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림픽이나 국제 경기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이 우승하거나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인 것 같지만 많은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스포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몇몇 지인들과 탁구를 치거나 날씨가 좋으면 테니스를 치기는 하지만 특히 스포츠 관람에는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니 사실 전혀 느끼지 못한다. 관람을 하면서 열광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에게는 스포츠에 전혀 열정은 커녕 어떤 구단에 어떤 선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유명 야구 선수와 식사를 같이 하게 되는 기회에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으니 스포츠에 대한 무관심을 넘어선 무시는 거의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선수들이 국제경기에 나가서 특히 시즌같은 월드컵 경기에서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해서 이기면 당연히 좋지만 그렇다고 승패에 따라서 나의 기분이 변화하는 그런 일은 별로 없다. 심지어 지인들끼리 모여 승패에 대한 내기를 하면 항상 지는 쪽에 내기를 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기면 돈은 잃지만 우리나라가 이겨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지는 경우 최소한 내기에서 이겨 경제적 이득으로 기분도 빨리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스포츠 무관심자에게도 김연아 선수의 국제빙상경기연맹 (ISU) 의 2013년 우승 모습은 그 어느때와 다르게 '와! 정말 예술이구나!' 라는 마음 속 공감을 얻어낸 정말 신의 경지에 이르는 경기였다. 부끄러워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아무리 김연아 경기라고 하더라도 생중계를 보더라도 중간에 졸거나 전체 경기를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때와 같이 김연아 선수의 우승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뭉클함을 선사해주었다. 개인적으로 김연아 선수가 뜨기 시작하고 어려운 고등학교 시절에 부각되면서 항상 이야기하던 주제가 있었다. 그냥 김연아 선수가 불쌍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항상 라이벌 선수인 일본, 미국 선수들과 비교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훈련했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김연아 선수의 명성을 이용해 상업적 접근이 많아질 것이라는 점이 가장 우려되었던 것이다. 사실 당연한 과정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상은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뭐 어떻냐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스타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오히려 특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질문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정말 스포츠 강국인가? 그 이전에 스포츠 강국이란 어떤 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할 것 같다. 김연아 선수를 배출한 우리나라, 조금 더 좁히자면 우리나라 민족, 대한민국 사람의 한사람으로 김연아 선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체가 피겨스케이트 강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그 누가 보아도 어색하다. 조금은 질문을 바꾸어 스포츠 강국에는 어떤 나라들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요즘 올림픽에서 뜨고 있는 중국... 올림픽의 성격이 한 국가의 평균 스포츠 능력을 가진 대표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최상위 선수들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성적이 좋다는 것이 지표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스포츠 강국이라기 보다는 스포츠 엘리트 보유국이 더 어울리고 그렇기 위해서는 인구가 분명 가장 큰 요소가 될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는 중국이라 한번도 고등수학을 배우지 않고도 미적분학을 고산지대 마을의 자연을 보며 터득하는 사람들도 나오는데 농담삼아 태어나자 마자 꽁꽁 언 호수에서 트리플악셀을 하는 중국아이도 있을지 모른다.
2000년대 중반 싱가포르에서 있을 때 싱가포르 친구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you also do play badminton well? - 너도 배드민턴 잘하니?" 너도...? 라는 말이 유독 들려 다시 물어보았다. "what do you mean 'also'? - 너도 라는게 무슨 말이야?" 오래전부터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쪽은 배드민턴이 상당한 인기 종목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한국 배드민턴 선수들을 열거하면서 그 중 몇몇 선수들은 동남아 쪽에서 유명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에서 이처럼 잘하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 정도면 어린시절부터 배드민턴이 마치 생활체육처럼 모든 학생들이 학교엣 정규 수업을 하여서 이미 한국에는 배드민턴은 대중화가 된 종목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주말에 시간내어 같이 갔던 지역주민 체육 시설에는 실내 배드민턴 경기장이 마련되어 있고 배드민턴이라고는 어린 시절 동네 흙바닥에서 엄마랑 그물(네트)도 없이 내리꽂는 스매싱만 하던 파행적 배드민턴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에 실제 코트에서의 경기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싱가포르의 다목적 체육관 - 지역단위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체육시설 |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배드민턴 고수일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졌던 싱가포르 친구는 더이상 배드민턴을 권하지 않았고 그 이후 우리나라 스포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스포츠 선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사람들을 통해 미디어를 통해 알아보았다. 꼭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스포츠 스타가 만들어지는 토양은 크게 두개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인 재능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과 재능이 발휘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즉, 재능과 기회이다. 남미의 빈민촌에서는 아이들이 상상하기 쉬운 성공은 축구 선수가 되어서 억대 연봉을 받아 잘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축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도 많은 아이들이 모여 축구라는 꿈을 통해서 만들어진 흥미로운 경우의 대중화이다. 어느정도 생활수준이 갖추어진 경우, 예를 들어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경우에는 특별히 출세를 위해 축구가 아니라도 다양한 경로가 있지만 학교나 공동체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다양한 경험으로 자신의 재능을 찾아내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국가나 지역 사회가 생활 체육으로 장려한 다양한 기회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아서 유명한 선수가 될수도 있다. 대중화의 성격과 동기도 다르고 여건과 환경도 다르지만 일단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스포츠를 직접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즉, 대중화란 조개 속 숨은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서 수많은 조개를 다 열어서 확인하는 과정으로 비유하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대중화는 재능을 기회로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최상품의 다이아몬드만 찾아내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자본이 넉넉하다면 좋은 다이아몬드만 사들일 수 있지만 광산에서 좋은 다이아몬드만 찾는 방법은 없다. 