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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1, 2018


통 유리창으로 풍경이 다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파리 한마리가 들어와 윙윙거리며 자유롭게 비행하고 있다. 소리가 크게 들렸는지 카페 주인이 다가와 파리가 어딘가에 앉기만을 기다리다가 잡지책으로 잡아 죽였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사라져서 좋기는 하지만 갑자기 여러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저 파리는 유리창으로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유리창으로 막혀 나가지도 못하고 얼마나 당황하고 있었을까 특별히 유리창 안 실내에서 파리가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단지 어쩌면 우연히 들어온 실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파리가 유리창의 밖에 있었다면 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잡지 책에 압사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파리가 죽어야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유리창이 만들어 놓은 공간 중 파리가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할 실내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만든 것은 인간이 만든 유리창이였다. 파리의 입장에서는 유리창을 인지할 수도 없고 그렇게 구별된 공간 중 자신이 원해서 선택했다기 보다는 우연한 비행의 경로로 실내를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더 넓은 자연에서 더 자유로운 비행을 할 수 있었던 파리에게는 유리창이라는 원하지 않는 공간의 구분으로 인해서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photo by https://www.pexels.com/@danielbendig

잡지에 눌려 죽음을 맞이한 파리를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인간은 이처럼 유리창과 같은 구조로 인해서 생존에 위험을 맞이하는 경우는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구조가 인간의 자유를 누릴 공간을 줄이고 심지어 생존에 큰 위험이 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졌다. 자연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인간 개인의 자유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제한된 자유에 대해서 사회는 개인들에게 얼마나 합당한 보상을 해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구조가 계속 되어서 인간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없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파리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유리창이 존재하고 그 유리창은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지만 그 자체가 억압하는 구조가 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Glass Ceiling

전 영부인이자 전 국무장관이자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Hillary Clinton 이 민주당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나온 장면은 유리천장 glass ceiling 이 깨지는 장면이였다. 유리천장이란 하나의 관용구처럼 사용된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an unofficially acknowledged barrier to advancement in a profession, especially affecting women and members of minorities.
직업 활동에서 성취를 가로막는 특히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비공식적이지만 잘 알려진 장애물 

유리천장은 말그대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여성이나 민족, 종교 등 다양한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는 방해물들 특히 사회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편견들을 포함한다. 유리천장의 의미는 다양하다. 유리는 투명하기 때문에 더 좋은 위치가 보이지만 이미 기득권에 의해서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이고 그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막상 그 위치에 오르려고 하면 유리천장 자체가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보여주기는 하지만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조건과 기득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경에 의해서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지만 그들이 누리는 좋은 환경은 이미 대중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동일한 능력이라면 직업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 바꿀 수 없는 조건에 의해서 사람들은 더이상 성취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가장 큰 범위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비교해서 동일한 교육 환경 동일 조건에서의 노동에서 남녀 사이에 발생하는 임금의 차이도 결국 생활 조건에 차별을 주는 다양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은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물을 국가가 나서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 유리천장을 깨는 이미지를 통해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유리천장의 종합판과 같은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 에게 패배하였다. 미국 대선 후보정도 되면 대놓고 유리천장을 깨지 말고 차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는 어려운데 신비롭게도 도널드 트럼프는 그러한 유리천장을 대놓고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다는 것도 더욱 신비로운 일이다. 그래서 어쩌면 도널드 트럼프는 유리천장을 더욱 굳건히 하여 표를 얻은 가장 최근의 인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유리천장의 정의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바로 비공식적 unofficially 하다는 점이다. 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이 어떻다 해도 차별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말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사회가 성숙할 수록 그런 차별이 만드는 사회적 문제가 크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차별을 만드는 유리천장과 같은 비공식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사회가 대부분 인정하고 때로는 법이나 문화가 만드는 구조들이 인간을 차별하는 경우는 없는지 더 생각해 본다.


Glass Wall

유리창으로 인간에게는 실내와 실외의 구별이 생기지만 파리에게는 그것은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심지어 인식하지도 못할 것이다.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는 우리에게는 구별이 되지만 파리에게는 실내나 실외나 자신들이 날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유리창이라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공간은 실내와 실외로 구별이 되고 실외에서 날아다니는 파리는 억지로 쫓아다니면 죽이려 하지 않지만 실내에 있는 파리는 기회가 된다면 죽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저 미물이지만 파리 사회에서 바라보면 누군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 형제 혹은 자매의 죽음일 수 있고 파리 한 개인에게는 삶을 마감해야 하는 안타가운 상황이다. 한 생명의 종말이다. 그렇게 한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만큼 유리창이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실내와 실외의 구별 이전에 인간이 감히 날아다닐 수 없는 넓은 공간의 자유를 가지던 파리에게 실내라는 공간을 제한하고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지 파리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그리고 더 확대해서 우리가 그런 유리창에 의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면 단순히 파리의 생명이 아닌 사회 안에서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될 것이다.

2017년 1월에 프랑스의 한 농부는 법정에 서게 된다. 그의 죄는 프랑스 국경 안으로 들어온 난민을 도와준 죄였다. 그의 올리브 농장은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워서 난민을 자주 접하게 되는데 지중해를 건너 온 난민들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해주고 도와주었지만 그는 불법체류자를 도운 협의로 법정에 서야 했고 농부 세드릭 에루 Cédric Herrou 는 법원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l Jazeera

"만약 사람을 돕기 위해 법을 어겨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농부는 사람을 먹여 살린다.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도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이 위험을 넘어서도록 돕는 것이고, 저 국경이야말로 그들에게 큰 위험"

이라고 말했다. 국경이 그들에게 큰 위험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위험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난민 혹은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실내에 놓인 파리와 같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출생지 그리고 난민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난민들의 생존을 도와줄 도움조차도 법에 의해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국경이나 난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아주 초기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결국 위험한 생명을 도와주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불법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법과 국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에게 유리창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인종, 성별, 국적 등이 아닐까 싶지만 파리이기 때문에 항상 죽는 것이 아니라 실내의 파리이기 때문에 더 쉽게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인간이 만든 사회 제도가 유리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유리창은 인간에게는 비와 바람을 막아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일종의 보호막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서 파리는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로 구별되고 실내의 파리는 인간에게 해충이 되기 쉽다. 유리천창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조건과 환경에 의해 차별받는 장애물이라면 유리창 혹은 유리벽은 오히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지만 그 구조에 의해 차별을 받을 수 있는 존재들이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난민을 도와준 사람이 범죄자가 될 수 있지만 그가 정말 죄를 지었는지 물어본다면 누군가는 죄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치 유리창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실내의 파리와 실외의 파리가 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에 의해서 그 죄인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다. 당연하지만 그가 쓰러진 프랑스 사람을 도와줬다면 그는 의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리벽 혹은 유리창 glass wall 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된다.

유리창 이론: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 동일한 존재가 상이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현상


Artificial structure

앞서 설명한 구조 structure 를 언급하면 주로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 structure 을 떠올리게 된다. 유리창도 하나의 구조물이 된다. 그러나 유리창 이론에서 구조물이 아닌 구조라고 표현한 이유는 물리적인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구조물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사회 문화 뿐만 아니라 제도 그리고 가장 넓은 범위로 법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고 봉건시대의 농노 villein, serf 와 비교하면 당연히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표현할 때는 두가지의 개념을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자유 freedom 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어떤 방해나 구속이 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른 자유 liberty 는 조금 다른 의미지만 한국어로는 모두 자유로 표현된다. 두가지 자유를 표현하는 말 중에 좋은 예는 나는 말할 자유가 없다 - I have no liberty to speak 란 표현이 있다. 말은 할 수 있는 자유 freedom 은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 혹은 피해 등을 생각하면 자신은 그렇게 말할 자유 no liberty to speak 가 없다고 표현한다. 말을 할 수 있는 발성기관은 정상이지만 그리고 말은 할 수 있지만 말을 했을 때 지어야 하는 책임과 사회적 피해를 생각했을 때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유 liberty 는 사회적 가치와 더욱 중요한 인간이 만든 모든 구조 속에서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의 머리 속에서 욕을 하고 험한 막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받을 비난이나 평판이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자유 freedom 보다는 해야 할 말만 하는 자유 liberty 가 더 중요하게 생각된다. 가정하기 어렵지만 어떤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는 가족이 죽은 유가족을 향해서 '시체 장사를 한다' 와 같은 막말을 하는 것이 장려된다면 그 세상에서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은 항상 위로받지 못하고 슬픔에서 헤어나오기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화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그런 문화가 존재할 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없지만 그런 문화가 가지는 위험성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문화가 모든 면이 합리적이라 볼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점점 진보한다고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만든 구조란 광범위하게 그런 문화적 요소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다양한 제도와 법도 포함해야 한다. 제도와 법은 원칙적으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항상 그렇다고 그리고 심지어 문화와 조금 다르지만 시간과 사람의 다양성이 많이 융합된다고 해서 더 좋아지고 더 많은 이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어려울 때가 많다. 그 복잡성은 인간의 구조가 단순히 인간 사상과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보다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라 본다. 가장 대표적인 가능성은 역시 인간의 기술이다. 인간의 기술이 발전하면 할 수록 그 기술이 가져올 피해와 이득을 정확하게 계량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때로는 기술이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소수의 인간에게만 이득을 주고 다수의 인간에게는 피해를 줄 때도 많다. 그것은 인간이 문화적으로 인문학적 사상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기술을 사용할 때 생길 수 있는 결과에 대해서 인간이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지켜야 할 할 가치보다 기술이 가져다 주는 당장의 이득이 세상의 모습을 더 빠르게 바꾸기 때문이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이들이 핸드폰을 소지하고 활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핸드폰으로 생각하지 못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어 편리하고 좋아졌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집에 카메라를 두고 빈집을 지켜보거나 애완동물의 활동을 관찰할 수 있는 편리함은 주었지만 인간은 그 기술에 비해 제대로 관리하고 보안에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면 인터넷에 연결된 카메라는 자신의 사생활을 너무 쉽게 노출시킬 수 있는 무서운 무기가 된다. 인간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몰래 보고 이를 악용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은 많은 이들이 인식할 수 있지만 기술이 가지는 편리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는 자신의 음침한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타인을 몰래 살펴보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문화적인 구조나 인간이 가진 도덕적 규율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일어나는 일이라기 보다는 대중이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기술의 구조적인 불완전성이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인간이 인터넷 카메라의 원리와 보안 원리를 이해해서 모두가 자신만의 강력한 암호화 체계와 보안이 잘되는 인터넷을 관리한다면 인터넷 카메라 기술은 많은 이들이 충분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술은 항상 그렇게 많은 이들을 이해시키고 확산되지 않고 확산되고 이해할 사람만 이해하도록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삶에서 인위적인 구조는 법과 제도 뿐만 아니라 기술도 포함을 시키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유리창 이론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 특히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사용할 줄 안다고 당연히 대답하지만 인터넷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나 악의적인 활동에 의해서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때가 많다. 너무 밀접하게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용자의 편리성을 강조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하는 입장에서도 똑똑한 사용자가 많아서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서비스 활동이 감시받거나 평가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용자들은 많은 이들의 글과 그림을 보는 것에 빠져 자신의 개인정보가 얼마나 많이 빠져나가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가 많고 심지어 자신의 주소록이 빠져나가거나 자신의 사적인 활동까지 수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내용이 뉴스로 나와도 순간 두려워할지 모르지만 몇시간 후에는 다시 접속하는 자신을 발견할지 모른다. 인간의 기술이 점점 발전해서 인간이 이해하는 속도보다 빨라지면 우선 삶의 모습을 빠르게 바꾸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술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 그것을 악용하는 비율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술이 주는 이득을 자주 접한다. 기술이 발전해 인간은 손하나 움직이지 않고 말로도 전자기기를 제어할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도 있고 생필품을 주문할 수도 있다고 알고 있고 그런 삶이 주는 편리함에 대해서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음성인식 기기는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항상 감청할 수 있는 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 화려한 세상은 계속 지켜보고 있지만 유리창 안에서도 나는 실외에 있다고 믿는 파리처럼 나는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유리창 안에서 감시받거나 자신의 삶의 반경이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점점 잊어버릴 수 있다.


Glassified legally

인간이 만든 구조를 생각하면서 다양한 대상을 생각할 수 있지만 우선 법과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법은 우선 영어로 law 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를 표현하는 영어 개념이 freedom 과 liberty 로 나눌 수 있는 것과 다르게 law 에는 어쩌면 상반될 수 있는 두가지의 뜻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법이다. 그 법에 대한 영어 정의는 다음과 같다.

the system of rules that a particular country or community recognizes as regulating the actions of its members and may enforce by the imposition of penalties.

