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4, 2013

인터넷은 우리를 똑똑하게 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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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양자역학에 빠져 있던 시절,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재미있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아주 간단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익숙한 방에 들어가는데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암흑같이 어두운 상황이고 피곤함에 바로 침대로 직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익숙한 걸음으로 침대쪽으로 다가가 아무런 의심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침대는 그날 낮에 누군가 방에서 빼내갔다면 이 사람은 어떤 운명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정말 존재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자기 방에 익숙한 사람은 자신의 침대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침대에 바로 누워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침대가 사라질 수 있다는 조금의 의심이나 개연성이라도 느꼈다면 분명 그렇게 쉽게 침대를 향해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존재란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실제 존재하는가? 단순히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하면 알 수 있는 물건도 우리의 인식에 따라서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인터넷에 있는 '정보'란 진정 존재하는 정보인가 아니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자연과학조차도 의견과 접근이 다양한 세상에서 집단 지성 (collective intelligence) 이 가능하여 개개인의 지적 능력이 한계가 있어도 그 집합체는 정말 모두가 바라는 진정한 지성으로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꾸웠던 한가지 착각은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소위 웹 2.0이라며 집단 지성 등 다양한 인터넷의 기능들이 인간의 인식과 지식을 넓혀 줄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주었지만 정말 그런 세상이 다가왔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아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세상 때문인지 지식에 대한 열망, 호기심에 대한 갈증은 더욱 더 줄어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가끔 어이없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많은 초등학교 학생들 중에는 참치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설마...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지식 단계의 앎에도 그리 큰 열망이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참치가 어디서 오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도 자신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면 알려는 의지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도구가 좋다고 우리의 인식이 넓어지는가의 문제이다. 즉, 아무리 인터넷을 쓰기 편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아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식에 대한 추구는 개인의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이란 것이다. 나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거리조차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인식의 다양성이다. 인식의 다양성은 앞서 말한 우리의 지식은 정말 인터넷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어주기도 한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만큼 우리는 인식한다. 따라서 인식이란 시각, 청각 등의 감각적 기능이 정상이라고 자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지를 가져야 가능한 과정이다.

리의 인식만으로 우리는 평화로운 선택이 가능한가? 

인터넷의 정보는 정말 무한대에 가깝고 해답을 찾지 못해도 어딘가에서는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사실이라면, 즉, 우리가 모든 해결책을 인터넷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식은 개인의 현실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절박함, 다른 표현으로 근접성이 클수록 그 의지가 강할 것이다.

를 들어 우리는 독일이 예전에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최소한 모른다고 해도 인터넷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분단의 사실 가운에 동독의 영토 안에 서베를린 / 동베를린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가 독일사람도 아니고 유럽사람도 아닌 한 소위 베를린 장벽이 왜 있었는지, 그리고 그 위치가 마치 우리나라의 분단 38선과 같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동독 안에 있는 지역을 두개로 나누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나의 삶과 그리 큰 근접성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사실에 대해서 왜 그런지 호기심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왜 이런 엉뚱한 상황이 왜 역사적으로 가능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양한 접근을 할 것이다. 근접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 해도 자신의 호기심의 크기는 그 근접성과 상관없이 인터넷을 좋은 도구로 자신이 가진 지식과 인식의 확장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러나 사실 우리의 인식은 아무리 우리의 삶과 근접한 일이라고 해도 꼭 그렇게 모두가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탈때 사람들이 빨리 가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서 있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바쁜 사람을 위한 배려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장려되고 마치 우리나라의 미덕처럼 강요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이로 인해 에스컬레이터 고장과 수리가 더 증가했다. 오히려 에스컬레이터에서 왼쪽을 막고 있으면 심지어 도덕적 비난까지도 감수해야할 때도 있다. 무엇이 더 공익을 위해서 좋은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전 누군가 '무엇이 옳다'는 가치판단을 미리하는 경우에는 아무리 우리의 삶과 가까이 있다고 해도 누군가 해준 가치판단에 의해 더이상 판단하거나 비판하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그런 대상이 배려라는 미덕이 먼저 주장될 때 더이상 반박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연출된다. 만약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놓으면 대부분 "그럼 그런 배려심도 없어야 하냐! 너는 바빠도 항상 걷지 말고 멈춰라!" 등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느날 오랫만에 예능에 출연한 여자 연예인을 보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분노하며 소리치셨다. "어디 애 낳고 뻔뻔하게!" 그 이야기는 루머로 떠돌던 연예인의 이야기를 거의 사실이라 강하게 믿으며 루머라는 반박에 대해서도 전혀 믿지 않으며 오히려 도덕적 가치를 들이대며 분노하시는 것이었다. 해당 연예인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반박 내용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고 다양한 이야기의 근원지가 어딘지, 사실과 주장, 그리고 전혀 관계없는 소문의 내용이 뒤섞여 누군가에게 들은 내용이 마치 사실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그 도덕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연예인이 꼴보기 싫을 뿐이다. 마땅히 그 루머때문에 개인적 손해를 본적도 없고 사실 전혀 관계 없는 연예인의 문제라면 루머를 굳게 믿으며 화내는 것보다는 사실이 아닐거야 하며 연민의 정을 배푸는 것이 개인의 감정이나 화를 조절하는데 더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넘어와 이런 우리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한계성을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해결해줄 수 있을까? 우리의 인식이 좀더 사실에 가까워지고 우리가 정의와 도덕의 잣대를 제대로 댈 수 있는 근거를 인터넷을 통해서 도움을 받는가라는 질문이다.

