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2011) |
억만장자 집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버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집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시키는 결혼을 포기하자 자신의 모든 재산마저 포기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단순 코메디에 내용도 단순하고 그다지 내용도 흥미진진하지 않은 내용이지만 마지막 결혼식에서 Arthur 가 혼인 서약을 하는 순간 결혼을 하객들 앞에서 거부하자 신부가 심한 독설과 함께 "돈을 위해 결혼하지 너 같은 멍청이와 누가 결혼하고 싶냐"고 소리지르고 적당히 정리되고 Arthur 는 자신이 원하던 여인에게 달려가게 된다.
어느 누구도 인내는 피하고 싶은 테마이다. 가능하면 쉽게 되고 싶고 걱정과 고민없이 선택하고 살아가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가능하다면 재력이 되는 집에 태어나 원하는 것 마음대로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하고 싶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한편으로는 참고 그 영광을 위해 기다려야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쉬운 길과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게 자수성가한 인물을 보면 한편으로는 힘을 얻고 용기를 얻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는 상황이 달라 어떻게 저렇게 하겠어 하며 체념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을 탓하며 포기하면 분명한 것은 절대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외계 지적 생물체를 찾는 프로젝트를 하던 사람들에게 "정말 가능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까?", "성공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을 때 프로젝트의 과학자들은 논문을 통해 대답했다.
The probability of success is difficult to estimate;
but if we never search, the chance of success is zero.
성공 확률은 가늠하기 힘들 것이다. (상당히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그 성공 확률은 분명 0% 이다.
Cocconi, Giuseppe; Morrison, Philip, Nature, V(184), I(4690), pp.844-846 (1959)
시도하지 않는다면 중간에 포기한다면 성공확률은 바로 0% 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고 견디어 내어 계속 할 수 있다면 그 확률은 0.000001% 라 하더라도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표에 도달하려는 수많은 시도는 우리에게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의도해서 성공한 것보다 의도한 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서 성공을 이루는 과정이 더 많기 때문이다.
비단 이러한 인내의 효과는 과학적 발견이나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영화에서와 같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의 관계에서 서로의 맞지 않는 부분때문에 서로 상처받고 자신이 손해보면서 살아간다고 믿으면서 자신은 참을만큼 참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항상 상대방은 피의자이고 나는 피해자라는 구도이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의 강론에서 이런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하셨다.
"두개의 서로 이가 맞지 않는 빨래판이 딱 달라붙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정답은 서로가 맞을 때까지 소리내어 갈리고 부딪치고 닳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픔과 고통의 관계 안에서 어려운 상황이 다가오면 그리고 그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인간은 자신이 드러내기 싫은 본성을 들어내기 마련이다. 그 본성이 나쁘다 좋다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숨겨오던 그 본성은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방을 비이성적으로 상처주기 마련이다.
그러한 과정을 인내의 과정으로 비유한다면 위기의 순간까지 서로 겪어봐야 서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필요한지 알 수 있게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연인들도 이별의 순간엔 서로가 보지 못했던 모습에 실망하고 그 실망이 인내로 견디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그 순간의 반복과 기억으로 이별을 고하는 것이 쉬울 것이다.
그래서
인내의 열매가 값진 이유는 인내가 요구되는 순간에 서로가 피해야할, 보지 말아야 하는 본성을 서로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은 얼마든지 척하면서 살 수 있지만 그 인내의 순간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본성을 알았지만 그 본성마저도 이해하고 적이 아닌 나와 같은 마음으로 믿어주고 다가갈 때만 그 달콤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 어떤 과일도 햇볕에 익어가기 전에 과육은 쓴맛을 가진다. 욕심에 인내하지 못하고 그 열매를 따서 먹으려고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대했던 달콤함이 아닌 쓴 맛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인내는 기다림이나 무조건 참아야 하는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아닌 나에게 더 달콤함을 주려는 햇살과 같은 존재이다. 어떤 과정도 씨앗이 바로 과일을 맺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인내는 기다림이나 견딤이 아닌 과정이고 필요한 과정이다. 짐같고 없으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면 인생의 과정이 힘들어도 해볼만한 용기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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