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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y 6, 2019

운다라 말할 때 교육기관이나 지식이 많은 학자를 떠올리 쉽지만 우리의 가장 큰 스승은 사실 자연이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 providence 를 잘 따르는 대상은 오히려 인위적인 그래서 인간의 욕심이 반영되지 않는 진리를 선물해줄 때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동네 꽃집에서 만난 꽃집 아저씨(라지만 할아버지에 가까운) 를 만나고 꽃이 주는 다양한 매력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많은 이들은 꽃을 가볍게 바라본다. 아름답다는 가장 많은 수식어를 붙이지만 그 아름다움만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가장 기분좋은 선물이라고 받지만 가장 쉽게 버려지는 선물이 꽃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찬란한 꽃이 개화한 상태는 즐기지만 개화하지 않은 꽃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시들어가는 꽃들 속에도 어떤 아름다움이 있는지 잘 보려 하지 않는다. 가장 미물처럼 보이지만 자연의 섭리를 가장 따르며 살아가려는 존재이기에 그들은 항상 순수하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 짧은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가끔 꽃을 보면 자연의 섭리 그리고 만약 종교를 가졌다면 그 자연을 만든 창조주에게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원하는 소위 초자연적인 '기적'은 이미 꽃이라는 생명안에 살아 숨쉰다는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다만 우리는 고개를 돌릴 뿐이다. 

용담초 Gentiana scabra , 한국자생꽃 중 하나

부분의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린다.

─ 크리스티앙 보뱅, 인간 즐거움 [원문

국화 Chrysanthemum


국화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진 꽃이다. 한송이 꽃보다는 여러송이 작은 꽃들이 뭉쳐 있을 때 그 군집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꽃이다. 꽃집에서 국화를 고르면 국화는 정서에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판매하는 입장에서는 구매욕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무엇에 좋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꽃은 무엇인가 나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혼자 떠돌 수 없는 꽃들이 나로 인해 세상을 구경하고 나는 꽃을 보아 기분이 좋아지고 기르는 과정 속에서 내가 주는 관심이 어떻게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대부분 화분을 공기정화를 위해 필요한 존재이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잘 모르게 된다. 그리고 혹시나 어떤 식물은 인간에게 유해하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그런 식물은 보기도 어려워질지 모른다.

국화의 중앙 부위 관상화 부분과 주변부 설상화 색 조합이 다양하다

인간의 필요 욕구에 의해 많이 좌우되는 꽃이지만 많은 이들이 별 거부감없이 좋아하는 꽃이 아마도 국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국화 한다발 혹은 한움쿰 데려 오면 국화는 별 문제없이 잘 자란다. 잘 시들지도 않고 일부 시들어도 대부분이 활짝 피어 있으면 보기도 좋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많은 국화들은 꽃들은 생생해도 아래 줄기부터 시들어 말라버리기 시작한다. 한 줄기에서 자라 나온 꽃들은 생생하게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더 활짝 피어 화사로운 향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그 아래 줄기에 붙은 잎들은 정말 시커멓게 말라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 마른 잎들만 잘 뜯어내면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계속 자란다. 신기하다. 한 줄기에서 나온 부분인데 꽃은 생생하게 살아있어도 잎들은 말라버린다. 같은 줄기를 가지고 있고 잎들이 말랐다면 줄기에서 물을 끌어올리지 못했나 싶지만 꽃은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난 것은 어쩌면 꽃을 살리기 위해서 잎들은 스스로 말라 죽는 것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산뜻한 연두색과 노란색의 조합

생명시스템 안에는 아포토시스 apoptosis 세포사멸이라는 과정이 있다. 한 세포가 계속해서 증식하지 않고 새로운 세포들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 스스로 사멸하는 것이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세포 분열을 일정 회수를 하면 세포가 더이상 분열할 수 없는 현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자신만 살겠다고 계속 분열하게 되면 세포가 원래 해야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체 자리만 차지하는 세포들이 된다. 그런 세포를 우리는 암세포라고 부른다. [세포의 죽음 - 죽어야 산다] 식물에도 암세포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세포생명학 cell biology 은 식물도 암세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세포의 무한 증식으로 인한 것이라기 보다는 주로 감염에 의한 작용이 많고 그렇게 암세포를 가진 식물들은 확산되는 전파가 약하기 때문에 거의 없다고 해도 된다. 세포사멸의 과정과 비교하기는 다른 규모이지만 꽃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사멸하는 잎들을 보면서 때로는 국화 꽃들이 오랫동안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국화 잎들이 스스로 말라 죽어 만든 희생의 결과일지 모른다는 것을 바라본다면 국화꽃의 오랜 아름다움이 한없이 기쁘기도 어렵다.


하나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아름다움이 만든 많은 조건들과 희생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아름다움을 본다면 그 아름다움 안에는 어떤 희생이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과정도 필요할 것 같다.

설유화 Spiraea thunbergii


설유화를 처음 만난 것은 결혼식장에서 누군가의 부케에 꼽혀 있던 작은 가지였다. 화려한 꽃들 속에서 작은 가지와 작은 잎들로 제대로 꽃 하나 없는 상태였다. 부케를 해체하고 각자 맘에 드는 화려한 꽃들을 한송이 두송이 가져가기 시작했다. 나도 화려한 꽃 몇송이 가져가고 싶었지만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설유화란 이름을 가진 가지였다.

설유화 가지

뿌리도 없는 가지가 잘 자랄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그래도 희망하며 물에 넣어 주었다. 몇일이 지나 설유화에 있던 잎들은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녹색의 잎들은 몇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버려야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몇개 남은 잎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물에 넣어주었다. 그러나 생각하지 못한 기대하지 못한 기적들은 그때부터였다. 새로운 잎들이 가지 사이사이에서 자라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녹색의 줄기가 옆으로 자라나고 있던 것이다. 더이상 희망이 없을 것만 같았고 그리고 한번 모든 잎들이 떨어져 앙상한 그 가지에서 내가 준 것은 물밖에 없는데 가지를 만들고 잎을 만들어 내고 있던 것이다. 새로 자라는 잎들과 가지들도 신기했지만 작은 가지 끝에는 눈송이같은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거의 모든 잎들이 떨어지고 작은 잎들이 나온다

그렇게 오랜동안 잎들은 녹색에서 노랗게 변해 떨어지고 또 다른 곳에서 자라나고 작은 꽃들도 몇번 피어났지만 곧 검게 시들기를 반복했다. 우연히 만나 처음의 모든 실망감 속에서도 심지어 잘 자라주기 바라는 마음조차 없었던 설유화 가지에서 피어나는 녹색의 가지와 힌 꽃은 생명이란 누군가의 관심을 벗어나 자라려고 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상처주고 그렇게 그 상처의 고통은 통증이 아니라도 살아가야 하는 의욕을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 것도 희망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명은 자라나고 살아간다. 쉽게 포기하고 싶어지는 어느 날 이렇게 큰 생명체인 나는 얼마나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지 오히려 부끄러워질 뿐이다.

새로운 잎들이 자라고 가지가 옆으로 생긴 설유화

보면서 매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 에서 김혜자 선생님의 대사는 이러했다.

"내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 것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드라마 「눈이 부시게」 마지막회 중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가장 힘들다. 하나의 작은 생명들 모두 "살 가치가 있습니다" 라는 말이 주는 위로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피어나는 작은 설유화 꽃처럼 한 순간에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그 설유화를 향해 나도 모르게 말했다. "대견하다. 고맙다."

두번째 잎들이 떨어지고 작은 흰꽃이 피어났다

삶은 아주 별것 아닌 위로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반대로 별것 아닌 상처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살아있어야 작은 꽃이라도 피워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다시 살아가며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게 된다.

스토크 Hoary stock


스토크를 만난 적이 있는 이들은 공감각으로 스토크 꽃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모양만 보아도 그 향기가 기억될만큼 꽃향기로 풍성한 꽃이다. 스토크는 꽃도 풍성하게 잘 나오기 때문에 굵은 줄기에서 나온 한 줄기만으로도 가득하게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향기로운 스토크는 물에 넣어 두면 물이 금방 혼탁해지고 마치 줄기가 녹아버린다. 녹는다는 표현을 가장 정확할 정도로 물에 담긴 줄기는 데친 아스파라거스처럼 흐늘해지고 무엇보다 녹색으로 짙어지는 물에서는 스토크가 가지는 꽃향기와 비교되는 묘한 냄새가 난다. 마치 정원을 모두 밀어버리고 거기에서 나온 식물들을 우물에 넣은지 일주일은 된 것 같은 냄새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스토크의 향기에 반했다가 조금만 지나면 나는 악취때문에 꽃이 아직 시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가장 색이 짙은 느낌의 핑크 스토크

"나는 식물을 못길러요."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사실 설유화의 꽃처럼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살아가려는 존재이고 작은 관심으로도 그 생명의 시간은 차이가 난다. 스토크는 물에 넣고 이틀이면 빠르게 줄기가 녹는다. 그리고 그렇게 녹은 부위에서는 제대로 물을 끌어올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스토크같은 줄기를 가진 식물들은 처음에는 줄기가 조금만 잠기게 놓고 잠긴 부위가 녹아들때는 다시 꺼내 잘라주어 다시 단단한 줄기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해준다. 스토크 같이 줄기가 녹는 꽃들인 라넌큘러스나 거베라는 꽃으로 만나서 그렇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을 보면 물에 담겨 있는 존재가 아니다. 반면 그냥 보아도 튼튼한 방수 체질같은 국화나 장미를 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장미는 물에 많이 잠겨도 잘 자라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에 맞게 맞춰주지 않고 똑같은 방법으로 대할 때 누구는 쉽게 사라지고 누구는 잘 자랄 수 있게 된다. 꽃집에 가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가요." 혹은 "관리 잘 안해줘도 되어요."라고 하지만 각자 가진 특징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가장 귀찮은 상태에서 손쉽게 죽지 않는 강한 꽃들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사람들의 강한 선호 preference 는 다양한 대상의 특징을 생각하고 싶지않다는 폭력일 때가 많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만나 서로의 특징을 알려고 하고 그 특징에 따라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야지 모든 꽃들을 장미다루듯 스토크 줄기를 물에 깊게 담궈두고는 냄새난다고 스토크를 향해 싫어한다면 그것이 스토크의 잘못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보라색 스토크

