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pril 14, 2013

언론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는가 - 시선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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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가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그린 영화 지슬의 오멸 감독님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했던 짧은 이야기 중에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치며 호기심에 바라보는 제주도 올레길에 있는 어떤 집을 볼때 잠시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그저 호기심에 한번 살펴보고 가는 것이지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것이고 그런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100명이라면 100번 자신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주거 문화의 새로운 시선을 선사해주었던 '땅콩집' 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관심으로 찾아왔고 땅콩집을 소개한 건축가의 부인은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생활의 힘든 부분도 있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통제 가능한 시선에 대해서... 

호기심과 관심으로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의도하지 않게 우리는 개인의 작은 시선 하나하나가 모여서 누군가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양의 시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보통의 삶에서 누군가 나에게 관심의 시선을 준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타인의 관심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 구조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또한 상당한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모두 화장하지 않은 피부와 제대로 입지 않고 아마도 패션이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세상의 다양한 패션과 유행 그리고 같은 기능을 하지만 다양한 디자인을 가진 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당 부분 많은 시선들에 민감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런데 우리가 가질 수 있고 통제 가능한 시선은 우리의 시선 뿐이다. 혹시 누군가 타인의 의식과 행동을 원격으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시선만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시선은 우리의 것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시선에 온전한 주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올레길에 관광을 온 관광객이나 땅콩집을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우연히 올레길에 거주하는 제주도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고 해도, 땅콩집에 사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과 같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 그곳에 사는 당사자들에게는 수많은 시선들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가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그들에게도 개인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곳에 있다면 나또한 그곳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무르게 될 것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곳이 유명하다 혹은 우리의 시선을 끌만한 무엇인가 대중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시선은 우연히 머무는 공간의 한 축이 될 수 있지만, 올레길이나 땅콩집과 같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서 시선의 집중도가 변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 

현대 물리학이 많이 연구되고 이제는 소립자 물리학과 우주론도 대규모 실험 장비에 의해서 그 비밀이 하나 하나 풀리고 있는 현대에서도 여전히 흥미로운 주제가 하나가 있다. 바로 '라플라스의 도깨비'라는 개념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현재의 모든 입자들 (질량체) 의 위치를 알고 있고 그 위치에서의 운동량 (운동량이기 때문에 벡터이며 방향을 가진다) 을 알고 있다면 고전 역학의 법칙에 의해서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보와 법칙을 알고 있는 존재가 바로 라플라스의 도깨비이다. 라플라스의 도깨비는 상당히 이상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사실 인간이 어려운 것은 정보와 법칙을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측이 어려운 것이지 이에 필요한 조건들을 충족시킨 상태라면 예측이 어렵지 않다는 결정론적 입장이다. 

만약 어떤 물체가 지표면으로부터 2m 위 공중에 떠 있는 상태를 목격했다면 (시선) 그 시선의 관심 대상인 물체가 다음에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 더 좁은 표현으로 중력에 의해서 물체는 지표면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현재 물체가 가지는 위치와 해당 물체에 적용가능한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후의 물체를 예측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을 적용하지 않아도 이에 대해서 발생할 수 있는 예외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물체는 자성체였고 주변에는 중력보다 강한 자기력장이 존재하고 있었거나 한다면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처럼 지표면에 떨어질 것이 아닌 다른 미래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결정론적 측면에서도 우리는 물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그에 따른 생각하지 못한 법칙이 있었을 뿐 그 정보와 법칙이 충분히 고려된다면 이또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주 간단한 예이지만 간단한 상황조차도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보와 법칙을 모르기 때문인지 (lack of information & principles) 아니면 원래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구조의 세상에서 사는 것인지 (structural error of prediction) 인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자면 미래는 확률론적 미래이고 이러한 미래에 대한 비결정론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슈뢰딩거의 고양이일 것이다. 영화 왓치맨(Watchmen; 2009) 에 나오는 닥터 맨하튼은 모든 정보와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기도 하고 (고전 물리학의 영역) 광자 이상의 속도로 여행할 수 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현대 물리학의 영역) 예측이라는 영역은 인간의 영역은 아니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려는 수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측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가능한 많은 정보들을 얻을려고 하고 그에 관련된 법칙들을 터득하려고 한다. 인간의 행동에 관련된 영역이라면 보통 심리학, 생리학 등의 학문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고 생명에 관련된 분야라면 생물학이나 의학 등 그 대상에 따라서 우리는 그 법칙을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다. 문제는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법칙을 알고 있다면 정말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측면의 질문은 얼마나 정보를 모아야 충분한 것이며, 얼마나 많은 법칙을 알아야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다고 해도 그 중 내가 관심 가지는 대상의 예측에 관련되지 않은 정보는 결국 정보를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쓸데없는 시간만 더 늘릴 것이고 세상에 예외성마저도 포함해서 예측할 수 있는 법칙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들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정보의 다양성 (diversity)와 예외성 (exceptionality) 은 결국 우리가 문제의 복잡성 (complexity) 라고 부르는 요소가 된다. 즉, 어떤 문제를 예측하고자 할때 얼마나 문제를 단순화 시키는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요소를 제거하거나 무시해도 되는 다양성을 줄이는 방법이자 예외적 상황에 대한 통제를 가지고 싶어하는 문제 해결방법이 된다. 간단한 예로 지표면 2m 위에 떠있는 물체에 대해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해당 물체가 자성을 가진 상황이나 그 자성을 이끌 자기력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예외성을 줄여 문제를 간단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다. 

