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5, 2013

손을 잡을 것을 권한다. ─ 나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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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boy Industry 

미국 LA 에는 홈걸 카페 (Homegirl Cafe) 가 있다. 온 몸에 문신이 가득한 여성들이 열심히 앞치마를 걸치고 빵을 만들고 음식을 만든다. 이들은 이전에 거리의 갱단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빵을 굽고 음식을 만들며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는 좋은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간다. (getting being...) 미국 LA 지역의 빈민 지역은 지역 갱단들의 이권 다툼에 의해 대낮에도 총을 쏘며 사람을 죽이는 그런 곳이었다. 위험하고 불안해도 경제적 이유로 이주하지 못하는 가족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자식들은 자연스럽게 어떤 갱단에 들어가야 더 살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상황에 대해 비관하고 갱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지 모른다.


이 지역에 온 가톨릭 사제 한명은 이런 상황을 바꾸려고 했다. 그는 갱단을 나온 사람들에게 직업을 줄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직업을 가질 수 없다면 직장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갱 활동밖에 하지 못했던 청소년과 젊은이들에게 직업을 가지도록 했다. 지역 청소 활동부터 시작해 가능한 모든 직업, 그러나 그 직업 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였다. 그렇게 갱에서 나와서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을 때 그들은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몸에 가득하였던 갱 소속을 표시하던 문신을 자랑스러워 했던 그들은 이제 그 문신이 후회스러운 모습이 되었고 일을 통해서 자신이 가치있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 많은 사람들은 웃음을 찾아갔다.


그렇게 홈보이 인더스트리는 갱 활동 밖에 할 수 없는 청년들에게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기회 속에서 일을 하는 청년들을 보고 지역 주민들, 주위의 시선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은 협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자신들의 시선을 더 부끄러워 했고 갱을 나와 자활하려는 모습에 응원하고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통해서 홈보이 인더스트리는 청년들의 문신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항상 바라보며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문신때문에 겪을 마음의 아픔을 치유해주기 위해서이다.

Suspended Coffee 

"혹시 남은 커피 있나요?"
노숙인 한명이 커피집에 들어와 묻는다. 커피집에는 누군가 5잔을 주문하고 2잔만 가져가고 나머지 세잔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다. 커피가게 점원은 커피 한잔과 따뜻하게 구워진 머핀 하나를 노숙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가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Suspended Coffee 는 돕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돕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돕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그 도움의 혜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해준다. 사실 커피집 주인이 기부 받은 커피가 제대로 다른 이들에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참여자들은 서로의 신뢰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눔은 여유로움에서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커피를 맡겨 놓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이 어렵지만 하나 둘 맡겨 놓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리고 더 맡길 수 없음을 미안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몇억 달러의 자산가들이 세상의 뉴스가 되는 세상에서 커피조차 쉽게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부끄러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이 어딘가에서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 못하고 거리에서 세상을 떠나는데 우리는 슬퍼하거나 안타가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는지 답답해지기만 할 것이다.


커피를 맡길 수 있는 커피집은 노숙인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노숙인이 있다며 불쾌해 하거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커피집 주인은 당당히 다른 가게를 가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Suspended Coffee 에 동참하기로 했던 주인은 처음에 고민을 했다. 노숙인들 때문에 매상이 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마음 먹었다. "그런 이유로 망한다면 그 지역은 서로를 위한 연민이 사라진 사람 사는 곳이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런 곳에서 장사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 먹고 시작하고 오히려 매상은 오르기 시작하고 매장의 한 곳에서 커피 한잔의 따뜻함에 감사함을 느끼며 마시는 노숙인들의 모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주인은 점점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한다.

GiveBack Films 

젊은이 세명은 조금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도전을 한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돕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들의 프로젝트 이름은 GiveBack Films 이다. 매주 월요일 그들의 모습은 유투브를 통해서 방송된다. 그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어쩌면 대중적 인지도를 얻기 위한 속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방송을 보고 나면 그냥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된다.

GiveBack Films Youtube Channel : youtube.com/user/GiveBackFilms

그들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나눔의 효과를 증명해보려고 한다. 한 주유소에 가서 주유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지금 주유하는 기름값을 대신 내주겠다고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 드라이브 인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주문하고 계산하려는 사람 대신 음식값을 내주겠다고 한다.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한 그들의 행동에 믿지 않다가 이후 감사한 마음을 거듭해서 표현한다. 때로는 살면서 자신의 어려운 삶을 나누기도 한다. 아주 사소해 보일 수도 있기에 보면서 좀 더 주유하거나 좀 더 비싼 것을 먹을걸 하는 아쉬워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 가득했고 그 마음이 영상을 통해 보였다.


