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3, 2013

착한 소비에 대한 고민 - 인식의 표준 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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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관심이 없어서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지 몰랐던 브랜드로 아베크롬비 & 피치 (Abercromibe & Fitch) 라는 의류 브랜드를 알게 되었다. 처음 알게 된 것은 미국 쇼핑몰을 지나가다가 같이 가던 그리스계 친구가 의류 회사의 정책과 인종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었다. 옷이야 더럽지 않고 깔끔하면 그만이지! 가슴에 새겨진 폴로가 말이 아닌 곰을 타고 있어도 맨몸을 가리고 몸 따뜻하게 해주는데 별 문제 없어서 신경 안쓰는 성격때문인지 친구의 이야기가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친구는 "백인이라면 모르겠는데 인종차별을 대놓고 하는 저런 회사의 의류를 사입는 동양인들은 이해가 안간다"라고 얘기해줬다. 나는 간단하게 "난 저 브랜드 한번도 입어 본적도 없어"하며 넘겼지만 아마도 그 당시 '의식하며 소비하기'라는 생각을 시작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베크롬비 & 피치 (이하 아베크롬비) 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 회사의 의류 브랜드는 백인들을 위한 옷이라며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며 동양인들의 생김새와 문화를 저속한 비웃음거리로 희화하는 티셔츠도 만들었다. 그리고 회사 고용에 있어서도 백인만을 채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미국내 고객 센터의 경우에는 동양인이 전화를 걸었을 때 '너의 발음을 못 알아듣겠다'하며 의도적으로 인종차별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거리를 지나면 아베크롬비 브랜드를 입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의류 수입업을 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없어서 못판다고 한다. 그런 인기를 반영하듯 국내엔 매장을 설치하고 행사를 했는데 그 행사에 관련된 모델에게도 인종차별에 관련된 이야기와 사진들이 소비자의 눈에 띄기도 했다. 무엇이 옳든 잘못되었든 옷이 이쁘고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구매하는 것에 대해서 도덕적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도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소위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착한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무엇이 '착한 소비'인지 그런 소비가 정말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될지, 단지 착하다는 것을 위해 자신의 소비 욕구를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될 내용은 분명 아닐 것이다.

독도는 일본땅이다! 

본의 대기업은 역설적으로 2차 세계 대전의 패배이후 미국의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경제 원조에 의해서 급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정밀, 전자를 비롯한 다양한 산업 기반에는 일본의 군국주의 시절 지도자를 하거나 군 장교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중 그들의 지도력은 전범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었다. 그래서 그 이념적 계승이 그대로 물려 내려온 기업들도 많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우경화 사업에 많은 후원을 하는 기업들도 많다. 제국주의의 기본적 기능이 식민지를 산업을 위한 자원 수집, 인력 수급을 중심으로 해서 경쟁력을 가지고 그 시장을 다시 식민지에 되팔거나 강력한 군사력으로 증가시켜 세력을 확장시키는 구조였다. 독일의 경우 이런 제국주의 전범 기업이 분명 존재하지만 피해자를 밝히는 일부터 적극적으로 금전적 사회적 배상(보상이 아니다...)을 적극적으로 했다.

만약 어떤 일본 기업이 독도는 일본땅이다! 라는 캠페인에 후원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기분이 들까? 만약 그 기업의 물건이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고 있다면 우선 우리가 적극적으로 할려고 하는 행동은 '불매운동'이 될 것이다. 표면적으로 대의명분은 '부도덕적이고 정의롭지 못하다... 옳지 못하다... 잘못 생각한다' 등의 이유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좋은 이유를 찾고 해당 기업이 잘못한 이유를 어떠한 근거를 대고 어떠한 논리를 사용해도 그냥 '기분 나쁘면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일본 기업의 물건이 아이폰이면 어떨까?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분명 우리의 감정을 분노하게 하고 우리의 민족 감정을 건드리는 기업이지만 그 기업의 물건이 아주 좋고, 그 기기를 사용하면 최첨단을 누리는 얼리어답터가 될 것 같은 유횩은 쉽게 뿌리치기 힘들다고 한다면 어떨까? 우리나라가 일본에 가지는 정서를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매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지만 기기 자체가 주는 그 매력에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은 구매할 것이다. 결국 아무리 주변에서 '매국노', '일본놈', '쪽발이' 등 뭐라 욕하고 불러도 자신의 구매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소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반대로 비합리적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어떤 이유를 생각해도 우리의 구매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우리가 가지는 '구매에 대한 매력도'이다.

우리는 왜 착한 소비를 강요하는가? 