럴 수 있다면 그냥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터넷에 익숙해지도록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럴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이기에 한계성을 가지는가?
그리고 소위 집단 지성을 비롯해 인터넷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왜 이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너무도 익숙해져서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어색한 상황, 심지어 모바일 시대를 겪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같은 인터넷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로 있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그것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더욱 더 큰 문제는 만약 우리가 더 평화롭기 위해,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인터넷의 다양한 기술과 기반을 만들었던 과학자, 공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오히려 우리가 인터넷의 노예가 되어버린다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하는 정보조차도 자본과 같이 불평등이 생기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인터넷을 우리의 벗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식은 원래 불완전한 것... 심지어 불안전한것... 

앞서 언급한 세가지의 예를 다시 한번 돌이켜 보자.

① 우리의 삶에 근접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인식하고자 하는 다양한 주제와 호기심만 존재한다면 인터넷은 분명 우리에게 큰 도구가 되어준다. 이 부분은 분면 우리에게 정보통신이 주는 우리의 가장 큰 혜택이 될 수 있다.

② 근접성이 높아도, 우리의 직접적 삶이라도 익숙한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별다른 비판없이 인식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일깨워주거나 영감(inspiration)을 준다는 의미에서 인터넷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손쉬운 공간이 되어준다.

③ 믿음의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지극히 개인의 신념에 관련된 문제들에서 어떻게 인터넷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명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요즘은 이런 잘못된 루머의 양산이 인터넷을 통해 더욱 더 커져가는 것은 아닐까? 

가지의 예를 보았지만 사실 인식은 인터넷의 문제가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호기심도, 비판의식도, 믿음의 문제도 결국 개인의 판단이고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세가지 예를 통해서 인식의 시작, 인식의 발전, 인식의 정착 이라는 단계적 차원에서 인터넷은 정말 우리의 삶에 이로운 기술이 되어줄 수 있는지 알고 싶다. 인터넷을 떠나 인식의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기본적 전제를 두어야 한다.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한 것이란 점... 불완전하다 못해 불안전하다.


TED 의 [ Beau Lotto 의 Optical Illusions, How we see ] 를 한번 보면 인식은 우리의 감각에 우선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그 감각조차 얼마나 많은 착시를 보게 되는지 알게 해준다. 즉, 우리가 받아들이는 현상조차 불완전한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야 더 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은 감각의 정보뿐만 아니라 우리의 편견, 그리고 우리의 이해관계 등 다양한 정치적 관계 위치에 따라서 우리의 인식을 변경하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은 불완전하면서 동시에 불안전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절대적 완전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 발전이 비록 더 좋아진다의 의미는 아니지만 부조리와 모순을 조금씩 끄집어 낼 수 있는 즉, 인식의 발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준다. 다시 말해 우리의 감각이 완벽하고 모두가 동일한 감각으로 받아들여 착시 현상과 같이 보는 사람에 따른 시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식은 다양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끊임없는 인식의 발전은 우리가 보지 못한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를 우리의 삶에 어떻게 이득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한 결과이다. 분명 인터넷도 그런 기술 중 하나가 되어줘야 할 것이다.

