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3, 2011

신의 뜻을 쫓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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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동안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끔은 새롭고 신선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교 그 중 가톨릭 그리고 더 세분화가 필요하다면 천주교 혹은 로마 가톨릭으로 분류되어 흔히 성당 혹은 천주교회를 다니는 사람들과 같이 성서공부와 관련된 활동을 하다가 보면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서 많이 회자되고 또 여러가지 주장이 엇갈리는 테마가 하나가 있다.

바로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한 평가이다. 예수님을 팔아 넘겨 결국 고통과 고난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시게 한 사람이다.


단은 왜라는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신학적, 역사적, 정치적 배경에 따른 여러가지 해석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결론이 난 사건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은 하는 것이 엇갈리는 주장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사람들은 이 시점에서 크게 두가지의 의견이 나오게 된다. 첫번째는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이룩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고 유다는 신으로부터 그러한 사명(?)을 맡고 태어났다는 주장이다. 소위 유다란 인물은 그리스도교의 시작에 필요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보고 상당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내가 신을 이해하고 있는... 아니 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심한 반박적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이스카리옷 유다가 그리스도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점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부분이 긍정적이거나 신이 '그렇게 하도록' 유다에게 임무가 부여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심하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정말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이 신이 '원하고 조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없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우리들은 종교를 하나의 자판기로 생각한다고 이야기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이 성취시켜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그런 존재로 말이다. 그래서 종교를 믿으면 부자가 되고 종교를 믿으면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도 얘기하는지 모른다. 왜냐면 무엇이든... 이라는 막강한 표현에 자신의 운명, 선택 그리고 말하고 싶은 '인간의 자유의지'또한 신의 영역에서 제어되고 통재되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신이 선하다면 정말로 이 세상의 잘못된 불의, 생명을 죽이는 전쟁, 미움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실증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넘어와서 만약 모든 인간의 행동과 운명이 신에 의해 결정되고 통제되어지는 성격의 것이라면 유다또한 조정당하고 자신의 운명은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다에 대한 동정일지 몰라도 그러한 생각에서는 분명 유다는 어쩔 수 없고 그에 대한 책임또한 유다가 아닌 신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고를 일단 결론이 난 다음에 쉽게 해석하고 과거의 인과관계를 분석하여 마치 그 당시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의 결론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참 쉬운 분석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들에 대한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의 운명같은 단계들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만다.

다시 말해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십자가형에 의해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처럼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결론이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 듯 해보여도 이 결론은 일어나지 않은 하나의 과정을 뒤집어서 마치 그 과정이 상당히 중요한 과정으로 부각시키는 오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그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의 과정을 뒤집는다고 해서 그 결론이 현실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 가정자체가 세상의 인과관계를 너무 쉽게 설명하는 어리석임일 것이다. 유다가 선한 결정으로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실 다른 일을 통해 예수님은 똑같이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 혹은 십자가형을 통하지 않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을지 모르고 또 혹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교가 다른 형태로 초대 교회가 만들어졌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결론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약 유다의 행동, 예수님을 팔아 넘긴 일이 신의 제어와 통제를 통한 일이라면 우리의 옳지 않은 행동들에 대한 상당히 세련되고 좋은 책임회피를 주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선생님이 학생을 자기 분에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구타했는데 그 학생이 그 복수심에 열심히 권투를 배워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선생님은 정말로 '그래 나는 너가 그런 멋진 파이터가 되게 하기 위해서 너를 때린거야. 너가 이렇게 성공하게 된 것은 다 내 덕분이지' 라고 말한다면 온전히 살아남아 있을 수 있을까? 소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악이나 불의도 결국엔 끼워마추기 식으로 결론에 다 좋은 영향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생각은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이나 불의를 보면 그런 결과는 신이 조정해서 만들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든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버리고 얼마든지 정의에 설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참 신비롭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식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쉽게 혼내거나 못하게 막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바라보며 안타가워 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내가 믿는 신의 범주에서도 그러한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인간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법칙과 선의 법칙이 작용되는 이 세상 안에서도 파괴와 악의 법칙으로 세상의 생명과 질서를 파괴하는 일은 존재하고 그런 모습을 신이 바라볼 때 안타가워 하며 그것이 제대로 되기 위해 다양한 메세지와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신앙인들이 기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 길이 하느님의 뜻인가요?" 라고 물어보면서 결국 자신의 욕심으로 선택을 하고 그 결과가 잘되면 (사실 그 결과가 잘되었다는 기준도 자신의 욕심과 시각에서이지만...) 이 길이 신의 뜻이구나 혼자 판단하고 잘못되면 (실제로는 맘에 안들면) 이 길은 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구나 하게 된다.

어떤 과학자는 자신에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연구적인 목적은 분명 아주 멋지다. 불치병 치료 기타 등등... 그에 따르는 명예와 부도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는 길이다. 그 과학자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길을 가면서도 신의 뜻을 이유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 1) 첫번째는 세상의 많은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바로 신이 원하는 길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부수적인 희생은 감수해야만 해... 
  • 2) 두번째는 아무리 그 목적이 옳다고 해도 그에 따라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생명 파괴의 길은 신의 뜻이 아닐거야 그래서 이 연구는 하지 말아야 해... 

두가지의 전혀 다른 결과에도 언제나 신의 뜻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 과학자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이 만든 자연의 법칙과 선의 작용을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생명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이에 의해 파괴되어지는 사건은 분명 신이 만든 '자연스러움'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는 상당히 많은 자신의 선택을 포장하기 위해서 신의 뜻을 이야기한다. 희망하여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노력과 마음가짐을 탓하기 보다는 신의 힘을 더 믿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인간의 자유의지를 너무 사랑하는 신을 억울하게(?) 만드는 것이고 자신의 욕심을 감추기 위해 신의 뜻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신을 믿는 신앙인으로 선함이란 신이 만든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지를 항상 살피고 그 살핌이 곧 자신의 자유의지에 강한 표현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신의 뜻은 이것이 아니라고 해서 저것이고 저것이 맞다고 해서 이것이 되는 그런 성격이 아닌 내가 욕심이 벗어난 상태에서 신의 다양한 메세지를 듣고 그것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항상 분별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신에게는 참 안타가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을 가진 예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누가 보아도 어리석고 멍청한 행동이라고 해도 그 행동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고 한 순간 한 순간 예수님 스스로의 행동이 정말 신이 원하는 선함을 길인지 살폈기 때문에 유다의 존재 여부에 관계없이 현재의 교회는 이룩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그 선택의 고통만큼이나 큰 희망을 준다. 미래의 결과에 두려워해 우리가 저지르는 많은 욕심의 결과만큼이나 신의 뜻이 무엇인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없이 오늘의 한순간 한순간을 살피고 스스로를 선함으로 보살피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주 기도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처럼...

'...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의 뜻을 살피고 정진하는 많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그 뜻과 일치를 이루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어렴움과 동시에 희망도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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