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Rattenfänger von Hameln) |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하멜른 지방엔 쥐떼들이 창궐하여 마을 사람들에겐 골치거리였다. 이때 마을에 나타난 한 사나이는 자신이 쥐떼들을 몰아 내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돈을 지불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사나이는 자신의 피리로 마을에 있는 쥐떼들을 몰아서 결국 호수에 몰살시켜서 쥐떼들이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처음의 약속과 다르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위 '배째 정신'으로 사나이에게 돈은 커녕 고마움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피리 부는 사나이는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유혹하여 이끌어내어 결국 그 마을엔 아이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개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산업 혁명의 시대에 무엇이 노동이며 노동의 가치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나의 부속품처럼 '쓰여지던' 시대에서 노동의 가치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사고의 기회를 주었던, 그리고 경제에서 우리가 불평등의 구조가 생기는지에 대한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시각을 주었던 책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단순히 육체적인 작업을 뜻하는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 직업, 일 (job)과 같은 의미이며, 그 어떤 직업이든 생산성에 관련된 모든 행위들을 노동이라고 정의하면 쉬울 것이다. 여기에서 생산성이란 꼭 우리가 말하는 돈(재화)와 연결이 된다 할 수 없지만 노동에 필요한 비용이 벌어드린 수입보다 많을 때 요즘 말로 우리는 '잉여'라는 새로운 신조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19세기말 러시아 공장노동자 |
피리부는 사나이로 넘어오자.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가지는 직업, 더 구체적으로 노동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 많다. 피리부는 사나이(이하 사나이)는 쥐떼를 몰아내는 노동을 맡는 장면에서 노동의 가치를 세가지로 언급하고 싶다. 우선은 ① 자신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재능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자신이 연마한 기술이라도 좋다.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② 자신의 상품 혹은 서비스가 유익한 타인이 있다. 쉽게 우리는 소비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③ 두가지 수요와 공급을 만들어주는 댓가이며 가격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아주 간단한 시장 가격의 형성 원리와 동일하다. 즉, 노동의 가치는 아주 간단하게는 수요, 공급이라는 시장 원리에 따라서 자신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시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능력의 공급, 수요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재밌는 점은 꼭 자신의 능력이 아주 특별하거나 객관적으로 뛰어나다고 해서 시장에서의 높은 노동의 가치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수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생산품이나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높은 가격이 형성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나이가 쥐떼를 몰아내는 특별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에서 쥐들이 문제가 아니라면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피리부는 사나이의 복수 - 노동 인력
피리부는 사나이는 노동의 가치를 적절하게 지불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나름 복수로 보이는 '노동'을 시행한다. 마을의 아이들을 피리로 유혹해서 마을에서 데리고 간다. 단순히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재앙으로 마을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줄 수 있지만,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비추어 본다면 노동의 가치가 상실되거나 제대로 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 아이들은 있어도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현재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해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는 사회라면 지금처럼 ⓑ 출산을 포기하는 사회로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점점 사라지는 그 모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즉,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다음 세대의 희망도 불투명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현재 세대가 몰락하고 결국 그 사회의 노동인구는 하멜른 마을처럼 노동의 가치가 아무리 인정받아도 정작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구가 사라져 버리는 그런 비극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익광호협의회,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공익광고 |
그렇다면 우리시대는 제대로 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노동의 댓가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그 누구도 어쩌면 선진국일수록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편의상 현대 사회의 경제를 세가지로 분류하고 싶다. 첫번째는 ⓐ 생산 경제(production domain)이다. 노동의 중심이 되며 우리가 필요한 모든 제품, 서비스들이 만들어지고 이루어지는 도메인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이다. 두번째는 ⓑ 금융 경제(finance domain)이다. 특별히 이를 따로 분류하지 않고 이를 생산 경제에 놓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현물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로 현물이 존재하지 않아도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별도로 놔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 투자 경제(investment domain)이다. 현실 세계가 움직이고 실제로 필요한 삶의 거리로 볼 때 생산 경제가 가장 가깝고, 금융 경제 그리고 투자 경제 순일 것이다. 경제 주체의 크기로 보아도 생산 - 금융 - 투자 순이지만 실제로 경제 규모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이는 마치 생태계에서의 먹이사슬로 보았을 때 식물 - 초식동물 - 육식동물 과 같은 형태이고 현실 경제에서는 마치 돈을 통해서 이어진 먹이사슬(capital chain)같다. 쉽게 예를 들면 금융 경제의 주 수입원은 생산 경제에서 나오는 수수료와 이자 등의 자금이다. 그리고 이런 경제 주체를 큰 자본으로 합병혹은 대규모 경영 변화를 만들어 천문학적 규모의 금융을 움지기는 것은 금융 경제 자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소수의 투자 자본이라는 것이다.