즉, 국가나 공동체에서 구성원의 행동을 규제하도록 인식된 규칙의 체계 혹은 구조이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 대비한 형벌을 포함한다.

그러나 두번째 law 는 한국어로 법칙이란 뜻으로

a statement of fact, deduced from observation, to the effect that a particular natural or scientific phenomenon always occurs if certain conditions are present.

관찰에 의해 추론된 사실의 정리 혹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법칙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영어로 역시 law 이고 열역학 제2법칙 the second law of thermodynamics 과 같이 자연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자연의 작동 원리도 역시 law 라고 표현한다.

첫번째 법은 상당히 인위적이고 무엇보다 국가 혹은 공동체를 전제로 정의되고 행동의 자유로운 활동보다는 규제되는 것을 더 표현하고 있다. 결국 공동체에서 인식된 법이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한다면 그것이 법이 된다. 그런 이유로 동시대를 사는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법에 의해서 여성의 차별이 법으로 정해진 나라도 있고 국가의 법 혹은 성문법 statement 의 내용과는 다른 관습법 customary law 이 더 존중받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 보다는 제한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혹은 하면 공동체 일원으로 비난받기 쉬운 내용들이 더 많다. 그래서 법은 무엇을 적극 장려한다는 내용보다는 하면 어떤 불이익이 가해진다는 내용으로 인식되기 쉽다. 한국어로는 법과 법칙으로 그 의미를 구별할 수 있지만 영어로는 law 가 법률의 법과 자연의 법칙으로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마도 자연이란 존재가 따라야 하는 법이기 때문에 법칙이라 볼 수 있지만 자연의 법칙은 제한하고 통제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단서가 된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은 어쩌면 법칙이 아니라 섭리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연의 섭리를 이용해서 그 섭리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내용이 오히려 기술이 된다. 그래서 기술은 중력을 이겨내어 하늘을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고 지구 대기를 뚫고 우주로 나갈 수 있는 로켓을 만들어 낸다. 자연의 섭리로는 유전에 의한 선천적인 장애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만 이 또한 유전자 치료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도전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인간 공동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법이나 자연의 법칙도 모두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술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항상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법률을 극복하거나 이용하면 보통 편법이라고 말하고 자연의 법칙을 이겨내면 이는 기술이라 말한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는 가장 큰 약점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률도 완벽하지 않아 이를 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소수가 생길 수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당연히 따라야 할 자연의 법칙을 극복하는 기술조차도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부작용에 대해서는 크게 바라보지 못한다. 결국 인간이 만드는 법은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유리창처럼 장벽이 될 수 있기도 한다. 완벽하게 잘 만들어진 법률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기 싫고 법률에 의해 피해를 보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만든 좋은 표현이 바로 대의명분 大義名分 이다. 영어로 조금은 의미가 다를 수 있지만 종종 사용되는 표현으로 the greater good 은 대의가 되고 명분은 cause 가 된다. 좋은 표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의 권리 혹은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 더 큰 선 즉, 대의를 위해서 사람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the greater good 를 말할 때가 많다.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대의명분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해야 하는 경우보다는 일부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알고 있다. 즉, 우리가 양보하고 포기하는 많은 자유들이 어떤 더 큰 선과 이유를 위해서 내용은 잘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막히고 특히 법률의 양이 많아지면 그런 경우는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든 법이란 그 특성상 제한 사항과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 대한 처벌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Glassified technically 

마가렛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는 Payback: Debt and the Shadow Side of Wealth (번역본: 돈을 다시 생각한다) 에서 과학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Paris Review

모든 과학 기술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연장이다. 따라서 안경, 망원경, 텔레비전, 영화, 그림은 눈의 연장이고, 라디오와 전화는 귀의 연장이며, 지팡이와 목발은 다리의 연장이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외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능력을 연장시킨다 표현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연장' 이라는 표현으로 신체적 물리적 능력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연장까지도 포함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앞에서 과학 법칙에 따르지 않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기술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렛 애트우드의 과학 기술은 natuaral science and technology 가 아닌 technology 만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번역본에서는 과학 기술로 번역이 되었지만 원문 책은

All human technologies are extensions of the human body and the human mind. 

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 & 기술이 아닌 기술만 놓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종종 과학 기술이 하나의 단어처럼 표현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가지의 단어는 별도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 법칙에 따르는 현상을 알아내려는 자연과학 natural science 와 그 현상을 이용하고 극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연장 extensions 이 되는 기술은 분명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기술이 만든 다양한 유리창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 같은 다양한 기술 용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기술 용어들은 우선 기술 소비자들보다는 그 기술을 이용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제품을 소비하는 매력으로 등장할 때가 많다. 여전히 인공지능 artificial intelligence 의 정확한 구조와 실현 방법에 대해서 연구가 계속 되고 있지만 가전제품 뿐만 아니라 주식거래와 같이 제품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구현되지도 않은 인공지능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광고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실현되지 않는 기술이라도 개념만 존재한다면 인간의 마음에서는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어떤 기술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삶은 획기적으로 바뀌고 그 바뀐 삶은 항상 행복할 수 있고 도 풍요로울 수 있다는 희망이다. 플라스틱이 발명된 시절에도 비싼 재료를 대체할 수 있는 혁명적인 재료라고 믿었고 플라스틱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 믿었지만 지금 플라스틱이 인간에 이득이 더 많았는지 아니면 해가 더 많은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조차도 더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다. 결국 플라스틱이 가져다 준 편리성과 경제성은 인간을 한순간에 매혹시켰지만 플라스틱이 가져오는 환경 문제와 그 환경 문제가 다시 인간 사회에 어떻게 재앙으로 돌아오는지는 여전히 관찰 중이다.


플라스틱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많은 기술들도 그런 거대한 희망의 크기 때문에 기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는 천재보다 자신이 연구하는 기술이 가져다 줄 부작용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현명한 이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기술은 항상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기술은 문제점을 걱정하며 더디게 진행되기 보다는 이념처럼 종교처럼 빠르게 실현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무래도 핵폭탄 개발을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많은 과학자들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참여 과학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였고 물리학, 화학에서 가장 최고의 과학자들이였다. 그러나 그들의 과학적 업적 예를 들어 원자핵의 구조나 원리 등을 알아내는 업적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를 무기로 만든 기술적 업적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자폭탄이 거의 완성되고 핵 실험을 하는 단계에서 이를 참관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만든 엄청난 기술의 결과를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살상력보다는 이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더 큰 대의명분에 휩싸여 기뻐했을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기뻐하지 않은 아주 소수의 과학자도 있었지만 이미 만들어진 거대한 기술의 결과를 뒤집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술은 항상 피해자를 만드는가?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은 그렇다고 마음으로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곧 이어 기술이 만들어 주는 많은 혜택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은 인간 사회가 원한다면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에 해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법으로 막을 수 있지만 기술이 주는 다양한 달콤함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날 정부가 핸드폰은 인간의 정신 활동에 악영향을 줄 수 있으니 다음달부터는 전면적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불법이라고 말한다면 공동체가 순순히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들어와서 오랫동안 머무르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을 더 길게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마가렛 애트우드의 표현처럼 이미 연장된 extended 인간의 몸과 마음은 쉽게 제거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기술은 완전하게 비가역적 absolutely irreversible 이지 않지만 가역하기에는 너무 완전한 irreversiblely absolute 대상이라 본다. 그리고 되돌리기 어려운 많은 기술의 결과들은 그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생산품들을 만든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경제적으로 부족하다면 핸드폰을 쓰지 않아 통신 요금을 내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통신 요금은 하나의 식사를 위한 비용만큼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미 기술에 의해 연장된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만들어 낸 영역까지도 고려하는 현대 사회에 맞는 인간의 기본 권리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돈없어 교통요금을 낼 수 없고 통신요금을 낼 수 없는 취약 계층들은 그대로 돈이 없으니 당연히 움직이지 말고 전화하지 말라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쓸 수 있는 자 / 쓸 수 없는 자 로 구별되어 기술의 사용할 수 없는 소외계층이 아닌 제외계층이 될 것이다. 한 개인이 해결 할 수 없는 기술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자본이 기술의 사용 가능성을 만드는 거의 유일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기술을 떠나 현대 사회의 자본 의존성 그리고 기술 사용에 필요한 비용이 증가하면 기술 자체가 아무리 선하고 인간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발생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Colored or Painted glass 

성당의 멋진 스테인드 글라스 stained glass 를 볼 때 교회 밖은 지옥같지만 스테인드 글라스에 의해서 멋진 성인과 아름다운 교회의 역사만 바라보라는 뜻인가 생각한 적이 있다. 교회 밖 세상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고 억울한 일들이 가득한데 교회 안에서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보면서 세상의 모습을 잠시 잊으라는 배려인가 싶기도 하다. 가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처럼 세상 밖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유리창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의 삶의 진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어쩌면 보면 싫어할 내용은 모두 다 제거하고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것만 보여주는 그런 유리창 말이다. 멀리 생각할 필요도 없이 '눈의 연장'이 된 텔레비전 혹은 언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병에 걸린 주인공도 극적으로 해외 유명 대학의 저명한 의사가 갑자기 난데없이 찾아와서 고쳐주기도 하고 하루 삶이 고단한 주인공의 앞에 갑자기 자신의 미모에 홀딱 반해버린 재벌집 자식이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준다. 우연히 만난 많은 은인들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이야기를 그저 현실성 없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드라마란 허구지만 우리의 현실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드라마는 차라리 환타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리창 모두가 스테인드 글라스라면 정말 세상은 아름다울까 아니면 현실은 무시하고 내 삶만이라도 아름다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의 모든 아픈 현실을 무시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대부분 개인의 욕망을 자유롭게 채우면 거의 대부분 공동체의 범죄자가 되기 쉽다. 최소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피해자들의 고통 그들의 신음소리를 무시하고 살면 어느정도는 편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자기 먹을만큼 살고 자기만을 위해 살면 된다.  『이상한 나라의 경제학; 이원재 저』 에서 '성안의 사람들'이라 표현된 소위 대기업에 직장을 가질 수 있거나 이미 일정 부를 대물림 받을 수 있어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스테인드 글라스에 둘러쌓여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행복할 것이다. 언론이 다양해지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언론이나 미디어를 소비하는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 현실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망을 대신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자극적이고 화려한 내용 contents 에 더 소비하게 된다. 그래서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다양성을 대변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다고 해서 무조건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해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스테인드 글라스에 민중을 갇히게 하려 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더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찾기 때문이다. [ 참고: 거칠어 지는 언론 - 미디어의 그레샴 법칙 ]

한국 사회 특히 정치에서는 '색깔론' 이란 표현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상대방을 정치적 적으로 간주하고 대중들이 싫어하는 대상으로 단정지어 말한다. 그래서 색깔론으로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짧고 명료해야 한다. "김아무개는 빨갱이다." 라고 말해야지 효과적이지 "김아무개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사상을 연상시키는 ..."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색깔론은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주 간결하고 명확하고 심하게 부정적인 단어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런 공격을 받은 점잖은 정치인은 반박한다. "그런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지 마세요" 그러나 이 표현은 결정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색깔론 공격을 하는 사람이 색안경을 썼다면 세상사람들이 색깔있게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그래서 효과적인 색깔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색안경을 쓴 사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격하는 이와 같은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다수가 색안경을 끼고 있다면 그 색안경을 벗을 수 있도록 해주거나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색 유리창을 깨야 한다. 농담같지만 우리 사회에 가득한 수많은 색 유리창(안경)을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깨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요건으로 포르투나 fortuna, 비루트 virtu, 네체시타 necessita 을 강조했다. 포르투나는 운 혹은 운명이고 비루트는 덕 virtune 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virtune 이란 말 조차도 어원은 남성을 뜻하는 vir 에서 나왔고 힘이란 뜻이 더 강조된다. 즉, 운명에 의해 결정된 인물이 힘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끌어가야 하고 네체시타는 시대가 필요한 정신, 혹은 시대에 적합한 행동 그리고 요즘은 시대정신 zeitgeist 을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올바른 도덕적인 군주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의 선을 위해 효과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내용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면 시대정신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라기 보다는 소수의 욕망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 힘과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경우 공동체는 거대한 방향성을 가질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네체시타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다양한 색 유리창을 통해서 사람들이 봐야하는 다양성의 색이 아닌 지도자가 강조하는 하나의 색 혹은 소수의 색만으로 보도록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색 유리창 안에서 갇혀 살아가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무지개 색에 대한 인식도 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나중에 무지개색을 보면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부정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힘을 가진 (권력을 가진) 이들이 하나의 정확한 결론을 낼 때는 우리가 색 유리창에 갇혀 있도록 원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예전에는 합리적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할 성스러운 군주를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지금 시대는 다양성의 목소리와 다양한 색의 조화를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완벽하게 도덕적이고 완전한 능력을 가진 인간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들이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꿈꾸며 경제를 살릴 수 [ 참고: 사람들은 조금씩 병들고 경제는 살아나고... ] 색안경 속에서 제대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경험도 있다.


