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21, 2012

보수와 진보, 대립에서 균형으로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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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가 끝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분석을 한다. 결과가 나온 이후 분석은 더욱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 수 없을 때는 모든 가능성을 이야기하다가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자신의 논리가 맞다는 것을 맞추기 위해서 결과에 맞는 해석을 한다. 그런 분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분석 중에서 가장 불편한 분석 중에 하나, 그렇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듯한 분석은 바로 보수(conservative)와 진보(progressive)의 대립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규정하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대립의 이유로 내놓는 보수와 진보란 도대체 무엇인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을 두고 진보라 부르며, 무엇을 보고 보수라고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진보의 논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받을 때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를 분석하기 위한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가 아닌 좀더 근본적인 정치의 본질에 대한,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정치 철학의 본질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보수란 무엇인가? 진보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보수주의(이하 보수)와 진보주의(이하 진보)는 정치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정치란 속성이 가지는 특성때문에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특히 정치가 가지는 통치 이념 그리고 행정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이념으로 자리잡기 때문에 단순히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그리고 심지어 문화에도 보수와 진보의 이야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하지만 그 모든 정의를 떠나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보수와 진보를 풀어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정의하는 보수와 진보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활동 안에서 갈등과 문제가 일어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에... 

보수는 기존의 시스템(제도 및 정책 등)에는 문제보다는 개인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보고,
진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기존의 시스템이 더 문제라 보는 

견해라고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고 싶다. 즉, 보수는 현재 운영되고 있는 사회, 경제적 정책 및 운영 등, 시스템 자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고 진보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시스템에 있다고 보는 견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본다면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에서는 기존의 방범 시스템이나 사법 시스템은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잘못을 교화하기 위한 교정 시스템으로 개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으며 진보는 그 개인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는지 사회적인 약자로 억압받은 것은 아닌지 사회 구조에서 만들어진 범죄가 아닌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양분해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도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과 다양한 입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기존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 시스템에서 잘 적응을 하고 그 시스템에서 적당한 생활을 해왔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자주 보는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시스템이 변화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진보적일 수 있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단순히 이념적 자신의 성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요약하자면, 

보수: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보: 문제의 원인이 시스템에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로 요약하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다. 


¶ 인간의 편의성에 의해 구별되는 이념들 

이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학교 시절 철학 서적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바로 "세상에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법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이다. 단순히 우리의 머리 속에는 냉전 시대의 대립 구조로 보여지는 두가지의 이념은 무엇이 좋다 나쁘다 그래서 어떤 것은 선택해야하고 반대 것은 버려야 한다는 흑백 논리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이념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이런 이념의 개념으로 살펴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한정된 자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써야 문제가 해결될까? 라는 질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화 시켜서 자본주의는 자원을 경쟁과 생산 주체들이 효율적으로 만들어 내어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원은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고, 공산주의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자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생산을 공동으로 해서 그것을 평등하게 분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과 함께 야심차게 공산주의 경제를 실현하겠다는 생각은 인간의 욕심과 다양성은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결국 공산주의는 스스로 몰락의 시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다양한 도구에 의해서 공산주의는 점점 패배한 이념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마치 이념은 비교 우위가 존재하는 것인양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비해 우수한 이념이라고 생각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놓고 도덕적 인간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공산주의는 포기해야 한다고 구별하기 시작한다. 소위 역사적으로 실패한 이념에 대해서 모든 가치적 판단에서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사회의 큰 문제로 부각되고 1%와 99%의 구별을 만들어 내고 자본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를 넘어서서 인권 및 생명보다 자본이 더 우월한 세상이 되어서 기본적인 생존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같은 도시에 살지만 다른 쪽의 세상은 상상하기 힘든 부를 누리며 양극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알게 되었다.  

시 원론으로 넘어와서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모두 결국 인간을 행복하기 만들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출발점과는 다르게 인간이 가지는 욕심과 공포의 작용으로 오히려 이상적으로 처음에 생각했던 이념적 순기능과는 관계없이 세상을 병들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념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오히려 이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으로 대립되어 서로가 서로를 구별하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지는 이념의 문제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보다는 상대방의 이념을 짓누르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잔인함은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적으로 이성적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을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제거하고 사라지게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이념의 발달은 결국 서로를 죽이기 위한 맹목적인 내용으로 변질되고 그렇게 변질된 상황에서는 도대체 왜 이념이 만들어진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고 구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아군과 적군을 만들어 객관적으로 아무런 미워할 이유가 없지만 서로를 비난할 수 있는 적절한 이유를 이념으로 핑계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이념은 결국 인간의 욕심과 공포로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 견고한 도구로 상대방을 이겨야하는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이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더욱 더 하지 않는다. 


