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어느 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혼자인 곳에서 갑자기 주인분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급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가셨다. 그 공간은 절대적으로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 들어오셨다. 안을 잠깐 살펴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무엇인가 가득한 가방을 들고 다가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와 함께 작은 종이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 온 학생입니다. 학비마련을 위해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다양한 가격대에 다양한 물건들이 있었지만 카드를 받을 수 없으실 것 같아 현금을 확인해보니 지갑에는 3,000원이 있었다. 가장 작아 보이는 열쇠고리가 얼마인지 물어보니 가방을 잡고 손가락으로 어렵게 셋을 세어 알려주었다. 그래서 "뜨리? 아진 드바 뜨리?" 해서 물어보니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리고는 고르라고 물건들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수작업으로 그린 열쇠고리인듯 했다. 작은 열쇠고리에 채색은 그렇다고 해도 얼굴 모양은 조금 이상한 것들도 있었다.
열개 정도의 열쇠고리 중에서 가장 안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골랐다. 순간 내가 안 이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른다면 다른 누군가는 더 예뻐보이는 열쇠고리를 고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냥 그분을 도와주려고 삼천원을 쓰고 안 쓸려고 그런게 아니라 어딘가 쓸모있게 내가 써줘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열쇠고리 인형은 나와 함께 다니고 있다.
여전히 과장된 눈썹은 삐뚤하고 다소 유머스러운 얼굴도 그대로다. 전자기기 전원 버튼에 붙어 있어 여전히 잘 지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흠있어 보이는 것을 먼저 가지려 한다. 가졌다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예쁘고 안 예쁘고는 내 눈의 환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맘에 들고 예쁜 것을 고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가끔 가장 안 예쁜 것을 고르는 나를 보며 '왜 그런 것을 고르냐고' 타박하는 분들도 계신다.
세상에 같은 존재라고 해도 그 가치와 시선에 따라서 두가지 형태의 존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 가치에 대해서 ─ 기능적 존재 vs. 근본적 존재 ] 어떤 기능을 해야만 존재의 가치가 생기는 경우와 그냥 있는 그대로 어떤 기능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가치를 가지는 경우이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무엇인가 잘 하는 존재로 이득이 될 때 기능적 존재를 잘 설명할 것이고 그냥 누군의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 부모에게는 무엇을 해도 무엇을 하지 못해도 그냥 그대로의 자식으로의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이 근본적 존재로 설명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태어나서 오랜동안 아프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서 어떤 일도 하지 못하고 심지어 누군가의 도움없이 살아갈 수 없다면 기능적 존재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런 존재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삶, 인간의 생명 안에는 그 자체로 근본적 존재 가치를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생명에는 그런 근본적 가치를 가진다.
언제부터인지 잘 알 수 없다. 자본주의 capitalism 가 상식이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자본의 가치가 모든 가치의 척도와 같은 때로는 교환 가능한 가치가 되어버린 어느 시절에는 때로는 근본적 존재 가치마저도 때로는 버릴 수 있는 가치라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어렵지만 어떤 동물의 생명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살릴 수 없음도 그렇게 잔인한 선택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어떤 동물의 생명에게는 애완용 혹은 어떤 이유로 필요한 기능이 있기 때문에 살릴 가치가 있는 생명과 그렇게 하기에는 비용이 많은 생명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소설이자 영화인 오두막 (The Shack) 은 상처입은 어떤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의 자전적 상처를 통해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많은 이들이 평가하지만 오두막을 읽고 나서 상처 혹은 치유에 대해 무엇이다 말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한 존재에 인간은 그렇게도 많은 평가를 내리고 무엇이 더 '좋다'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동들이 결국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짧은 내용을 강하게 보여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매켄지가 동굴에서 여인의 모습을 한 하느님과 만나는 장면을 보면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여인이 매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 중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두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딱 두 명만."
...
"또 당신의 자녀 중에서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갈 세 아이를 선택해야 해요."
결국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판단하는 모습들을 생각하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더 가치있는 자식인지 비교하는 것은 전혀 의미도 없고 그럴수도 없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공감하게 된다. 바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소위 공부를 잘하는 돈을 잘 버는 자식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가끔 책상 위에 놓고 싶은 꽃을 위해 꽃집에 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꽃 - 라넌큘러스 - 을 몇 송이 놓고 그 꽃들이 피어오르는 모습과 떨어지는 꽃잎들을 바라보게 된다. 라넌큘러스는 참 약하다. 꽃이 화사하게 피기 전에는 알갱이 같이 작은 꽃봉오리는 장미처럼 무엇인가 화려하게 필 준비를 하기 보다는 세상에 얼굴을 내밀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고 꽃이 조금이라도 무거워지면 쉽게 휘어지고 꽃대도 자주 꺾여버린다. 꽃이 다 피고 나면 꽃잎은 떨어지거나 색이 변하며 원래 색을 유지하는 시간보다 지는 시간을 더 많이 바라봐야 하고 꽃잎이 많이 떨어진 꽃은 때로는 볼품없는 대머리 독수리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도 좋다. 그래서 꺾어진 꽃대는 휴지로 부목을 대주기도 하고 떨어진 꽃잎들은 모아서 책갈피로 만들어 선물주기도 한다. 손이 많이 가고 아름다운 시간보다 초라해 보이는 시간이 많은 꽃이지만 그래도 그냥 좋다.
