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4, 2013

대립의 시대 - 혁명을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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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에서 '국민대통합'이 한참 화재거리였을 때 모 인터넷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글을 보고 처음에는 웃음짓다 한참동안 생각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내용은...

"민대통합 그게 뭐 그리 어려운가요. 지하철에서 누군가 새로 산 아이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지는 것을 보면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안타가워하는 그렇게 하나되는 마음으로... 


웃자고 쓴 글에 다큐로 분석하면 예의가 아니지만 이 짧은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그 가운데 첫번째는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 존재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 쉽지 않나... 하는 생각과 두번째는 모두 공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폰이 최소한 떨어뜨린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만약 아이폰이 떨어뜨린 사람에게 가치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안타가운 마음은 쉽게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확장하자면 안타가워 하는 마음을 가진 본인도 아이폰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단 것이다.

결국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상실한 한 사람을 향한 연민의 마음이 모두 통합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공감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단상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알고 있다. 학창 시절 배운 시험을 위해 기억이든, 프랑스 혁명이 가지는 숭고한 정신을 가슴 깊히 새긴 학자의 이념이든, 각자의 지식과 인식의 스펙트럼은 다양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프랑스 혁명이 있었고 역사적 비중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생각하며 우리가 태어나기도 아주 오래 전 일이라 당시 민중들의 마음과 생각을 우리가 쉽게 짐작조차 하기도 힘들고,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가르쳐 주는 프랑스 혁명은 신분제 제도에서의 억압, 성직자, 귀족 신분제, 모순, 이것 저것... 많은 이야기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억압과 고통받던 민중이 일어나 혁명이 일어났다. 보통 사회적 구조, 경제적 모순 등의 이유로 프랑스 혁명의 시작을 이야기한다. 비록 직접적인 원인, 도화선이 된 사건이 따로 있다고 해도 도대체 "왜 민중들은 참지 못하고 일어났는가?"라는 이유를 찾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단지 사람들이 억압받고 고통받았기 때문이라면 지금도 일어나는 억압과 고통에 눌린 사람들은 왜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인가? 라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다. 단순히 사회 기득권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무엇인가 이상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다른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민중들 중 왜 프랑스 혁명은 가능했는가이다. 조금 영역을 확장하면 민중의 힘으로 일어난 역사적 혁명은 왜 가능했는가이다.

처음에 이야기한 "공감할 수 있는 가치"로 돌아가보자.

프랑스 혁명 바로 전의 민중의 한 사람이 되어 상상을 해보자. 현실 세상이 어렵고 먹고 살기 힘든데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짓은 갈수록 악날해지고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 먹는 성직자와 귀족들이 꼴보기 싫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하루 열심히 일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겨우 겨우 마련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혁명을 꿈꿀 수 있었을까? 오히려 삶이 어려워지면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던 희망의 크기만 줄어 갈뿐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은 일어났다. 혁명의 힘은 빵도, 돈도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의 대상은 바로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을까.