실 나쁜 짓을 종용하는 사람보다 착한 일을 강요하는 사람이 더 싫을 때가 많다.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하라고 해도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회적 합의와 주변의 시선, 그리고 도덕적 시각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내 돈조차도 내가 원하는 소비"도 제대로 하지 말라고 뭐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착하게 살아야하니깐... 착한 소비를 해야한다는 논리는 이미 공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런 접근은 아예 버려야 한다. 반대의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구매한 브랜드가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단체에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면 왜 사람들은 불매운동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불매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에게 "왜 불매운동 하느냐" 라고 물어보면 그 질문을 당하는 것조차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당연한 것을 하는 것이고 그 당연한 것을 왜 물어보느냐이다. 그러나 우익의 이념을 가진 일본인들에게는 오히려 불매운동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이처럼 생각의 대립이란 서로 처음부터 공유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힘든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불매운동을 하는 것은 '이성적 행동'이 아닌 '감정적 행동'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소비를 하면서 '이왕이면...' 이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도... 어떤 조건이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조건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 A라는 가게에서는 물건만 5,000원에 주는데 B라는 가게에서 5,000원에 물건과 함께 덤으로 다른 물건을 준다고 할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B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생각과 근거로 자신을 '합리적 소비자'로 만든다. 예를 들어 마트의 적립 포인트가 나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시중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피자나 통닭을 판매하면 이왕이면... 싼 먹거리로 한끼 식사를 대체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할 것이고 현재 필요한 것은 치약 2개인데 묶음 포장으로 5개가 묶여 있는데 한개당 가격이 더 싸기 때문에 어짜피 썩지 않는 공산품이니 이득이라 생각하고 묶음 포장을 선택한다. 그 모든 선택에 사실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합리화를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 소비는 상당히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이다. 다만 돈을 써야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돈이라는 분명히 보이는 가치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지불한다는 합리화를 하고 싶을 뿐이다. - 합리적 최면 과정


그래서 사실 옆에서 누군가 과소비를 해도, 어울리지 않는 옷을 대량 구매하려고 해도, 먹는 것에 지나치게 소비하는 등 정상적이지 않는 소비라고 하더라도 특별히 말리거나 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첫번째는 "자기 돈 가지고 자기가 쓰는데..."이고 두번째는 "결국 자기 돈 아깝지 내 돈 아까운가..."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부부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상황과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쓸 수 있는 가용 자본의 범위와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 가용 자원의 한계성

소비란, 소비자란 무엇인가? 

리가 소비란 단어를 떠올릴 때 '소비', consumption 써서 없애다라는 의미보다는 어떠한 생산적 활동에 연결을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백만장자에게 요트를 구매하고 비싼 차를 여러 대 구매하고 그리고 대저택을 사는데 자본을 쓰는 것이 소비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비일 뿐이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신이 소비한 물건은 이미 소비의 순간 누구에게 그 소비를 유지할 자본, 자원을 책임질 것인가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것이다. 물건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롤스로이스 팬텀 한대 가뿐히 구매한 사람에게 차 한대를 구매했지만, 실제로 그 안의 철강 재료, 플라스틱, 가죽 등 그 차한대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품의 실질 가치를 다 합치고 차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인건비 등의 다양한 비용으로 차 한대의 가격이 결정이 되었고 그 가격을 인정한 소비자가 차를 소비를 했지만 그 이후 말그대로 구매자는 바로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낡아지는 물건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는 감가상각비를 소비하며) 을 가지며 그에 따른 운영과 관리에 또한 소비하게 되는 것이다. 즉, 소비란 단순히 만들어진 물건을 구매한다는 의미에 내가 그 물건의 가치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자본까지도 사용하겠다는 동의를 포함하는 행위이다.

어렵게 말했지만 아주 간단하게 토마토를 살펴보자. 매일 아침 녹즙에 넣고 싶어 토마토 한상자를 구매했다. 토마토 구매의 일차적인 목적은 소비하기 위함이다. 즉, 먹어 없애기 위함이다. 그리고 대량으로 구매했다면 토마토가 신선도가 떨어지더라도 그에 따른 책임도 내가 지겠다고 동의하고 구매를 결정한 것이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농산물같은 1차 생산물의 소비는 단순한 가치를 지불하는 구매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구매한 대상에 대한 처분과 사용에 따른 일련의 책임도 같이 수용하겠다고 동의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단순한 구매의 행위를 소비라고 부르지 않고 소비는 구매에 따른 결과와 과정에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한다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동의를 하는 것이다. 누군가 권총을 구매했다고 가정하자. 그 총을 가지고 끔찍한 총기 테러를 해서 다수의 인명을 살상했다고 했을 때 그 누구도 총을 제조한 회사, 총을 판매한 상점에 직접적인 도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소비자가 총을 구매했던 순간에 총을 구매하고 이후에 총과 관련된 모든 책임에 대해서 소비자가 책임을 진다는 동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비자란 말은 단순히 물건을 구매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물건에 대한 관리,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발생하는 사회적 손해와 피해에 대해서도 소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를 위한 권리는 없을까? 

