어진 자신의 책임일 뿐이다. 그런 자신감은 사실 자신은 틀리면 안된다 혹은 자신은 지면 안된다는 강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더 많이 생길 수 있다.

안철수 교수가 언젠가 모 실리콘 벨리의 기업체의 면접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 (I might be wrong) 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① 다른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고, ② 자기 발전의 가능성이 많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③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참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그 빈틈의 공간은 오히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래서 재미있는 연결 고리이지만 자신감이 높은 사람자신의 불완전성(incompleteness), 불안정성(instability)을 인정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일 수록 자신의 양보에 대해서도 항상 너그러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양보한다고 해도 그것이 단순히 지는 것이라고 연결시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감을 잃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존중하는 자존심또한 상처입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일상에서 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빗장을 열어놓은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아무리 누군가 나에게 '멍청한 놈'이라고 이야기해도 자신이 멍청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누가 뭐라고 해도 멍청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그런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바보가 된다면 이 세상에 질 것도 별로 없고 내 마음의 상처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한 것만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때로는 바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양보(yield)하는 것이 바로 행복을 얻는 것(yield)이라는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양보

Wednesday, August 8, 2012

원 응급실에 누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이었다. 옆 침대에 들어온 70대의 할아버지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 남편이 위급해지자 보호자로 같이 오신 할머니가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모르시며 울먹거리셨다. 가까이 있던 나의 엄마는 어느새 할머니 곁으로 가서는 어깨와 손을 잡아주며 당황해 하지 않도록 옆에서 같이 있어 주셨다.

정신 멀쩡한 나는 엄마의 행동을 보면서 오지랖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마저 했지만 아마도 안타가워 하는 그 마음이 그저 지켜보고 계시기 어머니도 힘드셨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들어가 삼일동안 보내고 일반 병실로 들어가는 날,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을 지나가는데 응급실에서 울먹이며 발을 구르시던 그 할머니께서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잘가라며 마중 나오신 것이었다.

일반 병실에 들어갔을 때 맞은 편 침대엔 다음 날 수술을 받기 위해 들어온 아버지 연배의 환자분과 어머니 연배의 보호자분께서 들어오셨다. 보호자로 온 분과 나의 엄마는 이야기가 잘 통하셨는지 같이 커피도 드시러 나가시고 서로 병실 안에서 수다도 자연스럽게 하시고 병실에 있는 이틀동안 가까워지셨고 그로 인해 병실 안에서 나의 생활도 별 부담없이 편안하게 눈치 보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에는 병동 앞까지 마중나오시며 아쉬움과 이야기하시며 인사했었다.


중환자실에서 나올때, 병실에서 퇴원할 때, 그 간단했던 마중들이 나에겐 참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별 말도 없었고 그냥 특별하지도 않은 그 인사 속에서 말이다.


람들과의 관계는 어쩌면 자신이 얼마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누군가에게 더 이상 위로 받을 수 없는 관계라면 특별히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덜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 우정 그 많은 대표적인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그 내면은 위로라는 작용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은 충분한 위로를 받으며 살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든 혼자서는 쉽게 포기할지 모른다.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 위로를 통해 상대방이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스스로 존재의 가치가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위로 받는 것 만큼 우리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상대방이 힘들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끔은 위로를 위해 상대방을 분석하고 상대방이 무엇이 필요하겠다 나름대로 판단하며 상대방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위로라는 말로 상대방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상황이나 경험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고 그렇게 위로 받고 싶어하는 상대방에게 '너는 아직 괜찮다' 라는 위로를 하려고 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로의 작용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이라는 노래 제목이 직설적으로 알려주듯 모두의 가슴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매직 표현(magic expression)은 세상에 없다. 위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분석해서 그에 맞는 처방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대방의 편에서 들어주는 인내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위로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은 위로가 가지는 일반적인 착각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요소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지적인 분석력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오히려 아무 말 없는 미소...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 그리고 나는 너의 편이라는 눈빛...



위로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결론이 아니라 문제를 보기 위한 서론일 뿐이다.

위로에 대하여...

Thursday, August 2, 2012

"아팠다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어 내고" 

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이 아팠던 적이 많았던 나였다. 그리고 그 아팠던 것이 후회스럽거나 원망스러운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아픈 이웃들을 보면서 그리고 꼭 아팠던 경험이 나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후 그 아픔의 경험이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기를 바랬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한다. 거듭 살펴보고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실수가 없는지를 생각하고 나서도 마지막으로 판단은 하지 말라고 한다. 심판자로 누군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본질을 판단하고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자신이 생각한 본질에 비추어서 끼워 맞추는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내 상황과 나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고 그리고 잠시라도 들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으로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에게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분은, 화도 나지 않고 내가 설득하려고 했던 상대방이 어쩌면 내가 설득해도 소용없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에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병마와 싸우면서 느낀 여러가지의 좌절과 시련, 그 안에서의 생각하지 못한 많은 아픔들에 대해서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팠다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어 내서' 뭘 할 것인지, 그렇다고 해서 아픈 것에 대해서 따뜻한 위로의 말도 해준 적도 없으면서 단지 아픔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상대방에 대한 내면의 통시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동정을 얻어내서 도대체 뭘 하는 것일까.