혁명은 왜 그리고 무엇으로 가능한가 

프랑스 혁명 이전, 루소와 볼테르와 같은 계명주의 철학이 나타났다. 교회의 종교적 권위와 절대적 신념에 반대할 수 있는 어떠한 대안적 가치도 제시해주지 못했던 시대에 계몽주의는 교회의 부정으로 만들어지는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모습, 그리고 현실의 문제점에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귀족과 성직자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머리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익숙하게 공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인권, 도덕이라는 것조차 계몽주의를 접하기 전 민중들에게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 민중들이 계몽주의 철학을 사람에게서 사람에게, 책을 통해서,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전해지게 되었고 계몽주의 철학은 민중이 '왜 저들은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철학적 신념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혁명은, 단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우리의 삶과 아무런 관계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아무런 저항없이 누리는 인권, 자유에 대해 혁명의 민중들이 피의 희생으로 싸워 이겼기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철학의 시작, 내가 놓인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인식을 '인권'이 무엇인지를 통해 생각할 수 있었고 우리가 고통받지 말아야 하는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다란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혁명은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인식이란 개인적인 작업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생각들이 진화하여 인식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행동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 실천은 힘을 가진다. 즉흥적으로 동물적 본능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계획되고 하나하나의 행동이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인식으로 근거를 마련하기 때문에 그 행동들이 모여 잘못된 세력과 싸울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임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시작, 죽음으로도 지키려 했던 것은 철학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공감할 수 있는 가치"였다 믿는다. 공감할 수 있는 가치는 민중의 머리에 가슴에 들어갔고 인권과 자유의 가치는 그들 모두가 공감했던 가치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결과 지금 우리는 인권과 자유라는 가치는 너무도 당연히 소유해 별로 그 소중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만약 우리가 당시 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피와 고통으로 싸워 찾아야 했고, 비록 누군가 아주 똑똑하여 인식을 혼자 했다고 해도 그는 기득권에 의해 쉽게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단순히 똑똑한 몇몇 개인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주어는 '인식하는 집단'이 되어야 하고 목적어는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고 동사는 '행동해야 한다' 가 되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당연한 인간의 가치는 내가 태어나기 전 몇 번의 혁명이 있었는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가치를 얻었는가?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거의 혁명으로, 그들의 피와 죽음으로 모든 가치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현실이 아닌 천국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힘들어하고 갈등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족한, 마치 프랑스 혁명 시절 그들에게 생각하지 못한 인권이라는 주제와 같이 이 시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있지만 우리는 패러다임의 한계로 찾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혁명은 무엇인가 바뀌고 우리의 삶이 나아지는 계기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앞서 설명한 개념으로 시작하자면, 혁명이란 '우리가 기존에 인식조차 하지 못한 가치를 찾는 사건'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쉽게 말하자면 몇몇 소수의 생각에 머무를 수 있던 생각들(철학)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고 전파되는 것이다. 즉, 프랑스 혁명 이전 시절 사람들에게 인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권이 있다는 생각'은 프랑스 혁명 이후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인식'하는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인식'조차 하지 못했기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우리에게 더 이상 추구해야할 가치가 없다면 우리에게 혁명은 필요없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구조와 상황에 힘들어 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우리가 소위 '혁명'이라고 부르는 다른 역사적 사실들을 살펴보자. 산업혁명은 분명 혁명이다. 혁명은 우리가 대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치'를 찾게 해준다.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자본'이라는 가치를 인식시켜 주었다. 우리가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요즘은 광고를 위해, 뭔가 인상줄 수 있는 요소를 찾기 위해 스스로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러나 혁명은 기본적으로 인식의 도약(conceptual leap)이 있어야 한다면 스스로 붙이는 혁명은 그냥 단순한 수식어일 뿐이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알 수 없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가치가 분명 우리에게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가치가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씩 형상화가 되고 조금씩 인식하게 되어 구체적으로 무엇이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과정(process)이다. 과정을 통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낸다면 우리는 혁명을 통해 가치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감할 수 있는 가치' 서론에서 찾았던 누구도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아이폰에 대한 안타가운 연민의 마음처럼 누구나 보편적이지만 아직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과정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보자. 철학의 힘은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인식하고 공유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만약 그 가치가 일부에게는 공감할 수 있는데 일부에게 공감할 수 없는 가치였다면 혁명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그 가치는 대립을 만들었을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은 일반 민중 뿐만 아니라 귀족 계급에도 파고들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 만약 지하철에서 떨어뜨린 아이폰이 테두리엔 금장을 두르고 구석 구석 다이아몬드가 박힌 보기에도 아주 비싼 아이폰이었다면 정말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일부는 공감할 수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일부는 저렇게 비싼 걸 왜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떨어뜨려 쌤통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즉, 혁명을 만드는 철학은 항상 수식어를 붙이지만 '공감할 수 있는' 즉, 대다수에게 공감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논리와 합리의 가치를 주장해도 오히려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대립하게 하는 가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충분히 똑똑한가?

우리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의심없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술이 발달하고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을 공정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것인가? 만약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 사실이 무엇인지 모두가 다 알고 있고 대부분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분명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착각하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① 우리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지도 않았고 ② 우리의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금은 통신의 발달이 극대화 되어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생각, 트렌드를 바로 바로 찾아볼 수 있다. 페이스북, 트웟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프랑스 혁명 시절 사람들보다 정보력이 뛰어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상당한 의문을 품고 싶다. 우선 정보는 사실이 인간적 해석을 통해 진실이 만들어 지고 진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는가의 정도이다. 프랑스 혁명 시절에 민중은 새로운 철학을 배우기 위해 힘든 노동 이후에도 사람들과 모여 이야기를 하고 전해 들어야 했다. 소위 구전아니면 책을 통해서 가능했지만 분명 지금보다 열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전달해야 하는 메세지의 강도는 지금보다 더 강했을 것이다. 열약하기 때문에 요점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미디어는 수많은 정보를 통해서 내가 어떤 정보를 취해야 하는지 무의식 중에 결정하게 된다. 눈뜨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정보의 양에 의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진실의 양은 줄어들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충분한 정보는 가지고 있는다는 맞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이란 수식어를 붙이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심리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먼저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보고싶은 것 먼저 보고 판단을 하게 된다. 판단은 편견이 되고 편견의 가지로 생산된느 모든 판단은 편향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역설적으로 그런 편향의 시각은 미디어의 발달로 더욱 더 증가한다. 우리는 어떤 미디어든 선택할 수 있다. 보고 싶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프랑스 혁명 시절 살롱에서 사람들은 모여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수정하고 합의되는 과정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 생각들이 만들어지는 반면 현대의 인터넷 환경은 익명성과 독립성으로 무장하여 아무리 자유로운 토론이 인터넷 공간 상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자신과 다른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지 않고 끊어버리면 된다. 아주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반대이다. 프랑스 혁명 시절로 다시 돌아가보자.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얼굴을 보며 토론을 한다. 비록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논리적 모순과 결함이 발견되지만 감정적으로는 기분이 상한다. 그래서 박차고 나갈 수 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 토론만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익명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터넷 미디어의 선택권과 익명성은 아무리 보안을 해도 자신이 내키는 대상을 더욱 선호하고 결국 그렇게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서로의 생각을 문제점을 파악하고 보완해주는 과정은 쉽지 않게 된다.


