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죄의 경감을 옹호할 만한 증언을 통상적으로 무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확신한 후에
그에 위배되는 증거들을 무효화하는 것이다.
진리라고 불릴 만한 것 중에서 이런 식으로 도출된 진리는 없다.
- 마릴린 로빈슨, 「아담의 죽음」 - 〔 원문 〕
사람들의 관계에서 사람들은 일단 판단을 하고 사람들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살아온 길, 그 사람이 말하는 태도, 그 사람이 행동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요소들을 판단하게 된다.
"저렇게 말하는 것 보니 저 사람은 무척이나 무례한 사람이야"
"저런 양복을 입는 것을 보니깐 꽤 사는 사람인가 보네" ... etc...
수많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판단하고 그 판단의 근거를 살펴보기보다는 그 판단은 곧 바로 다른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재밌는 부분은..
① 이차적인 판단의 근거가 되는 판단이 정말 사실인가?
② 이차적인 판단에 반대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은가?
③ 감정적인 판단에 의한 일반화의 오류는 존재하지 않는가?
CASE) 연인 사이인 영숙이와 영달이는 오랜 기간 교재해온 사이이다. 같은 학교 캠퍼스 커플인 둘은 좋을 때는 서로 없으면 안될 정도로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로 알고 싶고 서로가 무엇하는지 궁금해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이였다. 항상 같이 있고 싶고 즐거운 것을 함께 하는 그런 사이였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혼자 걷고 있는 영숙이에게 돌팔이라는 학생이 영숙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쫓아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잠시 시간을 내달라는 돌팔은 영숙의 앞을 가로 막았고 그 순간을 멀리서 우연히 보게 된 영달이는 멀리서 영숙과 돌팔이 서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영숙이가 어떻게 저렇게 "웃는 얼굴로" 모르는 사람에게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 "저 사람 영숙이랑 무슨 관계이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영달이는 자신이 보는 모습중에서 자신이 순간 느꼈던 가장 기억이 나는 판단을 떠올리게 된다.
"웃는 얼굴로"
웃는 얼굴을 기본으로 영달이는 영숙이를 정의하기 시작한다.
"영숙이는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구나"
그 이후에 영숙이와 영달이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되었다. 영숙이는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된 영달이 친구 순돌이가 하는 얘기에 흥미를 느껴 잠시 집중을 하게 되었다. 영숙이가 흥미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집중하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영달이는 또 판단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남자친구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나에게는 관심도 없이 저렇게 낯선 남자에게 집중하면 있을 수 있는거야?"
그러면서 순간 예전의 판단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논리와 판단을 확장시킨다.
"낮선 남자에게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는 아이가 바로 영숙이였지..."
원래 저런 아이니깐 저런 모습도 당연한거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술자리 이후 데려다 주면서도 영숙이에게 퉁명스럽게 이야기하고 예전같은 모습을 안 보이는 영달이가 이상해 영숙이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영달은 자기 잘못도 모르면서 저렇게 태연한지 원래 그런 여자임에 틀림없다 확신하게 된다.
그러다 의심은 심해지고 전화를 받지 않거나 집에 늦게 들어가는 영숙을 보면서 낯선 남자에게 잘해주듯 다른 남자 만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의 골은 깊어지기만 한다.
처음부터 살펴보면...
웃는 얼굴에 대한 사실 여부에 대해서 확인하지 않았으며
(사실은 어이없는 황당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는데...)
낯선 남자에게도 잘 웃어주는 여자라는 인격에 대한 도약적인 판단을 하였으며
(잘 변하지 않는 성격으로 고정화)
개연성이 없는 다른 사건을 기존 잘못된 판단을 통해 보이는 모습은 편협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며 처음부터 잘못된 사실에 대한 더욱 더 강한 확신을 만들게 된다.
결국엔 의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비이성적 비인격적 행동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역설하게 된다.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제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판단은 완벽한가? 충분한 근거와 변할 수 없는 진실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가?