이말은 최상품 다이아몬드 1개를 찾아냈다면 그 아래 단계의 다이아몬드 5개, 나쁜 품질의 다이아몬드 15개... 그런식으로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를 보면서 느낀 첫번째는 입이 딱 벌어지는 예술적 경기에 대한 감탄과 경외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느낀 것은 분명 김연아 선수는 참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나 미국 선수들은 두명, 세명 그리고 대회마다 바뀌는 선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선보이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김연아 선수는 이미 정상의 위치에서 사람들의 기대에 실망시키기 않기 위한 외로운 투쟁을 하는 투사같다는 생각같았다. 다이아몬드에 비유하자면 분명 김연아 선수는 최상품 중 유명 경매장에서도 최고가의 상품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래 등급의 다이아몬드가 그냥 사암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은 이런 값비싼 최고품의 정상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그 아래 등급의 다이아몬드를 가치를 절하하고 버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비유를 통해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연히 발견된 최고의 다이아몬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화려한 삶을 살지는 못한다. 물론 다이아몬드와 같은 무생물에게 삶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지만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동반되어야 하고 정작 다이아몬드가 가져야 하는 본연의 가치는 상관없이 항상 불안으로 어느 금고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더 길것이다. 만약 내가 그 다이아몬드라면 그런 삶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지 모른다. 인간의 가치로 평가해서 조금은... 아니 상당히 저렴한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반지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며 항상 사랑을 기억해주는 역할을 하며 인간과 더불어 그 삶 안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개념은 가치와 가격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그 흔한 착각은 가격이 높은 것이 가치가 높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가격이 싼 다이아몬드, 아니 다이아몬드가 아닌 흔한 지르코늄 큐빅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희노애락을 주는 의미있는 가치를 선사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상품의 다이아몬드일수록, 그리고 일찍 발견될 수록 항상 보호되어져야 하고, 사람들에게 탐욕의 대상이 되기가 더 쉬워지는 것은 안타갑지만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되어버린 것 같다.
세상에 최고품의 다이아몬드만 존재한다면 우리 삶에 의미있는 가치가 되어주기 어렵다. 다이아몬드가 가치있는 이유는 비싸기 때문이 아니라 중요한 순간, 인간에게 그래도 의미를 새기기 위해서 변치 않는 무엇인가를 위한 상징적 의미로 쓰기 위해 대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중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그렇게 대중적이지 않지만 수요가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대중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포츠의 이야기로 다시 넘어오자. 만약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해당 스포츠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존재한다면, 조금은 재미있는 억지이지만 어느정도 컴퓨터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컴퓨터를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면 아마도 지구상의 자원은 좀더 효율적으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낭비는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피겨 스케이트를 위해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진 김연아만이 우리나라의 모든 피겨 시설을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재정 문제는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피겨의 목적, 넓은 의미로 스포츠의 목적은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연아 선수가 트리플악셀을 한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트리플악셀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냉정하게 스포츠가 가지는 개인적 성취 영역과 국가적 성취 영역을 조금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 성취 영역과 국가적 성취 영역을 논하기 전에 항상 김연아 선수의 경기 이후 나오는 이야기 먼저 생각해보자. 김연아 선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불쌍한 (개인적으로 볼때...) 사람이 바로 아사다 마오이다. 사실 아사다 마오가 이제는 김연아 선수와 1,2위를 다투는 그런 상대라고 보이지는 않는데도 경기가 끝나고 인터넷의 어느 구석에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계속 반복해서 올라온다. 바로 아사다 마오가 훈련해온 환경과 투자를 이야기하며 김연아 선수와 비교한다. 그리고 결론은 김연아 선수 욕하지 마라! 이정도 해서 저정도 했는데 도와주지 못할망정...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앞서 얘기했지만 김연아 선수가 트리플악셀을 했다고 해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트리플악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한것처럼 기쁘고 감동적인 것도 사실이다. 한동안은 그것은 내가 김연아 선수와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더 감동하고 자신이 한것처럼 눈물흘리는 외국 사람들도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느끼고 김연아의 빙상 연기는 이미 대한민국의 자산이 아니라 세계인의 가슴을 위한 자산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김연아 선수가 훈련보다 광고에 나와야 하는 현실이 안타가웠고 대학 생활동안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것을 찾아가며 사람들이 가지는 교직 이수에 대한 의혹 등 그런 세간의 관심에 초연하기 쉽지 않은 자연인 김연아가 아닌 너무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버려 남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 사회적 기준을 적용받아야 하는 것이 참 안타가웠다. 특히 그런 것에 대한 감수성이 더 높은 어린 나이인데도 이미 세상에 나온 최고가의 물방울 다이아몬드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 선수에게 자신의 재능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엄청난 가치가 존재하는 무대이다. 그리고 국가가 그런 김연아 선수를 포함해 피겨를 도전하고 싶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 투자를 해야하는 이유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김연아 선수가 선사해준 감동으로 모든 것이 다 대변될 것이다. 대학이 장학금을 주는 이유는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클럽가서 놀라고 주는 돈이 아니다. 조금 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불필요한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 하라는 의미이다.
