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11, 2014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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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버스에서 서 있는데 바로 옆에 어떤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우연히 왼쪽 손목에 그려진 문신을 보게 되었다. 문신의 모양은 새장의 문이 열려 있고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두마리 새가 그려져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모양이었다. 익숙한 이미지였기에 인터넷에서 가장 비슷한 이미지를 찾아 보았다.


위의 이미지에서는 새들이 많이 있지만 그 여성분의 손목에는 날개짓을 시작하는 듯한 두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는 직접 문신이 아닌 피부에 그린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조금 유심히 살펴보니 문신 (타투) 가 가지는 몇가지 특징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문신이 그려진 곳에서 손목가까이 손목과 직각 방향으로 여러 흉터를 같이 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을 물어보지도 물어볼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 여성의 손목을 보는 순간 참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내가 본 것이 정확하다고 해도 내가 생각하는 내용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고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인간 세상에서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누군가는 속으로라도 훈계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질 수도 있고 나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아마 다양한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만약 그분의 흉터가 여러번 삶의 힘든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도한 것이거나 떄로는 습관적 이유에서 손목에 자해를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시도를 그만둘 수 있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도록 문신은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모든 추측은 나의 착각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통해서 그냥 그 잘못된 시도에 대해서 탓하거나 그런 나쁜 짓(?)을 왜 했었냐는 시선이 아니라 그저 문신으로 그려 놓은 그림처럼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새장과 같은 것에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기를 아주 짧게 기도하게 되었다.


끔 가벼운 슬픔부터 아주 깊은 고통에 힘들어 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의도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도움이 된다면 자신이 도와주고 싶다는 친절함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주 가벼운 슬픔이라고 해도 내가 왜 이런 슬픔에 빠졌는지 그 모든 원인과 상황을 되돌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만에 만난 누군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무엇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게 되었는지 얼만큼 슬픈 일인지 처음에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해주었던 것은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휴지 한장을 주면서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미 지나간 그 슬픈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다시 슬퍼지게 되는데 '무슨 일이 있었냐...'라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면 좀더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기본적으로 무슨 일인지 궁금함은 가득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누군가 '슬퍼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보름달이 크게 떠오른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슈퍼문 (super moon) 이라고 부르면서 평소보다 더 커진 달을 바라보지만 아무리 크게 보이는 달이라도 달의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달의 뒷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만 보기 위해서는 그만큼 달에게 다가는 노력을 해야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달조차 보여주기 싫은 뒷면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달과 같이 말하기조차 힘든 자신의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여주기 싫은 그 부분도 달이다. 달이란 자아가 가진 또다른 모습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달조차 그런데 사람이라고 달의 뒷면과 같은 면이 있을 것이다.


위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슬퍼하는 사람이 '왜 슬픈지'를 알려고 한다. 심지어 그것이 달의 뒷면과 같은 말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말하지 않으면 솔찍하지 않다거나 때로는 위로해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렵게 이야기를 해도 '슬퍼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거나 '그렇게까지 슬퍼하지 않아도 될 일...' 이라며 지금 내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을 향해 '슬픔의 품질'을 평가한다. 그러나 위로는 평가가 아니다. 위로란 이유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정일 뿐이다.


기도가, 내 위로가 단지 당신이 자유롭게 날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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