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3, 2012

마가렛 (2011) - 성장하지 못한 자아의 정의감

Leave a Comment
화  마가렛 (Margaret, 2011) 은 매우 단순한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성장하는 한 소녀(리사 코헨)의 성장통으로 마무리되는 아주 간단한 구조의 영화이다. 좋은 영화인지 추천하냐고 물어본다면 영화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갈등과 아픔에 대해서 고민하고 싶지 않다면, 그리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꼭 보라고 얘기하지 않을, 아니 오히려 보지 않을 것을 권유하고 싶은 영화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개인적인 느낌은 정말 뭔가 제대로 마무리 되지 않은 일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나중에 해결도 안될 것 같고 그리고 내 손에서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별하고 싶다. 첫번째는 ①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영화 도입부의 사고 사건이다.  두번째는 ② 주인공 리사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성장통의 아픔과 자아 갈등의 부분과 세번째는 ③ 사고 때문에 이루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의 갈등으로 구별하고 싶다.

▨ 영화의 시작 → 리사는 17살 고등학생이다. 남들과 별로 달라 보일 것 없는 평범한 학생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소녀이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듯이 분명 성장통을 가지고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그 날에도 리사는 평범한 날이라고 생각했고 사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사고의 시작 → 리사는 우연히 출발하는 버스 기사의 카우보이 모자가 맘에 들었다. 그리고 어떤 이끌림인지 몰라도 그 모자를 어디서 샀는지 알기 위해 닫힌 버스 문 사이로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버스기사는 리사와 눈빛과 손발짓을 보면서 뜻을 알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었고 버스 기사는 운전을 하면서 리사에게 신경이 분산되었다. 리사는 계속 직진하는 버스를 쫓아서 버스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따라갔다. 정신이 분산된 버스기사는 사거리에서 빨간불 신호등을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가려는 한 중년의 여자 보행자를 심하게 치고 말았다. 피해 여성은 버스에 하반신이 깔리면서 아주 심하게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로 인해 과다출혈로 거리에서 바로 죽고 말았다. 마지막 죽는 순간 리사와 짧은 이야기를 남기고 삶을 마감하게 된다. 

▨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보충 내용 → 버스기사(제이슨)는 등하교 시간에 버스를 이용하는 리사와 얼굴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였고 조금은 애매하지만 버스를 세우려는 목적이 자신이 타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이 맘에 드는 카우보이 모자에 대해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버스기사는 분명 리사에 의해 신경을 쓰이게 되었고 이에 대한 인과관계에 의해서 신호등을 놓친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 부분이 누구의 잘못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의 진위여부는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잠깐 언급만 하고 넘어가고 싶다. 


사건은 이렇게 진행되고 버스기사의 도의적인 과실치사는 인정되지만 리사가 현장에서 경찰에 "파란불 (green)"이었음을 진술하였기에 버스기사는 살인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점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한 리사에게 맞춰지고 리사는 학교의 토론 과정과 가족 안에서의 모습 등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와 자아에 반하는(against ego) 대상에 대한 구별을 강하게 하면서 그 반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거부감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다양한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흑이 아니면 백이 되는 극단적인 선택의 명확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죄책감과 더불어 커져가는 스스로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그 감정에 의해 생겨나는 정의감도 커지게 되고 자신이 목격한, 그리고 스스로의 죄책감 안에서는 자신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중년 여성의 죽음에 대해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에게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오히려 자신의 과실이 입증될 수 있는 상황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버스기사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피해자의 딸과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한다. 경찰에서도 마무리된 사건을 리사는 다시 조사하게 하고 이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가족과 변호사를 통해서 버스기사가 책임을 지도록 무단히 노력한다. 죄책감에 이어지는 정의감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책감은 최대한 들어내지 않으며 정의감에 불타 점점 리사의 행동은 정의감을 넘어서 맹목적인 행동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버스 노동조합이 피해자와 돈으로 합의를 보기로 이야기 되지만 그또한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리사는 피해자의 가족(딸)에게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느껴지는 느낌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정의'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안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순간 우리가 뜻하지 않은 다양한 경우에 있어서 정말 정의로운 해결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었다. 즉, 모든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 문제였고, 누가 문제였으며 (문제의 원인)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가 정의로운가 그리고 그 정의가 정말 누구나 다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에 속하는가에 대한 아주 간단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번째는 정의를 이야기하는 주체가 어떤 자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때로는 억지스럽고 때로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리사와 같이 자아에게 정의감이란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든 씻어내고 싶은 도구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정의로운가는 생각하는 주체의 자아의 이성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감성적인 감정의 상태에 따라서 같은 상황에서도 정의롭다, 정의롭지 못하다의 판단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상당 부분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고 때로는 상당한 불쾌감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의'를 떠올릴 때 항상 객관적이고 모든 사람들의 논리에 맞을 것이라는 그 단어가 가지는 느낌과 다르게 세상에 정의란 오히려 상당히 주관적 대상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주관적 정의의 다양성은 결국 우리가 가진 아주 위대한 발명품인 '법'의 한계성을 구체적이지 않지만 동감할 수 있는 한 단편이 될 수 있다.