처럼 실제의 현상은 전혀 단순하지 않지만 문제의 해결 혹은 미래의 예측을 위해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은 실제 존재하는 정보의 엔트로피를 무시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엔트로피(entropy)는 열역학 (thermodynamics) 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의 분산된 형태를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엔진 안의 연소된 기체는 엔진의 피스톤을 밀어 내어 실제로 우리가 사용 가능한 운동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아무리 온도가 높다고 해도 핀란드 사우나의 증기열은 기계적 운동 에너지로 변환하기에는 충분한 에너지의 형태가 아니다. 즉, 온도나 압력만으로 우리가 사용가능한 에너지의 형태로 정의할 수 없는데 이때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유용할 수 있는 (utility) 상태도 높기 때문에 에너지가 어떤 식으로 흐를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에너지를 사용하는 사용자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한 정보의 양과 사용 불가능한 예측할 수 없는 다양성이나 예외성의 모든 형태의 양 (엔트로피)를 합산하면 항상 일정하다는 가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태양 에너지를 생각해보자. 태양 에너지는 에너지 자체만으로 고려하면 상당히 유용한 에너지이다. 그러나 해당 에너지를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에너지인 전기 혹은 열 에너지로 변환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높은 에너지라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에너지의 엔트로피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앞에서 설명한 개념으로 치환하자면 우리는 태양 에너지라는 명확하고 상당히 뚜렷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는 법칙도 분명히 존재한다. 즉, 태양 에너지는 에너지의 전달에 있어 복사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고 태양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 혹은 그 자체의 열에너지로 변환하기 위한 물리 법칙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고 있다. 문제는 태양 에너지 자체의 정보는 높은 편으로 상대적으로 엔트로피는 적은 상태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전기 혹은 열 에너지로 변환하는 과정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요구하게 된다. 즉, 전기 에너지로 변환하기 위한 법칙도 알고 있지만 효율적이지 못하거나 예외적인 상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에너지 변환에 있어 효율이 높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 2법칙)은 열효율에 대한 법칙으로 불린다. 


열역학의 영역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별로 상관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반대이다. 앞서 설명한 정보 / 엔트로피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일상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 / 엔트로피의 양에 따라서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아주 사소한 결정, 예를 들어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어디에 투자를 할 것인가와 같은 규모의 모든 결정에는 이러한 정보 /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서 결정의 과정을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쉽게 풀어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상식으로 우리는 우리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결정에 관련있는 많은 내용을 알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내 결정에 중요한 관련이 있는 정보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정보와는 반대로 우리의 결정에 더 큰 복잡성을 줄 수 있는 엔트로피의 내용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 /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서 접근하는 방법은 단순히 정보의 양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줄 수 있다. 

만약 엔트로피의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의사결정권자는 가능한 많은 정보가 결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결정 이후 예측은 실제로 정보의 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 / 엔트로피의 균형이 어느정도인지에 따라서 내가 가지는 결정에 다양성과 예외성이 최소화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 가지는 엔트로피의 내용은 어떤 것들이 존재하는가? 가장 사소해 보이는 오늘 점심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엔트로피의 내용에는 음식 맛이 워낙 좋아서 주인이 쉬고 싶은 날 쉬는 음식점이 있다고 한다면 해당 음식점의 엔트로피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즉,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이라는 정보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항상 엔트로피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엔트로피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 가능한 현명한 대처는 직접 해당 음식점에 전화를 해서 영업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를 결정권자가 통제를 하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양을 줄이고 그만큼 정보의 양을 늘리는 방법을 선택하면 될 것이다. 즉, 우리의 결정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보의 절대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엔트로피는 얼마나 존재하는가에 대한 평가이다. 따라서 정보를 긁어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거해야할 내용(엔트로피)과 꼭 필요한 내용이 무엇인지(정보) 를 확인하는 과정이 더 중요할 것이다. 

