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ne 19, 2012

양치기 소년과 늑대 - 동화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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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시절부터 '거짓말 하지 말라'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어른들이 자주 들려주는 동화가 있다. 양을 돌보는 양치기 소년은 양을 돌보다가 심심해서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늑대가 나타났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 이야기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잡으러 왔지만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며, 때로는 화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다시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하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한번 속게 된다. 그리고 세번째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했지만 두번이나 속아서 마을 사람들은 이번에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달려가지 않았고 결국 양들은 늑대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동화의 교훈은 거짓말을 하면 결국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양들의 희생, 혹은 경제적인 피해의 책임은 거짓말을 한 양치기에게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묵언의 공감을 하게 된다. 일단 결과적으로 양들은 희생당했다. 양치기 소년은 어떤 이유에서든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동화의 묘사에 따르면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반응하는 모습이 바보스러워 보였고 그 바보스러운 모습에 다시 재미를 위해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화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양의 희생이다. 재산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양의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신뢰하지 않는 순간, 양의 생명, 좁게 생각해서 마을의 재산인 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양치기 소년을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확신하기 보다는 불신에 대해 더 쉽게 확신하게 된다. 그만큼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확신보다는 자신이 가지는 지식과 논리,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불신에 대한 확신은 빠르게 진행된다.

당신의 확신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 링크 ]

늑대가 나타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확신했던 것은 자신들의 불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이 늑대에게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양들은 희생 당했다. 그러나 좀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마을 주민이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게임이론(Game theory)비협조적 죄수의 딜레마를 통해서 살펴본다면,


양치기 소년을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을 믿는다.
늑대가 실제로 나타나지 않음  양들의 희생 = 0 양들의 희생 = 0
늑대가 실제로 나타남  양들의 희생 발생 ≠0 양들의 희생 ≠0 or 경미한 희생

결국 늑대가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양치기 소년을 믿는 것이 경제적인 손해에도 이득이 되는 것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대신 믿을만한 사람을 대신하게 하는 책임을 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대한 불신을 확신한 체 자신들이 지켜야 할 것,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책임도 제대로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불신이 가지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합리적인, 논리적인 생각의 사람도 결국에는 감정적, 불신에 의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작용하여 자신에게 피해가 되더라도 더 이상 합리적일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한 양치기 소년과 달리 이번에는 새로운 가정을 한번 해보자. 다른 마을의 양치기 소년ⓑ가 있었고 이전 마을에서 양들을 희생한 늑대들이 다른 마을에 가서 양치기 소년 앞에 늑대는 잠깐 나타났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동안 사라져 버렸다. 양치기 소년ⓑ은 마을 사람에게 알렸지만 마을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이미 늑대들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늑대들은 똑같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 마을 사람들을 헛탕치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양치기 소년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리를 계속 지켰다. 그리고 똑같이 세번째 경고에 마을 사람들은 불신하고 결국 똑같이 늑대들은 양들을 약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결국 양치기 소년ⓑ에게 탓을 할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억울해 하는 양치기 소년ⓑ에게 마을 사람들은 늑대가 양들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냥 가겠어? 혹은 자신들의 논리와 편견 혹은 자신들의 생각에 맞추어 쉽게 양치기 소년을 거짓말 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양치기 소년은 아무리 억울해 해도 마을 사람들은 정말 불신했을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에 현명한 마을 사람이라면 힘들지 몰라도 돌아가면서 양치기 소년ⓑ와 함께 양들이 지키는 노력을 했다면 양치기 소년ⓑ을 불신하는 잘못도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재산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을 살아가면서 의도적이지 않지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생기고 때로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기 힘든 상황에서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때로는 뒷조사를 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확인해 보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믿을만한 정보보다는 믿지 못할 내용에 대해서 더욱 더 확신하면서 상대방을 거짓말 쟁이로 만들 때도 있다. 그리고 그때 상대방은 어떤 상처를 받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불신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책임을 지으며 자신의 불신은 정당하고 확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오해를 풀겠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양이 늑대에게 물려가는 그 순간에도 확실하게 믿었던 상대방의 불신으로 가득차 어떤 피해를 입어도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다시 게임이론으로 넘어간다면 상대방이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을 보고 그래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때 그만두어도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신의 그늘 뒤에 숨어 상대방의 노력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판단한다.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그리고 자신의 편견에 휩싸인 체 다양한 사실에 대해서 받아보려고 하지 않으면서 결국 제대로 사실을 파악하지도 않으면서 불신의 확신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혼자 불신으로 살아가면 뭐라 할 수 없지만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가쉽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양치기 소년ⓑ도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마을 사람들도 양치기 소년ⓑ를 원망하면서 자신의 재산인 양에 손해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양치기 소년ⓑ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양치기 소년ⓑ에 대한 판단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것이다. "그 양치기 소년ⓑ 때문에 우리가 큰 피해를 보았고 더 이상 믿지 못한다"

믿음이 잃어가는 상대방이 있다면 용기있게 상대방에게 직접 물어봐 오해를 푸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지 않고 상대방을 믿는 척 하면서 자신의 불신을 확신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어떤 것도 결국 불신의 뿌리에서는 상대방을 오해할 이유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상대방의 상황과 사정을 생각하지 않은 체 자신의 오만과 편견으로 결국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의 증명은 결국 어떤 증명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양치기 소년ⓑ가 늑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고 억울함을 호소할 때 그의 편에 서서 늑대가 왔다갔다는 증거를 같이 찾아보려고 했다면 그것은 상대방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같은 편이라는 마음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 믿고 안 믿고는 다음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을 자신의 기준과 편리함으로 불신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것은 상대방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을 확신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

누군가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이라며 제대로 서로 알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함부로 판단하며 가쉽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 그 불신의 뿌리를 파 낼 수 있기를 그냥 묵묵히 기도하라는 어떤 성직자의 조언이 생각난다. 억울하다고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믿어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어떤 불신의 가능성으로 또 다시 오해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늑대가 왔다 간 발자욱을 발견해 보여주어도 늑대의 발자욱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있고 이런 장난을 위해 늑대 발자욱까지 만들었냐고 더 불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신의 깊은 뿌리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 불신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려도 잘 모른다. 그저 두려움이 무서울 뿐이다. 그래서 불신의 숲 안에서는 그 울창한 두려움의 나무들 때문에 그 사이에 비치는 햇빛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체 두려움의 그늘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불신의 그늘 안에 갇어 두지만 결국 그 불신의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은 자신인 것을 매번 확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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