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22, 2011

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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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

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말로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침묵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부족함을 표현할 것이다.

... 번째 에피소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있다. 어린 시절도 힘들게 보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하는...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하는 것들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 늘 사람들로 부터 사교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큼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을 유지한다. 그래서 그 사람 주변엔 항상 사람이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인상도 그늘 진 모습보다는 유쾌함에 묻어 나오는 선입견인지 사람들에게 호감을 더 주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밝은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 부터 상처도 많았다. 그 사람에게 그 상처는 항상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다. 어떤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솔찍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런 고백을 통해서 자신 만이 가지고 있는 짐이 덜어지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아왔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두통에 필요한 진통제를 먹듯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위로를 받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러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큰 상처나 예상하지 못한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뭔가 풀리지 않는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마치 진통제를 먹어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두통에 소화제를 먹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받지 못하면 그 관계의 본질이 이루어지지 않는 느낌으로 자신의 주변엔 자신보다 상처가 덜하다고 생각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 

... 번째 에피소드 

사람간의 이별에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별이라도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사별에 있어 그 이유가 사고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고의 현장에 아버지가 그 시간 그 곳에 있을 이유까지 찾을 수는 없다. 이미 끝나버린 이별에 매달리며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찾으려고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차이든(dumped), 차든(dumping) 항상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별의 이유라고 찾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 상대방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를 하면서 과거의 상대방을 평가하며 상대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자신은 항상 옳은 판단과 행동을 하면서 살았지만 상대방이 모든 원인 제공을 했고 나는 참을만큼 참아보았고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라며 그 이별의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이별이 비참해지고 누군가 물어보는 '왜 이별했어?'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것 같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나는 이별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며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 위로와 감정의 동감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진실했고 그 진실의 반대편에 상대방은 항상 진실하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때는 다 이해했던 구체적인 행동들을 꺼내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상식이하라며 자신의 심미적 감정의 기준을 대어 하나하나 판단하며 그 큰 맥락이 결국 상대방은 나쁜 사람이라 이별이 생긴거라 이야기 한다.



... 처를 받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변명일 수 없다.


스로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본질적인 상처를 꺼내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대부분 상처를 받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과거를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뿐이다. 그 누구도 나의 상처를 다른 이에게 완전히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부모의 학대를 받은 여러 명의 아이들이 모여도 그 상처는 사람 수만큼 다르다. 아마도 같은 부모의 학대를 받은 형제남매라 할지라도 다를 것이다. 그만큼 사람은 상처에 대한 각기 다른 수용과 감정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A 라는 아이는 그 상황을 탓하며 자신의 방이 없어 공부할 수 없음을 상처라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B 라는 아이는 자신의 방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과 살겹게 보낼 수 있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상처란 절대적으로 이것이 상처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성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는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의 빗장을 열기 전에는 상처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넌 왜이리 못생겼어'라는 말 자체가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 들여 '내가 못생겼다' 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상처로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로 잠시 넘어와서 자신의 상처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크게 두가지의 유형이 보인다. 첫번째는 그 상처를 통해 상처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의 이야기를 더 들어주는 사람, 그리고 그 반대편엔 자신의 상처를 좀더 들어달라는 더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아무리 힘든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이것이 상처다 저것이 상처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후자는 자신의 상처와 항상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판단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대방이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해도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되며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상처에 대한 비교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남에게 상처주면서도 '나도 이정도 상처 안에서 살았는데...' 라며 남에게 쉽게 상처주곤 한다.

이야기의 패턴은 항상 비슷하다. ① 나는 이런 상처를 받았다. ② 나름 많은 고민과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③ 다른 이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비교 분석한다. 상처는 치유하고 내적 성장을 위해 존재할지 모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이해하라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남의 상처를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사용한다면 그 상처는 하나의 독이 될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야지 판단의 근거가 되서는 안될 것이다.


... 신의 진실함을 핑계로 상대방의 순수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없다.


려란 참는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만나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두가지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둘 모두 자신의 이야기하지 못하고 참아오거나 두번째는 정말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경우. 둘 모두 그리 정상적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만난다는 것은 그래도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상대방을 통해서 나와 서로의 관계를 찾아가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시작은 그러한 서로에 대한 기대와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그런 접점을 찾기 힘든 경우일 것이다. 사실 이별의 시작은 다양할 수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든, 성격적인 이유든, 그 이유는 그냥 이별을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지 대부분 자신이 기대치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 구체적인 항목이 무엇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이별또한 아픔이고 상처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헤어지고 서로가 남이 된 상황에서 가장 재밌는 것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상당히 객관적인 자신을 설정하고 이별의 이야기를 자신의 주변에 이야기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별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상 진실해왔으며 상대방에 대한 상황과 행동을 자신의 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동의를 구한다. 나는 진실했고 여러가지 상황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 그때 그런 행동들은 정말 인간 이하의 행동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며 자신이 이별의 당연함에 동의를 구하게 된다.

대부분 자신의 행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에 맞춰 상대방을 잘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 대부분의 결론은 상대방은 원래 진실하지 못했고 상대방은 순수하지 못하다를 결론낸다. 그렇게 나쁜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동정과 연민을 얻어내면 자신의 마음이 수월해질 거라고 믿는다. 그런 소모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만남에서 자신은 진실하고 상대방의 순수성은 더럽히는 것이 자신이 이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노력한 내용들에 대해서 부연설명하며 자신의 순수성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순수성을 판단하면서 자신이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만에 가깝다. 이별의 순간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성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착하고 진실하게 되기 위해 지나간 인연에 대해 순수하지 못함을 가쉽하는 그 행동은 진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찰은 토론이 아니다. 누군가의 동의가 이별에서 자신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외치면, 그 어떤 만남에서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을까. 이별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만남의 해소일 뿐이다.



신의 상처가, 자신의 이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몇번의 상처와 이별을 통해서도 결코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 판단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바라보는 기준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결국 몇번이고 실패라는 냉소만 쌓이고 고요함 안에서의 자신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동정과 동의만을 통해 잠시 아픔을 잊게 하는 진통제만을 먹는 효과일 뿐이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주며 다른이의 상처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하며 다른이의 영혼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묘하게 재미있는 교차점을 가진다. 그것은 침묵 안에서 들릴 수 있는 내면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야기하듯 하지만 결국 다른 이를 판단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많아도 다른 이를 위한 배려는 배우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이런  모습들을 지우기 위해 성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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