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경계 상태
통신의 문제에서만 marginal status 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상황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하철을 타면 객차 한쪽은 노약자 및 임산부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젊은 나이의 청년이라면 이 자리에 앉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 앉기를 권고한 그 어떤 조건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임산부라면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인가? 비록 사회가 만든 통념적인 암묵적인 규칙이라고 해도 일단 규칙이 만들어지면 그 규칙에 갈등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게 된다. 임산부이지만 배가 나오지 않아서 자신이 임산부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건강한 젊은 처자로 보이게 된다면 스스로 갈등하게 될 것이다. 비록 사람들 모두를 편하고 공익을 위해 만든 규칙이라고 해도 배가 아직 덜 나온 임산부에게는 무척이나 불편한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해서 임산부 중에는 그냥 참고 서서 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과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칙 안에서도 이런 marginal status (이하 경계 상태) 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암환자이고 조금이라고 무리하면 악화되는 상황이라면 자신은 분명 노약자이지만 지하철 안의 노약자 석에 앉아도 될지에 대해서 무척이나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 통념상 그런 젊은이를 보고 자신이 앉고 싶어 그 청년에게 '왜 여기에 앉아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어르신이 계신다면 그 또한 곤란한 상황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상황을 확인하고 세상에서 주어진 규칙에 자신이 해당하는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에 해당하는 혜택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런 규칙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 소위 애매모호한 경계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겐 스스로를 판단하고 그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무척이나 큰 용기가 필요할 때가 많고 그 용기가 없어 받아야 할 혜택인데도 불구하고 그 혜택을 받지 않는 경우가 존재한다. 반대의 경우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누가 보아도 경계선 상의 사람이 아닌데도 양심과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젋고 건강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노약자, 임산부 좌석에 혼자 편하고자 앉는 경우일 것이다.
¶ 선택적 복지를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이 한참 무상급식으로 떠들석 한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의 먹거리는 나라가 보장해야 한다는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 굶는 아이들이 있는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인 사람들도 많지만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런 아이들이 굶고 제대로 된 영양을 보충하지 못하여 학업에도 영향을 받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실시하자는 정책이었다. 이에 반대하는 이견도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의견은 '잘사는 아이들에게까지 무상으로 급식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아이들에게까지...' 라며 전면적 무상급식이 아닌 선택적 무상급식을 주장했다. 어떤 정책이 개인적인 입장에서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할 것이다. 바로 자신이 처한 입장이 다르고 만약 자신이 충분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아이가 무상급식으로 나온 급식보다 더 질 좋은 도시락으로 먹일 수 있는데 하며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적 무상급식에 대한 많은 반대 의견으로 어린 시절부터 만들어지는 계층 위화감 (incongruity), 아이들의 상처 등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무상급식, 지역 식자재 공급이나 지역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지역기반 생산 영역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
개인적으로 자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특히 자신의 노력이 아닌 자신의 부모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의 양에 따라 계층을 정의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만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편의상 잠시 '자본적 계층'으로 불러본다. 개인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자본적 여유가 있는 계층의 아이들이나 절재적 빈곤 계층의 아이들이 아니다. 앞서 서론에서 본 것처럼 경계 상태에 있는 계층의 부모를 둔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싶다. 만약 정부에서 하위 30%의 소득 계층, 물론 부모의 소득 계층이 하위 30%인 아이들에게만 무상 급식을 제공한다는 정책을 만들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정책은 국가적 차원에서 합의하고 이룩한 사회적 규칙의 법률화된 형태이다. 아주 간단한 지하철의 노약자 석만 하더라도 그 경계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갈등이고 그 갈등의 결과 어떤 사람들은 혜택을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혜택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무상급식의 예로 다시 넘어오자. 