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29, 2013

가치에 대해서 ─ 기능적 존재 vs. 근본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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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도덕을 입문할 때 자주 접하는 이야기가 있다. 트롤리 (전차) 운전의 역설 (패러독스) 에 대한 문제이다. 트롤리 운전수 (제어 가능한) 인 당신은 두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전차 라인에는 다섯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고, 다른 쪽 전차 라인에는 한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만약 선택하여 지금 진행하고 있는 라인에서 벗어나 다른 라인으로 가도록 제어하면 다섯명의 생명은 살릴 수 있지만 다른 라인의 한명은 죽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고 실험이기 때문에 현실적 상황을 도입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명을 희생해서 다섯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윤리적인 선택인가?) 를 생각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공리주의 (utilitarianism) 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선택에 대한 다소 상쾌하지 않은 결론에 대한 의문을 남기게 한다. 그 상쾌하지 않은 결론이란 다섯명의 생명은 항상 한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가? 이다. 즉, 더 많은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항상 옳은가이다.

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유명한 사고 실험 (Gedankenexperiment; Thought experiment) 은 이후 Trolleyology (전차운전의 역설) 란 명칭이 붙을 만큼 다양한 문제와 다양한 변형을 통해서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 변형 중에 하나는 재미있는 장기이식 문제이다. 환자 5명이 있는데 모두 다른 장기부전을 가지고 있다. (편의상 신장부전 (renal failure) 는 두명이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환자 5명은 모든 장기가 건강한 뇌사 공여자가 생긴다면 모두 장기 이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의사 앞에 아주 가벼운 감기 환자가 찾아왔다. 그 감기 환자를 의문사가 되어 뇌사자가 된다면 환자 5명에게 적절한(?) 장기를 이식할 수 있게 된다. 이 사고 실험에 대해서 한사람의 생명을 희생시켜 다섯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은 앞서 트롤리 운전의 사고 실험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하버드 대학교 특강인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한 학생은 아주 재미있는 결론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환자 5명 중 한명이 사망하게 되면 한 사람의 자연스런 죽음으로 나머지 네명을 살린다는 결론이다. 이점은 공리주의를 지키면서도 추가적인 희생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기발하지만 이는 사고 실험 자체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그냥 재미로만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선로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이 있는 선로 혹은 5명이 있는 선로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다른 형태의 변형은 유행성 질환 (epidemic) 의 문제가 있다. 앞서 장기 이식의 문제는 여러가지 문제를 발생할 수 있다. 우선 장기부전의 이유는 죄없는 건강한 감기 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픈 환자들 각자에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금 의학적 배경을 적용해도 장기 적합성이나 장기 이식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나 장기 이식 이후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멀쩡한 사람 하나를 희생시키는 것이 너무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조금 보완해서 변형된 형태가 바로 유행성 질환에 대한 사고 실험이다. 유행성 질환에 걸린 환자 6명이 있다. 이들은 최근 유행하는 치사율이 아주 높아 걸리면 거의 사망하는 질환에 걸렸다. 그런데 이 중 한명은 질환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 내어 스스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나머지 5명은 전혀 항체를 만들어 내지 못해 사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6명 모두 의식이 없다. 의사에게 두가지 선택이 있다. 첫번째는 자연 그대로 놔두어 항체가 생긴 환자 한명만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항체를 만들어 낸 환자의 피를 뽑아 나머지 5명에게 수혈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혈을 하고 나면 항체를 만든 환자는 죽게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항체를 만든 환자는 희생을 하는 것이다. 이 문제의 재미는 장기 이식문제와 다르게 내가 6명의 환자 입장에 놓였을 때이다. 장기 이식의 경우 내가 장기 이식을 받아야 하는 입장과 장기 이식을 당해야(?) 하는 입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체 문제는 6명의 환자 중 한명이 되어 항체를 만들어 낼 사람인지, 항체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람인지 모른 상황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6명중 5명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내가 살 확률은 항체를 만든 사람을 희생시켜 5명을 살리는 쪽을 더 선호할지 모르지만 그건 내가 항체를 만드는 한명이 되었을 때에 대한 희생에 대해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앞의 장기 이식의 문제는 나의 상황에 따라 윤리적 상황과 입장이 달라질 수 있는 반면 이 문제는 내가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를 제거해서 보편적 상황에서 선택해야 하는 윤리적 선택을 접근하려 하는 것이다.
[ 유행성 질환으로 변형된 트롤리 역설에 대한 내용 : onni.me/1byd2sm ]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개인적 선택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사고 실험을 통해서 생각해볼 것은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는가이다. 즉, 인생은 선택이란 말에는 더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면 인생은 '더 가치있는 것' (이라 생각하는) 을 선택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더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것을 더 가치있게 생각하는가는 상당히 주관적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마다 기호 (preference) 가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 누군가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대상이 되는 이유는 바로 무엇에 관심을 가지는가, 무엇이 더 소중한가에 따른 가치의 평가에 의한 것이다. 결국 가치란 우리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결과이다.

