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28, 2012

공감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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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5살 아이가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릇을 잡고 가다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릇은 깨지고 아이는 놀란 마음에 가만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릇 깨지는 소리에 엄마가 달려와 아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소 큰소리로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친데 없어?! 그러니깐 조심성없이 이렇게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이렇게 해!" 


비록 깨진 그릇의 파편에 아이는 상처입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내 엄마의 목소리에서 나온 고성(高聲)의 파편에 찔려 그 순간 마음의 상처입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던, 아니 의지할 대상이 엄마가 전부였던 아이에게 엄마의 그런 공격적인 모습에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더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는 이제는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계속했다. 자신의 놀란 가슴만 생각하며 다시 이야기한다.

"앞으로 이렇게 조심성없이 뭐 가지고 다닐거면 가지고 다니지마. 다 너를 위한거야 그러다가 그릇에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려고! 엄마 말 좀 들어" 

아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며 이야기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아이에게 지금 당장 들리는 것은 엄마의 큰 소리이고 평소와는 다른 엄마의 무서운 얼굴 표정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놀란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 있는 그대로 아이에게 내 뱉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오히려 아이에게 이해를 구한다. 다 너를 위한 것이라고... 그런 엄마에게 아이를 대신해서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히 공감과 이해를 구별하지 않거나 별로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한다' 이 말이 가지는 긍적적 모습만을 생각하고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참 좋은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감과 이해는 분명 다르다.

공감의 능력은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상황을 분석하는 능력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결론이 난 일에 대해서 잘못, 옳음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해와 공감을 구별하기 위해 위의 상황에서 이해하려는 다른 엄마의 반응은 처음에 놀라 아이에게 달려가 자신의 놀란 가슴을 잠시 차분히 하며 '그래 아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고 아이는 분명 나를 도와줄려는 좋은 마음으로 그런 것이지' 라고 아이가 그런 실수를 한 자신이 생각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한 후 아이에게

"다치지 않았니?! 엄마를 도와줄려고 그랬구나. 그럴 수 있어 걱정하지마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실수할 수 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너가 다칠 수 있으니깐 앞으로는 조심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구나" 

라고 이야기한다면 공감의 능력이 뛰어난 것일까? 물론 첫번째 경우에 비하면 이해심도 아이에 대한 공감도 높다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과정 자체가 공감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번째 경우보다 훨씬 아이가 상처입지 않도록 배려심 많고 착한 엄마일지 모르지만 이해만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만약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즉,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의 행동이 보였을 때는 어떻게 될까? 어머니가 현명하고 긍적적이기에 아이의 상황과 행동을 긍적적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 경우라면 갈등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완벽한 인간이 아닌데 어떻게 모든 경우를 다 이해할 수 있을거라 장담하기 어렵다.

감은 있는 그대로 아이의 감정에 묻어 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어떤 반응이 적절한 공감의 반응이라고 예를 들기 어렵다. 누구도 100% 공감의 과정으로 아이를 대할 수 없고 비록 순간이라도 감정, 이해의 내면의 과정을 지나고 아이를 위해 공감의 단계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렇게 공감의 과정으로 갈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기에 아이에 따라 엄마의 공감 능력은 다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감에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나... 내 중심이 사라지는 나를 죽여야 가능한 것이 많다. 아이가 지금 어떤 감정일까, 어떤 마음일까? 를 먼저 살필려고 노력하고, 아이의 감정에 어떤 이유나 어떤 논리를 덧붙이지 않고 아이의 감정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이는 나보다 더 놀랐겠지 (논리)... 아이가 더 놀라지 않게 안아주자 등의 사고의 흐름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냥 아이의 감정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반응을 보여준다면 아이는 비록 그릇에 깨진 파편에 다쳐도 그런 아픔 따위는 엄마가 내편이라는 강한 의지와 안전에 이내 곧 웃음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분명 감정적으로 다치기 쉬운 존재이다. 아이들의 감수성은 어른들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한가지의 원리 (principle) 만 기억하자. 아이를 당신의 논리와 규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면 당신 아이의 감정은 점점 더 위선적으로 변해질 것이다. 그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 나오는 대사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사랑의 조건을 오해하고 살아가는지 잘 이야기해준다.

but you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고 하더라도 완벽하게 사랑하는 건 가능합니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이해심이 완벽할 것이라는 오만에 가깝다. 그 누구도 이해를 바탕으로 사랑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공감이라는 그 희망에 사랑의 본질을 생각하고 싶다. 머리로 판단하거나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가져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의 편'이라는 마음으로 그 어떤 상황과 감정에서도 같이(共) 느낄(感) 수 있음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아이도 하나의 인격이다. 그리고 당연히 사랑한다는 의심하지 않는 명제 아래 아이들에게 너무도 상처주지 않는지 한번 생각봐야 하지 않을까


공감의 미학을 즐기고 싶다. 애써 누군가를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애써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로움, 그 이해의 논리 속에서 항상 고민하고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공감이란 그렇게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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