소득 계층 하위 30%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해당 학부모들의 소득을 1등부터 꼴등까지 모두 줄세워 놓고 아래에서 30%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혜택을 줄 사람들을 선택하는 과정만큼이나 그 혜택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공정해야 할 것이다. 즉, 혜택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특히 자신이 만약 30%에 엇비슷하게 걸려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무리해서라도 무상급식을 신청하지 말것인지 아니면 그냥 경제적 어려움으로 무상급식을 선택할 것인지 말이다. 소득에 대한 정의도 문제를 불러온다. 어떤 부분을 소득으로 잡을 것인지, 가처분 소득은 없고 부동산은 가득한 사람들, 소득은 있지만 이자 비용으로 마이너스 지출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 등 그 수많은 소득의 정의에 따라서 누군가는 혜택을 보고 누군가는 혜택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국가 정책은 국민들을 고생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약 소득 계층 하위 30%라는 정책을 만들 때 그 30%가 가지는 의미를 분명히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논리는 돈일 것이다. 지금의 재정 상태에서 혜택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30%라는 것이 가장 논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단순히 무상급식이라는 혜택을 보기 위해서 학부모들이 특히 30%에 걸리는 경계 상태에 있는 학부모들은 자신의 상태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통신에서의 예나 지하철의 노약자석만큼이나 이런 선택적 복지가 가지는 가장 큰 위험성은 개개인들이 부담해야 하는 노력과 비용 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위 소득 계층의 학부모들에게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더욱 더 큰 문제는 사실 30%라는 선을 그어 놓으면 실제로 자신이 30%인지 35%인지 알 길 없는 학부모들은 그런 소득을 증빙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아무리 정확하게 계산을 해서 30%라는 숫자(figure)를 제시해도 사실상 소득 하위 10% ~ 40% 정도의 학무모들은 자신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의해 모두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의 영역에 놓인 학부모님들에게는 정부는 신경쓰지도 않는 사회적 비용(소득 증명을 위한 시간 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지하철 노약자석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문제도 발생한다. 바로 혜택을 볼 수 없는데도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남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혜택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정책에서 혜택을 볼 수 있는 계층과 볼 수 없는 계층이 나누어지는 순간 ① 경계 상태(marginal status)의 국민들의 사회적 비용 증가, ② 수혜자와 비수혜자를 나누는 기준의 정의로운 정의(impartial standards), ③ 부정한 방법에 의해 혜택을 받는 사람들 등 정부가 신경써야 하는 부분들은 더욱 더 늘어나고 개개인의 사회적 비용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 비용도 증가할 것이다. 국가의 정책은 정의롭고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야하기도 하지만 이런 경계 상태에 놓여 발생하는 부가적인 비용에 대해서도 고려해야할 것이다.
¶ 내가 꿈꾸는 복지 국가
2012년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대부분 복지국가를 이야기한다. 모두 각자가 생각하는 복지국가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복지국가가 가능하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래도 때로는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국민들에게 감언이설을 하고 때로는 실현 가능하지 않은 정책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정책은 실현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전략과 그 전략에 맞는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실현 가능한지에 대해서 철저하게 검증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꿈꾸는 가장 현실적인 복지국가는 바로 앞서 이야기한 경계 상태에 놓인 국민들이 최소화 하는 국가이다. 수식적으로 이야기하면
min( sum( citizens ∈ marginal_status ) )
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경제 규모가 커지고 국가의 경제 소득이 증가한다고 해도 국가의 복지 혜택을 절대적으로 받아야 하는 인구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제 상황이 경계 상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해야하는 인구가 많아질 것이다. 국가 전체의 생산 규모가 증가하고 대외적인 숫자로 보면 모든 경제 지표들이 안정화 되어가고 있지만 수많은 국민들은 자신들이 놓인 경계 상태에서 불확실성 안에서 불안해 하고 항상 고민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복지 국가는 아주 간단하다. 전체 국민들이 느끼는 불안의 양이 최소화 되는 상태를 유지하는 국가이다.
min( sum( | fears_of_citizens | ) )
즉, 정책이 경계 상태를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그 경계 상태에서 불안해야 하는 국민들은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복지 국가는 단순히 많은 재정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패러다임에서 국민들이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요소들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단순히 재정을 얼마 투입하고 어느 정도의 가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가의 결과론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인 정책으로 오랫동안 국민들이 불안해 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국가일 것이다.
¶ 선택적 의료 혜택을 생각해 본다.
