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남자는 모성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흔히 사람들은 자존심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말 그대로 자신을 존중해주는 마음이다. 자기 스스로(self) 자신을 존중해주는 마음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의 감정을 아프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은 참 재미있는 말이다. 자존심을 가지는 주체는 자기 스스로이다. 그리고 살짝 풀어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상하다 (덜해지다)"라는 뜻이다.
[ 몽달이 생각: 양보 ] 이전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결국 자존심도 자신이 허락한 것이다. 나에게 누가 바보라고 해도 내가 나를 존중해주는 마음이 강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결국 나의 자존심이 상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이야기, 외부의 상황을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결국 그 과정에서 내가 믿고 있었던 나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은 상대방에게 해야하는 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어야 한다.
우리 안에 누군가 존재한다고 가정하자. 그 누군가를 어떤 심리학자는 자아라고도 이야기하고 다양한 언어로 표현을 하지만 일단 그냥 "그 누군가"라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그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성격과 마음을 가지고 있고 어린 시절에는 나와 참 많이 동기화 되어(synchronized) 나와 별 충돌도 일어나지 않고 나와 별다른 의견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쉬운 표현으로 자존심은 강하다. 어느 순간 동기화는 점점 깨지기 시작한다. 내 안의 "그 누군가"는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의 순수한 마음에 대한 관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와는 달리 외부의 환경에 의해 감정도 상하고, 우리가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낙담도 하고, 때로는 믿고 따랐던 사람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도 하고 불신을 가지게 되고... 쉽게 말해 점점 좋게 말하면 나는 세상의 모습을 배워간다고 이야기하고, 나쁘게 말하면 세상에 물들어 소위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내 안의 "그 누군가"는 나와 다른 모습을,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순수하고 믿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실망을 하기 전에 그래도 더 믿어보려고 하고 세상을 좀더 아름다운 시각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래서 내 안의 "그 누군가"는 세상이 물들고 세속적인 것은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싸고 있는 "나"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그 바라보는 창이 더러워져 이렇게 세상이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야기한다.
"너가 깨끗하지 않은데 왜 세상 때문이라고 이유를 가지는 것이야!"
그리고 점점 세상 속에서 힘들고 아파하고 상처받는 "나"는 결국 내 안의 나를 더이상 존중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학대한다. 아니 때로는 내 안의 "그 누군가" 바로 너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더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외부에서 받은 아픔을 내부로 상처를 만들고,
외부에서 받은 고통을 내부로 좌절을 만들고...
그렇게 내 안의 "누군가"를 힘들게 하면 자신의 기분이 좀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내 안의 "누군가"도 태생적으로 나와 동기화되었던 인격이다. 비슷한 아픔에 비슷한 상처를 받고, 비슷한 고통에 비슷한 좌절을 느끼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아픔과 고통으로 살아가며 희망을 잃어가려는 순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 안의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한다. "나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반복되는 아픔과 고통 안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아간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렇게 나의 순수한 모습을 지키려고 했던 내 안의 누군가에게 물어본다.
"그때 그 일이 왜 너에게 상처가 되었니..."
그냥 전부 잊어버리고 있으면 가장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린 시절 아직, 나는 내 안의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어서 이야기도 많이 통하고 항상 너의 편이 되어줄거라고 믿었던 서로가 이제는 참 멀리 떨어져 버렸구나 알게 된다. 그리고 언제부터 그렇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차근 차근 하나씩 돌아본다. 그리고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어느날의 기억이 가슴이 아프도록, 슬프도록 그렇게 아픈 상처가 되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알게 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모성을 가질 수 없을까?"
우리는 살아가며 상처받는다. 대부분 아프니깐 그냥 다시 반복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아간다. 그리고 잊어버릴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나에게 칼을 들어 나를 찌른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방어를 하고 내가 어떻게 대처를 하냐에 따라서 상처의 모양과 부위는 다르게 된다. 이미 받은 상처는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잘 아물도록, 그리고 같은 아픔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 안의 누군가에게 더 관심을 가져보자. 그 누군가는 나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물들지 않은 그 순수한 마음과 모습을 지닐려고 노력한다. 그 누군가도 그 순수한 마음을 온전히 지키고 있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은 바로 내 몫인데, 오히려 내가 아프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 상처와 좌절을 내 안의 누군가에게 쏟아 냈으니, 그 누군가도 참 많이 힘들어 했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자. 아이는 항상 다칠까, 아플까 걱정하며 아이를 향한 온 마음을 쏟는다. 그리고 그 마음의 지속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 아주 길게 유지된다. 심지어 자식이 다 커서 백발 노인이 되어도 그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다. 아무리 위대한 학자의 어머니도, 살인자의 어머니도,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은 그저 어린 시절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무엇이 변하든, 무엇을 하든, 어머니의 마음 바로 모성은 항상 자식을 자식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켜볼려고 하는 그 마음이 아닐까.
그 모성의 마음으로 누구나 자신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마음쓰면 어떨까... 자신이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왜냐면 세상에 물들고 힘들고 아파하며 변할대로 변한 나의 모습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마음이 바로 '모성'이 아닐까. 나를 잊어버릴 때 나에 대한 학대 (자학) 은 강해진다. 자신만 포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결국 내 안의 누군가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모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자식이 먼저 떠나면 어머니도 쉽게 포기할 것 같지만 자식을 향한 모성을 배워가며 내 안의 누군가에 대한 모성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런 이유일까? 여자는 어머니로 세월을 지내면서 점점 어른스러워지고 외부로 받는 상처의 깊이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반대로 남자는 비록 아버지라도 나이가 들면서 애가 되어가는 것은 내 안의 순수한 누군가에게 자신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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