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13, 2014

신김치를 공감하다. ─ 공감은 감정의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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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시절부터 신김치가 좋았다. 

방금 김장이 끝나 한번 먹어보라고 맛있다고 해도 절대로 익지 않은 김치는 먹지 않았다. 그래서 김치가 익어야만 김치를 입에 대는 식성 까다로운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날 가족끼리 집 앞 칼국수집에 가서 외식을 했었다. 칼국수 맛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지만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유독 내 입맛에 딱 맞았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있다. 적당히 익은 신김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에 주인 아주머니에게 외쳤다. 


"와! 김치가 맛있어요!" 

밝게 웃으며 나에게 응답해줄 것이란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래?" 하시며 그냥 가신 기억이 뚜렸했다. 

무뚝뚝한 아주머니라 생각하며 그렇게 십여년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어서 학교 앞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칼국수 하나로 유명한 집으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역시나 저녁시간에 맞춰 와서 줄서서 기다려서 겨우 들어간 후 유일한 메뉴인 칼국수가 인원수대로 자동으로 주문이 되고 바로 칼국수가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십여년전 무뚝뚝한 아주머니가 계시던 그 칼국수집이 떠올랐던 것이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신김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칼국수 집 특유의 겉절이로 오늘 아침 막 양념이 묻은 그런 김치였었다. 옛날 칼국수 집이 생각난 이유는 어쩌면 그때 아주머니 표정은...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온다는 것은 얼마나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이겠니..." 

라는 그때 아주머니의 표정에 대한 이유를 이제서야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십여년이 지난 후에서야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칼국수 집 김치가 어떤 김치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다. 꼭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주방장의 특급 비법으로 제공되는 김치일지도 모르고 주인의 개인적 취향일 수도 있지만 일반적인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것은 아는만큼 보이게 된다. 흔히 공감을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아는 과정이라고 말하기에 일종의 감정의 과정처럼 표현된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에 공감은 그저 인간의 기본적 희노애락의 감정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슬퍼하며 눈물흘리는 것만으로도 슬픈 감정은 알 수 있지만 왜 슬픈지 왜 눈물까지 흘려야 하는지는 상대방의 상황을 알아야 더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전에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 빗질하는 순간 머리카락이 한움쿰 빠지는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그때의 마음은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실제로 무엇인가 현실로 다가왔구나 하는 슬픈 서막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텔레비젼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으로 가슴이 울컥해지고 마음이 큰 바위 하나가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온다. 사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전달할 수 있는 것은 내용뿐이지 그 느낌은 절대로 전달하기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같은 경험을 한 분들을 만나면 특별히 어떤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서로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공감이 이루어진다. 


결국 가장 효과적인 공감의 도구는 직접경험이다. 그러나 공감을 위해 직접경험에만 의존한다면 너무도 슬픈 세상이 될 것이다. 세월호의 유가족에게 막말을 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자식을 잃은,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최소한 조부모님과 죽음에 의해 이별해 본 경험은 있을 것이고 나이가 좀 있다면 부모님과 죽음으로 더이상 보지 못하는 상황일텐데 정확하게 '사고로 누군가를 갑자기 잃어본 직접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막말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의 자식들만 모두 모아서 바다에 침몰시켜 수장시켜봐야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까지 해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간접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직접 경험만으로 공감할 수 없기 때문에 나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물을 배우며 고양이는 어느정도 높은데서 떨어져도 괜찮고 무엇을 먹는지 지식을 배우는 이유는 고양이가 높은데서 떨어질 때마다 놀라지 않고 인간 몸에 좋다고 인삼먹으라고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고양이에 대한 습성, 생리학적 지식을 배워서 고양이가 내 앞에서 펼치는 이상한 행동에도 좀 더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내가 고양이가 아니어도 말이다. 인간의 생리학적 현상을 알게 되면서 왜 일어나는지 몰랐던 질병들을 이해하고 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과학적 접근이 가능해진 이유도 모두 간접경험, 교육의 결과이다. 

그래서 교육은 경쟁에서 이겨서 더 좋은 자리를 위한 입신(立身)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주변을 향한 공감을 위한 노력이 되어야 한다. 풍수지리의 내용을 알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특정 장소에 높은 가격에도 사려고 하는지, 어떤 땅은 아무리 싸게 나와도 사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기에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위한 지식이 되게 된다. 칼국수에 어떤 김치가 나와야 하는지 모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아저씨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고 심지어 경기도 양평에서 텃밭을 가꾸는 칼국수 매니아 김모 할아버지라도 김치에 관심이 없다면 별로 상관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칼국수 집에서 신김치가 나오는 것이 때로는 장사가 안되어서 김치가 익을 때까지 손님이 없을 수 있겠구나... 라는 추측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게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알게되면 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랑이라 표현되지만 관심과 애정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단순히 칼국수에 대한 애정뿐만 아니라 한숨 가득했던 아주머니의 표정 속에서 아직 보지 못했지만 가지고 있을 애환을 보게 되었다. 그 애환이 칼국수 집의 신김치라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에서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그저 사교성 나쁜 아주머니라 그냥 넘겨 버렸을 것도 어쩌면 장사가 잘 안될 수도 있겠구나 좀 더 다가가는 공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참 좋아하는 것은 항상 알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생긴다. 

기본적으로 세월호와 관련해서 막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인간에 가지는 기본적 애정조차 가지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비록 자신이 정확하게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마음이 어떨지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일텐데 그들에게는 직접 경험만이 유일한 공감의 영역이다. 교육은 알기 위해서이다. 그냥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참 좋아하는 대상을 찾기 위해서이다. 공감이 없는 그들은 인간에 가지는 기본적 애정조차 가지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고 한마디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놈이란 뜻이다. 


움의 목적은 참 좋아하는 대상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이기고 누구 하나라도 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라고 가르치는 이 교육현실에서 어떤 공감과 이해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희망이다. 누군가 나를 공감해줄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과 투쟁의 사회 속에서는 결국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그 소수가 될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무엇이라 할 수 없지만 서로가 공감하고 같이 살아가는 다수가 살아가는 사회가 더욱 행복할 것이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엘리트가 되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엘리트 속에서도 다시 경쟁에 의해 또 살아남아야 하고 결국 삶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경쟁과 생존으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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