교육도 비슷하다. 획일화 된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창의력이나 학습능력의 저하와 같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그 획일화에 맞지 않는 특징을 가진 이들은 항상 소외되고 심지어는 제거되어도 그들의 특징때문이라고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이 아무리 다양해도 일부 꽃들만 집중적으로 인기가 많은 사람들은 꽃 그대로의 존재로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목적을 위해 꽃이 필요한 것 뿐이다. 간단하게 우리가 지구에 사는 꽃이고 지구를 가꾸는 어떤 정원사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들이 정원사의 마음에 드는 특징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보다는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그저 필요없는 잡초가 될 뿐이다. 스토크의 특징을 잘 알고 잘 길러주면 오랫동안 기분좋은 꽃이다. 피어날때의 향기도 오래가고 꽃이 시들어도 크게 색이 변하지 않고 마르기 시작할 때 꽃잎만 잘라주어 말려주어도 스토크의 향기가 오랫동안 남아 있어 모아두어 옷장에 넣어두면 꽃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진다. 말린 꽃을 글리세린과 알콜을 적당하게 섞어서 스토크 마른 꽃들을 넣어두면 화장실에서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맨드라미 Cockscomb & 꿩의비름 Hylotelephium erythrostictum


맨드라미가 불꽃같은 모습으로 보였을 때 한 줄기를 데려온 적이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열정이 느껴지는 불꽃같은 느낌이라 좋아하지만 꽃이라는 느낌보다는 갈대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큰 한줄기에서 작은 줄기를 잘라서 여러 개의 꽃병에 나누어 담고는 가장 큰 줄기는 버리기 위해 한 곳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몇일 후 맨드라미를 둔 카페에 다시 갔는데 시험관 모양의 꽃병에 내가 버린 그 맨드라미 줄기가 담겨 있던 것이다.

"아니 이걸 왜 버리지 않으셨어요?"

꽃에 대한 애정 (죽이지 말아야지 하는) 은 있지만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던 카페 사장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냥 있길래 아직 죽지 않은 것 아니였나요?"

그런데 그 순간 너무 신기한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꽃 하나 있지 않던 맨드라미 줄기는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줄기의 잘린 부분 옆으로 작은 잎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미리 버렸다면 그리고 사장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다면 볼 수 없을 장면이다. 순간 그 맨드라미 줄기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생각해보면 줄기도 생명인데 그저 꽃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버릴려고 했기 때문이다. 꽃을 좋아하지만 꽃만을 좋아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비롭게 그 맨드라미에서는 붉은 꽃 몇개가 나왔고 다른 맨드라미보다 더 오래 자랐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는 맨드라미는 붉은색을 떠올리는 식물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줄기의 색과 신비롭게 나온 힌 뿌리의 색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맨드라미 Celosia cristata

그래서 가끔 처음보는 식물들을 볼때 맨드라미 같은 줄기는 아닐까 살핀다. 그런 꽃들은 잘 자라면 뿌리가 내릴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에 부응했던 꽃이 뀡의비름 꽃집에서 통용되는 이름은 불로초이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꽃들은 연두색으로 꽃이 잘 보이지 않지만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하면 별모양의 작은 꽃들이 한순간에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려하지 않게 그냥 한 자리를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자라난다. 그리고 색의 변화도 별로 많지 않고 꽃이 마르고 시들어도 조용히 작은 꽃들만 떨어질 뿐 그리 큰 변화가 없다. 무엇보다 물만 잘주고 빛만 적당히 허락해주면 꽃잎들도 변색없이 오래동안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맨드라미 줄기와 같은 강인한 줄기에서는 조금씩 뿌리가 내려온다. 처음에는 이 꽃을 불로초라 불렀을까 궁금했지만 이제는 정말 죽지않고 살아가는 꽃이 아닐까 싶은 의심까지 든다. 그리고 맨드라미도 불로초도 그렇지만 뿌리가 잘 내리고 살아가는 꽃들은 장수하는 비율이 높다. 앞서 언급한 설유화도 가지 굵기만 충분하다면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나무가지보다는 맨드라미나 불로초와 같이 단단하고 연두색을 가진 줄기들은 뿌리를 확 내리고 강인하게 살아갈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꿩의비름 Hylotelephium erythrostictum

우연히 안목없는 것 같은 카페 사장님의 선택을 받은 꽃없는 맨드라미 줄기를 보면서 꽃이 없어도 줄기만 있다면 두번째 기회가 있을 수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뭘 좀 좋아한다고 뭘 좀 안다고 함부로 버릴려고 했던 내 선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부터는 꽃들이 사라진 줄기들도 쉽게 버리지 않는다. 어쩌면 기회가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살려고 하는 그 강한 의지에 불구하고 내가 기회를 없애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르 레브 Le Rêve & 페루백합 Alstroemeria


백합의 개화를 지켜보면 수학의 기하학이 떠오른다. 안 꽃잎과 바깥 꽃잎이 조화롭게 더 정확하게는 안쪽 3개의 꽃잎들이 뭉쳐 있으면 바깥 꽃잎은 안쪽 꽃잎의 반을 걸쳐서 피어난다. 그래서 안쪽 꽃잎들은 120도를 이루어 있고 바깥 꽃잎들은 60도 정도 돌아가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백합의 꽃잎이 몇개인지 물어보면 머리 속에서 개화하는 모습이 떠오르며 쉽게 6개라 대답할 수 있다. 백합은 힌백 [白] 을 생각해서 힌 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백합의 백은 100 [百] 을 뜻한다. 알뿌리의 모양이 겹겹히 쌓인 모습에서 유래된 명칭이고 나리꽃이라고 불리운다. 그래서 나리꽃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꽃들이 가진 각자의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좋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다양한 핑크의 아름다움을 가진 부활절 나리꽃 Easter lily 인 르 레브 Le Rêve 가 있다. 힌색의 시베리아 Siberian lily 도 비슷하지만 르 레브 한 송이를 밤새 놔두면 아침이면 공간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하다.

흰 나리꽃 백합 Siberian Lily 

많은 이들은 반려 동물들이 좋은 점으로 들어오면 반겨주는 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르 레브 한송이가 만드는 향기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반려 동물 뿐만 아니라 꽃도 반겨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꽃 향기의 특징은 자신의 향기를 위해 다른 향기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공적인 향이 나는 향초나 향수 같은 경우에는 그 향기 때문에 다른 향기들을 몰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조화로운 향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꽃 향기는 신비롭다. 강한 향기를 가지는 꽃들이라고 해도 각자의 향의 영역이 있고 자신의 향때문에 다른 향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화로운 그리고 공간의 구조에 따라서 향이 가지는 특징도 달라진다. 수직으로 올라가는 향을 가진 꽃들이 있고 수평으로 퍼지는 향을 가진 꽃들이 있다. 르 네브와 같은 꽃들은 수평으로 올라가는 향이 강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들어나지 않지만 아무도 없는 밤동안에 수평으로 올라간 향들은 순환하며 넓은 범위까지 향을 전파한다.

르 레브 Le Rêve

과학적으로도 꽃들이 가지는 향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화학적 향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향이란 결국 인간의 코에 들어가는 화학물질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향은 주로 향을 내는 물질의 확산 그리고 공기 속에서의 농도 더 정확히 말하면 공기안에서 얼마나 농도를 가지는 분압의 차이에서 나타난다. 화학물질의 분압은 확산하기 유리한 단순 분자이기 때문에 다른 향을 몰아내거나 분압을 줄이지만 꽃향기는 대체로 분자량이 큰 형태이기 때문에 분압도 적당하게 유지하면서 향기를 유지한다. 그래서 다른 향을 방해하지 않고 고유의 향을 낸다.

잎들의 기하학적 구조를 보면 꽃잎의 구조를 이해하기 쉽다

그렇다고 향이 강한 백합, 나리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만나 그 매력에 푹 빠진 꽃이 바로 페루백합 보통은 알스트로에메리아 라고 부르는 꽃이다. 꽃시장을 가면 알스트로에메리아 색은 다양하다. 실제로 야생형태로 있는 꽃 모양은 계속 발견되고 있고 그 중 상품으로 팔기 좋은 꽃들만 주로 해서 30여가지가 있다고 한다. 알스트로에메리아는 페루백합 Lily of the Incas 잉카의나리꽃이라 불린다. 작은 꽃들이 국화처럼 모여 있지만 꽃 하나씩 보면 나리꽃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꽃잎도 6개이다. 그러나 더 신기한 것은 꽃잎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서 무늬가 다르다. 그래서 백합에 누군가 위 아래를 구별하기 위해 표시한 것 같은 느낌이다.

페루백합 알스트로에메리아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 cosmos 의 이름을 그대로 가진 꽃인 코스모스보다 개인적으로 나리꽃 종류가 우주의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꽃이란 생각이 든다. 향기부터 개화하는 꽃잎의 조화로움 그리고 그 안에 나타나는 강인한 수술들은 생명력까지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꽃잎 하나에 무늬마저도 어떻게 저 꽃들은 중력을 더 잘 알고 기하학을 이해하는 자연과학자 같은 꽃이다. 알스트로에메리아를 끝까지 살게 하면 꽃들이 떨어지고 처음에는 볼 수 없던 굵은 씨방이 생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꽃에서 끝나버리는 꽃들과는 달리 나리꽃 백합류의 꽃들은 신비로운 규칙을 가진 꽃들이라 좋다.