¶ 이상적 진보주의자는 현실적 보수주의자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진보를 지향한다. 단순히 진보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진보를 지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도 이겨낼 수 없는 사회적, 구조적 장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는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발생했고 더 구체적으로는 기득권층에 유리한 환경에 사회적 약자들이 계속해서 많이 발생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념은 옳고 그름의 판단의 문제이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믿는가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 믿음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한 이념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러나 2012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나는 이런 이념이 믿음의 문제이지만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는 결국 그 믿음은 더욱 더 쉽게 흔들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자 대결이 된 대선의 결과는 많은 부분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보수와 진보의 태그를 붙여서 생각해본다면 사회, 정치, 경제의 전반적인 문제에 있어서 박근혜 당선자는 보수의 성향을 가지고 있고, 문재인 후보는 진보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공통되는 공약을 제외하고 두 후보를 구별하였던 가장 큰 부분은 현재의 시스템을 얼마나 어느정도 규모로 바꿀 것인가에 대한 이슈가 많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박근혜 당선자를 보수, 문재인 후보를 진보로 놓고 보았을 때 결과는 결국 보수의 승리로 돌아갔다. 즉, 투표권을 행사한 국민들의 과반수 약 2%의 좀 더 우세하게 보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 많은 사람들의 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보면서 진보의 승리를 어느정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심지어 축제분위기까지 이끌어졌던 진보의 많은 지지자들에게는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옳고 그름의 강력한 무기와 당위성을 통해서 진보의 승리가 필연인 것처럼 강하게 믿었던 사람들에겐 분명 과반수, 51.6%의 투표자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가지 진보의 가득찬 이상과 이성의 굴레 안에서 오히려 '우물안 개구리'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은 결과가 나온 다음 우연히 들어온 여론 조사의 세대별 지지도였다. 단순히 분위기로는 20~30대 층에서 문재인(진보)의 지지도는 90%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나만큼 20~30대도 세상의 부조리한 부분들이 많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데 다른 사람들도 내가 보는 세상과 비슷한 것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얼마나 큰 착각과 상상을 했는지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아무리 이상적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서 미소짓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고 해도 당장 현실에 부딪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현실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어쩌면 아주 간단하지만 "남의 암보다 나의 감기가 더 급할 뿐이다." 