당장 앞에 보이는 모습이 화려하고 마음에 든다고 해도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많은 유리창이 존재할 때 우리의 삶은 왜곡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조차도 잘못되어 그 잘못된 시선이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되어 모니터에 보이는 심지어 VR 헤드기어에 보이는 모습들이 사실같다고 해도 정확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유리창이 투명하게 현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한번쯤은 내 앞의 유리창이 어쩌면 색 유리창이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 유리창이 아닌지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 유리창 안 실내가 분명 실외보다 안전할 수 있지만 가끔은 유리창 너머의 세상을 직접 가볼 필요도 있다.


Build or Break glass 

유리창이 만든 실내와 실외 그리고 그 안에 놓인 실내의 파리의 운명으로 별 생각을 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운명처럼 인간 사회에도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조들에 의해서 인간 스스로 파괴되거나 인간의 권리조차 무시당하는 경우도 생각했다. 또한 그렇게 만드는 장애물 같은 구조들을 만들어 내는 것 중에 법이나 기술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어쩌면 아주 간단하다.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구조같은 유리창을 어떻게 찾아내고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꼭 깨야 하는 것인지 묻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다양한 구조들은 처음부터 '인간을 파괴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두고 만들 수 없다. 그런 경우 공동체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고 심지어 실체적으로 파괴와 억압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조차도 항상 권력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색안경을 쓰게 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인간을 위해 잘 작동하는 구조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부작용으로 인간에게 큰 피해를 주는 경우도 많다. 역사에서 권력이 만든 색안경을 스스로 벗어내고 깨는 작용은 일종의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권력이 심어놓은 유리창으로 구별해서 적과 아군을 정하고 적은 억압하고 아군은 유혹하는 과정을 과감하게 벗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 억압을 당하는 현실을 볼 수 있도록 색안경을 벗어내는 과정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혁명의 시작은 누군가의 큰 희생이 알려지면서 붉은 색안경조차도 피를 확인할 수 있게 되고 색안경을 버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과정이 혁명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반면 완벽해 보이는 권력이라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서 충분히 필요하고 아무런 문제조차 없는 것이라도 종종 인간을 파괴하는 경우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많은 경우 초기의 선한 목적과는 상관없이 권력을 가진 주체가 바뀌면서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경찰저지선 (폴리스라인) 을 볼 수 있다. 경찰저지선을 정하고 운영하는 것은 경찰의 몫이지만 시위조차 할 수 없도록 경찰저지선을 만들거나 경찰차로 도로 통행에 방해가 되는 정도로 과도하게 만들어 놓고 경찰저지선을 어기는 사람들은 무관용 원칙에 의해 죄인이 된다면 그때 법은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과 권위는 정의를 구현하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만약 이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회가 흘러가야할 흐름을 막아버리는 위협적이고 조직적인 댐이 되어버린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1929~1968) [원문 보기]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말은 인간의 보호를 위해 만든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면 그때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 유리창을 과감하게 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리창 안의 실내가 항상 안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실외로 나갈 수 있는 흐름을 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라는 것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규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규제가 인간을 억압할 수 있는 구조라면 규제철폐해야 하지만 규제가 사라진다면 인간은 실내 실외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 상태가 될지 모른다. 자연상태란 자연 법칙이 따르는 상태가 아니다. 이미 사회 안에 살아가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는 그리고 그 공동체에 이미 존재하는 권력 (힘) 과 자본 (돈) 이 지배되는 세상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으로 경쟁해서 자신의 생업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밀려 살아남지 못하게 될지 모르고 권력에 의해서 불공정한 거래보다는 부정한 청탁이나 뇌물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될지 모른다. 애석하게도 실내에 놓인 파리는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만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유리창은 실외의 파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파리 죽음을 당할 가능성을 낮추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즉, 인간의 불공정하고 부도덕적인 모습이 만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법과 규제는 필요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공정거래법이 있다. 대기업의 일감몰아주기를 통해서 재벌 자식들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자식들이 아닌) 은 최소한의 자본으로 엄청난 주식을 소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특정 기업을 만들고 기업의 일감을 대기업에서 몰아주어 이익을 극대화해서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다. 만약 규제가 없다면 도덕적으로 완벽할 수 없는 재벌일가가 이런 획기적인 방법을 하지 않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재벌들은 이런 식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노동의 대가를 독식하게 되고 가만히 있어도 엄청난 이익을 얻는 불로소득 unearned income 을 가져가게 된다. 재벌은 부를 얻기 위해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개인적인 양심 혹은 도덕적인 가치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방법이 퍼지기 전에 유리창 안에 가둬놔야 한다. 파리를 보면 미친듯이 잡아 죽이는 사람이 실내에 있는데 실외에 있는 파리들이 들어가 죽지 않도록 유리창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의 규제를 설정하는 과정을 단순히 시대의 필요성 (네체시타) 에 의존해서 설정하거나 해제하기 보다는 법이나 규제가 유리창처럼 존재할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억압받을 수 있는지 아니면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인간이 만든 수많은 구조들은 모두 유리창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유리창이 인간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도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유리창의 비유로 계속 설명을 한다면

1. 유리창이 존재할 때 얻는 이득과 손해를 투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참여자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 특정 치료제가 일부 환자들에게는 효과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국민의료보험제도에 의해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치료제가 특정 약이 아닌 원래 제약회사가 신청한 임상 효과가 일정 수준이 아니라는 이유일 때가 있다. 심지어 보험이 되지 않지만 환자들이 비싼 약값을 감당하서라도 쓰겠다고 하지만 약의 처방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정부의 행정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그 규제에 의해서 피해를 받거나 이익을 얻는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당사자들의 소리는 듣지 않고 소위 탁상공론으로 수많은 지식의 색안경을 쓴 학자들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특히 이해당사자의 생명권에 관련된다면 이는 의무적으로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2. 오염된 유리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적 방법론을 만든다.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등장한 탈진실 post truth 시대에서 가장 큰 저항은 역시 사실확인 fact check 이다. 사실이 무엇이다 알린다 해도 이미 색안경을 쓰고 다니는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실확인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유리천장이라는 편견의 벽에 갇히고 색유리창에 갇히게 될 때 많은 피해자들이 오히려 가해자처럼 비난받게 되고 최근의 소위 미투운동 #metoo 의 많은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의 권력과 자본으로 오히려 더 힘든 상황에 놓이는 것을 지금 목격하고 있다.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색안경을 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단순하게 인과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을 가해자혹은 원인제공자로 만들기 전에 오염된 유리창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들이 만들어 질 필요를 느낀다.

3. 필요하다면 깰 수 있어야 한다. 유리창이 오염되어 닦아 낼 수 있어 투명하게 볼 수 있다면 보호막이 되어 공동체에 이로운 구조가 될 수 있지만 너무 오염되어 더이상 유리창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실외로 나가고 싶은 이들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면 그때는 유리창을 깰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말한 시대정신 네체시타란 단순히 소수 지성인의 선각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다양한 색을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생각으로 모으는 과정이라고 본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걸리고 또 당연히 오염되기 쉽다. 시대가 변하고 유리창은 점점 오염되는데 그 유리창을 그대로 놔둔다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유리창을 깰 수 있어야 한다.


Glassy conclusion 

참혹한(?) 압사를 당한 파리를 보고 본 글을 생각한지는 거의 3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건강상의 문제와 여러가지로 블로그를 이어가지 못하는 동안에도 소위 시대정신도 많이 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촛불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색안경 속에서 묻혀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색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도 하나씩의 색안경을 벗어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조금은 맥이 없는 glassy 결론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혁명은 유리창에 생긴 작은 균열 crack 이 유리창 전체를 깰 수 있듯이 작은 노력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진 결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몰랐던 오래된 그리고 유명한 혁명들 속에서도 유명한 이들의 노력보다 수많은 민중들이 작게는 자신의 편한 색안경을 벗어버리는 행동들로 인해 가능했다고 믿게 된다.

파리의 죽음을 목격한 유리창을 생각하게 한 4.19 혁명 민주묘지 근처 한 카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름의 유리창이 필요한지 생각하다 읽게 된 내용으로 마무리한다.

"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 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

유리창 이론 ─ 구조의 억압과 보호에 대해서

Monday, September 29, 2014

대의 주요 국가 중 흡연을 장려하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흡연의 위험성이나 질병 유발의 직접적, 간접적 연관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대를 얻고 있기 때문에 국가의 건강 보건 차원에서 흡연이 아닌 금연 정책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은 바로 가격 정책이다. 생산 가격은 낮아도 국가적 차원에서 세금을 높게 부과하여 일반 소비자들이 쉽게 구매하지 못하도록 하여 금연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2014년 담배 가격 (담배에 부과된 간접세) 인상에 대한 많은 논의 가운데 국민의 보건 및 건강을 위한 정책이라 주장하는 국가와 담배를 통해 세금을 더 걷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는 주장이 펼쳐진다. 무엇이 틀리다고 말하기에도 어렵고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 흡연자의 주장에 대해서 동조를 하거나 반대를 하기에도 어렵다. 그런 이유에서 담배가격의 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가지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담배를 싫어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담배 연기에도 생리적으로 빨리 반응하고 심한 경우에는 가슴 통증을 일으킬 정도로 담배 연기조차 멀리하고 싶어 한다. 그런 입장에서 흡연자의 심리와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제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는 것을 거의 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담배를 피고 옷에 담배 냄새가 나는 사람조차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데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지나치거나 가장 심한 경우 그런 길거리 흡연자의 뒤를 쫓아가게 되는 상황이면 참 힘들게 된다. 그래서 길거리를 가다가 멀리 돌아가는 상황이 되어도 돌아가는 경우는 두리안 (열대 과일) 을 파는 상점과 길거리에서 담배피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흡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보행 중 흡연의 문제점은 단지 간접 흡연의 문제 뿐만 아니라 담배불이 타인에게 화상과 같은 직접적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흡연자가 손을 내리고 있는 높이는 아이들에게는 얼굴의 높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상해가 가해질 수 있다. 

가의 정책이 금연인가 흡연인가? 

국가의 정책이 흡연인 국가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국가가 말하는 정책의 방향과 실제로 시행되는 정책의 방향이 전혀 다른 경우가 바로 대한민국의 흡연 정책이다. 정책이란 아주 간단하게 국민들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좋다 혹은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라는 기본적인 지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들 모두가 가지는 생각이 다르고 그 생각의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많은 충돌에서 누가 옳다는 것이 정해지지 않으면 국가는 국민대 국민의 다툼으로 모든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에 힘들어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 시설 근처에는 '유해' 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 는 정책이 주어진다면 교육 시설의 하나인 초등학교 근처에 자신의 자본과 자신의 의지로 단란주점을 경영할려고 한다고 한다고 했을 때 국가의 정책이 없다면 초등학교는 새로 세워질 유해시설을 미리 알아서 이들이 들어서지 못할 이유와 유해 시설이 어떤 (손)해를 초등학생들에게 입힐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방향이 '자본의 합리적인 주관적인 사용에 의한 부가가치의 증가보다 교육 시설의 학생들이 피해보는 사회적 비용이 더 크다' 는 입장이 정해진다면 불필요한 분쟁없이 단란주점을 경영하려는 자본가는 알아서 다른 자리로 피하게 될 것이다. 

가의 정책 뿐만 아니라 모든 정책이란 이와 같이 '무엇을 하려고 할 때'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해도 되는 것은 정책의 장려 (promotion) 이 되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책의 규제 (regulation) 이 되는 것이다. 작은 오해 중 하나는 정책은 꼭 도덕적, 윤리적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두가지 이유인데 1) 비도덕적, 비윤리적이라 해도 사회적 공익이 분명히 보이는 경우와 2) 국가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이 뚜렷할 때가 있을 것이다. 즉, 국가가 항상 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체주의 국가가 국가의 전쟁 수행을 위해서 국민들을 동원하고 그들의 죽음의 가치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정책의 방향이라면 국가는 국민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도 그에 대한 가치를 덜 평가해서 국가 배상 / 보상에도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의 정책은 때로는 야만적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전형적인 투표로 선출된 국가의 폭력이 강제적인 유태인 선별 (opt-in) 된 경우이다. 정책의 선별적 적용은 폭력이 되기 쉬운 대표적인 예이다. 