린 시절 80년대 중반 당시 대통령에 대한 나의 기억은 상당히 뚜렷하게 아직도 남아있다. 뉴스에서는 매일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었고 내 기억에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항상 한복을 입은 영부인을 데리고 다니며 많은 국민들을 찾아 격려해주는 그런 모습이 나에게 그 당시 정보였다. 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누가 고문 받아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어쩌다 죽을 수 있는 사고사 정도로 인식하였다. 그것이 그 당시 내가 믿었던 '진실'이다. 이후 자라면서 내가 접하지 못한 사실들을 접하고 아주 최근까지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너무 큰 슬픔이 몰려왔다. 가장 첫번째는 인권이 사라진 시대에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는가라는 무서움이었고 두번째는 나는 정말 세상을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내 정보력에 대한 절망감이었다.

몇년전 인터넷 기술이 보급되면서 나는 학문적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적이 있었다. 소위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라는 개념이 등장하며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조각 조각 지식을 서로 인터넷이란 공간에 공유를 하면서 보완되고 하나의 완성된 지식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위키피디아라는 실체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지금와 돌이키면 인터넷이 가지는 생태계에 대해서 너무 환상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는 조금은 한발 물러난 기대를 취하고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인터넷과 미디어는 사용자 임의대로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터넷 환경은 집단 지성이 아니라 편향된 여론과 한방향의 입장만 찾아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지고 만다. 아무리 그 안에서 서로의 합리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이미 편형된 인식으로 다른 인식에 대해서 많이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보편적 지성은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웠던 '일베'라는 공간... 개인적으로 해당 공간이 이슈가 되기 전에 들어가본적도, 아마 들어갔다면 기분 상해 그냥 다시 안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여론과 편향이 만들어지는 공간 안에서 좋은 대안, 해결책을 찾아도 결국 반대의 여론을 가지는 집단에게는 오히려 대립을 만들 뿐이다. 그렇게 보편성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인터넷 안에서 우리의 생각이 보편적 가치를 찾기도 어려운데 인터넷은 우리의 믿음과 다르게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사실도 제대로 전달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미디어가 중요하다. 미디어가 어느 한쪽의 편향된 사고만 전달한다면 반대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거부하게 될 것이고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계속 즐기며 자신의 생각에 맞장구 치며 계속 강화되기 때문이다. 미디어가 발달하면 그런 편향된 미디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미디어가 다양해져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다양한 사실이 전파될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아무리 미디어가 발달해도 대립은 더욱 더 깊어지고 미디어는 사실이 누구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전달하는 공정한 전달자가 아닌 상황에서는 우리는 합리적으로 판단할 근거마저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포털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해준다며 권력, 기득권의 입맛대로 걸러진 사실과 정보만 공급받게 된다면 우리 시대는 그런 불공정함에 분노하는 집단과 걸러진 사실과 정보에 기뻐하는 집단으로 대립하게 될 것이다.

정말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사실

나는 진보의 이념을 믿는다. 세상을 아름답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단순히 개인적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진보를 선택했다면 생각은 보편성을 잃어버려 결국 합리적 다수에 의해 자연스럽게 제거될 것이다. 그렇지만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지 않다. 2012년 대선이 끝나고 진보의 가치가 항상 옳고 정의롭다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었다고 반성하였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는 '공감할 수 있는 가치'이다. 지하철에서 떨어진 아이폰을 보고 같이 아파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에서 인권을 위해 목숨을 받친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이다. 가치는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 진보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든, 보수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가 똑같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가치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누구나 느끼는 심한 대립과 갈등의 구조 안에서 내가 옳기 위해 나와 다른 입장의 집단을 욕해야 했다. 분열과 대립은 분명 모두 갈등하고 지치게 만든다. 가장 먼저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 지역주의에 의한 지역간의 대립, 그리고 이제는 세대간의 대립까지 누구를 찍었는가에 따라 결과를 대립으로 포장한다. 정치공학적으로 대립은 기득권 세력의 권력 유지를 위한 전략이었다. 개인적으로 국민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권력 유지를 하려는 집단을 보수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보수든, 진보든 기본적인 이념은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다만 해결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분열과 대립을 위한 집단은 현실의 문제를 더 자극하여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익 집단'일 뿐이다.

