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라고 이야기 했지만 정작 인식의 주체인 나 이외 그것을 증명해줄 수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아닌 타인이 그 존재에 대해서 증명해 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중의 태아가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스스로 대변할 수 없고 그 대변할 수 없음은 태아가 생각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제 3자 관찰자의 증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요즘 유행하는 가루상 개그를 보면서 무표정하고 사람의 말을 하면서도 결국 '사람이 아니무리다' 하며 스스로 존재를 부정한다고 해도 그저 개그로 웃어 넘길 수 있지만 스스로 부인하는 존재의 생명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다소 엉뚱하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생명이 가지는 재밌는 현상은 반응이다. 무엇인가 자극에 반응하게 되며 그 반응은 일차적으로 생명에게는 말 그대로 스트레스이다.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신경정신학적 스트레스, 소위 현대 사회에서 말하는 스트레스로 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생각해볼 생명의 증거는 '고통'이 아닐까 싶다. 모든 생물학적 생명체가 아닌 우리 인간의 생명으로만 제한해서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하게 가장 피하고 싶은 '고통'이라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고통을 통해 우리는 다른 이들의 고통을 보며 연민과 동정을 느끼고 그 고통이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서 공감과 이해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비록 내가 느낀 구체적인 고통의 과정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아도 '보편적인 공감과 이해'를 고통을 통해서 어느정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만약 고통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은 일회성이고 그 일회성인 고통은 반복되어도 혼자만이 가져야 할 짐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의 고통을 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가지는 사회적 유대감은 고통에서 시작될지 모른다.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사회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쉬운 도구는 '고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흐름 안에서 태중의 태아를 생각하면, 낙태 시술에 비추어 보면 가루상처럼 얼굴 표정하나 느낄 수 없지만 시술 도구에 저항해 몸부림치는 태아의 반응은 고통에 대한 아픔이며, 그 모습을 보는 우리들도 같이 고통을 느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태아는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믿는다.
한때는 건강상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를 주는 고통을 이 세상에 왜 하느님은 만들어 놓았을까... 이 고통만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더욱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고통의 요소가 더욱 더 인간을 인간스럽게 만들고 인간을 희망안에 존재하게 하는 도구임을 느끼는 순간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수많은 고통과 인간의 고리 안에서 알 수 없는 섭리를 그저 '고통의 신비'라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Patior ergo sum - 나는 고통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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