만약 생산 경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금융 경제와 투자 경제만 활성화 된 상황을 생각하면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 경제에 필요한, 실제 생산을 위한 자본이 아닌 투자와 투기를 목적으로 한 복잡한 금융 상품들은 생산 경제의 원할한 수혈을 위한 자금을 위한 서비스가 아닌 생산 경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기조차도 자신들에게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복잡한 수학적 도식과 비율의 조작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경제를 만들어 냈고 실제 생산 경제의 흐름과 상관없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고 만다. 가까운 예를 들어도 환율하락에 의한 손해를 막기 위해 KIKO(Knock-In Knock-Out) 라는 상품만 보더라도 환율하락이라는 상황에서 손해를 막을 수 있지만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손해를 감수해야한다는 것도 상기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상품들은 생산 경제가 잘 흘러가는가와는 별도의 문제이다. 고위험, 고수익의 이러한 금융 경제 그리고 이미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투자 경제를 통해 생산 경제의 원할한 흐름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금융, 투자 경제의 결정 주체는 소수이기 때문에 다수의 집단 이성에 의해 공익을 위한 판단보다는 보통은 자본 소유자들의 탐욕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 생산 경제의 눈물, 그리고 반격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아니 무시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결국 재앙이 다가왔다. 그 재앙은 단순히 아이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노동 인력이 사라진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결국 마을의 실질 경제 - 금융 경제나 투자 경제가 아닌 - 가 이루어지기 위해 노동 인력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점이다.
금융 자본가, 더 구체적으로 금융 탐욕가의 경우, 자신이 벌어들인 이익이 아주 정당하고 제대로 치루어진 노동의 댓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생산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몇년 전에 비해 적은 수의 노동자로 같은 생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자동화, 생산 효율화 등 인간의 수많은 지식과 기술은 인간이 직접 생산 노동에서 좀더 창조적인 노동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생산 노동 자체의 가치를 급격하게 낮아지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0년전 100,000이라는 생산 가치를 1,000이라는 노동자가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한사람 당 100의 생산 가치를 만들어 냈고 이 중 노동자들은 100중 50정도의 인건비로 노동의 가치를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면 10년 후에 100,000이라는 생산 가치를 100명으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면 한 사람당 실제 노동 가치는 1,000 중 50% 라면 500 정도의 노동 가치를 댓가로 받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즉, 급속하게 증가하는 일인당 생산 가치에 비례해서 노동 가치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부가되는 문제는 생산 경제는 이제는 금융 경제와 투자 경제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게 되고 종속화 된다는 점이다. 즉, 생산 경제 자체의 창의성이나 생산성보다는 금융, 투자 가치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고 이를 통해 결국 노동의 숨결이 살아있는 생산 경제의 현장은 도매급으로 그저 투자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로 판단되게 된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금융 및 투자 경제 주체의 입장에서 당장의 이익이 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노동은 단순히 비용으로 보여지고 어떻게든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려 금융 및 투자 경제의 이익을 증가시킬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기업들의 도덕적 타락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회사를 위해 위험한지도 모르고 젊은 청춘을 받쳐 일했던 생산 현장에서 쓰러져간 노동자를 한번 생각해보자. 글로벌 기업을 지향하는 국내 모 기업의 생산 공장에서 일했던 많은 사람들 (정확한 숫자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적지 않은 숫자이고 단 한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백혈병을 비롯해 다양한 난치병에 걸리고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할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산업재해조차도 막으려는 기업이 있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단순히 쓰고 버리면 그만인 부속품과 무엇이 다르게 보일까. 어쩌면 버릴 수 있을 때 버리면 절감할 수 있는 비용으로 느껴질 것이다.
고인이 되신 반도체 노동자분들, 기업을 위해 열심히 일한 그들에게 돌아오는 기업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
다시 피리부는 사나이로 넘어가자. 노동의 가치는 단순히 수요, 공급 그리고 그에 적절한 댓가를 통해 결정된다고 했지만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하는 또하나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 노동은 인간이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기계화, 자동화가 발달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노동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본의 풍부함에 돈 아까운지 모르는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의 주변의 음식, 집, 가구, 자동차가 단순히 자신들이 지불한 돈으로 모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모든 것들, 음식은 어떤 농부, 어떤 어부의 생산 노동의 결과이고 모든 공산품들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그 생산 라인에 존재하는 노동자들의 생산 노동의 결과이다.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논리라면 아이들이 사라진 마을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억압받고 열악한 노동 환경 아래에서 결국 노동자들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자본가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는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실현해주고 인정해주는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즉, 피리부는 사나이의 유혹은 "노동자 몇명 없어도 일할려는 사람들 많아"라는 도덕성이 결여된 돼지같은 탐욕가에겐 경고일 수밖에 없다. 노동 시장이 도덕적이고 기업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주는 사회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세상으로 이동하려고 할 것이다.
