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저녁을 먹지 못해 늦은 저녁을 챙겨 먹기 위해 시장 골목에 순대국 집에 들어갔다. 술잔을 기울이는 손님들 사이 한 자리에서 나는 순대국 한그릇 시켜 먹기 시작했다. 조금 배를 채워가고 있는 중 할머니 한분이 순대국 집에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허리가 직각으로 굽어 있었고 할머니의 걸음마다 손으로 다리를 잡지 않으면 안되실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할머니는 식당 손님들에게 껌을 팔기 위해 들어오셨다.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셨던 식당 관계자 분들도 이내 할머니의 굽은 허리와 힘든 발걸음에 불편한 표정을 더이상 지을 수 없으셨는지 계산대에 한분이 가셔서 천원짜리 지폐를 준비하시려고 움직이셨다.
대지팡이 들고 걸어가는 꼬부랑할머니 뒤태를 담은 강재훈 사진가의 전시 출품작 |
그런데 할머니는 너무 힘드셨는지 눈 앞에 보이는 정수기로 가셔서 물 한잔을 받아 마시셨다. 조금은 힘든 숨 뒤에 한잔 물을 드시고는 조금 멈춰 그 자리에서 쉬셨다. 할머니를 본 몇몇 손님들은 할머니를 위해 지갑을 꺼내셨고 나도 잔돈이 있을까 지갑을 꺼내는 순간이였다. 할머니는 손님들에게 다가가 껌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급하게 밖으로 빠른 걸음으로 나가시는 것이였다. 나를 포함해 아마도 몇몇 분들은 할머니의 그런 행동에 놀라기도 했지만 천원 지폐를 준비하러 계산대로 가셨던 식당 관계자분이 가장 많이 놀라셨다. 할머니를 따라 할머니를 불렀는데 할머니께서는 갑자기 더 빠른 걸음으로 나가셨던 것이다. 할머니의 그런 행동을 계속 지켜볼 수 밖에 없었고 할머니께서 하셨던 말은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지만
"물도 마셨는데 괜찮다. 염치없이 어떻게 ..."
란 말을 남기고 식당 밖으로 급하게 나가셨다. 난 사실 순간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물 한잔 마셨다는 이유로 염치없이 어떻게 이 식당에서 껌을 팔 수 있겠냐는 내용으로 할머니가 말씀하셨을 때 사실 어떤 느낌인지 표현할 수 없는 멍한 가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원 지폐를 챙겨 따라가던 아주머니 뒤로 나도 잠깐 식당 밖으로 나가보았지만 할머니는 힘든 발걸음으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셨을까 싶을만큼 저 멀리 가고 계셨다.
사실 그때도 할머니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굽은 허리와 물 한잔에 '염치'를 말씀하시며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나가셨던 모습은 몇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염치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굽은 허리의 할머니는 항상 내 머리 속에 들어오신다. 가끔 쓰는 말이지만 '염치'란 말은 참 어려운 말이다. 국립 국어원에 의하면 염치/얌치 없다 로 표현하고 얌체란 얌체/염치 없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라 말한다. 고 해다. 그리고 '염치'를 영어로는 무엇인지 전혀 떠오르지가 않아서 사전을 찾아보면 shame 이라 나온다. 그러나 shame 이 염치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설명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e attitude of trying to maintain one's dignity or refraining from doing something shameful.
더 어렵다. 인간의 존엄 혹은 체면을 지키기 위한 태도나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염치 없다' 표현하는 것처럼 사리사욕보다는 타인을 위해 지켜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조절하려는 모습이 더 가깝다. 그래서 염치란 염치없다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부정적 느낌이 더 다가오기는 하지만 염치란 말 자체는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어떤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특히 허리 굽은 할머니의 행동을 본 이후 염치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친필로 알려진 예의염치 |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사회가 되면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소위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고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생각한 태도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통해 더 많은 욕심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에게 높고 낮음이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 높은 자리에서 대우받기를 원하는 그 모든 태도들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체면을 지키는 모습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통해 소위 권위와 위력을 통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는 사실상 염치란 별로 중요한 덕목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힘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인간의 존엄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출처: 한국교원신문 |
체면이나 부끄러움이란 말과 염치란 조금 느낌이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염치, 한자로 廉恥 : 청렴할 렴,부끄러울 치 이다. 부끄러움을 알거나 사람의 체면을 지키려는 태도라고 생각했지만 염치의 염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청렴함을 먼저 생각하는 모습이다. 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 속에서 청렴은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통해 탐욕을 챙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하나의 덕목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태도가 염치의 시작이 될 것이다.
SAN FRUTTUOSO, ITALY Christ of the Abyss |
낮은 곳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삶에서 많은 이들은 높은 곳을 바라보며 높은 곳을 동경하며 그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나쁘다 말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염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높은 곳에서 인간의 염치를 찾기 보다는 낮은 곳에서 염치를 찾기 더 쉬울 것이란 알 수 없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정하 시인의 시처럼 '너를 위해 나를 온저히 비우겠다는 뜻' 그리고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는 사랑의 노래에는 자신이 낮은 곳에 있지 않는다면 그 잠겨 죽어도 좋을 사랑은 밀려 오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낮은 곳이란 그런 의미같다. 낮은 곳에 있어야 사랑도 흘러 내려오고 인간의 아름다움도 내려온다. 염치란 그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인간의 태도일지 모른다.
낮은 곳이라도 허리 굽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 내 삶에 무엇이 소중한지 생각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싶다.
0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