세번째로 떠오른 주제는 바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이다. 누구나 자아는 존재하고 그 자아는 너무도 당연한 대상이기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만약 내 안에 자라는 또다른 나의 다른 객체(오브제; objet)라고 생각을 한다면 내 안의 자아가 성장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장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자라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성장의 결과는 성숙한 자아이다. 영화를 통해 역설적으로 성장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를 할 수 있었다. 리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순수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의 다양한 관계의 스펙트럼을 받아들이지 못하지 못하는 것이 자아의 성장통이 아닐까.

영화 안에서 리사의 모습은 성장하지 못한 자아가 흑백의 정의감에 의해서 타인에 대한 적절한 배려, 절제와 인내가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감정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게 된다. 영화 안에서 리사는 버스기사의 해고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거의 맹목적으로 감정적으로 주장하며 주변 사람들을 보편적인 논리가 아닌 자신만의 주관적인 논리와 감정적인 반응으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간다. 그래서 성장이란 성장통을 어떻게 적절하게 견딜지에 대한 연습이 없다면 혹은 그 시절에 상처를 받게 되면 자신의 인내에 한계가 생기고 그러한 상처와 아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그 성장통의 아픔을 주변으로 전파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리사는 문학시간에 Spring and fall 이라는 시를 듣게 된다. 많은 생각과 자아의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어쩌면 시인도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Spring and fall by Gerald Manley Hopkins

To a young child

Margaret, are you grieving
Over Goldengrove unleaving?
Leaves, like the things of man, you
With your fresh thoughts care for, can you?
Ah! as the heart grows older
It will come to such sights colder
By and by, nor spare a sigh
Though worlds of wanwood leafmeal lie;
And yet you will weep know why.
Now no matter, child, the name:
Sorrow’s springs are the same.
Nor mouth had, no nor mind, expressed
What heart heard of, ghost guessed:
It is the blight man was born for,
It is Margaret you mourn for.

어느 아이에게

마가렛, 슬퍼하고 있니
금빛두른 낙엽을 보면서 슬퍼하니?
마치 사람의 일인 것처럼, 넌
처음의 마음으로 봐줄 수 있을까, 너는?
아! 마음이 늙어갈수록
그러한 광경도 무덤덤하게 되어.
조금씩 조금씩, 탄식조차도 하지 않는다.
부서진 낙엽으로 가득한 세상이 드리워진다 해도;
넌 여전히 슬퍼하겠지. 이유도 알겠지.
아이야, 이름이야 상관  없다
고난의 봄이란 다 한가지인 것을
입으로도 마음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가슴이 듣는 것은, 유령이라면 모를까:
황폐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이지,
마가렛 너가 슬퍼하는 이유이지.

많은 자아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자아들이 모두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세상에는 수많은 성장하지 못한 정의감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주는 기회가 많아지는 세상 속에서는 성장하려는 또다른 자아들은 또 다시 상처받게 되고 그 성장의 기회는 조금씩 희미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에서 나온 것처럼 슬픔은 아무 이유없이 슬퍼해야하는 존재에도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되어버린다면 슬픈 사회, 금빛 두른 낙엽이라도 결국 부스러져 사라져 버리는 존재뿐인 사회가 되어버릴지 모른다.


영화 속에는 주연보다 더 유명한 까매오 출연들이 나온다. 맷 데이먼, 장 르노 영화는 거의 4시간에 가까운 시간으로 제작되었지만 줄이고 줄여서 2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나왔다고 한다. 자아의 복잡한 갈등을 보여주는데 수많은 에피소드를 보여줘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는 측면에서 4시간도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순간 순간 리사의 행동들은 강도있게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추천하냐고 물어보면 바로 그렇다 얘기하지 못할 것 같다. 끝부분에 가서 선생님(맷 데이먼)에게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낙태했다는 거짓말을 하는 순간에서 성장하지 못한 자아는 자신의 자아마저도 학대할 수 있다는 마지막 느낌을 얘기하면서 영화의 리뷰를 마치고 싶다.

0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