거베라 Transvaal daisy 


거베라도 오랫동안 같이 하기 힘든 꽃이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데려오면 쉽게 꺾어지고 줄기가 쉽게 녹는 것 같은 느낌이라 데리고 올때마다 걱정이 먼저 앞서는 꽃이다. 그러나 거베라는 참 매력적인 꽃이다. 많은 사람들은 처음 접할 때 종이로 만든 조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 거베라의 꽃잎은 잘 가위질한 종이같기도 하고 그 색이 꽃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파스텔톤이기 때문이다.

삼색의 거베라

우연히 꽃상자로 선물받은 분께서 시들어가는 꽃을 처리하기 위해서 버리시는데 종류별로 뽑아서 가져갔다. 짧아진 줄기가 아쉽긴 했지만 잘 묶어주고 꽃병에 잘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 거베라는 거의 한달 가까이 잘 지켜주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보지 못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거베라는 안쪽에서 작은 꽃들이 몽글몽글 자라나는 것이다. 자세히 확대해서 보면 작은 꽃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안쪽으로 어두운 꽃의 중심은 거베라의 작은 꽃들로 점점 화사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잘 자라면 거베라 한송이는 인구가 증가하는 지구같은 모습으로 점점 자신의 색을 찾아서 변화해 간다.

거베라 A & B

매번 금방 시들어버리는 거베라를 바라보면서 나와 거베라는 성격이 맞지 않는구나 혹은 나에게는 꽃집에서는 좋은 거베라는 주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꽃상자에 꼽혀 있던 줄기가 짧은 거베라들을 모아서 보면서 알게 된 점은 거베라의 줄기를 꽃병에 닿도록 두면 그렇게 닿은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쉽게 꺾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꽃병에 닫지 않게 잘 묶어주어서 여유 공간은 종이로 둘러쌓서 거베라의 줄기가 직접 닿지 않도록 더 정확하게는 거베라의 줄기 중 한 부분이 힘을 더 받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볼 수 있던 거베라의 경험으로 그 이후에는 거베라는 오랫동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꽃상자에서 버려진 거베라들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기억의 거베라들

보통 인간 관계에서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다른 이에게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면 대부분 자신의 탓을 하다가도 혹시나 다른이에게 그 문제의 원인이 있지 않을까 원망하게 될 때가 많다. 사실 정신건강의 측면에서도 너무 많은 자기 탓은 자신에 대한 자신감뿐만 아니라 자존감도 줄이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남탓은 중요하다고 한다. 가끔 무엇인가 안될 때 존재의 문제로 탓할 때가 있다. 거베라처럼 '나는 거베라랑 맞지 않아' 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베라는 내가 어떻게 해도 잘 자라지 못할 꽃이라고 한동안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거베라가 주는 매력은 항상 매번 이번에는... 이라는 희망을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거베라가 잘 자라고 심지어 작은 꽃들이 만들어내는 그 마법같은 생명력을 느끼게 되었다.

위 거베라 B 가 한달가까이 지난 모습

몇번의 시도로 쉽게 결론을 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인 것처럼 쉽게 편견으로 만들고 그 편견은 결국 새로운 매력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모르고 살아도 별 문제는 없지만 짧은 인생 속에서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거베라가 참 좋아졌다. 그리고 그동안 빨리 보내야 했던 많은 거베라들이 생각났다. 이제는 데려오면 잘 기를 자신이 생긴 꽃이지만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의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들 그 무엇보다 좀더 세심하게 다루지 못하고 좀더 잘 알아주지 못했던 나의 무관심에 있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의 탓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할지 몰라도 그 탓을 떠나 원인이 무엇일까 알아보는 것은 이후의 같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좋은 습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신비를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생명은 항상 이로움이 있다. 


하나의 믿음처럼 생각하는 것은 세상의 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가끔 보이는 바퀴벌레들에게도..? 라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지구의 생태계 차원 혹은 도시의 생태계를 위해서도 바퀴벌레는 어떤 이로움을 가지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른다. 꽃의 향기에는 특유의 고유함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거주하는 공간마다 항상 같은 꽃을 두고 그 꽃을 통해서 시각장애인들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후각적으로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엌에는 스토크를 두고 화장실근처에는 후레지아를 두어서 꽃이 가지는 특유의 향으로 시각장애인들이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익숙해진 공간이라면 그런 것이 왜 필요할까 생각할 수 있지만 시각을 쓸 수 없을 때 공간이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후각이 주는 안도감은 여러가지 이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위치한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다른 감각을 제공해주는 것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살구향기 가득한 수선화 

꽃향기 조차도 우리가 생각하면 다양한 이로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 이로움을 어디에 어떻게 필요한지 생각해야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쓰레기이도 하고 때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지구에는 도움이 되는 존재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하나의 특권 중 하나는 생명이 가지는 다양한 이로움을 찾아서 그 이로움이 필요한 곳에 배치하고 이로움을 이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만물의 영장일 수 있기는 하다.

배려 받음의 미학 


꽃집에서는 꽃병에 담아 주려면 약 45도 사선으로 줄기를 잘라주고 물병에 넣어주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라고 해도 그렇게 안하고 그냥 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도 하지만 왜 사선으로 자르고 넣으라는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고 그대로 한다. 사실 그렇게 자르는 것이 좋은 이유는 물병에 담아 두었을 때 수평으로 정확하게 자르면 그 단면이 물병에 모두 접촉해서 물을 흡수할 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사선으로 자르면 잘린 끝 부분으로 서있고 그 단면은 물과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선으로 잘라도 꽃이 기울어져 물병의 옆면에 사선과 모두 닿아있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물을 흡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스티로폼으로 잘 서있도록 해준 라넌큘러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어떻게 있으면 물을 잘 흡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 보통의 경우 사선으로 잘라주면 되지만 물병의 모양에 따라서 평면으로 잘라줘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사선도 평면도 좋지 않다면 가운데 부분만 오목하게 잘라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자르는 것이 좋은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물에서 한번 나온 줄기는 다시 잘라주는 것이 좋다. 물론 줄기가 안 좋아지거나 물을 흡수할 수 없을 것 같은 색이라면 물을 잘 먹을 수 있는 길이까지 잘라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에서 한번 나온 줄기를 한번 잘라주고 다시 넣는 이유는 공기주사를 생각하면 빠를 것 같다. 한번 빠진 줄기에서는 이미 공기와 접촉을 했기 때문에 공기 방울이 생길 가능성이 있고 그대로 다시 넣어준다면 공기방울은 줄기 안에서 공기 색전 air(gas) embolism 과 같이 물이 흡수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꽃들은 어떻게 하면 물을 잘먹을 수 있을까 그 고민만 잘해준다면 생각보다 많은 꽃들이 오랫동안 살아 즐거움을 줄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꽃을 못 길러...' 라고 하지만 그건 꽃병에 그냥 넣는 것만으로 꽃들은 잘 자라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들은 사람이 넣어준 대로 그리고 움직인 그대로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꽃병이 줄기가 딱 붙어 물을 흡수할 수 없는데 오래 살거라는 것은 코와 입을 막아버리고 잘 잘아봐 하는 것과 비슷하다. 꽃들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최소한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가꾸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서 그 생명력의 길이는 달라진다. 물론 꽃들의 특징에 따라서 신경써줘야 할 내용들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 목표는 모두 동일하다. 물을 잘 먹이기이다.

바로 말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미스티블루는 꽃들이 색을 변하며 피어난다

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명력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국화는 종종 마른 잎과 꽃들을 잘 골라줘야 하고 약해진 줄기는 잘 잘라줘야 한다. 조금 넓은 범위에서 주변에 있는 장애인들을 생각하면 어떤 도움이 그들에게 필요할지 생각할 때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어떤 배려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하나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덜 불편할 수 있을까' 이고 지나친 도움도 장애인들에게는 부담이라는 불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에 비해 꽃들은 아주 단순해보이고 명료한 '물의 흡수'라는 목표가 있지만 꽃들마다 그 방법들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다양한 꽃들을 접할 때마다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마땅히 배려 받아야 하는 존재들은 그만큼 우리의 손길에 따라서 결과는 큰 차이가 나타난다.

라넌큘러스는 피어나는 공간이 서로 확보가 될때 가장 아름답게 피어난다

배려한다는 것은 대상의 특징을 더 알수록 수월해지고 자연스러워 진다. 그리고 모든 배려라는 미덕에는 어떤 목표를 두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목표의식이 정확해야 할 때가 많다. 꽃병에 담을 때 줄기가 약한 꽃들은 병과 기대어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확실히 물병과 접촉한 부분의 줄기들은 다른 부분보다 약해진다. 그래서 줄기가 직접 닿지 않도록 그리고 가능한 수직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스티로폼이나 종이로 모양을 잡아준다. 수직으로 곧은 줄기들은 줄기 전체가 균형있게 물을 올리기 때문에 물의 흡수에서도 유리하다.

다양한 색의 알스트로에메리아 줄기가 수직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 주변에 사소하고 미물이라 불리는 생명들에는 그만큼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손길에 따라 그 생명력이 달라진다. 그런 이유로 같은 꽃들이 다르게 자라는 모습들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를 조금은 알게 되고 인간의 손길에 따라 달라지는 생명력을 보면서 섬세한 배려가 주는 그 변화를 알게 된다. 그렇게 인간은 아무런 힘없어 보이는 꽃들에게서 무엇인가 배운다.