식의 시작을 위한 인터넷 - 호기심을 자극하는가? 

인식의 시작을 위해 인터넷은 좋은 기술이 되어주는가? 분명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정보가 존재하는가이다. 검색엔진을 통해서 잘 찾아보면 정보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수 있는가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조금은 다른 주제를 이야기해본다. 컨텐츠(contents)라는 단어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컨텐츠 산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아무리 좋은 기반시설(infrastructure)가 있어도 즐기고 사용할 컨텐츠가 없다면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컨텐츠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그에 따라 컨턴츠의 양도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컨텐츠의 양도 증가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냉정하게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컨텐츠 - contents : 주로 복수로 쓰이면서 무엇인가를 담고 있는 전체적인 무엇인가 혹은 그 내용들 자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목차라고 부르는 것도 컨텐츠라고 이야기한다. 요체는 아무것이나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제와 일정한 맥락을 가지고 그 주제와 맥락에 맞는 내용물들이 쌓여있는 것을 컨텐츠라고 부른다. 

렇다면 우리의 의식안에서, 특히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용자 입장에서 컨텐츠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것이 가장 먼저 연상이 될 것인가? 한때 유행을 선도했던 UCC 도 사용자제작'컨텐츠'이다. 바로 사용자들이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에 맞는 플랫폼에서 여러사람들이 만들어간 공동의 작업물이 바로 컨텐츠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동영상 혹은 동영상에 관련된 방송 미디어에 관련된 제작물을 컨텐츠 혹은 컨텐츠 산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그러나 UCC 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그런 동영상을 보여주는 유투브(youtube)같은 서비스가 아니라 구글 맵스나 구글 어스와 같은 지도 서비스가 더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들은 각자 경험한 내용을 지역정보(geographical code)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올린다. 그리고 그 내용들이 쌓이고 특정 음식점의 평판이나 주변에서 볼만한 내용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지도를 통해서 자신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내용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컨텐츠가 가지는 의미는 인터넷에서 인식의 시작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국내의 현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컨텐츠는 무엇이 있을까? 즉, 어떤 사람이 특히 대학생 이전의 학생들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서비스를 해주는 컨텐츠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컨텐츠들이 어떤 기능을 통해서 사용자들의 호기심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런 컨텐츠들이 제작될 때 우리가 걱정해야하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가? 여러가지 내용을 생각하면서 국내의 인터넷 서비스 중 제대로 된 컨텐츠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마땅히 그런 서비스를 찾아볼 수 없어서, 그리고 국내 포탈 서비스의 컨텐츠 관련 서비스를 살펴보아도 웹툰 이외에 그다지 보이는 것이 없어서 외국에서 운영하는 몇몇 컨텐츠 관련 웹서비스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Ancient Encyclopedia History ]
학창 시절에 세계사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상당히 정적으로 보이고 서로의 인과관계가 딱히 체감되지도 않고 그저 외우는데 몰입해야했던 과목이라 더욱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된 프랑스의 유럽 역사에 대한 전집을 접하게 되고 세계사에서 특히 유럽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늦게 가지게 되었다. 책으로 접하는 내용도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인터넷에서 유럽의 고대 역사에 대한 웹서비스를 찾고 나서 고대사의 역사와 흐름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더 커져갔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고대 역사와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고대의 역사도 결국 현대를 인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에 대한 흥미와 자극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Khan Academy ]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가들이 동영상 등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해주는 웹서비스이다. 대상은 특별히 학생들에게 제한되지 않고 누구나 배우고 얻어갈 수 있게 해준다. 우리가 소흘하기 쉬운 생활 안에서의 과학 뿐만 아니라 조금은 삶과 떨어진 천체물리학 등도 접할 수 있어 자신의 관심에 따라서 어떤 내용을 해당 분야에서 연구하는지 알아내기 좋은 서비스이다.