국가가 국민의 4대 질환에 대해서 걱정해 주고 치료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준다는 정책은 분명히 환영받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해당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 보호자분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환영받아야 하는 반가운 정책이다. 쉽게 말해 해당 질환에 대한 '보장성 정책'은 아주 좋다. 여기에는 경증, 중증 질환에 따른 경계 상태에 놓인 환자들도 별로 필요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말 4대 질환에 해당하지 않는 질환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4대 질환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의료 혜택을 늘릴 수 있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왜 나는 하필 암에 안걸리고 간질환이 걸려서 더 많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한탄하는 사람들은 나오지 않을까? 합리적이지 않는다면 극단적으로는 간경변 환자의 치료비가 간암의 환자보다 더 많이 나올지 모르고 본인이 간경변이라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더 악화시켜서 간암 상태에서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경계 상태란 단순히 무상급식에서 나온 단순히 퍼센테이지로 구별하는 상황 뿐만 아니라 이처럼 혜택을 볼 수 있는 항목을 정의하고 '차별'하는 상황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2012년 모 후보가 내 놓은 4대 질환을 정한 합리적인 이유가 정확하게 모르지만 만약 의료비 부담 비율이 많은 질환을 중심으로 선택했다면 그 안에서 생각해볼 문제가 존재한다. 앞서 이야기한 복지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통해서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 (임파선암으로 수술 및 항암치료, 뇌종양 치료, 심근경색 및 당뇨치료 를 받아본 입장에서) 에서 사실 병원에서 환자의 심적 불안은 병의 중증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수술 및 시술에 몇개의 기구가 쓰이느냐에 따라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없다가 되기도 하고 그에 따라서 비급여 항목이 증가하는 것을 환자는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분명 받아야 하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건강 보험의 영역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입원에서의 비급여 간병인이나 입원실의 경우에는 그 불안도는 증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정으로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 환자인 국민들이 불안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병원을 경험해보지 않은 특히, 중증 질환의 불안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 한대로 그렇다면 경계 상태를 해소하여 사람들의 불안을 감소하는 정책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의료 혜택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국가의 재정이 늘어나야 하고 또한 공공성이 강한 재정 지출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분명 무상 의료의 상황에서는 국민들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릴 것인지, 그리고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덜할 것이다. 즉, 질환 자체에 대한 불안과 생존에 따른 걱정만 하면 될 것이다. 현재와 같이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 불안, 내가 어느 정도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 의료비로 인한 경계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이지만 무상적 의료 복지는 재정만 보장이 된다면 국민들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보험 장치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광고 중에 하나는 보험 광고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 건강 보험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많은 의료적 불안때문에 보험에 가입하고 적게는 몇만원에서 많게는 몇십만원을 월마다 지출하고 있다. 이런 경우 상당히 재밌는 경계 상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비록 현재는 경계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 더 구체적으로는 미래에 자신이 질병으로 인하여 경계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걱정으로 보험을 가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보험 시장은 개인들이 놓일 수 있는 경계 상태에서의 힘든 상황을 상상하게 해서 돈을 버는 마케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가가 무상 의료를 실현할 수 있다면 이런 미래의 경계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좋은 복지 국가의 특징은, 현재의 경계 상태 뿐만 아니라 미래의 경계 상태까지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다. 실제 사보험 시장에 지출하는 비용의 1/10 정도만 국가 건강 보험으로 지출한다면 개인의 비용도 절감할 것이다.
여기에서 기업적 보험 (사보험)이 정말 미래의 경계 상태에 놓일 불안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경계 상태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문제점 중 두번째 수혜자/비수혜자를 나누는 기준에 대한 문제이다. 보험의 일차적인 목표는 안심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러나 질병에 관련된 사보험은 대부분 어떤 질병에 걸리느냐에 따라서 수혜자가 되기도 하고 비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다시 넘어와 선택적 보험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열심히 납입한 보험금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의학적인 분류에 의해서 막대한 병원비가 들어가도 수혜받지 못하는 경우는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보험을 들고 우리가 바래야 하는 것은 우선은 건강해야 하지만 질병에 걸리더라도 보험 약관에 가능한 질병에 걸리기를 바래야 하고 이또한 다시 경계 상태와 동일한 것이다. (사족: 그래서 그런가? 경계성암이 사보험 시장에서는 아주 까다로운 항목인듯 하다.)
¶ 현실적 의료 정책을 생각한다.
