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그런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되면 하는 질문 하나가 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버스의 속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특별히 조건을 제한하거나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소위 Open boundary Problem 문제로 시작하려 한다. 특별한 정답이 요구되지도 않고 질문자가 원하는 정답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질문을 받는 학생들이 그 질문에 대해 필요하다면 조건을 더하고 그 조건에 맞는 가정과 논리적 전개 모두 다 허용하는 것이다.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해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대답 (bursting answer) 는 익숙하고 이미 그 목적을 위해 개발된 기성품을 이용하는 것을 제시한다.
"스마트폰의 속도계를 이용하거나 GPS 를 이용하면 측정할 수 있습니다!"
사실 가장 정확하고 그다지 나쁜 대답도 아니다. 스마프폰이 익숙하게 손에 잡혀 있는 상황이라면 특별히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끝나면 항상 시시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약간의 경계 조건 (상황) 을 추가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일체를 소지하고 있지 않고 사용할 수 없다면?"
그럼 학생들은 좀 더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대답한다.
"운전석에 가서 속도를 확인합니다!"
문제의 의도에도 벗어나지 않고 사실 첫번째 부여한 제한 조건에 어긋나지도 않는 좋은 대답이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를 물어본 이유는 아니기 때문에 다른 추가 조건을 제시하여 문제를 더 제한한다.
"안타갑게도 운전석의 속도계는 고장이 나서 표시가 안되는 상황입니다."
학생들은 여러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고민의 결과 다양한 대답을 내 놓는다. 물론 정확한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속도라는 우리가 과학을 위해 정의한 변량 (variable quantities) 를 어떻게 얻어낼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한 과정이다. 이런 고민의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대답하기 시작할 것이다.
"일정한 시간에 버스 밖으로 물건을 낙하시켜 떨어진 거리를 측정하여 속도를 알아냅니다."
이 대답을 접하는 순간 많은 학생들은 의문을 가진다. '속도를 알아낸다'는 목적을 위해 꼭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당장 알아내야 한다는 제한 조건은 없지만 많은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제한하는 조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위의 대답을 했던 학생은 '속도를 알아내다' 라는 목적에 집중하여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답이 하나 나오면 그때부터 다양한 대답들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문제를 풀 수 없게 만드는 제한 조건들이 자연스럽게 풀리기 때문이다.
대답과 그 대답이 어떻게 도출 되었는지를 확인하면서 몇가지 오답도 나오게 된다. 혹은 대답이 도출되는 과정에서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조작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버스 밖으로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은 괜찮은데 왜 버스 안에서 물건을 떨어뜨려도 속도를 알아낼 수 없는가이다. 버스 안에서 밖으로 자유 낙하하는 것과 버스 안에서 자유 낙하하는 것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자유 낙하할 경우 자유 낙하하는 물체는 공중에 떠있는데 버스는 앞으로 달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물체는 뒤로 가지 않을까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처럼 아주 단순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통한 질문은 복잡한 많은 대답을 만들어 주고 그 과정에서 자연 과학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 느낌없이 지내던 주변에 대해서 조금 더 주위깊게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해준다.
사실 이 하나의 질문으로 많은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배우는 많은 내용들은 '언어적 정의'에서 시작한다는 사실과 그 언어적 정의가 왜 자연과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먼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로 속도 (velocity) 와 속력 (speed) 의 개념을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단순히 속도는 벡터 (vector) 이고 속력은 스칼라 (scalar) 라고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을 통해서는 단순히 언어의 정의만 알려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속도의 측정이라는 현실적인 도전 과제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속도란 표현은 실제로 속력의 개념이고 그 속력에 방향이 합쳐지면 속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스마트폰에서 말하는 속도계란 실제로는 속력(측정)계가 정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물체를 떨어뜨린다는 생각은 이미 속력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많은 과학 지식들은 우리의 경험과 익숙함 속에 알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어려운 과학 지식도 설명하지 못하는 과학 이론은 없다. 다만 그 설명의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릴 뿐이다. 또한 이를 통해 제시된 질문으로 "왜 버스 안에서 떨어뜨리는 물체는 뒤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다. 많은 경우 버스 안의 공기와 일체가 되어! 와 같은 직관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사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된다. 중요한 점은 상대성 이론을 알아낼 수 있는 과정이라는 점이 아니라 동일한 행동 (물체를 떨어뜨리는 ...) 이지만 왜 다른 결과와 다른 유용성 ─ 버스 밖으로 던질 때는 속도 측정이 가능하지만, 버스 안에서 던질 때는 속도 측정이 안되는 차이 ─ 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두 과정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더 진행된다면 가속도의 개념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버스를 타면서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과정에서 몸의 쏠림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는 버스 안에서 물체를 자유 낙하할 때는 앞에서 바라본 경우와 다른 것인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가속도와 정속도 (가속도 = 0 ) 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과 대답의 과정들은 지식이 많을수록 많은 편견에 쌓이기 쉽다. 순수한 지성의 상태가 지극한 지성의 상태를 더 쉽게 만들어 준다. (a purified intelligent makes sincere intelligent) 순수 지성에 대한 신뢰는 어린 아이라고 지식이 짧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조차도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의 일상과 연결시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게 만든다. 주입식 교육이 지겹고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배우는 지식들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확신도 안들기 때문에 단순히 성적을 매기고 순위를 매기기 위한 하나의 경쟁 도구라는 인식을 가지고 지식은 절대로 인간을 즐겁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교육의 제도와 환경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보다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용하지 않은 체 그런 제도와 환경만 질문한다면 그건 쉽고 빠른 길을 놔두고 가시밭길을 가도록 놔두는 어리석음이 될지 모른다. 교육의 역할은 질문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가능성과 생각을 펼칠 수 있도록 경계가 없는 형태의 질문을 자주 묻는 것이다. 처음부터 제한되고 하나의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제시하고 학생들은 내가 고른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 매번 풀때마다 노심초사해야 하는 긴장 속에서는 지식은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어느 시대나 부조리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처럼 반복되고 부조리하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존의 문제에 놓인 그런 부조리의 시대말이다. 그런데 기성 세대는 후배 세대들에게 적절한 질문과 대답을 통해서 이 시대에 질문에 익숙하고 질문에 어떤 답을 해도 두렵지 않은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만약 후배 세대들이 질문에 겁을 먹고 대답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기성 세대의 잘못이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이 잘못되었다 말하게 된다. 그리고 질문에 익숙하고 다양한 대답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을 거친다면 세대를 걸쳐 우리는 조금씩 진보라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 것이다. 진보가 꼭 나아진다 좋아진다를 뜻하지 않기에 우리가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돌덩이의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해도 올려놔야 하는 언덕의 높이는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너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는 교사들도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학생들은 세상에도 질문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에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의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할 수 있는 학생들이 많아진다면 부조리에 노동자가 죽어가고 자본이 사람을 살인해도 아무렇지 않게 무관심한 사회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시대 우리가 부조리하고 마땅히 고쳐야 하는 인간의 파괴 앞에서 그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교육이 '어떻게 질문하는지 연습하지 못하고 오답과 정답의 구분 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오답이 아닐까 두려움에 떨게 만든...'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만들어 내는 교육은 질문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세상의 잘못에도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세상의 잘못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관심하게 생존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어떤 부모가 그런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살기 원할까?
0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