구글아트 프로젝트 (Google Art Project) ]

여러가지 예를 들 수 있지만 위의 세가지 정도의 예를 통해서 살펴보면 컨텐츠 서비스가 어떤 특징을 가지면 우리에게 자극이 되어주고 호기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위키피디아는 컨텐츠에 가깝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호기심은 자극하고 우리의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지만 사용자들이 기본적인 지식의 원리와 내용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컨텐츠에는 하나의 주제가 있어야 한다. 위키는 그런 것보다는 사전에 더욱 더 가깝다. 예를 들어 내가 고대 유럽의 역사라는 주제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면 위에서 언급한 사이트에 들어가면 내가 처음에 가진 호기심보다 더 확장된 범위의 내용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위키도 사용자들의 참여와 노력에 따라서 일부 내용은 이런 확장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컨텐츠 서비스는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가지런히 정리된 백과사전과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서비스하는데 있어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정리와 해석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가끔 위키피디아가 토론과 논쟁의 장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컨텐츠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일관된 내용으로 사람들에게 확장된 내용을 제공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국내에서 찾아보았던 이런 성격의 서비스로 [ 조선왕조실록 ] 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그 주제가 사용자들의 인식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좋은 도구로 얼마나 호기심을 자극시켜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자료를 모아두고 잘 정리한다고 해도 그 자료가 사용자에게 매력적이지 않다면 컨텐츠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컨텐츠엔 해당 내용에 대해 사용자의 상호작용 (interaction)이 존재해야 더 좋은 컨텐츠 서비스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사용자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모을 수 있게 하는 개인화 작업은 이제 컨텐츠 서비스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국내의 컨텐츠는 어떤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앞서 이야기한 포탈의 웹툰은 정말 컨텐츠라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호기심이라는 측면으로 바라보면 해당한다고 해도 그 외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의문이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교육 관련 컨텐츠는 페쇄적이고 돈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영상 강의, 그리고 입시, 시험 관련 자료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고 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따라서 컨텐츠가 좋은 돈벌이 수단이라는 인식은 이미 사교육 시장에서 보편화된 논리가 되어버렸다. 그런 입장이라면 Khan Academy 의 컨텐츠는 정말 바보스럽지만 그런 바보스러운 서비스가 사실은 인터넷만 가능한 저소득층 아이들, 심지어 인터넷도 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도서관의 공공 인터넷을 이용해 다양한 배움의 기회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할 수 있는 인식의 확장 공간으로 인터넷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컨텐츠 산업하면, 방송 미디어에 송출용 영상을 떠올린다.

양질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양의 팽창이 제대로 된 정보의 양마저도 파묻혀 버리고 자극적인 내용과 사람들의 인식을 위한 정보보다는 사람들의 오락을 위한 정보들로 넘쳐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좀더 현명하고 전략적인 사고를 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터넷을 사용하기 좋은 기반 시설을 만들기 이전에 좋은 양질의 컨텐츠가 무엇인지 한번쯤 생각해보고 그에 대한 공공적인 차원에서 서비스를 개발해야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백년의 역사를 하나의 주제로 삼아 컨텐츠 서비스를 해주는 것도 좋은 아이이디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국사를 선택하지 않아서 배우지 않아도 되는 세대에게는 우리나라 근대사가 자신의 현재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컨텐츠 서비스는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사업적 수단이 아니라 공공적 차원에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근대사를 왜곡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역사를 끼워맞추려는 시도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사실과 국가 철학에 기초를 둔 근대사의 컨텐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식의 발전을 위한 인터넷 - 우리는 제대로 생각하는가? 

아무리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좋은 컨텐츠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정보는 정보 이상 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다양한 미디어 특히 연결-공유의 개념으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는 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고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정보가 때로는 틀릴 수 도 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영역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고대의 철학을 배우고 자연과학의 원리를 배우지만 그것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많은 제약조건도 있고 또한 그 안에서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원리가 새롭게 보일 수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인식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단순히 역사의 과정에서 생긴 것 같은 인식의 발달도 역사적인 흐름으로 살펴보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안에서 수많은 갈등과 충돌에 의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찾기위한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로 우리의 인식의 발전은 기존의 정보와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현실적 갈등과 문제를 통해서 더 다듬어 지고 더 필요한 더욱 진화된(발전될 수도 퇴화할 수 있는...)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와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도구로 인터넷은 우리의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쉽게 말해 인터넷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양한 사용자들이 서로 도움을 주면서 그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고 그와 유사한 문제가 발견되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해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줄 수 있는가이다.