그런데 요즘은 소비자의 책임이라는 표현은 어색해도 소비자의 권리라는 말은 무척이나 익숙하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서인지 아니면 자본을 가진 사람이 최고라서 그런지 몰라도 소비자도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소비자에게도 구매의 순간 이후 소비자로 분명한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소비자를 위한 권리는 없는 것일까?

비자가 가지는 가장 우선적인 권리는 바로 '소비할 권리'이다. 소비의 방법은 다양하다. 두명의 노트북 소비자가 있다. 한 소비자는 아끼며 LCD화면도 열심히 청소해주고 자판 사이 먼지도 제거해주고 사용하지만, 다른 소비자는 LCD화면도 드럽게 쓰고 자판에 커피가 쏟아져도 별 신경안쓴다. 즉, 구매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해서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 그 권리는 당연히 소비자에게 존재한다. 즉, 소비의 방법에서 폐기(소비의 종료)까지 모든 결정권을 선택할 수 있다.


두번째는 판매자가 명시하고 계약한 권리가 존재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판매후서비스(애프터서비스; A/S)가 있을 것이다. 소비자가 동의하는 또다른 내용은 바로 판매자가 제시하는 구매 후 가질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서도 동의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단순히 우리가 가진 재화를 통해 구매를 하는 순간 우리는 최소한 두가지의 동의  (consents) 를 하는 것이다.

  1. 구매 대상에 대한 구매 이후 소비의 관리와 책임
  2. 판매자가 제시한 소비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조건 

이념의 공간에서 소비를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가정과 설명은 이념적으로 중립적인 시장(ideology neutral market)에서 소비자를 생각해본 것이다. 즉, 모든 시장의 판매자들은 이념적인 편향성도 존재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가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시작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중립적 시장, 이념적으로 중립적 판매자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동의할 것이다.

서 일본의 우경화 사업에 지원하는 기업이 있다면, 그 기업의 물건을 사고 싶을까? 다시 물어본다면... 사실 그에 따라 안 사겠다고 하는 사람, 사겠다는 사람이 나누어지게 된다.

경우 1) 난 사겠어요! : 이념은 다르지만 물건이 나에게 꼭 필요하고 요즘 세상에 이념으로 물건을 평가하는 세상이 아니잖아요. 그들의 생각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물건까지 나쁘지는 않아요.

경우 2) 난 사지 않겠어요! : 물건은 나에게 필요하지만 그들의 이념을 생각하고 하는 행동을 보면 정말 기분이 나쁘네요. 그래서 그들에게 항의하는 작은 행동으로 구매하지 않겠어요!

경우 3) 난 사겠어요! : 물건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그 회사의 물건은 가능하면 구매합니다.

경우 4) 난 사지 않겠어요! : 물건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아요... 끝... 

앞서 이야기했지만 내가 물건을 사는가 아닌가는 기본적으로 '내가 사고싶은가 아닌가'의 기분의 문제이다. 물건이 나에게 너무 필요하다는 입장도 사실 잘 생각해보면 기분의 문제이다. 그 이후 구매할지 아닐지에 대한 설명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구매 혹은 구매거부에 따른 자신의 합리적 근거를 추가할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물건을 구매한다고 자랑을 하던, 구매기를 올릴 때, 그런 물건 왜사느냐 하는 타인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기능적, 도덕적 다양한 이유를 들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해당 물건을 구매하지 못하는 (하지 않는) 구체적인 자신의 변론일 뿐이다. 여러가지 이유도 많고, 항상 무엇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가 설왕설래가 이루어지지만 소비는 가장 기본적으로 감정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우 3은 조금은 억지스러운 내용같단 생각이 든다. 나에게 필요없는 물건이라면 경우 4처럼 그냥 소비하지 않음으로 끝낼 수 있는데 왜 필요도 없는 소비를 하려고 하는 것인가?