다시 흡연의 문제로 넘어오면 국가의 정책이 '흡연 장려 정책' 인지 '금연 장려 정책' 인지 아는 방법은 아주 간단할 수 있다. 이는 흡연이 건강에 해를 주어서 국민 건강, 보건에 막대한 손해를 입힌다와 같은 주장이나 흡연의 알려진 직접적 발병 원인과 같은 과학 혹은 의학적 사실과 관계가 없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 국가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만약 국가가 가격을 통제할 수 있고 다른 국가에 비해서 싼 담배가격을 유지한다면 그것이 흡연 장려 정책인지 금연 장려 정책인지 각자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 흡연 장려 정책이라 생각한다. 이제는 사유화가 되어 있지만 사유화 이전 담배를 제조 판매를 공기업이 담당했다는 측면에서도 최소한 당시의 국가 정책은 흡연 장려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결과물로 아무리 '우리 국가는 흡연 장려 국가야!' 라고 주장해도 국가가 '아니야! 우리는 금연 장려 국가야!' 라고 주장한다면 쉽게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가 정책의 기본값에 대해서 

다양한 소프트웨어나 스마트폰의 앱을 사용하다 보면 설정 (settings / configuration) 에는 기본값이 있다. 사용자가 아무 것도 손대지 않으면 초기에 설정된 값을 기본값 (default) 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기능을 위해서 혹은 반대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기능을 제거하기 위해서 설정에 들어가 사용자가 설정값을 정할 수 있다. 즉, 기본값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사용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프트웨어가 문제를 일으키면 아주 간단하게 기본값으로 다시 돌아가기 (set to default) 혹은 공장초기화 (factory reset) 을 하게 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기본값이란 '이 정도면 사용자들이 편리하게 나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수 있겠구나...' 라는 배려의 차원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프트웨어를 통해서 자신들이 장려하고 싶은 기능을 기본값으로 놓는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최근의 클라우드 서비스 중 클라우드 스토리지 서비스에는 스마트폰이나 타블릿에서 찍은 사진을 자동으로 자신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올리는 기능을 장려한다. 즉, 사진을 찍으면 찍은 사진이 자동으로 해당 클라우드 서비스에 올라가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드롭박스 (Dropbox), 원드라이브 (OneDrive), 아이클라우드 (iCloud) 등이 있다. 초기에는 이러한 기능을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이 기능이 설정되어 자신이 열심히 찍은 사진들이 온라인 클라우드에 올라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아이클라우드 사용자는 자신이 열심히 찍은 아주 사적인(!) 사진이 자신의 집에 같은 계정으로 설정된 애플TV 에서 보여지기 되어서 부인과 싸우게 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이 기능을 알고 있었다면 당장에 실행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결국 설정의 기본값이 '사용함' 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다. 

구글의 서비스 Auto Backup 에 의해서 자동으로 사진을 클라우드에 올려준다. 사용자가 선택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opt-in 이다. 

이처럼 소프트웨어의 기본값이란 '모든 사용자들이 만족할 좋은 기능' 이기 때문에 설정해 놓기 보다는 소프트웨어 개발자(회사)의 정책의 방향이 더 중요하다. 예를 들어 클라우드 서비스의 장점을 살려서 이를 하나의 좋은 마케팅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본값을 '사용함' 으로 해야 더 많은 사용자들을 사용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생활 보호 등의 이유로 이러한 기능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사용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고 두번째 방법으로 소프트웨어 / 앱을 설치할 때 해당 기능을 사용 / 사용안함 (Turn on / Turn off) 을 설정할 수 있는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 어느 정도 합의된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여전히 소프트웨어 개발자(회사)의 정책은 '해당 기능 사용 장려'임을 생각해야 한다. 

본값은 항상 좋은 것인가? 

이 질문의 대답이 '아니요' 라는 것은 그냥 느낌으로도 알 수 있다. 에를 들어 한때 다수의 사용자를 자랑하던 커뮤니티 서비스가 있었다. 이 서비스에서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별도의 플러그인 (실제로 액티브액스; ActiveX) 을 설치해야 했다. 해당 플러그인은 사용자가 음악을 듣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이 플러그인이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소위 그리드 컴퓨팅 (Grid computing)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면 만약 A 라는 사용자가 음악을 듣게 되면 안정된 음질로 듣기 위해서 음원에 관련된 데이터를 서버에서 자신의 컴퓨터로 받아 놓고 이를 실행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사용자 B가 동일한 음원을 서버에 요청하면 서버에서 해당 파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아 놓았던 사용자 A 의 컴퓨터에서 전송하게 된다. 기술적으로 나쁜 기술은 아니지만 서비스 회사는 사용자의 컴퓨터 자원 (하드디스크, 램 등) 을 함부로 사용해서 다른 사용자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자신이 쓰지 않는데 컴퓨터가 계속 돌아갈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자신의 컴퓨터가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 경우 음악을 제대로 제공하기 위해서 사용자들이 알기 힘든 내용을 기본값을 설정해 두고 (심지어 이를 쉽게 해제하지도 못하게 하고) 사용한 것이다. 즉, 사용자들에게 음악을 듣는 기쁨을 담보로 기본값만 존재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그리드 컴퓨팅이 나쁜 것은 아니다. 외계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한 프로젝트인 SETI 프로젝트는 자신들이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필요한 컴퓨팅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 컴퓨터를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SETI@Home 이 있다. 즉, 사용자는 자신이 사용하지 않는 동안 프로젝트의 데이터를 분석하는데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컴퓨터 자원 (CPU, 메모리 등) 이 사용된다는 것을 잘 알고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모든 정책에는 기본값이 존재하고 특별한 경우 이를 사용하지 않을 권리와 자신이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SETI@home 프로젝트는 개인용 컴퓨터를 데이터 분석에 참여하기 원하는 (opt-in) 사용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결국 기본값이란 모든 사용자들이 좋은 공익적 목적을 대변하지 않는다. 앞서 설명한 클라우드 서비스의 예로 다시 돌아가면 사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기본값인 '사진 업로드 기능 사용함'으로 설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무 생각없이 사용하다 보면 자신의 모바일 데이터 사용량을 다 써버리거나 과도한 배터리 소모 및 발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많은 경우 스마트폰의 위치정보에 대한 기본값도 비슷하다. 대부분 이에 관련된 기능의 기본값이 '사용함' 이 많기 때문에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용자의 경우 사용의 편리함보다 평소 사용하지 않는 기능에서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의 자원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소프트웨어 사용자들이 좋아하는 값을 기본값으로 설정했다면 인터넷에서 수많은 팁들이 훨씬 덜 존재했을 것이다. 많은 경우 설정값 하나만 변경해도 눈에 보이는 차이점을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기본값은 정책의 방향이다. 

기본값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기본값과 함께 나온 중요한 개념이 바로 '자신이 원할 때 나올 수 있는 권리' '자신이 원할 때 들어갈 수 있는 권리' 를 말했다. 기본값이 항상 자신에게 필요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커뮤티니 서비스의 음악 관련 서비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러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알려주거나 이를 나올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신이 원할 때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옵트-아웃(opt-out) 이라 하고 반대로 '자신이 원할 때 들어 갈 수 잇는 권리'를 옵트-인 (opt-in) 이라고 부른다. 

당연하지만 항상 권리란 항상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대면 통행 (facing traffic) 에서 좌측 통행을 할 것인지, 우측 통행을 할 것인지는 국가의 정책 방향이고 기본값이다. 한국과 미국의 경우에는 우측통행이 기본값이고, 일본과 영국의 경우 좌측통행이 기본값이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는 의미가 없다. 그냥 정해진 기본값일 뿐이다. 이 기본값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권리 (opt-out) 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 자신의 기호에 따라서 누구는 우측, 어떤 이는 좌측을 통행하면 수많은 정면 충돌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국민의 생명과 공익을 위해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제거하기도 한다. 다른 경우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국가에서 부과된 세금을 내는 정책 (세금 내는 것이 기본값이다.) 을 거부할 수 없다.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권리 혹은 들어갈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되는 경우에는 법률로 제한해야 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와 같이 국가가 국민에게 부여한 의무의 대부분은 국가의 정책이 '나올 수 있는 권리'을 제한하여 이를 쉽게 나오지 못하게 만든 경우이다. (hard to opt-out) 그러나 이 경우 꼭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opt-out 이 어려운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방차 및 긴급한 경우에는 우측통행이 기본값인 국가에서도 좌측통행을 할 수 있고, 세금을 내야 하지만 세금을 면제해주는 경우도 있고 국방의 의무라지만 이 또한 면제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좌측통행이었다가 우측통행으로 변경되었다. 한동안 습관적으로 정책의 방향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출처: The Huffington Post & AP

종합하면 국가의 정책 방향은 기본값 과 관련이 깊고 나올 수 있는 권리, 나올 수 없는 권리 를 지정하는 것은 법률로 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정책 방향은 법률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국가가 정한 기본값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빠른 방법이다. 다시 한국이 금연 장려 국가인지 흡연 장려 국가인지 생각해보자. 

연 구역 vs. 연 구역 

국가 정책이 금연이라면 기본값이 금연이 되어야 한다. 국가의 정책이 흡연이라면 기본값이 흡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흡연이 나쁘다는 인식이 큰 현재의 시점에서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는 흡연을 장려하는 국가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값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금연이 기본값이라면 별다른 말이 없다면 국민들은 금연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흡연 구역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서 금연 정책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opt-out)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런 경우 특별히 금연 구역을 설정할 이유가 없다. 기본값이 금연이기 때문에 별도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국가는 금연 구역을 공공장소 빌딩 뿐만 아니라 주요 도로에 확대했다고 적극적으로 흥보한다. 그러나 금연 구역이란 말은 국가 정책의 기본값은 흡연이고 이 중 간접 흡연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공간을 중심으로 금연을 할 수 있는 (opt-in) 상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국가 정책의 기본값이 금연이라면 특별히 금연 구역을 설정할 이유가 없다. 

금연 구역이 증가하면 금연이 증가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한국의 길거리는 대부분 흡연 구역이 되어버리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나 버린다. 길거리에서 담배피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이 많은 거리가 아닌 골목 특히 공동주택의 경우 사적 공간과 공공 공간의 모호함으로 흡연으로 인해 이웃주민들에게 간접흡연의 피해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간접흡연의 피해를 덜 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많은 거리만 다니거나 흡연 구역만을 다녀야 한다. 거의 모든 건물들이 금연 건물이 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반대로 금연 건물 및 주변 구역을 벗어나면 흡연을 해도 된다는 생각에서인지 거리와 골목 등에서는 여전히 담배를 피고 다니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흡연을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흡연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상태에서 금연 구역에서만 있다고 금연 구역이 아닌 공간은 흡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쉬울 것이다. 즉, 기본값이 금연이 아니기 때문에 금연 구역이 아닌 곳은 곳 흡연해도 괜찮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흡연 구역을 설치하여 그외 지역은 금연 구역임을 특별히 알리지 않아도 시민들이 인지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금연이 국가 정책의 기본값이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기본값을 변경할 수 있는 권리 (easy to opt-in) 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opt-in / opt-out 이 쉽게 된다는 것은 결국 정책의 방향이 반대 방향이란 말일 뿐이다. 기본값이란 대다수가 그래주었으면 하는 방향이다. 따라서 쉽게 그 정책을 떠날 수 있는 구조란 말은 그 정책은 방향이 존재하지 않거나 국가적 정책의 철학이 없거나 더 심한 경우 겉으로 말하는 정책의 방향과 실제 정책의 방향이 다른 경우일 것이다. 결국 어렵게 나올 수 / 들어 갈 수 있는 권리 (hard to opt-out / opt-in) 는 법률로 규정하여 예외를 줄 수 있지만 쉽게 나올 수 / 들어 갈 수 있는 권리란 정책의 기본을 생각하지 않는 국가적 철학의 부재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책은 왜 중요한가 

국가 정책의 기본값 즉, 정책의 방향이 무엇인지는 1) 국가 전체가 가져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설정하고 2) 국가 전체의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은 무엇인지 그리고 3) 분쟁 및 대립이 일어날 때 해결의 기준을 제시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1) 국가 전체가 가져야 할 가치관은 쉽게 알 수 있다. 국가가 기업의 활동에 세금을 감면해주고 연구 개발에 사용된 비용에 대해서도 세금 혜택을 주는 이유는 기업의 활동을 장려하고 기업의 활동을 통해 국가의 이익 더 나아가 국민의 이익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친 기업 정책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경제활동이 중요하다는 국가 가치관을 반영하는 정책의 결과이다. 즉, 국가가 기업 활동에 대한 기본값은 장려이다. 결국 기업에 관련된 많은 규제를 제거한다는 정책은 기업이 가지는 탐욕적 활동보다는 기업이 가지는 생산적 활동이더 크다는 국가의 가치관이다.

