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handas Karamachand Gandhi, one of the most influential figures in modern social and political activism, considered these traits to be the most spiritually perilous to humanity.
Wealth without Work
Pleasure without Conscience
Science without Humanity
Knowledge without Character
Politics without Principle
Commerce without Morality
Worship without Sacrifice
Wealth without Work : 노력이 없는... 이라고 해석은 되었지만 상당히 광범위해진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디는 노동의 중요성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노동없이 누군가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그 작은 잘못된 예로 인하여 그 주위의 사람들은 노동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쉽게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동이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은 대부분 범죄나 남들이 만들어놓은 부를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사기나 강도같은 남의 재산이나 생명을 잃게하면서 자신의 배를 불릴려는 사람의 마음을 방지하게 하며 또한 노동에 의한 부의 축적을 사람들도 존경을 하고 인정을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잘못된 방법의 부의 축적또한 하나의 범죄라는 생각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인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진국의 탈세방지법이나 비평등조건상의 상업경쟁에 대해서도 규제하는 이유가 이때문입니다.
Pleasure without Conscience : 의식을 가진 즐거움이라고 해야할까요? 쾌락이 관능적, 육체적 즐거움만이 아닌 정신적인 즐거움까지도 다 포함을 해야하는데 간디는 근본적으로 상업적으로 이루어지는 쾌락에 대해서는 이 범주에 원체 넣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가 따라서 마약이라던지 성매매등과 같은 자기 스스로의 즐거움이라고 생각을 해도 이는 즐거움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진 쾌락 (Lust) 라는 것입니다. 의식을 가진 즐거움이란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독서나 다양한 활동으로 자신이 가지는 능력을 올바른 방향(Conscious)으로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체성을 잃어버린 상태의 즐거움이란 또다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있는 즐거움은 요즘 유행하는 몰입(flow)의 즐거움과 많은 것이 공감됩니다. 어떤 것에 빠진다는 점에서 몰입과 중독은 비슷하지만 몰입은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성취할 수 있지만 중독은 이때문에 자신의 원래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 있죠.
Science without Humanity : 인간이 없는 과학이 아니라 인간미가 없는 과학입니다. 인간미란 자신을 비롯해 모든 주변 사람을 포함하여 하나의 동등한 인류애로 바라본다는 점입니다. 인간미가 없는 과학은 자신의 과학기술을 통해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전에 깊히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과학자만의 몫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정부등 어떤 집단이던, 즉, 과학을 직접 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과학의 혜택을 받는 사람들도 이를 생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생각하지 않는 과학의 이용은 결국 인류를 망치게 되기 가장 빠른 방법이고 환경문제나 전쟁 무기, 테러와 같은 잘못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의 패러다임은 이제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인간 배아복제를 허가하지 않는 철학적 배경은 대다수의 인류를 구하기 위하는 대의명분아래 몇명의 인간을 희생시킨다면 그 기술은 결국 인간 대부분을 희생시킬 수 있는 기술이 된다는 점입니다. 더디고 우회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인류애를 염두하는 기술적 발전이 과학자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같은 것입니다.
Knowledge without Character : 도덕적, 윤리적 지식이라고 해야할까요? 이부분은 교육이라고 제도적인 부분까지 확대하기엔 간디의 의도와 참 많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간디의 일곱가지 죄악은 상당히 개인적인 권유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교육이라는 제도까지 포함하기엔 어렵기도 하고 오해의 소지도 생기기 쉽습니다. Character 란 말은 다른 말로 가치관이란 말입니다. 무분별하게 지식을 섭득하여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에 맞추어 사리분별을 하여 지식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디는 이후의 책에서 이러한 가치관의 사리분별적인 지식들이 모이게 된다면 그런 부분들이 인류의 고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처세술같은 시대적 지식이 아닌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고전'을 찾는 방법은 개개인의 올바른 가치관으로 뽑아져 나온 엑기스같은 것이겠죠.
후배하나가 국제 자격증을 딴다는데 옆에서 선배하나가 '그거 요즘은 별로 인정도 안해줘' 그러더군요. 지식이란 시대의 가치관에 흘러가게 되면 지식은 고갈되어버리고 그 시대에 맞는 '적절한' 지식만으로 퍼지고 그이후 그 한정된 지식에서는 창의력, 창조력의 부재로 더이상 나아갈 수 있는 질질 끌려가는 지식이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Politics without Principle : 정치이기 때문에 제도적인 부분이 아니겠냐 하지만 사실 간디의 정치란 큰 의미의 정치이전에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의 원칙이 우선시 되는 사회적인 관계성, 법적 관계성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나라의 정치란 사실 개인의 활동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개인의 비윤리적인 원칙없는 정치가 그(녀)가 속한 집단까지 비난받기 쉬운 것입니다. 원칙이란 자신의 양심에 근거하여 진실함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정치적 도덕성과 사회적 도덕성은 많은 경우 그 판단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정치적 도덕성이란 A 란 경우에 대해 B 라는 비슷한 경우에도 동일한 비슷한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원칙이 없이 때에 따라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고 이는 사람들에게 서로간의 불신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법까지도 포함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법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런 잘못의 경우 이런 벌을 받을 수 있겠구나, 이런 경우엔 이런 이익을 볼 수 있겠구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제도적인 확대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두 그 제도를 불신할테니깐요.