지금 상황에서 인터넷의 폭발적인 팽창은 이런 긍적적인 역할보다는 부정적인 역할이 더 강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인터넷은 분명 기회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터넷은 돈벌이의 좋은 수단이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사업의 기반마저 어려운 많은 분야가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기존의 실물 교환이 우선이 되었던 시장의 영역도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면 인터넷은 분명 좋은 시장으로 역할도 잘하고 있다. 가장 좋은 이유는 초기적 자본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자료만 잘 모아두어도, 게시판만 잘 만들어도 사용자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그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광고를 연결해서 생각보다 쉽게 돈벌이가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로 결국 인터넷도 자본이 자본을 잠식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대규모 자본이 소규모 인터넷 자본을 먹는 상황이 되면서 결국 인터넷 서비스도 자본에 비례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사용자들은 자본의 규모를 측정하는 단위가 되었고 그 안에서 사용자들은 개개인의 가치를 가지고 사용하는 의식적 사용자가 아니라 대규모 서비스가 제공하는대로 따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사용노예자가 되어버린지 모른다.

그렇게 자본의 시장으로 잠식된 인터넷에는 주목할 특징이 생긴다. ① 사용자들을 모으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컨텐츠를 만들어 내기 보다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서비스들이 선두에 놓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게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② 사용자들의 편의성, 기호 등을 고려하기 보다는 좀더 효과적으로 자본의 돈벌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 및 지식의 내용보다는 광고에 얼마나 노출되는지, 심지어 자신의 키워드와 검색 내용마저도 광고에 연결되는 현상이 극대화 된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가 서비스를 사용해서 느끼는 호감보다 광고에 의해 지저분해지는 화면에 의해 생기는 거부감이 증가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이메일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댓가처럼 개인 메일에 회사 로고 및 광고 내용을 첨부해서 발송하게 만들거나, 광고 노출을 위해 웹메일만을 제공한다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광고 노출, 자사 관련 앱 등을 설치하도록 유도하는 화면 구성 등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③ 사용자의 자유도가 줄어든 상황에서 사용자가 인식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와 지식마저도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되어버린다.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자본 취득'이 가장 큰 목적인 회사가 검색 엔진을 운영한다고 생각하고 그 회사의 운영자라고 한번 생각해보자. (특정 검색엔진의 사실이 아닌 가상의 내용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검색엔진을 통해서 많은 부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질병이나 증상에 관련된 내용이다. 검색엔진의 가장 큰 광고주 중에 하나는 병원이 있다. 따라서 질병이나 증상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들은 잠재적 고객이 아니라 실질적 고객이기 때문에 해당 고객들을 검색엔진에 가장 많은 광고 수익을 주는 광고주인 병원의 정보를 연결시켜주어 광고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광고주 병원의 진단과 설명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특히 광고주 병원이 척추수술이 전문 분야라면 내과의(醫)의 소견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가상의 내용이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인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나은 결론을 만들기 위해 검색하는 인터넷의 공간은 검색엔진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리 다양한 정보와 지식이 널려 있다고 해도 그 정보의 바다에 나갈 수 있는 항구가 비좁고 심지어 특정 해안은 막아놓아서 갈수도 없게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멀리 돌아서 결국 찾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좁은 항구를 통해 나간 바다만이 내가 만날 수 있는 바다라고 인식할 것이다. 즉, 검색엔진은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이 발전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그 인식의 한계를 주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검색엔진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용자로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대서양을 횡단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돌아와서 자신만 알기 위해 비밀로 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아메리카까지 도달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사용자는 다양한 인식의 발전을 위해서 사용자 스스로도 정보의 원천이 되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른 한편으로 검색엔진이 자본의 논리보다는 사용자의 편의와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가치를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무엇이 사용자들이 편리하게 정보를 찾는 방법인지, 정보를 찾는데 집중하는데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게 하고, 제대로 된 지식과 정보를 통해서 인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좀 더 모색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검색엔진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본의 논리로만 무장한 검색엔진은 결국 사용자의 인식을 발전시키기기 보다는 사용자들의 생각의 방향을 일방통행시켜 맹목적인 결론을 만들어버리는 역할을 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당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터넷의 발전은 인터넷의 정보와 지식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는 의식하지 않으며 정보를 수용하기만 했다. 그 안에서 비판적 옳은 시각은 대중적이지 못해 파묻혀 버리기도 하고 옳지 못한 대중적 의견은 사회를 아무런 의식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하였다.