꽃에게서 배운다 ─ 자연의 섭리 그리고 인간의 배려에 대해서

Wednesday, August 8, 2018


한민국은 인터넷 강국이다. 인터넷 속도만 생각해봐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자원, 기기 등을 생각해도 분명 인터넷 강국이다. 이제 인터넷은 선택이 아닌 필수처럼 되어버린 세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인터넷을 일부러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스마트폰이나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이미 인터넷의 사용자인 것을 모르고 쓰고 있는 중이다. 인터넷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인터넷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기기들 devices 과 접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용 빈도와 사용량이 다를 뿐이지 많은 부분 인터넷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인터넷이 보급되고 보편화되기까지 상당히 빠르게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때 TV 에는 인터넷 서비스를 위한 업체들 ISP; Internet Service Provider 광고들이 가득했었다. 그만큼 인터넷이 기업이나 학교 뿐만 아니라 홈 네트워크를 위한 가정용 인터넷 선 보급은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정도 초기 보급이 끝나고 나면 이후 나타나는 현상은 빠른 인터넷 선으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은 추가적인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가격을 적정선 유지하거나 약간 올리면서도 사용자 고객을 유지할 수 있는 전략을 세울 수 있다. 한때 100메가 속도를 자랑하던 시대에서 언제쯤 1000메가 = 1기가 선로를 보급시킬 것도 같은데 사실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학교나 기업망은 이미 내부 선로는 1기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가정용 보급 라인이 1기가로 대체되지 않는 것도 마케팅이나 기업 전략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생각해볼 테마가 아닐까 싶은 부분이다.


터넷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즘 스마트폰도 속도가 빨라지며 자신이 쓸 수 있는 인터넷 속도가 마치 얼마나 자신이 첨단 기술에 잘 적응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은 마치 공기와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한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며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터넷이란 정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대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시스템을 바라보는 시선 ─ 구조적 설계 사고 ] 에서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단순히 사용자는 웹브라우저에서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사이트를 입력하거나 터치하여 들어가지만 실제로 이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복잡한 과정과 규칙을 거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원하는 페이지를 보여주는 것이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지만 물리적으로 거대한 장비들이 처리해주고 그 장비들이 모두 연결될 수 있는 물리적인 선로들이 깔려 있고 그 외 필요한 통신 장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원활하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중 몇개의 요소만 사라지거나 작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소처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


이런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한느 것일까? 인터넷이 빨라졌다는 것은 상당히 추상적 개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 내용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이란 세계 어디에 있는 서버 (서비스)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상대적 결과가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주 들어가던 구글 메인 사이트에 들어가는데 인터넷 업체를 바꿔 보니 예전보다 더 빠르게 들어간다면 비교해서 더 빠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비교를 하던 그 순간에 구글 사이트가 내가 접속하는 요청을 빠르게 처리했는가 아닌가이다. 정말 운이 안좋아 인터넷 선로를 바꾸고 바로 구글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때마침 구글 사이트가 공격을 받아 반응이 느리다면 사용자는 구글 사이트가 느리다가 아닌 '인터넷이 느리다' 로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용에 관련된 몇가지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사용자] ─ {접속 기기 (노트북 혹은 스마트폰 등) & 웹브라우저} ─ (입력: june.meson.kr) ─ {june.meson.kr 가 어떤 IP 를 가지는지 확인한다; DNS 서버} ─ {해당 IP 로 접속} ─ {인터넷 상에서 해당 IP 로 접속할 수 있는 경로는 만들어 접근한다} ─ {경로 상에 수많은 장비와 선로를 거쳐서 해당 요청을 서버에 통보} ─ {해당 서버가 요청한 내용에 맞게 결과를 보내준다} ─ {접속 기기의 웹 브라우저에서 수신받은 내용을 구성해서 표시} ─ [사용자 확인]

아주 간단해 보이는 웹사이트 접속조차도 인터넷은 복잡하고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어렵게 어렵게(?) 사용자에게 보여주고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서 또 다시 적절한 페이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이 간단하게 '인터넷 쓴다' 라고 표현하는 과정을 약 1/100 정도로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사용자는 거의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빠르다 느리다는 이 모든 과정에 관련된 장비, 선로, 아주 가까이는 사용자가 쓰는 기기의 성능까지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터넷이 빠르기 위한 조건들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내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 자주 사용되고 서버가 빠르게 대응하거나 혹은 나와 물리적인 네트워크가 가까이 있는 (예를 들어 학교 내 서버 등) 경우 인터넷의 속도는 빠르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펜티엄 4 CPU 가지고 만들어진 서버에 접속하는 경우라면 그 서버까지 도달하는 장비의 성능, 선로의 속도, 심지어 서버의 반응 속도까지도 느리다면 전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내가 목표로 하는 서버까지 가는 길이 느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데 방해물이나 제한되는 요소가 없고, 사용자의 장비 (클라이언트) 와 서버의 장비 (서비스) 의 성능이 뛰어나 모든 처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가정용 인터넷이 빨라진 이유 중에 하나는 소위 백본망 backbone networks 에서 나온 가정용 선로의 속도가 100메가 (bps) 를 지원해주기 때문에 체감적으로 속도의 증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지만 한번쯤 생각해야 할 내용은 100메가 라는 속도는 제한속도이고 만약 이 선로를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늘어난다면 100메가를 사용자들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정용 선로로 들어온 인터넷을 여러명의 가족 구성원이 사용하는 기기를 '공유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공유하는 대상은 인터넷이기도 하지만 인터넷의 속도를 나누어 쓴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사용자의 인터넷 지점에서 백본망까지 도달하는 속도도 빨라야 하지만 백본망에서 다른 백본망까지 연결되는 선로도 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라와 나라를 연결해주는 해저 케이블 및 다양한 고속 선로를 만드는 이유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태평양 해저 케이블의 경우 일본에 지진이 일어나고 미국에 서버가 있는 웹사이트의 경우 심하게 느려지거나 접속이 불가능한 경우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아무리 사용자의 컴퓨터가 성능이 좋고 서버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해저 케이블이란 선로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해 생긴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인프라 infrastructure 가 마련되어 있다면 사용자가 투자해서 인터넷을 빠르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접속 장비와 더 빠른 인터넷 업체의 서비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사용자들에게 더 빠른 인터넷 속도를 이야기하는 것도 사용자의 접속 장비와 백본망까지 가는 선로 (무선망 포함) 가 얼마나 빨리질 수 있는가를 포함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이 충분히 빠르다면 사실상 인터넷은 급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터넷이 빠른 것은 좋은 것인가? 

개인 사용자 입장에서 인터넷이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그만큼의 투자와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자신이 빠른 인터넷 속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적절한 투자 혹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좋은 것인가? 라는 질문은 상당히 멍청한 질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르게 해본다. 모든 사용자들의 인터넷 속도가 모두 빠른 상태가 좋은 것인가? 뭐 개인의 인터넷이 빠른 것이 좋은데 모든 사용자로 확대한다고 뭐가 나빠질 것이 있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앞서 설명한 인터넷은 무한의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물리적인 장비가 충분한 성능을 가진다는 것을 뜻한다. 즉, 내가 인터넷을 사용할 때 모든 장비가 충분히 뒷받침 해준다는 말은 관련된 모든 장비들이 내가 요청한 내용을 처리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정량적으로는 모든 장비들이 내가 인터넷을 쓰는데 충분한 자원을 제대로 쓰고 처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비는 항상 한계를 가진다. 이런 장비의 한계를 이용한 공격 중 하나가 디도스 (DDoS Distributed Denial of Service; 서비스 거부 공격) 공격이다. 예를 들어 어떤 웹사이트에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5만명이라고 하면 10만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공격 웹사이트에 일시에 접속하게 하여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도 하나의 컴퓨터이기 때문에 CPU 및 메모리와 같은 물리적 자원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성능, 관련 데이터베이스의 튜닝 정도에 따라서 동시 처리 접속자 수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점을 노린 것이다. 문제는 10만명의 동시 접속 공격자를 만드는 일인데 이것은 해커들이나 공격자들의 몫이기 때문에 특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결국 이런 개념으로 접속하여 우리가 인터넷을 쓰는데 써야 하는 장비를 공격하는 방식을 DDoS 라고 한다. 여기에서 앞의 Distributed 란 말은 기존에는 한 클라이언트에서 여러개의 가상 클라이언트를 통해 공격을 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정도쯤은 가볍게 막을 수 있기 때문에 분산된 distributed 형태로 클라이언트를 동원하는 것이다. 결국 서버에서는 전세계 각지에서 접속하는 비이상적인 클라이언트의 공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서비스 거부 공격은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다. 조금 네트워크 시스템 프로토콜에 대한 이해와 각 장비의 취약점 정도를 파악하면 다양한 장비의 서비스 거부 공격을 통해 인터넷 서비스를 마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응용(?)할 수 있다.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리가 도메인으로 접속할 때 이 도메인 정보를 IP 정보로 해석해주는 DNS Domain Name Server 를 공격한다면 웹브라우저에서 입력한 도메인을 실제 IP 로 해석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해당 서버의 IP를 직접 입력하지 않는 한 웹사이트를 사용하지 못하는 공격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보안이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라 사용자의 사용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면서 악의적인 공격을 막아줄 수 있는 균형을 어떻게 잡는가의 문제이다.


량문제를 바라보다. 