¶ 각 세대가 가지는 문제를 찾아내는 정치공학

20대 / 20대의 보수화라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20대의 많은 수는 아직 사회에 안정적인 자리에 자리잡고 있지 않고, 취업을 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하고 쉽게 말해 기존의 시스템에 적응해서 진입해야 하는 세대들이다. 앞서 정의한 정의에 의한다면 약 30% 정도의 20대가 시스템의 변화보다는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개인의 역량을 최대화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본다. 상당히 의미있으면서 스스로도 20대가 가지는 문제가 나에겐 정말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왜 그들은 진보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20대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과 많이 다를 수 밖에 없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들 중 많은 아이들은 현재의 취업난, 경쟁 교육 상황에서는 시스템이 바뀌는 것, 아무리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며 바뀌는 모든 제도들이 부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열심히 준비한 제도와 다르게 바뀌어 버린다면 자신들에게는 손해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20대는 30대와 다르게 아직 자신의 꿈에 대한 미래를 꿈꾸는 세대이다. 즉, 아직은 자신이 일해야 하는 직장이 정해지지 않고 자신이 하는 만큼에 따라서 원하는 대기업이나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세대일 것이다. 그런데 진보는 자신들이 가고 싶어하는 재벌과 대기업을 규제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상당히 현실적으로 20대는 대기업의 일자리가 더욱 더 많아져 자신들에게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을까? 쉽게 말해 골목상권을 장악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가슴으로는 연민을 가진다고 해도 정작 자신이 그런 횡포를 부리는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머리로는 대기업을 선택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30대 / 그에 비해 30대는 어느정도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 직장도 가지고 살아가지만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의 부조리를 가장 몸으로 느끼는 세대일 것이다. 직장은 가지고 있지만 결혼을 하기 위해, 집을 구하기 위해 현실적인 대출과 생활의 최전선에 살아가야 하고 현실의 문제에서 부조리한 제도가 조금이라도 개혁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면 자신들의 삶이 더 확실히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30대의 진보에 대한 지지도는 20대에 비해 10% 정도 더 늘어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20%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된다. 적절한 숫자일지 모르지만 30대 중에는 처음부터 든든한 자본으로 이미 여유있는 삶을 가지는 자본적 의미의 상위 계층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40대 & 50대 / 가장 주목하고 싶은 세대는 바로 50대였다. 그들은 10년전 대선 때 야당후보에게 투표를 했던 많은 주역이고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를 겪으면서 80년대 말 대통령 직선제를 만들어 낼때 넥타이 부대였고 그 아래 세대인 40대는 학생운동의 주된 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보수에 대한 지지도는 상당히 높다. 40대, 50대 각각 50%와 60% 특히 50대는 투표참여가 거의 90%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무엇이 그들을 보수를 지지하게 만들었을까? 다시 넘어오자면 그들은 왜 기존의 시스템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몇가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 있을 것이다. 40대, 50대는 이제 어느정도 사회적 안정과 가정을 이끌어 가는 세대가 되었다. 상당수는 자산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 경제 구조로 보았을 때 그 자산의 대부분은 부동산일 가능성이 높다.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안정성과 더불어 사회에 적응하게 되면서 보수화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지만 현대사의 특수성에 비추어 보면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목숨을 바쳐 싸워온 세대에 기대하는 지지율에는 크게 모자르다는 생각마저 든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실적 보수주의자를 이길 수 있는 이상적 진보주의는 없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아주 현실적으로 세간엔 '어떤 후보가 아파트 값을 덜 내려가게 하겠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그런 현실의 문제, 자산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 앞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시스템을 제시해도 쉽게 들어올 수 없지 않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정치공학적인 접근에서 이념의 구별로 해석하는 것은 이제는 낡은 해석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삶의 문제이다. 당장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올지에 대한 감동이 있지 않다면 이념적 공방과 도덕적 자격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먼 산 이야기이다. 어쩌면 세상은 대통령 하나로 쉽게 좋은 나라가 되지 않는다는 현실감을 많은 경험을 통해서 체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현실에 더욱 부각되는 우리와 다른 현실들 