설사 제대로 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제대로 된 판단을 믿어 서로 관련이 없는 일에서 자신이 보고 싶어하고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증거만을 위한 편견의 안경으로 쓰는 것은 아닌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하기도 한다. 그렇게 판단을 해서 실제로 이성친구의 바람피는 것을 찾기도 하지 않냐고... 의심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난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그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마 작은 실수나 의도하지 않은 행동안에서도 의심의 모습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고 중요한 것은 (문제의 본질은) 상대방이 실제로 그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너 자신이 정말 행복하냐는 것이다."
상대방을 떠나서 의심과 의혹 혹은 자신이 바라보는 나쁜 모습의 상대방을 두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정말 너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관계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것은 부족함이나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믿음과 신뢰의 안경을 통해서 그 부족함과 실수의 굴레에 속박되어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의심과 판단의 안경으로 바라보면 결국 자신에게 표현하는 서투른 사랑의 표현조차도 자신의 정의에 움직이는 불편한 행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g.) 뜻하지 않은 꽃다발은 분명 바람을 피고 있다는 증거이다.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판단하며 상대방을 정의하며 그 정의된 Profile 에 맞추어 살아가는지 확인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100의 사람이 100가지 경우가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은 아마도 100,000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 이상 수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왜냐면 100인의 사람이 그때 가지는 감정, 환경, 그리고 상태에 따라서도 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만 우리가 취하기 좋은 증거만을 수집하고 기억한다.
그런데 그러한 선택적인 수집은 사실 그렇게 호의적인 판단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그 판단은 쉽게 의심의 눈초리와 감정의 상실감을 주기 쉬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은 우리가 분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판단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고 만약 부정적이라면 그건 자신을 위해서라도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영화 Doubt (2008) 에서 아동동성애를 의심하던 수녀님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신부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아동동성애에 시각을 맞추어 결국 확신을 하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그런 의심을 설득시킬 수 없고 의심으로 힘든 상황에서 강론을 통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 〔 원문 〕
어느 마을의 두 여인이 앉아서 동네사람 아무개의 흉을 봤답니다. 가십(gossip)을 한거죠. 그냥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의 흉을 봤겠지요. 그런데 두 여인중에 한 사람이 그날밤에 꿈을 꿨는데, 하늘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오더니 검지손가락으로 그 여자를 정확히 가리키는겁니다. 상상해보세요. 하늘에서 큰 손이 내려와 정확히 내 면전에다 대고 가리키는 겁니다. 꿈에서 깨어난 여인은 꿈에 대해서 생각해보다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무개 흉본것을 하느님이 아시고 야단을 치러오셨나봐. 그 손은 하느님의 손인가봐.. 여인은 신부님에게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신부님 제가 아무개 흉을 봤는데 꿈에 큰 손이 내려와 저를 비난하듯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저의 죄를 사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신부님이 여인의 이야기를 듣더니, 여인에게 숙제를 내 줍니다.
"집에 가서 당신이 베고 잔 그 베게를 들고 지붕위로 올라가서 칼로 베게에 구멍을 내시오. 칼로 베게를 구멍을 낸 후에 다시 내게 오시오."여인은 신부님이 일러준대로 합니다. 그리고 다시 신부님에게 옵니다.
"신부님, 신부님이 일러주신대로 베게를 지붕위로 가지고 올라가서 칼로 찢어 구멍을 냈습니다.""베게를 찢었다면...무슨 일이 일어났소?""베겟속 깃털들이 모두 흩어져 날아갔습니다.""이제 당신의 죄를 사할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소. 가서 깃털들을 모두 모아다가 그 베게를 다시 채우시오.""신부님, 그 깃털들을 어떻게 다시 모을수가 있나요 천지사방으로 모두 날아가버렸는것을...""네가 한 짓이 바로 그와 같도다! 네 말을 어떻게 되 담을수가 있겠느냐! 네 죄를 어떻게 씻을수가 있겠느냐!"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그 확신이 당신의 불행을 가져온다고 하여도 당신은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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