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3, 2013

숫자의 상징학 (Symbolism) - 상징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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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01 

어떤 의미를 가지는 숫자일까? 한번에 알아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숫자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24601 은 바로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Jean Valjean) 이 감옥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부여되었던 죄수 (수인) 번호이다. 뮤지컬을 보고 이 숫자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어떤 의미를 가지는 숫자는 아니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시작될 때 경매 장면이 나오고 오페라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기 바로 직전 극장의 샹들리에가 경매로 나오면서 부여된 번호는 666 이다. (Lot 666)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666이란 숫자가 가지는 느낌은 상식처럼 많이 알려졌다. 실제 666이란 숫자가 직접적인 효과를 가진 숫자가 아니지만 우리는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그 의미에 따라서 피하거나 선호하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오페라의 유령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샹들리에의 경매 번호는 666번이다.

이처럼 특정 의미와 내용을 함축적으로 포함하는 특정한 표현을 보통 상징 (symbol) 이라고 부른다. 상징은 그 미묘한 차이에서 은유 (metaphor)와 다른데 은유의 경우 은유의 대상과 은유의 피대상이 구조적으로 비슷한 경우에 가능하다. 은유이전 직유또한 은유와 다르다. 직유의 경우 "천사와 같은 동생" 이라고 한다면 동생은 천사가 아니지만 천사와 같은 이란 표현을 통해서 천사가 가지는 특징이나 특성을 동생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하는 직접적인 표현이다. 즉, 천사와 동생은 동일시 되지 않는 형태이지만 동생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더 이해하기 편한 천사를 통해서 동생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반면 은유는 "동생은 천사이다" 라고 표현을 한다면 동생을 나타내기 위해서 천사가 가지는 모든 느낌과 특징 뿐만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천사의 느낌을 그대로 투영해서 의미를 전달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시간은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라고 표현한다면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강물의 빠른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직유)이지만, "시간은 강물이다" 라고 한다면 강물이 가지는 개인적인 느낌까지도 수용해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이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특별히 666이란 숫자 혹은 13이란 숫자가 특별히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상황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나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고 만약 777이나 444 등과 같이 다른 숫자였다고 해도 그 원래 666이 가지는 느낌이나 역할은 그대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직유나 은유의 경우 연결될 수 있는 개연성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상징의 경우 꼭 그래야만 하는 필연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상징이 시작된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꼭 그 숫자가 특정 의미와 연결이 될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3이라는 숫자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느낌을 생각하면 13이 불길한 숫자가 된 이유는 여러가지 기원이 있다. 성서에 근거를 한 이유, 완전수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 등 다양한 이유는 있지만 그 이유의 결과가 꼭 13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조금은 억울하지만 이미 13이라는 숫자는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숫자가 되어버렸고 거의 고정되어 버린 그 개념의 상징은 특별히 논리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상징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공적 실패 (Successful failure) 라는 평가를 받은 아폴로 13호는 계획 단계부터 숫자 부여에 많은 반대가 있었다.

징은 특별한 개연성을 가지지 않지만 그렇게 정해진 상징의 연결에 대해서도 특별히 사람들은 그 부당성(?)이나 비논리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미 개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반박하는 것조차도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누군가의 임의로 정해진 상징이 어떤 이유가 존재한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는 경우도 많고 특히 누군가에게 상징의 연결때문에 특별히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숫자의 상징성에 의해 문화적 차이에 따른 편견의 차이는 발생할 수 있어도 그것을 특별히 논리적으로 따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의 연결은 가끔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숫자의 상징이 가질 수 있는 좋은 기능 중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부분 카드 놀이 (playing card) 를 할 때 느끼지만, 자신은 네가지의 모양과  각 모양은 13개의 개별 카드가 있다. 2 ~ 10 까지의 숫자와 A (Ace), K (King), Q (Queen), J (Jack) 으로 이루어져서 한장 혹은 두장이 섞인 조커(Joker) 카드를 제외하고 총 52장의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인지력이 가지는 하나의 속임수는 자신은 이 52장의 카드를 잘 기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한다는 점이다. 우선은 익숙한 숫자와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가지의 모양은 특별히 기억하기 편리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스페이드와 클로버, 하트와 다이아몬드는 같은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페이드와 하트를 혼동할 걱정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게 된다.