보수든, 진보든 결국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해결하고 싶은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임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단지 믿음의 문제로 상대방의 방식이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은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과는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단지 내가 진보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각하는 방식, 특히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나의 생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의 이념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장 걱정되는 문제는 이념을 대의명분으로 결국 사익을 추구하려는 모습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보수와 진보 그 어떤 정치 논리이든 국민들이 더욱 편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철학적 근본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사적 이익을 위해서 권력을 이용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진정한 보수는 자신의 이익보다 국가적 이익에 더욱 강력하게 주장한다. 특히 진보보다 더욱 더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보수란 자신이 지켜가고 있는 시스템이 잘 운영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자신의 시스템과 다른 나라와의 시스템이 충돌하는 상황,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특정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과정에 있어서 더욱 더 강력하게 저항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켜온 가치가 국민들을 위해 더욱 좋다고 믿어왔기 때문이고 그것을 보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외교는 자신의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불쾌할 수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상당히 불쾌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의 사회간접자본을 민영화하여 기존의 시스템을 변경하고 '합리화, 정상화'를 대의명분으로 지키지 않고 민간에 특히, 외국 자본에 팔려는 것이 진정한 보수주의의 모습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민영화 과정에서 특정 집단에 큰 이익이 보장되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보수주의의 탈을 쓴 사익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경쟁의 논리로 자라와서 경쟁으로 성취해야할 희망이 직장이 되어버린 20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궁금하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 특히 개인적으로 느껴왔던 '사회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소외 계층'에 대해서 얼마나 공감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20대에게 달렸다는 것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20대가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하다. 기업의 욕심에 의해서 직장에서 얻은 불치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현실을 볼 수 있지만 그 현실이 자신에게 얼마나 현실감있게 다가올 수 있는가이다. 만약 부도덕한 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가치가 자본과 자기 성장인 것만 배운 상황에서 다른 이들, 특히 소외받은 이들의 도메인(domain)에 얼마나 관심가지고 해결할려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표면적으로 보이는 이념의 다툼에서 다투는 사람들은 상처만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은 보이지 않는 소수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추구하는 이념이 아무리 진보라고 표명해도 자신의 이해관계 앞에서는 당장 진보를 고집할 수 없다. 당장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현실이 어려워지고, 소위 경제가 어려워질 수록 우리 사회의 많은 구성원을 보기 보다는 ⓐ 자신의 현실부터 챙겨야 하기 때문에 점점 보수에 다가갈 수 밖에 없다. 현실이 어려워지고 소위 생활고에 힘든 상황에서는 쉽게 기존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는 용기도, 그렇게 해도 내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도 사라지고 무엇보다 어떻게든 현재의 시스템에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 생존의 문제가 있는 사람에겐 분명 적응할 수 있는 노력에도 힘겨운 사람들에겐 진보적 생각은 생존적 이념이 될 수밖에 없다. 정리해고된 사람, 산업재해로 병든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생존의 문제로 다가서고 그들에겐 보수의 시스템에서 수용할 수 없기에 자연스럽게 진보의 이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 와 ⓑ 의 계층이 양산될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비율을 생각해보면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는 ⓑ 의 진보는 절대 다수가 될 수 없다. 정말 소수가 된다. 만약 우리 사회가 이런 약자에 대한 공감이 자신의 현실에 점점 사라진다면 분명 그들은 생존에서 포기의 삶으로 돌아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이념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있는 중산층보다는 삶의 현실에 어려워 어떻게든 살아가는 중산층이 증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지속가능한 정치를 위한 이념의 균형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중산층마저도 줄어들어 생존의 문제에 접근하는 계층이 증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혁명에 필요한 평형 상태에 이르기 전에 정부는 소외 계층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시대나 근현대사와는 다르게 이제는 인권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의 정책과 행정을 비롯한 시스템이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생존의 문제에 놓인 극빈층은 증가할 것이다. 특히 소득의 불균형과 소득 계층간의 분화가 점점 심화되면 더욱 심해진다. 

순히 대선 결과를 통해서 세대의 민심을 통계를 통해서 일반화시켜서 보수 혹은 진보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가 겪는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더욱 더 필요하다. 예를 들어 확연하게 30대는 진보의 지향성이 강하다. 왜 30대가 진보의 지향이 강한지에 대해서 30대가 원하는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정부는 바로 이 점을 위해서 바꾸어야 할 시스템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보수의 지향이 강한 40대 이상의 국민들은 무엇을 지키고 싶은 것인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각 세대가 가지는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노력이전에 많은 보수와 진보는 자신들의 논리가 맞다고 이야기하기 위한 근거로 통계자료를 활용한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보수와 진보는 누가 이겨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의 대상이고 이념은 내가 옳기 위해 너는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사진출처: CJ E&M

정부가 이념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이런 측면에서 경계해야한다. 즉, 다양한 계층을 포용하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를 단순히 한쪽 이념의 방법으로 제시한다면 분명 상대방 이념의 반발뿐만 아니라 상대방 이념이 가지는 강점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으로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형을 가지는 특히 정책의 실효성을 위해서 각 세대가 가지는 지지 성향을 통해서 어떤 정책에 어떤 이념이 필요할지에 대한, 이념을 넘어선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 


선 결과가 나오고 진보와 보수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는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했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진보는 종북세력이라며, 빨갱이로 몰아가며 마치 "너는 어느 대학을 나왔으니 너는 소극적이야"와 같이 전혀 상관없는 부분을 연결해서 상대방을 몰아가는 태도만큼이나 보수는 모두 틀렸고 합리적이지 않고 꼴통이다란 태도도 좋아 보일 수 없었다. 보수, 진보 모두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념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서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느껴지는 죄인의 낙인같은 이념의 대립을 넘어서 균형감을 가진 보수와 진보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여전히 시기상조일까 아쉬움이 가득하다. 

이념의 갈등을 떠나 이념이 가지는 근본적인 존재이유를 생각해보자. 어떤 이념이든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분열과 대립으로 만든다면 분명 우리가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 (1874-1965) 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If you're not a liberal at twenty you have no heart,
if you're not a conservative at forty you have no brain.”
"20대 때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40대 때 보수가 아니면 뇌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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