엇이 더 가치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가? 앞서 소개한 전차 운전수 (선로 결정권자) 의 입장이라면 다섯명의 생명과 한명의 생명 중 무엇이 더 소중한가에 따라서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서 더 재미있는 가정은 만약 그 한명이 운전수가 잘 아는 가족 중 한명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이다. 이처럼 단순히 보편적 윤리를 통해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무척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린다. 사고 실험과 달리 인생의 실전 현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상황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면 사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떤 무형의 가치가 아니라 금전적 가치, 소위 교환 가치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교환 가치란 인간의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서로 다른 가치 교환에 있어 혼란을 줄이기 위한 인간의 한 발명품 중 하나이다. 쉽게 말해 '돈'이다. 돈이란 교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교환 가치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환이 이루어질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약 교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교환 가치를 가지는 '돈' 혹은 '화폐' 는 그 자체의 물질적 가치만 남는 것이다. 그 말은 돈으로 사용되는 화폐를 이루는 종이 혹은 금속 물질의 가치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돈'이란 돈으로 사용되는 지폐나 수표에 대한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이에 적혀 있는 액수를 국가가 보증하기 때문에 가능한 가치이다. 국가가 그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면 유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가치 (value) 란 말은 가치, 값어치 란 뜻도 있지만 유효한 (valid) 과 연결되는 뜻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단어가 우수한, 훌륭한, 자랑스러운 의 뜻을 가진 valiant 가 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가치란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량적 기준을 가지는 대상이 아니라 상당히 주관적인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가치는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다르다면 변하게 된다. 특히 경제적 의미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허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본적 가치를 떠나 진정 우리가 더 추구해야 하는 가치란 무엇인가?

계속 반복해서 물어보게 된다. "무엇이 더 가치있는가?" 절대적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하지만 선택의 순간 무엇이 더 가치있는지를 선택하기 위해 어떤 것이 더 가치있는 '상대적 가치'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먼저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보석, 귀금속을 귀하게 여긴다. 앞서 설명한 교환가치와 다르게 보석, 귀금속은 적절한 수요자만 있다면 (가치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항상 값어치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물질적 욕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이것이 보편적 가치를 가진다고 보기도 어렵다. 아주 쉽게 접근해서 사람들에게 가장 지키고 싶은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 대답하는 내용은 아마도 '건강'이 될 것이다. 건강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분명 가치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한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가치있는가? 란 질문이다. 건강이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만 그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건강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인가? 란 질문이다. 이런 질문 역시 뭔가 개운하지 못한 느낌과 내리지 못하는 결론만 남을 것 같다.

가역성의 가치를 생각하다. 

열역학 제 2법칙은 비가역성을 이야기 한다. 무한하게 생각하는 자원이나 에너지도 사실 유한한 존재이고 심지어 내가 사용해 버린 자원 혹은 에너지는 사용하지 않은 자원 혹은 에너지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 한다. 결론적으로 자원이나 에너지는 아무리 회수를 잘하고 재사용을 잘한다고 해도 항상 효율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비가역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비가역성 (reversibility) 의 조금 다른 예는 촬영한 영상을 꺼꾸로 돌렸을 때 영상이 꺼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는 것은 아니다. 꺼꾸로 돌아가도 보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어떤 시점에서 어색한 부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 예를 볼 수 있는 좋은 뮤직 비디오 하나 감상해보자.