결국 인터넷에 의해서 자신의 인식은 발전하고 열리고 좀더 합리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을 사용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저 대중의 흐름에 휩쓸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모르고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가졌던 모 포탈 서비스의 지식 서비스 - 누군가 질문하고 누군가 대답해주는 - 를 두고 그 정확한 특징을 지적한 적이 있었다. '대학생이 질문올리고 초등학생이 대답하는 서비스' 라고 말이다. 대학교 조교 시절 해당 서비스에서 질문된 내용을 가지고 숙제를 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수강생 80명 중 무려 64명이 해당 서비스에 베스트 답변으로 채택된 답을 숙제로 제출한 것을 경험하고 그 많은 소위 지성인들이 가장 단순한 두가지마저 검증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참 답답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첫번째는 그 해답이 제대로 된 답인지 더이상 찾아보지 않으려는 유혹을 준다는 것을 왜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두번째는 그 베스트 답변을 선택한 사람은 그것을 질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집단 지성이 집단을 무시하는 지성으로 바뀌는 서비스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식의 정착을 위한 인터넷 - 이념의 동물 (Homo ideaologeus)

한번 인식이 정착되면 되돌리거나 변경하기는 정말 힘들다. 비록 변경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변경하기 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가장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하여 바꾸는 과정보다는 대부분 자신의 인식을 강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연예인에 대한 루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특정 연예인이 잘못된 불륜을 일으키건 도덕적 문제를 가지는 사생활을 가졌다고 해도 공인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 이외 그 사실이 특별히 비난받을 이유는 특별히 없다. 특히 가치 판단이 모호한 경우는 더욱 더 그런 경우가 많다. 정확한 사실 관계가 들어나지 않은 상태, 확실한 증거나 증인도 없는 상황에서 단정적으로 사실로 생각하고 그 사실에 근거해서 연예인들에게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물론 인터넷이나 미디어는 의혹이 있다는 사실이 아닌 의혹만 이야기해도 진실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인터넷 등의 통신 매체들은 우리의 의혹을 진실로 만들어 주고 강화하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이 존재하든 안하든, 인간의 심리적 상황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현상이지만 문제는 인터넷이라는 손쉬운 도구가 이런 현상의 강화 및 확산의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왜 이렇게 강화되고 확산되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그런데 우리의 그 합리적이지 않은 판단과 과정이 마치 인터넷은 그런 것처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가 우리의 판단이나 논리에는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즉, 우리가 합리적 판단을 내리기 위한 근거를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정보의 바다 인터넷은 우리의 그런 갈망을 잘 해결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정보의 바다에서 열심히 물을 마시다 보면 결국 그 갈망이 짠 바닷물에 의해 더욱 더 갈증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저 마시게 되어버린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제되지 않고 걸려지지 않은 정보는 우리에게 독이 될 가능성이 많고 특히 감정적, 도덕적 문제로 보일 때, 그리고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판단하며 비난하기 시작한다.

리는 우리가 믿고 비난하는 근거가 우리가 상당히 이념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연예인이 지저분한 행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욕하는 충분한 근거는 이념적으로 나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정의의 심판이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 때문에 그 반대편에 서있는 연예인은 마땅히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먼저 그렇게 판단할 근거 조차 사실이 아니라면 논리의 시작과 비난 조차도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난의 순간이 되면 이미 비난의 시작이 되었던 근거들은 진실이 되어서 더이상 검증하러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념의 맹점은 바로 비슷한 사건과 비슷한 문제에 대해서 무의식적 수준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견과 아무리 건설적인 생각으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저 사람은 빨갱이다라고 이야기 들으면 많은 사람들은 그 좋은 의견과 생각의 가치는 잊어버린 체 '빨갱이의 생각'으로 가공되고 그 이후 더이상 어떠한 인식의 발전도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실 인식의 정착은 인식의 발전과 인식의 시작만큼이나 중요하고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이지만 개인의 이념이, 즉 인식의 정착이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정착되었는지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진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머리 속에 굳어진 정착된 인식은 대부분 집단 대립이 아니면 집단 강화만을 만들어서 더이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정체된 상태를 만들고 만다.

