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7, 2012

프레임 - 인식의 한계성에서 상처의 프레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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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 프레임이란 정치에서 상대방과 싸워 이기기 위한 전략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코끼리를 생각하지마" 라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 머리 안에는 이미 "코끼리"가 자리잡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설득해야하는 과정 안에서도 사실 이러한 정치적 프레임은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특히 토론의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주제를 먼저 끄집어 내어 그 토론을 유도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불리한 내용으로 상대방이 반박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방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언어와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런 정치적인 프레임의 전략은 적용되게 되는 것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복지 국가를 위해서 세금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정치가에게 상대방 정치인은 "세금 폭탄"이 된다 라고 주장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그대로 "세금 폭탄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을 보는 대중의 입장에서는 아니다라는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잘 들어오는 "세금 폭탄" 그리고 폭탄이라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대상에 더욱 더 집중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미 반박을 위해 상대방이 "세금 폭탄"이라는 이야기를 거드는 순간 대중들에게는 다시 한번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 이후 폭탄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네거티브(negative)한 요소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상대방의 프레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제시하는 어휘적인 인식의 프레임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세금 폭탄이라는 대중적인 타겟으로 삼은 표현에 대응하여 "부자 감세"라는 좀 더 현실적이고 비록 부자인 사람들에게는 부정적인 내용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대안적인 프레임으로 전환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합리적 동물인가 

다수결은 민주주의 꽃이다. 그리고 다수결만큼 합리적이고 간단한 방법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인간 개개인이 모두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둔다면 다수결은 상당히 좋은 제도이다. 비록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의롭다'란 범주에 넣기 힘든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고 해도 분명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공리주의적 측면으로 보았을 때 분명 적절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다수결이라는 방법을 떠나 인간 자체는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을 가장 합리적으로 만들면서, 반대로 가장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가장 역설적 요인은 바로 인간의 이해관계이다. 쉽게 말해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지에 대한 선택이다. 비록 양심에 찔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합리적 사고를 포장하여 선택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NIMBY (Not in my back yard)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핵폐기물이나 송전탑 설치와 같이 환경보건적 영향이 존재하는 내용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를 통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집 주변에 납골당이 생겨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납골당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모습이나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등의 모습은 얼마나 합리적 포장을 통한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 안에도 사실은 프레임의 전략은 항상 숨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론이 중요하고 다수의 의견으로 움직여야 하는 경우에는 특히 더 강하다. 예를 들어 "납골당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 라는 소문을 듣게 되는 순간, 실제로 집값이 떨어지는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하지만 다수는 "집값이 떨어진다" 의 프레임, 특히 "떨어진다"의 프레임으로 빠져 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후 프레임에 갇힌 후에는 다른 논리적 설득과 과학적 증거가 제시되어도 자신의 믿음과 선택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프레임의 여론 형성은 공정해야 하는 법률 시스템 안에서도 의외의 결과들을 보여주게 된다. [ 맹모삼천지교 - 학교 주변 납골당 금지는 합헌 ] 헌법제판소는 2009년 납골당을 학교 주변 인근 200m 근방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문을 제시했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망자 시신이나 무덤을 경원하고 기피하는 풍토와 정서를 가지고 살아왔고 입법자는 학교 부근의 납골시설이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규제하기로 결정한 것"... "납골시설 기피 풍토와 정서가 과학적 합리성이 없다해도 규제 필요성과 공익성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여기에서 사망자 시신이나 무덤을 경원하고 기피하는 ... 이라는 표현을 쓰었지만 사실 납골당은 그 기능과 형태에서 시신과 무덤으로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만 듣는 대중에게는 "경원하고 기피하는" 대상으로 동일화 시킨다는 점이다. 즉,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별개의 대상을 동일화해서 하나의 네거티브 프레임에 넣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서교육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에서 가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로운 영향"을 제시하여 결국 대중에게 공포에 의한 불안을 제시하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프레임의 논리는 다수를 만드는 과정뿐만 아니라 사실 소수에 의해 불합리하고 정의롭지 못해 보이는 내용을 잘 포장하는 내용으로도 적절하게 쓰이는 전략이라는 점이다. 더욱 더 재밌는 것은 아무리 후반부에 "풍토와 정서가 과학적 합리성이 없다해도..." 라는 단서를 통해 스스로의 합리성을 부정한다고 해도 이미 부정적 제시어에 의해 여론을 끌고 갈 수 있다는 것, 즉, "아무튼 전략" 이 쉽게 구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프레임 전략은 인간의 ⓐ 욕심을 자극하는 이해관계ⓑ 공포를 자극하는 부정표현 을 통해서 합리적 판단에서 멀어지게 하고 심지어 바르지 못한 선택에 확고한 신념까지 만들 수 있는 전략적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 왜 우리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욕심공포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욕심과 공포 전략은 왜 우리가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빨리 도달하는 것인가이다.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욕심은 자신의 눈앞의 이익에 관련되고 공포는 자신의 눈앞의 위험에 관련되어 있다는 심리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우리가 가지는 인식의 한계성은 이러한 욕심과 공포의 울타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요소는 이 두가지라고 본다면 세부적인 전략은 바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천사"라는 표현을 했다면 그 표현에 대해서 거부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천사라는 단어가 가지는 호감의 느낌때문이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각 단어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을 가지고 있다. 앞서 설명한 예 중 "세금 폭탄"이란 표현 대신 "세금 확대" 혹은 "증세 효과" 등의 조금은 중립적인 표현을 썼다면 아마도 폭탄이 가지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누구도 이런 설명 후 자신이 이런 단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기 때문에 내용을 확인해보고 좀더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라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어에 대한 무의식적 이미지는 의식의 단계 앞서 작용하기 쉽다. 천사란 표현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의 천사" 라는 표현을 듣게 된다면 죽음이 가지는 부정적 이미지가 결국 천사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넘어서 부정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네거티브 프레임의 가장 교묘한 방법은 대중적 부정어와 대중적 긍정어를 적절하게 섞어 쓰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도 결국 부정적 언어에 대한 프레임에 들어가버리기 때문이다. 프레임 전략의 가장 극대화는 바로 상대방에 대한 부정표현 (≒ 공포) 과 더불어 자기편에 대한 이익표현 (≒ 욕심) 을 동시에 자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국회의원이당선되면 "우리 동네 집값이 오를 것이다" 라는 프레임이다. 그 안에는 구체적인 과정이나 집값이 오를 수 있는 이유도 들린다. 그러나 사실 이미 "집값이 오른다"라는 명제의 프레임에 빠져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대부분 이유도 상당히 엉뚱한 내용들이 많다. (e.g.: 그 국회의원이 그렇게 부자인데 그정도 돈을 풀지 않겠어..., 그 기관에 영향력이 있다던데...)