실제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제대로 시작도 안된 상태에서 인터넷에 대한 이해를 위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서론으로 삼았다. 이제 실제로 이야기하고 싶은 식량 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인터넷이 식량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의구심을 가질 수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개인적인 궁금증의 시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오늘 점심으로 더 맛있는 것,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것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해도 마땅히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많은 나라의 기아 문제 특히 심각한 출산한지 약 36개월이 되지 않아서 영양실조 및 기아 문제로 죽는 영아 사망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심각성은 인지하기 어렵다. 얼마나 심각한지 아무리 다양한 미디어와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으로 보아도 막상 그때뿐이고 곧 이어 누군가 음식 사진을 올리면 군침을 흘리며 다시 더 맛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분명 그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전세계 식량 중 먹지 않고 버려지는 음식 (식량을 포함하여) 은 전체의 1/3 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곳은 음식이 남아돌아 버려지고 낭비되는데 어떤 곳은 먹을 것조차 없어 죽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양의 문제를 떠나 이런 문제의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다.


아의 문제는 인류 역사의 문제인가?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다가 질문 한가지를 하게 되었다.

아 문제는 인류 역사에 걸쳐 항상 존재하던 문제인가? 

이 문제에 대한 인류학적 해답을 제대로 해준 책이나 지식인은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대의 역사에서 현대까지 생각해보면 항상 가난은 존재해왔고 빈곤 그리고 그 빈곤의 상태가 생계를 위협하는 '절대 빈곤'은 분명 있었다. 그 원인은 다양했다. 때로는 자연재해나 전염병에 의해서 인간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 때로는 이 자원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절대 감소 등으로 식량화하지 못했던 시기도 있다. 그런 시기를 떠나 적절한 부와 경제력이 존재하고 식량도 존재하는 동시에 '절대빈곤'에 의한 죽음이 사회적 현상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는가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 영역을 확대해서 전세계를 통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절대빈곤'에서 자유로운 국가인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끔 도시화가 인간의 절대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도시학자들에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많다.


반대로 역사상 절대 빈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국민들이 먹고 사는 것에 별로 걱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다. 즉, 최소한 먹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 그런 공동체 혹은 국가가 역사상 존재했는가를 묻고 싶다.


대빈곤과 인터넷 

식량문제, 절대빈곤의 문제를 인터넷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인터넷이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뭔가 구체적인 장치로 적용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식량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인터넷의 속성을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을 다시 해본다.

터넷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인터넷 사용자로 당연히 빠른 것이 좋다라고 대답하겠지만 한편 모두가 빠른 인터넷 속도라는 것은 결국 인터넷 자원은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에 한정된다는 사실에 집중한 내용이다. 쉽게 말해 인터넷을 전혀 사용할 수 없는 접속할 수 있는 지점 point 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질문은 전혀 상관조차 없는 질문이 되어버린다.


절대 빈곤에 놓인 사람들, 기아 문제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사실상 자신들이 먹을 식량이 있는가 없는가의 존재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양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인터넷이 빠른가 느린가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몫이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즉, 우리가 항상 친근하게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인터넷 사용자들, 소셜 미디어의 친구들은 모두 이런 인터넷 절대빈곤 (인터넷 사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사용자들에게는 더 빠른 속도의 인터넷이 세일즈 포인트 sales point 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터넷과 절대빈곤의 문제에서 첫번째로 끌어내고 싶은 문장은...

식량에 풍부한 접근성을 가지는 사용자 (소비자) 와 식량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절대빈곤 사용자 (소비자) 는 인식의 대상 영역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식량문제 혹은 기아 문제의 해결책을 단순히 연민 혹은 인간애에 의존하는 경우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접근이 어려울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아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가상 실험

한가지 가상 실험을 시도해본다. 인류가 진화(?)해서 인간은 더이상 먹지 않고 일종의 인터넷 식량 internet food 를 먹으면 생존에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단 하루에 정해진 서버에 접속을 해서 인터넷 식량에 접속해서 해당 페이지를 보아 확인해야 생존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 즉, 이제 인간은 먹지 않고 심지어 영양성분이 농축된 알약을 먹지도 않고 인터넷 웹 사이트를 접속하는 것으로 충분히 살아가는데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최첨단 시대에 살게 되었다. (가상이지만 조금 황당하기는 하다...) 

이제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웹 사이트에 접속해서 밥(?)을 먹는다. 하루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기 위해서 10군데의 웹 사이트를 들어가야 한다. 이런 상황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자본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인터넷은 생존에 꼭 필요하게 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접속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의 힘으로 인터넷 사용을 제한하고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 (절대빈곤) 이 만들어질 것인가? 만약 인터넷 사용이 생존의 문제가 된다면 요즘처럼 공짜 무선랜을 사용하게 하는 일도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심지어 흔하게 버려지는 구형 스마트폰이 쉽게 버려질 것인가? 가상 실험의 조건에는 인터넷은 현재의 기술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서버도 동시 사용 접속자수가 정해져 있고 빠른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느린 인터넷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사람 등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희망하건데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두 빠른 속도로 접속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한편 자원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성을 고려하면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인터넷 장비, 웹 사이트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성은 현재 얼마나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가와 관련되고 이는 결국 자본에 의해 얼마나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되게 된다. 사실 현재의 인터넷도 공공재의 성격은 아니다. 인터넷 사용에도 직접, 간접적으로 사용료를 제공해야 사용할 수 있고 현재는 다만 그 사용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상황일 뿐이다. 만약 이처럼 인터넷이 식량의 문제,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다면 현재처럼 관대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해 죽어가는 빈곤층이 발생하면서 이를 보다 못한 유엔과 각국의 정상들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하게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기기를 보급시키고 웹 사이트도 확대하여 동시 접속자수를 충분히 확보하였다. 그렇다면 인류는 이제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굶어 죽는 사람들은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이론적으로 기아는 사라질 것이다. 즉, 기술적 가능성을 떠나서 기아 문제의 근본적 문제와 해결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이런 황당한 가상 실험으로 인류의 전자적 진화(?)까지도 가정해보았다. 이제 온 인류가 기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보급하는 것이다.

즉, 이런 황당한 가정과 상상을 한 이유는 인간이 빠른 인터넷을 쓰고 싶어하는 욕심과 더 넓은 범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 싶어하는 욕심을 통해 다양한 네트워크 장비와 선로 등을 발전시켜 왔다. 즉, 보다 넓은 빠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기술은 발전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네트워크를 확장시키는 과정에서의 특징과 문제점 등을 통해서 기아 문제와 같이 한정된 자원을 보다 다양한 사람들에게 보다 빠르게 전달하지 못하는가의 문제로 환원시켜 문제를 비교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노력하는 문제 해결의 구조와 기아 문제의 구조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가상적이지만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히 성능 좋은 서버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쓸 수 있도록 하면 기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야호! (에휴...)


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는 인터넷 

여담이지만 어떤 자원도 한계를 지닌다. 그나마 가장 효율이 좋은 자원이라면 인간의 사고 및 생각이 아닐까 싶지만 그것 역시 신경세포를 혹사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충분한 영양과 관련되기에 이또한 제한된 자원과 연결이 된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인터넷을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가 된다고 해도 인터넷 사용에 불균형은 분명 발생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말은 한정된 자원을 누가 쓸 것인지 정하기 위해 누가 더 많은 토큰 token 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라고 바라본다. 토큰은 시스템 공학이나 컴퓨터 시스템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웹 사이트에 접근하는데 동시 처리 접속자수가 100명일 때 어는 순간 110명이 접속을 하게 되면 이때 누구의 요청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방법으로 각자의 이름이 적힌 토큰을 내고 원하는 페이지를 요청하는데 이때 동시에 100명까지 처리할 수 있으니 101번째부터 요청한 사용자들은 앞선 사용자들이 다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게 할 것이다. 이때 사용자들의 토큰을 제출한 순서대로 처리해주는 것이다. 즉,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 순번을 만들기 위해서 각자 사용자들의 순서를 정하는 방식이자, 시스템 내부적으로 어떤 작업을 먼저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재미있는 문제가 있다. 단순히 제출한 순서에 맞춰 처리해주는 것은 사용자들이 요청한 내용이 동일한 일의 처리량을 가질 때는 충분히 효과적이다. 그런데 101번째 사용자가 요청한 내용은 자원의 10만큼 필요한 내용인데, 102번째 사용자는 단지 4만큼 쓰게 되고 앞선 사용자 중 처리가 되어 한명이 빠져 나가 가용 자원이 딱 8이 남는다면 101번째 사용자 내용을 처리하기는 부족하지만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하기는 충분하게 된다. 이때 고집있게 101번째 사용자의 내용을 처리하기 위해 자원이 10의 여유가 생길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102번째 사용자를 처리해줄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사용자의 대기 순서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용자들이 더 빨리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설계가 더 효과적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 ⓐ 작업 최적화 load optimization 의 궁극적 목표 ] 


두번째 문제는 특정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된다면 서버의 위치, 갯수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다. 조금 현실적인 영역으로 넘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글에 접속한다. 동시 처리해야 하는 접속자수도 엄청난 숫자이다. 그런데 마땅히 구글 검색 엔진은 사용자가 많다고 서비스를 거부하거나 검색 결과가 늦게 처리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없었다 하기에는 분명 있긴 하였다.) 그렇다면 구글은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했는가? 가장 정답은 사실 자본이다. 돈이 많기 때문에 성능좋은 서버들을 많이 구매해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서버의 숫자를 늘린다고 해서 scale up problem 성능이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즉 자원의 충분한 숫자만큼 그 자원이 쓰이는 곳과 필요한 수요 네트워크에 따라서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에 따라서 달라진다. 구글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연구 내용을 만들어 낸다. [ ⓑ 분산 시스템 distributed systems 의 배치 location 문제 ]


