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4, 2014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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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장례식에 한 남자가 여자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것도 형광색으로...


온 국민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기 때문에 많은 공연들, 문화 행사들이 취소되고 있다. 심지어 계속 진행하려고 했지만 취소를 강요당하는 곳들도 종종 보게 된다. 미디어도 웃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도 조심스럽게 어떤 내용을 전달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람마다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다. 누군가는 슬픔을 잊기 위해 자신의 일에 더욱 더 몰두하기도 하고, 즐거운 음악으로 기분 전환을 해서 그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은 방법으로 슬픔에 대처한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은 결국 타인에 대한 폭력이 된다.

"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슬픈거 맞어? 이처럼 슬픈 상황에서 그런 걸 하고 싶어?" 

그런 이유인지 공연의 내용에 상관없이, 심지어 분위기 때문에 예정대로 잡혀 있던 공연 내용을 변경하여 최대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혹시나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러운 모습들도 보게 된다.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삼일로창고극장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예술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위로 할 수는 있습니다." 

참 멋진 말이다. 우리 모두의 삶이 슬픔에만 잠겨 있다고 슬픔에 대처하는 각자의 모습마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 나와 다른 모습으로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도덕적으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분명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이 더욱 더 빨리 슬픔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대한 폭력이 될 수 밖에 없다.

당연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비록 장례식장에 형광색 여자 복장을 하고 왔지만 장례식 분위기를 망치기 위한 행동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곧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복장을 하고 온 친구는 친한 친구이자 전우였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목숨을 잃은 전우의 장례식에 이런 무례한 복장을 하고 온 이유는 전장에서 전우와 나눈 약속 때문이었다.

"우리 중 누군가 먼저 죽게 되면 상대방의 장례식에 여자 복장을 하고 오자!
그래야 무덤 안에서라도 웃을 수 있지 않겠냐!" 

그리고 친구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슬프지도 않은데 슬픈 척 가식적인 모습보다 이 무례한 복장이 더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여자 복장을 한 친구는 결국 장례식장에서 오열을 하며 먼저 떠나간 친구의, 전우를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 슬펐을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세월호에 갇혀 아직도 찾지 못한 부모에게 가고 싶은데 아직도 부모님의 품에 한번 안기지도 못하고 찾지 못한 학생들, 그리고 누군가에게 가족이고 친구고 ... 누군가에게 누군가였던 실종자들이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이 슬픔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은 다르다. 그 모습마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전체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nation ; 우리는 국가라고 부른다. nation 은 항상 자기의 땅을 갖지 못한 이방인들이 태어난 [natus] 곳을 잊지 않음 [-ion] 을 기억하기 위한 정체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항상 어디에 있어도 기억해야 하는 nation 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국가 (國家) 라고 부른다. 나라도 부족해서 집이란 표현까지 붙여가며 우리가 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느낌까지 준다. 우리가 집밖에서 누군가가 때려 다친다면 가장 먼저 걱정해주고 슬프해줘야 하는 곳은 가족이다.

Will Lammert, Jewish victims of fascism : 파시즘에 의해 희생당한 유태인

그리고 그 슬픔에 가장 먼저 다가와 위로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국가라 부를 수 있는가?" 

슬픔에 대처하는 모습은 모두 다 다르다. 그러나 그 슬픔에 가장 큰 위로와 도움을 주어야 하는 존재는 국가이다. 왜냐면 국가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집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믿고 의지할 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국가가 우리에게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을 강요한다. 자신들의 모습대로 슬픔에 대처하라고... 그리고 그것은 곧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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