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25, 2013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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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세례를 받는 아기에게 아기 엄마는 조용히 이야기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축복의 말을 기대하고 있던 나였는데 아기 엄마는 아기에게 이렇게 이야기 해주었다.

"앞으로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야." 

알아 듣지 못하는 아이라고 하지만 아기가 세례받는 그 축복의 순간 엄마가 해주는 말 중 가장 '현실'적인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기를 향한 엄마의 그런 말이 오히려 더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영유아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잘 해준다. "앞으로 고생 길이 펼쳐질거야." , "앞으로 힘든 일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물론 그 다음은 "그러니 힘내고 용기내어라" 와 같은 말로 마무리를 한다.


이 컵에 담겨 있다. 물이 담긴 컵을 자세히... 정말 아주 자세히 살펴보아 인간의 시각을 벗어난 범위까지 확대해서 살펴보면 물은 정적으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다. 물과 공기는 경계면 (intefacial surface | boundary) 을 사이로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액체 상태의 물은 경계면을 통해 기체로 날라가려고 하고, 반대로 공기중의 수증기는 액체가 되려고 하는 수많은 물 분자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아주 정적으로 경계면을 뚜렷하게 가지며 구분되어 있는 것 같지만 역동적인 물분자의 동적 평형 (dynamic equilibrium) 을 이루어서 우리 눈에는 열적 평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약 주변이 모두 물 분자로 둘러 쌓인 액체 상태, 즉, 경계면이 아닌 액체 중심에 있는 물분자라면 이런 전쟁같은 경계면의 경험을 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지낼 것이다. 이처럼 경계면은 거시적으로 (macroscopic) 정적으로 보이지만 미시적으로 (microscopic) 동적인 상태이고 이런 경게면은 항상 끊임없는 갈등과 변화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경계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만약 일생 내내 경계면을 경험하지 않는 안정적 액체 상태로만 둘러 쌓여 있었다면 이 세상에 공기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지만 비교적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많은 갈등과 변화는 경계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갈등과 변화에 대해서 경험하지도 때로는 인식하지도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안정적 액체의 삶에는 수증기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상상하지 못할지 모른다.


런 의미에서 경계에 선다는 것은 항상 변화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항상 경계면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삶은 변화하게 된다. 사실 인간이 가지는 희망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을 통해 가능한 개념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노예들에게 절대로 자신들은 자유로워질 이유도, 기회도 없다고 믿어버린다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경계면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인식한 어떤 노예 한명을 통해서 노예 제도는 불합리하고 자신들도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될 때 그때부터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제도에 순응하고 그대로 따르게 된다면 더 이상 그 제도 이상의 변화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역설적으로 희망은 경계에 놓인 누군가 전해준 정보의 산물이 된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꿈꾼다면 우리는 희망한다고 말하지 않고 공상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경계에 서는 것은 위험하고 두려운 상태이다. 경계면의 물은 액체가 될 것인지, 기체가 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그 고민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의 자유도가 높아진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높아진 자유도는 인간을 더욱 두렵게 만든다. 진화 생물학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진화가 꼭 진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더 많은 질병과 질환에 노출되고, 유전적으로 취약한 많은 요인들이 생기고 그런 상황 속에서 발전하는 한가지 요소는 생물학적 요소가 아닌 사회적 요소인 인간 의지의 자유도 뿐이다. 질병이 많아져도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선택하고 개척할 수 있는 자유도는 높아지고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삶마저도 계속 이어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선택권까지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 진화의 관점은 인간의 생물학적 완벽도를 통해 생각하기 보다는 사회가 인간에게 얼마나 높은 자유도를 주었는지를 통해 인간 진화의 크기와 방향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접근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만큼 인간은 점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더욱 커진 자유도의 크기만큼 스스로 감당할 용기가 사라지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선택하지 못하는 자아, 흔들리는 자아 등과 같이 용기내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양산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도가 감소한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개인이 가지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사소해지고 그 사소해진 개인의 비중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오히려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하는 그 마저도 사실은 높아진 자유도의 직접적인 현상이 될 수 있다.

개별의 높은 자유도는 개별의 두려움을 만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적절하게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마케팅의 심리적 전략이라고 말한다. 즉,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개별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믿게 하지만 사실은 기업이 원하는 방향대로 끌려 다니기도 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많은 도구들 (미디어를 포함하여 모든 기술들) 은 인간을 매우 정보력 있고 (informative) 이해력 있는 (intelligent)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공포 (fear) 와 위험 (risk) 를 전달해 준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선택을 머뭇거리는 많은 개인들에게 자신들의 기술이, 상품이 그 공포와 위험을 해결해주거나 감소시켜 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집단적으로 최면에 걸린 것처럼 인간은 대중의 홍수에 휩쓸리기도 한다.

경계에서 서지 않고 공포와 위험을 느끼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신이 경계에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회에 놓인 위치와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 쉽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부유한 집의 자식으로 태어나 경계에 서는 기회가 적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언젠가 다가올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실패를 반복해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경계에 놓인 인간으로 우리가 경계에 서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쉽게도 방법은 하나 뿐이다.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경계에 놓이는 것은 내 마음대로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경계에 놓인다는 것에 대해서 긍정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경계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볼 수 있고, 그 변화를 관찰하며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계에서는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갈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결정에 용기를 가지고 실행하는 것이다. 물 분자가 액체가 되어도, 기체가 되어도 물 분자는 물 분자일 뿐이다. 액체, 기체의 상태 (phase) 는 달라져도 물 분자라는 본질적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에도 자신이 변할 것이라는,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낼 필요가 있다. 그런 선택에는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지금의 사회는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더 경계에서 서는 것보다 반칙을 통해서라도 경계에서 벗어나 안정적 삶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것은 실패를 낙오자,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물 분자가 기체가 되어 전혀 다른 쓸모없는 분자가 되어버린다면 아마도 모든 액체들은 절대 기체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이 물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사회가 사회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물 분자라는 본질적 내용을 가지고 동적인 평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수증기가 되어 날라가버리는 물 분자를 향해 항상 안정적으로 액체 상태로만 존재하던 컵 안의 물 분자들이 한마디씩 할지 모른다. "저런 바보같은 놈, 이렇게 편안한 삶을 버리고 저렇게 날아가다니..." 그러나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에 날라간 물 분자는 컵 안의 삶과는 전혀 다른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더욱 더 다양한 선택에 상상하기 힘든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경계는 변화에 대한 수용인 동시에 자신의 삶에 대한 가장 높은 자유도를 가지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 두려움에 지쳐 안주하거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여 휩쓸려간다면 자신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장 멋진 축복은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아픔을 부정하고 없기 바라는 축복이 아니라 그 고난과 아픔에 당당히 맞서 선택하고 변화가 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경계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도록 말이다.

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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