병마와 싸우는 많은 사람들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겠구나 싶은 이 말은 계속해서 머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심지어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닐까 하는 무서운 도돌이표를 새기면서 지금까지 내가 겪은 경험 안에서의 모든 이야기를 그냥 지워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런 촌철살인(?)같은 이야기를 한 분은 자신의 가족이 아프다면 그 아픔을 빌미로 다른 이들의 동정을 얻어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까 궁금하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프라는 그런 저주스러운 마음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누군가 어쩔 수 없는 유전병으로 계속 아픔의 고통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의 말은 종종 마음을 무겁게 하고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한순간에 지워버린다.

그래서 사람의 말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만들고
할수록 상대방의 마음을    만든다. 

비록 가볍게 무시할 수 없겠지만 나또한 그동안 가벼운 말들로 누군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 그 속죄를 위한 과정이라고 받아들이라고 누군가 조언해주셨다. 나도 완벽하지 않아 말의 옥석을 가리지 않고 가볍게 해버린 말들에 대한 반성을, 그리고 무겁게 고요와 침묵의 과정을 통해 가능하면 상대방의 본질, 의도, 본성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내 자신을 침묵과 고요의 중심에 두고 싶다. 

아팠다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어 내고...

Tuesday, July 24, 2012

등학교 시절 공부는 안하고 딴짓만 하느라 동호회 할동을 열심히 하다가 만난 누나가 있다. 이제 횟수로 18년이 넘는 시간동안을 알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힘든 시간, 즐거운 시간 가끔 만나도 항상 반갑고 의지가 되는 누나이다. 사실 그런 느낌으로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든든하고 행복한 그런 존재이다.

2000년대 초반 어느날, 한달에 한번 정도는 가볍게 안부 인사 나누던 사이였던 누나는 어느날부터 갑자기 그것도 먼저 아침에 전화를 주었다. 전화하자 마자 누나는 "나한테 전화오니깐 좋지?" 누나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음..? 왜그래?? 뭔일있어?" 그렇게 대꾸했고 이 후 몇일동안 이 알 수 없는 뉘앙스의 전화로 가끔 대화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직접 보자고 하면서 내가 있는 학교로 찾아와서는 갑자기 정말 힘들다는 얼굴 표정으로... "이제 그만해... 나도 힘들어" 하면서 나에게 알 수 없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던 나는 "무슨 말이야 도대체??" 라고 하고 앞뒤 전후 사정을 천천히 들을 수 있었고...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았다.

어느날 누나의 숙소로 전화가 와서 받자 마자 상대방이 "누나..." 라고 말을 시작하자 남자 형제가 전혀 없고 여대 나온 누나에게 그런 호칭을 부르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응 그래 원준아..." 라고 대꾸해주었고 그때부터 이 변태분은 자신을 '원준'이라 자칭하면 계속 전화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원준이로 빙의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상당 시간 시달림을 받아왔던 누나는 낮과 밤이 전혀 다른 나를 대하면서 결국 힘들어 하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조금은 놀랍고 많이는 웃겨서 한동안 어쩔 줄 모르는 웃었고, 나는 그럼 성이 뭐냐고 물어보라, 몇몇 우리만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거나 그럼 쉽게 알 수 있지 않겠냐고... 그리고 나는 알지도 못하는 누나 숙소 전화번호로 왜 전화하냐, 할거면 핸드폰으로 하지 등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어버리고 말고 그 변태분도 결국 나의 정확한 성을 알지 못해서 그 다음부터는 전화하지 않고 사건은 모두 일단락 되었다.


런데 난 이 사건이후 누나가 참 고마웠다. 일단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일거라고 생각하고 이상하고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①'나'란 존재를 믿어주고 그렇게 받아준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의 편에서 나의 입장에서 아무리 이상하고 힘들게 해도 참고 받아주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용기내어 ②나에게 찾아와서 나를 위해 내 앞에서 확인하기 위해서 나와 이야기해주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내가 혹시나 상처 받을까 그동안 힘들어하면서도 내가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랬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닌 누군가를 나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달래고 받아주었다는 그 바보스러움이 참 고마웠다. 당시엔 그냥 "누나 정말 바보같다..." 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 바보스러운 믿음은 아직도 내가 누군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태도로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되었다.

군가에 대한 믿음이란 그렇게 바보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바보스럽고 힘들고 말도 안되는 엉뚱한 일들에 고통스러울 수 있어도 그래도 사람에 대한 그 기본적인 믿음만큼 중요한 것도 없고 그 중요한 것은 지킬 수 있으니깐... 그렇게 나를 걱정해주고 나의 편이 되어주려고 항상 믿어주는 착한 누나는 나의 축일인 7월 3일에 토마스 신부님의 주례로 결혼하고 지금은 아이들과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그 바보스러운 믿음을 가진 누나는 항상 행복할 것이라고 기도한다.

믿음에 대한 바보스러운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