§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숨은 프레임

비단 정치적인 내용에서만 이러한 프레임 전략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도 결국 작은 정치이고 따라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안에서도 결국 프레임 전략은 작용하는 것이다. 설득이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점이다. 설득은 단순히 자신의 주장이 선택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내 프레임 안에 상대방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동일한 과정으로 결국 인간의 무의식을 움직이는 과정은 욕심과 공포이다. 자신이 설득해야 하는 내용에서 상대방을 움직일려는 욕심의 요소와 공포의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험 상품을 파는 사람에게 상대방에게 어떤 프레임을 적용할 것인지는 가장 쉬운 예이다. 상대방에게 제시하는 세상은 교통사고도 많고 무서운 세상의 프레임으로 넣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보험 상품이 어떻게 보호를 해줄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쉽게 넘어가는 무의식의 프레임 전략이 한가지 더 있다. 바로 통계, 비율의 함정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30대 중 20% 가 ... 라는 통계적인 수치를 제시할 때 두가지의 무의식의 인식이 작용된다. 첫번째는 자료의 신뢰성과 두번째는 본인의 가능성이다. 이러한 통계, 비율에 의한 프레임은 사실 상당히 설득력을 준다. 그래서 정치에서도 여론조사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통계의 과정과 신뢰성에 대한 검증보다는 숫자 자체가 가지는 강점을 잘 활용한 부분이다.


새로운 영역에 이러한 프레임을 적용해보고 싶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상처의 프레임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설득의 프레임과 다르게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받게 되는 상처, 그리고 그 상처는 왜 반복되고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당히 합리적인 존재라고 믿고 우리의 결정또한 그러하다고 믿는 인간에게도 벗어나기 힘든 굴레가 있고 그 해결되지 않는 굴레가 마치 정치적 프레임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는 생각이었다.

§ 상처의 프레임

인간의 인식이 한계성을 가진다는 점만으로 이런 상처의 반복성을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가지는 상처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을 떠나서 왜 계속 반복할 수 밖에 없는가는 단순히 인식의 한계성과 함께 상처 자체도 자신이 만든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결국 프레임은 욕심과 공포로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프레임 안에서의 사고는 외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정치의 프레임과 비슷하게 상처의 프레임도 비합리적인 고집을 볼 수 있게 된다.