뮤직비디오의 중간에는 이런 비가역성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인다. 그러나 꺼꾸로 돌아가는 모든 영상에서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어색함들이란 대부분 비가역성을 확인할 수 있는 현상들에서 보인다. 예를 들어 물줄기가 있는데 어항의 물은 줄어들거나 사람이 층계로 번쩍 올라가는 장면 어색함이 바로 느껴진다. 우리가 이런 장면에서 어색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미 자연 현상에서 무엇이 비가역인지 반대로 가역 (reversibility ; reversible) 현상인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층계 위로 올라가는 현상은 별로 어색하지 않은 장면일 수 있다. 힘을 주어 층계 위로 올라가는 것은 흔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서 있는 상태에서 올라가는 순간 올라가는 가속도의 양에서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뛰기 위한 일반적 인체의 형태와 관련이 있어 어색함이 느껴지는 부분이 더 강할 수 있다.) 이처럼 꺼꾸로 돌아갈 때 어색한 이유는 자연적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작용과 결과를 바라볼 때 가역, 비가역으로 살펴보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에를 들어 물이 가득찬 컵을 쏟으면 엎질러진 물을 다시 완벽하게 담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처음 컵에 물이 차 있는 초기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비가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설명이 복잡해질 수 있지만 쉽게 말해 '원상회복'가 가능한가를 생각하면 된다. 대부분 이런 비가역성이 강한 대상은 가치가 높을 가능성이 높다. 즉, 비가역성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더 가치를 매길 수 있다는 것이다.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작용을 가해도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작용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대해 질 수 있다. 비슷한 의미로 등가가치를 가지는 대상으로 얼마나 대체될 수 있는가 (degree of replacement) 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컵의 물을 쏟으면 그 초기 상태로 똑같이 원상회복할 수 없다고 해도 거의 구별되지 않는 물로 다시 채워놓으면 엄밀한 의미의 원상회복은 아니지만 충분히 만족할 수준의 원상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 비가역성과 ⓑ 대체가능성 은 어느정도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엎지러진 물은 다시 원래대로 담길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물로 대체되어도 별 문제가 없다. 이 경우 대체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리는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다른 시선에서의 예도 가능하다. 만약 컵에 들어 있는 물이 신성한 도사에게 몇천만원을 사온 물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런 물을 아무렇지 않게 개에게 주어 버리거나 버린다면 사온 사람은 크게 분노할 것이다. 몇천만원의 돈이란 교환 가치를 충분히 지불했던 이유는 그 물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수기 물이나 별로 구별이 안될 수 있어도 대체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딸에게 물려준 푸우 곰인형이 있는데 그냥 시중에 파는 일반적 푸우곰과 전혀 다르지 않지만 아버지가 선물로 주었다는 점에 의해 그 푸우 곰인형은 대체가능성은 사라진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가역성에도 연관이 있기도 하다. 이처럼 무엇에 주관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대부분의 행동들은 이런 대체가 거의 어렵거나 비가역성이 강해질 때 더 의미가 강해진다.

엇을 결정할 것인가?

조금은 다소 이른 확장이 될 수 있지만 정책의 결정에서 적용시켜 보자. 많은 경우 경제적 개발을 위해서 정부가 많이 내세우는 명분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가 희생해서..." 라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는 앞서 세가지의 사고 실험을 통해서 살펴보면 내가 그 결정의 이해 관계자가 아닌 경우 상당히 공리주의에 가까운 선택이 옳다고 믿는다. 실제의 예를 들어 보자. 밀양 지역에 송전탑을 지어야 하는데 도시의 전기 공급을 위해서 밀양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의 재산권과 건강에 대한 잠재적 위험을 감수하라고 할 때 내가 밀양 주민이 아닌 입장에서 오히려 직접, 간접적 혜택을 보는 도시민의 한사람이라면 그런 소수의 희생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익적 결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공리주의의 신봉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밀양 주민이고 당사자라 생각해보자. 이는 두번째 사고 실험인 장기 이식의 모습과 많은 부분 겹쳐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장기 수혜자라고 생각한다면 한사람의 희생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조금은 도덕적 양심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쯤은 잠깐 눈감고 넘어가면 나는 살수 있는 것이다.