인식의 정착은 단순히 정착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대립으로 이어진다면 그 해결을 위한 소모적이고 거의 반복적인 사회적 비용도 발생하고, 어떤 종교도 '사랑'을 강조하고 그 사랑을 가르치면서 서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폭력과 살인도 서슴치 않는 현상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인식의 정착은 결국 구체적 실천성을 동반한다는 점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가 발달하면 이런 이념적 갈등, 대립이 충분히 해소될거라 믿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사실 그렇게 예상하기보다 너무 빠르게 보급되어 오히려 대립과 갈등을 위한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듣기 싫은 이야기는 듣지 않고, 듣고 싶은 이야기는 집단으로 강화되는 현상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인식의 편향된 정착은 더욱 더 강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딴지일보의 춘심애비 부장님의 뱅뱅이론 ] 을 보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과 실제로 돌아가는 세상의 Figure (숫자, 통계) 는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른 시선으로는 객관적 자아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모든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여 어디에서 편중되지 않는 그런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자아가 존재하는가이다.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영역이 현실과는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식 영역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성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인식의 한계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이념의 한계성 (혹은 강직성)에 의해, 삼중 콤보 한계성을 통해서 우리는 더욱 더 객관적 시각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와 확실한 가치 판단을 해주는 정보일 수록 더욱 경계해야한다.

그렇다면 객관적 자아는 불가능하다고 해도 정착되어버린 인식, 이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도구로 인터넷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는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이다. 이미 정착되어버린 인식은 좀처럼 깨지기도 쉽지 않고 대부분 그렇게 깨지는 경우는 반대의 이념이 상충되고 대립하고 있을 때 패배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면적으로 정반합 따위의 고귀한 새롭고 더 가치있는 이념으로 환골한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패배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정착되어 이념의 고착화가 된 인식들은 인터넷이 아니라 소위 인터넷 할아버지에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의 선에 대한 인식 

세상이 점점 각박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선 세상이 어렵다는 이유가 가장 먼저 들리기 시작한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인터넷 앞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사고하고 무엇인가 가치판단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쉽다고 생각한다. (인식의 발전을 위한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충분한 지식과 근거, 정보들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인식의 시작에 문제가 없고...) 그렇게 강화되고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서 좀처럼 쉽게 반대의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인식의 정착이 되어 버리고...)

그러나 넓은 세상과 소통하는 듯 보여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많고 양질의 컨텐츠가 존재하지도 않고 자신이 찾는 정보의 질은 개인의 검색 능력과 선별 능력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인식의 발전을 위한 정보보다는 문제 해결을 위한 직접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검색엔진을 사용한다. 그런 사용자의 성향을 자본의 원리로 무장한 검색엔진 회사라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정보보다 우리가 방문하기 바라는 광고주의 정보가 우선시 되기 쉬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검색엔진을 사용하는 일종의 댓가라는 체념 속에서 더욱 더 힘든 검색의 향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화되고 항상 자신과 비슷한 인식의 정착을 이룬 인터넷 이웃들과 의견을 나누며 다양한 의견과 시선을 배우기 보다는 보다 강화되고 이념지향적 논리로 무장하게 된다.

과정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정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주어졌지만 오히려 사용자들은 점점 소외당하고 고립의 문화로 향해하는 것은 신기한 현상이다. 온라인에서 연결된 친구들이 나의 경쟁력이고 나의 관계의 다양성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그런 온라인의 관계성이 집중되면 될수록 그 관계가 이루어진 플랫폼 (예를 들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에 익숙해지고 습관적 활동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익숙함에 대한 반복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앨빈 토플러는 현대의 문맹자는 다음과 같다고 정의내렸다.
“21세기의 문맹자들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배우고 배운 것을 잊고 다시 배울 줄 모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 앨빈 토플러

“The illiterate of the 21st century will not be those who cannot read and write, but those who cannot learn, unlearn, and relearn.” - Alvin Toffler.