Devil is in the details - Dante
악마는 섬세한 곳에 있다. - 단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익 집단은 우리가 분열하고 대립하도록 만든다. 서로를 비방할 수 있는 화두를 제시하고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끌려 대립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어도 이후에는 논리적으로 무장한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애석하게도 이런 대립과 갈등의 프레임 안에서 합리적인 우리들은 순간 순간 판단의 근거를 대립의 화두로 찾아간다. 지역감정을 통해 "어느 지방 사람들은 원래 성격이 저래", "저런 빨갱이 같은 소리를..." 등과 같이 우리가 쉽게 찾는 근거들이 대부분 이런 부분이 많은데도 우리는 쉽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전파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근현대사를 찾아보면 좋겠다.)

이러한 대립은 어쩌면 앞서 강조한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립이 일어나는 순간, 서로의 칼날을 세우며 맞서고 있는 순간에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그리고 그 때문에 누가 이익을 보는지, 누가 손해를 보는지 생각해본적 있는가. 보수든, 진보든 결국 국가가 잘되고 그 안에서 대다수가 행복하고 걱정없이 사는 세상을 바란다. 이 사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대립한다. 대립의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다부터 현실적이지 않다... 결국 상대방은 우리나라가 망하기 위해 존재하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부분은 보수든 진보든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립의 순간 기득권을 챙겨가며 사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 대립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대립의 구도가 다양하면 할수록 더욱 더 좋아한다. 대립이 다양해지면 기득권의 도덕적 잘못, 비리를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희석시키기에 좋은 역할을 한다.


결국 국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두 애국자 집단이 사적 이익을 위해 대립을 조장하는 기득권 세력이 웃는 가운데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어디에 속해있든 기득권 세력에 속해있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대립의 칼날로 서로에게 상처주지 말고 만약 진정한 보수라면 보수의 이념으로, 진정한 진보라면 진정한 진보의 이념으로 함께 만나 이야기하며 우리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 해야할 것이다. 제발 지역감정이나 빨갱이 같은 수식어로 서로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미친 짓은 삼가하고 분노의 방향을 우리를 힘들고 우리가 서로 싸우게 만드는 집단을 향해 분출해야 하지 않나.

멋진 혁명을 꿈꾼다. 

분명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분노하고 싸워야 하는 사익 집단의 바램대로 따라주는 것이다.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가 바로 우리가 혁명을 꿈꾸어야 하는 시간이다. 우리가 혁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 a. 공감할 수 있는 가치 
  • b. 보편성을 가지는 철학 


이 필요하다. 안타갑게도 대립의 시대에는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모여 이야기하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보다는 서로의 잘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

수(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이처럼 재화는 위에서 솟아 아래로 흘러 들어가야 자연스러운 것이고
국가도 흘러내려가는 재화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국민을 볼 수 있다.
풍(風)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이처럼 생각은 아래에서 올라 위로 솟아 들어가야 자연스러운 것이고
국민도 타고올라가는 생각 안에서 자연스럽게 통치하는 국가를 볼 수 있다. 

역사를 되돌아 보았을 때 민중이 보편적 철학을 접하고 인식을 하고 깨어나 목숨을 걸고 싸워 얻어낸 혁명은 모두 아래에서 시작한 혁명이었다. 힘과 권력으로 위에서 시작한 스스로 혁명이라 부르는 사건들도 있었지만 혁명의 직 후 가장 두려워한 것이 민중의 인식이었는지 인식을 죽이기 위해 언론의 기능을 통제하고 그 기능을 권력 유지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편 국민들이 대립할 수 있는 적을 만들어주었고 민중의 요구가 강해지면 내부 분열을 만들어 내부의 대립으로 그런 움직임을 억압하였다. 그래서 위로부터 부는 바람은 국민들을 생각과 행동을 억압하고 심지어 그들이 억압당해도 당연한 수많은 분열과 대립의 이유를 제시하였다.


이제 열린 공간에서 열린 마음으로 우리가 진정 싸워 얻어내야 할 '공감할 수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하는 시간이 아닐까. 우리도 지금 시작해야지만 그 시작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 자식들에게 경쟁과 승리를 위한 가치만을 주입하는 교육도 그만했으면 좋겠다. 철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느끼는 이 부조리와 불편함의 이유를 단 하나라도 해결할 수 있는 가치를 찾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가치는 아직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의  가치
우리가 누구를 향해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찾을 수 있는가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그냥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노력해야한다. 그 가치가 '복지'가 되든, '생존'이 되든 그 무엇이 되든 우리가 혁명을 통해 얻어지는 그 고귀한 가치는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가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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