그래서 어디에 있게 되어도 항상 동네를 살피며 꽃집을 찾게 된다. 한국에서 꽃집은 조금 다른 느낌이 많았다. 결국 어디나 꽃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지만 그래도 꽃집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언제나처럼 라넌귤러스를 찾으면 처음에는 왜 그런 꽃을 찾을까 싶어하지만 그래도 몇송이 남은 꽃을 건네준다. 그리고 깔끔하고 많은 이들이 좋아할 대중적인 꽃집일수록 항상 정확했다. 한 송이에 얼마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내가 좋아하는 라넌큘러스는 몇송이 없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꺾여 있거나 너무 많이 피어 있는 꽃들은 주지 않으려고 한다. 팔 수 없다고 하면 괜찮다고 가져가겠다고 하면 어떤 가게는 그 팔수 없다고 했던 꽃들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받는다. 어떤 가게는 반값에 그렇게 계산해서 준다. 팔 수 없는 꽃을 가져가겠다고 하니 그냥 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래도 장사니깐 싶어 쉽게 그냥 달라고 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가져오고 나면 기분이 활짝 좋거나 그렇지 않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책상에 놓일 꽃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을 가져보려고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분은 꽃처럼 좋지는 않았다. 어느날 골목길을 지나가다 간판도 오래된 꽃집을 보았다. 잠깐 발길을 돌려 꽃집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보았던 많은 화려하고 화사한 꽃집은 아니였고 그냥 정말 거의 대부분의 공간은 꽃들과 화분에 양보하고 오래된 형광등 불빛은 다소 어둡기까지 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일어나서 무엇을 찾냐고 물어오셨다. 난 역시 라넌큘러스를 찾았다. 아저씨는 다소 놀라시며 몇송이 있긴 한데 핀것도 많고 그래서 많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여섯송이 정도 다양한 색으로 잡고는 간단하게 포장해주셨다. 어짜피 집에 놓을 것이니깐 포장 많이 안해주셔도 된다고 하니 그래도 가는 동안 괜찮게 줄기 끝부분만 잘 포장해주셨다. 그리고 다른 가게에서는 두송이 정도 살수 있는 가격으로 여섯송이를 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전해주신 아저씨의 얼굴이 더 신기했다. 라넌큘러스를 찾는 남자분은 처음보셨다면서 꽃이 꺾어지면 어떻게 하라고 얘기해주시는데 난 휴지로 꽃대를 세운 사진을 보여드리고 이렇게 하고 책갈피도 만들어요. 라고 말하니 아저씨는 정말 화사하게 꽃처럼 웃으시는 것이였다. 그리고 다음에 오면 잘 모아두었다고 주신다고 하셨다.
그 이후에도 몇번 찾아 아저씨 가게에 갔다. 오늘은 세송이 뿐이라며 2,000원만 받으시기도 하고 다른 가게에서 받던 가격을 생각하면 아저씨가 손해보시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사실 그보다 꽃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정말 꽃보다 사람이 더 아름답구나 생각될 때가 많았다. 아저씨는 꽃을 가져가 얼마나 잘 키울지 생각하면 기분좋은 손님이 있고 그렇지 않은 손님이 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아저씨는 꽃을 팔지만 정말 꽃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아지를 분양한다며 강아지를 파는 가게들을 지나갈 때마다 많은 생각들이 든다. 동물을 사랑한다면 저렇게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거나 어떤 강아지가 더 인기가 많다 어떤 품종은 똑똑하다 라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나중에 인류의 생명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인간을 체외 in vitro 에서 임신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인간도 분양이라는 이름으로 선택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꽃을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 해도 강아지 정도는 생명이 아니라고 바라보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꽃 하나 꺾어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안타가워 하는 사람들보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강아지라면 달라질 것이다. 강아지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생명을 다했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며 모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지는 않아도 꽃보다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의 모습만 다를 뿐 다 같은 자연의 생명인데 생명의 사라짐에도 이처럼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생명의 사라짐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이 다르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세월호가 침몰한 2014년 그 해도 분명 봄은 찾아왔었다. 그 때도 벚꽃은 피었었다. 그 해 아직 개화하지 못하고 낙화한 어떤 꽃봉우리를 보았다. 예전 같다면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냥 지나쳤지만 그 해 아직 개화도 못한 낙화를 보고 침몰하는 배안에서 사라진 생명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생명들이 겹치면서 그 꽃마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겹쳐 느껴졌다. 아무리 생명력이 강한 꽃들도 그리 긴 시간을 견디어 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섭리 providence 일지 모른다.
많은 이들은 '사랑'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많은 조건들을 만든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는 것 중에 정말 사랑을 위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워지고 많은 이들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조건으로 가졌고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만약 그 조건이 사라진다면 그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충분히 좋아할만한 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좋아할 수 없어 모두가 다 떠나갈 때도 지켜주는 이가 누구인지 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누구나 화려하게 아름답게 핀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꺾어지고 찢기고 상처난 꽃을 좋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에게 줄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냥 버리는 이들은 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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