반대로 기업의 탐욕적 활동이 국민들을 힘들게 만든다는 가치관을 가진 국가의 경우에는 당장 기업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이득보다는 국민들의 생명과 인권을 더 보호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무리 경제적 기여를 했다고 해도 노동권을 침해하거나 나쁜 노동 환경으로 노동자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 기업에 강력한 규제를 가하는 국가도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북유럽의 국가의 경우 모든 법률적 위법 사항이 없는 기업이라도 국가 정책상 필요가 없다면 퇴출시키는 경우도 있다. 즉, 국가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리 경제적 이득이 있어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사회적 비용이란 대부분 정책의 혼란이나 일관되지 못한 정책의 실행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비용이란 '개인이나 기업이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거나 제공하는 경우 이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제3자 혹은 사회 전체가 부담하게 되는 비용' 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생산품을 만들어 내서 기업이 이윤을 얻지만 공장에서 발생한 공해 물질이 주변 마을의 주민들에게 유입되어 주민들이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주민들은 병원비 등의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공해 물질 방지'가 정책의 기본값이라면 이에 대한 적절한 규제를 통해서 주민들의 건강을 악화시킬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겉으로 아무리 국민의 보건, 건강을 위하는 정책을 세운다고 말을 해도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 이를 아주 쉽게 opt-out 시키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핵페기물 유치, 위험성의 논란이 있는 송전탑 설치와 같은 경우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우선시 하게 된다면 혹시 있을 수 있는 작은 가능성에도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쉽게 opt-out 한다는 것은 국민의 건강은 국가 정책의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이윤활동이 정책의 기본값이고 국민들은 'opt-out 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3) 분쟁 및 대립이 일어날 때 국가 특히 사법부가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줄 것인지는 결국 국가의 정책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이 결과 사법부의 판단은 항상 국가의 정책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같은 내용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국가의 가치관은 국가 정책의 기본값이고 기본값은 결국 정책의 방향이고 이 정책의 방향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할 권리는 해석에 따라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불법이 되기도 한다. 사실 더욱 더 큰 문제는 같은 본질의 문제에 대해서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정책의 방향성이 아닌 정책을 개인적 이득 (사적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연 구역이 아니라 흡연 구역 

미국의 대도시의 경우 금연이 기본값이다. 따라서 흡연이 가능한 구역이 제한적으로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유로움의 상징인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2010년 이후로는 거의 대부분이 금연 구역이 기본값이고 흡연은 일부 구역과 사적 공간에서 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는 것이 어색한 경우이다. 심지어 주변에 아무도 없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흡연에 부끄러워 하지 당당한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금연이 정책의 기본값이고 흡연할 수 있는 (opt-in) 권리가 제한적인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다. 한국이 어떻다고 말하기 보다는 각자 개인적으로 느끼는 느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한국처럼 길거리에서 흡연이 자유로운 심지어 금연 구역을 몇 걸음만 나가도 흡연이 가능한 경우를 자주 보았던 것 같다. 이 현상이 사실이라면 한국이 금연 장려 국가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쉽게 금연 정책을 벗어날 수 있는 (opt-out)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Smoke Free Zone 이란 자유롭게 담배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담배가 없는 (free) 공간이다. 보스턴 시 전체는 기본적으로 금연구역이다. 

결국 근본적으로 전국적으로 금연 구역을 확대하는 것이 금연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흡연 구역을 제한적으로 만드는 것과 함께 흡연 구역의 조건을 까다롭게 만드는 것이 금연 정책의 정확한 방향이다. 금연 정책의 기본값은 금연이다. 이 말은 어디에서나 기본값은 금연이란 말이다. 길거리도 마찬가지이다.

책 결정의 단계 

정책 결정의 과정에서 opt-in / opt-out 을 생각하는 것은 정책 결정의 효율성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및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사후 장기 및 생체 조직 기증를 기본값으로 하고 이를 원하지 않을 때 opt-out 하여 '나는 기증을 원하지 않는다.' 를 밝히지 않으면 모든 국민들은 장기 및 생체 조직을 기증하게 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 반대이다. 국가의 장기 및 생체 조직 기증을 원한다는 opt-in 을 해서 자신의 의사를 밝힌 사람에게 한해서만 가능하다.

프랑스 장기 및 인체조직 기증 협회의 공익 광고 - 프랑스의 경우 장기 뿐만 아니라 피부, 뼈와 같은 인체조직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사후 기증이 정책 방향의 기본값이다. 원하지 않는 이는 opt-out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사후 장기 기증을 시신을 훼손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문화적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프랑스 및 많은 유럽 국가의 국가적 가치관은 장기 기증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과 삶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행이라 생각하고 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책의 기본값이 '사후 장기 기증 장려'에 맞추어 졌을 때 프랑스의 어떤 지성인이 논했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죽은 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배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행은 장기 기증이다. 만약 당신의 가족이 그 혜택을 한번이라도 받아 새로운 삶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가치에 눈을 뜬다면 죽은 이들도 기뻐할 것이다." 

국 이 가치관을 국가는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서 정책의 기본값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득 / 손해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경우 opt-in / opt-out 은 좋은 결정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기본값이 무엇이고 여기에 어떤 집단이 opt-in 할 수 있는지 어떤 집단이 opt-out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되고 이에 따라서 어떤 집단이 이득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큰 규모로 이득을 볼 수 있는지 반대로 손해는 어떤 집단이 어떤 규모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정책의 기본값이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점은 opt-out 내용으로 만들면 된다. 예를 들어 만성질환 환자의 장기, 혹은 전염성 질환 보유 환자의 경우 opt-out 에 해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을 내용은 만성질환과 같이 opt-out 대상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국가적으로 예방 진단 예산이 많이 발생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또한 국가 정책의 가치관이 확실하다면 예방 및 진단에 소요되는 예산으로 질병 및 질환의 초기 단계에서 찾아내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장점을 통해서 국민들의 진단 / 예방 참여를 기본값으로 둘 수 있다. 만약 이 경우 소요되는 예산이 국가 경제에 피해를 준다는 가치관이라면 관련된 정책의 기본값은 반대가 되어버릴 것이다.

본값은 철학적 고민의 결과이다. 

default 를 영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1 (의무 등의) 불이행, 태만; 체납; [法] 해태(懈怠), 채무 불이행. go into ∼ 채무 불이행을 하게 되다.
2  [法] (법정에의) 결석; [스포츠] (예정 시합에의) 결장(缺場). judgement by ∼ 결석 판결. lose a game by ∼ 부전패하다. win by ∼ 부전승하다.

지금까지 말한 기본값이란 최근 컴퓨터의 등장으로 나타난 말이다. 원래 default 의 첫번째 뜻은 나태, 불이행 특히 국가가 빌린 돈을 값지 않는 경우 국가 부도 (Sovereign default) 라고 말한다. 즉,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번째 뜻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 호텔의 경우 예약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 (no show up) 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이행할 의무도 없고 참석할 법정 다툼도 없다면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기본값이 되는 것이다. 국가 정책의 기본값은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따르게 되어 이행해야 할 의무도 아니고 법정에 나갈 이유도 없게 되는 것이다.

결국 컴퓨터 공학의 등장으로 사용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의 값을 위해 기본값 (default) 을 설정하게 되었지만 이는 국가의 정책과 유사한 점을 가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경우 아무 생각없이 개발자의 임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결정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개발자가 원하는 기능의 방향과 연관이 깊다. 그리고 해당 기능이 필수적이라면 절대로 opt-out 할 수 있는 옵션조차도 주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정책도 기본값을 가져야 한다. 아주 사소한 개발자의 결정에도 개발자의 생각이 반영되는데 국가의 정책은 더욱 더 그래야 할 것이다. 국가의 정책은 오랜 동안 축적된 인류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대부분 국가가 최소한 겉으로 거의 동일한 정책적 방향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인류가 가지는 보편적 철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권 탄압하고 사형을 활성화(?)하는 국가도 대의 명분은 더 많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형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제는 국가의 대의명분, 국가의 정책이 가지는 겉모습과 실체가 다른 경우이다. 이 경우 기본값 (default) 과 opt-in / opt-out 이란 기능을 통해서 국가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을 분석하면 실체적 국가의 정책 방향을 평가할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도 체계적인 결정을 위한 방법론으로 opt-in / opt-out 을 제시했지만 이는 국가 정책을 평가하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은 수중 자연을 포함한 국가의 자연 보호를 장려하는 국가라고 대내외적으로 말한다. 단 한번도 국가는 '대한민국은 자연을 파괴하기 좋아하는 국가이다' 말하지 않는다. 결국 국가의 정책 방향, 기본값은 '자연 보호' 가 되어야 한다. 기본값이 자연 보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예외 조항은 많으면 안된다. 즉, 자연을 파괴하고 인공적인 토목 시설이 개발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정책의 결과는 자연 생태계 종의 다양성이 확대되는 등 인간의 인위성이 사라진 상태에 더욱 가까워져야 한다. 그러나 4대강 사업 등을 통해서 자연이 파괴되어 가는 과정에서 국가는 함부로 '자연 보호'를 국가적 명분으로 말하기 힘들다. 그런 이유로 정책의 방향은 자연 보호가 아닌 환경 보호 더 나아가 환경 개발이라는 적극적 명분으로 바꾸어 나간다. 결국 인간이 개발한 것조차도 '환경'이라는 범주에 함부로 넣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정책이 제대로 가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감시자의 입장에서 국가 정책의 명제와 그 명제가 역사적 철학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안타가운 내용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국가는 '자연 보호'라는 명분이 아닌 '국가 경제' 와 '환경 개발' 이라는 정책의 명제를 내세웠던 것이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아무리 다양한 과학적, 논리적 반박을 해도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국가 경제'가 발전한다는 명제에 대해서 기본값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가 혜택을 보게 되는지 이것이 국가 전체의 공익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분석이 안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번째는 반대의 논리가 세부적인 내용과 함께 왜 적극적으로 '자연 보호'라는 더 중요한 명제를 강조하지 못했는가이다. 결국 경제와 환경 이라는 프레임에 갇혀버리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를 떠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국가 정책을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집단이 권력을 잡지 않도록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아쉬움이 남는다.

본값을 배우는 교육 

결국 철학의 부재는 국가의 정책에 기본값을 사라지게 만든다. 기본값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해도 적당한 이유를 만들 수 있고 심지어 개인적 이득을 위해 국가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간이 가져야 하는 기본값이 무엇인가? 

결국 기본값이란 당장의 이득이 사라진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나에게 이로움이 되고 공동체가 이로움이 될 수 있는 값이라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당장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게 된다. 인간에게 기본값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단순히 엉켜버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기본값으로 돌리기 (set to default) 로 해서 당장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만 생각해도 기본값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은 소프트웨어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정책이 시대에 맞지 않아서 또는 부도덕한 정권의 결과로 만들어진 정책에 의해 국민들이 망가지고 점점 파괴되어 간다고 해도 기본값이 있다면 언제라도 다시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부패한 정부가 사라져도 왜 좀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지 못할까 싶은 안타가운 마음이 존재한다면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기본값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컴퓨터 사용자에게는 기본값을 돌아갈 수 있다. 최소한 다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도감이 되어 줄 수 있다.

언젠가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었다. "정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데 대안이 뭐냐고 힘을 기른 다음에 싸워도 늦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힘을 단순히 권력이나 지위를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미 노예 근성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안은 아무리 부패해도 타락해도 되돌아갈 수 있는 기본값을 잘 배운 민중의 힘이다. 결국 교육의 문제이다. 인간이 가져야 하는 기본값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고 지식을 그저 경쟁과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기본을 배울 수 있을까. 프랑스 대혁명의 원동력은 민중의 무력보다 계몽이 더 큰 역할을 했음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소프트웨어의 수많은 설정값을 바라보았던 어느 날 국가의 정책에 대해서 고민하며 마무리한다. 

정책의 방향에 대해서 ─ 금연구역의 역설을 통해서

Monday, April 28, 2014

민의 마음을 알아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국민의 눈물을 보고 같이 슬퍼하며 무엇이 걱정인지 물어보는 국가가 있고,
국민의 눈물을 보고 거짓 눈물인지 확인해 거짓이라 판단하는 국가가 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할 수 있는지 듣는 국가가 있고,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무엇이 자신에게 위험한 것 인가를 찾는 국가가 있다.