밀양 송전탑을 세워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충분히 대체 가능성과 비가역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도시의 전기 공급을 위해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 밀양을 지나는 송전탑 뿐인가? 송전탑에 의해 발생하는 의학적 문제점, 다양한 질환의 발생 가능성을 생각했을 때 그런 질환에 걸린 경우 환자들은 얼마나 쉽게 회복할 수 있는 질환인가? 질환에 의해 몇명 정도가 병에 걸리더라도 도시의 전기 공급을 위해 불가피한 희생 (collateral damage) 이라 생각할 것인가. 모든 것을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지만 일단 송전탑의 대체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송전탑이 밀양을 지나가야 하는 이유는 경제적 이유이다. 경제적 타당성이다. 그러나 그 경제적 이유는 사실상 전기 송전의 특성을 살펴보면 지속적인 효과이기 보다는 송전탑 건설하는데 발생하는 단기적 효과가 더 크다. 경제적 효과는 사실상 지속성이나 공익성이 크게 보장되지 않는다면 단기적 사회적 분쟁을 만들면서 단기적 효과를 얻는 것이 현명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경제적 효과는 가장 가역성과 대체가능성이 높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손실은 이후 구조적 문제만 아니라면 이익 구조로 바꿀 수 있다. 자본은 가장 정체성이 없는 대체가능성이 높은 대상이기 때문이다. 마치 특별한 의미가 없다면 컵에 담긴 물을 쏟아도 다른 물로 대체할 수 있는 비슷한 존재란 것이다.

주민들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바라고 싸우는 것일까? 그들이 병들어 죽게 되는 상황이 만약 일어난다면 그들은 대체 가능한 존재들인가?

반면 주민들의 건강에 대한 위험은 어떤가? 송전탑에 의해 특정 질환이 높아진다면 그 질환에 취약한 주민은 그만큼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일단 병에 걸린다면 회복 가능성이 쉬워질까? 문제는 그렇게 병에 걸렸을 때 누가 그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함께 한 사람의 인생, 한사람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란 것이다. 사고 실험부터 시작해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할 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바로 생명이다. 건강이 소중한 직접적 이유는 건강은 생명이 잘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왜 소중한가? 당연한 질문에 앞서 설명한 비가역성과 대체가능성을 통해 생각해보자. 한번 끊어진 생명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완전한 비가역성이다. 심지어 다른 어떤 존재로도 대체 가능하지 않다. 다시 밀양 송전탑의 문제로 넘어가자면 이런 정책의 결정을 할 때, 그리고 앞서 사고실험에서 다섯명의 생명과 한명의 생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섯명의 생명을 살리는 결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각각의 생명은 등가 (equivalence) 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등가이고 그만큼 모든 생명이 소중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의 순간에는 다수를 살리는 것이 더 옳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그 이면에 내 선택에 의해 한명 혹은 다섯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결정의 순간 그 모든 6명은 전혀 구별이 없는 동일한 생명 그 자체의 등가일 뿐이다. 그러나 앞서 반증에서 설명했듯이 한명이 자신의 가족이라면 한명은 특정되고 (specify) 다섯명이라고 해도 한명을 살릴 수도 있다.

능적 존재 vs. 질적 존재 

우리가 다수라는 논리를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가지 가정 (assumption) 을 숨긴다. 이 숨겨진 가정은 상당히 불편하다. 모든 생명은 동일하게 소중하다. 란 가정이다. 사실 이 가정은 상당히 불합리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가까운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공직 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적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적을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을 정말로 완벽하게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혀 모르는 여인이 물에 빠졌을 때 누굴 먼저 구해야 할지 결정을 할 때도 이러한 가치의 불균형성은 나타난다. 적당히 둘다 살릴 수 있는 조금은 편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더 예쁜 여인을 구하려고 할지 모른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더 급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때 말하는 더 급한 사람이란 얼마나 비가역성이 증가했는가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위급한 사람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비가역성이 높은 사람을 먼저 살려 최대한 회복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공정하고 합리적 판단을 하는 존재라고 해도 항상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 (reinforcement of choice) 에 놓인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이 물질에 제한된다면 다소 편안한 결정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사람이나 생명에 관련된 문제라면 그 결정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는 비가역의 희생물은 그대로 자신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판사가 무고한 어떤 사람을 검찰의 정교한 증거와 조작된 증인을 통해서 사형을 내리고 형이 집행되었다면, 나중에 아무리 무죄가 증명되어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비가역성이 높은 결정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서 양심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충분히 그 양심의 죄책감에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보상하고 (대체가능성) 다시 되돌려 복권시킬 수 (가역성) 있다면 좀더 괜찮을 것이다.