시선에 대해 생각하다. 

올레길과 땅콩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바로 앞서 조금은 길게 이야기한 정보 / 엔트로피에 대한 개념을 같이 생각해보자. 우리는 올레길과 땅콩집에 왜 시선을 주는가?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선은 자신의 시선 하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하나의 시선이 정말 우리의 통제와 제어에 의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바라보는가? 다시 표현하자면, 각자의 시선은 각자가 완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조금 다른 표현으로 우리는 정말 바라보고 싶은 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금은 다른 영역으로 넘어와서, 정보 / 엔트로피 의 개념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우리의 결정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나마 제대로 가기를 바란다면 정보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보와 엔트로피를 구별하여 어떤 것을 제거하고,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임을 강조했다. 물론 이 결정 과정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면 정보의 양에 의존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 방향에 맞추어 자원 (시간, 돈 & 인력) 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정보 / 엔트로피 의 구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정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정보가 되고 그 정보는 또한 정보만큼이나 엔트로피도 포함하게 되고 결국 더 많은 정보를 취하려 하면 할 수록 엔트로피도 증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필요한 과정의 반복을 줄이기 위해서 단순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단순화는 내가 다루어야 할 대상이 10 입방미터 (cubic meter) 의 대상이라면,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비록 그 부분이 정보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부분에 대해서 과감하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즉,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을 축소하거나 집중하여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분을 줄이는 작업이다. 일상적 용어로 문제를 단순화, 간략화한다고 할 수 있지만 공학적인 용어는 이를 시스템화 (systemization) 이라고 부른다. 


시스템의 공학적인 정의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 이다.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다. 예를 들어 펀드 투자를 한다고 할 때 어떤 포트폴리오 구성에 따라서 A 에 60% 를 투자하고 20% 는 B 에 투자하는 등의 구성을 가졌다면 우리는 A와 B 가 서로 상충되는 이익구조를 가진다고 해도 A 에 집중하게 된다. 따라서 투자자에게는 A는 시스템이지만 B 또한 투자의 대상인 것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결정을 하려고 하는 문제의 규모는 줄어들게 되고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 (시스템) 에 관련된 정보 / 엔트로피 이외는 과감하게 무시하는 것이 결정의 단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상의 과정을 생각하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시선이 우리의 결정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과정은 우리가 왜 충분히 논리적이고 똑똑한 존재에게도 The Greater Fool 이론이 적용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충분한 정보를 모르고 있거나, 엔트로피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시스템이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이 엉뚱한 곳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기능에 대해서... 

언론의 기능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한 본론을 위해서 서론이 이제까지 길어졌다. 정치적 입장에서 언론이 어떻게 대중의 생각을 조정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노암 촘스키의 Manufacturing Consent (1992)를 통해서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가슴으로는 수긍이 되지만 오히려 머리는 따라가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언론, 미디어이 가지는 기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공감을 하고 그 과정을 공학적, (열)역학적 과정과 비교를 해서 기능을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소설 같이 긴 서론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 사결정 과정은 정보 / 엔트로피 의 균형에 의해서 구성된다. 
  • 보의 양은 늘리고, 엔트로피의 양은 줄이는 것이 원하는 결과를 높은 확률로 이룰 수 있다. 
  • 선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 (시스템)을 정한다. 
  • 사결정은 시스템에 따라서 결정에 영향을 주는 정보 / 엔트로피를 새롭게 구성한다. 

로 요약할 수 있다. 

언론은 시선의 자유도를 감소시킨다. 

