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CCTV 를 통해 관찰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CCTV 에 찍혀서 우리의 사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보여진다는 것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가 그 피해자가 되었을 때에 대한 생각보다는 화면을 통해 지켜보고 있는 관찰자로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인지의 한계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자신은 해당사항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익숙함과 친숙함에 둘러쌓인 하나의 부화하기 전 고치와 같은 것이다. 고치를 뚫고 나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나비로 살아가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고치로 살아가는 그 익숙한 삶에 남으려는 것도 무엇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 나비, 시인, 그리고 여자 - 영원을 꿈꾸는 이들의 사랑의 이상, 툴슈를 사랑한다는 것은 中 아지즈 네신 著) 종교적, 역사적 사건의 부활을 떠나 부활은 우리가 익숙하고 보호받고 싶은 것들에 대해 뚫고 나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리고 나비로 살아가는 삶이 꼭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어떤 이가 주지 못하는 평화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우리가 CCTV 의 관찰자에 익숙해져 CCTV 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의 둘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를 인지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치에서 뚫고 나와 나비가 되어야지만 내가 있던 고치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외형이었는지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 다음 주는 항상 사도 토마스의 불신에 대한 복음이 전해진다. 사도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믿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찾아나섰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복음을 읽는 우리들은 결국 사도 토마스도, 예수님도 아닌 관찰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CCTV 화면에 나온 하나의 사건처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믿어야 한다.", "왜 믿지 못하느냐..." 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나비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힘든 과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경험하지 않은 또다른 고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왜 믿지 않는가" 에 대해 이야기한다. 믿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과 아픔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믿음을 위해 노력한 토마스의 요구만큼 시선이 머무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상처를 아낌없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어떤 이유인지 상관없이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상처가 다른 이들에게는 쉬운 가쉽거리와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소재가 되어 돌아오는 경험이라도 한다면 상처는 비록 더 악화된다 해도 쉽게 보여주지 못하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상처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이기 때문일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시고 자신의 상처까지도 누구에게든 청하면 보여줄 자신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 아물어 이제는 흉터만 남아있는 그 못자욱이 다른 이들에게 필요하다면 그 상처마저도 아낌없이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이다.
인간이기에 그런 상처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너무도 힘들 때가 많다.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고 쉽게 상처가 무엇인지 요구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질 때도 많아진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아프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쯤 예수님과 같은 다 아물어 누군가에게 보여줘도, 오히려 그 상처가 누군가에게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는 상처를 통해 아프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은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고민해야하고 그 고민의 과정은 마치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를 뚫고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그 수많은 고민과 고난들의 과정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비가 되기 위해 고치 안에서 꿈틀거리는 존재에게 비치는 햇살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의 실루엣을 보여줄 것이다. 토마스 사도에게 예수님의 못자욱은 그런 세상의 실루엣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이제까지 믿음에 대한 강요로 "믿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던 고치 안에서만의 외침에서 벗어나 나비가 되기까지 필요했던 상처도 결국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그 작은 실루엣을 따라가고 싶어진다. 매일이... 매시간이... 매 순간이 그 실루엣을 따라 가는 그 긴 과정이라는 것이 힘든 한숨도 만들지만 지치지 않을 용기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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