경우 3)은 상당히 억지스러운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무리 미국의 자동차가 수입되어 싼 가격으로 풀려도, 그리고 미국의 외교적 압력이 가해져도 일본인들은 스스로 국내산 자동차를 소비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구매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 이런 형태의 소비는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이념의 공간이 제거된 시장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소비의 형태라는 점이다.

정치적 소비자의 선택 

이념은 결국 소비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효과를 주었다. 즉,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자신이 가진 자본으로 소비를 결정하여 판매자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직,간접적으로 줄려는 행동을 시작하며 정치적 소비자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정치의 투표권은 평등 선거인 반면에 시장 정치의 투표권은 가지고 있는 자본의 크기에 어느정도 비례하며 투표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반대로 국가 정치에 대입해도 재밌는 유사성을 보여주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표하는 것을 결정하는 다양한 근거와 합리성을 가지고 판단한다고 해도, 사실 최종적 선택은 '내 기분에 내키는' 투표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자주 이야기되는 40대/50대의 반란이란 제목으로 40대/50대가 보수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 자산에 위험이 취해지거나 내 생존의 기반인 자산 가치가 떨어진다는 상황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이다.


시 정치적 소비로 넘어가자. 오래전부터 나는 국내 특정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왔다. 그 근거로 해당 회사의 노동 조건과 환경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들이 백혈병 등의 질환을 얻게 되고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이 발생하고 아직도 진행중인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의 사안은 아직도 진행중이고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설명은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나는 그 사건을 보고 회사를 위해 일했던 노동자들이 아프다는데 그 이유와 원인을 떠나서 최소한 인도적 연민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나의 기분을 나쁘게 하였다.' 정의, 도덕 그런 멋진 표현을 빌리기 이전에 그냥 나는 그런 내용을 보면서 내 기분이 나빴고 그렇게 기분이 나쁘게 하는 회사의 제품을 쓴다는 것이 그렇게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 도덕 그 어떤 이유를 들어서 해당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해서 문제의 심각성이 이렇고... 비인간적이고... 어찌고 저찌고 수많은 논리와 근거로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다면' 특별히 그 제품을 불매할 이유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서야 느끼게 된 개인적 최대의 착각은...

소비자가 소비를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 이유는 머리가 아닌 "기분"일 뿐이다. 

그리고 내가 해당 회사가 어떻게 해서 나쁘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과정은 "나쁘니깐 쓰지말자"라는 과정이 아니라 "나쁘니깐 너도 기분 나쁘지 않냐?"를 결론내리기 위한 노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착한 소비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착한 소비는 상당히 감정적 결정이지만 우리는 어떤 소비든 나의 논리와 합리성을 상대방도 따르겠지 하는 심각한 착각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한 소비는 일단 좋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 - 사실 이 명제 자체가 가장 큰 장애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나라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진보는 일단 좋은(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 그래서 결국 착한 소비든 진보의 정치 프레임이든, 좋고 선한 것이니깐 따라야 한다는 명제 자체가 정치적 중도든, 소비적 중도에게 기분이 나쁘게 만들고 만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쁜 짓을 종용하는 사람보다 착한 일을 강요하는 사람이 더 싫을 때가 많다.

그래서 착한 소비의 전략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은 착한 소비가 무엇인지 많은 논의와 의견이 공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참 역설적으로 이제는 어디까지가 착하고 어디까지나 나쁜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판단과 결정의 모호함이 존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한 소비의 전략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할 것이다.

① 착한 소비로 무엇이 우리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가를 먼저 제시해야 한다.

아무리 착한 소비라고 해도 우리 스스로에게 혜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소비를 기분 좋게 소비할 근거가 사라진다. 즉, 우리의 감정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한동안 인기였다가 요즘은 조금 주춤해지는 공정무역커피를 생각해보자. 우선 공정무역커피가 우리에게 더 맛있는 커피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대단위 공장 규모의 커피빈(coffee bean)의 처리 과정과 소규모 처리 과정에서 어떤 커피가 우리에게 더 건강할 수 있는가(사실 이건 개인적으로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이 있다면...) 를 통해서 소비자들이 조금은 비싼 가격이라도 소비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공정무역 커피가 가격면에서 더 싸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돼지고기 소비에 있어서도 생각해보자. 국내 삼겹살 소비는 상상을 초월하는데 실제 국내산 양돈 농가에서 출하하는 돼지 하나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싼데 비해 인기가 많은 삼겹살만 비싸게 팔리기 때문에 농가들에 이득이 잘 돌아가지 않고 중간 유통 단계에서만 이득이 높아지는 구조가 발생한다. 그리고 비인기 부위는 인기가 없어 잘 팔리지 않아 폐기하는 상황이고 소비량에 맞춰 삼겹살은 대량 수입되고 음식점 삼겹살은 대부분 수입이 차지하게 되어버렸다. 국내 양돈 농가가 점점 사라져간다면 국내 삼겹살 소비는 수입에 점점 의존하게 되고 결국 가격 결정권을 외국이 가진 상황에서는 가격은 점점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싼 삼겹살을 수입해서 먹을 수 밖에 없어진다. (아우 기분나뻐!)