언론에서 보여주는 세상은 언론에서 보여주고 싶은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 사주의 이익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면 이에 대해서 보여주지 않는 것 혹은 이를 미화하여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해당 언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질 수 있는 자유도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까지 언론 통제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하나의 기업으로 당연한 부분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특정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금과 같이 다양한 미디어 형태가 존재하는데 언론의 통제가 일부 언론에 의해서 통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즉, 소위 SNS 라고 불리우는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가 존재하는데 아무리 특정 세력으로 옹호하는 언론의 보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반대되는 내용에 대해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특정 언론이 언론의 전체 여론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가장 처음의 서론으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선의 숫자는 단 한개, 우리의 시선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시선을 가질 것인가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시스템이 중요한 것이지, 전체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이 어떤 진실에 의해 돌아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시선을 통해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거론되지 않은 사실 혹은 단순히 SNS 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쉽게 시선을 접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올레길에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제주도 주민과 땅콩집의 주인이 수많은 시선이 신경쓰이는 이유는 바로 시선이 가지는 다양한 시스템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내용과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개인적 내용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서 소위 ‘신경쓰이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은 이러한 시선이 머물 수 있는 대상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관심을 가지기 쉬운 대중적인 대상, 조금은 더 말초적인 내용을 집중시키는 방법 등을 통해서 우리가 시선의 집중이 필요한 대상에서 집중이 필요없어도 되는 대상에 대해서 더욱 시선이 집중되게 한다. 언론은 모든 사실에 대해서 동일한 비중으로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편집권과 편성권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에 어떤 자극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대중적인 작용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시선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의 시선이 언론이 원하는 대상에 머무를 수 있는 확률은 충분히 높힐 수 있다는 점이다. 

런 작용을 요약하자면, 언론은 시선의 통제는 이루기는 어렵지만, 시선의 자유도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대상, 시스템이 어떤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보기를 적게 보여주거나 상대적으로 흥미롭고 짧은 시간에 집중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시선의 자유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3S (Sports, Sex, Screen) 정책을 통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관심을 가지고 분노해야 하는 대상에 둔감하게 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미디어가 다양화되어 주요 언론이 아무리 시선의 자유도를 줄인다고 해도 인터넷 시대에 대체 언론 혹은 미디어를 통해서 충분히 관심의 대상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올레길과 땅콩집을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의 시선도 결국 기본이 되는 정보가 있어야 알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시선을 끌 수 있는 자극적 요소들이 다양화 된다면 그런 환경 속에서 의지를 가지고 다양한 시선의 대상을 찾아 나선다는 것도 어렵다. 즉, 올레길과 땅콩집이 집중이 될 수록 시선의 집중이 되면 될수록 그 주변을 통해 찾아볼만한 관심의 대상도 쉽게 지나칠 수 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인간은 생리학적, 심리학적으로 무한한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적인 행동을 지속하지 못한다. 

우리의 문제 해결과정, 다소 협의적인 범위로 의사결정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측의 안정성을 통해서 자신의 결정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런 과정을 정확히 정량적으로 계량하기는 어렵지만 정보 / 엔트로피의 개념으로 소개했고 앞서 소개한 것처럼 우리는 정보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통제하기 어려운 엔트로피의 양을 줄인 상태의 의사 결정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를 언론의 기능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언론이 제공하는 것은 우리에게 정보가 될 수도 있고, 엔트로피가 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가장 큰 장점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미디어의 공신력(public confidence) 이라는 특징때문에 언론을 엔트로피가 높은 내용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상당히 신뢰하는 정보의 영역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물론 객관적 보도의 과정에서 언론 관계자들의 개인적인 가치관이 반영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지만 우리는 언론의 내용을 주의깊게 듣지 않고 내용을 정보로 받아들인다면 사실 관계를 판단하고 검증하는 모든 과정을 언론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맡긴 결과가 되어버린다. 


러나 여전히 주체적인 인간으로 우리의 행동의 지배자인데 언론의 기능으로 자신의 판단과 상관없는 행동들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언론이 아무리 대중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들의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the Greater Fool 이론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높은 엔트로피, 다시 말해 위험도가 높고 예측 가능성도 낮아 자신의 의사 결정이 제대로 실행되지도 않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인간은 상당히 비 이성적인 행동을 할때가 많다. 이런 과정에서 특별히 엔트로피가 높은 내용을 자신의 의사 결정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문제는 자신의 의사 결정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고려해야하는 시스템을 축소시키거나 혹은 합리적이지 않은 설정으로 자신만의 가상의 시스템을 만든 상태에서 해당 시스템의 호의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불리한 엔트로피는 제외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식 투자에서 손해를 보는 많은 투자자들을 생각해보면 손해 이후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면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요인이 발생했고, 자신이 생각했던 시나리오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여전히 자신이 생각한 대로 움직였다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바로 자신이 생각했던 시나리오는 제대로 된 정보에 근거를 한 내용이 아닌 대부분 상당히 높은 엔트로피를 가지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외성과 다양성을 배제하여 상상으로 엔트로피가 상당히 적은 정보로 가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제 이루어지는 법칙과 다르게 이처럼 높은 엔트로피의 내용을 정보로 가공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공포와 욕망 (Fear & Greed) 로 설명하기 편할 것 같다. 정보와 엔트로피를 근거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어떤 것이 정보인지, 어떤 것이 엔트로피인지를 구별하여 과정에서 우리의 판단은 생각보다 견고하거나 면밀하지 (rigours) 못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언론은 간단하게 이용할 수 있다. 정보 / 엔트로피를 구별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잘 평가하지 않고 자신이 나름대로 만든 근거에서는 상당히 논리적으로 판단했다고 착각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언론은 적절하게 공포와 욕망을 자극시키면 인간으로 가지는 논리적 동물의 자부심을 세워주면서 적절하지 못한 의사결정을 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 보도를 할 때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키는 방법으로 ‘XX를 투자하는 사람들은 향후 어떤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와 같이 상당히 높은 엔트로피의 내용 중 가능한 몇가지만 제시하는 방법이나 ‘YY를 대처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와 같이 잠재적인 위험에 대해서 언급하여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어떻게 언론을 바라볼 것인가? 