Commerce without Morality : 우리나라 기업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은 자신이 만드는 이익이 얼마나 부도덕한지를 측정하여 그를 통해서 기업에 징벌적인 세금을 만들어내는 법을 연방법으로 제정중에 있습니다. 엔론 사건을 포함하여 다양한 회계 부정 및 묵인적인 생산품의 하자,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생산등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서 징벌적인 세금을 추진하고 최고경영자들에게는 25년형 이상의 징역을 내리게 됩니다. 기업은 물건(서비스)를 만드는데 윤리적이지 않는다면 상업이나 자본주의 자체가 부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인 생산과 윤리주의적 책임이 같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실제로 징벌적인 세금이나 제도적인 측면을 벗어나더라도 기업의 비윤리적 활동이나 부도덕적 이윤에 대해서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징벌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먼 이야기 같긴 합니다.
이러한 도덕주의적 윤리 경영에 의해서 가장 큰 성장하는 나라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도덕적일 것 같은 중국입니다. 맥킨지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은 노동력이나 환경적 규제가 약하기 때문에 미국의 기업들이 생산을 중국에 옮기기 때문이랍니다. 윤리적 경영에 의한 블루 오션이라고 할 수 있겠죠.
Worship without Sacrifice : 희생이 없는 존경(?) 입니다. 좀 해석자체가 어렵지만 큰 의미의 종교라고 하기도 그렇고 작은 의미의 기도라고 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차적인 의미로는 자신이 존경을 받거나 자신의 행동이 본받음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희생이 없이 안된다는 것도 있고 이차적인 의미로는 누군가를 봉사하지 않고 나눔을 위한 종교적인 행동은 스스로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기도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종교를 떠나 누군가를 위하고 바라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전하는 하나의 명상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도 하나의 작은 희생이라고 할수 있겠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자신을 희생할려는 순수한 마음이 없이는 자신의 뜻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치료를 한다는 모 종교집단의 행사를 갔을때 느낀 점이 하나 있습니다. 실제로 치유의 능력이라고 하기 좀 그런 부분도 많았지만 아무튼 치유의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그 능력을 통해서 자신을 높히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에게 능력을 준 존재에게 영광을 돌렸다면 더 종교적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마도 치유의 능력은 있으니깐요.
현재의 우리나라를 보면서 간디의 일곱가지 죄가 마치 우리나라가 망극이다 아니면 간디의 말이 이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핵심은 이렇게 잘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는 이렇게 간디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따라서 이러한 말을 되집어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Contribution 을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자신의 회사에서 속한 어떤 방향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을때 과감하게 거부할 수 있는 용기란 가치관을 가진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판단입니다.
중학교때 아버지께서 해주셨던 것중 그레샴의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란 경제원리였습니다.
"가치 있는 것, 옳은 것, 정당한 것이 경직된 법과 명분, 또는 형식 일변도의 규정에 밀려나는 경제의 오류를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나라가 정말 안정적이고 정말 완벽한 유토피아다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있을까요? 예전에 Brunei 를 갔을때 그 곳의 사람들은 나라에서 돈도 주고 집도 주고 공부한다고 유학간다고 신청만 하면 돈도 준다고 하더군요. 모든 나라에서 살기 좋다고 얘기하는 그 나라 사람들 조차도 밑밑한 자신의 나라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부패가 만연해 있고 원리 원칙이 없는데도 그것이 무감해져버린 자신들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중대 법죄를 일으킨 사람에게도 너무 관대해져 그 나라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을 두려워한답니다.
경제적인 원칙에 맞춰서 이윤의 극대화에서 이윤의 패러다임은 변화해야합니다. 아니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그 패러다임에 발맞추어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따라서 간디의 일곱가지 죄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죄라기 보다는 이 시대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직해야할 원리 원칙입니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 박사를 두고 동료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현실을 바라보며 분석만 냉철하게 하고 이 사회는 망했어, 이 사회는 잘못됐어 얘기만 한다면 그는 냉철한 독설가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가 독설가와 다른 한가지 점은 사회의 잘못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치관에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문장을 주기 때문이다."
비록 간디가 비현실적인 대안가였을지 모르지만 오랫 시간이 지난후에도 가치관으로 가지며 판단할 근거를 제시해준 간디는 훌륭한 지성이라고 생각합니다.
traits to be the most spiritually perilous to humanity : 나라를 망치는 죄악이라기 보다는 인류애에 정신적으로 위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개인적인 덕목으로도 간직할 의미로 간디가 전해준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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