개인적으로 앨빈 토플러를 좋아하지 않지만 위의 말을 통해서 한번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가 인터넷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거대 자본의 움직임에 이루어지는, 거대 자본 플랫폼을 그대로 익숙하게 따라야 하는 그런 인터넷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성을 가지는 컨텐츠를 제공하는 방법이 다양화 되어야 할 것이다. 컨텐츠가 다양하고 그리고 하나의 정립된 철학을 통해 만들어지고 그 안의 사실과 내용을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쉽게 그 컨텐츠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식의 시작, 호기심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식의 발전을 위한 생각의 흐름, 생각하는 방법을 찾는 연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유럽의 역사를 소개한 서비스를 통해 사용자들은 당시 사회, 정치의 구조, 힘의 균형 등의 사실을 통해서 왜 이런 역사가 만들어지는지 그 논리적 흐름을 찾아갈 수 있는 좋은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고 생각하는 힘을 얻어지면 그것을 보통 우리는 역사관(觀)이라고 부른다. 즉, 역사관은 역사를 통해서 생각의 힘을 얻고 비록 역사가 아닌 다른 우리의 삶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역사관(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사관에 대해서 교과서에 어떻게 묘사하고 우화시키느냐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이유는 그 식민사관을 가진 일본 사람들은 인식의 시작이 식민사관만을 보여주고 그것이 인식할 수 있는 전부라 교육한다면, 그리고 좀더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노력을 해서 인식의 정착이 되기 이전 스스로 식민사관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하는 소수보다 그런 의식없이 바로 인식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다수가 많아지고 그 다수의 시선으로 현재의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바라볼 많은 학생들이 만들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우리는 그 반대의 시선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의 편리성과 나태함에 의해 우리는 그런 컨텐츠의 개발과 노력을 소흘해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는 무엇이 진실인가는 중요하지 않고 어떤 사실이 가치를 가지는가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인터넷에 의해 강화되어 잘못된 방향이라 할지라도 믿고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바로 우리가 소통과 자유로운 생각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인터넷을 통해서 말이다. 결국 인식의 정착 문제도 인식의 시작과 발전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인터넷 환경을 만드는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가치를 생각하다 ] 를 통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는 그들이 가진 능력을 통해서 연민의 대상을 이롭게 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희망했다. 마찬가지이다. 인터넷 사용자들도 단순히 즐기기 위한 내용의 인터넷 공간으로 수동적인 소비자 입장으로 자본의 논리 안에서 단순히 광고를 클릭해주고 광고 수익을 낼 대상으로 가치를 가질 것인지 아니면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고 믿는 가치의 선을 위해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자본의 통계 가치가 아닌, 개개인의 사용자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분명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너무 추상적일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덧붙이면, 만약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노숙인들이라면 노숙인들에게 필요한 무료 급식 정보, 인문학 강의 등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노숙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참 힘든일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을 보급되면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노숙인들을 그저 뉴스에 나오는 때로는 나쁜 짓도, 때로는 인간승리로 인생을 이겨내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그렇게 공급되는 인터넷의 정보들은 우리가 정말 그들이 왜 거리에 내 몰릴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그저 객관적 외부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되어버리고 그런 과정에서 연민의 감정은 쉽게 찾기 힘들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인터넷이 우리가 원하는 선을 추구하고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인터넷을 벗어나 실제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 세상에 적극 활동하고 오프라인의 공간에서 느끼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와 많은 이야기를 인터넷을 통해서 보게 되어도 한번 직접 체험하고 내 이웃의 아픔을 직접 듣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 - 백검색불여일행 (百檢索不如一行)

그래서 호기심을 위한 다양한 컨텐츠를 만드는 노력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무엇인가 공동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직접적 행동을 만들어내는 적극적 커뮤니티(activity-inducing community)가 인터넷에 많이 존재하기 바란다.

무리하며... 

통신과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똑똑하게 해줄 것이란 믿음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 대한 희망과 맹목적인 기대가 아닐까 싶다. 생각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의지하고 편해질 때 그 근본적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인터넷을 잘 사용하고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는 욕심은 결국 그것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인터넷 자본의 유혹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하는 가치를 위해서 우리가 행동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좋은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


기술이 가치 중립적이냐라고 묻는다면 기술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어도 기술의 사용자와 소비자는 결국 가치 중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기술은 우리가 어떤 의도와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독이 될수도 약이 될수도 있다. 그런 시선에서 인식의 시작, 인식의 발전, 인식의 정착이라는 세가지의 구분점을 통해서 인터넷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의 이야기로 다시 넘어간다.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인가?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 철학적 질문을 우리가 왜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항상 질문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인터넷이라고 인식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인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터넷에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아무런 가치없이 단순한 소비자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존재하는 가치를 위해 인식할 것인지는 본인의 몫에 달려있다. 그리고 선한 가치를 위해 인식하는 사용자가 많아진다면 어떤 기술과 어떤 플랫폼에서도 우리는 소비자에서 진정한 사용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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