국민의 몸짓을 보고 무엇이 힘든지 불편함이 없도록 돌보는 국가가 있고,
국민의 몸짓을 보고 무엇을 막아야 불평함이 없도록 누르는 국가가 있다.

눈물만으로 알아낸다면 국민은 눈물만 흘릴 것이다.
목소리로 해결해 줄 수 있다면 국민은 편할 것이다.
몸짓까지라면 힘들지만 그래도 보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물도, 목소리도, 몸짓도 모두 소용없는 국민들에게
마지막 남은 방법은 '자신의 목숨'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선진국이란 돈이 많은 나라도, 힘이 강한 나라도 아니다. 이제야 느낀다.
선진국이란 먼저 (先) 국민의 마음 (眞心) 을 알아내는 국가이다. 

숨을 다해 소리쳐도 그 뜻을 알지 못하는 국가는 폭력이다.

선진국이란 무엇일까...

Wednesday, December 11, 2013

송에서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1918-2013) 추모식에서 오바마 미 대통령이 연설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강한 메세지의 내용들이 점점 빠져 들어 결국 번역을 해야겠다 마음 먹었다. 완벽할 수 없지만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했던 넬슨 만델라의 정신을 본 받아 일단 번역을 시작했다. 연설문 중간 넬슨 만델라의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며 그가 남긴 정신에 대해서 살아 있는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멋진 메세지에 끌려 번역을 올린다. 연설문 번역 이전에 먼저 기사 하나와 영문 연설문 원문 링크를 같이 올린다.

Nelson Mandela Memorial: Photos From Celebration Of Madiba's Life

오랜동안 적대 관계로 있던 미국 대통령이 쿠바의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은 넬슨 만델라가 얼마나 큰 영혼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뭉클한 사진은 흑인 남성와 백인 여성이 같이 있는 장면이었다.

(LAUREN MULLIGAN © THE TIMES)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준 그의 정신을 깊게 길게 느끼고 싶다.

─ 오바마 대통령 연설문 원문 및 동영상
Transcript: Obama's speech at Nelson Mandela service by CNN
President Obama Speaks at a Memorial Service for Nelson Mandela by the WHITEHOUSE

오바마 대통령 연설문 번역 (번역: Thomas Júne Park)

번역前주: ① 큰 따옴표는 넬슨 만델라의 말을 연설문 중 인용한 내용 ② 편의상 연설문을 경어체로 작성 ③ 가능한 직역을 위주로 번역하려고 했지만 능력의 부족으로 내용의 전달을 위해 의역 혹은 표현을 변화시켰음 ④ 의미 전달이나 배경 지식의 이해를 위해 [번역주:  ] 로 추가했다.


1 만델라 부인 (Graça Machel; 만델라의 미망인) 과 유가족 여러분, 남아프리카 공화국 Zuma 대통령 및 정부 각료 여러분, 연방 주정부 지도자 및 관료 여러분, 전, 현직 내빈 여러분.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여러분들과 소중한 한 사람의 삶을 추모하기 위해 있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남아프리카 국민들, 모든 민족과 모든 계층의 여러분들에게 전 세계는 넬슨 만델라와 같은 인물과 함께 할 수 있었음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의 투쟁은 여러분들의 투쟁이었습니다. 그의 승리는 여러분들의 승리였습니다. 여러분의 존엄성과 희망은 그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2 한 사람을 찬사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한 삶을 구성했던 사실과 기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들의 기쁨과 슬픔이 녹아 들어간 한 사람의 본질적인 진실을 통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밝혀주는 소중한 순간과 고유한 특성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번역주: 앞의 사실(facts) 기록(dates) 에 대응하여 unique qualities quiet moments 가 대응한다.]  (이렇게 어려운데) 역사의 위대한 한 사람을 찬사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한 국가를 정의로 이끌었고, 그 과정을 통해 전세계 수십억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3 1차 세계 대전 중 태어난 권력의 중심(종주)과 관계없던 한 소년은 소떼를 기르고 템부(Thembu) 부족에 안에서 배우고 결국 그 소년은 20세기 마지막 위대한 민족 해방자가 되었습니다. 간디와 같이, 그는 저항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 저항운동은 초기에는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킹 목사와 같이, 그는 억압받는 자들을 대변하고 인종 문제에 정의를 위해 도덕적 필요성을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주장했습니다. 케너디와 후르시초프 시대에 시작된 잔혹한 감옥 생활을 이겨내고 냉전의 마지막 날까지도 이어졌습니다. 감옥에서 나와서 무장 세력도 없이 그는 아브라함 링컨과 같이 조국이 분열될 위기에도 국가가 같이 공존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미합중국 건국 시조들과 같이 미래 세대를 위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제헌 질서를 세웠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의회와 법질서 체계를 선거를 통해서 비준했을 뿐만 아니라 임기를 끝내고 재임을 포기하는 그의 의지를 통해서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4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며 그가 이룬 업적의 내용과 올바르게 얻었던 덕망을 생각할 때, 넬슨 만델라를 떠올리면 미소와 평온의 상징과 같은 존재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미소와 평온은 속 좁은 사람의 억지스럽고 화려하기만 한 모습이 아닌 (소박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오히려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만델라는 그가 가진 의문과 두려움을 우리와 함께 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승리와 함께 그의 실수들도 함께하려 했습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나는 성인이 아니다. 성인이란 항상 노력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번역주: 만약 사람들이 성인을 항상 노력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만델라는 스스로 성인이라 부를 수 없다.]

5 그가 불완전함, 결점을 인정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유쾌한 유머감각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가 가져야 했던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여전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흉상같은 사람이 아니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의 사람이었습니다. -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으며, 아버지였고 친구였습니다. 그도 역시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에게 배울 것을 찾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가 이룬 어떤 것도 운명적인 것들은 없었습니다. (그냥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가 남긴 삶의 한 획에서, 우리는 투쟁과 통찰을 통해, 인내와 신념을 가지고 역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은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삶 안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 만델라는 우리에게 실천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이상을 위하여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만델라가 그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부끄럽지 않은 저항정신, 공정함에 대한 고집있는 의지 를 통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수백만의 남아프리카 흑인, 유색인종과 함께 그가 말했던 것처럼 무수한 멸시와 수많은 모욕, 기억할 수 조차 없는 순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분노와 우리 국민들을 가두는 체제에 싸울 수 있는 욕망을 공유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7 그러나 아프리카민족회의 (ANC) 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던 Sisulus (Walter Sisulus) 와 Tambo (Oliver Tambo) 와 같이, 만델라도 그의 분노를 조절하고 조직을 통해, 플랫폼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전략을 통해 싸울 수 있도록 그의 욕망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신이 부여한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행동들이 만든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강력한 이해관계와 부정함에 맞서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백인 기득권에 맞서 싸워왔다. 또한 흑인 기득권과도 맞서야 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고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곳에서 같이 살아가는 민주주의, 자유 사회의 이상을 소중히 여겼다. 이것이 내가 살고 싶은 그리고 이루고 싶은 이상이다. 그러나 만약 필요하다면, 나는 그 이상을 위해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었다.

8 만델라는 우리에게 실천의 힘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상의 힘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성(reason)과 논의(arguments) 의 중요성입니다. 당신이 찬성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 뿐만 아니라 당신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검토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만델라는 이상은 감옥의 벽에 의해 갇혀 있을 수 없음을, 저격수의 총탄에 제거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피고로 선 법정은 인종차별주의를 기소하는 재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언변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번역주: 만델라의 죄를 묻는 재판을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항변으로 이끌어 냈다는 뜻] 변호사로 지낸 시절또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보낸 수십년간의 시간을 통해 논의를 제대로 이끌어 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또한 (투쟁) 운동에서 만난 다른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적 갈망을 표현하는데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억압자들의 언어와 습성을 배워 훗날 그들의 자유가 얼마나 억압자들의 의지에 달린 문제인지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번역주: 억압자들의 모습과 본성을 이해하여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고 그들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잘 설득하려고 했다는 뜻]

9 만델라는 우리의 실천과 이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여주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해도 법과 조직에 의해 상처나고 부정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는 현실적 (practical) 이었습니다. 그는 상황과 역사의 역경에 부딪치며 그가 믿는 것을 시험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켜야 할 핵심적인 원칙들에 대해서는 그는 단호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무조건적 사면 요구에 대해서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주: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통해 백인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무조건적 사면을 요구했지만 만델라는 거부했다. 오직 “범인이 진실을 밝히고 그들의 행동이 정치적 동기였음을 증명하면 위원회는 개인별로 사면을 행한다.” 는 원칙을 고수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인종분리 정책) 체제에 “죄수들은 계약에 참여할 수 없다.” 는 말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번역주: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이 협상할 수 있다. 죄수는 계약같은 걸 할 수 없다.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나의 자유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의 인용 참고: http://onni.me/J73nRn ]

10 그러나 정권 이양과 새로운 법률안의 기초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협상력을 보여준 것처럼, 그는 큰 목표를 위해 타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투쟁) 운동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능숙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헌법은 다민족 국가의 민주주의에 적합했으며 다수의 권리 뿐만 아니라 소수의 권리까지도 보호할 수 있고, 모든 남아프리카 국민의 소중한 자유를 위해 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그의 비젼에도 충분했습니다.

11 그리고 마침내, 만델라는 인간 정신을 엮을 수 있는 유대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유분투 (Ubuntu). - 만델라의 뛰어난 재능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서로 유대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인류를 위해 하나될 수 있음을, 서로 서로가 공유하며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줍니다.

12 우리는 그가 이런 정신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며 그가 보낸 어둠과 고독의 공간 안에서 (감옥안에서) 얼마나 이런 정신을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취임식에서 귀빈과 같이 감옥 시절 자신의 간수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을; 남아프리카 유니폼을 입고 럭비 경기장에 있던 그의 모습을; HIV / 에이즈와 직면해야 했던 슬픈 가족사를 접하는 그의 모습을 기억할 것입니다. - 이렇게 그가 가진 공감의 깊이와 이해심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분투를 구체화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안에 있는 진실을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번역주: Springbok uniform : 만델라는 대통령이 되고 백인의 유산같던 럭비 경기에서 남아프리카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 그리고 감격적인 승리를 거둔다. 영화 INVICTUS 참고 ; HIV / AIDS : 만델라의 아들은 에이즈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죄수 번호인 46664 은 에이즈 퇴치 운동을 위한 캠패인 이름이 되었다.]

13 이렇게 만델라와 같은 사람이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간수들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다른이들이 당신을 신뢰하기 위해 먼저 당신이 다른이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화합은 잔혹했던 과거를 무시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거를 직면하여 포용, 관용과 진실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법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바꾼 것입니다.

14 남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전세계 사람들에게, 만델라의 죽음은 당장 슬픔의 시간이고 그의 영웅적 삶을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나 (오바마) 는 우리 각자에게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솔찍하게, 우리의 위치와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가 남긴 교훈을 얼마나 내 삶에 반영하며 살아왔는지. 이것이 나또한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15 남아프리카와 같이 미국도 인종적 차별 지배의 시절을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잘 알듯이, 그에 따른 희생이 있었습니다. -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유명한 사람이든, 무명의 사람이든, 새로운 날의 서막을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미첼 (오바마 부인) 과 나는 이러한 투쟁의 수혜자들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는 그리고 전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할 수 없습니다. (퇴색되게 할 수 없습니다.)

16 형식상 평등이나 보편적 선거권을 이끄는 투쟁들은 드라마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도덕적으로 분명한 것처럼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역주: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옳은 것들이 도덕적으로 분명한 내용인지 알기 힘들지 모른다는 뜻] 오히려 그런 것들은 덜 중요할지 모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여전히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도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없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전세계에는 단지 정치적 믿음때문에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그들의 생김새, 그들이 믿는 것, 그들이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죄가 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17 그런 이유로 우리도 역시 정의를 위해 행동(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평화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만델라가 이끈 인종간 화합의 유산을 누리며 행복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적 빈곤과 급증하는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적당한 타협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만델라가 보여준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속을 요구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들이 따르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많은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기만족과 냉소주의에 안주하는 방관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18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질문은 - 어떻게 평등과 정의를 실현시킬 것인가; 어떻게 자유와 인권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갈등과 분파에 의한 전쟁을 종식시킬 것인가; 입니다. 이런 질문에 쉬운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1차 세계대전에 태어난 한 소년도 쉬운 해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우리에게 끝나기 전에는 항상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남아프리카는 이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남아프리카는 우리가 변화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름으로 구별되지 않고 우리가 함께 가진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갈등에 의해 갈리지 않고 평화, 정의, 기회로 만들어지는 세상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 우리는 다시는 넬슨 만델라 같은 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세상 모든 곳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만델라가 보여준 일들을 당신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30여년 전, 학생이었던 나는 넬슨 만델라를 알게 되었고, 그가 이 아름다운 땅 (남아프리카) 에서 이끌었던 투쟁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내 안의 무엇인가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다른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여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델라 그분에 비한다면 항상 모자른 존재일테지만, 그는 항상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원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는 내 안에 무엇이 최선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20 위대한 해방자가 안식을 찾게 된 후, 우리 모두가 각자의 도시로, 집으로 돌아가 매일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그의 용기를 찾기 바랍니다. 우리들 어딘가 있을 그가 보여준 영혼의 웅장함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어두워질 때, 부당함이 우리의 심장을 짓누르게 되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에도 불구하고 힘들 때, 감옥의 공간 안에서도 갇혀 있었지만 평온을 찾을 수 있었던 만델라의 말들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문이 얼마나 좁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형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

너무도 위대했던 한 영혼이여. 우리는 그를 무척 그리워 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은총이 넬슨 만델라와 함께하기를, 신의 은총이 남아프리카 국민들과 함께 하기를...

