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8, 2012

오래전 사진을 꺼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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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전 사진을 깨낸다는 것은...

화려하고 성스러운 수많은 성당을 다니면서도 세례를 받고 싶지 않았던 나에게 아직 터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비가 오면 바닥이 진흙이 되던 아직 기둥조차 없어 천막만 놓고 미사를 보던 그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세례받아야 겠다고 결심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조건들 때문에 세례를 나중에 받겠다고 말하였지만 나에겐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은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공부해야 한다며 학원으로 달려가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나는 매주 목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고 교리를 받고 매 주일은 오히려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며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꼈다. 아직 천막이 교리를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찬바람이 불면 바람 맞으며 비가 오면 비소리 들으며 교리를 들었다. 교리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세례명을 정해야 했고, 수많은 세례명을 두고 어떤 세례명을 고를까 즐거운 고민하던 엄마의 기대와는 달리 나는 무슨 마음인지 반절짜리 A4 힌종이에 '도마' 라는 이름 하나 적고는 접어서 사무실에 주고 말았다. 의심많기로 유명했던 그 세례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의 바램과는 다르게 나는 그 이름을 선택하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성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특별히 어떤 삶을 살았던 성인인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단지 이름에서 다가오는 어떤 끌림에 이 이름이 아니면 안되겠다 싶었던 마음이 생겼었다.


리고 다른 성당의 화려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런 세례식의 모습과는 달리 여전히 천막 하나에만 의지한 체 살짝 비바람이 부는 날씨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큰 이끌림이나 큰 동기가 있어 세례받은 것이 아니라 다소 합법(?)적으로 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점과 함께 천막 성당이 주는 그 소박한 아름다움이 나에게는 아직도 추억같은 그림이다.

세례를 받고 나서도 내 마음과 같지 않게 아픔이 다가올 때마다 신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아니 오히려 신이 있다면 이런 고통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이후 사도 토마스의 의심에 마지막 확인이 되어주셨던 그 옆구리의 상처는 '예수님의 존재'와 함께 '예수님의 고통'도 같이 확인하라는 뜻이었음을 아주 조금씩 조금씩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통이 다가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 오래전 사진을 꺼내어 본다는 것, 그 의미없어 보이는 작은 추억의 되새김은 지금도 나에게는 힘을 준다.

오래전 그 허름하고 누추한 그 천막안에서 받았던 그 세례성사의 신비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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