②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는 판매자의 모습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줘야 한다. 

우리는 제품에 대한 충성도가 그 제품의 판매자와 제조자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경향을 만든다. 당연하다. 제품이 나에게 주는 기분이 좋기 때문에 그 이면의 판매자, 제조자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기업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했다면, 소위 우경화 사업에 지원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이 있다면 그 사실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리고 이에 대한 해당 회사의 명확한 입장을 알릴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언론과 미디어의 역할이다. 우리가 소위 기분 나빠할 만한 내용들이 존재한다면 그 사실을 그대로 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들었을 때 단 한명이 기분나빠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알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기업이 소비자에게 싼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시하며 생산하고 환경적 규제를 어기며 결국 지역 주민들에게 심각한 환경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사람들은 그 기업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항상 강조하지만 그 근본적 이유는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발생한 문제가 나와 직접적 연관이 없거나 그 피해의 심각성이 나에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별로 심각하지 않게 기분 나쁘지 않을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

누군가 세상을 망친다 해도... 

정말 안타갑지만 착한 소비를 생각하면서 왜 아무리 착한 소비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이야기 해도 그 당위성이 내 성격만 버리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내가 아무리 그 기업은 악덕하고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인권에 대해서 나쁜 짓을 많이 하고 기타 등등... 분명 악마다.. 어찌고 저찌고 소리지르고 분노해도 내 분노의 크기만큼 상대방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누군가 세상을 망친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분노의 크기는 항상 표준 분포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문제는 아무리 같은 문제라도 그 문제 심각성은 개인의 인식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다. 

... 결론은... 

처음 시작은 어떻게 하면 착한 소비가 결국 우리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생각할 수록 왜 해결하지 못하는 장벽이 생길까 하는 고민이 더 커져갔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소비하여 얻어지는 기업의 자본은 결국 기업이 다시 어떻게 자본을 사용할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구매하는 순간 우리는 3. 소비에 지불한 자본에 대한 처분 권한도 동의 하는 것이다. 즉, 궁극적으로 일본의 우경화 기업 제품을 구매한다면 그 구매로 들어간 나의 돈은 그 기업이 독도는 일본땅이라는 캠페인을 위해 쓴다는 것에도 동의한다는 것이다. 즉, 기업의 이념과 행동은 결국 기업이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권한을 나는 소비라는 도구로 지지의사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그렇게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제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제품은 상당히 가치 중립적이고, 이념 중립적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리 우경화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그 제품도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식의 한계성, 개개인이 가지는 인식의 깊이와 방법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에 따라 결정되는 소비에 대해서 어떠한 합리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옆에서 누가 "당신의 소비는 잘못되었다"이야기해도 소비로 인해 기분이 나쁜 것보다 그 지적으로 인해 기분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착한 소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어려운 물가 문제, 기업의 독점적 횡포, 인권 문제의 부재 등을 해결 할 수 있을것이라고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다음의 한계성을 더욱 더 느끼게 되었다.

착하다고 강요하면 그것도 기분나쁘다.
소비는 정말... 상당히 감정적 행위이다.
소비라는 감정적 행위에 대한 무적의 합리화는 어떻게든 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논리와 생각이 '선'이라고 시작할 때, 그 당위성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기분' 나빠한다.
... 소비도 결국 투표와 비슷하다. 

사실 무척이나 희망적인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투표도 자본의 크기에 어느정도 비례하는 소비의 특성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현대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착한 소비의 전략이든, 진보의 전략이든 

우선은 스스로 '선'하다는 꼬리표를 과감하게 떼어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그리고 어떻게 기분이 좋게 해줄 수 있는지 제시해줘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많은 공론과 토론, 그리고 그에 대한 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한가지 느낌은... 내가 소비한 아끼는 물건이 땅에 떨어져 상처가 나고 흠집이 나도 안타갑고 기분이 안좋아질 수 있는데 내가 소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 희생해서 아픈 현실은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그 모든 즐거움의 댓가가 누군가의 희생과 생명이라는 가정은 받아들이기 힘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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