결국 인터넷은 결국 사용자 end user 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무리 좋은 장비와 서버가 배치되어서 접속만 해도 되는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져도 사용자가 접속을 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간과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접촉 영역 user interface 이 필요하다. 최소한 사용자는 웹브라우저를 실행시키기 위해서 터치를 하거나 더블 클릭을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야 한다. 컴퓨터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용자에게 컴퓨터를 주고 무엇인가 해보라고 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는 비효율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학습하고 교육받는 것이다. [ ⓒ 사용자의 교육 및 연습 user's training & practice ] 


모든 인류가 이제 익숙해져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인터넷은 공짜가 아니다. 이미 언급했지만 인터넷은 수많은 장비와 기기의 지원이 필요하고 이런 부분에 수많은 투자가 필요하다. 결국 인터넷은 자본이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모든 인류에게 인터넷을 쓸 수 있게 한다는 것은 자본이 있는 자들에게만! 으로 변경되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부분에서 공공재의 수익구조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이패드 하나를 구매하면 아이패드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비용과 기업이 가져가고 싶은 이익까지 다 포함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부과하고 이에 가치를 느낀 사용자는 이를 구매하는 것이다. 그러나 꼭 이런 수익 구조, 즉, 수혜자 부담의 원칙이 꼭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 공공사업 혹은 공공재이다. 예를 들어 같은 재화 혹은 서비스라고 해도 수혜자의 경제적 부담비율에 따라서 공급가를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글을 검색할 때마다 돈을 내야 한다면, 실제 우리가 검색하는데 필요한 서버의 전기료, 선로 이용료 등을 모든 비용을 계산해서 우리에게 부과한다면 사람들은 인터넷을 거의 쓰지 않거나 일부 소수의 전유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비용이 발생해도 특별히 비용을 사용자에게 부과하지 않는 이유는 검색에 의해 발생하는 비용 구조와 다른 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수익 구조를 분리해서 그 이익과 손해를 보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구글 검색에서 특별히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아도 다른 광고 사업이나 기업 대상 사업을 통해 수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 개인정보 privacy 차원에서 사용자가 단순히 무료로 사용하는가는 심각하게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이 부분은 잠시 접어둔다.) [ ⓓ 수익구조의 다양화 alternation of business model ]


아 문제 해결을 위해 인터넷을 생각한다. 

앞서 ⓐ, ⓑ, ⓒ, ⓓ 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빠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몇가지 네트워크 상의 문제이다. 식량문제도 가상 실험에서 생각해보았던 것처럼 자원의 배분, 공급, 그리고 사용자의 식량 소비와 같은 네트워크 문제로 환원해서 식량문제를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로드 발란스의 문제는 한정된 자원, 특히 같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한정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식량의 문제로 접근하자. 식량은 단순히 양의 문제 a matter of quantity 가 아니다. 시간의 문제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첫번째이다. 즉, 식량문제를 다룰때 충분한 식량이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식량이 필요한 곳으로 얼마나 빠르게 실행되어 공급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점이다. 따라서 식량이 필요한 지역적 문제뿐만 아니라 시간적 문제까지 포함해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의 문제와 같이 생각해보자. 시간의 문제로 제때 필요한 곳에 공급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잘 분산된 실행 시스템이 필요하다. 즉, 식량을 어떻게 공급하느냐는 얼마나 잘 정비된 공급망을 가지고 있는가도 중요하다.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식량은 직접적으로 식량을 만들어 내는 생산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마치 분산 시스템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식량을 잘 공급하기 위한 공급망이 잘 되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분산된 형태의 농업 생산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한 내용 중 하나는 왜 인류는 절대적 식량의 양은 증가하는데 왜 기아는 늘어나는가이다. 단순히 자본에 의해 식량이 아닌 연료나 가축의 사료 등에 증가하는 양을 떠나서 왜 기아가 심각한 곳으로 제대로 공급이 되지 않는가이다. 이는 단순히 공급망의 부실로 생각할 수 있지만 생산되는 곳과 기아 지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분산되어 제대로 지역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소위 지역 내 자체 식량 자급이 절재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도적인 차원에서 공급되는 식량에 의존하기에는 부족하고 마치 접속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아무리 성능이 좋다고 해도 사이트까지 접근하는데 복잡하고 긴 선로가 필요하다면 인터넷 속도는 느려지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즉, 분산 시스템이 결국 전체적인 인터넷의 속도를 증가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가까운 곳에서 처리할 수 있어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량 문제를 단순히 전체 식량의 양의 문제가 아닌 지역 단위에서 자급(自給)할 수 있는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의 문제와 같이 결국 기아 문제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한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당장의 생존의 문제가 달려 마땅히 먼 미래까지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기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과 더불어 주민들의 교육에도 힘써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좋은 핸드폰이 있어도 사용자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효율이 떨어지듯이 식량 문제의 효율을 증가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주민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자립을 목표로 할 수 있는 의식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식량의 지속적 지원과 더불어 식량 자립 구조를 가질 수 있는 농업 기술의 조언과 주민들의 의지를 바꿀 수 있는 교육 환경도 필요할 것이다.


의 문제를 연결하면 식량을 단순히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보다 다양한 수익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국제적 인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다고 해서 빈민국가를 마치 하나의 수익모델로 삼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탐욕적 그리고 약탈적 수익모델을 막기 위해서라도 수익구조와 비용구조가 분리된 일종의 국제적 차원의 공공 사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쓰기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지역 공동체 단위의 생산 소비가 이루어지는 동네 경제 [ 대량 생산의 불편함 - 동네 경제를 꿈꾸며 ] 에서 비슷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분산된 시스템의 장점 중 하나는 분산된 시스템 자체로 지역이 가지는 특징에 따라 지역이 필요한 경제 구조 혹은 수익 구조를 찾아낼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경제적 수요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분위기, 상황이 다른 나라, 지역과 비교했을 때 좀더 보완하거나 더 필요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접근하면 사실 기아 문제를 경험하는 나라들이 모든 상황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는 기아 문제로 40% 의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 상위 10% 는 호화로운 삶을 사는 나라도 존재한다. 아주 가까이는 우리나라도 이런 형태의 절대 빈곤의 구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분명 존재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를 접근할 때 어떻게 수익구조와 비용구조를 설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 보는 것이 정책 결정권자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내용일 것이다.


... 

가장 중요하게 전달하고 싶은 생각의 중심은 단순히 인터넷 사용과 식량 문제를 연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사용하도록 했던 노력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네트워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서 식량 네트워크의 문제를 보다 본질적 문제에서 접근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따라서 동일한 방법으로 혹은 비슷한 유사성 analogy 로 해결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트워크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특징의 유사성을 통해서 인류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쉽게 지나쳐 온 부분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식량문제를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닌 시간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고 이런 이유로 식량 문제의 해결은 하나의 시계열 문제로 처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는 점, 식량의 공급보다 지역 단위의 자급 시스템을 만드는데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점 등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를 던진다고 생각한다. 한순간에 식량문제가 뽕 하고 해결되면 좋겠지만 생소했던 인터넷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보급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식량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인터넷과 식량문제 ─ 네트워크를 바라보다

Sunday, May 6, 2018


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 로 유명해진 이미지가 하나 있다. 존재해야 할 의미가 없는 국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표현되는 벤데타 가면이다. 1600년대 영국은 제임스 1세에 의해서 가톨릭 탄압 정책을 펼쳤고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가이 포크스 Guy Fawkes 는 11월 5일을 기점으로 웨스트 민스터 궁전을 폭파해서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암살 계획이 미리 알려져서 화약에 점화하는 역할을 맡은 가이 포크스는 현장에서 잡혀서 극심한 고문으로 사전 공모자 등을 털어놓고 결국 사건 관련자들은 사지가 찢기는 등의 극형에 쳐해 죽게 되었다. 이후 영국은 11월 5일을 화약음모사건 Gunpowder Plot 을 막은 기념으로 '가이 포크스의 날'로 정하고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인물의 형상을 한 인형도 불태우고 모닥불도 불태우며 보낸다. 사실 가이 포크스는 핵심적인 주동자라기 보다는 실행자였지만 현장에서 잡히고 결국 극심한 고문으로 계획을 발설했지만 그래도 시대를 지나면서 가이 포크스는 하나의 저항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그 이후 저항의 의미 반정부를 뜻하는 의미의 의미로 가이 포스크 가면은 사용되어 왔다. 이제는 가이 포크스의 이미지를 검색하면 실제 모습보다는 '벤데타 가면'이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벤데타 가면이나 저항 정신 혹은 무정부주의 anarchism 에 대해 쓰고 싶은 것은 아니고 이렇게 유명한 가이 포크스와 관련된 흥미로운 그렇지만 무서운 그리고 무거운 이야기 하나가 있다. 바로 암살 계획을 듣고도 이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형을 받은 가톨릭 신부인 헨리 가넷 Henry Garnet 에 대해 전하고자 한다. 헨리 가넷은 폭파시킬 계획을 고해성사에서 듣게 되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알릴 수 없었다. 계획을 알고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렇지 않아도 맘에 안들었던 가톨릭 신부이기 때문인지 헨리 가넷은 사형당하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책을 만들고 (사형수의 가죽으로 먼저 만들어진다음 사형당한 것일까?) 자신의 죄를 상세하게 적어 놓은 형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 공개된 인피책 (人皮冊) 이 헨리 가넷의 것으로 밝혀졌고 책의 표지에는 헨리 가넷의 모습으로 보이는 형상이 나타난 것으로 유명해졌다. 헨리 가넷이 미리 계획을 알고도 이를 알릴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고해성사 THE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 에서 알게 된 내용이였기 때문이다.