무상 의료 정책이 실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분명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실현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고 최소한 경제적 약자가 질환에 의해서 생존의 문제로 넘어가는 억울한 상황은 최소화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재정의 문제이다. 재정의 뒷받침을 위해서는 분명 세금은 늘어나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우리나라 기업에 대한 세금의 현실화, 선진국 수준으로 증세를 하고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 그 책임성은 단순히 기업이 의무적으로 내어야 하는 것이 아닌 같이 공존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적 기여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명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많은 경영인들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세금 부담도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내용처럼 불안에 의해 발생하는 개인의 사보험이나 그런 불안 요소에 의해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 분명 기존의 지출보다 감소할지 모른다. 다양한 묘수를 동원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현실에서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2010년 건강보험 하나로를 위한 서명 운동 |
그러나 무상 의료 정책이 실현되면 일반 국민들이 병원 이용이 증가할 것이다. 의료에서의 경제적인 불안은 해소되었지만 질병에 대한 불안은 결국 병원 이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래서 절대적 생활 빈곤 계층을 제외하고 병원을 쓸데없이 이용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도 동시에 제공해야 할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예방과 검진에 투자하는 것이다. 사실 초기 검진에 의해서 발견된 질환의 치료 성공률은 높고 비용은 줄기 때문에 늦게 발견되어 중증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의 치료 비율을 줄일 수 있다면 중증 질환에 대한 국가 의료비 부담은 감소할 것이다. 즉, 의료 치료 뿐만 아니라 예방과 검진에 더 중심을 둘 수 있도록 검진의 현실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검진에서 초기 질환을 발견할 수 있는 의학적 발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시스템의 개발도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형 병원 위주의 의료가 아닌 지역 공공 보건소의 예방 검진 기능을 확대하고 이에 필요한 인력도 증가해서 공공 의료의 기능을 활성화 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의료부담 상한제는 완전 무상의료가 가지는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일 것이다. 무상이 아닌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에 대한 상한제가 존재한다면 (물론 의료비 적용 범위에 대한 합리적인 합의가 설정된 상황에서) 불필요한 병원 출입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원칙적인 가이드 라인은 중증 질환에 의한 생계의 문제가 생기거나 경제적인 부담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구조를 해결한다는 점이다. 어떤 병에 걸리느냐에 따라서 경제적 파탄이 일어나기도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일종의 복권이 아니기에 최소한 생계에 어려움을 줄 수 있는 고통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제도 아래에서는 살 수 있다는 마음의 안심만으로 복지 국가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며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는 가장 큰 주장은 우선 재정의 현실성이고 두번째는 도덕적 해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도덕적 해이란 무조건 주어지는 복지 혜택으로 인해 일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세금을 통해서만 놀고 먹는다. 결국 돈 버는 사람들 따로 있고 돈 쓰는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게 되어 결국 일하지 않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선택적 복지가 더 타당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 선택적 복지의 그늘 아래에서 구조적인 문제로 제대로 일자리도 가지지 못하거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입장으로 잠시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선택적 복지가 가지는 도덕적 해이는 역설적으로 더 커진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선택적 복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도덕적 해이도 계속 이야기해오던 경계 상태를 통해 설명해본다. 미국의 메디케이드(Medicaid)란 제도가 있다. 의료 분야에 사보험이 장악을 해서 돈이 없으면 결국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미국에서도 사실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의료보호제도의 일환으로 주정부 및 연방정부 공동 차원에서 보조를 받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의료보험 제도가 존재하지만 메디케이드를 받지 못하면 동일한 치료에도 의료비의 부담이 크게 다가온다. 전적으로 메디케이드에 의존하는 비율은 재정의 탄력성에 따라서 달라지지만 대체로 7% 정도이다. 이 7%에 들어가기 위해서, 메디케이드 자격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일을 찾거나 소득을 증가시킬려고 하기 보다는 소득을 줄이거나 일을 하지 않아서 결국 의료보호제도 안으로 들어올려고 한다. 그리고 이 또한 경계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경쟁이 되고 더욱 더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며 기본적인 삶의 질은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선택적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기본적 성취욕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일을 생계 수단의 도구로만 사용할 때 인간은 한없이 불행해진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생계 수단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인간의 노동의 가치는 증가하고 아울러 그런 구성원이 많은 사회는 생산적인 공동체가 될 것이란 믿음이다. [ 피리부는 사나이 -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 단순히 생산 활동을 하고 세금을 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가지 않을 가치를 위해 착취당한다 생각하게 만들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사회적 구조 때문에 쉬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생계가 힘들어진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그 시각이 참 불편할 때가 많다. 더이상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부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세상에 내가 살아가는데 나만 돈이 많고 풍요로운데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생계조차 힘든 상황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면 진정 내가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들이 불쌍하다면 내가 가진 돈으로 주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 국가가 가지는 가장 첫번째 이데올로기는 나 혼자만 행복한 세상은 없다가 아닐까. 나 스스로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같이 행복한 세상에서 더욱 편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아도 누구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공감하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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