언론은 이런 방법으로 충분히 공포와 욕망을 자극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이 순수한 언론의 역할에 의해 대중을 걱정해서 하는 보도인지, 혹은 어떤 숨은 의도를 가지고 보도하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정보 / 엔트로피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순수한 언론의 역할을 다할려고 한다면 정보의 내용을 제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 엔트로피가 높은 내용 중 가능한 일부분 혹은 상당히 제한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알려줄 것이다. 

렇게 의식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언론을 통해서 얻는 내용이 꼭 정보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는 것이다. 즉, 계속 반복해서 설명한 것처럼 언론은 우리에게 정보만큼 상당량의 엔트로피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언론을 받아들이며 언론에 대해서 맹신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언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정해진 정보에 의존하며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보이고 어떤 것이 엔트로피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우선 언론에 대한 맹신적 신뢰는 버려야 할 것이다. 언론의 순수한 기능은 상업적 독립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언론인들 모두 사명감을 가진 상태에서도 상당히 어렵다. 아무리 이상적인 조건을 제시해도 결국 인간의 과정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론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대체 미디어는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소위 SNS 나 개인 미디어, 혹은 상업적 자본에 독립한 미디어를 있다면 이런 매체를 통해서 정보 / 엔트로피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은 이런 방법도 결국 대중화가 된다면 언론과 마찬가지로 엔트로피를 제공하며 정보라고 속이는 현상은 반복되고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서론에서 제시한 명제를 떠올려 본다. 


아무리 우리의 시선이 언론에 의해서 의도된 방향으로 통제될 수 있고 제한된 정보와 왜곡된 엔트로피에 의해서 우리의 의사결정이 불합리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우리의 시선이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잃어버린 시선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우리의 의식으로 되찾아 오는 과정이 없이는 그 어떤 구조적 변화도 소용없는 것이다. 진보의 가치를 믿는 한 개인으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우리가 소속된 사회를 변화시키고 좀 더 좋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시스템이 변화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시선이다. 

의식있는 시선을 가진 구성원을 꿈꾸며... 

결국 정보 / 엔트로피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의 깜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능력은 유전적 능력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면서 배우는 교육과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지식만을 제공하려고 한다면 그만큼 정보와 엔트로피는 혼재되어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용한지에 대한 판단은 결여된 상태로 양만으로 강조될 것이다. 바로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교육 자체의 목적을 떠나서 언론에 대해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는 의식있는 구성원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정보일 수도 있지만 엔트로피일 수 있다는 의식은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가치를 만들 수 있고 이는 내 정보와 엔트로피를 다른 이의 정보와 엔트로피를 비교하며 어떤 해결 방법이 우리가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로 선택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수많은 토론과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한 공론화에 의해 누구든 다양한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언론이 취해야 하는 적극적 태도일 것이다. 


론이 스스로의 특권과 정보력을 믿으며 이를 전달하는 공급자라고 생각한다면 언론은 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언론의 기능은 바로 모든 구성원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언론의 기능 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요즘과 같이 언론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명확하게 구별되어 별도의 영역을 지키는 환경은 아무리 다양한 개인 미디어가 활성화되어도 우리의 시선은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정보와 엔트로피의 구별조차 어려운 더 복잡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결국 우리의 시선이 똑똑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더 다양한 철학과 고민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단시간에 가능한 것이 아닌 어쩌면 다음 세대가 다양한 철학과 사고의 연습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기대해야 할지 모른다. 

최소한 내 시선의 주인이 나라는 자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정보가 엔트로피일 수 있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통해서 깨어 언론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무한 신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충분히 견제하고 깨어 지켜봐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리의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빼앗이기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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