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응급실에 누워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일이었다. 옆 침대에 들어온 70대의 할아버지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다. 남편이 위급해지자 보호자로 같이 오신 할머니가 발을 구르며 어쩔 줄 모르시며 울먹거리셨다. 가까이 있던 나의 엄마는 어느새 할머니 곁으로 가서는 어깨와 손을 잡아주며 당황해 하지 않도록 옆에서 같이 있어 주셨다.
정신 멀쩡한 나는 엄마의 행동을 보면서 오지랖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마저 했지만 아마도 안타가워 하는 그 마음이 그저 지켜보고 계시기 어머니도 힘드셨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들어가 삼일동안 보내고 일반 병실로 들어가는 날,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을 지나가는데 응급실에서 울먹이며 발을 구르시던 그 할머니께서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잘가라며 마중 나오신 것이었다.
일반 병실에 들어갔을 때 맞은 편 침대엔 다음 날 수술을 받기 위해 들어온 아버지 연배의 환자분과 어머니 연배의 보호자분께서 들어오셨다. 보호자로 온 분과 나의 엄마는 이야기가 잘 통하셨는지 같이 커피도 드시러 나가시고 서로 병실 안에서 수다도 자연스럽게 하시고 병실에 있는 이틀동안 가까워지셨고 그로 인해 병실 안에서 나의 생활도 별 부담없이 편안하게 눈치 보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퇴원하는 날에는 병동 앞까지 마중나오시며 아쉬움과 이야기하시며 인사했었다.
중환자실에서 나올때, 병실에서 퇴원할 때, 그 간단했던 마중들이 나에겐 참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별 말도 없었고 그냥 특별하지도 않은 그 인사 속에서 말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쩌면 자신이 얼마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떤 누군가에게 더 이상 위로 받을 수 없는 관계라면 특별히 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덜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 우정 그 많은 대표적인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 그 내면은 위로라는 작용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인간은 충분한 위로를 받으며 살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든 혼자서는 쉽게 포기할지 모른다. 반대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 위로를 통해 상대방이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스스로 존재의 가치가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위로 받는 것 만큼 우리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고 상대방이 힘들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끔은 위로를 위해 상대방을 분석하고 상대방이 무엇이 필요하겠다 나름대로 판단하며 상대방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위로라는 말로 상대방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상황이나 경험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고 그렇게 위로 받고 싶어하는 상대방에게 '너는 아직 괜찮다' 라는 위로를 하려고 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로의 작용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인디 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이라는 노래 제목이 직설적으로 알려주듯 모두의 가슴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매직 표현(magic expression)은 세상에 없다. 위로는 상대방의 마음을 분석해서 그에 맞는 처방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상대방의 편에서 들어주는 인내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위로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은 위로가 가지는 일반적인 착각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마음을 여는 요소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지적인 분석력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오히려 아무 말 없는 미소...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 그리고 나는 너의 편이라는 눈빛...
위로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결론이 아니라 문제를 보기 위한 서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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