헨리 가넷의 인피책 출처: The Guardian  


Confidentiality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고해성사를 하는 살인청부업자 hitman 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는 이를 경찰이나 수사기관에 말하지 못하는 당혹스러움을 보여줄 때가 있다. 헨리 가넷도 성직자의 위치에서 암살음모를 알고 있지만 이를 왕에게 알릴 수 없었고 계획을 준비하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찾아가 설득하려고 했었다. 성직자로 지켜야 할 비밀과 암살 계획 사이에서 적절한 절충안을 생각했던 것 같다. 종교 특히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헨리 가넷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알게 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비밀 유지가 성직자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내용인지 그리고 암살계획과 같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까지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시민 사회 혹은 국가의 의미가 커지고 법이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제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법과 성직자가 가지는 비밀유지 원칙은 자주 충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법정 안에서 성직작의 비밀유지가 법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성직자가 알게 된 범죄 사실 혹은 범죄 가능성에 대해서 증언하지 않아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범죄 사실을 인지하거나 범죄자를 특정할 수 있는 identifying a criminal 어떤 이가 이를 수사 기관에 알리지 않는다고 불고지 (不告知) 죄 가 존재하고 이또한 범죄라고 생각한다면 성직자는 분명 범죄자가 되기 쉽다. 범죄사실이나 범죄자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이를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범죄가 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혹은 좋아했던 국가 중 하나는 대한민국일 것 같다. 지금 (2018년) 도 살아있는 국가보안법에는 이러한 불고지죄는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공권력에 처벌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Confidential 은 평범하게 비밀내용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 사전에 의해서 '기밀'로 번역되고 비밀은 'secret' 로 번역되는 경우를 볼 수 있지만 사실 문서 취급에서 보면 Confidential 이 붙은 문서보다 secret 이고 그보다 높은 문서 보안 수준은 top secret 이다. 느낌으로는 기밀이라고 하면 뭔가 빈틈없이 빠져 나가면 안되는 비밀같은 느낌이지만 그런 느낌이 맞다면 기밀은 top secret 에 더 어울릴 것이다. 사실상 confidential 은 다소 개인적인 내용 혹은 가급적 공개되지 않는 것이 좋을 내용을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기업간의 거래 및 회의 내용들은 confidential 이 되는 것이고 공적 이유로 공개되지 않아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secret 가 붙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직자와 신자간의 개인적인 내용에 대해서 서로가 (주로 성직자) 발설하지 않을 권리나 의무가 엄격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성직자라는 직업을 가지는 '기능적 자아'에게는 권리처럼 주어질지 모르지만 성직자가 아닌 자연인으로는 발설한다는 자유의지까지 잘못되었다 말하기는 다소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앞서 살펴본 성직자 / 신자를 뜻하는 priest–penitent 혹은 clergy–penitent 간에 비밀유지가 지켜지는 상태 혹은 지켜야 하는 의지를 confidentiality 라고 부른다. 동일하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환자의 상담 내용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나 광범위하게 의사가 진료 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의 병력 및 질환 상태에 대한 비밀유지를 하는 것도 동일하게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라고 말한다. 또한 법적 대리인과 의뢰인 사이도 동일하게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라고 한다. 이와 같이 찾아보면 현대 사회에는 직업상 (기능적 자아) 취득한 개인적인 정보에 대한 비밀 유지에 대한 어느정도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Confidentiality to privilege


앞서 소개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 doctor-patient confidentiality , 법적 대리인 - 의뢰인간의 비밀유지 attorney-client confidentiality 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비밀유지를 말할 때 confidentiality 를 쓰기 보다는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clergy–penitent confidentiality 보다는 clergy–penitent privilege 라고 사용하고 의료인 - 환자간의 비밀유지는 doctor-patient privilege 라고 표현한다. 우선 privilege 란 말은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권'이란 번역이 가장 먼저 나온다. 개인 혹은 일부 소수가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이득을 뜻할 때 특권이란 말을 사용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러한 특권은 그리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소수 재벌의 특권' 혹은 '권력자들의 특권'과 같이 일반 시민들이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에누리 없이 처벌을 받게 되지만 권력이나 자본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심지어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지 않게 되는 경우를 보면 특권이란 분명 사라져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성직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신자가 누리는 특권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privilege 의 어원에 대해서 찾아본다. 개인을 뜻하는 라틴어 'privus' 와 법을 뜻하는 라틴어 -lex (-reg) 가 결합되어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 혹은 법률'이란 뜻으로 'privilegium' 이 시간이 지나 privilege 가 되었다. 어원대로 privilege 는 특별한 권한 혹은 권리라기 보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다양한 법의 내용을 뜻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는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서 누린다면 그것을 특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통령이라는 직무를 수행하는 있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은 대통령 직무 행정부 특권 executive privilege 을 가지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성직자 - 신자간의 비밀유지가 privilege 라면 누가 누리는 특권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켜야 할 비밀인데 도대체 무엇이 특권이 되는가? 어원에서 살펴본 것처럼 특권이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아니라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나 지켜야 하는 상황을 confidentiality 라고 말했지만 이는 법률적 책임이나 의무를 가지지 않는 비밀을 유지하는 상태이다. 헨리 가넷의 사례를 통해서도 보았지만 성직자 - 신자 비밀유지를 떠나서 폭파 계획을 미리 알고도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이 범죄자가 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확장해서 생각하면 동료 중 누군가 HIV 바이러스 양성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이를 주변에 알려서 미리 조심하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아서 다른 동료 누군가 바이러스 양성자가 되었다면 그 사실을 알았던 사람은 법적 책임은 아니라도 양심적 가책을 가져야 하는가?

이처럼 개인간의 비밀유지가 공적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하거나 예상되는 피해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이를 비밀유지를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말하는 이들과 그래도 비밀유지는 지켜야 한다는 내용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다. 특히 그런 논쟁의 중심은 대부분 법정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많은 경우 비밀유지가 인정되어야 할 내용이고 이를 통해서 아무리 공적인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의 비밀유지를 지킬 개인적 의지에 대해서도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정에서 말하지 않을 권리 그리고 그렇게 증언을 하지 않아도 법적 책임을 지게 할 수 없다는 내용은 역설적으로 법정에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 되어졌다. 결국 개인간의 비밀유지를 뜻하는 confidentiality 는 법의 울타리에서 '비밀유지를 지키려는 개인'에게 적용되는 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Privilege against jurisprudence


법은 항상 상당 부분 허술하다. 직접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법이 완벽하다면 법이 시대에 따라서 변하거나 '법을 이용한다'라는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법이 정하는 특권 혹은 예외는 법이 모든 이에게 평등하다는 주장을 부끄럽게 만드는 내용들이다. 범인을 찾는 범죄 드라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도 범인을 잡아 가둘 수 없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많은 경우 범죄사실은 알고 있지만 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문제 혹은 법률적 특권이나 예외 사항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나라일 수록 특권과 예외가 많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앞에 모든이들이 평등하다면 소위 '국민 법 감정'이란 오묘한 감정도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법리학 jurisprudence 는 법이 가지는 철학이나 원칙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하게 될 가능성을 말하는 학문이다. 좀더 어렵게 표현하면 "법의 본질과 목적, 법의 개념, 법의 객관적 가치 또는 법의 이념, 법의 존재상태 또는 법의 효력 · 타당성, 법현상 등을 일반적으로 구명하고, 다시금 법의 제정 · 해석 · 적용에 특유의 논리 또는 법적 사유(思惟)의 기본적 카테고리나 법학 방법론을 고찰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한다."  라고 나와 있다. 여전히 어렵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인간이 관찰하여 얻어낸 이론이 법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지할 수 없지만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어떤 거대 법칙 universal laws 가 존재한다면 그 법칙만 알아낸다면 물리학은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슷한 느낌으로 법에도 공정하고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원리가 존재하고 이를 알아낸다면 법은 객관적 판단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복잡해서 상황에 따라서 해석하고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계기로 법의 골격이나 구조가 변화되어 왔다. 놀라운 지혜를 가진 완벽한 사람이 법이란 이렇게 작동한다라고 알려주었다면 사회 안에서 논란이나 갈등이 발생하며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줄어들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법은 그러한 해석의 영역이 더 강해지는 영역은 아닌가 의문이 들때가 많다.

"인위적인 법률과 그 가치에 대칭되는 것으로 자연히 존재하는 언제, 어디서나 유효한 보편적 불변적 법칙"으로 존재하는 자연법과 대비되어 복잡한 세상에 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을 실정법 positive law, ius positum 이라 부른다.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현실적인 제도로 시행되는 법"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새로운 권리를 만드는 법"이라 부른다. 앞서 설명한 많은 특권이나 예외는 실정법에서는 '새로운 권리'로 표현되며 인간 세상에서의 다양한 상황에 '조금 더 정의롭다고 추정되는 방향'으로 추진하려는 노력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많은 실정법들은 그렇게 느끼기 어렵지만 많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과정들이다. 막상 법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권리보다는 할 수 없는 제한들로 가득하지만 많은 부분은 앞서 설명한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특권 privilege 들은 법이 좀 더 합리적이고 많은 이들이 인정할 수 있는 실정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해왔던 것도 생각해야 한다.


Privilege under jurisdiction 


실증법은 그래도 개인의 사생활 개별 인격이 가지는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가 필요해서 만들어 낸 성직자, 의사 등 개인의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직업들이 나타나고 만약 성직자나 의사가 신자나 환자의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사회가 필요해서 만든 직업이 존재하는 의미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밀유지 혹은 특권은 단순히 사생활 보호가 아니라 직업이 유지되기 위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든 성직자들이 개인의 고해성사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말한다면 어떠한 신자들도 성직자를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 고해성사가 가지는 종교적 의미가 아무리 성스러워도 기능할 수 없는 고장난 기계나 다름없게 된다. 그러나 가끔은 어떤 생각에서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공 혹은 국가를 위해서 사생활이 제한받아야 하고 사생활의 내용이 국가를 위험하게 한다면 이는 비밀유지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 위험을 찾아야 하고 개인들이 나누는 사생활 속에서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활동, 대화, 심지어 생각까지 감시하기 위해서 인터넷이나 휴대폰 등에서 얻어낸 개인적인 내용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는다.