모든 카드 게임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번의 패가 돌아가기 전까지 이미 버려진 카드들은 각자 확인을 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블랙잭의 경우에 21을 만들기 (혹은 가깝게 하기 위해) 카드를 더 받을 것(hit)인지 아니면 그만 둘 것인지(stand)를 선택하는데 이때 이전에 버려진 카드가 어떤 카드가 지나갔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이다. 이밖에도 포커 게임에서 자신의 패 구성을 바꿀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 것은 버려진 카드를 제외하고 나오지 않은 카드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한다면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아질 것이다. 2~10까지 숫자는 우리에게 기억하기 상당히 쉬운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스페이드 3이었는지 클로버 3이 지나갔는지에 대해서 헷갈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실제로 게임을 해보면 스페이드와 클로버가 헷갈리는 것 뿐만 아니라 지나간 숫자가 3이었는지 4였는지 그리고 몇개의 숫자들이 지나간다면 그 기억은 점점 불확실해진다. 이는 숫자가 가지는 그 쉬운 접근성 때문에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숫자가 가지는 그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 숫자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그만큼 쉽게 잊혀지는 대상이기도 하고 특히 내가 기억해야 할 숫자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그래서 이런 경우 숫자에 기억하기 쉬운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을 통해서 단기 기억을 높이는 효과를 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숫자 2걷는다. 숫자 3식사하다. 과 같이 각 숫자에 자신만의 상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숫자가 아닌 구체적이고 행동이 부여된다면 그 행동의 구체적 모습이나 이미지가 있다면 그리고 각 숫자에 부여된 모습이 구별되는 모습이라면 더욱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숫자 2의 경우 다리 두개를 연상시켜 걷는 모습을 연상시키면 좋을 것이고 하루 세끼라는 의미에서 숫자 3은 식사하다로 연결한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행동을 부여하는 경우, 예를 들어 숫자 2의 경우 걷는다 인데 숫자 3의 경우 뛰다 와 같이 그 모습의 강도나 정도만 다른 경우는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상징성으로 숫자 → 동사 로 변경시킨 후 게임을 시작하면 기억의 성을 만들어서 그 기억의 성에 클로버, 스페이드, 하트 및 다이아몬드 의 옷을 입고 있는 병사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것 같은...) 를 만들어서 버려지는 카드를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페이드 2가 나왔다면 스페이드 병사가 걸어 기억의 성에서 나가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의 방법은 단순히 스페이드 2를 기억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억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상징성을 이용하여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대상에 대해서 좀 더 복잡한 형태나 행동을 상징으로 연결하는 방법은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많이 보편적이지 않지만 미국같은 경우 전화번호를 기억하게 할 때 각 번호에 부여된 알파벳을 통해서 기억하기 쉽도록 도와준다. 이를 Phoneword 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1-800-PHONEWORD 에 전화를 하기 다이얼에 붙은 숫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다이얼에 표시된 알파벳을 보고 누르면 +1-800-746-6396(73) (맨 뒤의 73은 무시된다.) 으로 전화를 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익숙하지 않지만 상징의 연결을 통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을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영역으로 변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국은 이런 PHONEWORD 가 대중화되지 않아서 잘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르기 쉽거나 번호자체가 기억하기 쉬운 소위 골드 번호를 선호하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모든 전화번호가 전자기기에 저장되고 더이상 기억하지 않게 되면서 이런 선호도도 많이 퇴색하게 되었다. 이전 전화번호들은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데 유독 대학 들어가며 만든 삐삐 (호출기) 번호는 아직도 기억이 난다. 012-365-7856 이었다. 여전히 기억하는 이유는 365는 1년 365일로 기억하였고 7856은 7곱하기8 = 56 이기도 하고 다이얼하기도 편한 번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럼 숫자 ↔ 의미 가 상징성으로 연결되어 우리의 기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런 상징성은 우리에게 잊고 싶은 기억들도 계속 기억해야하는 문제점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과거 연인의 생일이나 혹은 같이 공유했던 기념일 등 지우고 싶은 숫자들이나 날짜들의 연결은 때로는 계속 기억 속에서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그 숫자가 기억된다고 해도 실제 과거의 내용으로 연결되어질 개연성은 없지만 인간은 그 기억의 연결성을 통해서 다양한 상징성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할 정보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4.3 혹은 4월 3일이라는 숫자를 표현할 때 이제는 근현대사의 힘들고 아픈 과거였던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의미를 떠올리게 될 수 있다. 여러가지 예를 통해서 살펴보았을 때 상징은 꼭 상식적인 의미를 가질 이유도 없고 각자에 따라서 상징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사실 13이라는 숫자에 대한 불길한 느낌은 대부분이 가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13이라는 숫자를 좋아할 수 있고 문화에 따라서 좋아하고 선호하는 숫자는 달라질 수 있다. 즉, 자신이 가진 배경이나 이해에 따라서 선호하는 숫자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모두 명확할 수 없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13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면 좋아하게 되는 계기는 있었을 것이다.

the answer to life, universe and everything

이 대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42이라는 숫자는 참 허무하지만 알 수 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상징을 가질 것 같다. 영화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 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영화는 더글라스 아담스 (Douglas Adams; 1952 – 2001) 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영화 전체가 가지는 새롭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개념들, 그리고 엉뚱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내용이다. 이 소설이나 영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42라는 숫자는 상당히 재미있고 의미있는 상징을 가지는 숫자이다.