국가가 스포츠를 장려하는 목적은 변질되어서는 안된다. 김연아 선수를 통해서 국가가 얻을 수 있는 성취 영역은 냉정하게 말하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국가가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스포츠에 투자를 한다면 그 스포츠는 국민들이 스포츠를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스포츠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멍청한 발상이 목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항상 1위 2위를 다투던 구 소비에트연방에 프랑스의 외신기자가 인터뷰를 하는데 "국가가 올림픽에서 우승했는데 소감이 어떤가...?" 라는 질문에 소박한 어떤 농촌의 러시아 할머니는 "올림픽 종목 중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단 한개도 없는데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즉, 스포츠가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게 된다면 스포츠가 가지는 그 순수한 의미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없을 것이다.
즐거움의 복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포츠는 대중화가 될 때, 그 스포츠를 생활처럼 즐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의 즐거움이 되고, 스포츠가 가지는 다양한 가치가 만들어진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대중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스포츠가 엘리트화 되면 스포츠도 빈부격차에 이해 기회의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자신의 아이가 재능이 있어도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라면 쉽게 할 수 없고 그렇다면 그 조차도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엘리트 체육에 중심을 두어 대한민국 선수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몇명이 우승하는가만 관심있다면 점점 엘리트 체육으로 진행할 것이다. 엘리트 체육의 가장 큰 단점은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을 확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가받는 순간의 재능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쉽다. 재능은 타고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 재능을 계속 다듬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스포츠는 일단 개인의 능력과 여건으로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어 경쟁하게 해서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그러한 엘리트 체육은 스포츠는 하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라는 인식만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축구를 살펴보자. 축구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편이 지면 광분하거나 자신의 모든 기분을 망치는 사람들도 있다.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라 때로는 스트레스의 대상이 된다. 스포츠가 가지는 인생의 축소판같은 희노애락 그리고 개인적 성취 영역으로 보면, 선수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직업으로 자신의 재능을 다른 이들에게 가치를 선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훌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영국 친구와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about 98% certainly, no hooligan plays soccer with pleasure ever"
- 아마도 거의 확신하건데, 훌리건은 즐겁게 축구를 해본적이 없을거야"
만약 축구가 가지는 가치를 안다면 승리까지 가는 여정에는 패배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 조차도 더 큰 승리를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즐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스포츠의 대중화 없이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 이기는 전사를 만들어내기 위해 스포츠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전사는 싸워서 이길지 몰라도 그 상처는 개인의 상처이다. 그렇게 개개인의 희생과 상처를 통해서 국가가 스포츠 강국이 된다고 해도 재능있는 개인은 지쳐 쓰려질때까지 싸워야 하고 나머지 국민들은 전사를 바라보는 원형극장의 관객으로 둔다면 스포츠는 조금씩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잔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두렵다. 원형극장의 관객들이 흥분하는 이유는 그들은 단 한번도 글레디에이터(검투사)가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김연아가 피겨의 여왕이 되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안타가웠던 것은 어쩌면 우리는 피겨가 한 개인의 재능으로 얼마나 아름다움을 선사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피겨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관심보다 김연아라는 스포츠 스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검투사에 대한 상당한 인기와 명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극장의 검투 경기가 스포츠라고 부르기 힘든 것은 아마도 관객이 언젠가 참여해서 그 스포츠를 해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투사들이 느끼는 그 생존의 치열함, 아픔, 상처를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 사람들은 김연아의 우승과 그 영광만큼 그 과정의 고통, 아픔, 상처 그 모든 것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우선 그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뒤의 과정의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피겨라는 것이 어떤 스포츠인지에 대한 이해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피겨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생활체육회 |
단순히 아사다 마오와 비교하며, 스포츠에 대한 투자 그리고 한 선수를 만들어내는 과정에만 너무 집중한다.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스포츠의 대중화없이 정말 그런 투자가 쉬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은 결코 검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검투사가 사라져도 또다른 검투사를 기다릴 뿐이다. 그 안에서 쓰러진 검투사 개인에 대한 연민, 이해는 힘들 뿐이다. 우리가 스포츠 강국이라고 부르기 전에 비록 위대한 스포츠 스타 하나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만드는 투자에 국가가 소흘해서는 안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같은 돈이라도 스포츠 엘리트를 위한 투자는 검투사를 만들 수 있지만, 스포츠 대중화를 위한 투자는 스포츠가 가지는 가치를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대중화는 결국 사회적 규모의 투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죽음과 상처만이 가득한 원형극장을 즐거움이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국가적 시스템 차원에서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국가를 만들고 스포츠 강국을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스포츠의 대중화는 바로 즐거움을 위한 국가 복지의 다른 이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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