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3, 2004

얼굴과 나이 ─ 정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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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나이 들게 나왔었군요"

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책에 나온 사진은 언제 적 것입니까?"

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마 전에는 한반중에 아랫녘에 계시는 이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를 건네 받자 마자 이모께서는

"이 빌어먹을 놈아. 어째 그렇게 폭싹 늙어뿌럿냐"

며 푸념을 해대셨다. 어떤 텔레비젼 화면에 잠깐 지나간 내 모습을 보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만나 뵌 지가 3년이나 되어가니. 당신 나이 드는 것만 알고 내 나이 드는 것은 모르시는 이모로서는 그럴만도 하다.

언젠가 원로분으로부터 이런 말 들은 것을 기억한다.

"세월이라는 것은 겨울 삭정이에 눈 쌓이는 것 같다네. 한참 쌓일 때는 모르는데 어느 순간 그 가벼운 눈발 하나 더 얹히면 풀썩 꺾이고 말거든."

나도 이제야 알겠다. 시시각각으로 시간은 흐르지만 늙음은 한 달치씩 1년치씩 그때그때 표시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은 삭정이에 눈 쌓이듯 모아 둔 채 있다가 어느 순간에 폭삭 한꺼번에 나이 든 표시가 난다는 것을.

지난 5월, 어떤 수녀원에서 내가 좋아하는 찔레꽃이 한창이라며 불러 주었다. 꽃구경을 하고 향기에 취한 채 수녀님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한 수녀님이 "실례지만"이라고 전제한 후 내 나이를 물어 보았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5학년 몇 반이라고 대답하자 와! 하고 웃음이 일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수녀님이 얼굴에 그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는데 비결이 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당황해서 웃다가 '임상 실험'중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이것 한 가지만은 공개했다.

"저는 잠자리에 들 때면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행복했던 일이나, 아름다운 풍경, 혹은 누군가의 유머 등 기분 좋았던 일만을 생각합니다. 전에는 그 반대였지요. 그날 있었던 일 중에서 나한테 기분 나쁘게 했던 사람. 속상했던 일, 모진 말 등 안 좋았던 것만을 떠올렸었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잠자는 어린 아기를 들여다 봤더니 혼자 웃으며 잠을 자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저도 잠자면서 이 가는 것보다는 웃는 얼굴이 되고자 그런 임상 실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 정채봉 에세이 「 눈을 감고 보는 길 」



분 좋은 임상 실험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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