상처의 프레임은 우선 상처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앞서 얘기했던 "천사"라는 단어를 통해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사"라는 단어를 통해 호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이가 천사의 옷을 입고 있던 사람에게 어린 시절 폭행을 당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아이에게 결국 천사란 공포이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소위 외상(트라우마)라는 것은 대중적 느낌과 분위기와는 다르다. 즉, 자신이 가지는 상처의 프레임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특정 대상에 의해 만들어진 외상이 이후 경험하는 내용, 비슷한 유사 내용 등에 의해서 특정 대상만으로도 그 기억이 다시 반복되어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 외상후스트레스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되었을 때 그 환자에게 처방해 줄 수 있는 방법은 "해당 대상을 피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쉽지 않다. 특히 천사와 같이 일반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위해 많이 사용되는 대상이라면 더욱 더 힘들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부분도 결국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쉽게 말해 상처가 되는 대상을 피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정치적 프레임의 전략처럼 상처가 되는 대상을 전환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하루 다이어리] 마음의 상처

극단적 상태는 아니라고 해도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상처의 프레임은 쉽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헤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상대방 상처에 대한 프레임을 자극하는 것이다. 포장을 해서 가치관이나 다양한 표현으로 우회해서 설명할 수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경험적인 상처의 프레임을 자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결혼한지 10년이 되는 부부에 대한 부부클리닉을 보여주며 5년동안 말도 안하고 항상 회피를 하려고 했던 부부가 상담치료를 통해서 좋아지는 모습을 본 적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제시된 방법은 누가 잘못했는가에 대한 현상의 분석이 아니라 서로가 가지는 어린 시절, 성장기, 어른 시절에서 겪었던 상처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실 피상적으로 10년동안 부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어린시절부터 어른까지 받았던 상처의 내용정도는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어떻게 상대방에게 있어 상처의 프레임으로 만들어져서 상대방은 무의식적으로 그 상처의 프레임을 건드린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의 격한 상황에서 상대방이 자극이 될 수 있는 대부분의 표현은 바로 이런 상처의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한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첫째로 자라오며 항상 책임감으로 살아왔던, 그리고 중학생 시절에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져서 어린시절부터 경제적인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던 어떤 아버지에겐 "돈"이라는 단어는 필요하지만 항상 상처를 주는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남편에게 부인이 "돈"이나 "가장"이라는 의무감으로 공격한다면 일단 이성적인 판단이나 현실적인 판단을 하기 전에 자신에게 만들어진 "상처의 프레임"이 작동되고 감정적 폭발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상처를 잘 살펴보고 그 상처의 프레임이 무엇인지 지켜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의식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가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비이성적 행동이나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하는 것처럼 잘못된 여론을 만드는 것처럼 상대방이 가지는 상처의 프레임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면 결국 상대방에게 상처만 점점 주게 될 뿐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우선 상대방이 의식적으로 듣는다는 신뢰가 없다면 결국 자신의 상처들은 다시 상처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무의식적으로 들었던 상대방의 상처는 단순히 가쉽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 세상에 상처와 이별이 있는 이유는... ]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이 가진 상처의 프레임은 더욱 더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합리적 이성적으로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이 가지는 단순한 감정적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상처는 가지고 있고 그 상처의 원인도 있을 것이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다 바로 나타나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인간은 그렇게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는 상처가 무엇때문이고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전혀 없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단어의 수준에서 인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폭탄"에 놀라고 분개하는 정치적 동물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상처의 프레임을 인식한다는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필요하다. 하나는 ⓐ 자신이 가지는 상처의 프레임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고 ⓑ 상대방이 가지는 상처의 프레임이 무엇인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이다. 전자는 어쩌면 간단하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명확할 수 있다. 앞서 예를 들어 "천사"라는 단어에 두려워하지만 사실 그것이 상처를 만드는 본질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쩌면 우연히 천사의 가면을 쓴 폭력이라는 것과 그 폭력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프레임적으로 인식하는 단순한 대상과 내가 상처를 받게 되는 과정(메카니즘)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상처의 프레임을 인식하는 과정은 비슷하게 상대방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사랑에는 이런 인지 공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상대방이 가지는 상처의 프레임을 전환하게 할 수 있는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의 과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이 가지는 무의식의 수준이 강하면 강할 수록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그것은 우리가 무의식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가 느끼는 욕심과 공포의 프레임 안에서 상대방을 가두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두겹을 가진 상처의 프레임 안에서 상대방이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 탈 프레임의 인식을 바라며... 

비합리적 대중 안에서 끌려가는 방법은 아주 쉽다. 그냥 프레임 안에서 갇혀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프레임이 가지는 함정과 속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설득하여 세상에 정의로운 프레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지성인이 해야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정치적 프레임 전략으로 시작했지만 우리가 인식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가장 큰 시도는 바로 무의식의 인식에서 벗어나 좀더 관심과 노력을 가지고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게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다르다.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

문장가였던 유한준이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 의 발문에 붙인 문장이  바로 탈 프레임을 위한 가장 실천적 방법이 아닐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프레임을 벗어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언론의 진짜 기능은 바로 우리가 무의식속에 비판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탈 프레임이다. 뿐만 아니라 상처의 프레임도 같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시작은 바로 내 상처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의 프레임으로 다시 상처받지 않을 수 있도록 서로가 도와주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상처의 프레임을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 아닐까. 우선은 알아야 한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일상적으로 아니라 집중해서 의식적으로 말이다.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은 알게 되고 상대방의 상처가 자신의 상처인듯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보이는 상대방은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내 상처의 프레임도 벗어나게 해줄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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