잠깐의 스토리는 어떤 왕국에서 사람들은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다양한 철학적 고뇌를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있었는데 이 집단은 결국 모든 기술을 집약해서 모든 질문에 대해서 대답해줄 수 있는 슈퍼컴퓨터(Deep Thought)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슈퍼컴퓨터에 질문을 했다. "the answer to life, universe and everything" - 생명,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라는 질문을 받은 슈퍼컴퓨터는 7백5십만년 후 (seven hundred and half million years later)에 대답해주겠다고 했고 이를 기다려 결국 얻어낸 대답이 바로 42이다. 7백5십만년을 기다려 대답을 기다리는 축제의 그날 슈퍼컴퓨터는 대답해주었다.

The answer to the ultimate question of life, universe and everything is... 
42 (Forty-two)



허무함을 전해주지만 이 간결한 대답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 이후 42는 찾아낼 수 없는 그렇지만 뭔가 궁극적인 대답을 찾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의 허무함을 대변해주는 상징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뜻하지 않은 상징과 의미의 발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상징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그 상징이 가지는 의미를 서로 공유하고 그 공유의 원천인 소설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주 복잡하고 긴 이야기지만 42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은 공통의 공유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징은 이처럼 아죽 간결하게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서로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하나의 코드로 기능을 할 수 있다.


구글에서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으로 검색하거나 아이폰에서 siri 에서 Siri, what’s the answer to 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라고 질문해보면 문화적 상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재미와 허무함과 그리고 진지함을 제공해주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징성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가...

99 라는 숫자를 접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불평등의 상징처럼 등장한 99% 는 이제 99만으로 100에 도달하지 못한 채우지 못한 욕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아닌 가지지 못한 99% 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간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단순한 숫자가 아닌 의미를 가지고 무엇인가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숫자가 가지는 상징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다시 넘어가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근현대사를 포함하여 아직도 그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살아있는 동시대의 사건들을 기억해야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다시 만들 수 있는 어리석은 역사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치유되지 않은 살펴지지 않은 상처는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흩어 놓아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벽들을 만들기 때문이다. 4.3 사건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 한 그 시대 그 공간에 원하지 않은 체 놓인 제주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4.3 이라는 숫자를 보았을 때 공권력이 양민을 향해 이루어진 잔인한 역사의 기억은 상징처럼 기억해야 한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 지슬 (2012)

그러나 근현대사의 시각차이와 정치적 이유, 그리고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서 4.3 을 아픔과 상처로 기억하기 보다는 폭동과 당연히 제압해야 할 역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더욱 더 가슴아픈 현실이다. 이처럼 상징이 가지는 의미가 각자에게 그 크기와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인식의 상징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풀어 헤쳐 대립의 깊은 골을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상징이 가지는 또다른 기능이기도 하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4.3 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상징에 가지는 태도에 따라서 같은 태도를 가지는 사람들끼리의 공감대는 형성될 것이다. 만약 4.3 이후 '사건'을 붙여 부를 것인지 '봉기'라고 부를 것인지에 따라서 사람들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4.3 의 역사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동일한 시각으로 인식한다면 쉽게 4.3 이라는 숫자 만으로 공감대의 인식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4.19가 바로 그러한 상당한 다수가 가지는 공감대의 예가 되어줄 것이다. 특별히 4.19 혁명이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4.19 숫자 자체가 가지는 의미만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Homo symbolonus

24601 은 빅토르 위고에 의해 만들어 지기 이전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 숫자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어떤 이가 저지른 죄보다 받아야 할 벌의 강도가 너무 가혹할 때, 억울한 [ 구조적 억울함 ]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그런 상징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 상징의 숫자가 우리에게 하나씩 의미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활동하는 지적 활동의 큰 결과물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볼 때, 어떤 이는 사회 활동을 한다, 도구를 사용한다 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간은 상징을 만들 수 있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인간은 '상징을 사용하는 동물 (homo symbolonus)' 라고 생각한다.

간의 수많은 지적 활동은 기록과 저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기록들도 결국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다시 시작해야하는 과정일 뿐이다. 고대의 지적 능력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때 사용된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상징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고 이는 결국 기록이 인간의 지적 활동의 위대함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준다. 오히려 상징을 통해 인간은 지금까지의 다양한 지적 활동을 축약하고 하나의 의미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모든 것을 저장해주고 기록해주는 다양한 전자기기가 발달해도 인간의 지적 활동이 고도화 되지 않는 것 같은 막연한 불신이 느껴진 이유는 아마도 기록의 편리성때문에 더이상 상징의 활동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반문해본다.

인간은 상징을 통해 철학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 상징의 의미만큼 자신에게 의미있는 숫자와 상징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학문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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