사형제도를 비가역성과 대체가능성을 통해 생각해보자. 한번 실행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의미에서 사형제도는 비가역성의 비참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한가지 시선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조금은 대비되지만 직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대비이다. 바로 기능적 존재 (functional being)본질적 존재 (fundamental being) 이다. 사고 실험에서 우리의 모든 결정은 기능적 존재의 생명을 고려하고 판단하게 된다. 즉, 인간은 기능적으로 동일하고 다수가 더 좋은 것이란 공리주의란 모든 인간을 하나의 기능적 존재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때 전차 선로에 있는 Adam 란 인부와 다른 편에 혼자 있는 Thomas 란 인부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의 이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숫자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차 운전수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선로에 있는 인부들을 파악할 수 있고 혼자 있는 사람은 무척 선량한 가장이고 다른 선로에 있는 다섯명은 철도 노조를 망치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알게 된다고 해도 그 결정이 순수하게 다수를 살리는 결정을 내릴 것인가이다.

요약하자면 기능적 존재란 인간 하나 하나의 특성을 배제하고 동일한 생명이란 등가의 가치로 바라보는 것이다.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다른 존재로 대체가능하다는 것이다. 가장 흔한 현상으로 조건을 보고 결혼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조건은 기능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을 특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건이 맞다면 선택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Adam 을 고르는 것이나 John 을 선택하는 것은 별로 차이가 없다. 가능하다면 나중에 더 괜찮은 조건을 추가하여 Philip 으로 대체해도 상관없다. 즉, 가치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 중 대체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기능적 존재란 모든 사람들이 대체가능성이 최대로 높아진 상태를 생각할 수 있다.

철저한 익명성은 모든 사람들의 동일성을 만든다. 기능적 존재만이 남은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본질적 존재는 각 개인은 모두 특정되고 절대 대체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즉, 대체가능성이 전혀 없어진 상태를 생각해보자. Adam 과 John, Philip 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고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결혼이라는 기능적 목적을 위해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중요한 존재인지 가치를 평가하게 되는 과정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사랑이라는 과정은 거칠고 아픈 과정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수 있고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대체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이든 이런 기능적 존재 와 본질적 존재를 생각하며 가치를 생각하고 결정을 하는 과정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대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주 조금...)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는지, 본질적 존재로 바라보는지에 대한 평가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무리하며...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상의 결정이 얼마나 힘들고 스트레스 쌓이는 과정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선택에 얼마나 더 가치있는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확신할 사람의 거의 없다. 오히려 그런 확실한 선택은 선택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고 자신의 사소한 결정조차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신중한 태도없이 선택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에는 좀 더 가치있는 것을 지향하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어쩌면 그 질문의 과정 속에서 개인적으로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결론적으로 기능적 존재 와 본질적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일상이 계속 반복될 때 우리의 시선이 본질적 존재에서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게 변화하는지 많은 경우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 의사의 경우 매번 살피는 환자를 본질적 존재로 처음에는 느끼다가 반복되는 질환의 치료와 과중한 일의 강도에 의해서 환자들을 그저 치료하는 하나의 특정되지 않는 그저 일반적 환자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기계적으로 치료와 처방을 내리고 의사를 믿고 치료를 받는 환자의 입장에서 좀 더 놓치지 말아야 하는 환자만의 특징은 사라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환자를 본질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 존재로 바라볼 때 대체될 수 없는 치료해야 하는 한명의 소중한 생명, 그리고 질환에 의해 건강을 잃으면 다시 회복하기 힘든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

직업적으로 대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결국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만드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의사가 환자를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게 되는 경우 자신이 맡은 직업도 본질적 의미가 퇴색되고 기능적 의미만 남는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희망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이 큰 사람, 정치인이나 정책 결정권자들 과 같은 명예로운 사람들은 그들의 시선은 사람들을 본질적 존재로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한사람의 눈물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그 눈물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살펴보는 관심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며 사적 이익을 위해 싸우는 그저 기능적 존재로 집단화하여 바라본다면 그건 본질적 존재를 지우고 그저 기능적 존재로 살피는 것이다. 그런 시선을 가진 정치인은 스스로도 기능적으로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역사의 큰 아픔으로 남은 사건들에는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의) 대체 불가능한 사람들의 생명이 사라졌다. 그 생명이 사라지는 하나 하나 본질적 의미를 살피지 못하는 지도자는 개별 국민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고 그저 기능적으로 동일한 집단으로 살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가역성과 대체가능성 을 계속 반복해서 쓴 이유를 기억하는가? 바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했다. 우리 사회가 좀더 많은 사람들이 기능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줄이고 본질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을 늘릴 수 있다면 우리 스스로의 가치도 높아질 것이다. 개인 모두가 모두 하나의 우주가 될 수 있는 각자의 본질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사회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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