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랬다. 의무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아무런 느낌이 없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면 그 의무는 목적마저 잊어 버리게 된다.
약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는 고정 관념 속에서는 약을 먹는 것은 내가 정상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도 이제는 매일 주사를 찌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할 일이지만 가끔 약을 먹으라고 알려주는 알림 소리는 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라는 잔소리처럼 느껴지고 만다.
그래도 싫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일어나 무엇인가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더 잠자고 싶은 의욕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리고 조금 이른 아침 시간에 글을 쓰거나 필요한 책을 읽고 때로는 멍하니 공상에 잠겨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그래도 아무리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환하여 생각해보아도 약을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 지속가능한 즐거움 ] 무엇이든 지속가능하려면 노력해야 한다. 습관에 의지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지겨운 의무감으로 바뀌어 버린다. 아마도 매일 인터넷을 쓰면서 지속가능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을 쓰는 것이 의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하루에 일정 기간동안 인터넷을 의무적으로 써야 한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일이 되고 힘든 짐이 될지도 모른다.
우연히 개그맨 이동우 씨의 이야기를 라디오에서 듣고 적어 둔 내용이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또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였다. ... "고통 중에 억울함이 큰 고통이다. ... 그 억울함이 가장 나를 짓눌렀고 괴롭혔다. 확실히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란게 있다. 어느정도 버티어 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이 아닐까... "
행복에 대한 그 수많은 명사들의 이야기보다 이처럼 명경(明鏡)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시력이냐고 묻는 질문에 이동우 씨 대답은 이러했다.
"밝은 날엔 아 참 햇살이 좋다. 를 느낄 수 있는 정도..."
누군가에게는 절망에 가까운 그 상황에서도 맑은 햇살을 그 누구보다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생각한다. 내려 놓아야 함과 동시에 나에게 다가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이동우 씨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가슴이 먹먹하지만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뭔가 보물을 얻은 기분이다. 합병증 검사를 위해 안과에서 검사받으러 가던 순간의 두려움이 항상 기억난다. 온 다리에 힘이 풀려 휠체어에 앉아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아직 현실도 아닌 온갖 상상에 원망을 했던 것 같다.
분명 이동우 씨도 오랜동안 아주 오랜동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도 느껴진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을 그저 원망만 하며 그것을 핑계 삼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는 시간은 더욱 더 길어질 것이고 그 원망의 긴 어둠은 더욱 더 길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난 지구의 절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창시한 맑스라는 사람이 바보 같은 게 그렇게 매력 있었어. 도무지 쓸데없는 짓을 했잖아. 자신들이 노동자도 아니면서 노동자들이 왜 저렇게 비참한지를 연구하느다니. 그런 점이 나랑 통할 것만 같았던 거야.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걸 고민하는 게 맘에 들었단 말이야. 사는 건 그런 거라고. 어차피 고통스러운 거라고 돈 많은 엥겔스를 만나서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리스 고전을 논하고, 그 문장의 유려함에 대해서 서로 현학을 겨루기만 했대도 충분히 재미있었을 거 아냐? 충분히 책도 여러 권 쓸 수 있었을 거고 인기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 ... 그들은 마치 예수처럼 말이야. 그들도 바보 같았던 거야. 그러니까 만일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하고 울부짖던 말이 아니었다면, 버림을 받고 있으면서 왜 버리느냐고 울부짖었던 바보 같은 그 말이 아니었다면, 그러니깐 그건 정말 그때까지는 버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말도 되니까. 내가 그를 위선자는 아니었을까 의심할 뻔했던 것처럼 말이야.
공지영 ─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from「고등어」
내게 무엇인가 다가올 때 그것을 의무로 방어할 수도 아니면 내가 감내해야 할 것으로 받아들일 지는 선택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너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원망이란 내게 다가오는 것이 내가 감당할 것이 아니라는 거부와 어쩔 수 없이 의무감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모두 말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좋은 것, 원하는 것들만 누릴 수 있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삶은 꼭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고통과 아픔을 덜어 낼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통과 아픔을 거부한다면 그 고통의 크기는 더 커지고, 아픔의 시간은 더 길어질지 모른다. 때로는 우리가 받아들이고 허락한 그 아픔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단단하게 해주는지 느낄 수 있는 것도 행복일 수 있다고 믿는다.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 그것은 허락할 수 있는 마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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