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12, 2012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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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종일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사진 한장이 있다.


쓰레기를 치우던 어떤 분이 병자 영성체를 위해 성체를 모시고 가는 사제를 향해 멈추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분에게 다가오는 성체도 아니고 지나가는 성체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이 사진은 단지 사진 작가가 찍었다고 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이런 장면을 위해 만들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천주교 (가톨릭)에서는 성체는 매우 소중한 대상이다. 어쩌면 '대상'이라는 표현보다 그 자체로 성화(聖化)된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고 있다. 즉,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결국 그분의 희생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며 그 형장의 전날 최후의 만찬을 통해 그분의 몸과 피는 지금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이다. 교리적 해석이나 다른 종교의 반론 등을 떠나서 그냥 이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지는 아름다운 사진임에 틀림없다.

상을 살아가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항복하거나 치욕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그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릎을 꿇는 대상이 충분히 꿇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소위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이고 분명 쉽지 않은 행동이다. 그만큼 세상 살이에서 무릎을 꿇는 일보다는 누군가 꿇는 무릎 앞에 서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사진을 천천히 보면서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진 속 주인공의 마음의 간절함과 그 경건함, 그리고 성체에 대한 그 순수한 존경심이 보였고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배경은 마치 천국으로 가는 작은 계단같은 아련한 영상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나무도 마치 기도하는 사람을 따라 같이 무릎을 꿇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성체를 향해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기에 자신이 가진 짐을 잠시나마 놓고 쉴 수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삶의 고단한 무게만큼 무거워 보이는 저 짐을 놓게 해준 것이 바로 성체이자 기도인 것이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무릎을 꿇어 무릎이 아플 수 있겠지만 삶의 짐을 잠시 놓고 했던 저 분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느날 자신의 딸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딸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과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 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딸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버지다운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버지라고 한다. "내가 아버지야" 하면서 아버지로 받아야 할 당연한 존경과 위치를 가족들에게 요구한다면 아버지의 권위는 존재할지 몰라도 자신의 자식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아버지임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 높이에서 아이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비록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권위는 사라질지 몰라도 아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과정같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기꺼이 꿇을 수 있는 무릎에는 존경과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치욕이고 억압에 의한 것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기꺼운 마음... 그 마음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싶다.

그래서 어느날 나의 기도 안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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