Rest in Peace, Nelson Mandela

번역: 오바마 연설문 - 넬슨 만델라 추모식

Wednesday, November 27, 2013

교인이 정치적 발언, 행동을 했을 때, 정치인이 종교적 발언, 행동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런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근거로 정교분리 (政敎分離) 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한자어가 주는 함축적 묘미와 그 함의적인 기능에 대해서 매우 좋아하고 이는 어렵고 복잡한 상황을 쉽게 그리고 간결하게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 긍정적 기능이 때로는 본질적 의미를 흐리게 만들어 섬세한 의미의 전달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다고 느낄 때가 많다. 정교분리 (政敎分離) 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정교분리는 '나누어질 수 있다' 는 가능성 (what could be) 의 의미보다는 '나누어져야 한다' 는 당위성 (what should be) 의 문제로 넘어가는 현상을 볼 때마다 안타가운 마음이 더 강해진다.


정치와 종교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 아닌 나누어져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보편적 인식이 옮겨갈 때 대중은 이를 하나의 가치 근거 (a yardstick for judgement) 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런 가치 근거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종교 행사를 개인적 신분이 아닌 국가 원수로 혹은 지도자로 수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삼아 그런 행동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런 판단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정교분리를 포함해 많은 경우 역사적 전통과 여러가지 후유증의 산물이라면 득실보다 손해가 더 클 수 있다는 경험적 산물이기에 따르는 경우가 옳을 확률이 높을 뿐이다.

습적 언어의 문제점 

이렇게 여러가지 이유로 대중들에게 마땅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대중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것을 '관습적 언어 (conventional language)' 라고 정의내려 본다. 그런데 이런 관습적 언어는 그 시간이 오랫동안 지나면 어느새 '언어적 관습 (linguistic practice)' 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어적 관습이란 자주 사용하고 충분히 그 뜻은 이해를 하지만 그 언어의 기원적 본질 (originated fundamentals) 과 역사적 흐름 (chronological tendency) 은 잊혀지고 그 언어가 가지는 직관적인 용법 (instinct diction) 에 치중하게 되기도 한다. 정교분리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싶다. 그 누구도 정교분리를 대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있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분리되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언어적 관습이 만드는 첫번째 문제는 '왜 정교분리가 맞는가?' 란 질문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쓰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적당히 현학 (衒學 ; pedantry) 적으로 보일 수록 본질적 뜻을 탐구하기 보다는 쓰기에 급한 경우가 많아지는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그렇게 관습적으로 쓰인 언어가 어느새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왜' 라는 질문을 하지 않고 쓰는데 집중하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인 언어적 용인 (acceptance) 은 당위성으로 바뀌게 된다. 정교분리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 고 용인하고 연습하면서 어느새 사람의 의식 속에서는 '분리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have no toleration ; [note] 용인하다, 받아들이다는 영어로 accept 도 있지만 tolerate 도 있다. 둘다 받아들이다 용인하다란 뜻이지만 tolerate 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내용에 대한 관용, 참고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다름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 을 뜻한다.)


안타갑지만 이렇게 관습적 언어에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도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보다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나 하지 말아야 하는 타부 (tabu) 의 내용이 많다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내용들은 인간의 대중적 인기에도 상당부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관습적 언어만 잘 사용하면 대중적 선동 혹은 여론의 조작은 가능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대북 문제에 있어서 상당히 민감하다. 민감하다는 것은 이미 의사 결정의 방향이 정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정교분리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학문적, 철학적 담론 (discourse) 는 사라지고 정교분리는 '항상 진리'가 되어 버리면 이에 비추어 조금이라도 어긋나 보이는 모든 것들은 옳지 못한 것들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된다.

치란 무엇인가? 

항상 그렇지만 짧은 질문이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정치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그만큼 정치가 우리에게는 이미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듯 우리가 사회를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개인 및 집단의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정치 (政治 ; politics) 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다양한 어원적 기원은 많은 참고 자료가 있으니 생략하고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인간은 왜 동굴을 나와 이처럼 복잡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먼저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조금은 광의 (廣義) 의 의미로 정치에 대해 생각해본다.

정치란 인간의 한정된 자원을 분란없이 쓰기 위한 규칙과 권력이다. 

물론 개인적 정의 (definition) 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뭐라 이견을 이야기해도 별로 할말은 없다. 그러나 문제의 시작은 도대체 인간은 이 복잡하고 머리아픈 정치를 만들었는가? 생각하며 반대로 정치를 통해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아마도 한정된 자원이 아닐까? 아마 신학적 원죄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만약 지구에 무한의 자원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그 자원에 대해 욕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애심보다 자비심이 더 커지고 나누어 쓰는 것에 익숙해질지 모른다. 헛된 가정이지만 인간의 무한에 가까운 욕심이란 역설적으로 자원은 코딱지 만큼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자원은 한정되었고 그 한정된 자원을 모든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경제의 개념이 발전하게 되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 정의로운가의 문제를 접하면서 정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문제를 접근하며 만들어진 경제와 정치는 마치 쌍둥이가 아닐까 싶다. (일난성인지 이란성인지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정치는 누가 어떻게 쓰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사회 구성원이 움직이고 이를 어길 때는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상위의 조직이 필요했고 그 조직은 당연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의 동의와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고 비록 개개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사회의 한정된 자원을 올바르게 쓰기 위해서 구성원의 권한을 정치라는 제도를 통해 맡기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민주주의, 혹은 공화정 등에 국한되는 내용은 아니다. 왕이 통치하는 시절에도 이는 동일하다. 비록 자신이 이집트에 사는 신분이 낮은 계급의 사람이라고 해도 민주주의를 꿈꾸며 왕이 물러나기를 바랬다면 처형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보면 아주 심하게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때문에 저세상도 앞서 갔지만) 당시의 정치 제도 즉,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시대의 정견 (dogma) 에 비추었을 때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즉, 당시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통치 규칙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치가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첫번째는 충분히 고립된 (isolated) 사회인 것이다. 자원이 충분한 나라에서 어느정도 가능할 것이다. 예전에 만난 브루나이 (Brunei) 출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딴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할 정도의 느낌이다. 오일 머니로 국민들은 충분한 생활비와 모든 교육비가 무료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제도들이 있다. 그런 이유로 브루나이 국민들은 자신들이 별 걱정없이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왕을 진심 존경한다. 그런데 브루나이 사람들의 특징은 그다지 시대의 흐름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경우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 권력이 통치 권력으로 강력해지고 사회 구성원의 요구를 왜곡하고 통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거대한 정치 세력화를 만들 때이다. 가장 대표적이고 극단적인 경우가 전제 정치이자 독재 정치가 될 것이고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은 아마도 독일나치가 될 것이다. 이렇게 정치 세력이 전제 정치 (전체주의) 화 될때 다양성이 존재하는 어떤 사회나 반대 세력이 발생한다. 만약 전제 정치 세력이 좀 더 강하다면 어떤 방법을 쓰던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 혹은 제거하려 할 것이다. 만약 반대하는 세력이 조금 더 우세하다면 그 정체 세력은 물러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교란 무엇인가?

이또한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면 짧기 때문이다. 정치란 무엇이다 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전달했지만 종교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이처럼 쉽게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냐면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할 때 대부분 과정되거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힘든 내용이 되거나 아니면 믿음에 근거를 하기 때문에 극적으로 거의 광적으로 대중적인 사람들의 동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극과 극의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 극단의 결과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 위해 아주 사소한 내용으로만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다. 어짜피 정교분리라는 주제를 통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하는가? 혹은 분리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리차드 도킨슨 (Clinton Richard Dawkins) 은 증명되지 않은 신의 존재, 과학적 증명이 존재하지 않는데 종교에 빠지는 모든 인간의 믿음, 행동 등은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종교가 만든 신학의 그럴듯한 내용으로 사람들을 빠지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천주교 (로마 카톨릭) 신자이지만 그렇다고 정면에서 무신론을 강변하는 리차드 도킨슨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책을 탐독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다. 심지어 종교로 인해 인간의 악이 만들어지는 '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종교때문에 일어나는 많은 분쟁, 살인, 테러 그리고 무엇보다 무의식적 무비판적 행동들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자원의 낭비를 이야기한다. 리차드 도킨슨의 이야기에 모두 동의한다면 정교분리와 같은 논의는 별로 필요없을 것이다. 어짜면 정교분리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정교분리 때문에 갈등을 만드는 사회에서는 좋은 해결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항상 '제거'는 확실한 문제 해결 방법이지만 곧 제거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되기 때문에 이또한 적절한 방법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강력한 전제 국가는 권력의 힘으로 충분히 몰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이유는 그리 큰 이유가 아니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어느 순간 느끼게 되었던 인간의 한계성이었다. [ 글쓰기에 대한 소회(所懷) - 의도에 대해서 ]

삶에 대한 한계성... 먼 이야기같았던 죽음이 어느 순간 다가올 수 있다는 두려움과
인식에 대한 한계성... 내가 생각한 세상은 나와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공포로 인해, 

[ 신을 믿는 사람들은... ]

할 수 없음에 안타가워 해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할 수 있음에 자만하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음은...

유한한 삶에 대한 겸손함과
죽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이
교체해 흐르는 그 교차점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공감한다. 

종교가 무엇이냐고 사전적 의미를 이야기하면 죽음 이후 영원과 내세에 대한 약속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죽고 나서 이야기일 뿐이다. 삶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한계들 속에서도 인생이 좌절과 포기가 아닌 다른 방법을 제시해준다는 의미에서 종교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한하기 때문에 허무해질 수 있지만 겸손해질 수 있고, 죽음 (끝) 이 있기에 두려울 수 있지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얻을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종교를 통해 '같은 상황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좀 특이한 시선'을 얻게 된다. 즉, 허무와 두려움을 택하지 않고 겸손과 용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수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겸손과 용기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 숨쉬는 공간과 시간에 있는 것이다.

출처: 평화방송

종교가 무엇이다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개인적인 느낌을 다소 감상적으로 전달해 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종교는 겸손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생각보다 좋은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신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불완정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할 수 없다. 겸손과 용기가 때로는 변질되어 신의 권능을 배경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이를 통해 무엇인가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용하거나, 용기가 너무 과하여 맹목적으로 변해서 타인의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그 어떤 종교도 옳다고 말하지 않는 살인조차도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를 수 있게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핵폭탄과 총기류를 만든 과학 기술이 있기 때문에 과학 기술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 근본적 이유가 되어야 한다.

  • 겸손은 자신을 낮게 만든다. 낮게 만든다는 것은 비천하거나 천박해진다는 것이 아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쉽게 겸손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은 인간을 좌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겸손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겸손해진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소외받은 사람들, 아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한계에 부딪쳐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 용기는 인간을 넓게 만든다. 용기는 무모하거나 높아지기 위해 만드는 탐욕이 아니라 보다 넓은 곳으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신발과 같은 존재이다. 가야할 길이 가시밭길이고 거친 돌밭이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돌진할 수 있어 경험하지 못한 낯선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는 나와 다른 환경에 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만들어 준다. 

종교가 겸손과 용기의 미덕 (virtue) 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깨어있을 때 종교는 항상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당연하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히 종교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종교는 더욱 더 겸손과 용기의 미덕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점점 이런 미덕이 어려워지는 세상에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세상에 뿌려진 많은 현상중 종교와 관련된 사건들을 접하면 두가지 키워드로 분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겸손' 과 '용기' 라는 두가지 기둥을 통해서 말이다.

는 분리해야 하는가?  