9.11

극단적 충격은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마비시킬 때가 있다. 9.11 테러를 목격한 이들에게는 이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생명이 사라진 것의 공포와 어쩌면 내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테러는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당연하다. 테러를 계획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막을 수 있는' 테러는 당연히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막을 수 있는'이란 가정은 인간을 참 어지럽게 만든다. 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알아낸 테러의 징후를 통해서 막는다면 자신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이들의 사생활을 볼 수 있는 권리를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게 쉽게 내줄 것인지 말이다. 많은 이들은 나는 테러와 관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이들이 항상 정의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테러를 막아줄 수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가상이지만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본다.

1. 노동조합을 설립하려고 하는 노동조합장은 아내가 임신한 상태이다. 시위 관련법을 위반했다고 해서 경찰에서는 체포하려 한다. 아내가 다니는 병원을 알아내고 담당의사에게 언제 진료하러 오는지 알아내고 다음에 올 때는 남편도 같이 오라고 하라고 의사에게 강요한다. 의사는 환자의 정보를 알려줄 수도 없지만 아내가 임신 중 주의 관찰해야 하는 산모라는 정보까지 수사당국에 알려준다. 
2. 모기업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가 있다. 정신적 압박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는다. 기업은 내부 고발자를 미행해서 이 사람이 다니는 정신과 의사에게 접촉해서 어떤 상담 내용을 받았는지 회유하며 거액을 제시한다. 그리고 앞으로 상담 내용을 알려주면 더 많은 사례를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3. 정부 정책을 반대하는 어떤 학자가 다니는 가톨릭 성당에 가서 신부에게 정부의 정보기관 담당자가 접근해서 학자에 대해서 물어본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인지에 묻지만 그 사람은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국가에 위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그 사람의 고해성사 내용을 알려달라고 한다. 

앞서 설명한 관계에서 알게 되는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이 그 비밀유지를 깨는 대신 황금의 유혹이나 권력의 공포를 이용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알아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헨리 가넷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목숨을 내놓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이 '위험한 사람'이라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어 하면서 쉽게 알려주기도 할 것이다. 비밀유지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은 위험한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데 공헌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그렇게 안 보이지만 앞으로 테러를 할 계획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권력기관의 말을 믿고 심지어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사생활을 알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DHS

권력에 반하는 어떤 존재도 쉽게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권력이 주는 큰 유혹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은 신뢰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비밀유지까지도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쉽게 무너진 사생활에서 자신이 깨버린 비밀유지의 상대방은 극심한 고통에 놓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 상대방이 진짜 나쁜 놈이라면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뭐라 할 수 없지만 진짜 나쁜 놈이 아니라 권력에 저항한 의인이라면 비밀유지를 깬 이들은 어떤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Perjury against privilege 


인간의 이성은 스스로 옳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찰 때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제이 애셔 Jay Asher 의 소설이자 2017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진 13 reasons why 를 보면 자살을 선택한 한 소녀가 자신이 왜 자살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육성으로 남긴 내용으로 회상하며 말하는 내용이 전해진다. 여러가지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거짓증언 perjury 이 어떻게 진행되고 사건 what it happened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믿을만큼 얼마나 강하게 말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가리기 위한 이야기는 얼마나 자극적인지 느끼게 된다.

13 reasons why (Netflix)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파이의 숫자보다 미국 정보기관이 찾아낸 스파이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 평범한 사람이였지만 러시아계라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미국 정보기관에서 의심을 받아 감시를 받다가 진짜 스파이가 된 사람도 있었고 정말 스파이였던 사람은 미국에 협조한다고 하고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을 스파이라고 지목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사생활이 감시를 받고 일상 생활에서 고통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그렇게 사생활을 감시했으면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 정상일텐데 '저 사람은 스파이다'라는 전제하에 감시를 하면 모든 행동들이 스파이 활동을 위한 몸짓이라고 해석해서 보고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스파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스파이를 찾아내 높은 위치에 오르고 싶은 명예욕에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만드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나중에는 자신이 잡아낸 사람들은 진짜 스파이라고 믿는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 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권력이 만든 거짓 증언은 그만큼 그 피해와 고통은 생각보다 크다. 1920년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그 당시에 보아도 많은 이들이 이해하기 힘든 과정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형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무엇이 정의인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결과는 그들은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이 무정부주의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들은 진범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는 것도 사실 생각해 봐야 한다. 그들의 범행을 증명하는 과정이 아닌 그들이 가진 사상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살인범일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비슷하다. "누구는 빨갱이다" 라고 크게 소리지르면 자신은 빨갱이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고 자신이 살기 위해 쉽게 누군가를 빨갱이로 만들었다.

사코와 반제티

거짓증언 perjury 혹은 위증이란 말은 라틴어 perjurium 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false oath 란 뜻이다. 단순한 거짓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통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깨버렸다는 뜻에서 비밀유지 confidentiality 을 깨는 것과 의미가 더 통할 것 같다. 개인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비밀유지와 거짓증언을 하기도 하지만 권력과 같은 구조도 알고 싶은 정보를 위해서 거짓증언을 비밀유지를 쉽게 깰 수 있는 도구로 활용한다. 정보기관에서 "Smith Johns 는 테러범이다." 라고 말하면 환자나 신자와 같이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상대방의 정보를 얼마나 쉽게 제공하는지 아니면 제공하지 않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How to protect privilege 


프랑스의 정치인 중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1925년 12월 23일 - 1993년 5월 1일) 우크라이나 이민 2세이고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도 못했지만 프랑스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싸워왔고 16세부터 금속 노동자로 일하다가 정치에 입문해서 1992년에 부패 척결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총리에 올랐지만 다음해 5월 1일 노동절에 자살을 했다. 자살하게 된 이유는 부패 척결 정책을 펼치던 베레고부아 총리 자신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친구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했고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서 크게 떠든 내용과는 다르게 그의 자살 이후 그가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고 자신의 돈마저도 더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고 월세를 내기 위해 친구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에르 베레고부아 (Pierre Eugène Bérégovoy)

개인적으로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때 한강공원을 매일 산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강공원에서 만난 한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 너무도 유명한 연예인이어서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연예기사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서럽게 우는 모습에 그저 연예인으로 힘들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 이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생을 마감하셨다. 사건 이후 알게 된 내용 중에는 증권가 직원이 소위 증권가 찌라시 내용을 올린 내용이 있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증권가 직원은 고인을 얼마나 잘 아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그런 내용이 아무리 공인이라도 어떤 고통이 될지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갔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사실인지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내용이 가져올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쉽게 말하고 쉽게 전달한다. 성직자를 믿고 자신의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을 통해서 성직자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 아이는 어떤 성격의 아이야" 라고 말하거나 심지어 고해성사 중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말해서 사람들이 공연하게 알게 되버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의사가 집에 와서 자신의 환자 이야기를 하면서 무용담 삼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지 자랑하지만 그 안에서 환자를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거나 누구나 아는 공인이라면 "그 배우가 우리 병원에 왔는데 내가 맡았잖아." 하며 환자의 질환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아주 가벼운 가쉽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밀유지 내용을 깨고 있는지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그리고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자신도 들은 이야기라며 쉽게 가쉽으로 말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닌 큰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야만 느끼게 되는 몇 안되는 공감이 안되는 내용이다. 비밀유지를 지킬 것이라는 믿음으로 신자나 환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지만 지키지 않은 사람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가 많고 반대로 믿었던 사람은 고통을 얻게 되기도 한다. 막상 확실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밀을 유지할 상대로 믿지 말고 어쩌면 깰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비밀을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할 때 인상적인 그리고 유일한 impressive and unique 표현을 적당히 섞으라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받았던 환자가 정신과 의사를 비밀유지를 깨서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보았다는 소송을 걸었고 정신과 의사는 자신만이 그 사생활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친구에게 말할 때는 쓰지 않았던 성적 행위에 대한 특별한 단어를 정신과 의사에게만 이야기했다는 점으로 소송에서 이긴 적이 있었다. 결국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깨졌을 때의 상황도 생각해야 하는 복잡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영화 Doubt (2008)

그래서 영화 Doubt (2008) 에서는 가쉽에 대해서 다시 모을 수 없는 찢어 흩어진 베개의 깃털을 비유해서 전달했다. [ About Gossip ]  사람에 대한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하게 된다. 스스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 없는 사실인데 들은 내용만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탓하고 심지어 자신은 옳은 행동을 했다고 믿을 것이다.

윌리엄 W. 영의 오두막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네? 저요? 저는 그렇지 않은데요." 그는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하였다. "나는 판단할 능력조차 가지지 않았는데요"

"정말 그게 사실일까요," 바로 대꾸하며 이제는 조금은 비꼬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이미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 이 짧은 순간에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심지어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통해 많은 판단을 해왔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심지어 얘기하지 않은 동기조차 판단해왔고 그런 당신의 판단은 항상 진실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피부색, 몸짓 뿐만 아니라 체취까지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과거와 관계에 대해서도 판단했습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심미적 기호를 통해 바라보며 한사람의 가치마저 판단해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 보건데, 당신은 상당히 판단하는데 잘해왔음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원문]


사회 안에서 비밀유지 ─ 지키기 너무 가벼울 수 있는 비밀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