¶ 정부가 해야하는 일들은 무엇일까
아주 간단하다. 정부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그보다 더 중요하게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주체들이 아무리 힘이 있는 존재라도 억압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역할일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정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정부는 노동의 수요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개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리고 그런 수요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시장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노동의 수요는 국내 생산 경제의 규모화이다. 단순히 인건비의 압박때문에 국내 생산 공장을 해외로 진출하는 근시안적인 생산 경제도 결국 생산 경제의 장기적인 안목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투자 경제의 탐욕적인 결정이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결정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단순히 인건비때문에 생산 공장을 옮기면 내수 생산 경제는 축소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생산품의 질 등 다양한 외부 변수들의 위험도 감수해야한다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번째 개인의 능력은 노동의 다양화일 것이다. 이 부분은 무척이나 어렵다. 단순히 노동 시장의 문제가 아닌 교육과 개인의 역량을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소도시에서 몇몇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값비싼 소위 명품(masterpiece)의 생산은 자신의 능력과 고부가가치가 잘 들어 맞은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안정적인 시장은 바로 고용 안정에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불안한 직장에서 고수익을 얻는 것과 안정적인 직장에서 적당한 수익을 얻는 것 중에 많은 사람들은 후자를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안에서 오는 위험은 사람을 행복하기 위한 직업이 아닌 단순한 생계수단을 위한 수단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직업이 단순한 생계수단으로만 의미가 있을 때 인간은 가장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추가적으로 정부가 규제해야하는 부분 중 하나는 아무리 수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비윤리적 수요에 대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청부살인이라는 직업이 고수익이고 수요가 높다고(?)해도 분명 막아야 할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청부살인이지 아무리 일부에게 이익 혹은 행복을 준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불행을 통해, 다른 이들의 파괴를 통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수요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윤리적 노동 수요의 증가를 뜻해야 한다.
고용 하도급화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을 위한 필리핀 노동자의 노동운동 |
그래서 정부의 정책은 복잡하지만 그 철학적 배경은 아주 간단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탐욕과 공포 (greedy & fear) 이 최소화 된 노동 시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즉, 탐욕에 의해 자신이 가진 99에 1을 더하려는 사람들을 최소화하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증가하는 노동의 가치에 맞는 분배 정의에 맞는 노동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2년 대한민국의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그 출발점은 단순히 거시 경제의 규모와 그 규모에서 어떻게 분배를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중심이다. 그 안에서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상실된, 그리고 훼손되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힘들게 만들어버리는 노동 현실에 대한 냉철한 시각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가치를 실현해야한다는 철학적 기초부터 이야기해야한다는 것이다.
¶ 경제 민주화는 무엇일까?
노동의 가치부터 경제 민주화를 이야기해야한다는 심증적 믿음은 있었지만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실체, 손에 잡히는 명확한 정의는 너무 어려웠다. 그런 과정에서 피리부는 사나이가 주는 짧은 이야기가 짧은 그렇지만 굵은 연상을 주었다. 다시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로 넘어가자.
쥐떼를 몰아냈을 때 피리부는 사나이는 약속대로 돈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돈 천냥 (큰 포도주 통 두개를 채울 수 있을 정도) 을 주기 싫어서 사나이와 약속을 깨버린 것이다. 없어서가 아니었다. 분명 이것은 탐욕이었다. 그 탐욕의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사나이에게 돈주는 것을 만장일치로 반대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분명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마을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이, 소수가 결정한 결과이고 그에 따라 그 결과는 재앙에 가까웠다. 바로 소수의 경제 주체가 자신의 탐욕이나 잘못된 판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선배들이 목숨을 걸고 탐욕과 공포의 칼날 아래에서도 목숨걸고 싸웠던 정치민주화를 생각해보자. 그때에는 대통령조차 이제는 흔한 선거를 통해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장기집권을 통해 자신의 욕심대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간단하게 그것을 독재라고 부른다. 때로는 어떤 철학가는 아주 현명한 현자를 통해 나라를 통치하면 나라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 '아주 현명한 현자'라는 가정자체가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역사를 통해 그러한 현자로 불리던 사람들은 결국 독재자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렵게 이룩한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그래도 형식적으로 제도적으로 정치가 민주화 즉, 정치의 주체가 누가 되든, 그 결과가 어리석은 결과가 나오든, 자신이 원하는 바와 다르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구성원들이 집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25일 오후 서울 동대문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경제민주화시민연대 출범식, 민중의소리 |
경제민주화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소수의 재벌들이 자본의 계획과 집행을 결정하는 과정은 결코 민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 힘들다. 재벌들이 자신들의 사적 욕심을 위해 자본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잘못된 것이다. 소위 재벌은 법적으로도 주인이라고 이야기하기에 너무도 적은 주식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서 월권에 가까운 경영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경제민주화의 가장 기본은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동자들과 생산의 주체들이 경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에게 돈을 지불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그 과정이 길어지고 비효율적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비용이 아깝다고 하더라도 욕심에 의해서, 도덕성을 훼손하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중요한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 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민주화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아주 간단한 원리이다. 경제를 만들어내는 경제 주체가, 생산의 기여도만큼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상봉 교수님이 쓰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이야기하듯 노동 주체도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보장을 하고 법적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가장 큰 분수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의 마지막에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모든 아이들이 피리부는 아이들에 이끌려 마을을 떠났지만 몸이 불편했던 어떤 한 아이는 같이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른들의 탐욕으로 아이들의 행복까지 망치게 하는 것은 분명 큰 잘못일 것이다.
글쓰신 분의 academic credential을 여쭤볼 수 있을런지요? 어느 수준의 대학/대학원에서의 어떤 전공을 하셨고 현재 하시는 일 등에 대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 내에서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plyDele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