어떤 날에는 식당의 종업원 (웨이트레스) 에게 팁으로 200달러를 주었다. 팁으로 200달러를 받은 종업원은 눈물을 글성거렸다. 단지 생각하지 못한 큰 금액을 받았다는 기쁨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에서 200달러가 얼마나 큰 돈이고 생활하는데 어려운 매일 속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로 나왔다. 처음에는 아무 이유없이 노숙인들에게 100달러씩 주었다. 다음에는 노숙인들과 인터뷰를 하고 200달러를 주었다. 노숙인들에게는 분명 큰 돈이다. 노숙인들은 큰 고마움을 보이며 그들의 호의에 기도하겠다는 인사도 하고 포응도 하면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했다. 노숙인들의 삶을 이야기 듣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너무 멋진 삶의 이야기를 한편의 시로 표현해주었다.


다른 날에는 어렵게 살아가는 한 가족을 후원받아 이들이 새롭게 거듭나도록 도와주었다. 헤어샵에 가서 머리도 해주고 아이를 위해 장난감도 사주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도 같이 들었다. 그리고 이 가족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이는 웃음을 찾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들의 눌려 있던 자신감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볼 수 있었다. 매주 월요일 이들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지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프로젝트가 일종의 쇼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웃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줘봤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느끼는 것이 많았다.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고 그렇게 나눔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나눔이 왜 필요한지 여러가지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교황님의 말씀을 듣고 거리에서 자주 만나는 노숙인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난 그들의 눈빛이 어떤지, 그들의 손이 따뜻했는지 장갑이라도 끼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안났다.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가끔 주머니에 잔돈이 있을 때 그들의 동냥 그릇을 바라보며 거기에 넣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참 부끄러웠다. 교황님은 그들을 단지 도와야 할 목적의 대상이 아닌, 우리가 선행을 하기 위한 대상이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조금 안 좋은 상황에 있는 나의 이웃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단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커피 세잔과 약간의 먹거리를 가지고 거리에 계신 노숙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교황님의 말씀대로 커피를 전하며 손을 잡고 그들의 눈빛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눈빛을 보고 있었다. 내가 동냥 그릇만 보고 있을 때도 그랬을거란 느낌이 들었다. 거듭해 고마움을 전하는 눈빛, 입술, 그리고 내가 커피를 전하며 그의 손등을 살며시 잡으며 느낀 잠깐의 느낌은 마치 교황님이 주신 선물같았다.


가끔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뜻하지 않은 여유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화가 날 때도 많았다. 거리를 걷다고 자기 자식들에게 노숙인을 가르키며 "너도 공부 열심히 안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라며 이야기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세상의 구조적 폭력과 모순에 희생된 많은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지 노숙인들의 개인적인 잘못과 노력하지 않은 결과라 이야기하는 신앙인도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 그들에게 보였던 화남을 마땅히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나 조차도 제대로 그들을 위하려고 노력한다고 말을 하면서 제대로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는데 머리로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나또한 그렇게 훈련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자신이 가졌으면 바란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나의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라도 얻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진 마음이다. 그 마음이 나이기에 소중하고 타인이기 때문에 덜 소중할 수 없다. 가끔 '내가 노숙인을 돕지 않는 이유...' 라며 그들을 도우면 술마시는데 쓸 것이다. 뭐할 것이다. 도와줘도 소용없다와 같은 이유를 들을 때 함부로 해석하고 단정하는 인간의 비인간적 모습을 볼 때도 많다. 누군가 나를 '잠재적 범죄자'로 생각하며 대한다면 분명 기분이 좋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인간은 언제부터 모든 일을 '합리성이라는 변명으로 이웃이 쓰러져 가는 것을 외면' 해왔을까? 하는 잡념 속에서 글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세상 읽기] 고통의 해석학 / 이계삼 ; onni.me/1bl74Jq


이계삼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많은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고 싶은 분이시다. 담담한 그분의 글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것을 위해 싸우는데 자신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닮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잡념의 혼란스러운 잔상때문에 머리 아픈 가운데 선생님의 글 속에서 희망의 작은 빛을 한번 찾아보게 되었다.

"불가능성. 이게 사는 것인가? 지금 이 나라에서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이 체제 바깥에서도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누가 보여주었을까. 민주주의와 양심의 가치를 누가 가르쳐주었을까. 현금이 별로 없어도 더불어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진지들은 누가 다 파괴해 버린 것인가. ... (중략) ... 현재 이 순간에도 아슬아슬한 곡예처럼 이어가는 ‘맹목의 풍요’가 이제는 물리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그러므로 나는 괴로워 울고 있는 녀석에게) ‘괜찮다’고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네 양심이 너를 살아 있게 할 거’라는 고귀한 이야기를 던지고 싶지도 않다. 고통의 해석학, 나는 녀석에게 이 거대한 불가능성을 응시하고, 그 앞에서 실존을 건 질문을 던질 것을 권한다. 그리고 같은 불가능성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들의 손을 잡을 것을 권한다.

이계삼 선생님의 글 속에서 이 시대 같이 살아가는 이들, 함께 하는 이웃들의 고통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을 것을 권한다... 그리고 잡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 도움을 줄 때 나눈다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 (distribute) 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share)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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