관습적 언어라고 하더라도 일단 정교분리를 믿고 따라보자. 정교분리,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맞춰보자는 것이다. 우선 주중에는 정치적 활동을 하고 주말에는 종교적 활동을 하고 정치 활동은 극명하게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종교적 활동에서는 극명하게 종교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음... 가능할까? 이에 앞서 왜 정교분리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잠시 물어보고 싶다. 정교분리는 상당히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이야기를 다 서술할 수 없지만 그리고 역사적 내용이기에 직접 찾아보는 것이 더 필요할테니 결론적으로 정교분리는 역설적으로 종교, 정치 두 분야의 극명한 분리를 통해 무엇인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정치와 종교가 만든 갈등의 요소를 합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야할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정교분리를 이야기하지만 일상의 삶과 대화에서도 종교적 표현은 가득하고 사실상 많은 경우 정교분리라고 말하기 참 이상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운 관습적 부분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법원에서 증인 선서를 할때 성경에 손을 올리고 증인 선서를 한다. 증인이 이슬람 교도라고 코란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물론 주에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서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저 관습적 요소로 전통처럼 계속 사용한다. 이외에도 정치적 행사에도 종교적 발언도 많고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정치인들이 그처럼 외쳐대는 'God bless America' 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관습적 언어는 때로는 모순된 행동에 모순된 논리를 만들기도 한다. 다시 넘어와 미국의 정교분리는 독립 전쟁이후 영토 확장하는 시절 주마다 종교적 색체가 달라서 이를 조정하기 귀찮아 내린 일종의 정치적 해결책이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종교를 통해 사적 이익을 얻던 성직자들의 부패와 왕권의 대립 과정에서 특히 조세 및 다양한 노동력의 갈등이 심해 이미 사이가 안좋아진 상황에서 일종의 협상의 결과 혹은 왕권이 강해진 상황에서 종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치 세력이 종교의 배경을 가질 때 정치 세력이 절대화 혹은 우상화가 되는 결과 혹은 그 반대로 종교 지도자가 정치 세력화 되어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 종교를 배척하는 인권의 문제를 만들어낼 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은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정교분리를 경계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많은 경우 이야기하는 정교분리의 타당성으로 정치는 현실의 문제, 종교는 영원의 문제로 그 문제해결 영역 (domain) 이 다르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정교분리를 철저하게 따르려는 사람들이 주중에는 현세에 주말에는 내세에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너무도 비현실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어떤 것이든 이 세상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문제일 뿐이다.

정치와 종교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사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 말아야 한다 그런 주장 자체가 별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가장 의미있는 역설처럼 정치와 종교 그 어느 누구도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장 최고의 정치가 무엇일까? 장자(莊子) 외편인 천지편(天地編) 에 나오는 계철(季徹) 의 말을 인용하면,

季徹曰:「大聖之治天下也, 搖蕩民心, 使之成敎易俗, 擧滅其賊心而皆進其獨志, 若性之自爲, 而民不知其所由然. 若然者, 豈兄堯舜之敎民, 溟涬然弟之哉? 欲同乎德而心居矣!」

계철이 말했다. “위대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따라서 풍속을 훌륭하게 만들도록 합니다. 백성들의 악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모두가 도를 얻으려는 뜻을 밀고 나가도록 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은 그렇게 되는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정치를 어찌 요임금이나 순임금이 백성들을 가르치던 경지에 견주겠으며, 아무 생각 없이 모두가 같은 정치라고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같은 덕을 지니고 마음이 편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최고의 정치는 백성들이 정치가 이루어지는지 조차 모르는 정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유로 정치가 혼란스럽고 부정하면 그 직접적 피해는 백성들이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이 동의한 이란 단순히 다수결에 의해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반수의 지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공정했는가? 부정이 없었는가도 중요하다. 정치 세력이 가지는 정당성이란 따라서 다수결의 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 위임한 정치 세력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의 보이지 않는 희생과 의무를 통해서 만들어진 권력이기 때문에 그만큼 도덕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철은 "도을 얻으려는 뜻을 밀고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전에 '악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어' 란 단서가 붙는다. 그리고 그런 정치의 현상적인 결과는 '모든 백성들이 '마음이 편하게 되어야 ...' 한다는 점이다. 다수결의 지지는 형식적 지지일 뿐이다. 만약 집권을 한다고 해도 정치 세력이 부정했다거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 옳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면 사회 구성원의 지지는 영원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 세력이 가져야 하는 정당성이란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다수'인 사람들이 소수의 반대 의견에 관용을 배풀어 결국 반대의 소수조차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이다.

허나 불행히도 완전 일치하는 모두가 정체 세력과 의견이 일치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정치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최상의 정치가 이루어지거나 반대 세력은 모두 제거된 전체 국가(사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비록 자신을 욕하고 반대한다고 해도 그 반대의 이유를 찾아 관용을 배풀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종교가 가졌으면 하는 겸손과 용기는 모두 인간이 가지는 한계에서 시작된다. 그 한계의 가시적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종교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사회에서 위험과 폭력에 노출된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가 강자의 편에서 권위와 권력을 휘두를 때 맹목적 희생을 요구한다.

─ 몽달이 중간 정리 ... 

개인적으로 종교와 정치는 서로 공존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교분리에 대한 요구가 많은 경우 그 사회는 분열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다양성과 분열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정치의 관용과 종교의 겸손을 통해 다름이 서로 인정되고 서로의 가치가 존중되면 분열은 곧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풀 수 있는 다양한 혜안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정치, 종교 그 어떤 입장에서든 서로의 주장만을 강요할 때 분열은 분열로 계속 되고 그 분열은 결국 서로의 존재를 파괴하고 죽여야 하는 충분한 당위성이 된다. 반대로 정치는 사회적 약속을 통해서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공동선을 항상 고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법률과 규제를 통해서 사회 구성원을 동일한 굴레에 넣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묘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 세력은 모든 곳을 다 볼 수 없다. 특히 정치 지도자가 엘리트들만의 집단이라면 구조적 어려움을 가진 약자들을 살피지 못한다. 그런 곳에 종교의 용기가 필요하다. 종교의 용기를 통해 정치가 더욱 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약자를 대변하는 마당발 종교인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2013년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 국가 대한민국 

정치관용약속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둘은 정치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종교겸손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둘은 종교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 

종교와 정치는 서로 다른 현실과 영원 이라는 도메인(영역)을 관여하는 기능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삶 안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정치가 더욱 관용을 보이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종교의 겸손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종교인 또한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 정치의 약속을 지키고 관용가 이루어지는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약자의 대변인으로 정치의 관용을 촉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교분리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인간이 만든 관습적 언어에 어느새 맹목적으로 당연히 옳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없을까?

2013년 분명 대한민국은 정교분리를 명시해놨다. [ 헌법 제2장 20조 ] 그러나 정치와 종교는 분리한다 앞에는 국가가 국교를 정해 종교적 권위를 통해 타 종교를 배척하거나 종교의 권위로 국민들의 인권을 제한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만약 한 신부님이 법률적 위반 사항을 지적하며 정치가 가져야 하는 약속의 생명을 어기고 있으니 그 정권의 정당성을 한번 고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며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와 같은 비중으로 [ 헌법 제5장 ]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헌번이 정한 국민을 그리고 그 국민을 통해 만들어진 정치 세력이 단지 정치 세력의 전반적 의견에 반한다는 이유로 신부님의 '조국이 어딘지 묻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 헌법 제2조 ] 가 전하듯 법률적으로 어떤 자격요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종교가 약자의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생존과 생명에 대한 종교적 연민이자 사명이다. 부정 선거로, 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잡아도 경제를 살리고 많은 국민들 잘 살게 하면 되지 않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발언지는 대부분 그런 정치 안에서 혜택을 보는 계층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려고 하면 그 부정함을 양심에 견디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결국 부정한 방법이 정당성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양심을 비참하게 만들어 정치의 시작부터 '마음이 심하게 불편한' 국민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를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부정에 치를 떨고, 약자는 더욱 생존에 몰리게 된다면 그것은 최상의 정치와 멀어지는 정치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 세력의 권력 획득 과정의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진심을 믿는다. 그분이 국정원과 국가 기관이 아무리 조직적으로 선거 여론에 개입하고 정치 생명의 한 기둥으로 약속인 법률과 헌법이 하지 말라는 정치 개입을 했다고 해도 그분이 대통령이 아니고 물러나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다만 단지 자신을 지지한 국민 뿐만 아닌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들까지도 자신의 지지자가 될 수 있도록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어 소위 '어머니의 마음으로 약자를 보살핀다면' 왜 종교가 약자의 편에서 대변하고 목소리 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국가 지도자의 당당한 위용으로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은 잘못된 것이고 그 영향으로 대통령이 되는데 득본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약속을 어긴 국가 기관의 수장으로 잘못이라고 차라리 따끔하게 잘못되었으니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도록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냈다면 국민들이 이처럼 정치를 통해 불편한 심기를 들어내었을 것인가?

언제나 어디서나 종교가 정치처럼 세력화 되고, 정치가 종교처럼 이념화가 짙어지면 항상 정치와 종교는 점점 혐오의 대상이 되어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의 순기능, 종교의 순기능을 보고도 정교분리를 외치며...

  1. 배척과 불이행의 정치를 보고 종교가 바른 소리를 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우수개 소리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올리면 댓글로 '걱정된다' 며 정말 진지한 걱정을 하는 글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정치가 우리 삶에 공포처럼 다가와 있는지 느낄 때가 많다. 진정 우수개 소리였으면 좋겠다. 신부님 한명의 시국 미사 강론에서도 지도자의 관용을 보여주기 보다는 '묵과' 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모습에서 국민들은 정의로움을 느끼는가? 관용과 인내는 점점 사라진다. 국민들은 묵과하지 않음을 통해 정의를 배울 것이다. 정치는 결국 국민들이 보고 배우는 '삶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2. 종교의 오만과 비굴함을 보고 정치가 적절한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면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종교적 신념이 지나쳐 논리와 이성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종교적 맹신은 중독이 되고 일상의 생활을 파괴하여 사회 구성원으로 가져야 할 의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국민들을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도록 돕지 못한다면 종교의 오만으로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은 희생자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종교가 사적 이익을 취하고 도덕적 결함을 가지는데도 종교적 힘이 정치력을 가져서 제대로 처벌도 받지 않는 세상이라면 국민들에게 종교적 가르침은 위선이 되고 '약자들의 쉼터'는 점점 사라질 것이다.  

무리하며 라며...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며 정교분리를 이야기한다면 나는 반대하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이상하는 어떤 제도도 사실상 그 근본적 원칙을 지키면 인간에게 불행을 주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정치도 종교도 마찬가지다. 두가지 모두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 녹아 있는 원소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무신론자에게 종교는 아니지 않냐고 묻는다면, 무신론자에게도 인간의 두려움, 고통 그리고 아픔을 통한 인간의 한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지 묻고 싶다. 각자 그 인간의 한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한번쯤 해보았다면 그 질문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종교와 같은 컨텐츠 (contents) 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가장 보기 싫은 글의 종류가 있다. 부정적인 내용,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반대의 지엽적 내용을 강조하여 반증하는 과정을 다루는 글들이다. 그래도 그럴 수 있다고 ACCEPT 가 아닌 TOLERATE 해볼려고 노력한다. 정교분리... 오랜동안의 염증이 있다고 염증이 있는 생명체를 죽일 수 없다. 염증의 원인을 찾고 염증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염증에 강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런데 가끔 인간의 사회 제도들은 쉽게 버려지거나 반대하거나 때로는 이를 통해 심지어 사람의 생명까지도 제거하려고 한다. 종교, 정치적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하고 서로가 다름을 틀리다며 관용을 보이지 않는 모습은 너무 자주 보게 된다. 국민들이 불편한 것은 이 관용이 사라져 어떻게 하면 서로를 죽일까 매달리는데 힘쓰는 모습에 지치는 것이다. 그런 사이 정치는 소위 정쟁이 되고 약자는 점점 약자의 생존에 시달리다가 죽어가게 된다.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일상에서 만나던 사람이 지속적으로 나에게 실망을 준다면 인간적으로 보지 않으면 되지만 국가의 지도자, 공인은 백번 실망을 해도 한번의 관용으로 많은 민심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관용의 정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감동의 정치가 될 수 있는데 왜 그것이 어려울까 싶지만 그것도 인간이 가진 한계가 아닐까 싶어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적 이해를 떠나 그것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존과 삶이 걸린 정치의 문제라면 개인적 이해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복음 한 부분이 생각났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가득하지만 미완 (未完) 의 희망을 가지며 인용하며 끝내어 본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마태 10,34-36)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는가? ─ 정교분리에 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